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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마 14 - 카이사르의 성장과정과 갈리아 전쟁을 시작해 헬베티족을 제압하다!
2천년 로마 역사에서 가장 유명한 장군인 율리어스 카이사르는 시오노 나나미가 쓴 15권의 로마인 이야기
중에 4권과 5권 2권에 걸쳐 기술했으니.... 쇠락한 가문의 일원으로 출발하였으나 먼에스파냐 총독을
거쳐 집정관으로 선출된후 폼페이우스, 크라수스와 더불어 삼두정치를 구축해 원로원을 무력화 합니다.
‘로마인 이야기 4권’ 에 보면 시오노 나나미는 피렌체 경찰서 수사과장으로 마피아와 대결던 경찰이
나나미의 집에 방문해서는 카이사르에 관해 알고 싶다기에.... 제롬이 쓴 “카이사르 전기”
를 빌려주었더니 나중에 빌려간 책을 돌려주려 왔을 때 소감을 물으니.... 같은 시대에
태어났다면 그 아래에서 백인대장을 하고 싶다고 말했다니, 카이사르는 인망이 있는 사람 입니다.
고바야시 히데오는 투키디데스의 “역사” 에서 영웅전의 인물들은 모두 도덕적이고 정력적인 행동가
라고 했는데.... 율리어스 카이사르 처럼 정치는 직업도 기술도 아니고 고도의 긴장을 유지하며
이겨내는 사람이라고 말햇으며, 이탈리아 역사 교과서도 지도자에게 요구되는 자질은 지성,
설득력, 지구력과 자제력 그리고 지속적인 의지이니.... 이걸 갖춘 사람이 카이사르 라고 기술합니다.
폼페이우스 및 로마 원로원파와의 내전에서 승리한후 독재관이 되어 공화정 체제에 근본적인
개혁을 본격적으로 착수하였으나 그 끝을 보지 못하고 암살되었고.... 그 과제는 후계자로
지명한 옥타비아누스와 율리우스-클라우디우스 왕조의 초기 황제들에 의해서 완수되었습니다.
뛰어난 정치인, 군인이었을 뿐 아니라 타고난 문인이자 달변가로서 《갈리아 전기》, 《내전기》
와 같은 저술을 후대에 남겼으며, 그 외에도 "주사위는 던져졌다", "왔노라, 보았노라,
이겼노라", "브루투스, 너마저" 와 같은 명언 또는 발언으로도 후세에 많이 알려진 인물입니다.
카이사르의 고모부 마리우스는 북아프카에서 유구르타 전쟁에 승리하고 게르만민족들을 방어한 장군인데
집정관이 되어 징병제를 지원제로 바꾸었으니 작은 재산을 가졌다는 이유로 군대에 강제로 가야하는
사람들을 면제시켰고, 또 무산자에게 직업 군인이 될 기회를 열어준지라 민중을 대변하는 인물이 됩니다.
술라는 동맹시 전쟁에서 큰 전공을 세운 사람으로 기원전 88년에 민회에서 오리엔트 원정군 총사령관으로
선출되었는데, 마리우스는 개혁파 호민관 술피키우스와 손잡고 평민만이 참가할수 있는 기원전
287년에 제정되었으나 사문화된 ‘호르텐시우스법’ 을 근거로 “평민집회” 에서 이 결정을 뒤엎어 버립니다.
그러자 술피키우스가 민중 편향 정책을 펴는데 불만이었던 원로원의 지지를 받은 술라는 원정군 3만
5천을 이끌고 수도 로마로 진군하니.... 로마는 원래 부터 군대를 주둔시키지 않는
도시이고 또 군대가 로마로 들어오지 못하도록 되어 있던지라 방비가 없으니 금방 점령되어 버립니다.
술피키우스는 잡혀 죽었고 마리우스는 아프리카로 달아났는데, 민중파 지도자들은 나라를
어지럽힌 역적으로 선고되었고 12살 카이사르의 집안은 불안에 떨어야 했는데....
술라가 원정을 떠나자 집정관 킨나가 민회를 소집해 마리우스를 사면하니 귀국했고
그는 집정관 옥타비우스를 포함해 원로원 의원 50명을 비롯 기사계급 1천여명을 살해합니다.
이 중에는 동맹시 사람들에게 로마 시민권을 준 루키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등 카이사르의 삼촌 2명도
고모부 마리우스의 손에 살해되었으니... 이 때문에 충격을 받은 13살 카이사르는 평생
피 냄새 맞는 것을 싫어했다고 하며, 원한을 푼 집정관 마리우스는 기원전 86년 1월 70세로 죽습니다.
