Q3. 탐진최씨 族譜 중 가장 오래된 것은 어느 것일까?
국립도서관에 보관 중인 탐진최씨 족보 중 가장 오래된 것은 인터넷 검색을 해보니 15가지의 족보 중에서 1857년 조선 철종 임금 때 만들어진 <丁巳譜>이다. 11권으로 되어있다. 그 다음으로 만들어진 것이 1892년에 만들어진 <壬辰譜>이다.
장성`나주 등을 세거지로 하는 우리 진사공파는 조선조 숙종 9년 (1683년)에 派祖 進士 崔孝老公의 8세손 崔震漢公이 임진왜란 이후 흩어진 종족을 찾아서 만든 초보가 <癸亥舊譜>이며 가장 오래된 족보이다. 각 문중별로 보관하고 있는 족보들의 영인본을 만들어서 비교연구하고 종파간의 바른 연결 계보를 찾아내는 것이 우리 후손이 할일이라고 본다.
Q4. 耽津崔氏의 始祖는 누구인가?
莊景公 崔思全을 탐진최씨의 始祖라고 흔히틀 말하는 데 정확한 표현이 아니다. 莊景公의 묘지석에는 莊景公의 조부와 부친을 밝히고 그의 "선대는 탐진현 사람"이라고 기록했다. 조부가 시조라고 하지 않는 것을 보면 조부 이외에도 탐진최씨종족이 있었음을 쉽게 추정할 수 있다. 莊景公은 당시 탐진최씨 종족 중 지명도 있는 인물일 뿐이다. 莊景公이 유명하다고 해서 장경공의 여러 선대에서 갈려나간 모든 탐진최씨 종족조차 장경공의 후손이라고 하는 것은 언어도단이다. 마치 최치원 이전에 분파돤 모든최씨들을 경주최씨의 후손이라고 하는 것과 같은 오류다. 나는 장경공 직계를 <탐진최씨 장경공파 개성문중>이라고 부르고 싶다.
우리 탐진최씨들이 더 놀랄 만한 기록을 공개한다.
족보에서 확인된 기록 중에서 가장 일찍 출생하신 탐진최씨는 996년 즈음 태생이신 <화성문중>의 중시조 최응규공이라는 것이다.그리고 <화성문중>이 <개성문중>보다 빠르다는 것이다.
<탐진최씨 중서령공파 화성문중> 족보 기록에 의하면 中始祖 崔應奎公(생년 미상)은 고려조(?임금 때)에 중서문화성 중서령(종1품)을 했고 아드님 崔尙公은 1056년(문종10년)에 禮部郞中, 1065년(문종19년)에 禮部尙書를 했다고 한다. 두분에 대한 公文書나 史書에 나타난 벼슬기록을 확인해야 하겠지만 화성문중의 기록을 그대로 존중한다.
부친에 비해서 행적이 확실히 기록된 崔尙公이 1056년에 예부랑중 벼슬을 했는데 그때 30세쯤이라고 가정하면 최상공은 1026년 출생으로, 부친인 崔應奎公은 996년 출생으로 추정이 가능하다.
장경공은 1067년생이시다. 장경공의 조부 崔哲公은 1007년생 정도로 추정이 가능하다.
996년생 崔應奎公은 1007년생 최철공보다 10여년 먼저 태어 나셨다.
결론은 <화성문중>이 <개성문중>보다 빠르다는 것이다.
화성문중 崔應奎公이 장경공보다 70년 정도 먼저 출생하셨는데도 崔應奎公을 장경공의 후손이라고 족보에 기록되어 있으니 울어야 하나 웃어야 하나? 崔應奎公이 장경공보다 앞대 인물이면서도 장경공의 유명세 때문에 못난(?) 후손들에 의해서 후대 인물로 밀리고 심지어는 장경공의 후손으로 까지 추락하고 말았다. 이러한 혼란이 발생된 이유는 아라비아숫자에 의한 연대 계산법이 도입되기 전에 간지법에 의해 연대를 계산하는 방식이 어려웠기 때문이라고 판단된다.
강진을 탐진최씨가 貫鄕으로 삼은 것도 언제부터인지 기록이 없다. 족보에서 확인된 기록 중에서 가장 일찍 출생하신 탐진최씨는 996년 즈음 태생이신 <화성문중>의 중시조 최응규공이라는 것이다. 고려가 강진을 탐진이라고 개명한 것으로 보아 왕건이 고려를 개국한 918년 정도에 우리 탐진최씨가 출발한 시기가 아닐까 생각된다. 해주최씨의 출발과 비슷한 시기이다. 莊景公은 탐진최씨의 始祖가 될 수 없으며 中始祖( 장경공파 개성문중)가 될 수 밖에 없다.
