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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북한의 함경북도 무산군에 평범한 노동자가정에서 1남1여로 위로 8살 차이 나는 오빠와 늦둥이 외동딸로, 친가 쪽으로 장남이셨던 아버님과 외가 쪽에서 장녀이셨던 어머님 사이에서 태어나 외가 촌과 친가 촌의 사랑을 모두 받으면서 살았습니다.
저의 아버님은 다섯 개 나라 언어를 구사하시는 박식한 교육자셨고 저의 어머님은 일제 때 한 지붕아래에서 살고 계셨던 캐나다 선교사님에게서 영어를 배우셔서 유창하지는 않으셨지만 대화정도는 구사하시는 유식하시면서도 아름다우신 어머님의 영향으로 학업을 좋아하고 책읽기를 즐겨하면서 나름 ‘* 박사’라는 애칭을 들으면서 자라났습니다.
해방 전 외할아버님은 **여자중학교 교육자로 교감으로 시무하시면서 기독교 장로님이셨고 해방 후에는 **여자 중학교 교장을 하시다가 6.25전쟁 후 교직을 내려놓으시고 함경남도 함흥시에서 여생을 보내시다가 돌아가셨습니다.
1987년도 외할아버님이 보시던 성경책을 외삼촌이 발견하시고 두려워서 연탄불에 태워버렸다고 합니다. 그일 있은 후부터 **공업종합대학 교수로 학생들을 가르치고 계셨던 외삼촌 가정이 순탄하지 않았고 나중에는 가정이 풍비박산(風飛雹散)이 났다고 저의 어머님께서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1935년도 태어나신 저의 어머님은 모태신앙인으로 태어나셨고 1930년도에 명석한 두뇌를 가지고 태어나신 저의 아버님은 15살에 다섯 개 나라 언어를 습득하셨고 어린 나이에 **여자중학교 교사로 학교에 취직하시면서 교감이시며 기독교 장로님이시던 저의 외할아버님의 강요로 교회에 가셨다가 회심하고 캐나다 선교사님을 통해 성경을 배우셨다고 합니다.
바로 해방되기 직전에 일어난 일입니다.
오늘은 자랑스럽게 이야기하지만 부모님과 외가 쪽이 기독교이라는 이유로 저의 청소년시절 굉장히 우울하게 만들었습니다.
조선노동당원이 아닌 부모님을 자랑스러워하지 않는 딸의 모습을 바라보는 그들의 마음은 어떠하셨는지 그 분들의 마음을 지금에야 알고 나서야 회개하고 회개해도 모자랄 정도로 너무 미안하고 죄송하기만 합니다.
저에게 8년 차이가 되시는 오라버님은 무척이나 성실하시고 우직하신 분, 공부하시는 것보다 몸으로 일하시는 것을 가장 즐거워하셨습니다.
오라버님이 계심에도 불구하고 온 집안의 관심은 저에게로 집중되어있었고 부모님들의 스토리를 전혀 모르는 저는 늘 자신감과 꿈, 비전에 대한 열정이 넘쳐 있으며, 초등학교 졸업식 때 최우등상을 받으며 꿈을 향해 달리고 있었습니다.
부모님들의 일제 때 기독교인이라는 것 때문에 입당하지 못한다는 것을 알 수 없는 저는 갑자기 막혀버린 저의 앞날이 부모님들 때문이라 생각하며 원망하게 되었습니다.
우리 부모님 같으신 분들이 당원이 아니면 어떤 사람들이 당원이 된단 말인가?
이 질문이 저의 머리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눈앞이 캄캄하고 살아나갈 용기도 잃은 청소년시절은 너무나 불우하였습니다.
결국 풀리지 않는 숙제를 가지고 학교를 졸업하고 지방대학인 “회령경공업단과대학”에 입학하여 통신으로 대학을 다니면서 불우한 저의 운명과 꼬여버린 인생에서 벗어나고 싶은 마음이 강렬하였습니다.
김일성의 서거(逝去)로 북한 땅에 고난의 시가가 왔습니다.