후계자 킨나가 독재관으로 로마를 다스리는 동안 술라는 묵묵히 오레엔트 전쟁을 수행했으며
16세때 아버지가 죽으니 카이사르는 가장이 되었고, 어머니 아우렐리아는 재혼하지
않았으며 독재관 킨나는 딸 코르넬리아의 남편으로 17살 카이사르를 고르는데....
카이사르는 전 해에 성년식을 치르고는 짧은 투니카를 벗고 긴 토가를 입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그 해인 기원전 83년 브린디시에 상륙한 술라는 군대를 해산하지 않자메텔루스 피우스가 2개 군단으로
합류했고, 31세의 크라수스와 23세의 폼페이우스가 자비로 편성한 3개군단등 원로원 계급이
참가하니 11개 군단으로 보병 6만 5천에 기병 1만이었으며 반대로 로마에서 민중들은 12만명이 모입니다.
민중파는 숫자는 많았지만 지휘관이 없는게 약점인데 마리우스가 행한 학살로 보복을 두려워 한 민중파와
원로원파의 전쟁은 2년간 계속되었으며 기원전 82년 11월 1일 로마 성벽에서 벌어진 전투를
끝으로 승리한 술라는 로마에 입성했으니 술라는 민중파를 말살하기 위해 조직적으로 대학살을 자행합니다.
그 수단으로 술라는 노예 1만명을 해방시켜 “해방노예” 로 로마 시민권자로 만든뒤 자신의 씨족 이름
인 고귀한 “코르넬리우스” 라는 성씨까지 하사해 신분 보장을 확실히 한후에 이들을 이용
해서는 마리우스의 무덤을 파헤쳐 부관참시한후 테베레강에 버렸으며 원로원 의원
80명과 기사계급 1600명등 4,700명의 살생부를 작성해 민중파를 철저하게 잡아 죽여 씨를 말립니다.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도 살생부에 올랐는데.... 술라의 측근들은 그가 아버지도 없는 어린
18세로 정치적 행동은 전혀 하지 않았던 점을 들어 살려주자고 건의했으며
여사제(베스탈레) 까지 나서서 간청하자 탄원이 받아들여져서 기적적으로 죽음을 피하게 됩니다.
자비로 3개 군단을 조직한 폼페이우스도 장인이 민중파라 이혼이 강요되었으며 카이사르 역시 강제 이혼
당하고 술라의 처가쪽 처녀와 재혼하라는 명을 받았지만.... 18살 카이사르는 NO! 라고 거부
하고는 로마를 탈출해서 이탈리아 지방을 전전하다가 추격대를 피해 바다를 건너 소아시아로 달아납니다.
기원전 1세기 대학은 아테네와 로도스섬 단 2군데에 불과했으니 대학에 가고 싶지만 술라파에 들킬 염려
가 있는지라 대신 군대에 지원하니 전투를 하면서 경험을 쌓고 몸을 숨기기에도 안성맞춤이엇는데,
아시아속주(소아시아 서해안) 미누키우스 진영으로 찾아가 본명을 밝히니 술라파인 미누키우스
는 체포하는 대신에 원로원 의원을 지낸 인사의 아들이라는 자격을 참고해서 참모 본부로 발령을 냅니다.
이후 카이사르는 레스보스섬 공방전에 참전했으며 술라가 죽었다는 소식을 듣고는 제대를
신청해 2달간 여행을 해서 로마에 도착해 어머니와 아내 코르넬리아 그리고 처음
보는 딸 율리아를 만났으며, 기원전 78년 집정관 레피두스는 총독으로 부임하기 위해
편성한 군단으로 술라 체제를 뒤엎으려고 했는데...... 신중한 카이사르는 가담하지 않았습니다.
레피두스의 봉기는 원로원과 폼페이우스에 의해 곧 진압되었고 기원전 75년에는 아우렐리아의 오빠가
집정관으로 선출되었으며 23세 카이사르는 변호사로 개업해 집정관을 지낸후 소아시아 총독을
지낸 돌라벨라를 부정축재로 고발했는데, 경험 미숙으로 배심원들을 설득하는데 실패해 패소합니다.
서른살 폼페이우스가 로마군 4만명을 지휘하는 에스파냐 총독으로 부임하던 때에 또 다시 로마
를 탈출한 24살 카이사르는 로마는 30살이 되어야 공직에 출마할수 있는지라 그동안
대학에 가기로 했는데.... 로도스섬으로 가는 도중에 잔인하기로 악명 높은 킬리키아
해적에게 나포돼서는 병사 4천 300명의 1년치 봉급에 해당하는 20탈란트 몸값이 매겨집니다.
