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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 9;1-7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2017. 12. 24. 성탄주일.
메리 크리스마스. 즐거운 성탄입니다. 모두들 아기 예수 탄생과 함께 예수님을 경배하면서 동방박사들과 목자들이 발견하고 깨달았던 것같이 이 땅에 오신 예수 그리스도가 답이고 모든 소망임을 세상 가운데 선포하시기를 부탁을 드립니다. 주님께서 여러분과 함께 하십니다. 주님이 오셨습니다. 구원하셨고 축복하시고 사랑하십니다. 아멘. 먼저 오늘 본문의 내용을 간략하게 묵상을 합니다.
1. 본문의 내용은 절망의 현실입니다. 이사야서를 보면 고통과 절망에 빠져 신음하는 이스라엘 백성들을 봅니다. 적어도 5장에서 본문의 9장에 이르기까지 흑암이라는 단어가 여러 번 반복합니다. 반복은 강조를 의미 합니다. 그만큼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이 흑암이었습니다. 흑암이라는 것이 강조될 만큼 사람들에게, 이웃 나라들에게 이야기 거리와 우스게 거리로 조롱을 받았습니다. 5:30에 그 날에 그들이 바다 물결 소리 같이 백성을 향하여 부르짖으리니 사람이 그 땅을 바라보면 흑암과 고난이 있다. 8:22절에도 땅을 굽어보아도 환란과 흑암과 고통의 암흑뿐이리니 그들이 심한 흑암 중으로 쫓겨 들어가리라, 9:2절에도 흑암에 행하던 백성 이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아무리 좋게 보려고 해도 좋게 볼 수 있는 부분이 그 어느 것이 없습니다. 삶 전체가 암흑과 고난과 흑암입니다. 절망이고 소망을 가질 수 없습니다. 여러분, 얼마나 서글픕니까? 그런데 6:13절 그 중에 십분의 일이 남아 있을지라도 이것도 삼키운 바 될 것 이라고 말씀합니다. 무슨 말씀입니까? 지금도 서글픈데 그 중에 90퍼센트가 없어지고 10퍼센트만 남아도 마지막 남은 인원까지 다 절망이고 흑암이라고 합니다. 나중이 더합니다. 여러분, 이스라엘 백성들의 삶이 얼마나 비참하고 고통스러운 가를 보여줍니다. 이런 상황 가운데 하나님은 이사야를 불러 고통과 어둠과 절망에 빠진 이 백성들을 위로하고 소망을 주는 사명을 허락하십니다. 그리고 그 약속의 증표로 한 아기를 말씀합니다. 이 아이를 통해 장차 선민 이스라엘은 모든 흑암과 고통으로부터 구원을 받고, 이 아이를 통해서 장차 그들의 대적을 남김없이 심판하고, 이 땅에서 몰아낼 것이며, 이 아이를 통해서 평화의 왕국을 영원토록 세우실 것을 말씀으로 약속 합니다. 특히 9:1절에 스불론과 납달리 땅은 기원전 732년에 앗수르에게 점령당해 앗수르의 영토로 편입되었습니다, 이로 인해서 많은 이방인들이 몰려와서 살게 됨으로 선민으로서의 정체성이 크게 흔들렸습니다. 끊임없는 전쟁과 역사를 통해서 관심을 끌지 못했던 소외된 땅입니다. 그래서 이곳 사람들은 기뻐하려고 해도 기뻐할 이유가 없으며, 감사하고 싶어도 감사할 일이 없으며, 삶에 평강이 아니라 고통과 두려움과 소망이 없는 저주의 나날이 바로 이들의 삶이었습니다. 조금도 소망의 빛이 보이지 않았고 한 줄기의 빛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어떻게 이런 땅에 이런 환경 속에서 소망이 회복되며 기쁨과 평안을 되찾을 수 있습니까? 어떻게 이전의 이스라엘의 회복과 성장을 성취하고자 하는 것이 가능합니까? 전혀 불가능한 일입니다. 그렇습니다. 여러분, 인간의 생각이나 인간의 힘으로는 불가능합니다. 한 나라의 정치나 경제적 상황을 보면 이런 일은 절대 불가능합니다. 우리가 인생을 경험한대로 인간의 힘으로 평안을 회복하고 기쁨을 되찾고 감사를 일으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살아갈수록 더 많은 인생의 짐과 어려운 현실이 우리의 발목을 잡습니다. 그러나 이런 생각지도 못하고 경이롭고 기적 같은 일을 하나님이 하신다고 합니다. 기묘자, 모사,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강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이 하십니다. 