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김소월 시 다시 읽기 >/돌, 이종섭
1. < 진달래꽃에 숨겨진 향기 >
소월은 주로 자연 상관물을 매체로 노래했지만 그 특징은 우리 민족과 매우 관련성이 많은 자연물을 택했다는 것에서 찾을 수 있다. 시 <진달래꽃> 또한 그러한 범위에서 벗어나지 않으며, 여기에는 민족 고유의 향기가 진하게 숨겨져 있다.
그럼으로 해서 여태껏 우리는 소월의 시를 정한론이라는 특유의 민족적 정서에만 매달려 좁게 해석해온 것이 아닌지 반성해 본다.
* <진달래꽃> / 김소월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 때에는
말업시 고히 보내드리우리다
寧邊에 藥山
진달래꽃
아름따다 가실길에 뿌리우리다
여기서도 진달래꽃은 우리강산에 두루 피는 꽃으로 무궁화보다도 민족의 가슴속에서는 더욱 친근함을 주는 꽃이다. 어떤 경우에는 민족을 상징하는 꽃이기도 하며, 그 꽃만큼이나 아름다운 리듬과 정감 있는 어휘, 즉 ‘아름따다 가실길에 뿌리우리다’와 다음 연에서 계속되는 ‘가시는거름거름/ ... /삽분히즈려밟고 가시옵소서’ 같은 언어는 우리말이 얼마만큼 아름다운 것일 수 있는 가를 실증적으로 보여주는 듯하다.
그 유명한 ‘寧邊에 藥山’의 ‘진달래꽃’을 ‘가실 길’에 뿌리겠다는 것에서는 암시 하는 바 심상치 않으며, 님과 이별하게 될 때 님이 ‘가실길에 뿌리우리다’라는 것이 이 시의 핵심적인 해석의 열쇠로 보인다.
이를 두고 삼국유사의 <산화가>에서처럼 불교의 散花功德이라는 의식행위로 보는 것은 다시 한 번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왜냐하면 ‘散花功德이라 함은 부처에 대한 供養으로 부처 앞에 꽃을 뿌리는 것, 또는 그 일’을 지칭하는 것이므로 이별하는 님과 관련짓기는 애매할뿐더러, 그 뿌리는 꽃이 하필 ‘寧邊에 藥山/진달래꽃’이어야 하는가에 대하여는 답을 찾기 어렵다.
다음과 같이 이어진다.
가시는거름거름
노힌그꽃츨
삽분히즈려밟고 가시옵소서
나보기가 역겨워
가실때에는
죽어도아니 눈물흘니우리다
‘나보기가 역겨’웁다거나 ‘죽어도아니 눈물흘니우리다’는 것은 어쩔 수 없이 보내 드리는 수세적인 입장의 원망 섞인 답답한 심정의 표현일 뿐, 그것이 이별이라는 것 외에 상대가 누구이며 왜 이별을 하게 되었는가에 대한 답은 여기서도 끝끝내 진술하지 않는다.
이 시에서는, 화자의 의지에 대하여는 ‘-오리다’라는 말로 반복 강조하였고 청원하는 말에는 ‘-옵소서’라는 최상의 존칭어를 사용함으로써 화자의 상대가 얼마나 높이 존경할만한 존재인가를 나타내고 있다.
마지막으로 ‘나보기가 역겨워/가실 때에는’이라는 행 전체를 다시 한 번 특별하게 강조하면서 이제까지 고분고분하던 글투를 180도 뒤집어서 속마음까지도 순응하는 것이 아니라는 ‘충격적 항거의 의도’를 내비치며 마지막을 장식하고 있다.
화자가 보통의 사람이라면 꽃을 그냥 주는 것이 아니라 ‘아름 따다 가실길에 뿌리우리다’라는 것은 우리 민족의 정서로 볼 때 장례의식에서의 행위로 보는 것이 가장 옳다. 죽은 사람의 상여 앞에 꽃을 뿌리는 행위는 우리의 풍습 속에서도 가능한 것일 뿐 아니라 그것은 우리들의 보편적인 정서이다. 3연에서 ‘즈려밟고 가시’라는 것을 보면 더욱 그러하다.