카이사르는 크게 웃으며 몸값을 50탈란트로 올리고 몸값 마련을 위해 종자를 로마에 보낸후 다른 종자 2명과
해적 소굴에 남았는데 38일간 귀빈 대우를 받았으니 해적들이 떠들면 종자를 보내 조용히 하라고
시켰으며 해적들의 무술 훈련이나 오락에 참가하기도 했으며 해적들을 청중으로 시를 낭송하기도 했습니다.
종자가 돈을 마련해온 덕분에 자유의 몸이 된 카이사르는 곧 밀레토스로 달려가 배를 빌리고 사람들을 모아
무장시킨후 해적들을 기습해 사로잡은후 재산을 되찾았으며 소아시아속주 총독에게 보고하자
총독은 빼앗은 재물에만 관심이 있고 해적들은 카이사르에게 처분을 맡기니, 그는 모두 교수형에 처합니다.
로도스로 가서 대학에서 공부하는 중에 소아시아에 변란이 일어나면 자비로 군대를 조직해 진압에 나서기를
반복하던 중에 기원전 74년에 외삼촌 아우렐리우스 코타가 비타니아 총독으로 오자 카이사르도
달려갔는데 폰토스 왕국의 미트라다테스왕이 쳐들어 오니 아울렐리우스 코타는 패해 도주하다가 죽습니다.
이때 27살 카이사르는 아우렐리우스의 후임으로 로마로 귀국해 15명에 달하는 제사장을 맡았는데 직을 맡는
중에도 입후보해 600명을 거느리는 대대장 선거에서 당선됐으며 다음해인 기원전 73년에
일어난 스파르타쿠스 노예 반란에는 영화 “스파르타쿠스” 에서와는 달리 실제로는 참전하지 않은 듯 합니다.
폼페이우스는 에스파냐에서 세르토리우스와 전쟁중이고 폰토스왕 미트라다테스와 전쟁은 루쿨루스가 파병
되었으니 스파르타쿠스에는 장수가 모자라니 법무관 크리수스가 8개 군단을 이끌고 토벌하러 떠났는데,
기원전 71년 스파르타쿠스는 진압되고 노예 6천명이 아피아가도에 늘어선 십자가에 못박는데, 6천개 십자가?
에스파냐에서 개선한 35세 폼페이우스는 수단방법을 가리지 않는 43세 크라수스를 경멸했는데, 로마는
과두정으로 30세에 회게감사관으로 출마할 자격을 얻고 1년후에는 원로원 의원이 되며
39세에 법무관로 출마할 자격이 생기고 2개 군단 1만 5천을 지휘할 임페리움을 얻으며,
이후 10개 속주의 총독으로 부임하며 42세에 집정관으로 출마할 자격이 주어졌으니 연공서열제라....
기원전 70년 앙숙인 폼페이우스와 크리수스는 서로 약점이 있으니 타협해 집정관이 되었으며 30세
카이사르는 크라수스에게서 빚을 내어 선거운동을 해서 민회에서 무급인 회게감사관에
당선되는데 로마는 집정관까지도 무급이니 ‘쿠르수수 호노리움’ 이라고 불린 ‘명예로운 경력’ 입니다.
카이사르는 에스파냐에 부임했는데 화려한 생활과 빚으로 유명인사가 됐으니 그가 진 빚은 1천
3백 탈란트로 11만명 병사의 1년치 봉급에 해당했다는데.... 한편 폼페이우스는 지중해
해적들을 소탕하고는, 부임 7년이 지났는데도 승리하지 못한 루쿨루스 대신에
오리엔트 전쟁 총사령관이 되는데 카이사르도 저 안건이 민회를 통과할 때 찬성 합니다.
기원전 65년 35세의 카이사르는 안찰관에 선출된후 빚을 내어 아피아가도를 보수하고 640명의 검투사를 빌려
로마에서 화려한 검투사 시합을 주관했으니 이제 빚은 천문학적인 수준에 이르렀는데, 사실 가도 보수나
검투사 시합은 국고에서 지불하는 것이지만 원로원 심사가 부지하세월이니... 그냥 개인 돈으로 치룬 것입니다.
