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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덜보스의 바울신학 해설 8강
IV. 통일성과 다양성 – 권면의 구체성
이제 우리는 바울의 권면 내용을 살펴보려고 한다. 복음서가 아닌 사도들의 서신은 대체로 권면(혹은 명령)이 중심을 차지한다. 그런데 우리가 바울 서신을 얼핏 보면, 바울이 수많은 개념과 동기와 관점들을 사용하여 복음의 가르침에서 유래되는 윤리적인 명령을 끌어내고 있는 것을 볼 수 있다. 이것은 우리에게 혼란스럽기까지 한다. 이 모든 내용을 상세히 다루는 것은 본서의 목적을 넘어가므로, 우리는 이 권면 내용을 몇 가지 개념을 중심으로 통합적으로 고찰하려고 한다. 그러면 바울의 다양한 권면의 내용을 이해하기에 수월하다.
먼저 우리는 이 많은 권면을 통일성과 다양성의 관점에서 분류하는 것이 좋다. 통일성이란 새로운 순종 전체를 요약적으로 표현하는 모든 개념과 진술들(인디카티브와 임페라티브)을 말하는데, 예를 들면 우리가 의의 종이 되었다든지, 자기 자신을 하나님께 산 제물로 바치라고 하는 것(롬 6장과 12장), 즉 구체적으로 무엇을 하라고 지시하는 것이 아니라 포괄적으로 말하는 것이며, 다양성이란 새로운 삶과 새로운 의를 좀 더 자세하고 구체적으로 설명하는, 모든 개별적인 계명과 지시들을 말한다.
1. 통일성
통일성과 다양성, 이 두 가지는 모두 대단히 중요한 관점이다. 바울이 행하라고 명한 모든 새로운 순종은 서로 분리되지 않으며, 그 근원에서 하나로 통일되어 있는 것이 틀림없다. 바울이 새로운 순종을 나타내고자 사용한 표현이 단수형인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각 사람의 일”(고전 3:13-15, “각 사람의 공적”; 갈 6:4, “자기의 일”), “선한 일”(빌 1:6; “착한 일”), “믿음의 역사”(살전 1:3; 살후 1:11), “성령의 열매”(갈 5:22; 참조: 롬 6:22), “의의 열매”(빌 1:11; 참조: 4:17).
특히 갈 5:22에서 바울이 먼저 성령님의 열매(단수)라고 말한 다음에, 다시 여러 가지 덕목으로 세분해서 나열하는 것에 주목해야 한다. 이 순종은 한 단어 “사랑”으로 요약될 수 있다: “너희 모든 일을 사랑으로 행하라”(고전 16:14);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롬 13:10; 참조: 갈 5:14). 다른 곳에서 “믿음을 따라 하지 아니하는 것은 다 죄니라”(롬 14:23)고 말할 수 있듯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효력”이 있는 것은 오직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갈 5:6)고 말할 수 있다. 이렇게 다양한 성령님의 열매는 사랑이라는 한 단어로 통일되어 있다.
학자들이 새로운 순종은 통일되어 있고 서로 나뉠 수 없다고 한 것과, 이 점에서 예수님과 바울의 가르침이 일치함을 강조한 것은 옳다. 그리고 이러한 점에서 바울과 랍비들의 윤리에 대한 가르침의 큰 차이점이 드러난다. 랍비들에게도 다양성에서 통일성을 이끌어내려는 시도가 없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하나님의 뜻을 최대한 세밀하게 표현해서, 삶 전체를 그물망처럼 촘촘하게 규정하는 구체적 규례를 만드는데 주력했다는 것은 잘 알려진 사실이다. 바울은 그의 서신에서 이러한 옛 회당과의 대립을 분명하게 드러내지는 않았지만, 그럼에도 그의 권면은 이러한 점에서 랍비들의 권면과는 완전히 다른 성격을 가지고 있고, 그의 권면에는 예수님께서 서기관에 맞서 강조하여 가르치신 의와 율법 성취라는 개념이 각인되어 있다는 것이 분명하다.
2. 다양성
다른 한편으로는, 우리는 바울 권면이 매우 다양하고 부분적으로 매우 세부적이라는 사실을 간과하면 안 된다. 그의 서신에는 특별한 경고, 계명, 권고들로 가득 차 있는데, 이 모든 것은 그가 교회에게 그들의 부르심을 단지 통일성뿐만 아니라 그들의 구체적인 다양성 안에서 제시하고, 자기 자신도 때때로 그의 권고에서 복수로 말한다(살전 4:2, “명령들”; 살후 2:15; 고전 11:2, “전통들”). 새로운 순종을 “선한 사역”이라고 단수로 말하기도 하면서, 당연히 “선한 사역들”이라고 복수로 표현하기도 한다(엡 2:10; 딤전 5:25; 6:18; 딛 2:7,14; 3:8,14. 참조: 고후 9:9; 골 1:10; 살후 2:17). 이 점에 있어서 권면과 관련한 바울의 용어 사용은 그가 인간론에서 “몸”(외적으로 표현되는 인간의 실존 방식의 통일성)과 “지체들”(개별적이고 구체적인 행위들과 연관하여)을 구별해서 사용하는 것을 선호하는 것(참조: 롬 6:12 이하; 12:1; 골 3:5 등)과 완전히 일치한다.
o 골 3:5, 8 “그러므로 땅에 있는 지체를 죽이라 곧 음란과 부정과 사욕과 악한 정욕과 탐심이니 탐심은 우상 숭배니라…. 이제는 너희가 이 모든 것을 벗어 버리라 곧 분함과 노여움과 악의와 비방과 너희 입의 부끄러운 말이라”
o 롬 6:12-13 “그러므로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 또한 너희 지체를 불의의 무기로 죄에게 내주지 말고 오직 너희 자신을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난 자 같이 하나님께 드리며 너희 지체를 의의 무기로 하나님께 드리라”
o 롬 12:1 “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3. 반율법주의에 대해
그런데 이렇게 많은 바울의 계명과, 자유 안에서 사는 성령님을 통한 새로운 삶 사이에 모순이 있다고 하는 견해들이 있어왔다. 이들은 새로운 순종을 개별적인 명령들로 세분하는 순간부터 다시 율법주의에 빠져들 수밖에 없다고 한다. 어떤 학자들은 그러한 개별적인 명령들을 영속적으로 구속력 있는 계명들로 보지 않고, 사랑과 자유라는 하나의 계명을 그때그때 구체적인 상황에 맞추어 개별화 한 것으로 보고자 했다.
