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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드로 보티첼리 【Por Sandro Botticelli (1445 – 1510)】
지옥의지도 E' una mappa dell'inferno
이탈리아 화가 산드로 보티첼리(Sandro Botticelli; 알레산드로 디 마리아노 디 반니 필리페피; Alessandro di Mariano di Vanni Filipepi, 1445~1510)의 1485년작 〈지옥의 심곡(深谷)(La voragine infernale)〉이나 〈지옥도(地獄圖; The Map of Hell)〉다.
이 지옥도는 15세기에 편찬되었을 이른바 《보티첼리 삽화본 신곡(Disegni per la Divina Commedia; Divine Comedy Illustrated by Botticelli)》에 수록된 삽화 95편 중 한 편이다. 이 책의 원작은 이탈리아 시인·작가·철학자 단테 알리기에리(Dante Alighieri, 1265~1321)의 1309~1320년작 장편서사시(長篇敍事詩) 《신곡(神曲; Divina Commedia)》이고, 제1편 《지옥(Inferno)》, 제2편 《연옥(련옥; 煉獄; Purgatorio)》, 제3편 《낙원(천국; Paradiso)》으로 구성되었다. 《지옥》 제18곡에 나오는 제8지옥이 묘사되었다.
문학작품과 미술작품에 묘사된 이 지옥도는, 당연하게도, 13세기 이탈리아 시인과 15세기 이탈리아 화가의 지옥관(地獄觀)을 예시한다. 고대 그리스에서도 지옥은 상상되었고 묘사되었다.
그런데 어리뜩한 마혼의 야살스러운 눈깔에는 21세기 한국에서도 괴괴한 지옥도가 심심잖게 목격될뿐더러 심지어 이탈리아 시인과 화가의 지옥도에 묘사된 것보다 더 가혹하고 참담한 (무분별하고 악랄한 학부모들, 교사들, 공직자들, 정치꾼들, 갑질꾼들이 초래하는 가정의, 가족의, 학교의, 사회의, 현실의) 지옥을, 생지옥(生地獄)을, 현생의 지옥을, 지상(地上)의 지옥마저 아련히 암시하는 듯이 보인다.
『신곡』을 읽으면서 놀라웠던 것은 단테의 해박한 지식이었다. 단테 이전에 살았던 세상의 모든 현인들이 등장하는 『신곡』은 그리스 로마 신화 이야기의 무수한 신들부터 실재한 고대 철학자는 물론이고 그와 같을 시대를 살았던 인물까지 모조리 내용의 한 부분을 차지한다. 단테는 그들과 직접 이야기하고, 되어보기, 그들을 대변하고, 원본에 나오지 않았던 그들의 다른 모습을 우리에게 보여준다. 지옥과 연옥, 천국에 대한 100개의 이야기 장면은 때론 이해하기 어렵게, 때론 지루하게 펼쳐지지만 저자의 해박한 지식과 역사 해석, 현실에 대한 비판적 시각은 난해하지만 설득력이 있다. 그렇게 본다면 『신곡』은 이야기의 이야기이고, 고전의 해설서이고, 결코 한 번 읽음으로써 책꽂이 구석으로 되돌아가야 할 그런 책은 아니다.
단테는 그가 스승으로 섬기고 있는 베르길리우스의 인도를 받아 지옥으로 여행을 하게 되는데, 단테가 『신곡』에서 주장하고 싶은 그의 철학적 소신은 분명하고 완고하다. 지옥 편 제11곡에서 지옥의 구조를 설명하는 베르길리우스가 계속되는 단테의 의문을 풀어주면서 일러주는 말이다. 단테를 유럽 중세의 지성으로 불리는 이유를 설명해주는 것 같다. 단테는 서양사에서 셰익스피어와 비교되는 유일한 인물로 알려져 있지만 혹자는 셰익스피어를 단테와 대비하는 일은 셰익스피어에 대한 명성 부풀기의 단면으로 조롱하기도 한다.
철학은 그것을 깨치는
사람에게는 한 곳만 가르치지 않으니,
성스러운 지성과 그 기술을 따라
자연히 제 진로를 잡아가는 것과 같다.(지옥편 제11곡. 97-100)
『신곡』은 한편으로는 베아트리체의 이야기다. 단테의 뮤즈로서의 구원의 연인이었던 베아트리체는 이 책에서 완벽한 여인으로 부활한다.
