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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준과 1930년대의 수필문학
- ‘근대적 산문문학’과 ‘수필’에 대한 이해를 중심으로
1. 1930년대: ‘수필’ 장르의 정립기
우리 문학계가 수필과 수필적인 글쓰기에 대해 주목하기 시작한 것은 1930년대 중반에 이르러서 였다. 30년대 중반 이후의 문학계는, 긍정적인 의미에서건 부정적인 의미에서건, 수필이라는 주제를 끊임없이 언급했는데,1) 이는 이 시기에 수필 혹은 수필적인 글쓰기가 양과 질에서 비약적인 발전을 이룩했으며, 이런 사실을 당시의 문학계가 민감하게 의식하고 있었다는 것을 가리킨다. 특히 이 시기에 비로소 수필에 대한 이론적 검토가 시도되었다는 점은 매우 중요하다. 일반적으로 말해, 문학의 실제와 이론은 상호 영향을 주면서 발전한다고 볼 수 있는 바, 하나의 문학 형식이 장르로 성립하는 데에는 무엇보다도 걸출한 작품의 존재가 전제되어야 하겠지만 그 형식의 독자성을 이론적으로 정초하는 작업 역시 필수적인 것이다. 수필의 이론이 검토되기 시작했다는 것은 수필적인 글쓰기가 독자적인 문학 형식으로 자리를 잡기 시작했다는 것을 의미하며, 이 시기에 서구적인 에세이 개념과 일본적인 수필 개념에 영향을 받으면서 성립된 수필의 이론은 수필이라는 문학 형식을 의식화하는 데 중요한 역할을 한 것으로 보인다.2) ‘문학의 수필화’3)라는 진단도 수필적인 글쓰기 양식의 부상과 그것에 대한 당대적 이해의 일단을 보여주는 것인 바, 30년대 후반 문학(특히, 소설)의 경향이라는 큰 맥락에서 뿐만 아니라 수필 장르의 정립과 연관하여 생각할 때 새로운 의미가 부각될 수 있는 지점이다. 그리고 1930년대 당시 수필을 둘러싼 논의에서 특기할 만한 사항으로, 저널리즘의 상업성에 영합하는 현상에 대한 우려4)를 지적할 수 있다. 저널리즘과 근대적인 산문과의 관련성은 비단 우리나라에서만 아니라 어느 정도 보편적으로 확인되는 현상이지만, 저널리즘의 상업화와 수필의 유착 관계가 두드러지게 된 이 시기의 문제성은 수필사 연구에 있어서 하나의 주제를 형성할 만한 것이다. 이제까지 거론한 점들은 수필사에서 30년대가 가지는 의미를 측정하는 데 있어서 중요 항목으로 거의 매번 냐열되어 왔던 것인데, 1930년대는, 간단하게 말한다면, 수필이라는 장르와 그 장르의 개념이 정립된 시기라고 정리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런데 1930년대에 수필이라는 장르와 그 장르의 개념을 형성하는 데 가장 큰 기여를 한 것은, 그것의 문학적 독자성을 탐색하고 실천하고자 했으며 수필 창작을 자신의 가장 중요한 문학활동으로 의식했던 김진섭, 이양하 등이라고 보는 것이 통설이며, 이로써 이상, 박태원, 김기림, 정지용, 이태준, 이효석 등의 수필과 김기림, 이태준, 임화, 이원조 등의 수필론은 수필사에서 그 역할이 거의 부각되지 못했다. 이들의 수필과 수필론이 일반인의 감상이나 학계, 수필계의 비평과 연구의 대상이 되지 못한 데에는 두세 가지 원인이 있는 것으로 생각된다. 먼저, 이들 중 대다수가 월북 문인이어서 해방 후 오랫동안 우리 문학의 과거와 현재로부터 철저히 배제되었던 점을 지적할 수 있다. 이들의 작품은 읽힐 수 없었고 공공연한 논의의 대상이 될 수도 없었던 것이다. 그리고 수필이 이들의 문학적 위치와 성격을 판별할 수 있는 대상으로 고려되지 않았다는 점을 들 수 있다. 이들은 소설가, 시인, 비평가였으므로 수필은 이들의 ‘본격적인 문학’이나 작가론적 주제를 해명하는 부차적인 자료로서의 역할을 하는 데 그쳤을 뿐 그 자체가 연구 대상이 되지 못했다. 또 수필은 아직까지도 ‘진지한 문학’이라는 가족의 당당한 구성원으로 인정받지 못한 상태인 바, 이들의 수필은 좀처럼 학계의 관심사가 될 수 없었던 것이다. 다음으로는, ‘수필가의 작품만이 수필’이고 ‘수필가의 이론만이 수필론’이라는, 수필계의 뿌리 깊은 편견과 관련된다.5) ‘순수수필’이라는 관념의 기원과 성격은, 수필에 대한 지배적인 관념의 형성과 관련하여 우리 근대수필사를 검토하는 데 중요한 주제가 되는 바, 여기에서 자세히 논의하는 것은 버거운 일이다. 다만, ‘수필가의 수필’과 ‘수필가의 수필론’만을 인정하는 풍토 속에서 30년대에 활발하게 전개되었던 수필에 대한 다양한 담론들은 급격히 잊혀져 갔고, 수필사는 김진섭, 이양하에서 피천득 등으로 이어지는 흐름을 주류로 인정했다는 것을 지적하고자 한다.6)
분단과 단정 수립을 계기로 한 문학사적 단절은 수필사에 있어서도 예외가 아니었던 것인데, 시사와 소설사의 복원은 80년대에 이데올로기적 금기로부터 벗어난 진보적인 연구자들의 열정에 의해 비교적 활발히 추진되어 이미 적지 않은 성과를 낸 것에 비해 수필사의 복원과 잊혀진 수필론의 복권은 아직 전면적으로 이루어지지 않고 있다. 따라서 위에서 거론한 1930년대의 여러 작가, 비평가의 수필과 수필에 대한 이해를 검토하는 것은 수필사의 복원과 잊혀진 이론의 복권이라는 측면에서 큰 의미를 지니며, 오늘날 수필이라고 불리는 것이 형성되어온 과정과 그 의미를 ‘밖으로부터’7) 볼 수 있는 시선을 재발견한다는 의미를 지닌다.