이 예수님을 오늘 우리에게 보내셨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우리의 마음에 기쁨을 주시고 평안을 주십니다. 하나님이 하시면 됩니다. 사사기 7장에 보면 3백 명의 기드온 용사가 미디안의 연합 대군을 전멸시키고 이스라엘을 구원하는 장면이 나옵니다. 이것은 기드온의 손이 연합 대군들을 물리치고 승리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손이 그들의 대적을 기드온을 통해서 물리친 것입니다. 이스라엘이 목숨을 걸고 싸워서 승리한 것이 아니라 전쟁에 능하신 기묘자요 모사이신 하나님이 자기 백성들을 대적의 손에서 구원했습니다. 여러분, 오늘 우리는 어떻습니까? 앗수르와 바벨론에게 멸망당하여 그야말로 아수라장이 되어버린 스불론 땅과 납달리 땅의 모습과 다름없지요 하지만 어느 날 어둠 속에서 길을 잃어버린 채 절망 속에서 한 치 눈앞도 볼 수 없는 칠흑 같은 시간을 지날 때 그때 우리의 삶 속에 한줄기 빛으로 다가오신 분이 있습니다. 그 분이 오시면 스불론과 납달리처럼 어둡고 고통스럽던 우리의 믿음이 환하게 밝아집니다. 하늘도 땅도 나무도 별도 달도 꽃도 바위도 돌멩이 하나도 아름답게 보일 수가 없을 때에, 삶의 어깨를 무겁게 짓누르던 고통의 멍에가 하나하나 벗어집니다. 눈만 뜨면 채찍질 하듯 내리치던 삶의 문제도 하나하나 사라집니다. 그런데 하나님은 이사야를 통해서 이 소망의 말씀을 하십니다. 사7;14, 그러므로 주께서 친히 징조로 너희에게 주실 것이라,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그 아들의 이름이 임마누엘 예수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심입니다. 사 9:6-7,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낳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그 어깨에는 정사를 메었고 그 이름은 기묘자라, 모가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니라,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자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 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히 이를 이루시리라. 그래서 이스라엘이 결국에는 승리의 기쁨을 나누게 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오늘도 주님의 오심이 찬송과 경배를 받으실 일이지만 우리의 경배를 받으신 주님으로 여러분의 흑암 같은 삶의 현장에서, 기묘자, 모사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강의 왕으로 구원과 함께, 삶 가운데 승리가 있으시기를 주님의 이름 축원을 드립니다.
2. 그러면 본문에서 절망의 현실을 반전시킬 소망의 미래를 만들어 가실 분이 누구신가, 본문은 그 분을 가리켜서 기묘자, 모사,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강의 왕이라 합니다. 마 1:23,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은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하셨으니 이를 번역한즉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함이라. 이 말씀은 이사야가 예수님 탄생 700여 년 전에 이미 예언을 했습니다. 그런데 여기 처녀는 시집을 가지 않은 여자나 결혼을 하지 않은 여자라는 의미가 아니라 동정녀입니다. 동정녀라는 말은 남자를 한 번도 가까이 하지 않은 사람입니다. 눅 1;31 보라 네가 수태하여 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할 때에, 눅 1;34, 마리아가 천사에게 말하되 나는 사내를 알지 못하니 어찌 이 일이 있으리까? 동정녀입니다. 마리아는 분명히 남자를 알지 못했던 동정녀입니다. 그런데 동정녀를 통해서 하나님은 이 땅에 한 아이, 예수 그리스도, 구세주, 메시야를 주십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 일이 이루어지나요?