아래 인용문은 베아트리체가 단테를 천국으로 인도하면서 천사들에게 단테의 인물성에 대해 소개하는 말이다. 단테는 베아트리체를 만나면서 삶의 방향을 정할 수 있었으나 그녀의 죽음으로 방황하던 자신의 모습을 되돌아본다. 그의 인생에서 베아트리체는 살아있는 이유였고, 사명의 인도자였고, 제2의 자아였던 셈이다.
얼마 동안 나는 내 모습으로 그를 부축했고,
나의 젊은 눈을 그에게 보여주면서
올바른 방향으로 그를 인도하였지요.
그런데 내가 둘째 시기의 문턱에서
삶은 바꾸자마자, 이 사람은 나를
떠나 다른 사람에게 의존하였지요.
내가 육신에서 영혼으로 올라가고
아름다움과 덕성이 더 커졌을 때에도
그는 나를 덜 귀중하고 덜 즐겁게 여겨,
옳지 않은 길로 걸음을 옮겼고
어떤 약속도 채워주지 못하는,
그릇된 선의 모습을 뒤쫓았지요.(연옥 편 제30곡. 121-132)
오늘날 베아트리체는 단테라는 개인적인 연인의 이름에서 벗어난 지 오래다. 베아트리체라는 이름은 이미 구원의 연인의 상징으로 불리고 있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했을까. 그것은 오로지 『신곡』 때문이다. 단테는 베아트리체를 인류 사상 불명의 연인으로 만들겠다는 스스로의 다짐을 『신곡』이라는 불세출의 고전으로 실현시켰다. 단테의 사랑은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한다. 그를 천재로 만들었고 인류 사상 위대한 인물의 반열에 올라놓았다. 결국 한 여인에 대한 사랑이 한 남자의 삶을 바꾼 셈이다.
기록들에 의하면 단테와 베아트리체의 만남은 거의 드물었고, 두 사람의 관계도 일방적이었던 것 같다. 아홉 살 때 처음 만나 시작된 짝사랑이 젊은 나이에 요절한 그녀의 죽음으로 그대로 화석화 되어버린 듯하다. 베아트리체 앞에서 수줍기만 했던 단테였으니 그가 말하는 사랑도, 또 구원의 여인이란 말도 편향적이었을 것이다. 베아트리체가 단테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직접 한 적도 없고, 그렇다고 단테가 베아트리체에게 사랑을 고백한 적도 없이 단테만의 일방적인 외곬 사랑인 셈이다. 그러나 그 사랑이 시인이었던 단테를 만나면서 천상의 불멸인 사랑으로 승화되고, 마침내 세기의 고전인 『신곡』이 탄생하게 되는 것이다.
『신곡』은 지옥 편이 가장 유명하게 된 것은 아마도 지옥의 구조에 대한 놀랄 정도로 세밀 하고 체계적인 묘사 때문일 것이다. 단테 이후 수많은 작가들의 저서에서 지옥의 구조가 모방되고 『신곡』의 지옥을 모델이 되고 있다고 한다. 그러나 내가 감탄한 것은 지옥 편에 나오는 수많은 인물들에 대한 단테적 해석과 중세 스콜라 철학의 형상과 비판적 시각이 적나라하게 펼쳐지고 있다는 점이었다. 예를 들어 지옥 편 제 4곡에 등장하는 신화나 역사 속 인물들을 열거해본다.
먼저 신화와 역사적 인물을 보면, 음유시인 호메로스부터 시작하여 아킬레우스와 함께 일리아스의 트로이 영웅인 헥토르, 트로이 왕국의 시조인 다르다노스를 낳은 엘렉트라, 트로이 장군으로 트로이 멸망 후 유민들을 이끌고 이탈리아로 건너 가서 로마 건국의 시조가 된 아이네이아스, 아이네이아스와의 전투에서 한쪽 젖가슴을 드러내고 싸우던 여전사 잔다르크의 원조격인 카밀라, 아마조네스 여왕으로서 트로이의 프리마도스를 도와 싸우다 아킬레우스에게 죽은 펜테실레이아, 아이네이아스의 장인이자 라티움의 왕 라티누스, 그의 딸 라비니아, 로마 시대 카이스르의 딸이자 폼페이우스의 아내인 율리아, 그리고 브루투스와 루크레티아, 십자군 시대 예루살렘을 탈환하면서 사자왕 리차드와 겨루었던 술탄 살라딘이 등장한다.