그러나 우리는 새로운 삶에 대한 바울의 이해가 개별적인 명령이나 규정과는 맞지 않는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의견 배후에는, 바울의 이해가 아닌, 계몽주의와 칸트철학에 근거를 둔 자유와 기독교적 자율에 대한 이해가 있다. 이 개별적인 지시와 계명에 구속력을 부여한다면 그가 그렇게 격렬하게 반대하던 유대교의 율법주의로 회귀하게 된다는 그러한 생각은 바울과는 전혀 관계가 없다. 우리는 앞에서 바울이 사람이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의를 내세우는 것을 비판한 후에 새로운 생명은 의를 섬기는 삶이라는 것을 강조한 것을 보았다. 그는 율법의 행위 없이 칭의 되지만, 선행은 새로운 삶의 열매라고 가르쳤다. 만일 새 생명과 그것을 토대로 요구되는 새로운 순종의 본질이 새로운 지시와 계명에 순종하는 것과 갈등을 일으킨다면, 바울 서신은 처음부터 끝까지 이해할 수 없는 책이 된다. 왜냐하면, 바울서신은 그러한 계명으로 가득찼기 때문이다.
어린 교회가 처한 구체적인 상황 때문에 사도는 지속적으로 구체적인 규정과 계명을 주었다는 사실을 우리는 주목해야 한다. 그가 그들의 잘못을 그대로 용납했다는 것은 어디에서도 찾아볼 수 없고, 그는 자기가 예수님의 사도로서 그들을 지도해야 하는 특별한 사명을 받았다는 것을 근거로 제시한다. 예를 들면 롬 15:14 이하에서 바울은 자기 직분을 성전에 봉헌 된 재물을 감시하고 보호하는 것이며, “이방인을 위하여 그리스도 예수의 일꾼이 되어 하나님의 복음의 제사장 직분을 하게 하사 이방인을 제물로 드리는 것이 성령 안에서 거룩하게 되어 받으실 만 하려” 하므로, 그는 자기 직분의 힘으로 “더욱 담대히 대략 너희에게” 쓴 것이라고 한다.
또한 골 1:26 이하에서도 바울은 자기가 그리스도를 “일반적으로” 전파하는 일만이 아니라, 개별적이고 구체적인 문제들과 필요들에 따라서 목회적이고 교육적인 의미에서 교회를 인도하고 지도하는 일도 자신의 직무로 여겼다는 것을 또 다시 분명하게 보여준다.
그러므로 우리는 바울의 구체적인 권면을 오로지 하나님의 큰 계명(사랑의 계명)을 그때그때 상황에 맞추어 적용하는 것으로만 보고 일반적인 규범을 제시하는 것으로 보지 않았다고 하는 것을 경계해야 한다. 물론, 사도가 윤리적인 규범들과 지시들의 체계를 제시하고 있지 않다는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의 지시들은 흔히 교회들이 처한 특별한 상황들과 관련되어 있고, 교회들이 자기에게 문의한 질문에 대한 답변이다. 로마서 14장과 15장, 고린도전서 8장 이하에 나오는 “강한 자들과 연약한 자들”의 문제, 고린도교회 내에서의 분쟁들(고전 3장), 고린도전서 5-6, 11, 14장에 나오는 잘못한 자에 대하여 권징을 행하지 않은 것, 신자들 간의 다툼을 불신자들의 법정으로 가져간 것, 성찬과 관련된 폐해들, 회중 가운데서의 질서 등에 관한 권면이 그런 것들이다. 그러나 이러한 지시들이 단지 사랑의 계명을 다양한 상황에 맞추어 현재적으로 적용한 것(사실 이것도 중요하고 교육상 필요한 것이지만)일 뿐이고, 보편적인 타당성을 지닌 것은 아니라고 말하는 것은 결코 아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여기에서 두 가지를 염두에 두어야 하기 때문이다.
1. 사도가 그리스도인의 삶에서 실제로 일어나는 현안 문제들에 대해 대답할 때에, 그는 이들이 이 문제와 상황을 전체적이고 보편적인 관점에서 바라보고 해결하도록 지시했다. 예를 들면, 이방교회에서 우상에게 제물로 바친 고기를 먹는 문제가 쟁점이 되었는데, 이에 대한 해결책을 제시할 때 그렇게 했다. 바울은 각각의 구체적인 지시에 머무르지 않고, 음식을 먹고 마시는 자유를 그리스도의 구속사역의 관점에서, 그리고 땅위에 있는 모든 것이 하나님이 창조하신 것이므로 버릴 것이 없다는 입장에서 바라보며 가르친다.
또한 그와 함께 형제 사랑과 교회 구원이 모든 것의 판단 기준이 되어야 한다고 하고, 또한 자기 자유를 경솔하게, 혹은 교만하게 사용하는 것에 대해 경고한다. 이렇게 구체적인 상황에서 나온 문제들은 항상 보편적이고 도덕적인 관점과 생활규범에 연관되어 해결책이 결정된다. 다른 예들도 많다: 고전 6:12 이하; 10:23 이하; 고후 9:7; 딤전 4:5 이하.
o 고전 10:23-26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유익한 것은 아니요 모든 것이 가하나 모든 것이 덕을 세우는 것은 아니니, 누구든지 자기의 유익을 구하지 말고 남의 유익을 구하라. 무릇 시장에서 파는 것은 양심을 위하여 묻지 말고 먹으라. 이는 땅과 거기 충만한 것이 주의 것임이라”
o 고후 9:7 “각각 그 마음에 정한 대로 할 것이요 인색함으로나 억지로 하지 말지니 하나님은 즐겨 내는 자를 사랑하시느니라”
2. 이렇게 특별한 상황에 관련된 권면 외에도 다른 많은 규정과 계명이 있다. 롬 6:12 이하에서와같은 매우 일반적인 권면들과, 이와는 달리 롬 12:3-13:14에서와같이 매우 구체적인 계명도 있는데, 이것은 로마 교회의 현안문제에 대한 대답으로 보기는 어렵다. 바울서신의 마지막 부분에서 나오는 권면도 대체로 이와 같다. 이를 통해 우리는 사도가 윤리적이고 목회적인 관점에서 교회에 지침을 줄 필요성을 절실히 느꼈다고 말할 수 있다.
아울러, 우리는 바울이 후대의 다수 해석자들의 관점, 즉 새 생명 안에서 성령으로 살아 가는 신자들에게는 그런 구체적인 지시들이 필요하지 않고, 성령으로 살아가는 자는 누구나 성령으로 말미암아 자기가 어떻게 행해야 하는지를 안다고 하는 전제와는 거리가 멀다. 일반적인 내용이 담긴 규정과 계명은, 구체적인 개별 계명의 경우보다 더욱 분명하게, 바울의 권고가 얼마나 광범위하고, 그가 삶을 얼마나 다양한 관점에서 바라보는지, 자기 계명이 얼마나 많은 상황을 포괄하는지를 보여준다.
