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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세황 姜世晃
강세황(강세황. 1712~1791)은 조선 후기의 문인(文人), 화가 그리고 평론가이었다. 그림 제작과 화평(畵評)활동을 주로 하였다. 이를 통해 당시 화단(畵壇)에 한국적인 남종문인화풍(南宗文人畵風)을 정착시키고, 진경산수화(眞景山水畵)를 발전시켰으며, 풍속화, 인물화를 유행시켰으며 새로운 서양(西洋)화법을 수용하는 데도 기여하였다.
남종문인화 南宗文人畵
명나라 말기 동기창(董其昌), 막시룡(莫是龍) 등이 당나라 선종(禪宗)의 남북분파(南北分派)에 착안하여, 중국의 산수화(山水畵)를 출신성분과 화풍에 따라 남북 2종으로 구분한 것에서 비롯된 명칭이다. 문인화가들을 중심으로 전개되었기 때문에 '남종문인화'라고도 한다. 학문과 교양을 갖춘 문인(文人)들이 비직업적(非職業的), 여기적(餘技的)으로 수묵(水墨)과 옅은 담채(淡彩)를 사용하여 내면세계의 표출에 치중하고, 시정적(詩情的)이며 사의적(寫意的)인 측면을 중시하여 그런 품격 높은 그림을 일컬으며, 북종화(北宗畵)와 대비되는 개념을 지닌다. 이에 대비되는 북종화(北宗畵)의 특색은 기교적이고 형식적인 화풍이며, 형식상의 특징은 산수(山水)의 일각을 강조하고 있다.
강세황 姜世晃
본관은 진주(晉州)이며, 자는 광지(光之), 호는 첨재(添齋), 표옹(豹翁), 노죽(路죽), 표암(豹菴)이고 시호(諡號)는 헌정(憲靖)이다. 어려서부터 재능이 뛰어나, 8세 때 시(詩)를 짓고, 13~14세 때는 글씨에 뛰어난 솜씨를 보여, 소년기에 쓴 글씨조차도 병풍을 만드는 사람이 있을 정도이었다고 한다. 그는 벼슬에 뜻이 없어 젊은 시절에는 주로 작품활동에만 전념하였다.
강세황은 1713년 윤 5월 21일, 서울에서 진주 강씨의 후손인 아버지 강현(姜晛. 1650~1733)과 어머니 광주 이씨 사이에서 3남6녀 중 막내로 태어났다. 어릴 적부터 등에 '표범'과 같은 얼룩무늬가 있다고 하여 표암(豹菴)이라는 호(號)가 붙었다.
그가 태어나기 전 아버지 강현(姜晛)은 큰 형 강세윤(姜世胤)이 치른 과거(科擧) 시험의 부정행위에 연루되어 파직을 당하였다. 경종(景宗)의 즉위하면서 '강현'은 벼슬길에 올랐고, 강세황은 유복한 유년시절을 보낼 수 있었다. 그러나 경종(景宗)의 갑작스러운 승하(승하)로 영조(英祖)가 등극하자, 의금부 당상관 시절 노론(老論) 4대신을 죽이는 데 가담하였던 '강현'은 금산으로 귀양을 갔다.
강세황의 큰 형 강세윤(姜世胤)도 이천부사(利川府使)로 재직할 당시, 이인좌의 난(이인좌의 난)과 연관되어 유배를 따나게 된다. 설상가상으로 강세황의 나이 20대에 부모상을 당하였고, 이후 가세(家歲)는 급격하게 기울었다. 집안의 몰락과 가난을 견디지 못한 그는 1744년 처남(妻男) 유경종(유경종)이 정착한 안산(安山 .. 지금의 안산시 부곡동)으로 이주하였고, 1773년 출사(出仕)하기까지 30년을 이곳 안산(安山)에서 생활하였다.
강세황은 15세 때 진주 유씨 집안인 유뢰(柳瀨)의 장녀와 혼인하여, 네 명의 아들을 두었다. 강세황이 생활을 돌보지 않은 채 오로지 책과 필묵에만 몰두한 까닭에 빈곤한 살림살이는 모두 부인 유씨의 몫이었다. 지금으로 치면 무능한 무책임한, 형편 없는 가장이었다. 그런데 그의 나이 44세 때 부인 유씨가 세상을 떠났다. 어려운 살림을 꾸려오던 부인의 죽음은 어린 네 아들을 보살펴야 하는 그에게 청천벽력이었다. 부인을 잃은 슬픔으로 방황하다가, 넉 달 만에 과천부근에서 겨우 장례를 치르고 다음 세상에서도 함께 할 것을 약속하였다.
그의 문집인 ' 표암유고(豹菴遺稿) '에 그의 부인과 그 부인의 죽음을 애통해 하는 시(詩)가 여러 편 전하고 있다. 부인 류씨는 강세황과 혼인하여 네 아들을 두고 30년간 애틋한 사랑을 간직하며 살다 1756년 5월 1일 44세의 나이로 죽었다.
