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대한민국의 유명한 패션 디자이너 앙드레 김이 타계했다, 연세가 많아
자연사 하였으므로 크게 놀랄 일은 아니었다,
내가 놀란 것은 그가 한국의 국민 디자이너로
어떻게 그리도 오래 군림내지는 존경을 받아 왔을까 하는 것이었다,
김세린으로 말할 것 같으면 도대체 그의 옷들은 우리가 평시 입을 수 없는 옷들만
지어내고 있어서 앙드레 김의 옷은 정말로 '패션을 위한 패션 옷'이라는 관념을
지울 수 없었기 때문이다, 요즘처럼 일하는 여성들이 많은 시대에
풍성한 우아한 옷들은 실생활의 유용도와는 거리가 멀었다,
단출하고 시크한 의상이 현대 여성에겐 좋은 것이다,
그러나 앙드레김의 옷은 그에 아랑곳 않고 대개 풍성하다,
그의 옷들은 자수를 놓기도 하는데 그것은 아름다웠다,
그러나 그런 옷을 입고 어떻게 현대 여성들이 사무실에서 일 할 수 있겠는가,
이런 점에서 그의 의상들은 어떤 의미에서 현대적 일하는
여성들의 복장과는 아무 상관이 없었다.
나의 관념이 이러니 앙드레김이 디자이너로서 긴긴 장수 성공과 인기비결은
늘 하나의 놀라움이었다, 이제 그가 타계하여 한국국민들이 모두 아쉬워하고
그를 칭송하며 국가마저 무슨 훈장 하나 하사하고...
여러가지 그에 대한 일화들이 쏟아지고 있었다,
그래서 마침 나는 그가 어떤 '인간'이었는지를 짐작 할 수 있는 정보를 만났다,
알고보니 한마디로 그는 참 모범적 인간, 시민, 프로라는 사실을 금방 알았다,
존경 할 만한 어르신이었던 것이다.
*너무나 '촌스런' 본명 '김봉남',
생년월일 1935년 8월 24일, 출생지 경기도 고양군 신도면 구파발리 22번지(
현재 서울 은평구 구파발), 구파발에서 농사를 짓던 김진산(金辰山)씨의
5남매 중 넷째, 고양군 신도초등학교를 나와 고양중학교에 다니던 중
6·25가 나자 온가족이 부산으로 피난을 떠나 그곳에서 한영고등학교를 졸업
키는 178cm, 혈액형은 A형, 좋아하는 음식은 김치찌개와 된장찌개,
종교는 불교, 유족으로는 1982년 입양한 아들 중도씨(30)와 며느리 유은숙씨
그리고 세 명의 손자가 있다,
1999년 당시 이른바 고급옷 로비 청문회에서 앙드레 김은 우리 한국사람들을
단박에 확실히 웃겼다, 옷로비 의혹사건 진상조사 청문회에서 밝혀진 앙드레 김의
본명이 '새 봉(鳳)자, 사내 남(男)자 김봉남'이라는 사실!
앙드레라는 이국적 이름과는 대조적으로 너무나 촌스런 이름
'김봉남'은 여전히 대한민국을 웃게 만든다,
그날 청문회에서 앙드레 김이 "앙드레 킴입니다"라고 답변하자
목요상 법사위원장이 본명을 얘기하라고 말했고, 김씨가 "김봉남입니다"라고
대답하는 순간 방청석에서는 폭소가 터졌다,
정형근의원: 어떻게 해서 앙드레 김이란 이름을 갖게 되셨습니까?