바울이 체계적인 윤리를 제시하지 않았다는 주장은 넌더리가 날 정도로 자주 반복되었다. 이 말 자체는 논란의 여지가 없다. 그럼에도 그의 권고는 내적 흐름과 체계가 있고, 그의 지시는 서로 연관성 없는 권면들로 구성되어 있는 것이 아니다. 이 사실은 가정 규범에서 가장 분명하게 드러난다. 그리고 다른 곳에서도 체계가 있다. 고전 7장에서는 혼인과 관련된 모든 문제를 광범위하게 다루고, 롬 12:3-20은 새로운 마음을 받은 신자들은 서로 간에 어떻게 대해야 하는지, 그리고 불신자들과는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의 문제를 다룬다. 고전 14장, 딤전 2-3, 5장에서는 제도적 의미에서 교회생활을 위한 지시가 나오는데, 여기에서는 예전과 교회 질서의 시작을 볼 수 있다.
그러므로 바울은 교인에게 구체적인 지침과 지시를 주고 이에 대한 순종을 명한 것이 분명하다. 물론 그가 계명을 완전히 체계적으로 제시하지 않았으며, 또한 그의 윤리는 각 경우에 따라 지침을 주는 그런 윤리(Kasuistik)가 아니라 동기를 묻는 윤리라는 것을 전제하고 있다. 어떤 구절들은 그가 교회 자체의 도덕적인 활동과 독립적인 판단을 존중하고 자기 자신을 모범으로 내세우면서, 이들도 그렇게 하라고 자극을 준 것도 나타나는데, 이에 대해서는 앞으로 좀 더 자세히 살펴볼 것이다. 그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교회가 권면에 대해 순종하고 실제로 문제가 된 것들에 대해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통찰력을 향상하고 감각을 기름으로써 더는 죄에 순종하지 않고 하나님께 헌신된 새 생명의 모습을 보이는 것이다.
사도의 권면은 완전히 새로운 바울의 창작물이 아니라, 내용적으로나 형식적으로 바울 이전에 가르쳐진 것과 연관되어 있다. 그의 서신에서 윤리적 개념과 동기와 관련된 내용을 자세히 연구해 보면 이러한 사실이 드러난다. 우리가 일반적으로 말할 수 있는 것은, 바울이 한편으로는 구약을 출발점으로 하고, 다른 한편으로는 예수님의 선포를 기반으로 하는데, 이것은 그가 사랑의 계명을 매우 강조하고 이것이 어떻게 구체적으로 적용되는지 설명한 것을 보면 알 수 있다. 다른 곳에서는 그가 신자들의 윤리적 삶의 지침을 가르칠 때, 사도의 동시대 지성인이 사용하던 용어들과 틀(Schemas)을 사용한다. 그러므로 이들의 독특한 기독교적 의미는 그 용어 자체가 아니라, 기독교 선포에서 그 용어가 사용되는 전체적 맥락에서 찾아야 한다.
V. 율법의 제3사용(Tertius usus legis)
우리는 지금까지 신자의 새로운 순종에 하나님 중심적이고 총체적인 성격이 있다는 것과, 이러한 순종으로 독려하는 권면들을 모두 살펴 보면, 그들 사이에 통일성과 다양성이 존재한다는 것을 배웠다. 그러면 이제 이 새로운 삶은 구체적으로 어떠한 규범을 가지고 전개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질문이 자연히 생긴다. 이에 대해 본질적인 것은 앞에서 논의한 결과 분명히 드러났다: 새로운 순종은 하나님께 향해 있고, 성령님의 인도함을 받으며, 무조건적이고 모든 것을 포괄하는 성격을 가지고 있다. 특히 바울의 구체적인 계명 속에는, 그가 “의”, “성화”, “선한 사역”이라고 말한 것이 구체적으로 무슨 의미인지를 알려주는 중요한 관점이 제시되어 있다.
그런데 사도는 그가 요구하는 순종에 대한 규범을 어디로부터 도출해내고 있으며, 교회는 하나님의 뜻을 성취하기 위한 올바른 도덕적인 판단과 활동에 대한 통찰은 어디에서 얻을 것인가? 또 한가지 중요한 질문은, 바울의 권면에서 구약 율법이 어떤 의미가 있는지이다. 즉 율법이 여전히 하나님의 뜻을 나타내고 있으며, 새로운 삶의 규범으로서 긍정적으로 작용하고 있는지에 대한 질문이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많은 논란이 있어왔다. 우리가 앞에서 율법이 “잠정적인” 의를 가지고 있다는 것과(24장), 사도가 율법으로부터의 자유를 역설한 것을 연구했기 때문에, 많은 사람이 율법이 새로운 삶의 규범이 될 수 없다는 생각에 이른 것이 어찌 보면 당연한 귀결이라는 생각도 가질 수 있다.
이 주장은, 얼핏보면 율법이 의에 이르는 수단이 아니라는 바울의 가르침과 같은 것을 말하는 것 같지만, 좀 더 자세히 살펴보면 이것은 전체적으로 바울이 율법에 대해 말한 것과 다르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바울은 율법이 폐해지고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마침이 되셨다는 것을 강조하지만, 다른 곳에서는 그가 새로운 순종의 내용과 새로운 삶을 위해 하나님의 뜻을 찾을 때에는 다시 율법으로 돌아가기 때문[1]이다. 이에 대해 가장 중요한 구절들을 찾아본다:
o 롬 8:3-4 “율법이 육신으로 말미암아 연약하여 할 수 없는 그것을 하나님은 하시나니 곧 죄로 말미암아 자기 아들을 죄 있는 육신의 모양으로 보내어 육신에 죄를 정하사,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
o 롬 13:8-10 “피차 사랑의 빚 외에는 아무에게든지 아무 빚도 지지 말라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 간음하지 말라, 살인하지 말라, 도둑질하지 말라, 탐내지 말라 한 것과 그 외에 다른 계명이 있을지라도 네 이웃을 네 자신과 같이 사랑하라 하신 그 말씀 가운데 다 들었느니라. …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니라”
o 고전 7:19 “할례 받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요 할례 받지 아니하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따름이니라”
o 고전 9:21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이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o 갈 5:14 “온 율법은 네 이웃 사랑하기를 네 자신 같이 하라 하신 한 말씀에서 이루어졌나니”
o 갈 6:2 “너희가 짐을 서로 지라 그리하여 그리스도의 법을 성취하라”
니그렌과 같은 사람들은 율법의 긍정적 역활을 인정하면서도 율법이 신자들의 삶에 적용된다는 율법의 제3용도를 인정하지 않는다. 이러한 문제 때문에 이에 관련된 이들의 성경 해석은 난관에 부딪힐 수밖에 없다. 니그렌의 롬 13:8-10 해석을 보면 이런 문제가 분명히 드러난다.