音容一隔査難追
삽載光陰片夢疑
此日傷心無限事
何由報與九泉知
목소리 얼굴 한 번 멀어지니 아득하여 추억하기 어렵고
삼십 년 흐른 세월이 한조각 꿈인 듯 헛갈리는구료
오늘 애타는 마음 끝이없는데
어찌 저승에 알려서 알게 하리오
강세황은 환갑이 넘어서야 출사(出仕)할 수 있었다. 영릉참봉(英陵參奉)에 제수되면서 안산(安山) 생활을 정리한 후 상경하였고, 남산 기슭에 집을 마련하여 서울생활을 시작하였다. 이후 한성판관, 동의금 총관 등을 거쳐 지금의 서울시장인 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까지 오르게 되었다.말년에 이르러서야 그의 정치적 입지가 견고해 진 것이다.
강세황이 안산(安山)으로 거처를 옮긴 것은 가난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는 처남(妻男) 유경종(柳慶鍾)을 비롯하여 많은 문인(文人)들과 친분을 다지면서 폭넓은 학식과 높은 안목을 키웠다. 비록 가난하고 벼슬길에 오르지 못하였지만, 우아하고 멋스러운 풍류모임인 아회(雅會)를 열어 시서화(詩書畵)를 즐기고 학문의 깊이을 더한 것이다.
위 그림은 강세황이 안산 시절에 그린 현정승집도(玄亭勝集圖)이다. 1747년 초복날, 강세황과 그의 친구들은 진주유씨 대종가의 서재이었던 처남(妻男)유경종(柳慶鍾)의 청문당(淸聞堂)에 모였다. 이미 초복(初伏)을 맞이하여 개고기로 포식을 한 후였다. 요즘처럼 더운 여름날, 청문당(淸聞堂)에서 보낸 느긋한 시간을 강세황의 처남이자 청문당의 주인 유경종(柳慶鍾)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복날은 개를 잡아 여럿이 먹는 모임을 즐기는 것이 풍속이다. 정해년(丁亥年. 1747년) 6월1일이 초복(初伏)이었는데, 청문당(淸聞堂)에 모였다. 광지(光之 .. 강세황의 호)에게 그림을 부탁하여 훗날의 볼거리로 삼으려고 한다. 모인 사람이 열한 명이었다. 방 중간에 앉은 사람이덕조(德祖 .. 유경종), 문 밖에 책을 들고 마주 앉은 사람이 유수(有受 .. 유경용), 가운데 앉은 사람이 광지(光之 ..강세황), 옆에 앉아 부채를 흔드는 이가 공명(公明 ..엄경응), 마루 북쪽에서 바둘을 두는 사람이 순호(醇乎 ..박도맹), 머리를 드러내고 대국하는 이가 박성망, 그 옆에 앉은 사람이 강우(姜佑 .. 강인), 맨발로 있는 자가 중숙(仲叔 .. 최인우)이다. 동자가 둘이 있고 독서하는 이가 경집(慶集), 부채를 든 이가 산악(山岳 ..유성)이다. 마루 아래 대기하고 있는 자가 가동 귀남(貴南)이다.
아회(雅會)는 조선의 선비들이 한적한 곳에 모여 서로 안부를 묻고, 시주(詩酒)를 즐기며 친목을 나누는 모임이었다. 사교와 인적 관계망을 중시(重視)하는 선비들의 일상(日常)이자, 여가문화(餘暇文化)의 일면이었다. 그리고 조선의 선비들은 아회(雅會)의 즐거움을 그림으로 남겨 화첩을 꾸몄다. 그림의 한 분야로 아회도(雅會圖)라고 한다.
현재 청문당(淸聞堂)은 경기도 안산시 상곡동에 남아 있으며 (위 사진) , 경기도문화재자료 제45호로 등록되어 있다. 강세황은 그의 처남(妻男) 유경종의 부탁으로 청문당(淸聞堂) 아회(雅會)를 그 자리에서 간략하게 그렸고, 작품 제목을 ' 현정승집도 (玄亭勝集圖) ... 그윽한 정자의 우아한 모임 '라고 했다. 강세황의 그림에는 금기서화(琴碁書畵 .. 거문고, 바묵, 그림, 글씨)를 즐기는 아회인(雅會人)들이 등장한다. 댓돌에는 땋은 머리를 한 시동(侍童) '귀남'이도 서 있다. 유경종의 기록과 일치한다. 문인들의 자유로운 모임과 예술의 마당인 아회(雅會)가 강세황에 의하여 시서화(詩書畵)로 재현된 것이다.
강세황을 보면, 김홍도가 보인다
강세황은 김홍도(金弘道)의 스승이자 후원자로서 김홍도의 예술 생애에 있어 정조(正祖)와 함께 가장 중요한 인물이다. 강세황은 명문 사대부 출신으로 60세가 넘어 벼슬길에 올라 참판까지 지냈다. 강세황은 자신과 김홍도와의 관계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요약한 바 있다.