김봉남:제가 60년도부터 디자인 공부를 하고 있을 때 프랑스 대사관의
외교관께서 세계적인 디자이너가 되기 위해서는 한국의 성은 간직해도
이름은 부르기 쉬운 이름으로 앙드레라고 하면 어떻겠느냐 해서
앙드레 김으로 되었습니다,
그 폭소는 지금도 진행중이다, 적어도 김세린에게는 그렇다,
그런데 이 청문회를 계기로 앙드레 김은 자신을 더욱 더 알리고,
애국적이며, 모범 성실 납세자 시민임을 알렸다,
마치 위기를 기회로 만드는 도사이듯이, 할아버지 앙드레 김의 존함이 알려
지자 세상은 더욱 웃고자 하였다,
"앙녕하세요- 드자이너예요- 래이름은요- 김봉남이에요"라는
'앙드레 김 4행시'까지 등장했다,
야당의 정치 공세로 시작된 옷로비 청문회, 사람들은 청문회에 나와서도
한결같은 그의 언행을 보고 더 친근감을 느끼게 되었으며,
무엇보다도 어린이들이 천진난만한 할배 앙드레 김을 알아보고
사인을 요청할 만큼 스타가 되었다고 한다,
오히려 패션디자이너 로서는 보기 드물게 그는 서민대중으로부터도
사랑을 받는 '국민 패션디자이너'로 거듭났다는 것,
또 청문회 이후 속옷, 화장품, 아동복 브랜드 등에서
사업제안이 쏟아져 들어와 그와 라이선스 계약을 맺을 만큼 사업영역이
확장되었으니,외려 그 청문회는 앙드레 김을 위한 정치쇼처럼 보인다,
이렇게 개인적 위기마저 기회로 바꾼 앙드레 김은 실생활에
서는 평생 동안 한결같은 노력과 꿈을 추구한 것으로 보인다.
* 'NQ(인간관계지수)의 달인'
20여년 전에 패션 담당 기자로 그를 처음 만난 후부터 그에 대한 경이로움과
존경심을 항상 간직하고 있다는 유인경 기자는 그에 대한 첫인상을 이렇게 적었다,
"처음 만났을 때도 그는 겨우 20대 초반의 신참 여기자에게
두 손을 모아 깍듯하게 인사를 했으며 패션 촬영을 나갈 때는 의상과
액세서리는 물론, 모델과 스태프들이 먹을 도시락까지 직접 준비해 나타났다,
'밖에서 파는 음식을 잘못 먹어 모델이나 기자분들이 배탈 나면 안 되죠'라며
그는 집에서 말아 온 김밥을 꺼내 놓아 감동시켰다,
그토록 겸손한 태도와 완벽하게 주변을 챙기는 모습은
칠순이 된 지금까지도 변함이 없다."(칠순의 현역, 앙드레 김의 롱런 비결,
월간 <징기스칸> 2004년 5월호)그는 한번 맺은 인간관계를 매우 잘 유지하며
타인들끼리도 서로 좋은 관계를 맺어 주려고 노력하는
'NQ(인간관계지수)의 달인'이었다는 것.
* 성실, 노력
"그는 매일 오전 5시 30분에 일어난다,
스포츠, 경제, 영자(英字) 신문을 포함한 17개의 신문을 구독한다는
그는 1~2시간 동안 신문을 훑어본다, 관심 분야는 따로 스크랩도 하고
지인(知人)들의 동정도 챙긴다,
단골 고객, 친한 사람들과 관련된 기사가 나오면 직접 전화를 걸어
'축하해요'라거나 '속상하시겠어요' 등의 인사를 나눈다,
그래서 신문이 안 나오는 일요일이 너무 싫지만
'기자들도 쉬어야지' 하고 참는다고 한다.
