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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혈 영화팬과의 뜨거운 문답2 - 김지운, 박찬욱 편
젊은 감독, 관객을 만나다
장진, 류승완 감독에 이어 수요일, 목요일의 남자가 된 김지운, 박찬욱 감독. <씨네21> 창간 7주년을 기념하는
행사로 마련된 ‘젊은 감독과의 대화’는 마지막날까지 가득 찬 객석으로
관객의 관심을 입증시켜주었다. 아트선재센터 앞에 삼삼오오 모여 있는 어떤 무리는 4일을 모두 채웠다고 했고,
평소 흠모하여 마지않던 ‘감독님’을 만나기 위해 월차를 내서 왔다는
회사원도 있었다.
한편 감독들은 각자 비밀루트를 통해 전날 어떤 수위의 질문이 오고 갔는지를 확인한 뒤 마음의 갑옷을 단단히 채워왔고 관객은 오랫동안 장진해 놓았던 질문들이 다시 제자리로 돌아갈까봐 여기저기 손을 들어 총알을 날려댔다. 가끔은 “혈액형이 뭐예요?” 같은 스펀지형 총알에서 ‘호두 이론’까지 들먹이며 전작에 날카로운 평가를 내리는 초강력 총알도 있었다. 하지만 누구도 부상당하지 않았다. 솔직하고 담대했지만 자체 치유기능까지 갖추었던 이날의 대화에는 혹시 하는 마음에 ‘빨간약’까지 준비하고 있던 주최쪽만 심심할 뿐이었다. 편집자
백수 고수 김지운, 센시티브했던 유년기를 털어놓다 (1)
“살면서 `이게 뭘까`하는 느낌을 잊지 마세요”
안녕하세요. 김지운이에요. 들어오다 잠깐 들었는데 ‘야, 진짜 선글라스 썼네’
그러시네요. 사실 제가 낯을 많이 가리고… 눈을 어디다 두어야 할지 몰라서요…
선글라스… 양해부탁드립니다. 먼저 절
모르시는 분들도 많을 테니 제 소개부터
하죠. 저는 서울에서 몇 안 되는 서울 토박이고 할아버님 본적이 중구 삼각동이에요. 그 동네가 일제시대부터 양복점인지,
포목점이 많은 동네라 할아버님도 그런
일을 하셨나봐요. 저는 태어나기는 홍제동에서 났어요, 잠깐만 옷 좀 벗을게요.
(윗옷을 벗자 ‘우우∼’ 하는 환호성이
터져나왔다. 김지운 감독, 당황하며) 이런, 다 벗는 건 아니에요. (웃음) 어제 류승완 감독이 땀이 많이 날 거라고 하던데
정말 땀이 많이 나네요….
#1 유년기
어떻게 영화감독이 되었을까를 생각해보면 아마 유년 시절에 대한 기억이 많이 작용했던 것 같아요. 저는 3살 때부터 그림을 그렸어요. 동네 친구들한테 돈 받고 팔기도 하고, 가끔은 그냥 주기도 하고. 전설처럼 내려오는 이야기는 제가 식음을 전폐하고 밤낮으로 그림을 그렸다는 거예요. 부모님이 걱정을 많이 하셨죠, 애가 밥도 안 먹고 그림만 그리니까. 하루는 식구들이 불을 다 껐어요. 그래도 제가 울면서 달밤에 그림을 그렸다, 는 믿거나 말거나 하는 이야기가 있죠. (웃음) 그리고 아버님이 차마 절 때리지는 못하시니까 그 그림을 다 찢었어요. 울면서 찢겨진 그림을 이어붙였죠. 아마 그때부터 편집 감각을 키웠던 것 같아요. (웃음)
그러다 큰 사고가 있었어요. TV 수사드라마에서 어떤 사람이 고문을 당하는 장면이 있었는데 그걸 보다가 제가 쇼크를 받아서 기절을 한 거예요. 병원에서, 이 아이는 현실이 아닌 가상의 세계를 현실로 받아들이는 정도가 다른 아이들보다 예민한 것 같다고 했대요. 그뒤 다량의 약을 먹었는데 어머니에게 무슨 약이냐고 물어보면 ‘용가리 통뼈약’이라고 하셨어요. 사실 무슨 영양제였을는지도 모르지만 저는 지금도 그 약이 나의 감각이나 감성을 죽이는 신경안정제가 아니었을까 하고 생각하고 있어요.(웃음) 그러다보니 저는 제 자신의 유년기에 대한 콤플렉스가 있어요. 유년기에는 지금보다 대상에 대해 더욱 열정적이었고 센시티브하지 않았나, 하는 것 말이죠. 그래서 어린 시절 있었던 일이 너무 생생하게 기억나고 유년에 대한 집착이 강해요.
이런 이야기를 왜 하냐면 타르코프스키가 <봉인된 시간>이란 책에서 ‘영화란 것은 기본적으로 노스탤지어가 있어야 하는 것’이라는 말을 했는데, ‘봉인된 시간’, 시간을 공간화시킨다는 개념에서 이 말은 영화라는 매체의 속성을 잘 설명한 것 같아요. 제가 지냈왔던 유년에 대한 향수, 만화를 그렸던 감수성, 가상의 세계를 현실적으로 받아들이는 이상증세, (웃음)집이 기울어져서 자주 이사를 다니면서 바뀌는 환경에 친구가 없어 늘 혼자 지냈던 기억, 혼자 지내는 사람의 특성 중 하나는 상상력이 풍부해지고 낯선 사람에 대한 호기심과 관심이 민감한 것이잖아요, 그런 모든 것들이 지금의 저를 만든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어요.
#2 백수 시절
중고등학교 때는 운동을 열심히 했어요. 그런데 학교에서 서클에 들라고 했어요. 폭력서클이었는데(관객웃음) 그곳에서 폭력을 행사하면서 학창 시절을 보냈죠. 그리고 군대를 갔고. 이후 군대를 포함 10년 가까이 백수 생활을 했어요. 사실 저는 제가 끝까지 백수로 살 거라고 생각했거든요. 그렇게 힘들지는 않았어요. 물론 돈이 없어서 불편하긴 했지만. 그러니까 서른세살까지 백수 생활을 했죠. 사실 그게 1∼2개월이 제일 힘들죠, 2년 정도 지나면 리듬이 생겨요. 백수 리듬을 타게 되면 사람이 참 부드러워지고 유연해지죠. 성취욕 그런 게 없으니까 뭐 특별히 급할 것도 화낼 것도 없어요. 일생에서 직업적으로 제일 길 게 한 것이 백수인데 아마 감독이란 직업도 영화 안 찍을 때는 도로 백수일 수 있어서 선택한 것 같아요. 지금 여기 오신 분들 중에서도 그런 직업군에 속한 분들이 계실 텐데(웃음) 급하게 생각하지 마세요. 이건 나중에 돈으로 사려고 해도 살 수 없는 시간이거든요.