Q5. 莊景公 崔思全은 누구인가?
장경공은 1067년에 태어나셨다. 고려 인종조에 이자겸의 난을 평정한 공로로 군기소감의 신분에서 守太尉(국가 최고 원로 자문역),門下侍郞 平章事(행정 총괄기관의 시랑 다음 계급)까지 오르셨다. 돌아가신 후에는 三韓後壁功臣에 추증이되고 인종임금 묘정에 배향되신 고려 공신의 한 분이시다.
장경공의 墓誌銘에 의하면 본관은 탐진이다. 조부는 상약국직장 崔哲公이시며 부친은 장작감 崔靖公이시다. <고려사>에는 장경공은 두분의 아드님을 두셨는 데 장자 弁公은 이부상서를 하셨고 차남 烈公은 (벼슬 기록은 없으나 )효심이 깊어 孝仁이라는 이름을 임금에게서 하사 받았다고 한다. 장경공의 조부 때부터 조정에 입사하여 벼슬을 하셨던 걸로 보아서 직계가 고려의 수도인 개성에 세거하셨을 것이다.
장경공의 직계후손들은 과거를 거치지 않고도 음서로 벼슬을 할 수 있도록 보장되었던 바 자손들이 개성을 쉽게 떠나지 않았을 것이다. 본관은 탐진이지만 장경공의 직계는 탐진(강진)에 세거하지 않았다는 말이다.
<고려사> 제84권에 의하면 고려말의 충선왕이 조정의 개혁을 지시하며 "공로를 평정함에 있어서 최응, 서희, 崔思全, 조충, 김방경, 등과 같은 사람이라야 功臣이라 할 수 있고 그의 자손도 등용할 수 있다."라고 한 것으로 보아 장경공이 고려 공신으로서의 위치를 알 수 있다. 조선 왕조의 개국으로 고려공신 가문인 탐진최씨가 쇠락한 것인지도 모른다.
첫댓글 시조할아버지의 선조가 탐진현 사람이라고 한 대목이 맞나요? 시조할아버지가 탐진인이라고해서 본관이 탐진이라는 것은 오류일 수 있습니다..그 당시 성은 있었지만 관향이 없는 사람들도 숱하게 많았답니다..
탐진현 사람이라는 것과 관향이 탐진, 즉 탐진최씨라는 것은 다르다는 것입니다.
탐진이 관향이라는 것은 맞지만 관향을 탐진으로 정한 연후에야 관향입니다.
탐진최씨라는 본관이 정해진 이전에 탐진은 그냥 지명입니다. 탐진현에 사는 사람이라는 뜻이죠
최초의 족보가 만들어지는 시기에 관향이 정해지지 않았을까요?
시조님이나 또는 그 이전에 본관을 정했다고 생각하십니까?
벼슬 기록은 개인이나 문중이 조작을 할 수 없는 진실이다.
어떤게 진실이라는 것이지요?
탐진최씨 현재까지 가장 오래된 족보는 1751년에 발간된 辛未譜입니다.
정사보 보다 100년전에 나왔네요
여기에는 왜 그런 중요한 벼슬들이 써있지 않고 그냥 휘자만 써있을까요?
가정과 추정으로 결론을 내린것이 진실이라고 할수는 없습니다.
이런 주장은 혼란만 야기할수 있습니다.
그렇치 않아도 많은 계파로 갈라져 통합도 못하는데 또다른 엉뚱한 문제를 제기 하셔야 되겠습니까?
신미보에는 응규할아버지는 中書令이라고 적혀 있고요 상할아버지는 아무것도 쓰여있지 않네요
1751년 신미보보다 빠른 족보 1683년에 진사공파에서 발간된 계해구보 초보를 보여주세요
그리고 자꾸 선조님 휘자에 공을 붙이시는데 이는 잘못된거 같습니다.
公字는 남자의 姓이나 아호 또는 諡號나 관직에 붙여서 쓰는 존칭입니다.
崔公, 莊景公(藏景公:한문틀림), 중서령공...처럼 맞게쓰면 어색하지 않지만
선조님들의 휘자에 아무렇게나 붙여쓰면 어색하지 않나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