2-1. 소망의 미래를 만들어 가실 분은 예언하신대로 그대로 700여년 후에 이루어집니다. 그러면 어떻게 동정녀가 아기를 가질 수 있는가? 성경은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라 기록합니다. 마태1;18예수 그리스도의 나심은 이러하니라. 그 모친 마리아가 요셉과 정혼하고 동거하기 전에 성령으로 잉태된 것이 나타났더니. 마1;20, 다윗의 자손 요셉아 네 아내 마리아 데려오기를 무서워 말라 저에게 잉태된 자는 성령으로 된 것이라. 성령으로 잉태 되었습니다. 원래 이스라엘의 혼례는 정혼을 하고 나중에 신부 값을 치루고 얼마를 기다리다가 결혼을 허락 받고 결혼식을 올립니다. 그리고 합방을 하는데 아기 예수님은 이러한 과정을 거치지 않습니다. 이 것은 기독교의 절대 진리입니다. 이해가 되고 논리적으로 설명이 되어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닙니다. 이 것은 진리로서 믿음으로 받아드립니다. 눅 1;35, 천사가 대답하여 가로되 성령이 네게 임하시고 지극히 높으신 이의 능력이 너를 덮으시리니 이러므로 나실 바 거룩한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으리라. 그 이후 1;37, 38절에서 하나님의 모든 말씀은 능치 못하심이 없느니라. 는 말씀에 대하여 마리아는 주의 계집종이오니 말씀대로 내게 이루어지이다. 그대로 하나님의 뜻을 받아들입니다. 마리아는 성령에 의하여 잉태하고, 그리고 한 아기를 낳습니다. 메시야가 아기로 오실 것에 대하여 사9;6 이는 한 아기가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우리에게 주신 바 되었는데 이 예언이 마침내 이루어집니다. 메시야가 아기의 몸으로 오셨습니다. 예언의 말씀이 약 7백년 후, 마리아에게서 이루어졌습니다. 그런데 사 7;14절 보라 처녀가 잉태하여 아들을 낳을 것이요 그 이름을 임마누엘이라 하리라, 임마누엘은 히브리어로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 는 뜻입니다.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계시다는 것은 구원과 모든 삶의 영역 가운데 함께하심입니다. 그래서 임마누엘은 하나님의 임재를 나타냅니다. 그러면 임재가 무엇인가? 이스라엘 백성들이 시내광야를 거칠 때, 불과 구름기둥으로 인도하셨습니다. 그때에 성막은 하나님 임재의 상징이었습니다. 요1:14절에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거하시매는 헬라어 에스케노센(έσχήνωσεν)으로 거주하다. 장막을 치다 는 뜻입니다. 성막은 이스라엘 12지파의 진, 한 가운데 쳐졌고 그 곳에 하나님께서 거하셨습니다. 이런 것처럼 성육신 하신 예수님께서 그의 이름으로 모이는 우리 가운데 함께 기거하시고, 함께 계신다는 말씀입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나와 함께 에스케노션 합니다. 장막을 치시고 거하십니다. 그 일을 위해서 아기 예수님을 이 땅에 보내셨습니다. 이 것은 예언의 성취입니다.
2-2. 그럼 왜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앗수르에게 고통을 당하게 하셨는가? 입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있어서 고난과 흑암과 어두움은 이유가 있습니다. 이스라엘의 불순종이 그들과 그들의 자손들을 고통하게 만들었습니다. 스블론과 납달리 땅을 고통과 흑암의 땅으로 만들었습니다. 그들은 고통을 당해도 그것을 깨닫지 못하고, 어려움 속에서 하나님을 의지하지 아니하고, 강대국을 믿고 사람을 의지했기 때문입니다. 자신들의 불순종이 앗수르의 침공으로 이어졌습니다. 그런데 가까이는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멀리는 아담이 잘못한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서 주님이 이 땅에 오셨습니다. 그러면 우리는 이 땅에 오신 예수님에 대하여 어떻게 해야 합니까? 동방박사처럼 목자처럼 예수님에게서 구원의 빛을 보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의 능력을 덧입어야 합니다. 하나님은 아들로 오셔서 하나님의 주권과 능력을 인정하고 순종함으로 승리의 영광을 얻을 것을 원하셨습니다. 그래서 영존하시는 아버지로 오셔서 연약한 우리를 끝까지 책임지시고 보호해 주실 것을 약속하셨습니다. 그 분의 이름이 이 사실을 보증하고 있습니다. 바로 그가 베들레헴에서 나신 아기 예수시며, 우리 모두의 왕이십니다. 여러분, 스스로 인생을 책임지고 나아가는 사람에게는 늘 미래가 두렵고 불안합니다. 아무리 잘나가는 인생이라도 현실은 어둡고 고통스러울 뿐입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믿고 의지하는 자는 어떤 환경과 조건 속에서도 기드온처럼 승리합니다.