저는 시나리오를 빨리 쓰는 편이거든요. 이렇게 시나리오를 빨리 쓸 수 있는 건 아마도 다년간 쌓아온 ‘백수 공력’이 아닌가 싶어요. 백수 때 많이 보고 잘 놀고 10년간 받아들이기만 하고 한번도 쏟지 않았던 창착욕구, 한번에 다 쏟아져 나오는 거란 생각이 들어요. 이런 유년기와 백수기가 저에겐 감독이 될 수 있는 정신적인 자양분이었던 것 같아요.
기술은 미학에 복종해야 한다고 생각해요
사회자: 관객이 질문을 준비하실 동안 한 가지만 묻겠습니다. 뛰어난 예술가들을 보면 공통점이 있는데
대부분 상태가 안 좋은 어린 시절을 보냈다는 거죠.
(웃음) 폐인이 될 만한 충분한 요건이 있었던 사람이
감독이 되어서 참 다행입니다. 자기 속의 감당할 수
없는 에너지가 폐인도 만들고 예술가도 만드는데, 감독님에겐 그 에너지를 생산적인 쪽으로 전환시킨 계기가 있으셨는지요.
김지운: 글쎄요. 폐인이 되고 안 되고는 좀더 지켜봐야 하지 않을까요? (웃음) 얼마 전 완성한 <메모리즈>는 3개국 감독의 작품을 모은
건데, 홍콩편은 진가신 감독이 찍었어요. 이 작품 촬영은 왕가위와 오랜 작업을 했던 크리스토퍼 도일이 맡았는데 이 사람, 정상이 아니에요. 하루에 2, 3시간밖에 안 자고 밥도 안 먹고 만날 맥주만 먹어요.
그냥 길거리에서 보면 정신병자구나,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요. 그런데 이 사람이 하는 건 예술이거든요. 카메라의 무빙이나 색감, 톤, 앵글이 장난이 아니에요. 시나리오를 쓰다가 가끔 졸려서 자야지 그러거나, 담배 그만 피워야지 하는 순간엔 도일을 떠올려요. 엄살을 피울
필요가 뭐가 있을까 그냥 빨리 죽자 하는 생각, 앗 그러고보니 답이 딴
데로 샜군요. 아마도 10년 백수 생활 동안 좋은 영화를 많이 보았기
때문이 아닐까요?
관객: 저도 시나리오를 쓰는데 다 썼다고 덮고 나서도 이게 관객에게
어떻게 다가갈까 전혀 감이 안 오거든요. 아까 시나리오를 빨리 쓴다고 하셨는데 감독님은 시나리오를 쓰고 나서 자신의 작품에 대한 확신이 바로 드시나요? 또 첫 번째 시나리오인 <조용한 가족>은 교통사고 내고 돈이 급해서 썼다고 들었는대요.
김지운: 교통사고는 제가 낸 게 아니라, 차가 낸 거죠. (웃음) 워낙 상태가 안 좋은 차였는데 그날 말을 안 듣더라구요. 사실 처음 시나리오를 쓴 건 <조용한 가족>이 아니라, 프리미어에서 당선된 <좋은 시절>이라는 시나리오였어요. 2년 정도 여자친구와 사귀면서 그동안 몸에
익어온 백수 리듬이 많이 흐뜨러졌는데 여자친구랑 헤어지고 나니 시간이 너무 많이 남아서 할 일이 없더라구요. 그래서 이 시간에 뭐하나
하다가 시나리오를 써보자 하고 썼던 게 <좋은 시절>이었어요. 지금도 그렇지만 영화를 할 때는 조금이라도 현실을 잊을 수가 있어서 좋은 거거든요. 자연스럽게 실연의 아픔을 느낄 틈도 없이 시나리오에
몰입했어요. 그러던 차에 교통사고가 났고 목돈이 필요했어요. 별로
돈에 구애받지 않고 살았는데 돈이라는 게 자기 앞가림을 하기 위해선 필요한 거더라구요.
처음 쓴 시나리오가 우연히 공모에 당선되고 뭐 다른 시나리오 공모가 없나 찾던 차에 식당에 아줌마가 라면을 쟁반 대신 <씨네21>에 받쳐서 가져오시더라구요. (웃음) 거기에 ‘시나리오 마감 일주일 전’이라고 써 있었는데 그걸 보고 <조용한 가족>을 쓰게 되었죠. 어쨌든 전 시나리오를 즐겁게 쓰는 편이에요. 고통스럽게 쓴다고, 쥐어짠다고 되는 건 아닌 것 같아요. 고민해서 안 나오는 건 나한테 없는 거라 생각해요. 시나리오를 빨리 쓰는 건 완성의 의미가 아니라 다른 이들에게 어떤 이야기를 어떻게 찍겠다는 것을 빨리 알리는 의미인 거죠. 진짜 시나리오는 현장에서 오케이 사인이 나오는 순간까지 다시 쓰여질 수 있는 거라고 생각해요. 늘 모든 영화의 신들은 현장의 다변적인 요소들과 화학적 반응을 일으키니까요.
관객: 저는 극작과 학생입니다. 시나리오를 쓰실 때 어떻게 소재를 찾나요? 그리고 정신병자와 예술가의 차이는 결국는 정상인으로 돌아나올 길을 아느냐, 모르느냐의 차이인 것 같아요. 어떻게 기나긴 백수 생활을 접고 감독이란 통로를 찾으셨는지 궁금하네요.
김지운: 눈을 뜨고 눈을 감을 때까지 내가 겪은 모든 일들을 작품의 원천으로 삼는 편이에요. 특히 그림이나 사진에서 아이디어를 많이 받아요. 사진이나 그림을 보면서 그 사진의 앞 혹은 뒤의 상황들, 그곳에
감춰진 이면을 상상하는 것을 좋아하는 편이죠. 나의 인격이란 것이
그렇게 되어 있나봐요. 감독이 된 동기는 앞에서 자세히 말씀드린 것
같고, 워낙 어릴 때부터 영화를 좋아하긴 했어요. 하지만 영화를 좋아하는 것과 영화를 하는 것은 큰 차이가 있는것 같아요.
