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강경5가해20-2-1.zip
설의:법에 집착함은 다만 법이 곧 법이 아님을 알지 못한 때문이고, 비법을 취함도 다만 비법이 곧 법임을 알지 못한 때문이니, 하나의 참 法界는 옳음도 없고 그름도 없으며, 이 없다는 것도 또한 없는 것이니라.
이런 까닭에 말하되 “어찌 한 법 가운데 법이 있고 법 아님이 있으리오”하니 혹 이 법과 법 아님을 분별한다면 하나를 잡고 하나를 놓는 것이니 어찌 마칠(깨달을) 기약이 있으리오?
청봉착어:법이 곧 비법이요
비법이 곧 법이어서
진공 법계는 시비가 없으니
법도 비법도 집착하지 말지니라.
傅大士:有因은 名假號요 (假號는 一本에 作無號라) 無相은 有馳名이라 有無無別體하여 無有有無形이로다 有無無自性이거늘 妄起有無情이니 有無가 如谷響거니 勿着有無聲이니라
부대사:원인 있다는 것(有因)은 거짓으로 부르는 것이요
상이 없다는 것(無相)은 이름을 전함은 있음이라
있다 없다는 것(有無)은 달리 실체가 없으니
있다 없다(有無)하는 것은 형체가 없음이니라.
없고 있음이 自性이 없거늘
있다 없다는 알음아리를 망령되이 일으키니
있다 없다(有 無)는 마치 골짜기의 메아리 같거니
있다 없다는 소리에 집착하지 말지니라.
冶父:金不博金이며 水不洗水로다
說誼:只是一般金이거늘 豈分能博所傅이며 只是一般水인데 豈分能洗所洗리오 恁?則法則一味거늘 見有二取하니 二取相亡하여야 一味方現하리라
야부:金으로 금을 바꾸지 못하며 물로써 물을 씻지 못하도다.
설의:다만 같은 하나의 금인데 어찌 바꿔줄 것과 바꿔 가질 것으로 나누며 다만 같은 한 가지 물인데 어찌 씻는 물과 씻어지는 물로 나누리오.
이러한즉 法은 곧 한 가지(一味)이거늘 두 가지 소견을 취하니, 두 가지(아, 법상) 집착하는 相을 없애야 한 가지(一味)가 바야흐로 드러나니라.
청봉착어:상이 없다는 것은
그대로 상이 없다는 이름은 있다 함이고
있다 없다는 것은 상으로 쫓는 명사이니
참 있다면 그 무엇이고? 참 없다면 없다는 건 무엇인가?
있다 없다는 건 실상을 모르는 집착이니라.
冶父:得樹攀枝는 未足奇이니 (攀枝는 一本에 作攀高라) 懸崖撒手하여야 丈夫兒로다 水寒夜冷魚難覓하니 留得空船載月歸로다
說誼:得一心存이 未是奇이라 一處亦亡하여야 是丈夫니라 到這裏여서는 凡情이 脫盡하고 聖解도 亦亡하니 但將無私照하여도 却來是非場이로다
야부:나무에서 가지를 잡음은 족히 기이함이 아니니
벼랑 끝에서 손을 놓아야 비로소 장부로다.
물도 차고 밤도 깊어 고기 찾기 어려우니
빈배에 달을 싣고 돌아 오도다.
설의: 존귀한 한 마음을 얻는(깨달아) 것이 기이한 게 아니라 한 곳(心處)이라는 것마저 없어야 장부이니라. 이에 이르러서는 범부의 식정이 모두 다하고 성인의 안다는 것도 또한 없애야 하니, 다만 사사로운 비춤을 없앨지라도 도리어 是非의 場에 옴이로다.
청봉착어:정(定)을 얻었다 하면 정이 아니니
얻었다는 그마저 얻음이 없어야
참정(定)에 듦이요
없고 없음마저 없음이 참 없음이니라.
以是義故로 如來常說하기를 汝等此丘는 知我說法如筏喩者하나니 法尙應捨거늘 何況非法이랴
이런 뜻이므로 여래가 항상 말하기를 ‘너희들 비구는 나의 설법을 뗏목과 같은 것에 비유하라’ 한 것을 알아야 하나니, 법도 오히려 마땅히 버릴 것이거늘 하물며 법 아닌 것이랴?”
淸峯:강을 건너면 배를 버리고 목적지에 도착해야 하듯이 달을 가리키는 손가락을 잡고 있지 말라는 것으로 8만4천 법문은 실다운 것이 아닌 방편설 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병이 없음에 약은 자연 필요치 않음과 같은 것이다.
미(迷)하면 상에 끄달리고 개오(開悟)한 자는 양변을 여의게 되는 것이니 사람이 공하고 법이 공하여 유무(有無)를 따로 세울 것이 없어, 본래 실상이 없건만 허망한 분별심으로 애착하고 집착하게 되는 것을 막고자 하신 것이다. 따라서 유무의 자성이 없고, 유무를 초월한 자성을 요달하면 상에 집착할 것이 없음을 깨닫게 되는 것이다. 법상(眞理)에 집착하지 말라는 뜻은 일체 모든 것이 있어 진리라고 생각하는 그 또한 망념된 생각이므로 거기에 집착하지 말라는 뜻이니, 하물며 진리 아닌(도리에 맞지 않는) 것이랴? 한뜻을 바로 알면,
“둥근 것은 둥근 것을 보지 못하고, 눈은 눈을 보지 못하며, 대통지승불이 십겁을 좌선해도 불법을 보지 못했다”한 이 뜻을 알리라. 법이라고 하는 법상은 병을 치료하는 약이며 비법상은 치료해야 하는 병과 같은 것이다.
병을 치료하고 나면 약도 없이 해야 하거늘 병(非法)이야 하물며 말해 무엇하랴?