(지금 생각하여 보면 우리를 이 땅으로 빼내시기 위하여 기근과 전염병을 주셨고, 그 땅의 죄악과 회개하지 않는 주님의 백성들에게 기회를 주신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시 79:8) “주를 알지 아니하는 민족들과 주의 이름을 부르지 아니하는 나라들에게 주의 노를 쏟으소서.”
(시 105:16) “그가 또 그 땅에 기근이 들게 하사 그들이 의지하고 있는 양식을 다 끊으셨도다.”
(렘 34:17) “그러므로 여호와께서 이와 같이 말씀하시니라. 너희가 나에게 순종하지 아니하고 각기 형제와 이웃에게 자유를 선포한 것을 실행하지 아니하였은즉 내가 너희를 대적하여 칼과 전염병과 기근에게 자유를 주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내가 너희를 세계 여러 나라 가운데 흩어지게 할 것이며”
(겔 6:12) “먼 데 있는 자는 전염병에 죽고 가까운 데 있는 자는 칼에 엎드러지고 남아있어 에워싸인 자는 기근에 죽으리라. 이같이 내 진노를 그들에게 이룬즉”
하나님의 말씀은 하나도 땅에 떨어지지 아니하고 북한 땅에 이루어졌습니다.
김일성과 김정일, 김정은 측근들은 칼에 엎드러지고 북한 땅에 남아있는 자나 계속 김일성 삼부자(삼 대)에게 충성한 사람들은 전염병과 기근으로 죽어가고 있습니다.
그 나머지 탈북한 탈북민(사람)들은 한국 땅에서 적용 못하거나, 여의치 않게 중국 땅 여기저기에 인권유린 당하고 있으며, 그 외 다른 탈북민들은 벨기엘, 카나다. 미국, 영국, 프랑스, 독일 등 세계 여러 나라에 산재되게(하게) 되었습니다.
고난의 시기는 저에게 중국으로 갈 수 있는 기회를 주었습니다.
저는 중국에 가서 식당일을 하여 돈을 벌기 위해 부로커를 만나게 되었고 그의 도움으로 1998년 3월 드디어 중국에 대한 환상을 가지고 도착하였지만, 기다리고 있었던 사기꾼의 인신매매에 걸려들어 중국인 조선족 총각에게 팔려가게 되었습니다.
아무리 가난해도 그렇게 가난할 수가 없는 중국의 조선족 시댁, 소금이 없어 된장으로 모든 반찬의 간을 맞추어야 하였고 입쌀이 없어 소들이 먹는 겨를 가져다가 시커먼 빵을 먹어야 하였습니다.
실망과 좌절, 두고 온 6살의 어린 딸, 부모님 생각에 저는 알콜중독자가 되었습니다.
낮(낯)선 중국 땅에서 중국말도 모르고 깊은 산골에서 빠져나올 기회조차 없어 저는 수면제를 먹고 자살을 시도하기도 하였습니다.
무엇도 나에게 동정을 해주지 않았고 누구도 손을 내밀어 그렇게 먹고 싶은 입쌀밥을 가져다주지 않았습니다.
산에 올라가 달래를 캐고 도라지를 캐어 시장에 나가 팔아서 먹고 싶은 계란을 삶아먹고 오이를 씹으며 눈물을 하염없이 흘리기도 하였습니다.
그렇게 시간이 흘려 파리하여지던 저는 시어머님께서 들고 다니시던 책가방에 흥미를 가졌습니다. 혹여 돈이 있을 듯 싶었는지 모릅니다.
그러나 그 속에는 돈도 없었고 사탕이나 과자도 없었습니다.
다만 “성경전서”라는 책 한권이 있었습니다. 막막한 마음이었지만 워낙 책을 좋아하였던 저는 낮(낯)선 땅에서 한글로 된 책을 발견하고 마냥 기쁘기도 하였습니다.