1930년대의 수필과 수필론의 지형을 검토하는 데 있어서, 우선은 이상, 박태원, 김기림, 정지용, 이태준, 이효석 등 30년대 중반 이후 우리 문단을 주도했던 작가들이 수필 장르의 형성에 적지 않은 기여를 했다는 것을 인정해야 한다. 일찌기 윤오영은 이상, 박태원, 이효석이 ‘수필문학을 의식했거나 아니했거나를 불문하고’, 이들의 산문은 ‘수필문학의 중요한 본질적인 요소를 갖추고 있다’고 평가하면서, 이들의 산문작품을 ‘수필문학의 태동’으로 보았다. 이러한 판단의 근거는 이들이 산문에서 (1) 각자 개성적인 독특한 문체를 구축하려고 노력한 점, (2) 자기들의 내적 체험의 세계를 표현했다는 점, (3) 시, 소설과 일관한 작가 정신을 잃지 않았다는 점이다.8) 윤오영이 수필 문학의 본질로서 들고 있는 요소의 타당성 여부는 좀더 세밀한 검토를 요하는 문제일 것이다. 그러나 이들의 산문 작품을 수필 장르의 형성이라는 관점에서 바라보고 그 의의를 분석한 것은 우리에게 적지 않은 것을 시사한다.
그리고 이 시기에 수필이라는 장르의 이론화를 시도했던 김기림, 이태준, 임화, 이원조 등의 견해도 중요한 의미를 지닌다. 1930년대에 수필론을 선도했던 것은 김진섭, 이양하만이 아니었으며, 위에서 거론한 이들의 견해는 수필 밖으로부터의 시선이었다는 점에서도 큰 의미를 지니는 것이다. 작가로서 자기세계를 개척하고 작품을 모색하는 과정에서 나온, ‘작가적 입장에서의 수필론’으로부터 구체적인 수필론을 들을 수 있다9)는 견해는 일반적으로 타당하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오히려 그 입장의 폭과 깊이라고 할 수 있는 바, 작가의 직접적인 체험에만 의거해서 이론을 성립시킨다는 것은 어불성설이다. 이론은 있는 것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있어야 하는 것을 말하는 것이며, 그렇기 때문에 이론과 실제는 오히려 생산적인 관계를 맺을 수 있는 것이라고 했을 때, 이 시기 김기림, 이태준, 임화, 이원조 등 수필을 밖에서 볼 수 있었던 작가, 비평가들이 각각 수필의 본질과 이상을 무엇으로 보았는가 하는 것을 검토하는 것은 중요하며, 이들의 수필론이 김진섭 등의 수필론과 어떤 점에서 동일하고 어떤 점에서 차이를 낳고 있는지, 이 시기에 수필의 일반적인 개념을 성립시키는 데 어떤 영향을 주었는지를 살피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이 글은 위와 같은 문제 의식에 입각하여 이태준의 수필론을 검토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이태준은 근대적인 단편소설의 한 완성자10)라는 평가를 받을 정도로 소설에서 일가를 이룬 작가이지만 수필이라는 장르와 그 개념을 형성하는 데 있어서의 역할 또한 만만치 않은 것이었다. 이는 그 시기 수필을 논한 많은 사람이 이태준을 거론하고 있는 것에서 단적으로 드러난다.11) 또 문장강화는 수필을 비롯한 다양한 한글 산문의 작법을 교양하려는 목적에서 쓰여진 것으로서, 당대는 물론이고 그 이후 오랫동안 작문 교과서의 역할을 해왔다.12) 이렇게 볼 때, 이태준은 우리 근대문학사에서 산문과 산문예술에 대해 가장 전방위적인 지식과 실천을 보여준 작가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대략적인 검토를 통해서도 수필사 연구에서 이태준을 통해 해명할 수 있는 것이 적지 않다는 것이 드러나는데, 이 글에서는 특히 근대적인 산문과 산문 예술에 대한 그의 이해가 수필에 대한 이해와 어떤 관련이 있는지를 밝히는 데 중점을 두었다. 필자는 그가 근대적인 산문의 특질을 무엇으로 생각했는지, 산문예술의 두 형식인 소설과 수필을 어떻게 이해했는지, 일기나 서간 같은 산문 양식과 수필의 관계를 어떻게 인식했는지를 살펴봄으로써 1930년대에 수필의 개념이 형성된 한 경로를 추적하려 한다. 이는 수필사 연구에 있어서 다른 사람 아닌 이태준을 통해서 해명할 수 있는 가장 중요한 지점이 된다. 이 글이 검토의 대상으로 삼은 주요 텍스트는 <<無序錄>>13)과 文章講話14)이며, 여기에 실린 글들 중 수필작품보다는 산문문학, 소설, 수필에 대한 견해를 드러내는 글에 중점을 두어 살폈다.
2. 이태준의 근대적인 산문예술에 대한 이해: ‘서술적 낭독체’에서 ‘묘사적 산문체’로
근대적인 산문예술의 특성과 의의가 어느 정도 일목요연한 이론화를 이룩할 수 있었던 것은 30년대 중반 이후 였다. 이 시기 활발하게 전개되었던 소설론 탐구가 크게는 이러한 맥락 안에 있었다고 할 수 있으며, 이태준의 단편소설론도 여기에서 벗어나지 않는다. 이태준의 단편소설론은, 문학적 영향면에 한정해 말한다면, 前代 소설에 대한 강한 양식적 대타의식과 소설의 근대성에 대한 의식에 근거하고 있다.15) 그가 전대 서사 양식, 즉 활자본 고소설과 신소설의 양식적 특징으로 지적한 것은 이야기성과 낭독조 문체였다.