그런데 그 뿌리는 꽃이 다른 꽃도 아니고 화자 자신의 고향을 지칭하는 ‘寧邊에 藥山/진달래꽃’이라는 것이 문제이다. 이 시에서는 ‘진달래꽃’을 시어 중 하나로 사용하고 있기는 해도 어느 모로 보더라도 그 내용으로 보아 표면적 주제가 ‘진달래꽃’은 아닌데, 그럼에도 불구하고 시인은 시의 그 꽃을 구태여 철쭉이나 유채꽃 또는 무궁화꽃이 아닌 반드시 ‘진달래’이어야 하게끔 제목 자체를 <진달래꽃>으로 정해버렸다.
여기서 ‘진달래꽃’은 비록 2, 3 두 연에서 외형적으로 이용되고 있는 것에 불과하지만, 제목 자체를 ‘진달래꽃’으로 정함으로써 ‘진달래꽃’이 나타내고 있는 의미의 정서를 이 시에서 부분적으로 관여하는 단일비유가 아닌 작품 전체를 지배하는 가장 핵심적인 확충비유로 바꾸어버린 것이며, 동시에 그 보조관념인 진달래꽃이 실제 진달래꽃이면서 동시에 화자 자신, 화자의 사랑, 화자의 원망 등 다른 원관념을 내포하고 있기 때문에 상징화된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렇다면 이는 분명 ‘진달래꽃’ 또는 그 꽃과 가는 자 또는 보내는 자와의 사이에 피치 못하게 숨기고 있는 어떤 필연적 관련성이 있을 것이고, 그것도 하필 향토적 의미가 내포된 ‘寧邊에 藥山/진달래꽃’을 ‘아름따다 가실길에 뿌리’는데 사용하겠다는 이유도 함께 있을 것이다.
‘가시는거름거름’과 ‘즈려밟고 가시’라는 표현을 보면 설령, ‘나보기가 역겨워’떠나시는 경우라 가정하더라도 그를 사랑하면서도 한편으로는 무척 존경해마지않는다는 극히 조심스런 표현일 수 있다.
그렇다면, 결국 이것은 죽는 것은 아니되 죽음을 의미하는 가시는 길에, 그것도 겨레와 강토를 상징할 수 있는 의미의 ‘寧邊에 藥山/진달래꽃’을 뿌린다는 것으로서 화자뿐만 아니라 우리 민족에게 무척 성스러운 그 무엇인가가 떠나가는 것이라는 결론에 도달하게 된다.
이와 더불어, 소월 시집에 나오는 대부분의 시에서 화자의 상대는 전혀 언급함 이 없어 한용운의 ‘님’보다도 더욱 추상적이다.
따라서 개인적인 사랑을 빌어 표현한 것처럼 보이지만 결코 개인적인 사랑의 노래라고만 단정하여 읽을 수 없으며, 이때 시 자체에서 화자의 상대나 이별의 이유를 찾을 수 없다면 당시 시대상황이나 시인의 전기적 사실에서 찾으려 하는 것은 오히려 자연스러운 것이다.
2. < 무덤 위에 찾아온 봄 >
지금 중, 고등학교에서는 어떻게 가르치는지 모르겠으나, 여태껏 정한론이란 틀에 얽매여 가장 잘못 읽혀져 온 소월의 시가 <金잔듸>가 아닌지 모르겠다.
한 번 보자.
* <金잔듸>/김소월
잔듸,
잔디,
金잔듸.
深深山川에 붓는불은
가신님 무덤가엣 금잔듸.
봄이 왓네, 봄비치 왓네.
버드나무끝테도실가지에.
봄비치 왓네, 봄날이 왓네,
深深山川에도 금잔듸에.
기다리던 봄날이 왔다. 하지만 봄은 실망스럽게도 환상 속의 봄으로서 님 없는 현실을 인식하고 만다. 즉 찾아온 희망의 봄과 깨닫는 슬픈 현실이 역설을 이룸으로써 시대적 모순을 이끌어 내고 있는 것이다.