그 책을 가져다가 펼쳐보다가 저는 저의 아버님에게서 들었던 유다와 예수의 이야기를 책에서 발견하게 되었습니다. 흥미를 가지고 펼쳐보는 저에게 성경전서는 저의 베게가 되었습니다. 늘 두통으로 시달리던 저는 성경전서 책만 베고 자면 머리가 아프지 않음을 알게 되었습니다. 신비한 책이라 생각하며 펼쳐보다가 4개월 만에 일독을 하였습니다.
저는 저의 시어머님이 다니는 곳에 가고 싶어졌습니다.
하지만 시댁과 남편, 그리고 주인집의 감시를 받고 있었던 저는 쉽게 용단을 내리지 못하다가 무엇에 끌리듯 교회를 찾아가게 되었습니다.
미리 탐지하여 놓았던 정보를 통해 금요일 저녁 실내화를 신고 친구 집에 간다고 남편에게 거짓을 말하고 교회로 갔습니다.
그곳은 다섯 명의 어르신들이 한족인교회의 사찰이 방을 빌려서 모임을 하는 조그마한 사찰 방이었습니다.
그날 찬송은 감사 감사 예수 찬송이었는데 이 노래만 10번 정도 반복하여 부르시고 말씀을 드르륵 읽으시고 기도를 하시고 서로 인사와 교제로 마무리 지우시고 끝나는 조그마한 시골의 조선족 교회였습니다.
북한에서 쟁쟁한 사상혁명으로 단련되어온 저에게는 모임이 초라하게 보였습니다.
속으로 별로구나 하는 마음으로 집으로 돌아와 자는데 밤에 신기한 꿈을 꾸고 있었습니다.
제가 배우지도 않은 감사 감사 예수찬송을 하늘위에서 부르고 있었고 또 다른 제가 나무에 매달려 있는 것입니다. 뭐하나 싶었더니 땅 아래 나무에 매달려 있는데 저의 이마에서 큰 막대기 비슷한 것이 나오는데 얼마나 긴지 그 분이 그것을 한 손으로 뽑아내시고 계시는 것입니다.
제가 속으로 저렇게 긴 쇠막대기가 내 머리통에 어떻게 들어가 있었지?
그렇게 하고 꿈이 꾸고 아침에 일어났는데 세상에 이렇게 변할 수 있을까요?
저의 남편의 얼굴이 그렇게 훤해 보이시고 순한 양 같아 보이고 어진 남정에게 지난 세월 술주정했던 것이 미안하기까지 하였습니다.
저는 하나님의 은혜가 아니고서는 9시간 전만 해도 잠자리 들기도 싫었던 남편이 갑자기 성실하고 착하게 보일 수 없다 생각합니다.
벙실벙실 웃는 저를 더 이상하다고 쳐다보는 쪽은 저의 신랑과 세를 맡고(주고) 살던 주인집, 그리고 저의 시댁 식구였습니다.
그날 이후부터 제가 어머님을 모시고 교회를 다니면서 기도를 어떻게 하냐고 물었더니 주기도문 10-50번 이상 읽으면 된다고 하셨습니다.
아! 처음에는 3시간 이상 걸리다가 나중에는 1시간이니까(에) 50번을 할 수 있었습니다.
알콜중독자였던 저는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함이라.”라 말씀하시는 전도사님의 설교에 찔림을 받았습니다. 매일 매일 기도하였습니다.
사람답게 살고 싶으니 술을 끊게 해달라고 기도하기도 하였습니다. 믿어지지 않는 일이지만 정말로 1년 만에 완전히 술을 끊을 수 있게 되었고 술이 없으면 잠을 자지 못하고, 밥도 먹지 못하였던 제가 어느 날 완전히 술을 잊고 살게 되었습니다.
주님께서 그 어르신을 통해 기도의 방법을 알게 하시고 기도의 응답으로 인한 기쁨과 기도하면서 주님과의 교제 속에서 당신의 사랑과 말씀에 대한 약속을 확증하여 주셨다고 믿습니다. 일이 점점 커져갔습니다.
수요예배. 금야예배, 주일예배. 이제는 십일조 해야 한다, 집의 시어머님은 10년을 다녀도 저처럼 요란하게는 다니지 않았다고 은근히 말씀하시는 눈치셨습니다.