그는 롬 13:8-10과 롬 10:4의 절대적 해석(율법의 역할은 완전히 끝났다)과의 사이에 모순이 없다고 하며, 다음과 같이 피력하며 자신의 주장을 정당화하려고 한다: 율법은 죄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가지고 있으므로 “의”인 그리스도는 율법의 마침을 의미한다(그리스도께서는 “의” 자체시므로 믿음으로 의에 이른 사람은 죄에 대해 부정적인 입장을 가진 율법이 의미를 잃는다. 그는 이미 율법 없이 믿음으로 의를 이루었기 때문이다: 역자 해설). 이것은 사랑에도 똑같이 적용된다. 사랑이 있는 곳에서는 율법이 금지하는 것은 어떤 것이라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러므로 “그리스도는 율법의 마침”이라는 말과 “사랑은 율법의 완성”이라는 말은 같은 것을 표현하고 있다.
그런데 이러한 해석은 단지 바울이 사랑을 율법의 „마침“, 혹은 사랑이 율법을 „불필요하게 만드는 것“이라고 할 때에만 정당성을 가진다. 그런데 롬 13:8은 이와 반대로 율법을 성취하는 것이 신자의 의무라고 말한다. 이것은 율법이 계속해서 의미가 있음을 전제한다. 따라서 율법이 단지 죄에 대항할 뿐이며, 의에 대하여 부정적이며 의를 요구하지 않는 것이 율법의 특성이라고 말하는 것은 옳지 않다.
대부분 학자들은, 심지어 바울이 모세 율법이 종결되었다고 말했음을 확신하는 사람들도, 바울이 어떠한 방법으로든 율법을 붙들고 있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바울이 율법에 대해 분명히 긍정적으로 말한 구절들이 많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불트만은 율법의 이중 의미에 대해 말하는데, 한 가지는 영원하고 계속 유효한 하나님의 뜻으로서의 율법과, 다른 하나는 그리스도에 의해 폐기된 율법이다. 바울은 이 폐기된 율법을 특히 “모세의 율법”이라고 하고, 이것은 “나중에 첨가된” 율법으로서 그 기원이 하나님이 아니라 천사라고 한다(갈 3:19 이하).
어떤 다른 학자들은, 바울이 율법에 내재된 뜻과 율법을 수여할 때 알려진 하나님의 뜻을 구별해야 한다고 말한다. 롬 8:4와 13:8-10은 이 후자에 대해 말하고 성령님이 이 후자를 그리스도인의 삶 속에서 이루어가신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러한 이론을 통해서는 바울이 율법의 제3용도를 인정했다는 결론을 도출할 수 없다.
보른캄은 갈 5:14에서 결론적으로 다음과 같이 말했다: “… 이 구절의 논점은 율법의 폐기에 관한 문제가 아니라, 행위를 통한 율법의 성취에 관한 문제이다. 따라서 페플레로타이(성취되었다)는 율법은 사랑의 계명으로 요약된다는 것 이상의 것, 즉 사랑 안에서 율법이 온전히 성취된다는 것을 보여 준다.”
우리가 이 문제들을 전체적으로 검토해 본다면, 우리는 율법의 적극적인 의미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할 수 있다:
1. 바울이 당시 유대인들이 율법 준수를 구원의 방편으로 본 것을 비판하여 율법의 소극적인 측면(정죄하는 율법)을 강조했을지라도, 우리는 그의 서신에서 율법의 제3용도(우리 삶의 지침인 율법)가 나오는 것을 간과할 수 없다. 신자가 “율법에 대해 죽었고”, 그리스도께서 “율법의 마침”이시라는 것이 강조되었을지라도, 율법이 하나님의 뜻의 표현이므로 그것에 영구적 의미가 있다는 것은 자명한 일이다. (구원의 방편으로소의 율법을) 거부하는 것과 (하나님의 뜻을 알려준다는 의미에서의) 보존하는 것이 바울에게는 묘하게도 서로 모순되지 않고 병존한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는 초등교사로서의 의미와 새 생명의 삶을 위한 규범으로서의 율법의 이중의미를 부정하거나, 이 두 가지를 용어상으로 구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그러므로 만일 우리가 율법을 대신하는 것으로서 사랑이나 성령님이나 심지어 그리스도를 내세운다고 할지라도 그것은 새로운 삶의 규범이 될 수 없다.
롬 13:8-10과 갈 5:14에 나오는 사랑에 대한 가르침은 이 점에 대해 분명히 말한다. 사랑이 율법의 자리에 들어와 그것을 대신하는 것이 아니라 율법의 요약이다. 사랑이 율법의 판별기준이 아니라, 사랑이 절대적으로 요구되는 것은 사랑 안에서 율법이 성취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를 통해 율법의 요약으로서의 사랑의 의미, 즉 율법 성취의 판별기준으로서의 사랑이 지닌 중요한 의미는 훼손되지 않는다. 이 점에서 바울의 사랑의 찬가는 산상수훈에 나오는 예수님의 급진적인 계명에 버금가게 율법의 깊고 분명한 내용을 대단히 훌륭하게 풀어 놓은 것이고, 율법 해석에 있어서 이전에는 도달한 적이 없는 가장 높은 봉우리에 도달한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그러므로 사랑은 구속력이 있고 율법은 구속력이 없다는 식의 대비는 바울에게서 찾아볼 수 없다.
성령님도 새로운 삶의 능력으로뿐만 아니라 규범으로도 역할을 한다. 성령님은 단지 육체의 지배를 굴복시키는 능력만인 것이 아니다. 성령님의 인도함을 받는 자는 누구든지 하나의 분명한 방향으로 인도함을 받는다. “성령을 따라 행하다”(갈 5:25)라는 말씀도 하나의 척도(기준)을 가지고 있다. 이 말은 성령님이 새로운 삶의 규범으로서 율법과 경쟁한다거나 혹을 율법의 자리에 들어온다는 것도 아니고, 성령님의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율법의 요구로부터 해방되었다는 것을 의미하지도 않는다. (유감스럽게도) 이러한 견해는 널리 퍼져있는데, 우리는 이에 반대하고 바울의 가르침을 붙들어야 한다.