이어서 그리스 철학자들이 등장하는데 아리스토텔레스를 필두로 소크라테스와 플라톤이 나온다. 유물론의 시조이자 플라톤의 관념론에 대립했던 데모크리토스, 금욕주의자로서 알렉산더 대왕과의 일화가 유명한 디오게네스, 자연주의 철학자 아낙사고라스, 자연철학의 시조이자 피라미드의 높이를 측정했던 탈레스, 만물의 4원소를 주장한 엠페도클레스, 변증법의 창시자 제논 등의 이름이 끊임없이 등장한다. 또한 하프의 명수이자 아내 에우리디케를 저승에서 데려오고자 했던 음악의 신 오르페우스, 로마의 국부 키케로, 네로 황제의 스승 세네카, 기하학자이자 유클리드의 제자인 에우클리데스, 천문학자이자 천동설을 주장한 프톨레마이오스, 의사의 아버지라 불리는 히포크라테스 등이 열거되고 있다.
『신곡』에서 이들과 같은 신화와 역사적 인물들을 불러내는 단테의 작업은 끝없이 이어진다. 『신곡』이 읽기 어렵다는 것도 이와 무관하지 않다. 이 때문에 서사시 형태인 신곡은 독해에 도움을 주기 위해 해설이 붙어 있는데 사실 해설을 읽는 시간이 더 걸릴 정도이다. 그러나 그렇기 때문에 『신곡』을 제대로 읽게 된다면 단테의 해박한 지식에 감탄할 뿐만 아니라 읽는 사람에게도 엄청난 영감을 주는 보고로서의 가치를 느끼게 된다. 『신곡』이 한 번으로 읽고 끝낼 책이 아니라는 사실도 이런 의미이다. 더구나 당시 교회가 세상을 지배하던 중세 시대의 생활상과 인물들의 사고를 추적하다보면 현세에 대한 비판적 안목도 배양할 수 있을 것이다.
단테의 『신곡』에 대한 평가에서 특이할만한 점은 언어의 사용에 있다. 『신곡』은 라틴어의 방언인 토스카나어와 피렌체 방언으로 쓰여졌는데 이것이 바로 이탈리아어 형성의 기원이 된다. 로마에 대한 자부심으로 라틴어 사용만을 고집하던 당시 지배층이나 지식인층에 정면으로 대항하여 이탈리어 고유어를 들고 나온 것이다. 훈민정음을 창조한 세종대왕과 집현전 학사들이 문득 떠오르는 것은 자연스런 현상일까. 현재의 이탈리아어의 기원자로서 단테, 그의 자부심과 또는 권력권에서 퇴출당해 오랜 기간 타지에서 방황하면서 망명 생활을 하던 자신의 삶의 괴로움에 대한 승화라는 숨은 뜻이 있는지도 모른다. 단테를 숭앙한 보카치오도 자신의 작품을 피렌체 방언으로 썼다. 단테의 이런 노력의 결실이 결국 현재의 이탈리아어를 탄생시키게 되는 것을 보면 문학, 또는 위대한 작가의 힘이란 어떤 것인지 감복할 수밖에 없다.
