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난번에 김장 배추 모종을 심어 놓고 무더위에도 잘 자라주어 대견하고 고맙다는 이야기를 했던 것 같다. 뿌리를 내렸으니 더 이상 물을 주지 않아도 된다는 이웃 아재의 말씀을 듣고 금년 배추농사 잘 되겠다 생각했다.
추석 연휴 기간 아이들과 며칠 보내고 시골에 왔다. 도착하자마자 텃밭을 찾았다. 멀리서 봐도 시들지 않고 푸르게 잘 자라고 있었다. 기분이 엄청 좋았다. 불볕같은 햇살에도 견뎌내다니 말이다.
이웃밭 아재가 속상한 목소리로 말했다. 추석 연휴 동안가족들과 어울린다고 며칠 밭에 오지 않았더니 벌레가 배추 속을 다 파먹었다고 우리 배추도 살펴보라고 했다.
가까이 다가가 자세히 살펴보니 배추가 살아있기는 한데 벌레가 속을 파먹은 게 반 정도 되었다. ㅎ 이걸 어째. 배추 겉잎을 갉아먹어도 속만 살아있으면 괜찮다고 하는데 그게 아니다.
새로 모종을 구해 심어야겠다고 고향에서 종묘상을 하는 친구에게 연락하니 삼천포에 모종이 동이 났단다. 멀리 산청 골짜기 육묘장까지 훑었는데도 모종이 없단다. 우리 배추만 그런 게 아닌 것 같다. 추석 연휴로 돌보지 않은 사이에 좀나방 담배나방 파밤나방 배추흰나비 애벌레들이 잔치잔치 했다고 한다. 무더위도 일조한 것 같다.
남아있는 것 살리려면 살충제로 방제를 해야한다고 한다. 지난 해에는 며칠 쪼그리고 앉아 핀셋으로 벌레 잡아 무농약 배추라고 누이들에게 자랑했는데... 농사짓는 친구한테 이야기 하니 목초액을 치라한다. 없으면 살충제 뿌려야 할 것 같단다. 다들 다 그런단다.
비는 오고 할 일은 없고 해서 우의를 덮어쓰고 핀셋 하나 들고 애벌레 잡으러 갔다. 벌레 하나 없는 배추도 있었지만 무슨 놈의 벌레가 그리 많은지 깜짝 놀랬다. 예전에 못 보던 벌레도 있었다. 친구가 말한 파밤나방 애벌레인가? 우중에 이게 뭐하는 짓인가 하면서도 일단은 눈에 보이는 벌레는 다 잡았다. 속을 파먹힌 것은 속이 꽉찬 결구배추가 되지 않는다니 아깝지만 그냥 뽑아버려야겠다.
부산 사는 누이한테 배추 모종 알아보고 구해서 내려오라 했다. 다행히 김해 어느 종묘상에서 구할 수 있었다고 한다. 모종값도 많이 올랐고 그것도 겨우 구했다고...
그런데 말이다. 배추 안 되면 김장 적게 하면 되고 그냥 안 심고 절인 배추 사도 되고 그것도 아니면 사먹으면 되는데 굳이 심으려고 하는 이 심사는 대체 뭘까?
어제 오늘 삼천포에 비가 많이 왔다. 어제는 비가 참으로 반가웠다. 그동안 많이 가물었기 때문이다. 오늘은 바람과 함께 폭우가 쏟아졌다. 무섭게 내렸다. 이 비바람에 무 배추가 잘 버텨냈을까. 내일 날 밝으면 살펴봐야겠다.
시골에서 땅을 일구면 작물이 자라는 모습에서 기쁨도 느끼고 건강도 좋아지는 느낌이 든다. 몸이 훨씬 가벼워진다. 오래 살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올 여름처럼 날씨가 도와주지 않을 땐 힘이 많이 든다. 심어 놓은 작물 때문에 예정했던 여행도 미룬다. 떠나지도 못 한다. 농사 그만 할까 하는 생각이 든다. 갈등이 생긴다.
폭우에 피해 없기를 빈다. 비는 그치고 귀뚜리 우는 소리가 요란하다. 가을이 오겠지. 늘 행복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