갈 5:18(“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에 있지 아니하리라”) 말씀은 신자가 하나님의 뜻을 깨닫는 것과 그 판별 기준은 율법이 아니라 성령님에 있다는 말로 들릴 수 있다. 그러나 이곳에서 “율법 아래에 있다”는 말은 사람이 믿음이 없어 생명을 주시는 성령님의 능력을 얻지 못하고 율법 아래에서 무능력하고 정죄를 받고 있는 상태를 의미한다. 성령님의 활동은 율법의 유효성과 요구를 폐기하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확증하고 성취한다고 바울서신이 가르치고 있다는 사실을 간과하면 안 된다.
성령님의 일은 정확히 신자들의 삶 속에서 율법을 이루는 것이다: “육신을 따르지 않고 그 영을 따라 행하는 우리에게 율법의 요구가 이루어지게 하려 하심이니라”(롬 8:4). “육신의 생각”과 “성령의 생각”과의 차이는 육신은 하나님의 율법에 복종하지 않고 그럴 수도 없다는 데에 있다(롬 8:7). 우리는 바울에게서 하나님의 뜻의 내용과 관련해서 율법과 성령님 사이에 대립이 있다는 그러한 영성주의의 흔적을 발견할 수 없다. 율법 자체는 거룩하고 영적이므로(롬 7:14), 성령님에 대립될 수 없으며 성령님으로 대체되어 불필요하게 되지도 않고, 오히려 성령님에 의해 견고하게 된다. “성령님의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선하고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하나님의 온전한 뜻이 무엇이지 분별하고 검증하는 법을(롬 12:2) 새롭게 배우는데, 이것은 다른 곳에서 약간의 표현 차이가 나지만 율법에 대해 그렇다고 말하는 것이다(롬 7:12: “이로 보건대 율법은 거룩하고 계명도 거룩하고 의로우며 선하도다”).
2. 이제 앞에서 말한 것을 좀 더 자세히 설명하고자 한다. 앞에서 율법이 여전히 그 의미를 유지하고 있다고 말했는데, 그렇다고 해서 그리스도께서 오심으로써 역사적 형태로서의 율법의 효용은 이전과 동일하다는 의미는 아니다. 이에 대해 고전 9:21 말씀이 중요한데, 바울은 그곳에서 율법 없는 자들에게 율법 없는 자처럼 되었다는 것을 강조하고자 다음과 같은 말을 덧붙였다: „율법 없는 자에게는 내가 하나님께는 율법 없는 자가 아니요 도리어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자이나 율법 없는 자와 같이 된 것은 율법 없는 자들을 얻고자 함이라“. 이 구절은 율법에 지속적인 의미가 있다는 것과 관련해서 그리스도와 율법 사이의 관계를 분명하게 표현해주는 세 가지 요소를 가지고 있다.
1) 율법은 그리스도 교회에 더는 무제한적이고 무차별적인 유효성을 가지지는 않는다. 교회는 어떤 의미에서는 „율법 없는“ 곳이다.
2)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율법이 폐기된 것은 아니다.
3) 율법의 이러한 지속적인 의미는 고전 9:21에 따라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것으로 표현될 수 있다.
이 세 가지 요소의 의미는 바울서신 전체를 통해 좀 더 자세히 설명될 수 있다.
1) 율법은 그리스도 교회에 더는 무제한적이고 무차별적인 유효성을 가지지는 않는다. 교회는 어떤 의미에서는 „율법 없는“ 곳이다:
유대인과 이방인을 분리하는 배타적 의미로서의 모세 율법은 더는 유효하지 않다. 이것은 이방인의 전도를 위해 부름받은 바울의 사도직의 토대이다. 그는 이 율법을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이며, „중간에 막힌 담“이라고 한다. 그리스도가 허시고 폐하셨다는 말은 이 율법에 적용된다(엡 2:14 이하; 참조: 갈 2:14; 4:10; 5:2 이하; 골 2:16 이하; 또한, 롬 2:26 이하; 3:30 등; 고전 7:18-19).
2) 그렇다고 해서 하나님의 율법이 폐기된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와 함께 다른 율법이 왔으며, 바울이 „그리스도의 법“(혹은 단순히 „법“)을 영원하고 지속적인 하나님의 율법으로 이해해서 의도적으로 모세 율법과 대비해서 그렇게 말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이러한 오해를 피하고자 어떤 학자들은 롬 13:8을 일반적으로 번역된 „남을 사랑하는 자는 율법을 다 이루었느니라“를 피하고 „사랑하는 자는 다른 법을 다 이루었느니라“고 번역하여 „다른 법“을 그리스도의 법이라고 하거나, 그리스도의 법이 모세 율법을 대신하여 들어왔다고 한다. 그러나 이러한 번역은 본문의 분명한 의도를 애써 회피하고 있을 뿐이다. 바울이 율법의 지속적인 효용을 인정해서 그 요구를 말할 때 그는 의도적으로 십계명을 인용한다. 따라서 여기에서 그는 모세와 그리스도, 또는 법과 모세 율법을 대비시키고 있는 것으로 보기 어렵다. 그리고 이것은 „계명들“이라는 표현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그리스도가 „규례들로 이루어진 계명들의 율법“(엡 2:15; 골 2:14, „법조문으로 된 계명의 율법“)을 폐지하였다는 것이 아무리 사실이라고 할지라도, 다른 곳에서는 진정으로 중요한 것은 하나님의 계명들을 지키는 것이라고 말하고 있고, 구체적인 경우들에 있어서 모세 율법의 개별 규례가 근거로 제시될 수 있었다(엡 6:2; 고전 9:8 이하)는 사실이 바뀌지 않는다.
o 엡6:2 네 아버지와 어머니를 공경하라 이것은 약속이 있는 첫 계명이니
o 고전9:8-9 내가 사람의 예대로 이것을 말하느냐 율법도 이것을 말하지 아니하느냐 모세의 율법에 곡식을 밟아 떠는 소에게 망을 씌우지 말라 기록하였으니 하나님께서 어찌 소들을 위하여 염려하심이냐
3) 율법의 이러한 지속적인 의미는 고전 9:21에 따라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에 있는“ 것으로 표현될 수 있다:
“그리스도의 법에 묶여 있다”(고전 9:21)는 말의 실제 내용은, 그리스도는 그 자체로 하나님의 법이며, 따라서 모세 율법을 대표한다는 의미이다. 그분은 자기의 영(성령님)을 통해 신자를 다시 율법에 매시어, 율법이 새언약에서도 렘 31:33에 따라 그 능력을 보유하게 된다. 그리스도께서는 자신의 성령으로 신자들의 마음속에 새롭게 율법을 새길뿐만 아니라, 이러한 율법에서 어떤 것이 효력을 다했으며, 어떤 것들이 여전히 유효한지를 판별해주는 새로운 기준이 된다(골 2:17).
