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통령 선거때 재정을 맡았던 안희정을 비롯하여 강금원, 염동현, 정대철, 이상수, 이재정 등 많은 사람들은 한 시대의 잘못된 관행과 잔재를 털어 내려는 대통령 의지를 존중 하기 위해 각자 십자가를 기꺼히 졌다고 생각한다
높은 산을 오를때 고소 증세는 보통 해발 3,000 km 아상부터 느낀다 증세는 두통, 구토, 현기증, 설사 등 체질에 따라 다르게 나타난다 문재인과 노무현은 대우조선 사건에 이은 두번째 변호인과 의뢰인이 탄핵때 였다 남상국 씨 실명 거론이 빌미를 줬다 탄핵 재판중 제 17 대 국회의원 총선에서 열린 우리당은 299 석중 152 석을 얻어내 원내 과반수 정당이 됬으며 민주 노동당도 비례대표 8 석 포함하여 10 석의 국회의원이 탄생, 원내 제 3 당으로 약진했다 선거 막마지 정동영 의장의 노인 발언 역풍이 없었다면 더 많은 의석을 얻을수 있었다고 생각한다 탄핵 재판 내옹은 인용 3 명, 기각 6 명 이었다 헌법 제판관 9명은 3 명은 국회에서 선출하고 3명은 대통령이 지명 하므로 6명은 정치적 임명이 될수있다 탄핵이 마무리 되면서 나는 시민 사회 수석을 맡게 되었다 이라크 파병, 부안사태, 새만금 문제, 평택 미군기지 이전 문제 등으로 시민 사회의 손상된 관계 회복을 위해서 였다 시민사회 수석 시절 북에 사시는 막내 이모와 어머니의 만남이 있었다 이기준 교육부 장관겸 부총리 인선 파동으로 인사 수석과 민정수석이 하차한뒤 얼마 지나지 않아 민정 수석으로 자리를 옮겼다 이때 대통령은 대연정을 제시 하였다 이는 잘 되면 좋은 제도가 되겠지만 아직은 시기 상조 였으며 대통령을 만들어준 국민에게 등을 돌리는 배신 행위로 까지 비춰저 생각만을 던진 대통령은 지역 구도 타파를 위해서 였지만 여러 문제점이 있었고 대통령의 진정성 에도 문제를 삼는등 휴유증이 있었다 대통령도 참여 정부에서 가장 큰 실책 이였다고 말씀 하셨다 수사 지휘권 발동에 반발하여 검찰 총장이 사표를 냈다 동국대 강정구 교수가 국가 보안법 위반 사건을 천정배 법무 장관이 수사 지휘권을 발동해 김종빈 검찰 총장에게 불구속 수사를 지시했기 때문에 일어난 사건이다 법에 의해서 공개적 으로 정당한 행위 였는데 검찰 총장의 사표는 이해하기 힘든 점이 있었다 시법 개혁은 일반인의 관심 외지만 법조계 에선 마땅이 해야 할 일로서 인권, 여성, 소수자 보호, 연공 서열이 아닌 적임자 우선 순위 방향으로 기준을 세웠다 일부만 성공했다 과거사 정리 기본법이 국회를 통과 했다 국가의 잘못으로 희생된 고인들의 명예 회복과 관련 유가족이 받아야할 권리를 되찿아 주는 뜻으로 진실 화해를 위한 과거사 정리 위원회가 설치되어 미흡 하지만 성과를 거두었다 민정 수석을 두번 재임 하면서 끝내 못한게 고위 공직자 비리 수사처(공수쳐) 설치 불발과 국가 보안법을 폐지 못한 일이다 공수처 설치가 어려웠던건 수사 대상이 대통령 측근과 친,인척 청와대 주변 권력형 비리의 위험이 있는자가 기본 대상 이었으며 고위 공직자는 물론 국회 의원까지 포함하고 있어 국회가 법안 처리에 거의 파업을 했기 때문이다 보안법은 여당의 소국적 노력으로 당내에서 조차 원만한 소통이 이루어 지지 않았다 어쨋든 민정수석 두번째 자리를 사임했다 얼마후 총선 지원을 위해 열린 우리당 부산 시당 지원 연설을 했는데 취지와 본연의 목적과는 반대로 지역주의 타파가 아닌 부추김 조장 으로 기사화 돼 총선에 악 영향을 끼치면서 정치가 혐오 스럽고 무서움을 느끼기 까지 했다 이후 정무 특보를 밑았으나 딱히 할일이 많지 않았지만 남미의 에콰도르 대통령 취임식에 대통령 특사로 참석해서 장관급 보다 앞서는 대우로 접견했다 청와대 시절 민정수석 2회, 시민사회 수석, 