이런 사업으로 로마시민의 인기를 얻어 최고 제사장에 당선되고 기원전 60년에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수를 중재
해서 삼두정치(트리움 비라투스) 를 시작하고 다음해 기원전 59년에 드디어 집정관에 당선됐으며
진보 색채를 지우고 전통을 부활했으며 농지법을 개혁하고는 갈리아 총독으로 부임해 갈리아 전쟁을 치릅니다.
“갈리아 전쟁” 은 기원전 58년부터 51년까지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이끄는 로마 공화국
원정군과 갈리아 부족 연합 사이에서 벌어진 전쟁으로 카이사르가 승리함으로써, 로마는
"Vae victis (패자에겐 비애 뿐)" 에 대한 치욕을 설욕함과 동시에 켈트족이 로마를
침략할 위험성이 근절되었으며, 카이사르는 “갈리아 전기” 라는 이름의 책으로 기록해 남겼습니다.
"Vae victis" 란 기원전 390년에 알리아 전투에서 승리한 갈리아족 브렌누스가 로마로 쳐들어와 도시를 점령
한 뒤 로마인들에게 1000파운드(329kg) 의 금을 바치라고 하자, 로마인들은 금을 가져와 갈리아의 양팔
저울에 달았는데, 충분한 금을 가져왔는데도 저울이 부족하다고 판정하자 무게추가 잘못된 것 같다고
불평하니, 브렌누스는 검을 무게추에다 올리면서 패자에게 불평할 권리는 없다는 의미로 말했다고 합니다?
조선인들은 일제 강점기때 조선인을 차별대우 했다며 침략자라고 욕하는데..... 앗시리아가 이스라엘 정복후
10개 부족을 잡아갔으니 구약성경에 10부족 후손들은 오늘날 멸절됐고, 신바빌로니아는 유대를 멸한후
모두 바빌로니아로 잡아갔으며.... 로마는 카르타고를 멸한후 생존자를 전원 국제 시장에 노예로 팔았습니다.
당나라는 신라와 연합해서 백제를 멸망시킨 후에 사비성과 웅진성의 왕족과 귀족에 상류층을 중국
에 잡아가 노예로 부렸고, 고구려를 멸한후 백성 대부분을 잡아가서 농노와 노예로 부렸으며,
훗날 고려 왕건은 사람들이 다 잡혀갔으니 인적이라고는 전혀 없이 황무지로 변한 빈땅인 평양
을 전투 없이 그냥 줏었는데.... 전쟁에서 패한 사람들이 인간 대우를 받는다는건 어려운가 합니다.
갈리아 전쟁은 3편으로 나누어 기술할 예정인데 기원전 58년에 아라르 전투, 비브라테 전투, 보주 전투이고
기원전 57년에는 악소나 전투, 사비스 전투, 아투아투키 공방전이며 기원전 56년에는 옥토두루스 전투,
모르비앙 해전이고 기원전 55년에 1차 브리타니아 원정 그리고 기원전 54년에 2차 브리타니아 원정입니다.
갈리아는 수많은 부족들이 패권을 다투던 불안정한 상황으로 하이두이족과 세콰니족이
강력했는데.... 세콰니족은 명성이 높았던 게르만족과 연합하니, 게르만 수에비
족의 아리오비스투스는 라인강을 건너와서 수차례에 걸쳐 갈리아 연합군을 격파합니다.
마게토브리가 전투 이후 세콰니족은 갈리아의 패권을 주장하게 되었고 게르만 수에비족의
아리오비스투스는 세콰니족의 공물에 만족하지 않고, 프랑스에 눌러앉아 3분의
1에 해당하는 영토를 요구하니 세콰니족은 게르만족을 끌어들인걸 깊이 후회하게 됩니다.
게르만족 침략에 시달리던 스위스의 헬베티족은 영토가 알프스 산맥과 론 강, 로마 속주와 레만누스
호수로 둘러싸였기 때문에 영토를 확장하는 것도 어렵자.... 귀족이었던
오르게토릭스는 갈리아 내로 이주해 새로 정착하자는 제안을 했고 헬베티인들의 호응을 받았습니다.
우여곡절 끝에 농토가 별로 없는 척박한 땅 스위스의 헬베티인들은 갈리아로 이주를 위한 침략
준비를 마쳤을 땐..... 12개 도시와 400개의 마을이 모두 불태워졌고, 300,000명이 넘는
대규모의 전력을 갖춘 헬베티족은 3개월치 식량을 휴대하고는 갈리아로 이주하기 시작합니다.
