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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군의 진격루트를 보면 알겠지만....
선봉장인 1군 고니시와 2군 가토의 한양 경쟁이 치열했다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둘 중 1등에게 포상을 준다는 조건에 한양을 향한 초고속 진격에 목숨을 걸었다고..
조선군은 일본군에 완전히 초토화 되어 상부에 자세한 보고조차 하지 못한다.
이런저런 사정으로 침공이 시작된 후 나흘 뒤에나 소식이 서울에 알려졌다.
당시 조선군의 방위체제는 제승방략체제로 각지의 군사가 하나의 전략거점으로 집결하여 한타싸움을 하는 방식이었다
전면전에 강하지만 병력이 괴멸되면 후방에 병력이 없다는 단점이 있었다.
그리고 이 단점은 임진왜란에서 그대로 나타난다.
초기 대구에 수만의 조선군이 집결했으나 장군이 오기전에 일본군이 내습하여 깨지고 ...
이일은 지휘할 군대가 오기전에 일본군과 맞닥드리기도 했다.
또한...
전투에서도 조선군은 훈련도 사기도 낮아 온갖 경험치가 쌓일대로 쌓인 일본군을 상대로 고전을 면치 못했다.
이것이 200년간 태평성대를 누린 조선과 100년 동안 치고 박고 싸운 일본의 차이라고 할까?
상황이 이런데 당시 조선 조정은 가벼운 왜구들의 준동으로만 파악하고 있었다
그래서 당시 명장이었던 이일을 내려보내 사태를 수습하고자 했으나...상주에서 패배
이에 북방에서 명성을 날린 신립을 보내나..탄금대 전투에서 패배한다
당시 명장으로 칭송받던 이일과 신립의 패배로 조선조정은 큰 혼란에 빠진다..
ㅆㅂ 이것들 장난 아닌데?
사태의 심각성을 느낀 우리의 찌질이 군주 선조는 북으로 피난길을 가게 된다...
그리고 도성에 분노한 민중이 들이닥쳐 방화와 약탈이 발생했다.
불은 장예원(노비문서 보관소..)에서 시작되었다고..
그렇게 해서 일본군은 1592년 6월12일(음력 5월3일) 한양에 입성한다
한양을 점령한 일본장군은 여기서 문화적 충격을 느낀다.
일본에선 성주가 끝까지 성을 지키다 성이 함락되면 할복하고...
주민들은 새로운 성주에게 복종하는게 관례였는데...
조선의 성주는 성을 버리고 도망치고...
그 밑의 백성들은 새로운 성주가와도 환영은 안해주고 죽이려고 덤벼드니....
옥포해전
1592년 6월 16일 옥포(지금 거제 옥포동)앞바다에서 이순신의 조선 수군이 일본 함대를 무찌른 해전.
임란 당시 조선 수군의 최초 승전.
임란 초기, 함선을 자침시키고 도주했던 경상우수사 원균은 전라좌수사 이순신에게 구원을 요청하였다.
이에 이순신은 자신의 나와바리가 아닌 경상 해역에 출전하는데 고민을 한다만....
그것도 잠시..
전라우수사 이억기에게 도움을 요청하여 연합 함대를 꾸려 출전하려고 한다...만...
똥싸느라 늦었다..
이억기가 시간을 제때 맞추지 못했다.
이에 녹도만호 정운이 때를 놓친다면 후회해도 소용이 없을 것이라며 이순신을 설득하고
이순신은 전라좌수영 병력만을 이끌고 출전하여...
전라·충청 지방에 이르는 해로의 목줄인 옥포만으로 향했다.
판옥선 24척 협선 15척, 포작선 46척.
이때 원균은 자침시키고 남은 파옥선 4척과 협선2척이 합세하였다.
6월 16일
낮 12시경 조선 함대는 옥포 포구에 정박하고 있는 적선 50여 척을 발견하고..
동서로 포위한 후 포구를 빠져나오려는 적선들에 포격을 가해 적선 26척 격침시킨다
전투에서 탈출에 성공한 왜선은 몇 척에 불과하였고, 미처 배를 타지 못한 왜적은 육지로 달아났다.
이 싸움의 결과 아군은 부상자 1~2명,
이 부상자들도 전라좌수군이 사로잡은 왜선을 원균쪽 수군이 빼앗으려고 활을 쏴서 생긴 것....응?