스블론과 납달리 땅이 절망할 수 없었던 이유는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약속, 하나님의 구원을 기다렸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흑암에 행하던 백성이라도 하나님은 능히 생명의 빛을 비춰주시고, 소망을 주십니다. 마침내 때가 되매 아들을 보내어 영원한 사랑으로 온 세상을 구원하셨습니다. 마1;21,아들을 낳으리니 그 이름을 예수라 하라. 이는 자기 백성을 저희 죄에서 구원할 자이심이라. 예수님만이 구원받는 유일한 수단입니다. 예수님만이 나를 흑암에서 해방시켜주십니다. 이러한 복음의 소식을 온 세상 사람들은 듣고 싶어 하면서도, 아기 예수가 기다리던 그리스도인 줄을, 메시야인 줄을 알지 못합니다. 그래서 성탄절은 복음전파의 기회입니다. 2017년 성탄절을 통해 우리의 잃어버렸던 영육간의 귀한 것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회복되며, 또한 우리의 이웃에게 복음이 전파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3. 이름의 뜻입니다. 그러면 오늘 말씀 속에 나오는 임마누엘, 하나님이 나와 함께하시다는 구체적 예수님의 이름의 뜻이 무엇입니까? 여러분, 병원의 신생아실에 가면 갓난아기들이 누워있는데 저마다 명패에 쓴 이름이 있습니다. 부모나 집안 식구들이 태어나기 전부터 아이의 이름을 짓습니다. 어떤 집안은 태어날 아이의 이름을 놓고 싸우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유가 무엇입니까? 아이의 이름이 장차 태어날 생명의 인격이고 삶이기 때문입니다. 다른 사람들보다 더 잘되고 더 복되고 뛰어난 존재가 되기를 원하는 것이 부모의 마음이고 그런 사랑하는 마음이 자녀들의 이름에 나타나기를 원합니다. 5년 전에 혜정이가 첫 아기를 출산 했습니다. 출생 전부터 아이의 이름을 가지고 친 할아버지께서 많이 고민을 했습니다. 믿는 집안이고 증조할아버지께서 장로님이시고 그래서 쉽게 이름이 나올 줄 알았는데 그것이 안 되었습니다. 마지막에는 저한테 부탁이 왔는데 저도 시댁에게 위임을 했습니다. 서로 양보하다가 아기가 세상에 나왔습니다. 그래도 미리 기도하면서 부모가 부른 이름이 있었는데 이레입니다. 정 이레. 그런데 정 이레가 호적에 올랐습니다. 여호와 이레의 이레로 정하고 호적에 올렸답니다. 두 째 아들 정 이안은 히브리어로 신의 선물, 기쁨이고 요한의 독일식 발음이 이안입니다. 여러분, 저의 이름이 무엇입니까? 성은 이요 이름은 서로 상에 메울 열입니다. 제가 서로 서로 중간자의 입장에서 메울 것은 단 하나 밖에 없습니다. 여러분을 주님 앞으로 인도하는 중보자 역할입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십자가 복음 앞에 여러분을 세우는 것입니다. 생각해보면 제가 태어날 당시에는 우리 가문이나 주위에는 예수 믿는 사람이 한 사람도 없었지만, 하나님은 저를 복음의 일꾼으로 부르셨고 제 이름 그대로 현재를 살아가도록 했습니다. 오늘 이스라엘을 위하여 어린아이가 태어났습니다. 문제는 아이의 이름이 특이합니다.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그리고 평강의 왕이라고 했습니다. 그러면 왜 예수님의 이름의 뜻이 이렇습니까? 하나님이 우리와 함께 하시는 분으로서 나에게 있어서 기묘자, 모사,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시는 아버지, 평강의 왕이어야 나에게 주신 영역과 삶의 승리를 가져올 수 있습니다. 구원의 문제가 그렇습니다. 인생, 성공의 문제도 그렇습니다. 관계하는 모든 관계가 그렇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시간 여러분에게 그렇게 되시기를 축원합니다. 그러면 왜 하나님께서 이렇게5가지로 말씀을 하셨습니까?