카이사르의 “갈리아 전기” 에는 갈리아로 부임하자마자 우연히 헬베티족의 침략을 맞닥뜨린 것처럼
서술하고 있으나 그가 갈리아 총독으로 부임하는 과정과 헬베티족에 맞서는 전력을 편성하는
과정을 보면 헬베티족의 움직임을 사전에 알았고, 집정관 시절에 준비에 들어갔었던 것으로 보입니다?
카이사르는 남프랑스의 갈리아 2개 속주에 일리리아 속주까지 3개의 속주를 다스리는 총독으로 임명되면서
5년이라는 긴 임기를 부여받고 4개 군단 지휘권인 임페리움에 식민지 건설 권한까지 부여받았으니
기존의 총독직을 훨씬 능가하는 권한은 갈리아 전쟁을 치르기 위한 역할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라 보입니다.
헬베티족과 만나는 보름간에 속주에서 1개 군단을 뽑아냈고, 협상하면서 2개 군단을 보충했다고
갈리아전기에 기록했는데.... 3개 군단이 모집되고 합류하는 과정이 단 보름만에 이루어
지는 것은 카이사르가 이미 병력을 준비해 두었고, 전투가 벌어지자 소집했던 것으로 여겨집니다.
삼두정치의 일원인 폼페이우스와 크라수스의 협조를 얻어내 민회의 지지를 받은후 집정관 임기가 만료된
기원전 58년에 갈리아 속주로 출발했는데, 헬베티족은 영토를 모두 불사르고, 갈리아로 침략하는
중이었고, 카이사르는 속주에 주둔 중인 1개 군단과 함께 론 강을 사이에 두고는 헬베티족과 조우합니다.
카이사르는 론 강 다리를 파괴해서 헬베티족의 도강을 방해했지만 휘하 병력은 적었는데,
헬베티족도 강력한 나라인 로마군을 공격하지 않고 카이사르에게 사절을
보내 로마 속주의 통과를 요청하지만.... 적의 무리를 자국 영토에 들일수는 없는 법입니다.
카이사르는 시간을 벌기위해 보름간 생각할 시간을 달라고 하고는 강변을 따라 19마일에 걸친 16피트의
보루와 참호를 파고 성채를 곳곳에 둔뒤 수비대를 배치하는등 진지 공사를 단행했으며
그런후 속주에서 추가로 뽑은 보조병이 합류했고 카이사르는 헬베티족과 맞설만한 전력을 갖추게 됩니다.
헬베티족이 찾아왔지만 카이사르는 거부했고 로마 속주를 침입한다면 전쟁일 뿐이라며 엄포를
놓자 헬베티족은 뗏목으로 강을 건너는 움직임을 보이다가는.... 로마 속주를 통해
갈리아 내부로 들어가는 것을 포기하고 과거 호의적이었던 하이두이족의 둠노릭스에게 연락합니다.
둠노릭스의 중재로 세콰니족의 영토를 통과하는 것을 허락받았지만 곧 폭도로 변해 영지를 약탈
하기 시작했으며 세콰니족의 영토를 유린한후 헬베티족은 하이두이족의 영토로 진입
하려고 했으니.... 카이사르는 헬베티족이 갈리아 중부로 진입해 산토니족의 영토를
점령한다면 로마 속주가 헬베티족의 위협에 노출될 것이기 때문에 저지해야 한다고 판단합나다.
카이사르는 이탈리아로 돌아가 2개 군단을 새로 편성하고 숙영중인 다른 갈리아 속주의 3개
군단을 합류시켜 5개 군단을 이끌고 오니 기존의 보조병을 비롯한 1개 군단과 합류
하자 6개 군단을 거느리게 된 카이사르는 갈리아에 개입할 시기만을 가늠하는
중에 하이두이족이 지원을 요청하니 카이사르가 기다리던 소식이라 신속하게 기동합니다.
헬베티족은 리옹의 아라르강을 건너는 중이었으니 카이사르는 새벽 1시경 3개 군단을 이끌고 야습
하여 아직 강을 건너지 못한 4분의 1 정도 헬베티족을 몰살시키니 바로 "아라르강 전투" 입니다.
헬베티족은 다음날 사절을 보내 카이사르에게 강화를 제의하니 카이사르는 하이두이족과 세콰니족에게
보상하고 볼모를 제공할 것을 요구하자 굴욕적이라고 판단한 헬베티족은 거부하고는 하이두이족
의 영토를 지나갔고, 카이사르군은 갈리아 동맹군으로 부터 기병 4,000명을 제공받아 추격에 나섭니다.