이후 합포(경남 마산)앞바다에서 5척, 다음날 적진포(통영시 광도면)에서 11척을 불태우는 전과를 올리며 조선 수군의 남해 제해권을 장악하기 시작한다.
이순신은 이 전공으로 가선대부의 벼슬을 받았다.
그리고 일본에서는 이순신이라는 존재를 알게 된다.
가선대부
조선시대 종2품의 문관과 무관에게 주던 품계
참고로 그 이전의 이순신은 전라좌수사로 정4품 품계
협선
조선시대 대형전투함에 부속되어 활용된 소형배이다.
조선후기에 사후선이란것이 있는데 그것보다 소형이었다.
(사후선)
포작선
소형배로 전투함은 아니다..고로 실질적인 전력도 아님
다만..
가볍고 빨라 전선으로 이용하기도 하였으며 수군 씨다바리로 동원되기도 하였다
(포작선의 용도? 전투후 허후적대는 일본수군 목따기용? )
녹도 만호
녹도진은 조선시대 수군의 해안방어기지로 현재 전남 고흥군 녹동마을에 있다
만호는 조선시대 종4품의 무관직 품계다 지금으로 치면 연대장 정도의 직급?
품계
참고로 조선시대 품계는 정.종 순이며 관직을 보면 대충 이런식이다.
종2품(당상관)-병마절도사(관찰사겸)
정3품(당상관)-수군절도사(관찰사겸)
종3품(당하관)-병마첨절제사(겸),수군첨절제사
정4품(당하관)-수군우후(좌.우수영)
종4품(당하관)-병마동첨절제사(겸), 수군만호
종6품(참상관)-병마절제동위(겸)
첨절제사=목사. 도호부사.부윤
동첨절제사=목사.부사.군수
절제도위: 판관.현감.현령
해유령 전투
임란 초기 조선 육군 최초로 승리를 거둔 전투이나 규모가 작아서 딱히 잘 알려져 있진 않다,,
전투가 벌어진 지명의 이름을 따서 양주 전투라고도 불린다.
충주 탄금대 전투에서 조선군이 전멸하자 선조는 도원수 김명원에게 한강 방어를 맡긴다.
그러나 김명원은 6월 11일(음력 5월 2일) 전투를 포기하고 후퇴...
부원수 신각이 이를 말렸으나 씨알도 안먹혔다..
결국 신각은 자신의 군사만 이끌고 도성 안으로 들어가 유도대장 이양원과 합류해 양주로 후퇴했다.
양주에 진을 친 신각은 함경남도 병사 이혼과도 합류하여 적의 동태를 살피기 시작했다.
한편 한양을 점령한 일본 2군 가토 기요마사는 개성으로 피란가던 선조의 어가를 쫓기 위해 선발대 70명을 보낸다.
6월 25일(음력 5월 16일)
선조를 쫓기위한 70명의 일본군 선발대가 해유령에 이르렀는데 그들은 이미 일본1군 고니시 유키나가가 조선 최강의 부대라 일컬어지는 신립의 부대를 쉽게 전멸시켰기 때문에 조선군을 우습게 봐 무장도 제대로 갖추기 않게된다.
이때 신각이 이끄는 조선군이 활을 쏴 70명이 모두 전멸해 목이 베였다.
선조의 어가를 보호한다는 핑계로 개성으로 후퇴(라고 쓰고 도망이라 읽음)한 도원수 김명원은 한강 방어의 실패로 문책을 받을까봐 선조에게 신각을 모함했다.
그래서 김명원은 신각이 말을 듣지 않고 제멋대로 도망쳐서 패했다는 치명적인 거짓 보고를 올린다.
이 말을 그대로 믿은 선조는 선전관을 보내 신각의 목을 치라고 명령한다.
그러나 며칠 뒤 신각으로부터 가토 기요마사의 선발대와 싸워 승리했다는 장계와 그 증거물품인 일본군 선발대 70명의 수급 을 받게되는데....어라?
선조는 급히 다른 선전관을 급파해 신각의 목을 베지 말라고 명령했으나 이미 6월 27일(음력 5월 18일) 먼저 도착한 선전관에게 목이 베여 처형당한 후였다.