3-1. 기묘자, 모사입니다. 기묘자, 모사라는 것은 전쟁에 있어서 탁월한 지략가를 의미하는 단어입니다. 전쟁이나 국가의 경영에 있어서 그 누구도 상상할 수 없을 정도의 뛰어난 계획을 세우는 지혜 자를 말합니다. 그러면 왜 기묘자 모사가 되어야 합니까? 오늘 우리는 인생의 전쟁터에서 살아갑니다. 인생 성공이 내게 있지 않습니다. 모사이고 기묘자이신 예수님께 있습니다. 바로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보내주신 그 신기하면서도 신비스런 지략가 모사인 예수님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은 우리가 가진 능력을 뛰어 넘어 기묘하게 하나님 나라를 내 안에 보여주시는 기묘자이시고 지혜로 하나님 나라를 만드시는 모사의 주님이십니다.
2012년 12월 23일 고베 신문에 사회면 1면에 오단 크기로 마음의 병, 5200명의 선생님, 이란 타이틀로 기사가 난적이 있습니다. 2012년 한 해 동안 5200명의 선생님이 정신적 공항으로, 마음의 병으로 휴직을 했답니다. 정신적 박탈감으로 더 이상 아이들을 가르칠 수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이런 일이 어디 일본 뿐 입니까? 요즘 한국의 젊은이들도 상대적 박탈감으로 절망합니다. 그런데 이런 절망과 고통은 누구에게나 있고 전 세계적인 현상입니다. 너나 할 것 없이 모두 힘들고 어렵습니다. 노후에 대한 준비가 없어 미래가 불안하고 힘든 것은 다 마찬가지입니다. 상대적인 가난이 고통스럽지만 절대적인 가난은 더 고통스럽습니다. 그런데 우리 부모들은 그런 시대를 살았고, 그런 환경과 조건 속에서도 낙심하지 않고 지금의 국가의 기초를 놓았습니다. 주어진 영역에서 열심히 수고하고 땀 흘리며 살아 왔습니다. 무엇보다도 하나님 앞에 민족적으로 기도하면서 전진했습니다. 여러분, 지금의 국가를 이룬 것은 이 사람들이 절망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여러분, 포기하지 않으면 기회는 오고, 흑암을 물리치는 광명의 태양은 반드시 떠오릅니다. 이스라엘이 어떤 나라입니까? 하나님이 계획했던 나라입니다. 아브라함으로부터 12지파로 하나님께서 친히 인도하셨던 나라입니다. 그러나 이스라엘은 지정학적으로 늘 열강에 짓밟히는 나라와 민족이었습니다. 그래서 꿈에도 소원은 자주국방과 부국강병이고 우리도 한 번 잘 살아보자는 마음입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이 사모했던 것은 강력한 통치자 메시야입니다. 앗수르, 바벨론, 애굽이나 로마를 물리칠 만한 왕을 원했습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스라엘에게 한 아기를 약속하셨는데, 곧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입니다. 바로 그 분이 본문의 말씀에 기록된 한 아기입니다. 기묘자와 모사는 흔히 부르는 이름이 아닙니다. 특별한 뜻을 가지고 있습니다. 이름의 의미는 이렇습니다. 기묘자는 ‘신기한 이름’이라는 뜻이고. 모사는 ‘신기한 지혜’라는 뜻입니다. 아이의 이름이 신기하며 특별하지 않습니까? 왜 이런 이름을 주셨을까요? 하나님이시면서 사람이기 때문에 기묘자라는 신기한 이름입니다. 그리고 신기한 지혜를 지니고 있기 때문에 모든 것을 할 수 있습니다. 이 아이의 지혜는 사람이 측량할 수 없습니다. 불가능이 없습니다. 한마디로 신기하고 오묘한 신비스런 비밀이 담겨있습니다. 어느 누구도 감히 생각하지 못할 일, 통치하게 될 것을 700년 전에 보았고 예언이 되었습니다. 여러분, 오늘 날 경제가 어렵습니다. 그래서 정신적인 위기와 마음의 병이 들었습니다. 낙심과 절망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때를 가리켜서 딤후4;3-4,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좇을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좇으리라. 이 시대는 사람의 마음이 물질, 돈에 사로잡혀 있기 때문에 경제가 어려워지면 마음도, 믿음도 무너지는 그런 시대입니다. 그러나 여러분, 경제가 어렵다고 신앙까지 흔들리는 것은 하나님 백성의 모습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백성들의 신앙은 어려울수록 기묘자요 모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의 도우심과 인도하심을 사모해야 합니다. 왜 그렇습니까? 주님은 만물을 자신의 뜻대로 관리하시고 인생의 모든 생사화복을 주관하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7절 부분에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말씀합니다. 인간의 힘으로는 강대국 앗수르를 물리칠 수 없습니다. 흑암에 내려앉은 가난한 땅 고통의 땅을 회복할 수는 없습니다. 그러나 8절, 야곱에게 말씀을 보내시며 그것을 이스라엘에게 임하게 하시는 예수님만이 하실 수 있습니다. 