제 안에 있는 성령은 아침 첫 시간을 새벽기도부터 시작하게 하셨고 그로 말미암은 기쁨이 저의 몸과 입을 흔들흔들 찬양이 떠나지 않게 하였습니다.
주님께서 주시는 저의 기쁨과 평안을 그 누구도 빼앗아갈 수 없습니다.
2004년도 북송되어 집으로 갔을 때 어머님께서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열정적으로 주기도문, 사도신경, 기도하는 저의 모습을 보시던 저의 어머님께서
“하나님이 살아계신다. 네가 이렇게 변할 수 있다니~~~”
놀라워하시면서 저의 집 가정사에 대하여 이야기하여 주셨습니다.
저의 외할아버님은 일제 때 기독교 장로님으로 봉사하였다고 합니다. **여자중학교 교감으로 계시던 저의 외할아버님은 카나다에서 오신 선교사님을 통해 하나님을 만나게 되었고 교육자로 계시면서 교회를 섬겼다고 합니다.
**여자중학교 교감으로 섬기시면서 주일에는 교회에 나가셔서 장로님으로서 봉사에 적극적으로 섬기셨고 저의 아버님은 장인과 함께 교회를 다니신 것이 “죄 아닌 죄”가 되어 김일성정부의 감시를 받았다고 하셨습니다.
제가 부로커에 의해 강제 인신매매를 당하였지만, 저의 어머님의 말씀은 그 시간조차도 하나님의 축복이라고 말씀하여 주셨습니다. 교회를 10여 년째 다니셨던 시어머님을 만난 것입니다. (‘축복’은 “신에게 복을 빈다”는 뜻입니다. 하나님은 더 높은 어떤 신에게 복을 내려달라고 비는 분이 아니라, 복을 내려주시는 분입니다.)
우연이란 있을 수 없음에 고백하게 하는 놀라운 주님의 은혜였고 축복이었습니다. 저의 외할아버님과 저의 부모님들의 기도를 기억하여주사 험악한 곳에 팔려가지 않게 하여 주셨습니다.
저는 중국의 조선족 교회를 다니면서 하나님을 알게 되었고 기도하는 것마다 응답받는 놀라운 성령의 뜨거운 역사도 체험하였습니다. 중국정부의 북송이 날로 심해지자 시댁에서는 저를 한국으로 떠밀어 보냈습니다.
한국에 온 저는 또 다른 문화와 언어, 습관과 생활패턴을 배워가게 되었습니다.
외래어와 IT강국인 대한민국에서 적용하기란 쉽지 않았습니다. 차라리 중국에 있었을 때가 오히려 더 편하다는 생각을 할 정도였습니다. 지금 생각하면 그 시간들이 오늘 신학공부를 하는 데(‘하는데’가 아니라, ‘하는 데’ 곧 ‘하는 것에’라는 뜻이지요.)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그 시간들이 한국 사람을 이해하는데(하는 데) 많은 도움을 주었습니다. 제가 서울아산병원에서 간경화 진단을 받았을 때에도, 북한의 부모님들이 저의 이름을 한없이 부르시다 돌아가셨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에도, 장로교신학대학에서 30년 차이 나는 고등학교를 갓 졸업한 학생들과 공부할 때에도 늘 함께하시는 하나님, 모든 것을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중국인이라 한글과 한국말을 할 줄 몰라 번번이 직장에서 짤리우는 남편을 바라보며, 갑상선기능저하와 간염으로 진단받아 집에서 치료중인 남편을 바라볼 때조차 위로의 하나님, 사랑의 하나님, 위대하고 크신 하나님을 만났습니다.
학교를 다니면서 3,000원이 없어 점심밥을 먹지 못하고 기도 탑에 올라갔을 때에도, 3,000원이라는 돈이 없어 길에서 파는 떡을 먹고 체하여서 고통스러웠던 때에도, 재정 때문에, 물질 때문에 인간의 생각으로 목회자의 길을 포기하고 싶었을 때에도 등 밀어 주시는 하나님, 업고 가시는 하나님, 남몰래 흐르는 눈물도 닦아주시는 크신 하나님, 위로의 하나님을 더 뜨겁게 만나게 되었습니다.