도원수
고려,조선시대 전시에 군대를 통할한 임시 무관직.
전쟁 때 대개 문신의 최고관을 도원수로 임명, 임시로 군권을 주어 군대를 통솔하게 하였다.
또한 지방의 병권을 맡은 장수를 도원수라 하기도 하였다.
조선 시대에는 대규모 군 동원이 있을 경우 임명하였다.
유도대장
임금이 도성 밖에 거둥할 때 도성에 남아 도성을 지키는 대장.
선전관
선전관청에 속하여 왕명을 맡아본 무관
임진강 전투
조선의 수도를 점령한 일본은 전쟁이 끝날줄 알았는데..
조선 조정은 피난 스킬 발동..ㅋㅋㅋ
이에 황당함을 느낀 일본군은 조선조정의 피난로를 따라 추격하게 된다..
조선 조정은 1만수천여명의 병력을 동원해 임진강에서 일본군과 대치하게 한다.
이때 조선군 주요 장수는 도원수 김명원과 제도도순찰사 한응인, 그리고 이일, 이양원, 신할(신립의 동생) 등이였다.
하지만 최고 사령관인 김명원은 한강 전투에서 도망쳐 신망을 잃은 상태였다.
여기에 한응인은 선조에게 신뢰를 받고 있어서 사실상 조선군 수뇌부는 둘로 나뉘어져 있는 거나 마찬가지 상태였다.
한편 계속 북상하던 일본 2군 가토 기요마사는 임진강에 주둔한 조선군을 보고 진격을 멈추게 된다.
조선군이 배를 없애버렸기에 시간을 끌면서 서로 대치하게된다.
그렇게 대치하던중 일본군이 철수하기 시작한다. .
도원수 김명원은 일본군의 계약으로 생각했으나..이계략에... 한응인파 장수들이 낚여버린다.
당시 신할 등 장수들은 공을 세우고 싶은 욕심이 앞서 있었고 김명원은 전에 있었던 일로(한강방어시 토낀전력) 신임을 잃은 상황에서 한응인이 실세가 된 상황이였다.
여기에 조선 조정은 잘못된 보고로 전황을 제대로 알지도 못하고 계속 공격하라고 종용하고....
역쉬...전투를 글로 배운놈들은 도움이 되지 않어...
결국 김명원측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신할 등 한응인측은 임진강을 건너 일본군을 추격할 것을 명령한다.
그리고 ...신나게 깨진다..
님들아..망했어요...ㅠㅠ
한응인파 유극량이 1만이 넘는 조선군이 강을 건너갔고 처음에는 남아 있던 소수의 일본군을 물리치며 승승장구 하는 듯 했으나...
곧이어 숨어 있던 일본2군 가토군이 튀어나와 조선군을 포위공격해 신할, 유극량은 전사하고 조선군은 그대로 전멸하고 만다.
강 너머에서 이 광경을 본 조선군도 도주해버리고...
일본2군 가토는 조선군이 타고 온 배로 유유히 강을 건너오게 된다..
이 전투는 지휘계통의 문제와 엉망인 군사, 허접한 정보분석 등 조선 조정의 판단 미스가 겹쳐 일어난 패배였다.
조선 조정도 이런 점 때문에 김명원 등을 처벌할 명분을 잃어 결국 별다른 처벌을 내리지 못했다.
그리고 임진강 방어선까지 내주며 방어 능력을 상실한 조선 조정은 계속 북으로 도망쳐 의주까지 몽진을 가게 된다.
사천포 해전
이순신 함대가 두 번째로 출전해 치른 해전으로 거북선이 첫 실전투입된 전투.
일본 수군은 해전에서 큰 타격을 받았음에도 서해안으로 진출하기 위해 계속 기회를 엿보고 있었다.
이순신 함대는 이러한 일본 수군을 공격하기 위해 7월 8일 노량으로 나아가 사천 앞바다에서 경상우수영 수군과 합류하였다.
이어 해안선을 따라 사천 선창으로 도망치는 왜군 척후선 1척을 격침시킨 뒤, 계속 나아가 사천 포구에 이르렀다.
선창에는 왜군 대선 12척이 매어 있고, 선창 뒷산에는 왜군이 진을 치고 있었다.
이순신 함대가 접근하자 왜군은 완강히 저항하며 맞섰다.