(고소설에는) 인물 하나를 진실성이 있게 묘사해 놓은 것을 찾기가 어렵다. 장화의 계모 허 부인, 흥부 형 놀부, 춘향이나 이도령이나 하나 제대로 그려나간 것이 없다. 문장이란 처음부터 끝까지 낭독조만을 위해 쓸데없는 과장과 對句와 유식한 체 해서 愚衆을 무조건 압도해 나가려는 典故法에만 몰두하고 말았다.(무: 65)
고소설이 이야기성에 치중하고 있다고는 하지만, 그것의 매력은 무엇보다도 낭독조 문체에서 나오는 것이다. 고소설은 “이야기책, 즉 귀로 듣는 책일 뿐으로, 뉘집에서 얘기책을 본다 하면, 누구의 작품이라거나, 무슨 책이란 것은 문제가 아니다. 누가 읽느냐가 문제요, 또 처음부터 꼭 들어야 하는 것도 아니다. 춘향전 하면 대강은 내용을 알면서도 들으러 가는 것은, 소설 그것보다 목청을 돋우고 군소리를 넣어 가며 듣기 좋게 읽는, 그 소리를 들으러 가는 것이다.”(무: 66) 이태준에 의하면, 고소설에서 이야기의 흡인력을 상회하는 힘을 발휘하는 것이 바로 낭독 지향적인 문체인데, 그것은 과장, 대구, 전고법에 몰두한 문장을 낳게 함으로써 ‘표현의 진실성’(문: 65)을 훼손한다.16) 이때 진실한 표현이란 작가의 개성적인 ‘눈’(인식)과 ‘손’(표현)에 의해 형성된 스타일, 곧 문체를 말한다17). 그러나 문체를 개성적인 스타일로 정의할 경우, 사실 산문과 시 사이에 본질적인 구별은 아무 것도 없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작가의 개성적인 인식과 표현은 자유로운 시와 산문 둘 다에서 가능하다는 말이다. 그러나 이태준이 ‘爛調套語와 高談俊論은 필요없고 철두철미 묘사라야 한다’(무: 73)고 했을 때, 그의 경우 진실한 표현을 이룩할 수 있는 개성적인 문체는 자유시가 아니라 낭독조 문체로부터 탈피한 묘사적 산문에서 찾아졌다고 할 수 있다. 현대소설은 ‘묘사로 들어가 묘사를 졸업한 이야기’, ‘들려주는 이야기가 아니라 보여주는 이야기’(무: 73쪽)여야 한다는 말을 통해 거듭 강조하고 있는 ‘묘사’와 ‘보여주기’는 일반적으로 ‘정열적인 지각’이 아니라 ‘냉정한 지각’을 바탕으로 한다는 점에서 본래 산문적인 성질을 갖고 있다. 묘사는 냉정한 마음을 바탕으로 한 지각의 내용과 그 지각이 지시하는 개요를 정확히 전달하는 것을 이상으로 하는 바, 운율(리듬과 각운 등)에 의한 제약이나 과장된 설명을 견딜 수 없는 것이다.18)
월색은 방롱方濃하고 송죽松竹은 은은한데 취병翠屛 튼 난간欄干 하에 백두루미 당거위요, 거울 같은 연못 속에 대접 같은 금붕어와 들쭉, 측백, 잣나무요. 포도, 다래, 으름 덩굴 휘휘친친 얼크러져 청풍淸風이 불 때마다 흔들흔들 춤을 춘다.(춘향전에서, 문: 89)
이태준은, ‘이런 문장은 산문이라기보다, 또 운문이라기보다, 낭독문체라고 할까, 낭독하기 위해 다듬어진, 의식적인 일종 율문(律文)’이라고 말하고 있다.(문: 89-90) 그가 운문과 율문을 구별하고 있는 점은 주의를 요한다. 둘 다 운율이 있다는 공통성이 있지만 운문은 정서를 음악적으로 드러내는 독자적인 문학형식(문: 84)인 반면, 율문은 낭독을 위해 운율에 맹종하는 것이며, 이것이 낭독조 문체가 패턴화될 수 밖에 없는 이유이다. 이태준이 이러한 낭독조 문체의 결정적인 한계라고 지적하는 것은 “음조를 다듬다가는 그만 ‘뜻에만 충실’을 지키지 못하기가 쉽다”(문: 89)는 것인데, 여기에서 ‘뜻’이란 앞에서 말했던 것처럼 지각의 내용과 그것이 지시하는 개요라고 할 수 있다.
춘향전과 달리, ‘뜻을 가리며 나설 다른 것(음조)을 용허容許하지 않는’(문: 91), ‘뜻에만 충실한 글’(문: 91)로, 이태준은, 안회남의 단편 「노인」을 일부를 인용하여 보여준다.19)
커다란 체경 앞에 서니까 노인의 발가벗은 몸뚱이는 그냥 앙상하다. 아주 늙은 편은 아니건만 무섭게 말랐다. 곳곳이 뼈가 드러났다. 가슴패기는 똑 자라 배때기처럼 늑골肋骨이 나와 금이 생겨서 임금왕자를 두어 개나 그렸고, 양편 어깨는 움푹하니 앞으로 오므라졌으며 엉덩이에서부터 아래는 골격만이 기다랗게 말라깽이일 뿐이다.