이 기병이 헬베티족 기병 500기와 교전중 몇개 부대가 퇴각하여 패배한 사건이 있었고, 하이두이족의
군량 보급이 자주 끊기는 일이 있자.... 카이사르는 격분하여 부족장을 소집해 질책했는데
이때 부족장들로 부터 헬베티족에게 우호적인 하이두이족의 둠노릭스가 손을 쓴 것을 알게 됩니다.
카이사르는 헬베티족 추격을 계속했는데 군량이 떨어지자 하이두이족의 도시로 방향을 돌렸으니
이를 로마군이 겁을 먹고 도망가는 것으로 오판한 헬베티족은 전력을 다해 로마군에게
공격을 감행하자...... 카이사르는 기병을 내보내 헬베티족의 공격을 견디는 한편 병력을
언덕 위로 배치하니 정예 4개 군단이 3열로 포진했고 신병은 언덕 꼭대기에서 짐을 지키도록 합니다.
헬베티족은 돌진했고 로마군 보병과 접전하기 시작하자 로마군은 필룸(창)을 던져 방패를 소모하게 한뒤
일제히 돌진하니 헬베티족도 용감하게 싸웠지만 1마일 정도 밀리게 되었고, 헬베티족 후방 병력
일부가 우회해 로마군의 우익을 협공하니 로마군 3열은 전열에서 빠져나와 헬베티족의 기동에 응전합니다.
로마군 필룸(창) 이 헬베티족 방패에 박히면 뺄수 없으니 너무 무겁고 거추장스러운지라창이 박힌
방패를 버릴 수밖에 없고 그럼 무방비 상태가 되니 로마군의 화살과 창검이 쏟아지는
데.... 마침내 진영을 빼앗기게 된 헬베티족은 군수물자를 상실하게 되니 "비브라테 전투" 입니다.
카이사르에게 저항할수가 없게 된 헬베티족 생존자들은 다음날 사신을 보내 카이사르에게 항복했고,
카이사르는 볼모를 받은 뒤 헬베티족에게 그들의 근거지로 돌아가라고 명령했는데, 카이사르가
남긴 기록에 따르면, 헬베티족은 360,000명 중에 30%에 불과한 110,000명만 살아 남았다고 합니다.
헬베티족의 전사로서 명성은 높았고, 50년전 로마군을 패배시키고 집정관을 전사시킬 정도로 만만찮은 모습
을 보였던 바 있었으며.... 헬베티족이 유린한 영토는 갈리아의 패권을 다투던 세콰니족과 하이두이족
의 영토였으니 이런 헬베티족을 한번의 싸움으로 크게 무찌른 카이사르와 그의 군대의 명성은 높아졌습니다.
그러자 갈리아의 족장들은 카이사르로 하여금 갈리아를 침공하고 있던 게르만족을 상대하려고
했으니..... 다수의 부족장이 카이사르와 만났고 하이두이족의 족장인 디비키아쿠스는
그들을 대표해서 게르만족에게 고통 받는 갈리아인들의 상황을 설명하고 도와 달라고 말합니다.
더 큰 전쟁을 원하는 카이사르에게 있어서 참으로 좋은 제안이었는데.... 분쟁에 개입하여 적의
세력을 내쫓고 지역의 새로운 패권자가 되는 것은 전형적인 로마인들의 세력
확장 방법이었으므로 카이사르가 이제 갈리아의 패권을 주장할수 있는 상황이었기 때문입니다.
카이사르는 게르만족의 일파인 수에비족의 지도자 아리오비스투스에게 사절을 보내 더 이상
게르만족을 불러들이지 말 것, 갈리아의 볼모를 모두 돌려보낼 것,
그리고 이후 갈리아족을 상대로 더 이상 전쟁을 시도하지 말 것이라는 세 가지를 요구합니다.
수에비족 아리오비스투스는 "승자와 강자가 패자와 약자를 마음대로 다루는건 인류 역사의 오랜 법칙이고
로마인들도 그렇게 살아오지 않았느냐? 나도 그렇게 다루겠다는데 당신들이 무슨 권리로 막겠다는
것이냐? 불만이 있다면 덤벼라. 14년동안 지붕 아래에서 잠을 잔적이 없는 게르만족의 용맹을 보여주겠다"
맞는 말이지만 카이사르는 즉시 군대를 라인강 근처로 이동했고, 아리오비스투스 역시 수에비족을
이끌고 오니.... 로마군은 게르만족의 용맹과 큰 체구에 대한 묘사를 전해듣고 겁에 질렸지만
카이사르는 동요하는 이들에게 교묘한 화법으로 단합케 한뒤, 아리오비스투스와 회담을 가졌습니다.