‘봄이 왓네, 봄비치 왓네./.../봄비치 왓네, 봄날이 왓네,/’라는 점층적 표현은 학수고대하던 봄이 왔음을 느끼게 하는 착각의의 결과이며, 그 결과인 봄이 단순한 금잔디가 아닌 가신 님 죽어있는 ‘무덤가엣 금잔듸’로서, 삼천리 방방곡곡 구석구석이라 할 수 있는 ‘深深山川에도 금잔듸에’도 왔다는 것이므로 결국, 삼천리강산 ‘深深山川’ 모두가 다 무덤이 되어있는 상태로서 ‘深深山川에 붓는불은/가신님 무덤가엣 금잔듸.’가 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이다.
첫댓글 돌__님 잘 읽었습니다.^^
최근 어느 원로 비평가는 우리 문학인 탄생 1세기를 맞아 1920년대의 시인들에 대한 검증을 하는 자리에서 김상용은 '남으로 창을 내겠소'라는 시 말고는 내놓을 게 없는 '단벌 시인'이라고 평하였다. 또한 그 시대의 이상화, 이육사 시인들은 아마추어 시인에 불과한 게 아니었던가 하는 의문을 제기하였다. 그는 우리 시에 있어서 그 무렵 김소월이 가장 위대한 시인이었고, 전문 시인의 출발점은 정지용 시인부터라고 하였다. 일리가 있는 이야기라고 들린다. 따지고 보면 윤동주 시집 전체를 읽어보면 몇 편을 제외하고서는 동시 수준에 머무는 치졸한 것이 많이 눈에 띈다.
오늘의 우리 시를 읽는 대중들은 김소월을 뛰어넘지 못하는 소박한 수준임에 비추어 정지용 이상의 수준은 잘 모르겠다고 손사래를 칠 게 불을 보듯 뻔하다. 요즘의 대중들에게 인기 있는 시들을 한두 편 예로 들면 대체로 이런 부류의 시들이다.
치열한 자기 부정과 고민이 없이 쓰여진 글들이 버젓이 시라고 행세하다 보니 유안진 시인의 수필 '지란지교를 꿈꾸며'의 일부분도 시라고 생각하는 독자도 의외로 많은 형편이다. 아마추어 시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문단의 공기라 하기 어려운 시잡지, 종합지 등의 범람으로 이 땅에 명색 시인이 수천 명을 헤아린다던가. 그런 형편임에도 좋은 시집이 이천 부를 못 넘게 팔리는 현상을 어떻게 보아야 할 것인가. 우리 나라에 시인은 많아도 시의 독자는 그보다 훨씬 적다. 젊은 시절 시에 자기 생의 전부를 걸고 피나는 습작을 하여 등단하던 순정한 시인들의 자리가 오히려 뒷전으로 밀리는 듯한 느낌마저 든다.
시는 상상력의 결정체이며 정서와 감동을 동반하는 언어 예술이다. 시 속에 함축된 비의가 독자의 심금을 울릴 수 있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서 시인은 머리와 가슴으로 시를 써야 한다. 가슴으로만 시를 쓰던 시대는 갔다. 오늘의 시는 가슴 외에 머리로 쓰지 않으면 안 된다. 누군가 원로 시인의 축에 드는 어느 시인은 요즘 시인들이 술을 마시지 않고 가슴이 아닌 머리로만 시를 쓰므로 감동이 적다고 말하였다. 속으로 충분히 공감할 수 있으면서도 시대를 역행하는 사고가 아닌가 웃음이 나왔다. 다음과 같은 시를 보면 딴은 머리로만 쓰여진 시가 독자를 얼마나 불편하게 할 것인지 짐작이 간다.
위 내용은 쉼터님이 올려주신 강인한님의 시와시인에서 나름대로 발췌한글 입니다. 김소월님의 시를 해석하여 주셔서 댓글에 올려봅니다. 감사합니다.
민족적인 정서가 듬뿍 담긴 소월님의 시...다시한번 새겨봅니다......감사합니다.....
선생님은 평론쪽이 참 잘맞으시는 것 같아요...어여 좋은 소식 주세요..기다릴께요^^ .....귀한글 고맙습니다..행복 주말 되세요^^
좋은 시 다시 한 번 더 읽어 봅니다. 행복한 주말밤 이루시고 휴일을 맞이 하시길 바랍니다.
귀한글 잘 읽고 갑니다. 편안한 휴일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