여호와의 열심히 있습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땅에 오신 예수님이 여러분에게 기묘자, 모사가 되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3-2. 전능하신 하나님입니다, 전능하신 하나님이란 단순한 혈통을 이어받는 인간이 아니라 그 안에는 하나님의 신성이 충만함을 말씀합니다. 이 세상에 오시기 위해서 인간의 육신을 입으셨지만, 근본은 창조주 하나님이십니다. 아이는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 아이의 이름이 하나님이라는 것은 신적인 성품을 소유한 말씀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신성과 인성을 동시에 지닌 인격적인 주님입니다. 하나님은 이스라엘 백성들이 돌아와서 부를 이름입니다. 구약에서 자주 불렀던 이름입니다. 전능은 불가능이 없습니다. 전능은 무에서 만물을 창조한 것을 말하며, 이차적으로는 이 아이가 도래하여 행할 기적들을 말씀합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3년 공생애가 증명합니다. 이 아이에게 신적인 성품과 전능이 있기 때문에 어깨에 정사를 멜 수 있으며, 우주적 통치가 이루어집니다. 우주적 통치는 영원을 포함합니다. 처음과 끝입니다. 알파와 오메가입니다. 여러분, 이 세상 통치자들도 우주를 통치하려는 야망을 가진 자들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대부분 실패로 끝났습니다. 독일의 히틀러, 이탈리아의 무쏠리니, 일본도 그러했습니다. 일본의 천황은 항복했습니다. 히틀러는 세상을 떠나야 했습니다. 무쏠리니도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은 세계를 영원히 통치합니다. 예수님의 통치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만 국한 되는 통치가 아닙니다. 세계, 우주를 영원히 통치합니다. 선택 받은 이스라엘 백성들은 다만 통치의 모델로 제시되었습니다. 다시 말해서 이스라엘은 이 아이가 통치할 시범케이스입니다.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닙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여러분의 삶이 전능하신 예수님으로 통치되는 그런 복된 삶이 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3-3.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아버지는 한 가정을 책임지고 자녀들을 돌보고 부양하는 보호자입니다. 그런데 영존하시는 아버지입니다. 영존은 두 가지 큰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이 아이의 신성에서 유래된 것으로 영원한 존재를 말하며, 다른 하나는 죄와 죽음이 없음을 말합니다. 그러나 핵심은 아버지입니다. 아버지는 가장 편안하며, 친근합니다. 왜냐하면 철저한 보호자이시기 때문입니다. 아버지와 아들의 관계는 계급적인 것이 아니라 부양하는 보호자, 후원자입니다. 히브리 사고에서는 더욱 그렇습니다. 아버지는 무게와 거리를 무너뜨립니다. 아버지는 무게와 거리라는 담을 헐어버립니다. 예수님이 사람의 모양으로 우리 곁으로 와서 하나님과 우리 사이의 있는 무거운 담, 죄의 담을 실제적으로 제거했습니다. 엡2;13-14, 이제는 전에 멀리 있던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그리스도의 피로 가까워졌느니라. 그는 우리의 화평이신지라 둘로 하나를 만드사 중간에 막힌 담을 허시고. 이 아이 예수님이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있는 담을 헐어버리는 현장을 700년 전에 보았습니다. 결코 상상한 것이 아니라 역사적인 현장을 계시로 보았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사야 선지자가 아이 예수님을 전할 때에 기대감이 컸습니다. 왜냐하면 다음 후손들은 이 아이가 그 담을 허는 것을 실제적으로 목격할 것으로 기대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 아이가 700년 후에 이스라엘 땅에 왔습니다. 이사야 선지자의 예언대로 빛으로 오셨고, 실제적으로 막힌 담을 헐었지만 후손들은 이것을 몰랐습니다. 느낌마저도 없습니다. 거부까지 했습니다. 사도 요한은 당시 이스라엘 백성들의 모습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그 안에 생명이 있었으니 이 생명은 사람들의 빛이라 빛이 어두움에 비취되 어두움이 깨닫지 못하더라. 그가 세상에 계셨으며 세상은 그로 말미암아 지은바 되었으되 세상이 그를 알지 못하였고 자기 땅에 오매 자기 백성이 영접지 아니하였도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예수님은 영존하시는 아버지입니다.