(안회남의 단편 「노인」에서, 문: 90)
그가, ‘알리고 싶은 뜻을, 생각을, 사상을, 감정’을 ‘실상답게’ 전달하기 위해서는 운율에 종속되지 않은 산문이 요구된다고 주장할 때, 이러한 산문문장의 이상형은 현대 소설의 묘사문에서 찾아진다. 인용문에서 관찰자로서 작가의 시선은 냉정하고 엄밀하며, 그는 마치 자신의 눈으로 본 노인의 몸을 오직 실상 대로 전달하려는 의도만을 가진 것처럼 보인다. 언어는 오로지 대상의 정확한 재현만을 위해 사용될 뿐 허투루 낭비되는 일이 없기 때문에 문장은 매우 간결하다. 그런데 이러한 ‘묘사’는, 이태준에게 있어서는, “산문의 육험肉驗이요 정신”이라고 강조한 “실증實證”(문: 90-91쪽)과 뗄 수 없는 연관을 맺고 있다.
앞에 인용한 춘향전은, 대상의 명암과 그림자를 처리하지 않으며 이른 봄에 피는 수선화를 가을 꽃인 국화와 함께 한 화면에 등장시키는 전통 미술의 畵意를 공유하고 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자신이 보고 있는 대상을 그대로 그리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빙자하여 자신이 알고 있고 또 생각하고 있는 것을 그리려는 것이며, 그래서 풍경 속의 자연은 가시적인 묘사에 의해서라기보다 상징에 의해 표현된다. 전통회화 속에 보이는 모든 자연물은 이미 본래의 자연이 아니며, 다만 인간적으로 해석되고 탈바꿈된 자연임과 동시에 화가의 사상과 정서를 매개하는 상징물인 것이다.20) 이와 마찬가지로 춘향전에 나타난 정원의 풍경은 사실적이라기보다 관념적인 것이다. 특히 ‘거울 같은 연못 속에 대접 같은 금붕어’라는 어구에 나타나 있듯이, 연못을 거울과, 금붕어를 대접과 일치시키는 비유적 발상에는 ‘유사한 것은 같은 것이다’라는 비분석적인 인식이 전제되어 있다. 이런 점에서 그것은 일종의 ‘주술’이며 ‘시’이다.
반면, 산문은 소재의 사실성을 전제로 하여 자신이 실제로 경험했던 사실을 그대로 전달하려는 태도의 산물이며, 이런 점에서 ‘산문은 비교적 근대의 산물이다’.21) 따라서 근대 산문문학의 제1조건은 소재의 사실성(factuality)이며, 산문문학은 인식론상으로는 경험론을 바탕으로 하면서 과학적 방법에 의해 실제로 확증하는 것을 지향하는 실증주의(positivism) 정신에 입각하고 있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22) 안회남의 「노인」은, 대상을 하나의 존재태로 보고 그것의 외형을 사실적, 객관적으로 묘사하여 대상을 재창조하려는 서양화의 화의를 공유하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안회남은 노인의 마른 가슴을 자라 배의 모습에 비유하는 것에 만족하지 않는다. 그는 그것이 ‘임금 왕 자가 두어 개 그려진 모습’이라고 더 자세히 시각화하며, 그 원인은 늑골의 돌출에 있다고 분석한다. 이태준은 안회남의 소설을 통해, ‘산문’이란 대상의 실태를 정확하게 파악하고 그 원인을 분석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실증정신에 기반해있으며, 이러한 정신이 묘사에 의해 실현되는 것임을 보이고 있는 것이다. 이런 점에서 이태준이 “소설에서 문자성이 지닌 의미를 본격적으로 제기하고 그것을 자신의 문학관의 근본으로 삼은 첫 작가”23)라고 했을 때, 여기에서 ‘문자성’이란 더 정확히 표현한다면 ‘산문성’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래서 그가 정초한 단편소설의 ‘근대성’은 근대적인 실증 정신과 그것의 육화로서의 산문, 그리고 묘사라는 기술을 떼어놓고는 얘기할 수 없는 것이다.
3. 이태준의 수필 장르에 대한 이해
3-1. 독특한 문예문장으로서의 수필
중국에 기원을 둔 동양의 고전시학에서 ‘문장’이란 말이 실용적인 목적의 다양한 기록까지 포함하는 넓은 뜻으로 사용되었다는 것은 널리 알려진 사실이며, 이태준이 문장강화에서 일기, 서간문, 감상문, 서정문, 기사문, 기행문, 추도문, 式辭文, 논설문, 수필을 ‘각종 문장’(문: 8)으로 포괄하고 있는 것은 그가 ‘문장’이라는 말을 고전 시학에서와 똑같이 사용하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안에 시, 소설 등 ‘문학’이 포함되어 있지 않다는 것도 이런 추론을 뒷받침한다.
이태준은 문장강화에서 위에서 말한 다양한 산문 양식의 특성을 설명하고 각각의 양식에 알맞은 작법을 가르치고 있다. 예를 들어, 그가 일기를 “그날 하루의 견문, 처리사항, 감상, 사색 등의 사생활기私生活記다”라고 정의하고, 일기쓰기의 가치를 수양, 문장공부, 관찰력과 사고력의 배양에 두고 있으며, 일기의 내용 요소로서 氣象, 사건, 감상, 서정, 관찰, 社交를 들고 있는 것이 그것이다.(문: 92-102) 한편, 그가 일기문 그 자체의 실용성을 초과하는 문학적 가능성에도 관심을 기울이고 있다는 사실이, “내면 생활의 기록은 훌륭히 문학에 접근할 뿐 아니라 내면생활이 풍부한 사상가나 예술가들은 일기가 그들의 작품만 못하지 않게 예술 가치를 발휘”(문: 95)한다고 보는 데 나타난다. 고전 시학에서 문학적 표현은 실용적 의도와 목적을 더 잘 달성하기 위한 수단으로만 의식되었던 것에 반해, 이태준은 일기와 더불어 서간문, 감상문, 서정문 등을 그 자체 실용문인 동시에 풍부한 문학적 가능성을 가진 산문 양식으로 이해하고 있는 것이다.