마침 썰물 때라 전선을 포구에 댈 수 없어 아군 함대는 작전상 후퇴하며 적군 일부를 먼 바다로 유인하였다.
왜선이 아군의 함선을 따라 따라오자, 이순신 함대는 갑자기 뱃머리를 돌려 다시 왜군을 공격하기 시작하였다.
최전방 돌격선의 임무는 거북선이 맡았다.
이순신은 아군 주력선인 판옥선보다 먼저 거북선을 적진에 들여보내 각종 화포를 집중적으로 발사하였다.
이에 놀란 왜군 함대는 지리멸렬해 사천 포구 쪽으로 도주하였고, 그러는 사이에 만조가 되었다.
거북선에 이어 밀물을 따라 포구에 도착한 판옥선에서도 일제히 불을 뿜기 시작하자,왜군은 배를 버리고 산 위로 도주하기에 바빴다.
이 와중에 수많은 왜군이 죽고,포구에 있던 왜선 가운데 10척이 아군에 의해 불타 없어졌다.
나머지 2척은 패잔병들이 타고 도망갈 때 소탕하기 위해 일부러 태우지 않고 남겨 두었다
함대를 사천만 입구의 모자랑포로 옮겨 그 곳에서 밤을 지냈다.
나머지 2척을 타고 도주하려던 왜군 패잔병은 7월9일 (음력 6월 1일) 새벽 배와 함께 불에 타 죽거나 목이 베어졌다.
이 해전에서 왜군 2,600명이 도살되었고, 13척의 왜선도 모두 격침되었다.
아군 측은 군관인 나대용이 적의 총탄에 맞았고, 이순신도 왼쪽 어깨에 탄환을 맞았다.
용인전투
5만 VS 16000
임진왜란 초기 조선군의 희대의 병크 중 하나.
한양이 함락당하자 많은 장수들이 흩어진 군대를 모아 전라도관찰사 이광을 맹주로 추대하였다.
이들은 매우 기세가 등등해서, 자신들을 남도근왕군, 삼도근왕군이라고 지칭했다.
이 연합군은 한양을 탈환하기 위해 진격했으나, 문제는 제대로 된 준비도 없는 급조된 부대에다가 장수 대부분이 전쟁에 약한 문관 출신.
특히 사령관인 이광부터가 문관.
또한 작전 회의에선 서로다른 의견이 나와 합의가 되지 않았다.
무엇보다 권율이 신중하게 전투를 치루라고 하는데도 불구하고...
이광은 초기에 적 5명을 죽였다고 기세가 올라 우랴돌격을 했다가 많은 장수들이 전사한다.
결국 7월14일(음력 6월 6일) 아침
밥을 지어 먹던 조선군은 왜군의 기습을 받고 패하여 후퇴하게 된다.
일본수군 와키자카 가문의 군 기록인 <와키자카기>에 의하면 이 때 거둔 수급이 1천여급, 생포 2백여 급이라고...
한마디로 1천 6백명의 병력으로 5만의 조선군을 몰아낸셈이다.
훗날 이치 전투와 제2차 진주성 전투에서 분전하는 황진은 부대를 온전히 보전한 채 퇴각하였고...
맹주로 군사를 이끌던 이광은 책임을 지고 파직되어 유배된다.
용인 전투가 기습으로 인해 패퇴한 것이긴 하나 대부분의 병력은 피해 없이 퇴각하여 훗날을 일본의 전라도 진격을 저지하게 된다.
한편, 여기서 사기가 오른 와키자카는 남쪽으로 내려가 해전을 계획하고..
이순신을 만나 59척의 전함을 날려먹는다..응?
참고로 어떤 사이트에선 엄청나게 개박살 난걸로 묘사가 되있다..
조선군 2만여명이 죽었다나 어쩠다나?
근거도 없는 글은 그냥 씹어주자...
정암진 전투
50 vs 2000
1592년 6월 8일 (음력 5월 24일) 최초로 의병이 일본군과 싸워 승리한 전투
이 승리로 일본군의 전라도 진격을 막고 곽재우의 의병을 중심으로 의병들이 규합되었다.
일본군은 전라도 진격 작전을 개시하여 일본 6군 고바야카와 다카카게가 전라도 진격 작전을 지휘한다.