저승 여행 이야기인 『신곡』은 단테가 직접 자신의 이름을 작품 속에 등장시키면서 살아있는 몸으로 일주일간 지옥, 연옥, 천국을 다니면서 보고들은 것을 기록한 것으로 요약할 수 있다. 물론 여행 이야기라고 하지만 단순한 여행이 아닌 아주 고난도의 독해와 시대적 현상을 사전 지식으로 구비하여야만 조금이라도 알아들을 수 있는 이야기다. 그러나 어떤 목적을 가지고 읽는 것이 아니라면 시간적인 여유만 확보할 수 있다면 천천히 흥미를 느끼면서 읽을 수 있다. 만약 누군가 자신의 창조적인 활동을 염두에 두고 있다면 『신곡』 만큼 훌륭한 안내자를 찾기 어려울 것이다. 보카치오의 『데카메론』이 『신곡』의 모방 또는 패러디였다는 수많은 연구자의 조언이 아니더라도 자신에게 적합한 일화와 전개, 내용과 의식에서 감정을 공유하는 체험을 하는 일이 드물지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슬람교의 창시자인 마호메트를 기독교 분열 조장 인물로 분류해 제8옥의 아홉째 구렁에 집어넣은 단테의 『신곡』은 분명히 중세의 기독교적 세계관에 따라 저술된 것은 틀림없다. 그렇다고 기독교적 전통적 내세관이 『신곡』에서 나타나는 단테의 철학적 사유의 깊이까지 훼손시키지는 못하고 있다. 또한 『신곡』이 서사시 형식의 고대 문학의 모습을 취하고 있다는 점도 유의할 만하다. 루카치가 『소설의 이론』에서 창공의 빛나는 별, 총체성의 세계로 규정지었던 신과 종교의 시대 문학의 정점에 위치하고 있기도 하다. 단테가 호메루스와 비견되는 것도 이러한 문학 형식의 연장선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보카치오가 단테를 추앙하면서 평생의 문학적 스승으로 삼았던 것, 『신곡』 해설서를 쓰고 단테 강의를 했던 보카치오의 존재도 일익을 담담했을 것이다. 보카치오가 『데카메론』에서 구원의 여인으로서 피암메타를 등장시켜 그녀를 그의 사랑이었던 마리아의 분신으로 구현했던 것도 단테의 베아트리체를 패러디 한 것은 아닌지 알 수 없는 일이다. 그러나 보카치오가 『데카메론』을 그가 사랑했던 마리아를 위한 것이라는 주장은 아무래도 설득력이 크지 않다. 보카치오는 결국 마리아에게 버림을 받았는데 단테에게 베아트리체는 어떠했는가. 단테는 베아트리체의 존재를 숭앙하기 위해 세기의 사랑의 주인공들을 『신곡』에서 어떤 모습으로 구현했을까. 지옥 편 제 5곡에서 얼마간의 해답을 얻을 수 있다.
지옥의 제 2원은 애욕으로 고통 받는 자들이 머무는 곳이다. 첫째로 등장하는 인물은 세미라미스, 메소포타미아 여왕으로 바빌론의 공중정원을 건설하기도 했지만 자신의 음탕함을 법률로서 정당화시키면서 아들과 근친상간의 죄를 저지른다.
두 번째 등장인물은 디도. 피그말리온의 여동생이자 카르타고의 여왕이었던 그녀는 아이네이아스가 자신을 버리자 자결하고 만다. 세 번째 인물은 음란함의 대명사 클레오파트라, 이어서 헬레네가 등장한다. 토로이 왕자 파리스와 애정 행각 때문에 트로이 전쟁을 유발한 장본인이다. 폴릭세네를 사랑하여 자신의 약점이 발뒤꿈치에 있다는 사실을 알려주어 파리스의 화살에 죽음을 맞는 아킬레우스, 그리고 헬레네의 연인 파리스 왕자, 사랑의 묘약을 마시고 숙부의 아내가 된 이졸데를 사랑하다 비극적 최후를 맞는 트리스탄이 차례로 등장한다. 마지막으로 단테가 즐겨 인용했던 파올로와 프란체스카의 영혼이 슬픈 얼굴로 단테에게 자신들의 사랑의 비극을 하소연한다.
프란체스카는 라벤나의 귀족 구이도의 딸로서 1275년 리미니의 귀족 잔초토와 결혼하게 된다. 두 가문은 원수지간으로서 화해를 위한 정략결혼을 택한 것이다. 잔초토가 불구의 몸이라 리미니는 동생인 파올로를 결혼식장에 내보내는데 신부 프란체스카는 나중에 이 사실을 알게 된다. 프란체스카는 결국 파올로를 사랑하게 되었고 두 사람의 불륜이 형 잔초토에게 발각되고 두 사람은 그 자리에서 잔초토의 화살에 비참한 최후를 맞는다. 단테는 이 두 사람의 사랑이 갤러헤드가 지은 랜슬럿과 귀네비어의 사랑이야기라는 책에서 그들이 키스하는 대목을 읽다가 사랑에 빠졌다는 고백을 듣게 된다.