서울 강남구 압구정동 그의 집에는 다섯대의 TV수상기가 있어
늘 네 개 공중파와 한 개 케이블 방송을 모니터 한다,
드라마, 쇼 프로그램, 광고 등을 모니터 하면서 누가 현재 인기가 있으며
앞으로 가능성이 있을지 파악한다, 그의 패션쇼에는 항상 당대 최고 인기를
누리는 톱스타들과 앞으로 성장 가능성이 있는 신인 스타들이 함께
등장하는데 부지런히 TV를 본 그의 안목 덕분이다,
나는 어떤 신문기자나 방송사 간부도 그이처럼 많은
신문을 꼼꼼하게 챙기고 여러 방송을 모니터 하는 것을 본 적이 없다
*끊임없는 공부
앙드레 김이 영어를 잘했다는 사실은 오늘 김세린을 가장 놀라게 한 대목이다,
그는 옛날 사람이다, 1935년 생이다,
지금이야 다르지만 그 세대에 영어 잘했다는 것은 그가 공부파라는 사실을 입증한다,
학식과는 상관없는 직업인이었기에 더욱 돋보인다,
유학을 간 것도 아니고 그저 열심히 배우고 익히고 연습 했을 뿐이다,
영어를 잘하는 앙드레 김은 다음과 같이 영어 배운 내력을 말한다,
밤11시에서 다음 날 새벽 7시, 그 사이에 미국 통신부대에서 배웠다는 것이다,
"그런데 시골학교여서 그런지 아이들은 영어시간을 제일 싫어했어요,
선생님이 리딩을 하고 다음에 '읽을 사람?'하고 교실을 둘러보면
아이들은 선생님과 눈을 마주치지 않으려고 책 속에 얼굴을 파묻어버리곤 했죠
(그는 이 장면을 설명하면서 스케치노트를 들고
직접 얼굴을 가리는 흉내를 내며 웃었다) 그때도 저는 필링을 살려서 시적으로
읽는 것을 좋아했기 때문에 언제나 제일 먼저 손을 들고 영어책을 읽곤 했지요,
이제 기억나는데요, 부산 피란시절에 저는 미군 통신부대에서
아르바이트를 한 적이 있어요, 학생들이 3교대로 일을 했는데,
저는 밤 11시에 가서 아침 7시까지 일했지요,
그 시절에 영어실력이 많이 늘었던 것 같아요,
나중에 외국인들과 대화를 나누는 데도 불편함이 없었구요".
앙드레 김은 그의 good한 영어 실력으로 외국인들과도 잘 통했고,
친분도 쌓았고, 해외패션도 성공적이었는 것 같다,
해외에 나가 패션쇼를 통해 우리 문화의 우수함을 전파했으며,
주한 외교사절들이 부임할 때는 축하 꽃다발을 보내고 이임할 때는
석별파티를 열어주는 등 민간 외교관 역할도 톡톡히 했다.
그의 디자인의 예술성을 먼저 알아본 것도 외국이었다,
그는 패션의 본고장인 이탈리아에서 대통령 문화공로훈장(82년)을
받을 것을 시작으로 해서 한국정부의 화관문화훈장(97년),
프랑스정부 예술문화훈장(2000년) 등을 수상하였다.
* 모범성실 납세자 표창받은 '성실시민'
그는 애국자였다, 절세와 탈세의 경계선을 줄타기하는 고관대작들보다
더 정직한 삶을 살았다, 앙드레 김은 2005년 제39회 납세의 날에
모범성실 납세자로 선정되어 국무총리 표창을 받았다,
국세청은 세무조사 결과 앙드레김 의상실이 최근 3년간 매출누락, 가공경비
계상, 위장-가공 세금계산서 수수사실이 전혀 없고 장부를 성실히
기장했음을 높이 평가하였다.
그는 축하인사를 받고서 기쁨을 착하게도 표현한다,
"오우, 여러 가지 상을 많이 받았지만 참 기쁘고 뿌듯해요,
당연히 해야 하는 일이고 남보다 세금을 많이 낸 것도 아니어서
상을 받을 줄 몰랐거든요"
* 패션오페라'의 장인 앙드레 김은 백남준이 '비디오아트'라는
예술장르를 처음 만든 것처럼 '패션오페라'라는 새로운 장르를
개척했다는 평가를 받는다고 한다.
* 애국자, 앙드레 김은 그의 의상에서 국산천만 사용하고
모피를 전혀 사용하지 않는 '애국자'였다,
모피는 대체로 밀수품이라 사용안했다는 정직성을 보여 준다,
그리고 그의'엘레강스하면서도 우아하구, 판타스틱하면서도
환상적인' 의상들이 의외로 초고가 사치품이 아니었다.