마지막으로 우리는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율법 해석에 주목해야 한다. 바울은 여러 곳에서 그 해석을 근거로 제시하고 있다(참조: 고전 7:10-11; 갈 6:2).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오심으로 율법이 폐기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근본적이고 철저한 의미로 성취되었고(마 5:17), 교회는 단지 그리스도 안에서 율법과 관계하게 되었으며, 이러한 의미에서 교회는 “그리스도의 율법 아래 있게” 되었다.
3. 끝으로 그리스도와 율법과 성령님, 그리고 사랑이 어느 정도로 하나의 통일체로 결합되어 있는지는 다음과 같은 병행 구절을 비교해 보면 드러난다:
o 갈 6:15-16 “할례나 무할례가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새로 지으심을 받는 것만이 중요하니라. 무릇 이 규례를 행하는 자에게와 하나님의 이스라엘에게 평강과 긍휼이 있을지어다”
o 갈 5:6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는 할례나 무할례나 효력이 없으되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뿐이니라”
o 고전 7:19 “할례 받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요 할례 받지 아니하는 것도 아무 것도 아니로되 오직 하나님의 계명을 지킬 따름이니라”
새로운 창조는 새로운, 그리고 구속사적인 규범을 가지고 오는데, 이것은 그리스도인의 자유를 의미하지 않고 새 시대의 규범을 따라 사는 삶이다. 이것은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 혹은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으로 불릴 수도 있고,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는” 것(빌 3:3)이라고 할 수도 있다. 이러한 선언들의 결합이 매우 흥미로운 것은 새 창조에 의해 주어진 규범(갈 6:16)은 사랑(갈 5:6)과 성령(빌 3:3)이라는 범주와 아울러서 율법이라는 범주(고전 7:19)도 포함하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이렇게 여러 모티프들이 서로를 정의하고 또 제한한다.
한편으로는 전에 주어진 율법이 이제 더는 그리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보일 수 있다.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는 새 창조의 개시자인 그리스도에 의해 결정된다. 그분이 율법에 나타난 하나님의 뜻의 깊은 의미를 우리에게 알려주신다. 하나님을 성령님을 통해 섬기는 자는 율법을 성취하시는 그리스도의 구속사를 믿는 관점에서 율법을 바라본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의 삶은 “영적 예배”이며, 신자들이 자기 자신을 제물로 드리는 것이며(롬 12:1-2), 거룩함과 흠 없음은 이제 외적인 것과 육신에 있지 않고, 내적인 것과 성령님(빌 3:3; 롬 1:9), 믿음의 제사(빌 2:17)에 있다. 다른 한편으로는, 이러한 신령함은 다름 아닌 사랑의 역사이고 하나님의 계명을 지키는 것이다.
o 빌3:3 하나님의 성령으로 봉사하며 그리스도 예수로 자랑하고 육체를 신뢰하지 아니하는 우리가 곧 할례파라
o 롬1:9 내가 그의 아들의 복음 안에서 내 심령으로 섬기는 하나님이 나의 증인이 되시거니와 항상 내 기도에 쉬지 않고 너희를 말하며
o 빌2:17 만일 너희 믿음의 제물과 섬김 위에 내가 나를 전제로 드릴지라도 나는 기뻐하고 너희 무리와 함께 기뻐하리니
그런데 새것과 옛것, 효력이 있는 것과 효력을 상실한 것 사이에 정확한 경계를 허락하지 않은 것이 이 새로운 상황의 특징이다. 그러므로 율법이 그리스도인의 삶의 모든 경우를 포괄해야 하고 율법이 삶의 모든 상황에 올바르고 정확하게 적용되어야 한다는 율법주의적 관점을 끝났다. 그와는 대조적으로 지금은 모든 율법과 삶 전체는 그리스도 안에서 계시된 구원의 빛 안에서 이해되어야 하고,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은 율법을 아는 것 외에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 성령님의 인도하심에 의존하고, 인간의 내면이 새롭게 되는 것에 달려 있다. 이 두 가지가 모두 중요하다.
사도가 율법 중에서 일시적인 것과 연속적인 것, 특별한 것과 보편적인 것을 좀 더 자세히 구분하지 않은 이유는, 교회가 그러한 일에서 스스로 책임을 지고 영적 활동을 하도록 지도하고, 도덕적이고 영적으로 자립할 수 있도록 도왔기 때문이다. 예를 들면, 무엇이 옳은지 하나님의 뜻을 검증하고 분별하라고 요구한 것이 그런 이유에서이다:
o 롬 12:2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o 빌 1:9-10 „내가 기도하노라 너희 사랑을 지식과 모든 총명으로 점점 더 풍성하게 하사, 너희로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하며 또 진실하여 허물 없이 그리스도의 날까지 이르고“
o 골 1:9 „이로써 우리도 듣던 날부터 너희를 위하여 기도하기를 그치지 아니하고 구하노니 너희로 하여금 모든 신령한 지혜와 총명에 하나님의 뜻을 아는 것으로 채우게 하시고“
o 엡 5:17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
여기에서 분명한 것은, 하나님의 뜻을 깨달으려면 내면에 올바른 성품이 전제된다는 것이다. 이러한 점에서 이 구절들은 로마서 2장과 흥미있는 병행을 이루는데, 그곳에서는 유대인들이 자기들은 율법을 소유함으로써 하나님의 뜻을 알 수 있는 원천을 가지고 있음을 자랑했다고 한다(롬 2:17-20):
„유대인이라 불리는 네가 율법을 의지하며 하나님을 자랑하며, 율법의 교훈을 받아 하나님의 뜻을 알고 지극히 선한 것을 분간하며, 맹인의 길을 인도하는 자요 어둠에 있는 자의 빛이요, 율법에 있는 지식과 진리의 모본을 가진 자로서 어리석은 자의 교사요 어린 아이의 선생이라고 스스로 믿으니“.
바울이 이렇게 하나님의 뜻을 알고 있다고 자랑하는 유대인들을 비판하는 것을 통해 교회에 무슨 말을 하려고 하는지가 분명해진다. 그것은 교회가 아직 어리다거나 율법이 그들에게는 유대인과 다소 달리 적용된다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뜻을 알려면 반드시 내적으로 새로워져야 한다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다[2]. 이것은 하나님의 뜻이 율법에 주어졌다는 것을 부인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계명들로 여겨질 수 있는 것들의 올바른 적용은 하나님의 계명의 내용에 부합되는 내면의 상태에 달려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런 의미에서 하나님의 뜻을 알려면, 하나님의 뜻의 거룩하고 영적인 표현으로서의 율법의 계명과 규례에 주목하는 것만큼 성령님의 인도와 기도와 믿음도 필수적이다.