정말 차원이 다르죠. <매트릭스>에서 피시번이 ‘케이크를 보는 것과 맛보는 것은 전혀 다르다’는 명대사를 하는데 정말 그래요. 감독이 되기 전 캠코더 한번 들어본 적이 없는 저는 미학이 기술보다 우선해야 한다고 기술은 미학에 복종해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이에요. 감독은 또다른 세상을 그리는 판타지만 품고 있으면 된다는 생각이 드는데요. 예술이란게 판타지를 세상에 어떤 현실물로 구체화하는 전과정이라면 좋은 판타지만 가지고 있으면 그것을 기술이 도와준다 이렇게 생각하는거죠.
백수 고수 김지운, 센시티브했던 유년기를 털어놓다 (2)
“살면서 `이게 뭘까`하는 느낌을 잊지 마세요”
“지나간 영화는 ‘떠나간 옛사랑’ 같아”
관객: 감독님은 몸가는 대로, 마음가는 대로 사는 분인 것 같아요.
김지운: 예? 몸가는 대로
살지는 않는데요.
관객: 아니, 그런 말이 아니라 가족의 반대와 걱정도
많으셨을 텐데 어떻게 이겨내셨는지가 궁금하다구요.
사실 저는 감독님을 잘 모르거든요. 그런데 오늘 여기서 뵈니까 멋진
분인 것 같아요. 혈액형과 별자리와 좋아하는 이성스타일과 동성스타일을 말씀해주시겠어요?
김지운: 저… 딱히 동성을 좋아하진 않구요. (관객웃음) 집안에서 걱정을 많이 하긴 했지만 저는 걱정이고 뭐고 그냥 밀고 나가는 편이에요.
물론 부모님 하시는 말씀은 틀린 게 하나 없는데 늘 말보다는 그 말들의 관계 속에서 스트레스를 받는 거잖아요. 저는 그냥 쿨하게 받아들였던 것 같아요. 물론 서른이 넘었는데 다 큰 아들이 집에만 있으니 어머님이 “공무원 시험이나 봐라, 동회 같은 데서 일하면 얼마나 좋은
줄 아냐”, 그러시면 “아… 예” 하고 아무것도 안 했어요. 그러다가
시나리오 당선돼서 “엄마, 나 시나리오 당선됐어” 하니까 “이놈이
이제 거짓말까지 하네” 그러시더라구요. (웃음) 심지어 <조용한 가족> 찍을 때까지도 당신 아들이 감독이 된 것도 모르셨어요. 촬영중에
삐삐가 와서 전화를 하니까 “너 요즘 뭐하고 사는데 집에도 안 들어오는 거냐” 하시더라구요. (웃음) 저는 그렇게 생각해요. 어른들 말
새겨듣는 건 좋지만 결국엔 자기 생각하는 대로 사는 게 좋은 것 같아요. 잘못 들어선 길이 지도를 만드는 법이니까요. 그리고 뭐 물어보셨죠? 아! 혈액형? 혈액형은 O형이구요. 별자리는 게자리고 생일은 칠월칠석 전날인 7월6일이라, 직녀 같은 여자가 제 이상형이에요. 저는
색깔이 있으면 모든 색이 다 예뻐 보이거든요. 여자도 마찬가지인 것
같아요, 모든 여자들이 다 저마다의 아름다움이 있죠.
관객: <조용한 가족>을 보았을 때 히치콕이 연상되면서 아, 우리나라에도 저런 작품이 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습니다. 감독님은 한 영화를 끝내고 나면 자신의 작품에 대해 스스로 평가를 하는 편이십니까?
아니면 끝내면 다음 것 하느라 그전 것에는 관심이 없으신가요.
김지운: 저에게 지나간 영화는 ‘떠나간 옛사랑’ 같은 느낌이에요.
원망이나 감정은 있겠죠. 왜 내가 좀더 잘해주지 못했을까, 왜 내가 그런 짓을 했을까. 그런 미련들이지 평가를 하진 않아요. 예를 들어 지난해에 헤어진 얘는 7점 정도, 지지난해에 헤어진 얘는 한 8점 정도 그러진 않잖아요.(웃음) 저 역시 <조용한 가족>은 한 8점 정도니까 열심히 해서 9점 넘겨야지 그러진 않는 거죠. 그때의 감성과 그때의 최선의 태도로 만들었다는 생각이 들고 혹시 그 의도와 생각이 다가가지
못한 느낌이 있더라도 그것 역시 그때의 나라는 생각으로 받아들여요. 그저 서서히 좋아질 거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다음 것을
할 수 있는 거죠. <조용한 가족>을 끝내고 드라마가 부족하다는 말을
들었고 드라마를 생각하며 <반칙왕>을 찍었고, 그 작품을 끝내고 여성캐릭터가 부족하다는 생각을 해서 <커밍아웃>을 찍었고, 좀 진지했으면 좋겠다는 말에 <메모리즈>를 찍었죠. 아까 떠나간 연인 같다고
했는데 지난 사랑에게 못해줬던 아쉬움을 다음 연인에게 잘해줘야지,
하는 생각과 같은 거죠.
관객: 한겨레문화센터에서 수업 들을 때부터 하고 싶었던 질문인데요. 감독님은 브레송이나 파졸리니, 타르코프스키를 좋아한다고 들었는데 그들을 좋아하는 이유는 감독님의 삶의 철학이나 종교적 관점이
그들의 영화가 닮아 있기 때문인가요, 아니면 미학적인 측면인가요.
또한 코미디를 만드는 비결 같은 게 있으신가요.
김지운: 음, 먼저 종교적 관점은 아니구요. 그들의 영화마다 인상적인
장면들이 있는데, 그 장면들은 무언가 설명할 수 없는 슬픔들을 담고
있어요. 저는 영화를 보며 슬픈 느낌 받는 걸 좋아하는데, 그들의 영화를 보면서 내가 슬퍼지는 이유가 뭘까. 하는 질문을 하게 되죠. 예를
들면 브레송의 <부드러운 여인>이나 아녜스 바르다의 <행복> 같은 작품들을 보며 내가 왜 슬퍼졌을까, 두 영화가 슬픔의 감정을 드러내는
부분은 하나도 없는데 말이죠. 반대의 이미지들을 조합해 그 반대의
것들을 도출해내는 마력이랄까. <행복>의 행복한 결말을 보면서 인간이 행복을 추구하는 데 이렇게 잔인해질 수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며
슬퍼했고 <부드러운 여인>은 극히 평범한 개인의 영혼이 한 고결한
영혼을 어떻게 망가트려 비극적인 결론으로 이끌고 가는가에 슬픔을
느꼈어요.