앙드레 김의 옷은 "평상시 입는 정장은
135만원, 155만원, 180만원, 190만원, 200만원까지 있고,
200만원 이상 되는 것으로 이브닝드레스나 음악회를 위한 의상,
웨딩드레스가 있다"면서 "그것은 보통 250만원, 290만원 정도다"고 대답했다,
"800만원짜리 1000만원짜리는 없느냐"는 질문이 이어졌지만
그는 "그것은 아닙니다, 전혀 아닙니다"라고 강하게 부인했다.
결국 로비의 대상이 된 김태정 장관의 부인 연정희씨의 옷값 2400만원
의혹은 연씨가 딸 혼수용으로 장만한 옷값 250만원이 10배쯤 부풀려진 것으로
사실상 밝혀졌다.
"저는 처음부터 주한외교사절단을 대상으로 패션쇼를 했고,
그래서 한국적인 것을 보여주고 싶었기 때문에 옷감도 국산만 썼어요,
그리고 밀수품을 취급한다는 것 자체가 전혀 싫고요, 그래서 저는 지금도
모피를 하지 않아요, 모피는 밀수품인 경우가 많으니까요,
그리고 실루엣 디자인 뿐만 아니라 디테일하게 수를 놓아 옷감을
디자인하는 것도 저에게는 즐거운 일이지요."
* 앙드레 김은 동성애자가 아니다?
평생 독신이었던 '앙드레 김은 아마 동성애자일 것이다'는
세간에 그는 프로페셔널리즘으로 반박하였다,
젊은 시절 앙드레김 모습을 보면 178cm의 큰 키에 이목구비가 뚜렷한 미남,
결혼을 왜 안했는지 질문에 일하고 성공하기 위해서 안했다는 것이다,
"그런 질문을 하는 분들에게 제가 꼭 드리고 싶은 말은요,
여자의상을 만드는 남자디자이너로서, 이성을 너무너무 좋아하게 되면
성공을 할 수 없다고 생각해요, 그 이유가요, 항상 여성들을 대해야 하는데
손님 중에는 매력적인 손님도 있고 패션쇼, 화보촬영을 하면서 아름다운 모델,
아름다운 연예인을 가까이서 자주 보게 되는데, 이성을 너무 좋아하게 되면
일도 못하게 되고 디자이너로서 이미지도 나빠지는 것을 많이 보았어요."
* 독창성 유지위해 외로움을 이겼다
자신만의 독창적인 패션세계를 추구하기 위해
앙드레 김은 외로움을 이겨냈다고 말했다,
"남들은 인생의 반쪽을 여인에게서 찾지만,
나는 이미 패션에서 그 반쪽을 찾았다" 평소에 고인이 지인들에게 하던 말이다,
“전 룸살롱도 노래방도 가본적이 없어요, 포커나 고스톱도 할줄 몰라요,
결혼도 하지 못했어요, 한 여인의 남편이 되어 사랑을 나누지도 못했지요,
저에겐 자유롭고 소박한 삶이 없어요, 내가 동네 중국집에 가서
자장면 한 그릇만 먹어도 사람들 사이에서 이야깃거리가 되니까요,
하지만 저의 독창적인 세계를 지켜가기 위해서는 외로움을 이겨내야 해요.”
* 앙드레 김의 묘비명
그에게 묘비명을 미리 쓴다면 뭐라고 쓰겠냐고 기자가 물었다,
그는 이렇게 답했다,동아일보 13일 보도에 따르면, 앙드레 김은 8년전
자신의 묘비명을 두고 “오우…. 글쎄요..
20세기라는 과거에서 태어나 21세기라는 미래까지 활동한
패션 디자이너 앙드레 김은 유행에 연연하지 않고
동양의 에스프리가 담긴 독창적인 세계, 순수한 영원의 세계를 추구했다’고요”
앙드레 김은 동양의 에스프리가 담긴 독창적 패션을 추구하며
영원을 꿈꾸던 예술가였던 셈이다,
그는 프로정신에 충만하였던 사람이었다, 명복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