‘문장’들이 실용적인 목적을 초과하여 예술적인 성격을 가질 때, 우리는 이런 것들을 제4의 문학으로 분류한다.24) 그런데 어떤 특정한 기록물이 문학이 되는지 못되는지의 여부는 쓴 사람의 의도에 의해서만 결정되는 것이 아니다. 실용적 의도에 의해 쓰여졌고, 당시에는 실용적 가치를 가지는 데 그쳤지만, 오랜 시간이 지나 그 실용성이 상실되었을 때 그것은 문학으로 향수되기도 한다. 오늘 우리가 기행, 일기, 서간 등 고전 산문을 문학작품으로 읽고 있는 것은 대개 이런 과정을 거쳐 나타난 현상인데, 이는 이태준이 <恨中錄>, <仁顯王后傳>, 仁穆王后의 전교, 필자 미상의 祭文과 <祭針文> 등을 인용하며(문: 289-293), 그것들을 ‘조선의 산문 고전’(문: 278)으로 평가하는 데에서 볼 수 있다. 그러나 30년대 당대는 이미 서구의 삼분법 체계가 일반적인 것으로 받아 들여지고 있었고, 소위 문학성이 있는 것만이 문학으로 대접받을 수 있었다. 따라서 당대에 어떤 문학 형식이 또 하나의 장르로 성립하기 위해서는 다른 형식과 구분되는 독자성을 확보해야만 했다. 일기가 문학으로 읽히기 위해서는 그것의 문학성이 확증되어야 하며, 문학으로서의 일기는 시, 소설, 희곡이 가지는 것과는 다른 독자적인 성격을 보여야만 한다는 말이다. 이 시기에 수필의 ‘이론’이 탐구되기 시작한 것은 시, 소설, 희곡로 분류할 수 없는 다양한 산문 작품들의 성격을 해명하고 그것들의 문학성을 정초해야 할 필요성 때문이었다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수필’은 다양한 산문 양식들 중의 하나로 등재되어 있으면서도 그 자체 하나의 ‘문예문장’으로 파악되고 있다.
(수필은) 자연, 인사, 만반에 단편적인 감상, 소회所懷, 의견을 경미, 소박하게 서술하는 글이다(문: 165)
수필은 엄숙한 계획이 없이, 가볍게 손쉽게 무슨 감상이나, 의견이나, 무슨 비평이나 써낼 수가 있다. 인생을 말하고 문명을 비평하는 데서는 작은 논문일 수 있고, 우감偶感이나 서경, 서정에 있어서는 모두 소작품小作品들일 수 있다.(문: 186)
수필은 다양한 산문 양식들의 예술화로 인식되고 있다. 앞에서 열거한 다양한 양식들-대상 그 자체를 객관적으로 전달하는 것을 목표로 하는 기사문은 제외되겠지만-은 실용적 의도를 초과하여 ‘예술적’(문: 187)인 의도에 의해 가공됨으로써 문예문장인 수필이 되는 것으로 생각된다. 그러나 수필이 다양한 산문 양식의 예술화라면, 그것은 앞에서 말한 것처럼 그저 그 양식들이 가진 문예적 가능성이 실제화되었다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특정한 방향으로 예술화된 것으로서, 그 양식 자체와는 구분되는 새로운 형식을 산출하는 것이다. 그것은 ‘계획 없이’, ‘가볍고 손쉽게’, ‘단편적으로’, ‘경미, 소박한 방향’으로의 예술화이다. 이태준에게 있어서 수필이 하나의 독자적인 성격을 가진 문학 형식으로 의식되고 있다면, 그것의 독자성은 ‘隨錄’, ‘隨想’, ‘隨記’, ‘隨評’ 등의 혼합물이라는 데 있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이태준이 ‘수필’을 제4의 문학 등으로 불리워지는, 소설을 제외한 예술적 산문을 통칭하는 명칭으로 사용하고 있는 것이 아니라 그 안에 포함될 수 있는 하나의 작은 갈래의 이름으로 사용하고 있으며, 그 갈래의 특징은 여러 산문 양식들이 가볍고 소박한 방면으로 예술화된 것이라는 점에 있다고 의식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앞의 논의를 정리해본다면, 이태준은 수필을 아직은 문학이 아닌, 문학적 가능성을 가졌지만 본래는 실용적인 성격을 가진 산문들과 나란히 위치시키는 동시에 그것들과는 달리 독특한 형식을 가진, 본래적으로 예술적인 성격을 가진 문예문장으로 인식하는 혼란을 보이고 있다. 그리고 문예문장, 즉 문학으로서의 수필의 특징은 ‘네가티브한negative’, 즉 ‘어떤 것이 결여된’ 형태로 정의되고 있다. 즉 수필은 계획이 없고, 일관성이 없고, 무게가 없고, 크기가 없는 문학이라는 것이다. 그런데 이태준의 수필관은 그가 수필의 특성을 소설에 대비하여 포착하려고 할 때 더 구체화된다.
3-2. 산문정신이 결여된 산문문학으로서의 수필
이태준이 문장을 스타일의 차원에서 의식한 대표적인 작가임은 주지의 사실이다. 예를 들어 “冊만은 ‘책’보다 ‘冊’으로 쓰고 싶다. ‘책’보다 ‘冊’이 더 아름답고 더 ‘冊’답다.”(무: 90)라고 말할 때, 그가 한문의 형상성을 미적인 차원과 스타일의 차원에서 의식하고 있음이 여실히 드러난다. 그런데 아래의 인용문에서 특기할 점은 수필에서는 그것들이 특별히 더 중요해진다고 강조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이태준은, 수필이 인물과 사건을 통한 시각적 형상화를 추구하지 않는 산문이기 때문에 문자의 형상성이나 어구와 문장의 맛이 더욱 중요하다고 말하고 있다.