VI. 양심과 자유
리덜보스가 순종과 권면, 율법 이야기를 하다가 갑자기 “양심과 자유”를 말하는 것은, 이 모든 것이 중생된 자에게만 해당하는 것이며, 이렇게 새롭게 된 자만 깨끗한 양심을 받기 때문이다. 양심이 깨끗한 자는 진정한 자유를 누릴 수 있다. 이 자유란 죄 사함을 통한 하나님 앞에서의 죄책의 자유이며, 그 결과로 죄의 노예로부터 해방되어 비로소 하나님의 계명을 이해할 수 있으며, 하나님 뜻을 행할 수 있는 자유를 누린다.
바울은 양심이라는 말을 일반적으로 도덕적 자기 판단의 의미에서 “자기 자신을 아는 것”이라는 의미로 사용한다. 예를 들면 롬 2:15[3]에서는 먼저 이방인들이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즉, 요구)”에 대해 말한 후에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고발하며 혹은 변명하여”라는 말로 그것을 뒷받침한다. 이곳에서 그는 양심의 기능을 “(자기를) 고발하거나 (자기를) 변호하는 것(변명하여)”이라고 한다. 고전 4:4; 롬 9:1, 고후 1:12에서도 사도는 자신의 양심이 자신의 혐의를 벗겨주는 역할을 한다고 말하고 있고, 다른 곳에서는 좀 더 관행적인 의미에서 “선한 양심” 또는 “순전한 양심”에 대하여 말한다(딤전 1:5, 19; 3:9; 딤후 1:3 등).
고발하거나 변호하는 사람은 증인이다. 그러므로 양심은 매우 유력한 증인이다. 그는 하나님의 규범(율법)이라는 자기를 초월한 심급(Instanz)이 준 요구를 알고 있으므로, 그는 이 규범과 자기 행위를 대조하여 가지를 고발하거나 변호한다(롬 13:5). 다시 말해서 양심은 사람이 도덕적인 행위를 할 때에 자기 위에 있는 하나님의 판단기준에 비추어서 자신의 행위를 판단해야 하는, 인간 속에 있는 의식[4]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 안에서 주어진 자유는 이제 양심에도 영향을 미친다. 이 자유는 자기가 더는 정죄받지 않는다고 하고 자기를 새로운 순종으로 인도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바울은 롬 9:1에서 자기 양심이 성령님의 인도를 받아 자기를 판단하고 있다고 한다(“내 양심이 성령 안에서 나와 더불어 증언하노니”). 이것은 바울이 자기 양심의 내적 판단이 성령님에 의해 인도되고 있음을 안다는 것이다.
다른 곳에서 그는 양심을 믿음과 결부시켜서 말하기도 한다(딤전 1:5, 19; 3:9). 그러므로 성령님을 통한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는 양심이 해방되었음을 말하기도 한다. 그는 죄 사함을 받아 죄책감이 그에게 사라지고,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삶을 시작했으므로, 자기 말이나 행동이 성령님에 의해 인도받는다는 확신을 가지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방된 양심은 죄책과 죄의 권세를 벗어나지 못한, “더럽혀지고 자기를 고발하는 양심”에 반하여 “선하고 깨끗한” 양심으로 존재한다(참조: 딛 1:15; 롬 2:15). 이런 이유에서 선한 양심은 구속의 선물이라고 직설법으로 말할 수 있고 신자의 의무라는 명령법의 관점에서 말할 수 있다(참조: 고후 1:12; 딤전 1:5, 19; 3:9). 즉, 신자는 중생될 때에 선한 양심을 선물로 받았고, 또한 그 후에는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을 순종함으로써 이 선한 양심을 계속 유지해야 한다.
o 딤전 1:5 “이 교훈의 목적은 청결한 마음과 선한 양심과 거짓이 없는 믿음에서 나오는 사랑이거늘”
o 딤전 1:19 “믿음과 착한 양심을 가지라 어떤 이들은 이 양심을 버렸고 그 믿음에 관하여는 파선하였느니라”
o 딤전 3:9 “깨끗한 양심에 믿음의 비밀을 가진 자라야 할지니”
이 점과 관련하여 고전 8:7 이하와 로마서 14장(이곳에서는 양심이라는 단어가 나오지 않지만)에서 양심에 대해 말하고 있는 대목이 중요하다: “그러나 이 지식은 모든 사람에게 있는 것은 아니므로 어떤 이들은 지금까지 우상에 대한 습관이 있어 우상의 제물로 알고 먹는 고로 그들의 양심이 약하여지고 더러워지느니라”(고전 8:7). 그들의 양심은 쉽게 “더러워지므로” 약하다. 즉 그들이 그 일을 함으로써 자기가 죄를 지었다고 생각하는 것이다. 이렇게 양심이 약한 사람들은 삶에서 많은 것에 걸려 넘어질 위험에 처해 있다. 그러므로 강한 자들은 약한 자들이 죄라고 생각하는 것을 자기의 자유를 사용하여 거리낌없이 행함으로써 그들로 하여금 걸려 넘어지게 하는 죄를 범할 수 있다.
그 결과 약한자들이 자신이 죄라고 생각하는 것을 하게 함으로써 그들을 멸망하게 하는 것이다. 고전 10:23-33의 강한 자들과 약한 자들에 대한 본문도 이러한 사고가 전제되어 있다.
로마서 14장에서 나오는 권면은 양심이 신자의 새로운 실존방식과 관련되어 있음을 보여준다. 그곳에서는 약한 자들이 믿음이 약한 자들이라고 명시적으로 표시한다. 신자는 각자 “자기 마음(누스)에서 온전히 확신한” 가운데 행동해야 한다고 바울은 말한다. 즉, 고전 8장과 10장에서 “양심”이라고 한 것을 이곳에서는 “믿음”과 “마음”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어떤 일이 그 자체로는 잘못된 것이 아닐지라도(14-15), 그것이 형제들에게 걸림돌이 되게 해서는 안 된다(13). 왜냐하면, 깨끗한 것도 그것을 “거리낌으로” 먹는 자, 즉 “악한 양심으로” 먹는 자에게는 악한 것이 되기 때문이다(20). “거리낌으로” 라는 말은 “하나님 앞에서 흠이 없다고 할 수 없는 의식 속에서” 라는 의미이다.
