창덕궁 이야기가 너무 길어져서 두편으로 잘라냈습니다. 출출해지는 고픔을 무릅쓰고
운현궁으로 향했습니다. 도심 트래킹입니다. 내가 튀겨온 누룽지 쬐끄만 봉지를 살짝 꺼냈는데, 옆 뒤의 이손저손이 가져가 마파람에 개눈 감추듯 없어졌습니다. 모두들 배가 고팠던
게지요. 우리의 진행 방향은 낙원동 지나 그이름 유명한 국일관이므로 그 길목에 있는,
운현궁도 보여주고 싶었던 김익명대장의 후의였습니다. 14k들이 역사문화도 고팠는지,
참 열심히 해설사의 말을 경청 하기에 좀 놀랐습니다.
雲峴宮에 왔다. 운현의 명칭 유래가 된 서운관은 조선시대 천문·지리·역수·측후 등의
일을 맡아보는 관아였다. 현재 창덕궁옆 현대건설 본사 마당에 서운관에 속하였던 관천대(觀天臺)가 첨성대처럼 남아 있어서 사적 제296호로 지정되어 있다.
운현의 남쪽, 운니동 80·85·114번지 일대에있는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 1820∼1898)이 살았던 이 저택은 구름재 즉 운현의 지명을
따서 운현궁이라 하였다.
흥선대원군은 영조의 현손(玄孫)으로서 아버지는 남연군 구(南延君 球), 어머니는
여흥민씨(麗興閔氏)였다. 숙종 이래 대대로 여흥민씨의 소유로 되어 왔던 安國洞宮에서
출생, 구름재로 이사온 후 이 집에서 고종을 낳았다.
1863년 철종이 후사없이 승하하자 효명세자의 비였던 조대비의 명으로 그의 차남
명복(命福)이 대통을 이어받아 입궐함에 따라 흥선군에게는 대원군의 칭호가 붙게 되었으며, 어린 고종을 대신하여 섭정하였다.
대원군은 집권후, 조촐하던 집을 궁궐 못지 않은 대저택으로 개축하였다.
우리가 갔을 때 안채였던 노락당에서는 결혼식이 있었다. 방안에는 전통혼례복을
입은 신랑신부가 신혼여행은 어디로 갈 것이냐는 물음에 하와이로 가겠노라고
대답하고 있었다. 운현궁과 하와이..얼핏 웃음이 났다. 내 생각은...또 많은 사람들의
생각은, 대원군의 쇄국이 조선에 많은 실기를 주고 말았다는 것 ..
고종 3년인 1866년 삼간택이 끝난후, 이곳에서 고종과 민규수가
가례를 지냈던 곳이니, 결혼식장으로는 아주 의미있는 장소이긴 하다.
궁궐로 떠나기전 민왕후가 왕비수업을 받던 곳도 이곳이었다.
바깥채에 그의 집무실인 노안당(老安堂)과 아재당(我在堂)을 개축
하였다. 노안당이란 현판은 '老者를 安之하며' 에서 따 온 것으로
대원군이 추사 김정희의 글씨를 집자하여 만든 것이라 한다.
노안당은 대원군의 일상 거처였던 사랑채로 파격적 인사정책, 중앙관제복구, 서원철폐,
복식개혁 등 국가 중요정책을 구상하고 논의 했던 장소이다. 그는 79세의 나이로 이곳에서 눈을 감았다. 임오군란과 갑오경장 등으로 하야와 재집권을 반복하였던 그는, 청나라로
납치되었다가 돌아온후, 이집 안에서만 지내야 했다. 명성왕후를 비롯한 당시의 권력층은
노쇠한 대원군도 두려워 운현궁의 대문을 밖에서 잠그고 보호 감시했다고 한다.
창덕궁 연경당 서향의 선향제에서 본 그 차양이 운현궁에도 있었다.
운현궁 해설사에 의하면, 원래 대궐에서만 할 수 있는 구조물인데, 이 운현궁 사랑채가
유일하다고 했다.
대원군은 재야 파락호 행세를 할 때(명당터임을 알고, 절을 불태우고 부친 남연군의 묘를
썼음) 거느렸던 주먹들을 전부 경호원으로 채용하여 이 운현궁에 살게 하였다. 행랑채에
천하장안이라는 명패의 방이 있는데, 아마도 千.河.張.安이라는 성씨 들이었던 것 같다.
사적 제257호로 지정된 운현궁은 대원군의 5대 직계손인 이청(李淸)의 개인 소유로 있었는데, 1991년 12월말 서울시에서 구입하여 1993년부터 보수공사를 시작했다. 1996년 10월에
완공하여 전통문화공간으로 시민들에게 공개하고 있다.
이제 운현궁 뒤편으로 보이는 洋館 이야기를 해보겠음.