내가 사능(士能.. 김홍도의 호)과 사귄 것이 전후 대개 세 번 변하였다. 처음에는 사능(士能)이 어린 나이에 우리 집에 드나들어 혹은 그 재능을 칭찬하기도 하고 혹은 그림 그리는 요령을 가르쳐주기도 했고, 중간에는 한 관청에 같이 있으면서 아침저녁으로 서로 대하였으며, 나중에는 함께 예술계에서 노닐어 지기(知己)의 느낌이 있었다. 사능(士能)이 내 글을 구하는 데 다른 이에게서가 아니라 반드시 내게서 구하는 것은 역시 그럴만한 까닭이 있다.
강세황을 보면 김홍도가 보인다. 김홍도(金弘道. 1745~1806 이후)를 이해하려면, 강세황(姜世晃. 1713~1791)을 알아야 한다. 강세황과 김홍도의 관계는 숙연(宿緣)이라 할만큼 각별한 인연을 맺었다. 김홍도(金弘道)는 어려서부터 중년(中年)이 될 때까지 강세황과 사제지간(師弟之間)을 넘어 긴밀한 관계 속에서 작품활동을 해왔기 때문이다.
김홍도는 그의 나이 7, 8세 때 안산(安山)에 살고 있던 강세황의 문하에 들어와 그림ㄱ ㅗㅇ부를 하였고, 두 사람이 같은 관청에서 일하기도 하였으며, 나중에는 예술계에서 지기(知己)로서 함께 활동하였다. 화가인 김홍도는 61년 생에 속에서 2/3에 해당하는 39년을 강세황과 더불어 작품활동을 해왔기 때문에 김홍도에게서 강세황은 절대적인 존재이었다. 따라서 김홍도의 작품세계를 파악하기 위해서는 강세황을 이해하는 작업이 선행되어야 할 것이다.
강세황과 김홍도의 인연은 1740년대 말이나 1750년대 초에 이루어졌다. 김홍도가 ' 젖니를 가는 어린 나이 '로 안산(安山)에 있는 강세황의 집을 드나들며 그림을 배웠다. 김홍도 그림의 기초는 여기서 형성된 것이다. 실제 김홍도 그림 속에 간간히 안산(安山)의 추억을 되살리는 장면이 있는 것으로 보건데, 김홍도에게 많은 영향을 미친 것을 알 수 있다.
두번 째 깊은 인연은 1774년 사포서(司圃署)에서 이루어진다. 사포서(司圃署)는 궁중의 밭과 채소 경영을 관장하는 기관인데, 강세황과 김홍도는 같은 벼슬인 별제(別提)로 이곳에 근무하였다. 별제(別提)는 종6품으로 녹봉(祿俸)을 받지 않는 명예의 관직으로 당시 사포서(司圃署)에는 세 사람으 별제(별제)를 두었는데, 그 중 두 사람이 강세황과 김홍도이었던 것이다.선생과 제자가 같은 직급으로 같은 곳에서 근무하였다. 아울러 나이 들어서는 화단(畵壇)에서 서로 지기(知己)로서 지냈다.
기록상 확인되는 관계는 이와 같지만, 강세황이 김홍도의 그림에 많은 평문(評文)을 적은 점으로 보아 강세황이 줄곧 김홍도의 후원자 역할을 하였음을 알 수있다. 아울러 김홍도도 평문(評文)을 받을 일이 있으면, 강세황에게 부탁하였다. 강세황은 김홍도의 풍속화(風俗畵)에 대하여 많은 평문(評文)을 씀으로써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김홍도 풍속화의 든든한 배경이 된 것이다. 안산(安山)이 배출한 강세황과 김홍돠는 회화(繪畵)의 두 거장(巨匠)은, 사제지간이라는 긴밀한 관계 속에서 강세황은 평론(評論)과 작품으로 조선 후기 화단을 이끌어 나갔고, 김홍도는 조선시대 최고(最高)의 화가로 우뚝 선 것이다.
강세황은 김홍도의 재능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칭찬하였다. 단원(檀園)은 어릴 적부터 그림을 공부하여 못하는 것이 없었다. 인물, 산수(山水), 신선, 불화(佛畵), 꽃과 과일, 새와 벌레, 물고기와 게 등에 이르기까지 모두 묘품(妙品)에 해당되어 옛 사람과 비교할지라도 그와 대항할 사람이 거의 없었다. 특히 신선(神仙)과 화조(花鳥)를 잘하여 그것만 가지고도 한 세대를 울리며 후대에까지 전하기에 충분하였다. 또 우리나라의 인물과 풍속(風俗)을 잘 그려내어 공부하는 선비, 시장에 가는 장사꾼, 나근, 규방(閨房), 농부, 누에 치는 여자, 이중으로 된 가옥, 겹으로 난 나무, 거친 산, 들의 나무 등에 이르기까지 그 형태를 꼭 닮게 그려서 모양이 틀리는 것이 없으니 옛적에는 이러한 솜씨는 없었다. 그림 그리는 사람은 대체로 천과 종이에 그려진 것을 보고 배우고 익혀서 공력을 쌓아야 비로소 비슷하게 할 수 있는데, 단원(檀園)은 독창적으로 스스로 알아내어 교묘하게 자연의 조화를 빼앗을 수 있는 데까지 이르렀으니, 이는 천부적인 소질이 보통 사람보다 훨씬 뛰어나지 않고서는 될 수 없는 일이다.