아마도 그런것들을 저는 피할 수 없는 운명적인 것으로 받아들이는 것 같아요. 사실 제가 지금까지 만든 영화들이 모두 코미디의 범주에 들어가지만 저는 코미디영화를 안 보고 별로 좋아하지도 않거든요. 코언 형제, 짐 자무시, 우디 앨런, 아키 카우리스마키, 팀 버튼, 코미디가 강한 감독 중엔 멜 브룩스 정도? 사실 <조용한 가족>도 코미디라고 생각하진 않았어요. 코믹과 호러를 변주한 영화였는데 상업영화의 틀을 가져오는 과정에서 잔혹한 장면이 많이 빠지고 코미디만 불거져 나온 거죠. 코미디를 고집하진 않아요. 오히려 ‘모든 것이 다 웃길 수가 있다’고 생각하는 편이죠. 난 코미디를 만들 때도 늘 슬프다는 생각을 해요. 최민식씨가 <조용한 가족> 첫 시사후에 “강호야, 세상살기가 이렇게 힘든 거야”라고 하는데, 너무 쉽게 할 수 있는 이야기지만 정말로 듣고 싶은 이야기였어요. 이 영화는 원하는 방식으로만 삶이 흘러가지 않는다는 슬픈 현실을 장르 위에 얹어놓은 영화였거든요.
“문법이 없었기 때문에 자유로웠죠”
관객: <씨네21>에 연재하신 숏컷 칼럼을 보며 팬이
된 사람입니다. 숏컷을 보고 비디오로 뒤늦게 <조용한 가족>을 보았는데 어떻게 그때 이런 영화를 만들었을까 하는 생각을 하면 감탄했거든요. 사실 1, 2년
전에 ‘엽기’라는 말이 유행했는데 그때 <조용한
가족>이 나왔으면 더 흥행할 수 있었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감독님은 지금은 아무도 몰라주지만 3, 4년 뒤에 사람들이 깜짝 놀랄 만한 작품을 만들고 싶으신지, 아니면 딱 반 발짝만 앞서가서 흥행과 비평, 두 마리 토끼를
다 잡는 감독이 되고 싶으신지 궁금하거든요. 그리고 칼럼을 다시 쓰실 생각은 없는지….
김지운: <씨네21>에서 대답하셔야….
사회자: 게재할 계획이 없습니다. (웃음) 농담입니다. 사실은 1년도 못
채우고 9개월인가 지나서 못 쓰겠다고 하시는 걸 온갖 감언이설과 협박과 회유를 해서 1년 채우고 끝냈는데, 사실 김 감독님이 1년 동안
규칙적으로 그렇게 일정한 일을 한 건 태어나서 처음이라고 하시더라구요. 본인 스스로를 장하게 생각하신다고. 언제든 다시 쓰시기를 기다리고 있지요.
김지운: 숏컷을 썼던 한해는 내 자신이 가장 자랑스러운 한해였어요.
다시 쓰는 건 좋지만 <씨네21>이 워낙 원고료가 박해서….
사회자: 원고료 올렸습니다. (웃음)
관객: 영화를 꿈꾸는 후배들에게 해줄 말씀이 있는지….
김지운: 홍상수 감독이 ‘맨눈으로 봐라’라는 말을 하셨는데 그 말이 저에겐 선명하게 남았어요. 요즘엔 영화에 관한 정보량이 넘쳐나서 마치 자신이 보지 않은 것을, 느끼지 않은 것을 본 것처럼, 느낀 것처럼 말하는 경우가 있죠. 저두 그럴때가 있구요. 그런 건 한순간에 무너져내리는 거거든요. 정말 자기가 보고 느낀것을 자기 방식대로 이야기하는 게 중요해요. 그런 말은 귀에 쑥쑥 들어오거든요. 임상수 감독의 말투나 어법은, 그러니까 양아치 어법이란게 있는데(웃음) 그가
무슨 말을 하든 자기 속에서 체화되어 나오는 말이기 때문에 알아듣기가 편하고 재미있어요. 홍상수 감독 역시 심오하고 어려울 수 있는
이야기를 아주 귀에 쏙쏙 들어오게 얘기해줘요. 그것은 그들의 고통이 실재하기 때문이란 거죠. 아, 그러고보니 모두 ‘상수’네요. 역시
저는 ‘하수’인 걸 느껴요. (웃음)
관객: 시나리오를 공부하는 사람인데요. 공부하던 문법이 막상 시나리오를 쓰려고 하면 방해가 되는 경우가 종종 있습니다. 감독님에게는 감독님만의 문법이나 스타일이 있는지, 그리고 모든 매체가 그렇겠지만 이성적인 면과 감성적인 면 중 어떤 쪽에 비중을 두고 그런 면들을 어떻게 배분해서 작업하는지 궁금합니다.
김지운: 저는 이성, 감성이 어떻게 분리되는 것 같지도 않고 배분해야지 생각해본 적도 없어요. 사실 저는 영화공부를 하나도 안 했고 그래서 문법이란 걸 염두에 둔 적도 없어요. 영화만큼은 충분히 독학으로도 해결할 수 있는 분야라고 생각해요. 그저 살면서, 행동하면서 어떤
인상을 받으면 매순간의 ‘이게 뭘까’ 하는 느낌들을 잊지 않고 생각해요. 처음 시나리오를 쓰겠다고 생각했을 때도 음 이런 문법을 이렇게 적용해야지가 아니라, ‘그냥 내가 생각하는 영화를 글로 옮기는 과정’이었어요. 문법이 갖춰진 게 없었기 때문에 오히려 자유로웠던 것 같아요. 교육은 체제와 지배이데올로기에 귀속되어 있다면
예술은 그것을 뛰어넘을수 있다고 생각해요. 좋은 시나리오 교본이
있다는 말은 들어본 적 없는 것 같은데요. 좋은 이야기는 다 생활에 있다고 생각해요. 오늘 이 자리에 감독이나 시나리오 작가를 꿈꾸시는
분들이 많이 오신것 같은데요. 모두들 ‘생활의 발견’을 하시길 바랍니다.
사회자: 맺음말 겸해서 한마디 드리자면, 김지운 감독은 범인들이 보기에 얄밉습니다. 아무 생각없이 살다가 시나리오 썼는데 당선돼, 감독하라니까 감독해, 만들자마자 히트해, 두 번째 영화 찍어, 서울 200만 터졌지, 처음 칼럼이란 걸 썼는데 뛰어난 필자로 인정받아, 그것만이 아닙니다. 김지운 감독의 영화는 장사만 잘된 것이 아니라 두편 다
한국의 장르영화에서 앞서나가 있는 아주 혁신적인 장르영화라서 비평적으로 굉장히 높은 평가까지 받았잖아요. 진짜 얄밉죠. (웃음) 누구는 단 한 가지만 하려고 발버둥을 쳐도 너무 힘든데….