고바야카와의 부장 안코쿠지 에케이는 2000명의 군대를 이끌고 전라도로 통하는 길목인 경상도 의령으로 진격한다.
한편 곽재우가 의령에서 최초로 의병 50명은 조직하여 거병하고 곽재우는 안코쿠지에 대항해 남강 북안의 정암진에 군사들을 매복시켰다.
6월 8일
안코쿠지의 2000명 병력은 정암진 대안에 도착해 통과할 지점에 나무 푯말을 꽂아 표시를 해두고 도하 준비를 했다.
이에 밤 사이에 곽재우는 군사들을 동원해 나무 푯말을 늪지대에 꽂아두고 군사들을 매복시켜두었다.
날이 밝자 안코쿠지의 일본군 선봉대가 도하를 시작했으나 늪지대로 잘못 들어가 곽재우의 의병군에게 선멸되었고 안코쿠지의 주력군은 남강을 도하했으나 곽재우 군의 기습을 받아 크게 패하고 말았다.
최초로 의병을 일으켜 승리를 거둔 곽재우 의병은 이 후 관군을 편입시켜 총 4000명의 병력으로 불어난다.
웅치전투
7천 VS 1만
1592년 8월 13일(음력 7월 7일) 전라도 웅치 방어선에서 벌인 전투
김제 군수 정담과 관군, 의병장 황박 등의 의병, 나주 판관 이복남, 해남군가 변응정 등이 나섰으나 군사 수백이 전사하고 패배했다.
7월 초순에 들어 일본군은 전라도로 진격할 준비를 서둘렀다.
일본 6군 고바야카와 다카카게는 1592년 7월 31일(음력 6월 23일) 충청도 금산을 점령하고
그의 부장인 안코쿠지 에케이는 1만 군사를 주어 전라도 진격을 지휘케 했다. .
그는 창원에서 남원을 거쳐 전주를 점령한다는 계획을 세웠으나 중간 지점인 의령에서 곽재우 의병부대의 저지를 뚫지 못하고 방향을 틀어 성주로 올라왔다.
일본6군 대장 고바야카와 다카카게는 한양에 있다가 안코쿠지의 진로에 차질이 생겼다는 보고를 받고 금산에서 안코쿠지와 합류했다.
금산에서 전주로 들어가려면 진안에서 전주 사이에 놓여 있는 가파른 웅치(곰티재)를 넘어야 한다.
또 다른 길로 금산에서 전주로 들어가려면 진산의 이치(배재)를 넘어야 한다.
이때 광주목사 권율이 광주 지방에서 모집한 군사 1,500여 명을 직접 이끌고 이치를 지켰다.
한마디로 웅치엔 김제군수 정담이 이치엔 광주목사 권율이 지키고 있었던것..
암튼
웅치 방어선에는 정담, 방정영, 박석, 황박, 이복남, 변응정 등이 모였는데 3개로 방어선을 나누어 구축했다.
제1방어선은 산 아래 의병장 황박이, 제2방어선은 산 중턱 나주 판관 이복남이, 제3방어선 산 정상에는 김제 군수 정담이 배치되었다.
8월13일(음력 7월 7일) 안코쿠지 에케이는 군대를 이끌고 총공격하여 제1방어선과 제2방어선이 무너지고 정담이 지키는 제3방어선이 전투를 치르고 있었다.
그러나 왜군의 희생도 커 날이 저물자 전투를 중단하고 후퇴했다.
다음날 늦은 아침, 일본군은 병력을 총동원해 진격했다.
1선을 맡은 황박군이 저지하다가 밀려나자 2선을 맡은 이복남군이 나섰다.
적은 2선까지 제치고 밀고 올라와 정상에 이르렀다.
정상에는 정담 군이 포진하고 있었다.
정담은 백마를 타고 올라오는 적의 장수를 쏘아 죽였으며, 적이 계속 밀어붙여도 후퇴하지 않고 선두에서 공격을 퍼부어댔다.
날이 저물고 화살이 떨어져 군사가 흩어지기 시작했으나, 그는 끝까지 백병전을 벌이다가 마침내 장렬한 죽음을 맞이했다.
조선군의 화살이 떨어지자 왜군은 철수를 취소하고 다시 재공격하여 이 과정에서 조선군이 밀리게 되었다.