풍속화 ... 강세황 그리고 김홍도
단원 김홍도(金弘道)가 이룩한 회화적 성취는 풍속화(風俗畵)이다. 조선 후기뿐만 아니라 우리나라를 통틀어 풍속화가(風俗畵家)라면 '김홍도'를 내세우는 데 주저하지 않을 것이다. 그는 조선 후기 풍속화의 절정을 보여주었던 화가이다. 그가 활동한 정조(正祖) 때는 풍속화가 성행하는 분위기가 무르익었던 시기다.
당시 속화(俗畵)라고 불렸던 풍속화가 규장각(奎章閣)의 자비대령화원(差備待令畵員 .. 본래 예조에 소속된 도화서의 화원을 규장각에 파견하여 왕명의 지시를 받았다. ) 녹취재(祿取才)의 시험문제로 가장 많이 출제되었고, 정조(正祖) 자신도 ' 모두 보자마자 껄껄 웃을 만한 그림을 그려라 '고 지시할 만큼 궁중에서 스스로 권장한 분야이었다. 이처럼 풍속화에 대한 긍정적인 분위기 속에서 김홍도라는 걸출한 풍속화가가 등장하게 된 것이다. 바로 정조(正祖) 직전의 영조(英祖) 때에는 상황이 판이하게 달랐다. 조영석(趙榮晳)이 자신의 풍속화로 꾸민 화첩인 ' 사제첩(麝臍帖) '에 ' 남에게 보이지 말라. 범하는 자는 나의 자손이 아니다. 勿示人 犯者非吾子孫 ' 라는 경고문을 적을 만큼 풍속화 제작을 꺼리는 분위기이었다.
김홍도가 풍속화에서 보여준 놀라운 성취는 정조(正祖)라는 진보적이고 개방적인 성향의 군주(君主)이 후원과 더불어 강세황(姜世晃)이라는 스승이 있었다는 사실에 크게 주목할 필요가 있다. 만일 스승 강세황이 없었더라면, 김홍도의 풍속화도 없었을 것이라고 단언할 수 있을 정도로 김홍도 풍속화에서 강세황의 영향은 매우 크다.
특히 강세황이 당시 안산(安山)의 학풍인 실학사상을 갖고 있는 이들과 교유하면서 자연스럽게 몸에 밴 실학적인 사상을 김홍도의 풍속화를 통해 실현되었다. 사소하고 하찮은 것으로 치부했던 일상(일상)이 18세기 후반 정조(正祖) 시절에는 그림의 주변이 아니라 중심(中心)으로 자리 잡았다. 사소한 것의 가치와 평범함의 아름다움을 중시하는 인식의 전환이 풍속화를 통해 이루어졌다. 아취(雅趣)와 풍속(風俗)으로 구분되는 주제에 대한 전통적인 차별의식이 달라진 것이다. 오랜 세월동안 굳어져 온 속(俗)에 대한 부정적인 가치관에서 벗어나 긍정적인 가치관이 싹튼 것이다.
김홍도가 풍속화를 통해 추구한 일상(日常)의 아름다움은 강세황의 실학적 사상과 무관하지 않다. 강세황은 풍속화처럼 평범하고 일상적인 것의 가치(價値)를 높게 평가하였다. 물론 당시 풍속화가 유행하게 된 배경에는 이러한 사상(思想)이 뒷받침되었지만, 그 결정적인 역할을 한 사람이 바로 강세황인 것이다.
강세황은 처가(妻家)가 있는 안산(安山)에 1744년부터 1773년까지 30년을 살았다. 그가 가난때문에 처가살이를 했다고 밝혔지만 , 할아버지와 아버지가 기로사(耆老社)에 입적한 명문 사대부가 집안에다 충북 진천, 오창 충남 공주, 천안에 적지 않은 토지를 소유한 점으로 보아 조선시대 사대부들이 상투적으로 내세우는 수사(修辭)일 뿐, 실제는 안산(安山)에서 여러 유명한 인사들과 교유하기 위하여 안산으로 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그만큼 안산(安山)은 당시 학문과 예술의 고장이었다. 진주 유씨, 여주 이씨 등 정권에서 소외된 남인(南人)들이 살았고, 여주 이씨는 성호 이익(星湖 李瀷)을 중심으로 실학사상을 펼쳐나갔다.