김지운: 내참, 이제 비밀을 말씀드려야 할 때가 온 것 같은데요. 사실
10년 가까이 백수 생활을 하면서 모진 핍박과 압박을 받으며 살아왔어요. (웃음) 어머니가 서른이 넘은 아들에게 모멸감을 주는 말을 왜
안 하셨겠어요. 그럴 때마다 매번 슬기롭게 헤쳐나갔던 거죠. 나 또한
공무원 시험봐서 나쁜 길로 갈 수도 있었는데,(웃음) 견뎌냈거든요. 그런 걸 이겨내는 건 딴 분들이 습작하는 것과 똑같은 에너지가 소비되는 거거든요. 어… 중간중간 어디 나와서 일해보지 않을래, 하는 유혹도 많았지만 어, 눈앞에 있는 작은 이익들에 연연하지 않고 흔들리지
않고, 어, 꿋꿋히 영화에 대한 꿈을 키워온 거거든요. 전 10년 동안 백수하면서 안 힘들었는 줄…(아아… 수습 안 된다) ……… 그만할게요.
(웃음… 박수)
정리 백은하 lucie@hani.co.kr·사진 손홍주 lightson@hani.co.kr
***
불평분자 박찬욱, 엉뚱한 영화에의 입문기를 고백하다 (1)
“연출부 100년해도 소용없어요, 좋은 각본을 쓰세요”
(‘젊은 감독, 관객을 만나다’ 4번째는 원래 장진 감독이 예정되어 있었다. 그러나 첫날 예정되었던 박찬욱 감독이 전주영화제에서 올라오는
도중 비를 만나 제시간에 도착하기
힘들게 되어 부득이 장진 감독과 시간을 맞바꾸게 되었다. 약속시간 약
15분 전, 어린 시절 자신을 사로잡았다는 영화 속 ‘스파이’처럼 짙은 색 선글라스를 끼고 나타난 박찬욱 감독은 ‘바꿔친 감독사건’의
원인제공자로서 사과의 멘트로 ‘나의 인생, 나의 영화’에 대해 입을
열었다.)
장진 감독을 만나러 온 분들에게는 죄송하게 생각합니다. 월요일에 전주에서 충분한 시간을 갖고 출발했는데 비가 쏟아지는 바람에 그만…. 다음 작품 때 <씨네21>이 혹평을 해도 받아들일 각오가 되어 있습니다. (웃음) 용서해주시리라 믿고, 제가 살아온 이야기를 할게요. 저는 1963년에 태어났어요. 부모 양가가 서울에서만 오랫동안 여러 대에 걸쳐 살아온 보기드문 서울 토박이인데, 그런 출생의 발견이 어려서는 콤플렉스 비슷한 것이었어요. 대개 위대한 예술가는 어느 나라를 막론하고 시골 사람이(웃음) 많잖아요. 서울 토박이는 깍쟁이, 예술가보다는 공무원이나 회사원이 어울릴 것 같구요. 어렸을 때 영화를 좋아하긴 했어요. 부모님이 영화를 좋아하시는 분이셨구요. 어머니도 영화를 좋아하셔서 당시 <동아일보>가 석간이었는데 저한테 주말영화 프로그램을 읽으라고 시키곤 하셨어요. 예를 들어 감독 앨프리드 히치콕, 주연 누구 하면서 읽으면 “아, 그 영화! 봐야지” 하곤 하셨죠.
저는 보통 우리 세대 동료 영화광들과는 취향이 달랐던 것 같아요. 제임스 본드의 영향이 컸고, 첩보, 스파이 영화에 소년다운 호기심을 가졌죠. 고교 때 영화라는 매체에 매력을 느껴 감독이 될 생각을 했어요. 그런데 영화판은 터프한 곳, 나약한 내가 할 수 없다고 생각해서 영화과는 지레 겁먹고 포기했죠. 왜 그렇게 겁이 많았나 몰라. (웃음) 예술에 가까운 다른 길을 해볼 수 없을까 생각해봤고 글재주는 좀 인정받았는데 가난하게 살아야 한대서…. (웃음) 미술에 관심이 많았고 작가는 되지 못해도 미술비평을 할 수 있겠다 싶었는데 미술비평과가 없어서 철학의 한 분과로 미학과를 가려다 주위의 조언으로 철학과를 가게 됐어요. 그런데 집안이 대대로 오래된 가톨릭 집안이라 서울대 아니면 서강대를 가야 하는 분위기야. 서울대는 못 갔고, 서강대를 갔는데 거기 철학과는 당시에는 미학에 전혀 관심이 없는 곳이었어요. 중세 교부철학에서의 미학, 할아버지 신부님의 토마스 아퀴나스 강의(웃음) 이런 것만 듣고 있으려니 못하겠더라구요.
백수 생활, 날품팔이 생활, 그리고 데뷔작
일찌감치 포기하고 동아리 활동에 취미를 붙였는데 영화와 그나마 비슷한 사진반에 들어갔어요. 서강대는 영화와 관련된 책들이 비교적 많은 학교였는데 그런 책들 뒤에 대여카드에 이름이 씌어 있잖아요. 근데 서강대는 작은 학교니까 빌려간 사람이 뻔하거든. 하나둘씩 만나기 시작했죠. 83년쯤에는 전국에 영화를 진지하게 공부하겠단 사람들이 많았어요. 정성일, 김소영, 그런 사람들 만나고 체계적으로 영화를 공부하면서 점점 깊숙이 수렁에 빠져들게 됐죠. 졸업할 때쯤 되니 막막했는데 친하게 지내던 친구가 현장에서 본격적으로 영화를 익히라고 충고해주더라구요.