학우들의 도움을 받도록 주님께서 사람을 붙여주셨고, 재정 때문에 울고 있는 저에게 마음의 평안으로 충만하게 하여 주었기에 때로는 배고픈 줄도 모르고 학업에 열중하였던 기억이 새롭게 생각납니다.
모든 고비 지나가고 시간들이 지나서 어느 덧 남편은 곧잘 한국어도 곧잘하시고 중국에서 온 아들도 친구들과 잘 적용(적응)하였습니다.
삭막할 줄 알았던 저의 집안이 오히려 풍족한 생활을 누리고 있었습니다. 여기저기에서 일들이 생겨 남편도 일자리가 생겼고 부족한 저에게도 전도사 사역의 길이 열리면서 재정이 채워지게 되었습니다.
모든 시간을 통해 저는 세상사람 날 버려도 주님만을 의지하도록 이끌어 가시는 성령님의 도우심과 부모님에게 넘겨받은 신앙의 바통이 너무나 귀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매일 매일 성경 읽고 쓰는 아들과 성실하고 순수한 남편을 주신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순간순간을 겸손히 살아내기를 기도합니다. 저에게 부어주신 시련과 고난은 주님의 사랑으로 저를 강건케 하였으며, 낮아진 마음으로 섬길 수 있도록 낮추어 주셨습니다.
주님의 사랑을 공동체로부터 받으면서 내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라 하신 뜻의 심오함을 깨닫게 되었고 여러 가지 질병치료를 받으면서 지체의 귀함을 알게 되었습니다.
올해는 유별하게 두 번의 수술을 받으면서 가장 약한 네 번째(넷째) 발가락 골절로 온몸조차(온몸을) 움직일 수 없음을 겸손히 깨닫게 하시면서 공동체의 한 지체 한 사람 귀함을 알도록 낮아짐에 대한 비움의 진리를 알게 하여 주셨습니다.
앞으로 어떤 사역을 할까? 하나님은 무엇 하기를 원하실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는 일은 무엇일가(까)? 늘 생각하며 기도하며 살았습니다. 성경 66권 속의 진리의 비밀을 알려고 금식과 철야를 하였습니다. 주님 앞에 간절히 물으면서 응답을 구하였습니다.
그런데 이미 나는 알고 있다는 것을 성령님께서 기억하게 하셨습니다. 우리 아버님의 신앙이었습니다.
우리 아버님은 나에게 하나님에 대하여 가르쳐 주신 적도, 기독교인이라 말씀하여 주신 적도 없으십니다. 그러함에도 나는 대한민국 땅에 와서 신학을 하고 있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기도를 하셨습니다. 그리고 1990년대에 들어서면서 “조선노동당의 축복”에 의하여 조선노동당에 입당할 수 있는 기회가 있었음에도 입당하지 않으셨습니다.
저의 아빠는 믿음으로 나를 키우셨습니다. 믿음으로 주님의 하실 일을 기대하며 나를 위해 기도하셨습니다. 일제 때 신사참배하였던 선배들처럼 배교하지 않으셨습니다.
우리 아빠는 정의의 하나님, 공의의 하나님을 바라보셨습니다. 그 믿음을 저에게 물려주었습니다. 자랑스러운 우리 부모님을 주님께서도 기억하여 주실 것이라 믿습니다.
나는 입으로는 예수 전하면서 행위는 탐욕과 거짓으로 가득 찬 목회자를 봐왔습니다.
기도 외에는 이런 유가 나갈 수 없다 하신 주님의 말씀을 우리 아빠는 믿음으로 구하였던 것처럼 우리 아빠와 같은 목회자가 되고 싶습니다. 나의 신앙의 롤 모델은 우리 아빠입니다.
김일성 독재 아래에서 묵묵히 주님만을 바라보시면서 믿음으로 살아내셨습니다.