아리오비스투스는 카이사르한테 입장을 설명했지만 도중에 카이사르 휘하 기병에게 수에비족 기병
이 돌을 던지는 일이 있자 카이사르는 이것을 핑계삼아 돌아왔고 대치하여 전투할 시기를 가늠
하는데, 아리오비스투스는 달이 바뀔 때까지 기다려야 한다는 점쟁이의 말을 듣고 전투를 미룹니다.
카이사르는 대담하게도 수에비족의 진영에 다가가 진을 차린뒤 아침마다 진에서 나와 수에비족
코앞에 병력을 포진시키는 일을 벌이니 5일에 걸쳐서 그 꼴을 본 아리오비스투스는
분노하니... 마침내 군대를 내보내 로마군을 공격하기 시작했고 양군은 격렬한 전투를 벌입니다.
아리오비스투스의 공격은 거셌고 양군의 거리가 가까웠으므로 로마군은 필룸(창) 을 던질
기회도 없이 바로 백병전에 돌입했는데..... 백병전이 벌어지자
갑옷과 투구 등 무장의 질적 수준이 훨씬 높았던 로마군의 전투력이 돋보이기 시작합니다.
로마군은 수에비인들의 밀집대형에 뛰어들어 방패를 낚아챈뒤 찌르는 방식으로 싸우니 수에비족의
좌익은 공세를 견디지 못했으며.... 우익은 로마군을 거세게 공격했는데, 이를 간파한
기병대장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는 3열에 포진한 로마군을 쪼개 로마군 우익에 투입합니다.
로마군의 우익은 늘어났고 좌익이 무너진 수에비족은 전투가 가망이 없다고 생각하여 전원이 패주하기
시작했으니..... 수에비족의 수장 아리오비스투스도 가족을 모두 버린채 라인강에 이르러
배를 타고 강 건너로 달아났으며, 카이사르는 수에비족을 완전히 패배시켰으니 "보주 전투" 입니다.
카이사르는 군단을 세콰니족의 영토에 주둔시킨뒤 부관 라비에누스에게 맡기고 북이탈리아로
돌아갔는데, 수도 로마에서는 제1차 삼두정치의 영향으로 두 집정관의 직위를
꿰차고 있었으며 그 와중에 마르쿠스 툴리우스 키케로가 카틸리나의 반란 진압때
재판없이 로마 시민을 처형한 문제로 재산이 몰수된 후 국외로 추방당하는 사건이 있었습니다.
갈리아에서는 카이사르가 게르만족을 패주시킨 이후도 병력을 철수시키지 않은채, 갈리아족의 영토에
남겨둔 의도에 대해 미심쩍어하는 세력이 있었으니 이들은 로마가 게르만족이 했던 것 처럼
갈리아족의 지배자가 되고자 한다고 의심했으며 친 로마파 정치가들의 입지가 강화되는
것을 아니꼽게 본 이들도 많았으니 벨가이인들의 도움을 받아 로마군과 전쟁을 벌일 음모를 꾸밉니다.
기원전 57년 카이사르는 겨울에 2개 군단을 추가 편성하고, 초여름에 속주 6개 군단에 합류케 한뒤 갈리아
의 곡식이 익을 무렵, 이탈리아를 떠나 전군을 이끌고 벨가이의 영토로 진군했으니... 15일 만에
벨가이인 영토에 진입했고 갑작스러운 침공을 받은 레미족은 카이사르에게 항복한후 협조를 약속합니다.
카이사르는 갈리아인 레미족에게 벨가이인들에 대한 정보를 물었고.... 각 부족의 구성과 위치,
병력수를 알게 된 카이사르는 벨가이인들의 맹주 역할을 하는 부족이 벨로바키족
이라는 사실을 알아낸후 하이두이 족장인 디비키아쿠스에게 벨로바키족의 영토를
짓밟으라는 요청을 했으며.... 레미족의 볼모를 얻어내어 로마군을 배신하지 못하도록 합니다.
벨가이인들의 연합군은 레미족 도시를 포위 공격했고, 구원을 요청하자 크레타섬의 궁병과 발레아레스
제도의 투석병을 보내 도시를 지키도록 하자 벨가이인들은 군대를 철수한뒤 카이사르의
본진으로 접근했으니 카이사르는 기병전을 통해 벨가이 연합군의 실력을 헤아린뒤 전투를 결심합니다.