비서실장, 정무특보 까지 4년을 재임 했는데 외각에 나간 첫 케이스 였다 밖에 있는 동안 반기문 전 외교부 장관이 UN 사무총장 으로 선출됬다는 낭보를 들었다 노 대통령이 신경 쓴것 중의 하나다 무엇보다 참여정부의 일관된 균형 외교에 있다 중국의 협조가 있어야 하기 때문이다 노 대통령 재임 시절 한,미 F T A 협상이 있었는데 대통령은 협상 본부장 에게 정치적, 군사적 영향을 고려 하지 말고 국익을 위한 장사꾼 논리로 협상에 임하되 모든 책임은 대통령이 지겠다며 협상팀에 자율권과 힘을 실어 줘서 미국과 대등한 입장에서 좋은 성과를 이룰수 있었다 남,북 정상 회담시 보여주는 요식 행위보다는 실질적 성과에 비중을 두었다 따라서 방북길을 철도로 정했으나 북측의 철도시설 부실로 뜻을 이루지 못하고 판문점을 통한 도보 섞인 승요차로 북에 갔다 분단의 상징인 판문점에 노란 경계선을 대통령이 넘어서는 순간 장면은 어떤 효과보다 크게 작용했다 남북 정상간 회의 결과는 대체로 만족 할만한 수준 이었다 다만 아쉬움이 있다면 남북 정상 회담을 정례화 시키지 못한것 이었는데 이는 김정일 위원장이 남쪽을 방문할 준비가 안돼 불발 되었다 참여 정부 출발과 함께 북한 관련 안보 문제는 늘 골치아픈 이슈에 자리 잡고 있었다 미국의 북한 자금 동결, 부시 정부의 강경 대응으로 대북 폭격설, 네오콘의 깅경 주장 속에 미국 중유 공급에 대응한 북한의 핵확산 금지 조약 탈퇴, 핵 프로그램 전개, 핵 사찰단 추방 등의 악화된 환경 속에서 노 대통령은 일관되게 대화를 통한 평화적 해결 주장을 내세워 부시 행정부의 강경 일변도의 정책을 무디게 만들고 북한의 신뢰를 얻을수 있어 북한의 모든 핵 프로그램을 폐기히여 동북아의 영구적 평화에 기여 할수 있는 논의 구조를 만들었다 한편 정동영이 열린 우리당을 외면 하는데 노 대통령은 무척 안타까워 했었다 민주당의 지역 주의를 개선 시킨 열린 우리당 이였기 때문이고 자신이 힘들여 만든 정당 이였기 때문이다 이명박 대통령 당선인은 노 대통령을 2 회 인사 했으며 대통령 자격으로 문재인이 1회 인사를 하였다 노 대통령은 퇴임후 고향 봉하 마을에 , 저자는 양산에 거주 하게 됬다 새 정부가 들어서며 미국산 수고기 수입 반대가 있었고 뒤이어 대통령 기록물 관리법 위반이 문제로 떠 올랐다 원본은 규정 대로 처리 하고 사본을 유출 했다는 것으로 별 의미 없는 법리 불비(法理]不備) 정도 였다
기록물 사건이 마무리 되는가 싶더니 쌀 직불금 문제로 망신 주기 하는걸 보고 이명박 대통령이 노 대통령을 상대로 각을 세우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본격적 비극은 노 대통령과 친분 있는 사람들과 기업이 표적 으로 검찰 수사로 이어졌다 우리들 병원, 태광 실업 등이 세무 조사를 받게 되고 세종 증권 매각 비리에 노건평 씨가 개입 되어 있었고 총무 비서관을 지냈던 사람 마저 불미스런 일로 구속 되었다 형님의 불미스런 일은 첩보 입수 했을때 대응 하기는 했지만 당사자들(노건평 씨와 기업 관련자)이 잡아 떼니 수사권이 없는 청와대 에서 어찌 할수 없었지만 적극적 으로 단속하지 못한 아쉬움은 있었다 노 대통령 에게 큰 실수를 하게된 권양숙 여사는 면목 없어 했다 노 대통령도 사실을 몰랐던 것이다 대책 회의 에서 채근 하는 질문에 딥하는 총무 비서관과 권여사의 말을 들으면서 노 대통령은 " 다 내 질못 이다 무능한 경제 개념, 장래에 대한 아무런 믿음을 못주니 집 사람과 총무 비서관이 그렇게 한것 아니겠는가 ?" 