인물이나 사건을 묘사하는 문장에서는 구체적으로 인물과 사건을 보여주니까 독자가 시각적으로 만족하지만, 인물도, 아무 사건도 보이지 않는 문장에서는 어구나 문장 그 자체까지 아무 맛볼 것이 없다면 읽는 데 너무나 흥미 없는 노력만이 부담될 것이다.
그러기에 문예文藝 문장에서도 아무 시각적 흥미가 없는 수필류의 문장은 한자가 섞인 편이 훨씬 읽기 좋고 풍치風致가 난다.(문: 68)
위 인용문이 수필과 소설의 차이를 드러내고 있다면, 그것은 이야기의 유무에 있는 것이 아니다. 수필에는 인물과 사건이 얽히면서 빚어내는 이야기가 없다는 것을 지적하는 것은 아니라는 것이다.25) 이태준에게 있어서, 소설과 수필의 차이는 ‘보여주기’ 혹은 ‘묘사’의 유무와 관련된다. 여기에서 이태준이 수필을 ‘대상에 대한 단편적인 감상, 생각, 의견을 서술하는 글’(문: 165)이라고 정의했던 것의 의미가 더 분명해지는데, 그는 ‘묘사’에 대립하는 것으로서의 ‘서술’을 수필의 주된 특성으로 보고 있는 것이다.26) 그런데 그가, 소설은 인물이나 사건을 ‘묘사’하여 ‘보여주는’ 문장이지만 수필은 그렇지 않다고 말할 때, 바로 그 ‘묘사의 결여’는 앞에서 말한 온갖 결여-계획이나 일관성, 진지함 따위의 결여-를 초과하는 근본적인 결여이다. 그것은 한 마디로 산문성의 결여이며, 근대적인 산문정신의 결여이다. 왜냐 하면 이태준에게 있어서, 묘사란, 앞에서 말한 것처럼, 일반적으로 산문적인 성질을 갖는 표현방식의 문제를 넘어서는, 실증주의 정신에 입각한 근대적 산문 예술의 요체로서의 의미를 갖는 것이기 때문이다. 필자가 보기에는, 이 지점에서 이태준의 수필론은 그 자신이 말한 산문 정신 또는 근대적인 산문 문학의 궤도로부터 이탈하게 되며, 그의 수필론은 산문의 ‘정신’과 연관을 끊은 수필이 취하게 되는 대표적인 도피처를 보여준다. 그것이 바로 어구와 문장의 조탁을 통한 스타일의 창조이다.
근대수필을 산문정신과 연관하여 사고한 대표적인 이론가로서 윤오영을 들 수 있다. 윤오영은, 동양에서 “散文이란 말은 朗誦體에서 오는 對句麗辭와 같은 修辭法을 破棄한다는 뜻이니 元來 散文은 詩에 對稱되는 말이기보다 변文에 對稱되는 말이었었다.”27)라고 말하고 있다. 여기에서 ‘변문’이란 ‘변려체’의 다른 표현인데, 그것은 ‘四字句와 六字句에 대구를 써서 지은 화려한 문장으로 육조 시대에 많이 행해졌던 문장’이다.28) 산문이 시에 대칭되는 말이라기보다 변문에 대칭되는 말이었다는 언급은, 이태준이 운문과 율문을 구분한 논리와 정확히 상통한다. ‘시’ 또는 ‘운문’은 하나의 문학 형식을 칭하는 용어이지만, ‘변문’ 또는 ‘율문’이란 패턴화된 낭송체를 칭하는 용어이다. 대구가 반복을 낳고, 반복은 운율을 낳으며, 전고에의 몰두는 화려한 수사로 귀착되는데, 이는 낭송체의 필연적 결과이다. 윤오영은 수필의 본질이 이러한 낭송체로부터 해방된 자유로운 산문예술이라는 점에 있다고 본다. 그가 “隨筆이란 自由로운 散文”29)이라고 할 때, 여기에서 ‘자유롭다’는 말은 고전 문장의 일체의 규격과 제한된 사상에서 탈피한다는 뜻이고, ‘산문’이란 앞에서 말한 것처럼 낭송체에서 해방된 문체를 의미한다. 요약한다면, 그는 수필의 가장 큰 특징을 前代의 형식적, 내용적 규범으로부터의 해방에 두고 있는 것인데, 이 해방은 어떤 시대에나 나타날 수 있는 ‘전통의 부정적 계승’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윤오영은 ‘獨抒性靈에 不拘格套’라는 표어를 내걸었던 晩明의 小品文운동이 중국 현대수필문학의 기초30)라고 보는데, 명조 말기나 조선 후기에 ‘性靈’이나 ‘性情’이라는 용어가 인간의 자유로운 감정을 일컫는 말로 쓰였던 것을 생각할 때, 위 슬로건은 ‘오로지 자신의 자유로운 감정을 서술할 뿐 규격과 상투에 얽매이지 않는다’라고 해석할 수 있을 것이다. 이는 소위 주정주의emotionalism의 대두라고 할 수 있을텐데, 윤오영이 이러한 주정주의를 현대수필의 기초로 보고 있다는 점에 주의할 필요가 있다. 현대수필의 기초로서의 주정주의는, 인간에게 있는 어떤 일반적이고 영구한 태도가 아니라 어떤 특정한 역사적사회적 상황에서 발생하고 발전한 특수한 태도로서의 낭만주의31)를 바탕으로 하고 있는 것이며, 이런 점에서 수필은 근대적인 장르라고 할 수 있다. 이태준이 파악하는 수필의 이상, 즉 낭독조 문체를 배격하고 자기의 감상이나 의견, 비판을 자유롭게 서술하는 것이라는 견해 역시 일단은 이와 매우 유사한 함의를 갖는다고 말할 수 있다.