이장호 감독님의 회사에 연출부 막내로 들어가 유영식 감독의 <깜동>을 했어요. 이장호 감독님은 엄청 다혈질이라 이런저런 고생을 했는데, 당시 연출부 세컨드하던 곽재용 감독이 “제작사 차릴 테니 조감독 해라” 해서 고속승진했죠. 같이 각본을 써서 <비오는 날의 수채화>라는 영화를 만들었어요. 근데, 곽재용 감독님은 또 이장호 감독님 저리 가라 할 만큼 다혈질이라서 좀 힘들었어요. 그래서 나왔는데, 그땐 이미 결혼도 한 상태라 살길이 막연하고…. 이렇게 끝낼 순 없으니 시나리오라도 한편 써보자 해서 처음으로 장편 시나리오를 혼자 썼어요. 그런데 써놓고보니 이런 재능을 충무로에서 나오게 하는 건 너무나 큰 피해다 싶어(웃음) 마음을 추스르고 작은 영화사에 취직했죠. 싼 외화 사다가 자막번역도 하고, 보도자료도 쓰고. 보따리장사 같은 것을 한 거죠. 그때 그 영화사에서는 영화를 할 수 있는 최소한의 제작비만 모이면 데뷔시켜주겠다는 약속이 있었어요. 고맙게도 제작자가 약속을 지켜주더라구요. 1억원이 조금 넘는 제작비로 영화를 만들었는데 그때는 데뷔만 할 수 있으면 뭐든 하겠다는 생각이었으니까 찍었죠.
당시엔 저예산영화라는 개념이 별로 없었고, 흥행은 해야 하니까 아주 토속적인 스토리에 형식은 이렇게 하면서 아주 현학적인 태도로 <달은 해가 꾸는 꿈>을 찍었어요. 주연배우는 영화사에서 이승철을 시키라고 해요. 당시 마약파동 때문에 인기는 있는데 TV 출연 못하니까 이럴 때 영화 만들면 얼마나 좋겠나(웃음) 이승철 아니면 안 찍겠다 하는 거예요. 선배 감독을 만나 고민을 털어놓으니까 데뷔 여부에 따라 대우가 달라지니 무조건 하라 그러더라구요. 그런데 이승철이 너무 바쁜 사람이라 도무지 만나주질 않는 거야. 촬영 전날 처음 만났어요. (웃음) 첫 마디가 “감독님, 줄거리가 뭐예요?” (웃음)
어쨌든 데뷔작은 실패하고, 그뒤로 오랜 백수 생활을 했죠. 글쓰고, 방송 출연하고 하는 날품팔이 생활. 그무렵에 이훈이라는 사람을 만났어요. 일찍 죽어서 여러분은 잘 모르시겠지만, 정말 싸구려 B급영화를 두편 만든 사람인데, 그 사람을 소개받아 미국서 사온 영화를 보면서 영화에 대한 생각이 근본적으로 바뀐 것 같아요. 살아 움직이고, 거칠고 엉뚱하고 유머러스한 영화의 세계를 안 거죠. 정말 나한테는 큰 영향을 준 친구예요. 이런 친구들의 영향이 <달은…>과 <삼인조> 사이에 있어요. 어쨌든 <삼인조>도 흥행이 안 됐고…. 내 영화로 만들고 싶은 아이디어는 너무나 많은데 계속 남의 영화만 갖고 이야기하고 있으니 못 견디겠더라고. 그래서 돈을 구해서 단편영화 <심판>을 하다가 명필름에서 <공동경비구역 JSA> 기획을 의뢰받아서 일을 시작했어요. 이 정도까지만 하고 질문을 듣죠.
모호함이 남아있는 영화가 좋다
잡지에서 읽었는데, <공동경비구역 JSA>를 퀴어영화로 갈까 했다는데….
남북한 병사의 우정은 약하다. 저 정도 가지고 감동이 올까 하는 생각이 들더라구요. 그래서 그냥 우정이 아니라 사랑으로. (웃음) 어차피 이데올로기가 아니라 개인과 개인의 휴머니즘을 억압하는 체제와의
싸움을 다룬 영화니까 병사들의 사랑과 그걸 용납 못하는 군대가 겹쳐지면 주제가 더 강해지지 않을까 했는데, 일언지하에 거절당했죠. (웃음) 아니, 대꾸를 안 하더라구요. 침묵이 잠시 흐르더니 그 애기를 아예 못들은 척하는 거야. 다시 이야기했더니 “농담이시죠?” 이래서 그냥 싸움이 끝나버렸지. 결과적으로
그렇게 안 한 것은 잘한 것이라 생각해요.
영화감독이라면 누구나 고민하는 문제라고 생각하는데요. 감독이 말하려고 하는 것을 관객이 이해 못할 때가 있잖아요. 관객과의 의사소통을 못하는 것을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요. <복수는 나의 것>이나 <공동경비구역 JSA>를 관객이 감독님이 원하는 만큼 이해했다고 생각하시나요.
관객은 여러 사람으로 이루어진 집단이니까 관객에 따라 다른 거죠.
하나의 해석만을 바라면서 만드는 건 아니고, 다양한 해석이 있을수록 재밌죠. <공동경비구역 JSA>는 비교적 비슷하게 받아들인 영화였다면 <복수는 나의 것>은 정말 다양한 해석이 존재하더라구요. 그런데 다른 건 다 흥미롭게 받아들일 수 있는데, 도덕적 비난은 받아들이기 힘들더라구요. 너 감독 아니지라든지, 인명을 경시한다라든지. 또
명확한 정치적 노선을 갖고 만든 영화는 아닌데, 이건 스탈린주의라고. (웃음) 어떤 분은 이 영화에서 정치적인 이야기는 그냥 웃자고 한
말이다 전혀 진지한 게 아니라는 분도 있는데, 다 좋아요. 나름대로의
독법이 있는 것이고. 하여간 정말 훌륭한 영화는 한줄로 꿰어지지 않고 뭔가 모호함이 남아 있는 어떤 것이 있어야 재밌다고 생각합니다.
<복수는 나의 것>에 대해 질문드리겠는데요. 호두 이론이라고, 하드고어는 껍데기가 딱딱해 깨물면 이가 빠져 진짜 맛있는 알맹이는 먹을 수 없는 호두와 같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복수는 나의
것>이 그런 경우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거든요. 감독님이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너무 딱딱한 껍데기 때문에 관객이 이해하기 힘들었다고
생각해요. 그것에 대한 어떻게 생각하시나요?
그 정도로 하드고어라고 할 수 있나? (웃음) 너무 잔인한 폭력묘사라든가 이런 데 눈을 뺏겨 진짜 중요한 것을 놓칠 수 있다는 말이죠? 그건 이 경우에는 맞지 않다고 생각해요. 이 영화는 토마토예요. 껍질도
먹고, 알맹이도 먹고. (웃음) 그러니까 폭력묘사도 내가 똑같이 중요하게 생각한 이 영화의 핵심이고. 그 안에 그것말고 다른 뭔가 맛있는게
있지는 않았다는 거죠.