1898년 1월 흥선대원군이 이곳에서 별세하자 장손 이준용(李埈鎔)에게 양자로 들어온
의친왕 이강(李岡)의 차남 이우가 운현궁을 지켜나갔다. 이후 궁의 면적은 축소되어 현재 2,148평에 불과하고 건물 몇채만 남아 있다. 지금의 운현궁은 양관(洋館)을 포함한 대지는
덕성여자대학교가 소유하여 바로 양관이 뒤로 보인다.
몇년전 여름 운현궁에 놀러갔다가 지붕 뒤의 우아한 크림빛갈 서양식 건물에
주목하게 되었다. 관심없는 친구를 데리고 그 건물을 찾아 운현궁 옆의 덕성여대로
가보았다.
덕성여대는 오래전 우이동으로 이사했다고 하고, 이렇게 아름다운 건물이 남아
있었는데, 아무 표지문도 안내글도 없이 잠겨져 있었다. 되돌아나가서 덕성여대 경비원에게 이 서양식 건물의 내력을 물으니, 자기는 슬프기짝이없는 역사를 전해 듣긴 했는데, 옮길 수는 없노라고 입을 열지 않았다.
명성왕후에게서 후사가 없자, 대원군과 왕실 세력들은 한 때, 고종의 형인 이재면의
장남 준용을 세자로 하자는 모의가 있었다고 한다. 이런 모의가 정말 있었는지, 아니면
민왕후쪽의 지나친 경계심이었는지, 이준용은 연루된 것을 알고 급히 일본으로 몸을
피했다. 일본정부에서는 이준용을 귀한 객으로 생각하고 운현궁내에 이 양관을 지어
살게 하였다. 이곳에서 외국인들과 사교 파티도 열고 화려하게 살았으나, 이준용은
몸이 몹시 약해 그의 양자로 들어 온 의친왕의 차남 이우가 이 집과 운현궁을 지켜
나갔다고 한다.
그리고 일제는 이준용이 죽자 즉각 자기들의 경찰청으로 이 집을 접수하였다.
장손 이준용이 살던 양관은 1911∼1912년에 건축된 것으로 추정되며, 석재를 혼용한
벽돌 2층으로 프랑스 르네상스식으로 건축되었다. 8.15 해방후, 이 건물은 미군정청에
넘어 갔다고 한다.
이 양관은 1955년 학교법인 덕성학원이 소유하면서 덕성여자대학교 강의실 등으로
사용하다가 이 학교가 쌍문동으로 이전하면서 현재 2층은 창고로, 1층은 덕성여자대학교의 평생교육원으로 사용하고 있다.
운현궁 양관 내부
(서울대 박물관 '잊혀진 황실 대한제국전'에서)
지금은 덕성여대 재단사무실, 총동창회 건물로 사용되고 있다는 이야기도 있는데,
박물관으로 개방, 기증하기를 바라는 마음이다.
여러번의 개보수로 현재의 모습이 남아있는데, 1,2층 16개의 방은 모두 천정의 문양이
다르다고 마지막 보수에 참여한 교수의 글을 읽었다.
덕성여대 부지 뿐만아니라, 일본문화원 터 등 창덕궁에 이를 수 있는 동산까지 넓은
터를 자랑했던 운현궁은 자손대에서 규모가 많이 줄어버렸다. 특히 한국전쟁이후
자손들이 생활고에 많이 팔아넘겼다.
저 담넘어로 보이는 집이 '영로당'이다. 대원군의 장남 이재면의 거처였다. 그런데 오랜
병치례로 이재면의 장남인 이준용이 죽게되자, 준용의 부인이 주치의에게 사례로 저 집을
주었다고 한다. 이 집이 바이올리니스트 김영욱 가문이고, 법률사무소 김&장도 그 주치의
가문이었다고 문화해설사가 말했다. 조장일님이 옛날 저곳에 김&장 사무실이 있어서
가봤었다고 확인해 주었다.
운현궁 옆 건물인 서울 빌딩 주차장 뒤로 저 집이 잘 보이는데, 대문은 굳게 잠겨있는듯
보였다. 현재는 일본문화원 건물 뒷편쯤으로 출입로가 있을 것 같다.
1시 45분쯤 국일관 1층의 '이대감 고깃집'에 왔다. 캬바레 국일관은 콜라텍 간판으로
바뀐것 같은데, 그건 멀리서 본 간판일뿐 아직 유명한 캬~ 업소가 성업중일지 모른다.
상관없이 우리는 열심히 고기를 구워먹기로 했다. 김대장 말씀이 김영우님이 또 점심
턱을 내기로 했다고.
예쁘장한 마담이 재치있게 서빙을 하면서, 은근슬쩍 고기를 더 권하는 재치도 부렸다.
배불리 늦 점심을 먹은 후, 당구 칠 사람 당구장으로, GS 패는 회관으로 떠나고, 술꾼들은
또 어딘가 2차할 곳을 찾아 떠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