그러나 이태준의 수필론은 윤오영의 그것과 다른데, 그 차이는 수필의 ‘정신’과 관련된다. 윤오영은 “隨筆의 精神은 어디까지나 散文精神”32)이라고 보았다. 여기서 ‘산문’이란, 앞에서 말했던 것처럼, 운문에 대척되는 것으로서의 산문이 아니라, 대구와 반복, 전고에의 몰두라는 패턴화된 형식과 익명적, 공식적, 보편적 가치에 대한 비판을 담지한 새로운 형식이다. 보편적이고 익명적인 지식 혹은 진리가 개성적인 경험 혹은 진실에 의해 대체된다는 것은, 진리는 ‘지금’과 ‘여기’에 있어서만 타당할 뿐이라는 것을, 더 극단적으로는 어떤 한 개인의 경험 안에서조차 한 순간과 다른 순간이 같지 않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러므로 감각과 사유의 주체로서 개인을 정립하는 것은 개인의 감각과 사유를 통한 실재의 파악이 제한적이라는 인식을 내포할 수 밖에 없다. 즉 사유와 감정의 주체로서 개인을 정립하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개인의 사유와 감정의 제한성, 즉 ‘모든 생각은 상황적이라는 것’, ‘실재의 모습은 그것을 포착하는 입지점에 의해 제한되지 않을 수 없다는 것’을 의미하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상대주의33)가 작가로 하여금 자신이 선 자리, 즉 자신의 담론의 맥락이나 상황을 계속 성찰하도록 하는 것이며, 이러한 상대주의에 입각해서 본다면, 개인의 경험과 감정의 참신성과 성실성을 중시하는 낭만주의적 글쓰기는 결국 ‘상대적으로’ 새로운 리얼리티의 발견을 목표로 할 뿐이라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수필이 ‘기존의 형식과 전통에 얽매이지 않는 새로운 개성적 형식과 새로운 가치를 창조하고 발견하려는 정신의 산물’34)이라고 할 때, 그것은 단지 앞의 것에 비한 새로움을 말하는 것이 아니라 어떤 역사적인 단절을 의미하는 것이며, 윤오영이 말하는 ‘산문의 정신’이란 이런 맥락 위에 있는 것이다.
윤오영에게 수필은 하나의 역사적 장르이며, 그것은 생각과 느낌의 주체로서의 개인 존재의 정립을 기반으로 해서만 존재할 수 있는 것이며, 동시에 그러한 주체를 생산하는 문학적 매체이다. 이런 점에서 윤오영은 낭만주의 정신을 기반으로 하여 현대 수필론의 한 영역을 개척했다고 평가할 수 있을 것이다. 반면, 이태준은 수필을 산문정신과 관련 없는 것으로 보았다. 물론 이태준이 말하는 산문정신이란, 앞에서 살펴본 바에 의하면, 실증주의에 입각한 객관적인 산문의 정신이다. 철학적인 의미에서 주관주의와 객관주의, 낭만주의와 실증주의는 서로 모순된다고 할 수 있지만, 문학에 있어서 대상에 대한 낭만주의적 태도와 실증주의적 태도는 한 동전의 양 면이랄 수 있으며, 그 동전을 주조하는 데 부어진 소재는 바로 근대적인 개인 주체의 정신이다.
대상에 대한 실증주의적 태도의 대표적인 문학적 표현을 기록문학의 발생이라고 볼 수 있으며, 기록문학은 사실성에 입각하여 일회적이면서도 툭수했던 인간 자신의 경험 가운데서도 가시적검증적 대상만을 그 작품적 소재로 하면서 다시 그 사실의 내용을 신빙성있게 전달하려는 의도에 의해서 창작된 작품이다.35)
나는 여길 거슬러 올라가기 시작하였다. 바위 모습은 넓어지면서, 어지럽게 흐르는 물은 발을 내딛기 어렵다. 여러 사람들은 아래서 내가 떨어질까 걱정하였으나, 말리지 못한 그들은 나를 바라볼 뿐 오지는 못하였다. 나는 한 걸음 더 올라가 머리를 돌려보니 손짓하며 부르는 손과 입들은 역력히 헤아릴 수 있었고, 다섯 걸음 뒤에 머리를 돌려 내려다 볼 때엔 아직도 나를 향해 쳐든 얼굴의 눈썹 언저리까지만 보였고 열 걸음 뒤에 돌아볼 땐 다만 갓의 평면만 가물거릴 뿐이다. 나는 백 보쯤 더 올라가서 다시 돌아보았더니 멀리 떨어진 洞口의 사람들이 폭포 밑에 와 앉은 듯이 보이고 나를 보낸 폭포 밑의 사람은 이미 보이지 않았다.36)
박제가의 만폭동 답사기의 일부이다. 박제가가 폭포의 근원을 찾기 위하여 산을 올라가면서 아래에 두고 온 사람들을 바라본 것인데, 박제가는 자신의 위치가 변함에 따라 보이는 모습이 달라지는 것을 소상히 적고 있다. 처음에는 밑에 있는 사람들의 손짓하는 손과 입이 분명히 포착되었으나, 그가 더 높이 올라 뒤돌아 볼 때에는 얼굴의 눈썹 언저리만 보였고, 좀더 높이 올라갔을 때에는 갓의 평면만이, 그 다음에는 결국 보이지 않게 되더라는 것이다. 이는 주체의 감각에 포착되는 실제를 객관적으로 파악한다는 실증주의가 말 그대로 완벽한 객관주의를 성취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관점주의를 내포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는, 벌린의 말한 바, 계몽 자체가 내포하고 있는 균열로서의 일반적 상대주의를 보여주는 것이며, 이런 점에서 대상에 대한 낭만주의적 태도와 사실주의적 태도는 근대적 산문 문학의 두 바퀴라고 할 수 있다. 이 두 가지 태도는 모두 중세의 익명적, 보편적, 공식적 진리를 거부하고 개인 주체에 의거해 새로운 리얼리티를 발견하기를 의도하는 근대 정신의 표현이다.