카이사르는 언덕을 배후에 두고 포진했는데 로마군은 소수이니 진영뒤 양 측면에 참호를 파
두었으며, 벨가이인들과 로마군 사이에 늪지가 있었으니 공격을 감행하기 꺼렸으므로
지켜보기만 했고, 기병전에서는 로마군이 우위를 차지하고 있었기 때문에 벨가이
인들이 섣불리 늪을 건너지 못하리라 판단한 카이사르는 자신의 병력을 진영으로 물립니다.
벨가이인은 병력을 쪼개 우회해 로마군 진영의 배후로 돌아갔으니.... 이것을 지켜본 카이사르는 이들이 강을
건널때 기동력이 뛰어난 기병과 경보병을 보내 급습하자 이 싸움에서 벨가이인들은 큰 피해를 입었습니다.
벨가이인들은 방어가 완벽한 위치에 포진한 로마군을 공격하는 것이 여의치 않은데다가 군량도
떨어지니 자신의 영토로 이동하기로 결정했는데..... 하이두이족이 벨로바키족의
영토를 공격하려고 했으므로 오래 머물면서 싸울 의지가 없어졌으니 밤 12시에 퇴각을 감행합니다.
그런데 퇴각은 모든 부족원이 동시에 이루어졌기 때문에 혼란스럽게 되는데, 카이사르는 의도를 정확하게
파악하지 못했으므로 잠시 지켜보다가 벨가이인들이 진을 거두고 출발한지 어느정도 지난
동틀 무렵에 기병을 보내 배후를 급습했으며 곧이어 티투스 라비에누스가 이끄는 3개 군단이 출발합니다.
기병이 후방을 치자 벨가이인들은 뒤돌아 서서 응전했지만 전방 부대는 로마군이 급습했다는 소식에 공포에
휩싸여 달아나기 시작했고, 로마군에 응전하던 후방 부대 역시 전의를 상실했으니 카이사르의 기병과
뒤이어 합류한 보병은 해가 질 때까지 추격했고, 달아나는 벨가이인들을 살해했으니 "악소나 전투" 입니다.
승리의 여세를 몰아 주변 부족의 영토를 침공한 카이사르는 수에시오네스족의 항복을 받은뒤 벨가이인
의 맹주 벨로바키족의 영토로 진입는데, 전황이 안 좋게 되자 벨로바키족
내부에서 전쟁을 주동했던 자들은 브리타니아섬으로 망명했고 벨로바키족은 카이사르에게 항복합니다.
맹주 벨로바키족이 항복했지만 반발한 네르비족은 그들 부족만으로 로마군에게 항전하고자 하는 의지
를 품었으니..... 스파르타 처럼 포도주 및 사치품을 수입 금지한채 성인 남자들은 금욕적인
생활을 유지하며 오로지 군사 훈련으로만 세월을 보내는 이들로 10개 부족을 지배하에 두고 있었습니다.
카이사르는 네르비족을 격파함으로써 로마의 패권에 불만을 품은 세력을 일소할 생각으로 네르비족의
영토를 향해 진군하자, 네르비족은 첩보와 지형의 상대적인 우위를 활용하여 행군 중인 카이사르의
군대를 급습할 작전을 세웠는데 매복하기로 한 장소는 언덕 밑의 평지 끝자락에 위치한 숲 속이었습니다.
로마군이 진입하자 네르비족은 숲에서 뛰쳐나와 로마군에 돌진했으니 사비스 전투라고 부루는데, 이때
네르비족을 격파한 카이사르는 항복을 받아내고, 네르비족을 지원했던 아투아투키족을 공격하려
행군하자 본디 농성하기로 했으나, 로마군이 거대한 공성병기를 만들어 움직이자 겁에질려 항복합니다.
그러나 그날 밤 아투아투키족은 야영 중인 로마군을 야습했는데, 하지만 로마군의 반격으로 4,000명
희생자를 낸 끝에 성내로 퇴각했고.... 다음날 아침에 성을 함락한 로마군은 주민 53,000
명을 모두 노예로 팔아바렸으니 신의를 저버린 자들에 대한 징벌로 니 "아투아투키 공방전" 입니다.
벨가이인들을 복속시키는데 성공했다고 판단한 카이사르는 푸블리우스 리키니우스 크라수스
를 보내 갈리아의 대서양 부족들을 항복시키도록 했는데, 벨가이인들이 패퇴했다는
소식에 갈리아족은 로마에 항복했으니..... 원로원은 무려 15일 동안 감사제를 지냈는데,
이는 폼페이우스가 동방 원정을 마무리 짓고 개최한 12일간의 감사제를 능가하는 규모였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