아울러 ' 성호 이익(星湖 李瀷)'의 문하들이 그의 사상을 이어받아 학문활동을 펼쳤는데, 특히 강세황의 처남(妻男) 유경종(柳慶鍾)도 이익(李瀷)의 제자이었으며, 양명학(陽明學)의 개조(開祖)인 정재두(鄭在斗)가 살았던 곳이 바로 안산(安山)이었다. 아울러 강세황과 교유했던 허필, 이용휴, 유경종, 임희성 등도 실학사상에 심취한 인물들로써, 일상적이고 현실적이며, 박애적인 사상과 문학을 실현하였다. 따라서 강세황이 실학(實學)의 학풍이 강한 안산(安山)에서 실학적인 인식을 갖게 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고, 이러한 사상은 자연스럽게 김홍도에게 영향을 미친 것으로 보인다.
조선 후기 풍속화의 유행은 당시 사상 및 문화계의 동향과 밀접한 관련이 있다. 일상(日常)과 서민(庶民) 문화에 대한 인식이 달라지고, 그 중요성을 강조하는 주장이 득세하는 분위기 속에서, 일상과 통속적인 생활상을 다룬 풍속화는 실학(實學)의 영향 속에서 발전한 것이다.
강세황의 절필 .. 평론가
표암 강세황은 그의 나이 51세 때 갑자기 붓을 꺾기도 하였다. 아들이 과거(科擧)에 합격하여 영조(英祖)를 만났을 때, 영조(英祖)는 표암의 근황을 물으면서 ' 화가를 천(賤)하다고 업신여기는 사람이 있을 터이니 그림 잘 그린다는 얘기는 하지 말라 '고 하였다. 이 소식을 들은 강세황은 감격하여 3일 동안 눈이 부어오를 정도로 눈물을 흘렸으며, 강세황은 붓을 태워버리고 다시는 그림을 그리지 않을 것을 다짐하였다.
이 절필(絶筆)의 결심은 영조(英祖)가 살아 있는 동안 변치 않았고, 다시 붓을 잡기까지 20년 동안 강세황은 창작(創作) 대신 평론가(評論家)로 활동하였다. 그가 당대 제일의 평론가(評論家)로 이름을 날릴 수 있었던 것은 해박한 지식과 높은 안목은 물론 시서화(詩書畵)에 능했기에 가능하였고, 문예게 인사들과 폭넓은 교유에서 온 결과이기도 하였다. 그는 글씨나 그림에 대하여 논평을 하는 데 처음부터 구상한 일이 없이 손 가는대로 써내려갔지만, 한 구절 한 어구(語句)라도 새롭지 않거나 기이(奇異)하지 않은 것이 없었다고 한다.
표암 강세황은 윤순(尹淳. 1680~1741. 조선 후기 문신이자 서예가), 겸재 정선(謙齋 鄭敾), 심사정(沈師正) 등 내노라하는 서화가들의 작품에 방대한 양(量)의 평(評)을 남겼는데, 특히 제자 ' 단원 김홍도 (檀園 金弘道) '에 대해서는 신필(神筆), 신품(神品), 입신(入神) 등으로 극찬하였고, ' 화가는 각각 한가지에 장점이 있고, 여러 가지를 다 잘하지 못하는데, 단원(檀園)은 못 그리는 그림이 없고, 특히 신선과 화조(花鳥)를 잘 그려 이것만으로도 일세(一世)를 울리고 후대에 전해지기에 충분하다 '고 평하였다.
삼절 三絶
그는 젖비린내 겨우 가시던 나이부터 시(詩)를 짓고 그림을 품평(品評)하였다. 임금이 불러 벼슬기로 나아갔는데, 그것도 환갑이 넘어서였다. 병조참판과 한성부 판윤 등 고관을 지냈으나 시(詩), 서(書), 화(畵)의 ' 삼절 (三絶) '로 이름을 날리며 당대 예림(藝林)의 총수로 군림하였다. 천재 화가 김홍도(金弘道)가 그의 문하에서 지랐다.
강세황의 묘
현재 묘소에는 정경부인 진주유씨(晉州柳氏 . 1713~1756)가 합장되어 있고, 묘 앞에는 상석(床石)과 좌우 문인석(文人石) 및 망주석(望柱石)이 설치되어 있으며, 묘소 앞 200m 지점에는 ' 연민 이가원 (淵民 李家源) '이 지는 신도비(神道碑)가 서 있다. 그의 묘는 충청북도 진천군 문백면 도하리에 위치하고 있다.
강세황의 말년 그리고 죽음
나이 60살이 넘어 우연히 들어온 벼슬길에서 강세황은 그야말로 초고속 승진을 거듭하였다. 그리하여 1781년에는 호조참판까지 지내게 되었다. 1년 후 1782년부터 강세황은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하였다. 그것은 영조(英祖)와의 약속을 지켰기 때문에 더 이상 그림을 그리지 않고는 견딜 수 없었던 것이다.