이복남이 이끄는 나주관군은 안덕원까지 퇴각했고, 피하지 못한 정담과 강운, 박형길 등이 전사했다
웅치에서 조선군이 패했으나 왜군의 손실도 무척 컸다고 한다.
전투 후에 웅치의 긴 고갯길은 조선군의 시체로 덮였다.
웅치에서 관군과 의병이 패하자 전 성균관 정6품을 지냈던 이정란이 전주성 안으로 들어가 백성들을 수습하고 전라감사 이광(용인전투의 그 이광 맞다..)도 성을 굳게 지켰다.
결국 안코쿠지 에케이는 금산으로 후퇴한다..
안코쿠지는 후퇴 도중 웅치에서 전사한 조선군의 시체를 모아 큰 무덤을 만들어주고 조 조선국 충간의담이라는 비석을 세워주어 그들의 충절을 기렸다고 한다.
이치전투
1천여명 VS 2천명
한산도 대첩과 함께 일본군의 전라도 공략을 무산시킨 전투.
금산성을 점령한 일본6군 코바야카와 타카카게는 전라도를 공략하는 루트로 금산-진산-전주를 고르게 되는데.
이 루트를 돌파하는데 지나쳐야 하는 이치에서 권율이 이끄는 전라도 군이 방어하고 있었다.
코바야카와 타카카게는 자신의 부장에서 1만의 군사를 주어 웅치를 치게하고 (웅치전투)
자신은 2000의 군사를 이끌고 이치를 치기로 한다.
권율은 일단 전라도 방어선을 두개로 나누었는데, 그 하나가 바로 이치였고, 만일 이치 방어선이 전부 무너진다면 패잔병들은 전부 전주성으로 후퇴에 전주성을 2차 방어선으로 싸울 계획이었다.
권율은 고지를 유지하면서 전투했는데, 이때 화살로 엄호 사격을 하던 황진은 적탄을 맞고 후방으로 후송된다.
이치 전투 사이에 안코쿠지 에케이는 이미 전주성에 도착했지만, 고경명이 이끄는 7천 의병이 금산성을 친다는 보고를 듣고 급하게 후퇴해야 했다.
어쨌든 고경명의 의병 때문에 코바야카와는 후퇴하게 되고, 이치 전투는 승리로 끝난다.
정확한 사상자는 불명,
단 일본군은 한산 대첩과 함께 연이은 패전으로 인해...
이후로는 강화 및 조선내 국지전으로 전투방식을 바꾸게된다.
권율은 이 이치전투를 자신의 제일 자랑스러운 전공이라고 했다고 한다.
잡아낸 적은 행주대첩이 더 많지만, 행주대첩과 다르게 이치에서는 턱없이 부족한 군비로 일본군을 몰아내어서 그렇다고.
한산도 대첩
용인 전투에서 조선군을 상대로 승리한 일본수군 와키자카 야스하루는 사기가 올랐고 조선군을 얕보기 시작했다.
이후 일본은 육전에서의 계속되는 승리에 고무되어 다시 해상을 장악하려 했고 와키자카가 수군을 지휘하게 해 이순신이 이끄는 조선 수군을 돌파할 임무를 맡긴다.
한편 이순신 장군 등이 이끄는 조선군도 수십 척의 일본군 함대가 가덕도 근처에서 일본 육군과 조우하는 것을 보고 일본 수군을 다시 격파해야 한다고 판단, 출정을 결정한다.
한편 일본군도 이전의 패배를 만회하기 위해 함선을 계속 증강시켜 일전을 준비한다.
이순신 장군은 위급 상황시 함대가 빠져나가기 편하고 도망친 일본군이 상륙해도 굶어죽기 딱 좋은 한산도를 전장으로 삼기로 결정했다.
이억기 장군과 함께 47척의 연합 함대로 출정한 후 노량에서 원균이 이끄는 7척의 함대와 합류했다.
그후 견내량에 일본 수군이 들어섰다는 보고가 들어오자 한산해역 좌우측 섬들 사이에 경상우수, 전라우수군을 복병으로 매복시켜 숨겨 배치하고, 의도적으로 전라 좌수군의 전선들만을 이끌고 복병을 숨긴 해역에서 좀 더 나아간 곳까지 함대를 전진시켜 일자진(혹은 소규모 어란학익진)을 펼치고 일본군을 유인했다.