어느 날 우리는 재미 삼아 랜슬럿이
사랑에 빠진 이야기를 읽고 있었는데,
우리 둘뿐이었고 아무 의혹도 없었어요.
그 책은 자주 우리 눈길을 마주치게
했고 얼굴을 창백하게 만들었는데,
오직 한 대목이 우리를 사로잡았소.
그 연인이 열망하던 입술에
입 맞추는 장면을 읽었을 때, 나에게서
절대로 떨어질 수 없는 이 사람은
온통 떨면서 안에게 입을 맞추었지요.(지옥 편 제5곡, 127-136)
트리스탄과 이졸데의 사랑이 사랑의 묘약으로 이루어졌다면 프란체스카와 파올로의 사랑은 키스로부터 시작된 셈이다. 이들의 사랑은 헬레네와 파리스, 랜스럿과 귀네비어의 사랑 이야기처럼 서양 중세사에서 널리 알려진 이야기이다. 단테는 이들의 사랑을 비극이라고 보고 지옥편에서 다룬다. 그렇다면 단테의 뮤즈인 베아트리체, 천국편에서 자신을 천국으로 인도하는 베아트리체와의 사랑은 어떤 성격을 가지고 있는가.
베아트리체는 어떻게 단테의 뮤즈가 되었는가. 이에 대한 질문과 대답이 오늘 이 글의 마지막이 될 것 같다. 프랑스 철학자 에티엔 질송은 그의 책 『단테와 베아트리체』에서 단테에 대한 베아트리체의 태도에 대해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베아트리체의 진짜 삶에 대해서 사람들이 알고 있는 것은 거의 없으며, 다만 그녀는 임종 당시 결혼을
하였고, 한 가정의 어머니였으며, 그것이 어떤 것이든, 사랑이 그녀의 실존을 뒤흔들었던 적은 없었던 것
같다.(질송, 『단테와 베아트리체』)
이것은 베아트리체에게 단테라는 존재는 미미했다는 뜻이 된다. 아홉 살 때 처음 만나고, 베아트리체가 결혼한 후 베키오 다리에서 두 번째 만남이 전부였으니 베아트리체에게 단테의 존재가 어떤 형상이었을지는 짐작할 수 있다.
물론 단테와 베아트리체가 피렌체의 도심의 이웃이었다고는 하지만 두 사람의 만남이 사랑으로까지 발전될 수 있었을까하는 의문은 여전히 남는다.
단테는 베아트리체와의 두 번 째 만남에서 그녀가 자신에게 상냥한 미소를 보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그것은 단테의 일방적인 생각일 수가 있고 그렇다고 그것으로 베아트리체가 단테에게 연심을 품었으리라고 상상하는 것은 거론의 가치조차 없는 일이다. 이러한 베아트리체에 대한 단테의 입장은 어땠을까. 다시 질송의 말을 인용해 본다.
단테는 그가 처음 베아트리체를 만난이후부터 그의 상상 속에 지니고 있었던 빛나는 아름다움이 소멸
하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 빛나는 젊음 속에서 죽은 베아트리체는 그를 사랑했던 한 젊은이의 생각 안에
영원히 한 젊은 소녀의 죽음으로 남아 있었다.(질송, 『단테와 베아트리체』)
베아트리체에 대한 단테의 사랑은 그녀의 죽음으로부터 완성된 것임을 알 수 있다. 현실적으로 이루어 질 수 없었던 일방적인 사랑은 현실과 이상의 거대한 장벽에 가로막혀 단테 그 자신조차도 어떻게 감당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가 그녀의 죽음으로서 그 벽이 허물어진 것이다. 마침내 단테는 베아트리체를 구원의 연인으로 정좌하게 만들었고 그것을 『신곡』이라는 불세출의 거작으로 승화시킨다. 문학을 통하여 베아트리체는 이제 영원히 단테만의 여인으로 남을 수 있게 된 것이다. 사랑의 위대함이라고 말할 수 있다. 베아트리체가 존재하지 않았다면 세기의 고전이 『신곡』은 탄생할 수 없었고, 그랬다면 단테라는 이름도 세상에 알려지지 않았을 것은 분명하기 때문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