마침 손주가 아파서 그림을 그려달라고 한 것을 기화로 다시 그림을 그리게 된 것이다. 그리고 1784년 10월에는 평소 그의 소망대로 그의 나이 72세에 부사(副使)로 북경 사행(使行) 길에 올라 1785년 1월 6일 건륭(乾隆 .. 청나라 황제) 천수연에 참석하였다. 중국 여행은 강세황이 중국학자들과 만나 막힌 가슴을 터놓기를 바랐던 소망이 이루어진 것으로 그곳 문인들과 시, 서, 화를 교환하며 의견을 나눌 수 있는 좋은 기회가 되었다.
이 일로 중국인들은 강세황의 그림과 글씨를 구하려고 모여들어 그를 칭찬하였다는 것이다. 1791년 즉, 신해(辛亥)년 정월, 강세황은 병환이 들어 23일 술시(戌時)에 붓을 달라고 하여 ' 푸른 소나무는 늙지 않고 학과 사슴이 일제히 운다 .. 蒼松不老 鶴鹿齊鳴 '라는 여덟 글자를 남기고 조용히 생을 마감하였다.
강세황은 1791년 즉, 신해(辛亥)년 정월, 병환이 들어 23일 술시(戌時)에 붓을 달라고 하여 ' 푸른 소나무는 늙지 않고, 학과 사슴이 일제히 운다.... 蒼松不老 鶴鹿齋鳴 '이라는 여덟 글자를 남기고 조용히 생을 마감하고 이곳에 묻혔다. 그는 인생역전의 주인공처럼 그 생을 살아왔다.
인생역전 人生逆轉
강세황의 일생은 기구하였고 파란만장하였다. 표암 강세황의 본관은 경남 진주이었다. 그의 아버지 '강현'은 영조 때 예조판서를 지낸 분이었다. 강세황은 그의 아버지인 '강현'이 65세에 얻은 막내 아들이었다. 남산 기슭의 남소동에서 9남매의 막내로 태어난 그는 아버지의 마지막 사랑을 독차지하여다.그기 6살 때에는 숙종의 국상(國喪)에 어울리는 시(詩)를 지어 주위를 노랄게 하였고, 열살 때에는 예조판서인 아버지를 대신하여 도화서 생도들을 취재하는 데 어른들을 대신하여 등급을 매긴적도 있다.
강세황은 15살에 동갑나기 유씨와 결혼을 하였다. 아버지가 살아있을 때는 그럭저럭 잘 살았지만, 그의 나이 21살에 아버지는 일찍 죽은 둘째 며느리의 장지(葬地)를 보기 위해 진천으로 갔다가 도중에 병을 얻어 세상을 뜨게 된 것이다. 이때를 전후하여 강세황에게는 시련이 닥쳐오기 시작한다. 마침내 아버지가 84세의 나이로 병사하자, 그는 3년 동안 초막을 짓고 여묘살이를 했다. 그는 시묘살이를 하면서도 아버지의 유고집을 직접 베끼는 정성을 들였다. 이미 가세는 기울었고, 3년 후에 서울로 돌아오자 귀양갔던 형 '강세윤'을 대신하여 어머니를 모시게 되었다.
집은 가난에 찌들었다. 식구들은 많아 좁은 집에서 살 수가 없어서 남소문 밖에 있는 본집과 처가가 안산(安山)으로 이사를 하게 되었다. 남은 식구들은 남대문 밖 염초교에 있던 빈 집으로 흩어져서 살아야만 했다. 이때 강세황의 처 유씨는 70살이 된 시어머니를 모시지 못해 항상 죄송해 하였다. 이런 처지를 강세황은 한탄하였고, 결국 아버지보다 22살이나 어린 어머니도 4년을 더 살다가 죽었다. 그리고 강세황은 아버지,어머니의 묘에서 또 다사 3년간 여묘살이를 하였다.
워낙 가세가 기울어 가난한 탓에 강세황 본인도 하루에 두끼를 죽으로 때우면서 버텼지만, 두 번의 여묘살이로 건강이 악화되었고, 뒤이어 그의 자식들도 3명이나 5살을 넘기지 못하고 죽었다. 1744년 겨울 32살의 강세황은 미련없이 가산을 정리하여 아예 안산(安山)으로 이사를 단행했다. 몰락한 집안의 자손으로서 그림에 취미가 있어 그림을 그리다보니 그저 백수생활이었다. 집안 살림은 부인유씨가 도맡아 할 수 밖에 없었다.1756년 44살의 강세황은 부인 유씨를 잃었다. 어렵고 힘들게 살아가던 유씨는 결국 일찍 세상을 떠나게 된 것이다. 이때의 비통한 심정을 강세황은 다음과 같이 기록하였다.