라면서 비서관 에게는 " 다 대통령이 시켜서 한일 이라고 말하라 " 고 했으나 비서관이 말을 듣지 않아 글로 써서 자기가 시켰다고 했다 그러면서 노 대통령은 " 여러분은 저를 버려야 한다 " 라고 말했던 것이다 그 말은 진심 이었다 이는 결벽증 이라할 정도로 자신에게 엄격했던 분이 당시 상황을 받아 들이기 힘들었을 것이다 검찰은 사실을 수사 하지만 언론은 과장되게 보도 하게 마련이다 변명 이나 해명이 필요 없어진다 문재인은 노무현 대통령을 생각해 보았다 가난이 그를 공부에 매달리게 했고 가난이 그를 인권 변호사로 만들었고 정의를 위해 사익을 버리고 공익에 섰다 조금 저축한 돈도 다 쓰게 됬다 노 대통령 상속 신고때 부채가 재산보다 4억원 가량 더 많았다 노 대통령은 * 진보와 미래 * 라는 책을 쓰려 했다 노 대통령 영결식에 4 대 종딘 지도자 들이 기도해 주셨다 불교의 봉은사 주지 명진 스님 한국 기독교 협의회 총무 권오성 목사 천주교 송기인 신부 원불교 이선종 서울 대교구장 이었다 수원 연화장에서 노 대통령은 한줌 재가 되었다 통도사 범어사 해인사 등 거의 모든 사찰에서 49제를 지냈다 49제는 불교와 유교 사상이 결합된 의식으로 유교적 조령숭배(祖靈崇拜) 사상과 불교의 윤회사상(輪廻思想)이
절충된 것이다 유골 석함에 부장품 2 개는 서거후 추모인파 사진과 참여정부 5년의 기록이 담긴 다큐맨터리 DVD 였다
묘역은 화려한 장식을 버리고 그의 유언이 실천 될수 있도록 박석들을 심도록 했디 문제인은 노동시국 사건을 자신보다 많이 다룬 사람들이 없다고 말했다 그런 그가 노대통령과의 인연으로 변호사를 접고 청와대에 들어간 것은 일탈 이라 했다 내내 불편 했고 맞지 않은 옷을 입고 생활 하는것 같았다고 했다 참여 정부가 끝니고 7 - 8 개월 동안 공백 기간을 소화 한뒤 변호사에 복귀했다 참여 정부의 공,과를 냉정하게 따저 봄직하다 다만 참고할 배경이 있었다 사회 밑 바닥에 흐르는 고고한 보수의 풍토와 여론을 주도하는 강고한 보수 세력 속에서 노 대통령과 참여정부는 마치 고립된 섬 이었다 개혁은 모든 곳에서 보수 세력과 기득권의 저항에 부딪첬고 가로 막혔다 복지 정책을 펴는데도 뛰어 넘을수 없는 벽이 있었다 참여정부는 보수와 진보 개혁 양쪽의 공격을 받아야 했다 국보법 폐지 실패도 개혁 입법이 중요한 시기에 법사 위원장을 야당 에게 넘겨준, 원구성 협상에 잘못이 있었다 검찰 개혁 역시 심각하게 고민해야 한다 지나치게 정치화된 검찰 권력, 통제 받지 않는 무소불위의 검찰 권력이다 다른 나라들이 일반 사건에 대한 수사권을 경찰에 맡기는 쪽으로 인식이 모아지고 있다 공수처 신설 역시 검찰에 대한 견제 방안으로 여겨저 국회의 벽을 넘지 못했다 안타까운 일이지만 진보 진영이 참여 정부에 등을 돌린것은 이라크 파병 이었다 그러나 정부로선 북핵 위기의 평화적, 외교적 해결을 위해 최소한의 행위였다 국익을 위한 결정 이었다 또 한가지 참여정부가 신 자유주의 즉, 시장 절대주의, 작은 정부, 감세, 민영화, 노동의 유연화 등은 참여 정부가 추종했던 로선은 아니였다 따라서 생각해 보자 참여 정부는 출자총액 제한 제도와 금산분리 등 시장 규제를 고수 했다 작은 정부를 반대 했고 종부세로 부유층 증세를 했다 국민의 정부 때부터 진행해 오던 민영화를 전면 중단 했다 비 정규직 보호법 등으로 제동을 걸기도 했다 한,미 F T A 역시 불가능한 시대의 흐름 이었다 노 대통령은 사람사는 세상을 항상 강조 했디 복지 국가의 꿈을 의미했다 어릴적 가난의 기억은 살아 가면서 그대로 인생의 교훈이 됬다 노무현 대통령을 극복하고 참여 정부를 넘어서야 한다 성공은 성공 대로 좌절을 좌절 대로 뛰어 넘어 야 한다 운명 같은 것이 나를 지금 의 자리로 이끌어 온것 같다 노무현 변호사를 만나고 지금에 이르게 된것도 마치 정해진 것처럼 느껴진다 대통령은 유서에서 " 운명 이다 " 고 했다 내 삶도 그런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