윤오영의 수필론은 낭만주의 정신을 기반으로 하여 현대 수필론의 한 영역을 개척한 반면 이태준의 수필론은 근대적인 산문 정신으로부터 멀어지면서 어구와 문장의 맛을 강조하는 데로 경사된다. 그런데 수필에서 어구나 문장의 맛을 지나치게 추구하는 것은, 그가 그렇게도 비판했던 음조에의 맹종과 똑같은 결과를 초래하기 쉽다. 고소설이 음조를 다듬다가 대구, 과장, 전고에 의한 화려한 수사라는 패턴화된 형식을 낳음으로써 ‘뜻에의 충실’이라는 산문정신에 배리되는 결과를 낳았던 것처럼 문자, 어구, 문장의 스타일 다듬기에 치중하는 태도 역시 ‘실상 대로 정확히 전달하는 것’을 목표로 삼는 산문정신을 저버릴 가능성이 있다. 규범적, 관성적, 익명적인 것에 대한 비판에서 효과적인 역할을 했던 개성적인 스타일 혹은 문체가 이번에는 자신 스스로 또 하나의 규범으로 정립하고 있는 것을 여기에서 목도할 수 있는데, 그것은 스타일이 문자, 어구, 문장 같은 표현론적인 문제로 고착되고 말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를 갖는 문체란 수필의 문학성을 논하는 데 있어서 가장 피상적인 양상일 뿐이다. 수필은 산문의 세련화를 추구하지만, 문체를 향한 과도한 경사는 수필에 있어서 가장 명백한 함정이다.37) ‘수필은 무엇보다도 아름다운 산문이어야 한다’고 강조하는 것, 그것의 순문학적인 열망을 강조하는 것은 기껏해야 피상적인, 공허한 또는 보잘것 없는 문학성을 조장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태준의 수필론에는 이런 타락을 대비하기 위한 안전 장치의 필요성에 대한 의식이 부족한 것으로 판단되는데, 이는 그의 수필론이 산문정신의 결여 위에 수립된 것이기 때문이다.
4.
일찌기 김윤식은, 1930년대 말 문인들의 수필이 형상화와 미문주의를 동일시함으로써 언어의 병적 미학을 낳았다고 비판하면서도 ‘미문주의는 이 시대의 한 특징이며 동시에 계승해야 될 한국 수필 문학의 중요한 유산이란 주장에는 변함이 없다’고 말했다.38) 범박한 수준에서 말한다면, 산문은 운문으로 표현할 수 없는 경험과 요구가 있었기 떄문에 태어난 것이며, 그런 점에서 산문 예술의 아름다움은 운문 예술의 그것과 같지 않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앞 절에서 살핀 것처럼 주정적인 산문 역시 근대적인 산문 예술의 한 가능성이라는 점을 고려할 때, 그 자체를 문학성의 미달로 평가하는 것은 또 하나의 편견임에 틀림없다. 다만 주정적인 태도가 미문에 대한 추구로 떨어지는 경우, 우리는 그것에 미문주의라는 이름을 붙일 수 있다. 한 시기의 산문예술이 주정적인 미문에로만 흘렀다면 이는 문제적인 것이며, 미문주의는 산문문학의 긍정적인 유산이 될 수 없다. 따라서 1930년대의 수필사적 위치를 가늠하는 데 있어서 우리의 중요한 과제 중 하나는 그 시대의 특성이 주정적 산문형식을 정제된 형태로 보여준 데 있는지 미문주의로의 함몰에 있는지를 판별하는 것일 것일텐데, 이는 필자가 이 글의 맨 앞에서 제기한 바 그동안 우리 근대 수필사에서 소외되어 왔던 작가와 비평가의 수필과 수필론에 대한 정밀한 검토를 통해서만 해결될 수 있는 쉽지 않은 과제이다.
이태준은 수필의 매력을 문장에서 찾고, 문장을 작가의 개성적인 스타일의 표현으로 보았는데, 이는 1930년대 수필이론의 중요한 지점이며39), 30년대가 수필사에서 가지는 의미 중의 하나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스타일’의 문제를 ‘어떻게 보며 어떻게 말하는가’40)가 아니라 단지 ‘어떻게 말하는가’로 환원해 버린다면, 이 때 ‘자기 문장의 개척’(문: 296)은 단순히 작법의 문제로 떨어지거나 피상적이고 공허한 장식에의 열망에 의해 추동되기 쉽다. 그의 수필론이 미문주의의 흔적을 가지고 있다면 바로 위와 같은 의미에서 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이태준이 한자나 고전적인 뉘앙스를 가진 어구와 문장을 통해 고아한 풍치를 표현하는 산문을 지향한 것은 단지 딜레탕트의 고전 취향이라는 문제로 환원되지 않는다.41) 이는 그가 근대적인 산문과 산문예술의 특성을 누구보다 분명히 포착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수필을 그 연장선 상에서 사고하지 않았다는 점과 관련된다. 그에게 있어서 산문의 정신은 단편소설에 의해 체현되는 것이었다. 수필은 줄글의 형식으로 나타나는 것일 뿐, 소설처럼 근대적인 산문 정신에 바탕을 둔 것은 아니었다. 이태준이, 조선시대의 산문 고전으로 든 혜경궁 홍씨의 <한중록>이나 작자 미상의 <인현왕후전> 등에서 ‘典雅한 古致’와 ‘委曲한 情’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나(문: 289), 실제 창작에 있어서도 골동품과 화초라는 소재를 가지고 ‘書齋수필’을 짓는 데 만족하고 ‘정제우아의 아름다움을 배타적으로 선호’42)한 것도 기실 그가 수필을 근대적인 산문 문학으로 의식하지 않았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수필을 근대 정신과의 연관 속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