목회를 하던(하든) 선교를 하던(하든) 기도가 없는 믿음은 물 위의 부평초입니다. 한 사람의 영혼을 믿음으로 바라보지 않으면 그 또한 주님 앞에서 거짓과 위선이라 생각합니다. (‘하던’은 과거형입니다. “목회를 하던 10년 전”이라고 씁니다. 그러나 ‘하든’은 “일을 하든지 말든지”와 같이 씁니다.)
믿음의 기도만이 병든 자를 고칠 수 있다 하셨습니다. 행함이 없는 믿음은 죽은 믿음이라 하셨습니다. 하늘의 별을 창조하시고 아래의 궁창을 땅이라 명하신 높고 위대하신 주님을 믿음으로 바라보면서 한 걸음씩 영혼구원 사역에 전진하렵니다.
성령의 충만함과 도우심이 선물로 받았으니 그 분께 의지하여 목회를 하렵니다.
신약의 바울이 성령의 인도하심에 의지하여 믿음으로 전도여행을 하였던 것처럼 하렵니다.
요란한 교회건물보다 한 영혼을 살려내는데 최선을 다하고 싶습니다. 웅장한 오페라 찬양대원들보다 실족하는
영혼이 없는지 살피는 것과 핍절되어 있는 영혼을 위해 기도하는 일에 최선을 다하고 싶습니다.
교회헌금 30%는 선교에 사용하고 싶습니다. 늘 언제나 무릎 끊고(꿇고) 기도하는 목회자로 주님 앞에 서고 싶습니다.
교회가 크던 적던(크든 작든) 이곳으로 보내주신 주님의 뜻이 북한 땅에만 향하여 있다고는 생각하지 않습니다. 지금 제가 선 자리에서 영혼 구원을 위해 최선을 다하여 나갈 때 주님께서 북한 땅의 산지도 저에게 허락하여 주실 것이라 믿습니다. (하나님은 금지하신 일이 없으십니다. ‘허락하여’는 안 써도 됩니다.)
성실과 근면으로 최선을 다하고자 하는 것이 저의 좌우명이기도 합니다.
이 마음 또한 주님께서 저에게 부어주신 가장 귀한 은사라고 생각합니다.
구약의 갈렙은 40년 광야 모세와 함께 최선을 다하고 가나안 정복 때에도 10지파의 가나안 정복에 동참하여 협력하였습니다.
(수 14:9) “그 날에 모세가 맹세하여 이르되 네가 내 하나님 여호와께 충성하였은즉 네 발로 밟는 땅은 영원히 너와 네 자손이 기업이 되리라 하였나이다”
(수 14:12a) “그 날에 여호와께서 말씀하신 이 산지를 지금 내게 주소서”
저는 대한민국 땅을 밝(밟)도록 허락하신 주님의 부르심 앞에서 그것이 학업이든 사역이든 맡겨주신 분부대로 순종하며 나갈 것입니다. 이 땅에도 실족하고 좌절하고, 실망과 실연으로 힘들어하는 주님의 백성들이 있습니다. 저에게는 이 땅 대한민국이 광야입니다.
광야에서도 오로지 하나님 여호와께 충성하였던 갈렙처럼 생존하는 그날까지, 남북한이 통일되어 정복하려 나갈 때까지 잘 훈련된 주님의 종으로 거듭나기를 기도하면서 저의 간증을 마무리 하려고 합니다.
긴 이야기 읽어주심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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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감사합니다. 주님의 은혜가 아니면 이루어질 수 없는 미국땅에 계시는 귀하신 후원자님과 나균용목사님과 칼로스회원들, 한국땅에 살고 있는 탈북민들의 만남은 이루어질 수 없음을 고백합니다.
하나님은 오늘도 살아계십니다는 고백이 절로 나오는 기적같은 만남이 너무 감사합니다. 목사님께서 매일 올려주시는 카설교를 통해 자신을 돌아보는 시간들이 많아졌습니다. 주님께 감사와 영광과 감사를 드립니다. 저의 후원지님도 늘 건강하시고 행복한 시간을 주님안에서 늘 보내시기를 기도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