단편 <심판>도 그렇고, <복수는 나의 것>도 그렇고 굉장히 종교적 냄새가 나는데, 아까 가톨릭 집안이라고 하셨는데 처음부터 그런 해석이 들어갔는지 궁금하구요. 또 <복수는 나의 것> 마지막 장면이 상당히 실망스러웠는데, 송강호가 죽는데 배두나씨 조직이 와서 죽이잖아요. 그전까지 배두나 혼자 생각인 줄 알았는데 정말 조직이 와서 죽이는 것이 껄끄러웠고, 또 조직에서 가슴에 꽂은 죄명을 송강호가 보잖아요. 그것이 약간 촌스럽게 느껴졌거든요. 그런 점에서 감독님의 죽음에 대한 철학을 좀 밝혀주세요.
종교적 분위기에서 성장한 것이 분명히 영향이 있다고 생각해요. 가톨릭이라는 종교가 죄와 구원의 문제를 눈에 선한 이미지로 제시하는
것도 그렇고, 인간의 원죄나 수많은 성인들의 순교사 같은 것들이 영화적인 요소를 많이 갖고 있어요. 제 영화에서는 항상 죄와 구원의 문제가 중요하게 다뤄지는 것 같아요. <복수는 나의 것>의 끝은 보기 나름인 것 같아요. 저는 그 장면이 촌스러움의 반대라고 생각하는데, 극단끼리 만난다더니 그렇게 보는 분도 있는 것 같아요. 그리고 송강호가 판결문을 보는 부분은, 나라면 죽기 전에 자기를 살해한 사람이 무슨 이유로 그러는지 알고나 죽자는 하는 마음이 생길 것 같았기 때문이죠.
불평분자 박찬욱, 엉뚱한 영화에의 입문기를 고백하다 (2)
“연출부 100년해도 소용없어요, 좋은 각본을 쓰세요”
그로테스크, 창과 방패가 결합해 만들어지는
아이러니
<복수는 나의 것>이 하드보일드로 가다 마지막에
관객의 기대에 미치지 못하는 것인지, 감독님의 의도인지 모르지만 코믹하게
나간다는 판단이 많은데요. 그것에 대해 해명을 해주세요. 그리고 충무로 연출부 생활을 했던 사람으로서 영화감독이 되려고 하는 후배들에게 알려주고 싶은 것이 있다면요.
<복수는 나의 것>은 하드보일드와 코믹이 불가분의 관계로 처음부터
끝까지 섞여서 가기를 원했어요. 오히려 하드보일드한 느낌은 뒤로
갈수록 강해진다고 보구요. 의도적으로 점점 코믹하게 가려고 했었고. 송강호의 죽음에 대해서도. 송강호가 그런 식으로 죽는 것이 굉장히 우스꽝스럽다고 실망한 관객도 있겠지만, 나는 주인공의 죽음이
우스꽝스러운 것이 아주 중요한 포인트라고 생각해요. 우스꽝스러울수록 비참한 기분이 더 들기 때문에. 두 번째 질문, 영화감독이 되려는
후배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말은, 사람이 1만명이 있다면 그걸 직업으로 삼는 사람은 100명, 그중 성공하는 사람은 10명, 그중에서 성공했으면서 가정적인 사람은 1명? (웃음) 성공이 뭔지에 대해서도 다시 생각하게 되는데….
감독님은 가정적인가요?
오늘도 대판 싸우고 나왔어요. (웃음) 성공이란 것도, <공동경비구역
JSA> 만든 감독이다, 그래서 성공했다고 하잖아요. 그런데 그것 하나로 끝날 수도 있어요. 내 나이 서른 몇인데, 이후 40년을(웃음) 계속
힘들게 지낸다면 그게 성공한 인생이랄 수 있나요. 그렇게 계속해서
성공하는 감독은 찾아보기 힘들고, 특히 한국에서는 50살만 넘어도
거의 퇴출 분위기니까. 여러 가지 면에서 바람직하지 못한 직업이니까 말리고 싶어요. 그래도 해야 한다면 뻔하죠.
좋은 각본을 만드는 것. 한국은 전문적인 각본가가 별로 없었어요. 왜 그런지 아세요? 뛰어난 각본가는 다 감독이 되어버리기 때문이에요. (웃음) 데뷔를 하려면 자기가 좋은 각본을 갖고 있어야 해요. 연출부를 100년 해도 소용없어요. 결국 마지막 순간에 좋은 각본을 갖고 있지 않으면 아무도 데뷔시켜주지 않아요. 또, 단편영화를 썩 잘 만들어서 픽업되는 것도 좋죠. 그런데 좋은 단편영화를 만드는 데도 돈이 들어가기 때문에 혼자서 쓰는 게 좀 싸죠. (웃음)
감독님께서 주성치를 좋아하셔서 어떤 영화에 주성치를 오마주했다는데….
<공동경비구역 JSA>예요. 이병헌이 김태우를 데리고 월북하는 장면에서 다리를 건너가잖아요. 거기서 김태우가 “다음에 가자”고 하니까 이병헌이 “통일의 물꼬를 트러 가는 거야”, 그러니까 “나중에
트면 안 될까요?” (웃음) 그 장면은 <007 북경특급>에서 정부 첩보기관의 높은 사람이 주성치의 임무에 대해서 한참 동안 설명하고 엄청난 자료를 준 다음에 “마지막으로 하고 싶은 말 없나?” 하니까 “안
가면 안 될까요?”(웃음) 너무 웃겨서 그걸 썼어요.
많은 분들이 <복수는 나의 것>에 대해 질문을 하시는데 영화 자체가 <공동경비구역 JSA>보다 신선하다고 느껴서 그러는 것 같아요. 저도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래서 세 가지 정도 질문을 드리겠는데요. 감독님이 잡지 인터뷰에서 “이 영화는 코미디다”라고 말했는데 조금 전에 그로테스크한 것, 하드보일드한 것, 우스꽝스러운 것 등이 섞여 있다고 말씀하셨습니다. 이런 요소들을 어떤 방식으로 배치하셨는지 궁금합니다.
둘째는 시청각을 많이 배제시켜 찍으셨다고 했는데 오히려 고도로 계산되어 있지 않나 하는 겁니다. 카메라 각도라든가, 류가 일하는 공장에서 기계소리만 지나치게 크게 들린다든가 하는 부분에서요. 마지막으로 동진이 유선 시체를 해부할 땐 울먹이다 누나 시체 해부할 땐 하품을 하잖아요. 인간 본성이 파괴되는 것 같아 충격적이었어요. 감독님 작품들에서는 나중에 주인공이 죽잖아요. 사람 사는 것에 대해 염세적으로 보고 계신지 알고 싶습니다.