바울은 자유로운 양심으로 행하는 사람이 복이 있다고 말한다. 이것은 양심의 거리낌이 없다고 해서 그가 하는 모든 것이 옳다는 의미가 아니다. 자기 양심에 거리낌 없이 행하는 자면 하나님 은혜를 얻는다는 확신을 가질 수 있기 때문이다. 왜냐하면, 이곳에서도 양심이라는 말은 나오지 않지만 같은 의미로 말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의심을 가지고 먹는 자는 죄를 짓는 것이다. 그가 믿음으로 행하지 않기 때문이다. 그리고 믿음으로 행하여지지 않는 모든 것은 죄다(23). 바울은 이것을 통해 다음과 같은 것을 말하려고 한다: 그리스도인에게는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삶에 대한 확신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 앞에서 가진 자유에 의거하여 자신을 변호할 수 있는 것 외에는 어떤 결정이나 행위도 선할 수 없다(참조: 고전 10:29).
요약하면, 양심은 신자가 자기가 죄로부터 깨끗하게 되었다는 것을 알고, 자기 행동이 하나님 앞에서 볼 때 죄가 없다는 확신을 가진다는 점에서 그리스도 안에서의 자유를 반영한다. 이 자유는 다른 사람의 판단을 받지 않고(참조: 고전 10:29), 그는 스스로를 정죄하지 않고, 의심하지도 않고 내적 확신과 믿음을 가지고(롬 14:5) 도덕적인 결정을 내리고 행동한다(롬 14:22-23).
신자는 양심 안에서 자기가 하나님과 묶여 있다는 것을 알고, 그리스도께서 구속사역을 통해 이루어주시고, 성령님을 통해 선사된 하나님 앞에서의 자유를 인식한다. 이것이 왜 사도가 그토록 양심을 더럽히면 안 된다고 강조하는 이유이다. 이것 때문에 그리스도와의 교통을 막아서 형제를 멸망으로 인도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롬 14:15; 고전 8:11).
이 권면에서 다루고 있는 것은, 일차적으로 하나님 뜻을 아는 것(계명을 깨닫는 것)이 아니라, 그분 앞에서 죄 없이 자유롭게 산다는 의식의 문제이다. 로마서 14장과 고린도전서 8장은 윤리적이기 보다는 종교적인 것을 다루고 있다. 즉, 양심은 신자가 도덕적인 결정을 할 때 하나님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려주는 심급(Instanz)이 아니라, 그가 이 결정을 할 때 하나님의 심판을,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얻은 자유를 더럽히지 않고 보존해야 한다는 것을 기억나게 하는 심급이다. 마지막으로 우리는 이러한 맥락 속에서 고전 4:1-4에 대해 잠시 생각해본다.
o 1 사람이 마땅히 우리를 그리스도의 일꾼이요 하나님의 비밀을 맡은 자로 여길지어다
o 2 그리고 맡은 자들에게 구할 것은 충성이니라
o 3 너희에게나 다른 사람에게나 판단 받는 것이 내게는 매우 작은 일이라 나도 나를 판단하지 아니하노니
o 4 내가 자책할 아무 것도 깨닫지 못하나 이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 다만 나를 심판하실 이는 주시니라
o 5 그러므로 때가 이르기 전 곧 주께서 오시기까지 아무 것도 판단하지 말라 그가 어둠에 감추인 것들을 드러내고 마음의 뜻을 나타내시리니 그 때에 각 사람에게 하나님으로부터 칭찬이 있으리라
바울은 그곳에서 자기가 사도직을 수행하는 데에 대한 인간의 판단은 자기에게 별로 중요하지 않다고 하고, 자기도 자신에 대해 판단하지 않는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는 자기를 자책할 만한 것을 알지 못하나(자기 양심이 깨끗하므로), 그렇다고 해서 자기가 이를 통해 의로움을 얻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기를 판단하는 분은 오직 주님 뿐이시다.
종교개혁적 전통에 서 있는 이전의 석의에서는 사도가 이곳에서 양심의 판단이 불충분하다고 말한 것으로 이해한다. 이 말 자체는 옳지만 오늘날의 해석가들은 사도의 논증의 초점은 다른 곳에 있다고 한다. 즉, 자기의 순수한 양심이 아니라 장차 있을 하나님의 심판에 대한 것이며(5절), 하나님의 종인 자신이 아니라 주님께서 판단을 내리시고 승리의 월계관을 주실 것이다.
우리가 보기에는 이 해석이 옳다. 바울은 여기에서 자기 양심이 판단을 할만한 능력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것이 아니라, 자기는 주님의 종으로서 스스로는 사람들 앞에서 변명(증명)을 할 권한이 없다는 것을 말하고 있다. 그러므로 이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얻지 못하노라“는 어구는 주의 판단만이 바울이 의롭다는 것을 하나님과 사람들 앞에서 증명해 줄 수 있는 유일한 권위라는 것을 보여준다.
인간의 양심은 자기 앞에서나 다른 사람들 앞에서 자신의 의를 주장할 수 있는 근거가 될 수 없는데, 그 이유는 하나님의 판단은 훨씬 깊이 들어가고, 그것만 유일하게 오류가 없기 때문이다. 이를 통해 더욱 분명해지는 것은, 양심의 판단이 모든 논쟁을 끝낼 수 있는 것이 아니라는 점이다(자기 양심이 깨끗하다고 해서 무조건 그가 죄가 없다는 것을 의미하지 않는다). 단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유만이 하나님 앞에서의 죄책으로부터의 자유를 선사한다. 그리스도인의 양심의 자유의 특징은 도덕적인 판단을 형성하는 것과 관련된 영역에 있지 않고, 하나님에 대한 종교적인 관계의 영역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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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율법의 제3용도라는 말은 멜란히톤이 “usus (legis) in renatis”(거듭난 자에게 사용)라는 명칭으로 비롯되었다. 그는 율법이 거듭난 자에게 규범이 된다고 했다. 그 이후 모든 개혁교회가 이 가르침을 따른다.
[2] 앞에서 말한 멜란히톤의 율법의 “거듭난 자를 위한 용도”를 참조하라. 중생되지 않은 자는 율법의 진정한 의미를 알 수 없을 뿐더러 그것을 지킬 수도 없으며, 그러한 거룩한 하나님의 율법이 거친 돌이 되어 넘어진다.
[3] “이런 이들은 그 양심이 증거가 되어 그 생각들이 서로 혹은 고발하며 혹은 변명하여 그 마음에 새긴 율법의 행위를 나타내느니라”.
[4] 그리스어로 syneidesis인데 문자적으로 “함께 아는 자”로 번역할 수 있다. 이것은 내 안에 있는 또 하나의 의식으로써 하나님의 기준에 비추어 내 생각과 행위를 판단하는 기관이다.
*강의자 : 송다니엘 교수
*본 리덜보스의 바울신학 해설 8강은 2024년 8월 25일(주일)과 9월 1일(주일)에 실시된 부천개혁교회의 사경회와 부천개혁성경신학교의 집중강의를 겸하여 강의된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