아아, 나와 공인이 부부가 된 지 지금 꼭 30년이었다. 내가 추우면 공인이 입혀 주었고, 내가 굶주리면 공인이 먹여주었고, 내가 병이 들면 공인이 치료해 주었다. 나의 부모를 잘 섬겨서 효성스럽고 부지런하였으며 또 나와 함께 6년의 상복(喪服)을 입었다. 공인은 나에게 그 은혜를 지극히 하였으며 그 정성이 극진하여 추호도 섭섭함이 없었다. 공인이 가난한 것은 내가 살림을 모른 잘못이며, 공인이 곤란하게 지낸 것은 내가 과거를 하지 못한 잘못이며, 공인이 병을 앓은것은 내가 치료방법을 모른 잘못이다. 공인이 죽기에 이르러 내가 공인에게 잘못한 것이 너무 많았다. 너=ㅏ는 또 무슨 마음으로 얼굴을 들고 이 세상에서 사람이라 할 수 있겠는가
강세황은 마지막까지 결국 처가집의 도움을 받게되었다. 즉, 추위와 배고픔에 떨고 잇는 강세황과 그 자식들을 돌본 이는 바로 처남(妻男) 유경종(柳慶鍾)이었다. 유경종은 강세황보다 한 살이어린 부인 유씨의 남동생이다. 유경종은 죽은 누이를 대신해서 누이의 아들들과 자형을 돌보았고 조카들의 교육까지 맡았다. 자식들을 유경종에게 맡긴 강세황은 개성으로 여행을 떠나 '송도기행첩(松都紀行帖)'을 남겼다.
1763년 강세황의 나이 51세가 되었다. 이때 그의 둘째 아들 '강완'이 과거에 급제를 하였다. 이때 영조(英祖)는 '강완'을 보더니 그의 할아버지 '강현'을 생각하였다. '강현'은 영조의 부왕인 숙종을 시봉하던 충신이 아니던가. 그런데 그런 충신의 아들이 아직도 백수로 있다니...영조가 충신 '강현'과 그의 아들 '강세황'을 생각해내자 당시 영의정 홍봉한은 영조에게 아뢰었다. ' 전하, 강세황은문장을 잘하고 서화에 능하다고 들었습니다 ' 영조(英祖)는 다음과 같이 대답하였다. ' 요즘 사람들이 인심이 좋지 않아서 천한 기술이라고 업신여길 사람이 있을터이니 다시는 그림 잘 그린다는 얘기는 하지말라. 예전에 서명응도 강세황이 그런 재주가 있다고 하기에 내가 대꾸를 하지 않았던 것은 나대로의 생각이 있었던 것이니라 '
이러한 영조(英祖)의 말을 들은 강세황은 영조의 은혜에 감사하며, 사흘동안 눈물을 흘리다가 마침내절필(絶筆)을 하였다. 그러다가 마침내 강세황에게도 행운이 찾아온다. 강세황의 첫째 아들인 '강연'은 마침내 영조를 모시는 벼슬을 얻었다. 그러다가 1773년 영조가 베푼 양로연이 있었다. 이때 영조는 강세황의 아버지인 '강현'이 숙종 때 기로연에 참석하였던 사실을 기억해내고, 그 기로연(耆老宴)에 참석했던 사람들이 다 죽고 그 자손들도 다 죽었는데, 오직 혼자 살아있는 강세황을 기억하게 된 것이다.
그리하여 옛 충신의 아들의 나이가 60살이 넘었지만 아직까지 백수로 있다는 것을 알고는 마침내 9품 하급직인 영릉(英陵) 참봉직을 제수하였다.그러나 그 나이에 참봉이 어울리지 않는다고 생각한 강세황은 곧 사직해버렸다. 영조는 사직 사실을 알고는 다시 사포서(司圃庶)의 별제(別提)에 임명하였다. 이는 종6품이다. 이때부터 강세황은 본격적인 벼슬길에 나서 초고속 승진을 거듭한다.
강세황과 겸재 정선
강세황이 중국의 대가와 화보에 관심을 가지고 참고하였음은 분명한 사실이다. 그러나 강세황은 우리나라 선배 화가들인 창강 조속(蒼江 趙涑), 공재 윤두서(恭齋 尹斗緖), 겸재 정선(謙齋 鄭敾) 등의 영향을 받아 그 화풍을 따르거나 모방한 작품도 다수 있다. 특히 강세황이 겸재(겸재)의 '피금정도(披襟亭圖)와 어한도(魚閑圖)에 부친 찬문도 크게 주목할 필요가 있다.
이 찬문에서 강세황이 ' 겸옹의 그림은 마땅히 우리나라 제일이다. 두루마리 안에 그려진 것들도 역시 모두 특외작이다. 옹은 이제 늙었다. 謙翁之畵 當爲吾東第一 卷中所畵亦皆得意 翁今老矣 '라고 적은 것을 보면, 강세황이 겸재의 그림을 우리나라 제일로 꼽았으며, 또 겸재 정선을 잘 알고 있었음을 확인할 수 있다.