우스꽝스러운 것이 어떤 식으로 결합되어 있느냐 했는데, 코미디라고
한 것은 영화의 잔인성, 폭력성이 너무나 두드러지게 소문이 나서 전략적으로 얘기한 거예요. (웃음) 그러다간 손님 하나도 안 올 것 같아서. 그래도 손님 안 오긴 마찬가지였지만. (웃음) 코믹한 부분들이 있지만, 한마디로 코미디라고 말할 순 없죠. 그로테스크는 그 안에 이미
유머를 갖고 있어요. 유머가 없는 그로테스크는 엽기취미일 뿐이고,
유머 빼고 잔인하거나 끔찍하기만 한 묘사는 재미도 없고. 사람마다
언어의 뉘앙스가 다르겠지만 내가 말하는 그로테스크는 모순된 것이
결합돼서, 모와 순, 창과 방패가 결합해 만들어지는 아이러니예요. 그것이 영화의 핵심적 방침이었고. 그런 것이 부조화하기 때문에, 부조화를 싫어하는 사람들은 참기 어려울 것이고, 그런 부조화가 인간실존의 부조리한 것까지 생각하게 하는 관객한테는 즐거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지요. 두 번째 질문, 처음엔 미니멀한 영화를 만들겠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결과는 미니멀한 영화는 아닌 것 같아요. 물론 배우가 많이 표현하지 않는 것, 컷 수, 음악 등은 미니멀하지만 결과는 아닌 것 같아요. 다만, 아주 엄격한 고전적인 비극의 느낌이 잡혔으면 했어요.
<버라이어티>의 데릭 엘리라는 평론가가 이 영화를 “아시아에서 온 희랍비극이다”라는 평을 썼는데 칭찬이고 아니고를 떠나서 그 말이 마음에 들어요. 잔인한 묘사가 많다고 하지만 희랍비극이나 <일리어드> <오디세이>에 묘사된 전쟁, 폭력의 장면들이 엄청나게 많아요. 잘 아시는 오이디푸스의 비극은 상상을 초월하는 엽기 스토리구요. 아주 엄격한 구도와 그런 분위기가 담긴 영화를 만들고 싶었어요. 그런 숨막힐 듯한 엄격함 속에 썰렁한 개그가 틈틈이 끼어드는. 세 번째 질문인 세계관은, 낙천적이진 않은 것 같아요. 물론 생활에서는 즐겁게 살려고 노력하는데 자꾸 이런 영화만 만드는 것은 해피엔딩을 만드는 것을 제가 거부했기 때문이에요. (웃음) 앞으로는 일부러라도 그런 영화를 만들려고 합니다.
나의 원동력은 분노
개인적으로 여덟개의 질문을 준비했는데(웃음) 지금
분위기가 너무 <복수는 나의 것>쪽으로 가면서 무거워지는 것 같아서 가벼운 질문을 하겠습니다. 엊그저께 류승완 감독님은 따님에게 절대 영화일 안 시킬
거라고 말씀하셨는데 감독님도 부모님 영향을 받았다고 말씀하셨듯이 감독님이 거실에서 DVD로 스플래터, 호러무비 등을 보면 영향을 받을 텐데 그런 영화에서 따님을 어떻게 보호하실 건지요.
그런 영화는 애 있을 땐 안 보죠. <슈렉> 같은 것 보죠. (웃음) 영화감독은 멋진 직업일 수도 있지만 그저그런 감독이라면 그것처럼 비참한
직업이 없어요. 딸애가 지금 초등학교 2학년인데, 제가 하는 일보다
더 보람있고 재미있는 일도 많은데 그런 일 시키고 싶죠. 지금 하고 싶어하는 일은 동물보호 액티비스트. (웃음)
감독님께서 아까 시나리오의 중요성을 강조하셨는데 좋은 시나리오를 쓰기 위해 어떻게 하셨는지, 또 감독님이 생각하기에 좋은 시나리오란 어떤 건지요. 그리고 좋은 시나리오를 쓰기 위해서는 어떻게 하는 것이 좋은지요. 마지막으로 <공동경비구역 JSA>를 굉장히 감명깊게 봤는데 감독님은 군생활을 어떻게 하셨는지 알고 싶습니다.
군생활은 그저, 방위. (웃음) 그때는 6개월 방위가 많았는데 18개월로
늘어난 첫 번째 기수였어요. 그것도 육군본부 도서관 방위. 내가 가장
공부를 열심히 한 시절이었어요. 아마 대한민국 군인 중에서 제일 편한 생활을 했을 거예요. 좋은 각본은 어떤 것이냐. 일단 재주부리지 않고 진심으로 쓰는 것은 표가 난다고 생각해요. 상투적인 이야기지만
사실이에요.
스스로 절실해서 안 쓰면 못 참겠어서 쓰는 스토리가 진짜라고 생각하고. 좀더 기술적인 얘기를 하자면 지문을 아주 간단하게 쓸 필요가 있어요. 인물과 꼭 필요하다면 장소의 풍경 정도. 대사도 줄일 수 있는 데까지 줄여보는 게 좋아요. 이 말을 안 하면 얘기가 안 통한다거나 성격 전달이 안 된다거나 하는 경우 빼놓고는 다 없애버리는 게 큰 도움이 되고. 그렇게 아주 콤팩트한, 가벼운, 얇은 시나리오를 쓰는 버릇을 들이는 것이 기술적으로 큰 도움이 될 것이고. 갈등과 이야기 전개면에서는 셰익스피어가, 인물의 성격 창조에서는 도스토예프스키와 발자크가 교과서 같은 작가죠. 시나리오 작법 책은 한권도 안 봤어요.
감독님의 작품을 보면 사회적인 분노나 메시지 같은 것이 보이는데요, 분노가 혹시 영화를 만드는 원동력은 아닌지요?
원래 매사에 투덜이, 불평분자예요. 세상에 잘 돌아가는 부분도 있고,
좋은 사람도 많지만 안 되는 것, 나쁜 쪽에 더 관심이 가고. 나쁜 짓을
하고도 멀쩡히 잘사는 사람들이 왜 그렇게 많은가 그런 것에 관심이
가고. 그게 크게 작용한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그것만 갖고 영화를 만들 순 없잖아요. 그것만 갖고 하다보면 나도 지치고. 세상과 인간을 좀
다른 모습으로 바라볼 필요가 있지 않나 싶지만, 아직까지는 분노가
가장 큰 원동력이 아닌가 생각해요. 나이가 더 들어서 원숙한 통찰력이 필요할 때까진.
정리 위정훈 oscarl@hani.co.kr·사진 이혜정hyejung @hani.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