3-4. 평강의 왕입니다. 왕은 통치적 개념입니다. 백성들을 돌보는 책임자로서 왕입니다. 왕의 일반적인 통치 개념은 왕궁에 앉아서 왕의 상징인 왕복을 입고 백성들을 통치합니다. 그러나 평강의 왕의 통치는 일반적인 통치 개념이 아닙니다. 평강의 왕은 왕궁에 있는 것이 아니라 항상 백성들과 함께 합니다. 예수님의 3년 공생애가 증명해 줍니다. 예수님은 3년 동안 사람들과 함께 했습니다. 변화 산 사건이 일어 날 때에 베드로가 주를 위하여, 모세를 위하여, 엘리야를 위하여 집을 짓고 변화 산에서 안주할 것을 요구받았을 때 주님은 거절하고 세상으로 내려 왔습니다. 무엇을 말씀합니까? 자기 백성들과 함께한 것입니다. 평화의 왕’이라는 말은 피 흘림이 없는 통치입니다. 피 흘림이 있다면 그것은 예수님의 피 흘림입니다. 여러분, 피 흘림이 없이는 세계를 통치할 수 없습니다. 세상의 군왕들은 다른 사람의 피를 흘려야 세계를 통치할 수 있지만, 이 아이 예수님은 스스로 피를 흘리는 방법으로 세계를 통치합니다. 피 흘림을 통한 통치는 누구나 동일합니다. 그러나 세상의 군왕들과 이 아이의 피 흘리는 방법, 그 의미는 확실하게 다릅니다. 세상의 군왕들은 남을 쳐서 피를 흘리게 하여 죽이고 포로 잡아야 만이 세계를 통치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이 아이는 자기 자신을 쳐서 피를 흘려 세계를 통치합니다. 세상의 군왕은 자유를 억압하는 통치이지만, 이 아이는 오히려 포로 된 자들에게 진정한 자유를 주는 통치입니다. 세상의 군왕과 이 아이의 차이는 그저 단순하게 생각하면, ‘너와 나’의 차이인 것 같지만 영원한 통치, 평화의 통치로 볼 때는 차원이 다릅니다. 그래서 이 아이의 이름은 기묘자, 모사가 됩니다. 그렇습니다. 이 아이는 우리에게 났고, 한 아들을 주신 바 되었습니다. 이분이 오실 만왕의 왕, 왕 중의 왕 예수 그리스도입니다. 예수님은 어깨에 정사를 메었고, 그의 이름은 기묘자, 모사요, 전능하신 하나님, 영존하신 아버지. 평강의 왕이십니다. 7절, 그 정사와 평강의 더함이 무궁하며 또 다윗의 위에 앉아서 그 나라를 굳게 세우고 자금 이후 영원토록 공평과 정의로 그것을 보존하실 것이라 만군의 여호와의 열심이 이를 이루시리라.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이 땅에 평강의 왕으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선포할 뿐만 아니라, 여러분의 삶의 전 영역에 평강의 왕이신 예수님의 은혜가 넘치시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을 드립니다. 여호와의 열심히 이를 이루실 것입니다. 메리 크리스마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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