“불로써 어찌 불을 끌 수 있으랴? 반야바라밀을 행한다고 하면 강을 건너면 배를 버리고 갈 곳에 이르르면 지팡이를 버려야 할 것이니라”
渡江不顧船 도강불고선 하고
到家杖便休 도가장편휴 하니
得魚更忘筌 득어경망전 이오
得意忽忘言 득의홀망언 하라
강을 건너면 배를 버리고
갈 곳에 이르면 지팡이를 버리리니
고기를 잡은 후엔 그물을 버릴 것이요
뜻을 얻었으면 말을 잊어 버려라
說誼 : 佛所說法은 只是入道方便이니 依方便而入道則可이나 守方便而不捨則不可하니라 方便도 尙應捨離이니 此離를 亦何所存하리오
설의 : 부처님이 법을 설하신 것은 다만 道에 들어가는 방편이니, 이 방편에 의해서 도에 들어가는 것은 옳거니와 방편을 지키(묶임)고 버리지 않음은 옳지 못하니라. 方便도 오히려 마땅히 버려야 하는 것이니 이 버려야 할 것을 어찌 보존하리오?
청봉착어:교법은 깨달아 들어가게 하기 위한 비유의 말씀이므로 이 말에만 쫓으면 구경의 깨달음을 얻지 못하니 방편설에 집착하지 말라 하신 것이며,
따라서 법 아닌(이치에 맞지 않는 삿된 소견) 것이랴 하신 것이다.
圭峰:曲分爲二하면 初는 正結歸中이요 後는 引說以證이니라 筏喩는 假言顯義이니 不應如言執義니라 不執은 卽爲不取이니 非全棄也니라 偈에 云하되 彼不住隨順은 於法中證智라하고 論에 釋云하되 不住者는 得證智捨敎이니 如到彼岸이고 隨順者는 隨順彼證智之敎法이니 如未到彼岸이라 하다 無着이 云하되 法尙應捨者는 實想生故이고 何況非法者는 理不應故라 하다
규봉:상세하게 둘로 나누어 보면 처음은 바로 中道에 돌아가게 결론을 짓는 것이고 나중은 말씀을 베풀어 증명하신 것이다.
[結歸中이라는 것은 不應取法은 있음(有)을 여읜 것이고 不應取非法은 없음(無)을 여읜 것이니 이미 유, 무를 여의었으면 곧 中道에 돌아간 것이다]
뗏목에 비유한다는 것은 거짓인 말(방편)을 빌려서 뜻을 드러낸 것이니 마땅히 말과 뜻에 집착하지 말아야 한다. 집착하지 않음은 곧 취하지 않음이 되는 것이니, 모두를 버린다는 것은 아니다.
[不執等이란 만약 모두를 버린다는 말로 잘못 안다면 모든 법의 공한 뜻을 알 수 없는 것이다. 다만 그 병만 제거하고 그 법은 제거하지 않음을 말하는 것이다]
偈에 이르되 “저 머무르지 않고 순리에 따르는 것은 일체 가운데 지혜를 증득했다” 했고, 論에서 해석해 말하되 “不住란 깨달아 지혜(證智)를 얻으면 가르침(교법인 방편설)을 버린다는 것이니 피안에 이르름과 같고,
隨順이란 저 깨달아 알아야 할 지혜(證智)를 깨닫게 일러주신 敎法(말)만을 따름이니 피안에 이르지 못하게 되는 것과 같다”고 했다.
無着이 이르되 “法尙應捨란 實相이 나는 까닭(마땅히 법에 집착하지 않음으로 실다운 상이 드러남)이고, 何況非法이란 이치가 맞지 않은 까닭이라고” 했다.
[應捨란 것은 실상의 지혜를 얻음은 상도 없고 얻음도 없으므로 마땅히 버린다(應捨)라 하는 것이다. 理不應(이치에 맞지 않다)이라 하는 것은 모든 법의 실상(말로나 뜻으로나 생각으로 이르를 수 없는 실다운 본성)을 뺀 그 밖의 것은 모두 마의 일(삿된 것)인 때문이다]
청봉착어:물은 물이 아니니
바다 물을 말해도 입술도 적시지 못하니라
입술을 적시지 못하는 것이라도 물은 물이니
물과 물 아님 모두를 떠나야 참다운 물을 아니라.
六祖:法者는 是般若波羅蜜法이요 非法者는 生天等法이라 般若波羅蜜法은 能令一切衆生으로 過生死大海케하니 旣得過已하여서 尙不應住일진대 況生天等法을 而得樂着인가
육조:法이란 반야바라밀법이요, 非法이란 천상에 태어나는 것(執着)등의 법인 것이다. 반야바라밀법은 능히 일체중생으로 하여금 생사의 큰바다(苦海)를 건너가게 하는 것이니, 이미 건너감을 증득 했을진대 오히려 마땅히 머물(執着)지 않을 것이니 하물며 天上에 나는 등의 법의 즐거움에 집착하겠는가.
傅大士:渡河에 須用筏이되 到岸에 不須船이니라 人法知無我하여 悟理?勞筌이리오 中流도 仍被溺이거늘 誰論在二邊인가 有無에 如取一하면 卽被汚心田되리라
부대사:강을 건너는 데는 모름지기 뗏목을 쓰되
언덕에 이르러서는 뗏목을 쓰지 않는지라
人과 法에 있어서 我가 없음을 알아
도리를 깨달았으매 어찌 방편(筌)을 빌리리오?
가운데(中道) 흐름에도 이에 빠지는 것이거늘
누가 二邊이 있음을 말하는가?
있고 없음에 만약 하나를 취하면
곧 마음 밭(본성)을 더럽히게 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