조선 수군의 전선 수가 일본 수군의 전선보다 적다는 것을 안 와키자카는 그대로 조선군 측으로 돌격을 명령했다.
이순신이 펼친 일자진(소규모 어란학익진)의 단점은 측면 쇄도에 취약하다는 것이었고, 더군다나 일본 수군의 전선 수가 이순신의 함선 수보다 많았으니 이때까지만 해도 와키자카의 판단은 크게 잘못된 것은 아니었다.
이에 이순신은 함대를 복병을 배치해둔 해역까지 후퇴를 하게 하고..
어느 정도 물러난후 진형을 펼쳐 큰 원형의 학익진을 펼친다.
와키자카는 이를 조선 수군의 병크라 판단하고 기세등등하게 계속해서 돌격을 명하게 된다.
와키자카의 판단은 당시로서 틀린 것이 아니었다.
당시 선보인 학익진은 육전에서나 사용되던 것이지 수전에서는 사용된 전례가 없었다.
또한 학익진은 적을 완전히 감싸야 하나 최초로 학익진은 함선이 적어 오히려 일본함대에 압도당했다
그러나..문제는...
상대가 이순신이란것...응?
와키자카의 일본 수군은 곧장 조선 수군 함대를 향해 돌진을 하게 되는데
그 때 갑자기 기다리고 있던건 좌우측 섬들 사이에 숨어있던 전라우수, 경상우수군의 복병,
전라좌수군의 학익진에 합류하여 일본측 함대의 좌우측면을 둘러싸서, 일본군을 포위해버린다.
암튼..
함정이라는 것을 깨닫고 당황한 일본군은 퇴로를 찾아 빠져나가려 하였으나 조선 삼도 수군 연합 함대가 포위를 마친터
조선수군은 포격과 화공을 퍼붓기 시작했고 일본군의 전선은 박살나기 시작한다.
이날 70여 척의 일본의 함선이 전부 침몰하거나 불타버렸다.
아다케급 7척 포함, 대선 35척, 중선 17척, 소척 7척을 포함 총 59척을 격파했고 살아 돌아간 배는 대선 1척과 중선 7척등 14척에 불과했다.
한산도에 상륙한 400명과 14척에 타고 있던 인원을 제외한 대다수 일본군이 전멸당했다.
와키자카를 포함한 생존자 400명은 당시 무인도였던 한산도에서 13일간 미역과 조개 등을 먹으면서 연명하다 뗏목을 엮어 가까스로 탈출할 수 있었다고 한다.
이순신은 수군을 육상에 상륙시키는 것만큼 위험한 일이 없다고 생각하여 이들에 대한 소탕전을 전개하지 않았다.
이 해전으로 정유재란이 벌어지기 전까지 일본군은 해상을 장악할 의욕을 완전히 상실해 버린다.
해상으로 육군 보급을 충당한다는 일본군의 기본 전략이 완전히 박살이 나고...
고니시 유키나가가 이끄는 평안도 방면의 일본 육군은 남하할 수밖에 없었고 이 덕에 조선 조정은 일본군에 붙잡히는 꼴을 면한다.
또한 이렇게 시간을 끌어주는 동안 조선 육군도 재정비가 시작되어 반격의 실마리가 마련되었고 명나라 군대도 조선에 본격적으로 지원을 들어오게 되면서 전쟁 양상에 큰 변화가 오게 된다.
한마디로 임진왜란의 운명을 바꾼 전투.
이순신 장군은 이때 세운 공으로 정헌대부로 승서되었고 이억기와 원균도 가의대부로 승서되었다.
정헌대부
조선시대 정2품 문무관에게 주던 상위자리 품계.
가의대부
조선시대 종2품 문무관에게 주던 상위자리 품계
옥포해전으로 이순신이 받은 가선대부와 같은 종2품이나..
가의대부는 가선대부보다 상위자리 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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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인전투와 웅치전투사이에 정암진 전투가 있는데 빠졌네요..
정암진 전투 내용 추가 합니다.
내용상 별것 아닌것 같지만...
왜 일본6군이 돌아서 전라도를 치게 됬는지..에 대한 부연 설명이라 생각하시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