문인(文人)출신의 강세황이 직업화가(職業畵家)이었던 겸재 정선(謙齋 鄭敾)을 이처럼 높이평가하였던 것은 대단히 중요한 사실이다. 뛰어난 서화가와 평론가로서 강세황의 열린마음을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그가 사의산수화(寫意山水畵)만이 아니라 '송도기행첩(松都紀行帖)'을 위시한 진경산수화도 주저없이 그렸던 소이도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표암유채 豹菴遺彩
경기도박물관 소장 유물인 ' 강세황 행초 표암유채 (姜世晃 行草 豹菴遺彩) '가 최근 보물 제1680호로 지정되었다. 이 '표암유채'는 글의 끝에 경술년(庚戌年. 1790) 겨울에 썼다는 기록으로 보았을 때, 1791년 1월23일 79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나기 1~3개월 전 작품임을 확인할 수 있다.
이 서첩(書帖)의 구성은 모두 13장 26면에 이르며, 규격은 54.7 × 31.5cm로 일반 서첩류보다 월등하게 크고, 글자의 크기도 커서, 큰 글자는 자경(字徑)이 15cm에 이르고 있다. 서체는 송ㄴ라 양시(楊時) 등의 칠언시(七言詩)를 유려한 행초(行草)로 쓰고 발문을 적었다.
평생의 꿈 중국 사행 (使行)
그 누구보다 사행(使行)을 간절히 염원하던 18세기 사대부가 있었다. 바로 표암 강세황이다. 조선시대에 국경을 건너 타국 땅을 밟는다는 것은 쉽지 않은 일이었다. 사행(使行)은 타문화를 접하는 공식적인 통로로 거의 유일하였다. 조선시대 사행단(使行團)의 규모는 정사(正使), 부사(副使), 서장관(書狀官), 역관(譯官), 의관(醫官), 화원(畵員) 등 정관(正官) 30여 명을 기본으로 하여 3백명 내외에 이르렀다고 하며, 조선시대를 통틀어 총 500여 히에 걸쳐 중국에 파견되었다.
수백 명이 함께 중국으로 출발해서 공식적인 업무를 수행하고 조선에 돌아오기까지 다섯 달 이상 걸리는 대장정의 길이었다. 명나라 때는 천자(天子)에게 조공 간다는 의미를 담아 '조천(朝天)'이라 하였고, 청나라 때는 연경(燕京 ..북경)에 가는 일이라 하여 '연행(燕行)'이라 하였다. 조천과 연행 모두 '중국 사행'을 뜻하는 말이지만, 연행(燕行)에는 조공관계를 생략하고 좀더 객관적인 사실만을 담고자 했던 조선 후기 지식인들의 고민과 생각이 담겨 있다.
시대에 따라 가는 길도 달라지고, 가는 사람들의 마음가짐도 달라졌던 이 역동적인 사행의 중심에는 화가(화가)들이 있었다. 사행단에 속했던 화가들은 새로운예술과 문화를 직접 접하고 활발하게 교류하면서 사행의 여정과 문화교류의 결실을 그림으로 남겼다. 그들의 작품 속에는 고된 여정의 순간이 담겨 있다. 거친 파도를 헤치며 배를 타고 갔던 바닷길 사행, 중국 땅에 도착하여 접한 이국적인 풍경들, 문헌기록을 통해 듣기만 했던 중국의 역사 유적지 등을 직접 보고 느낄 수 있었던 경험을 우리는 화가들이 남긴 그림을 통하여 간접 경험하게 된다.
영대기관첩 瀛臺奇觀첩
강세황은 초야(草野)에 묻혀 시서화(詩書畵)로 예술가적 삶을 살아가던 인물이었다. 그러던 그가 61세에 관직생활을 비로소 시작하게 되는데, 66세가 되었던 1778년, 채제공(蔡濟恭)을 따라 중국에 가게 된 박제가(朴齊家)에게 부러움과 한탄이 섞인 편지를 써서 준다. 그 안에는 다음과 같은 말을담았다.
중국에서 출생하지 못한 것이 한(恨)이며, 사는 곳이 멀리 떨어진 궁벽한 곳이기에 지식을 넓힐 도리가 없다. 중국 학자들을 만나서 나의 막힌 가슴을 터놓기가 소원이다. 어느덧 백발이 되었는데 이렇게 날개가 돋힐 수 있을까
66세가 되도록 강세황은 중국 한번 가보는 평생의 소원을 이루지 못하고 있었지만, 아직 포기할 수 없었던 이유를 밝히고 있다. 그리고 6년 후 72세가 된 1784년 10월, 강세황은 드디어 정사(正使) 이휘지(李徽之), 서장관 이태영(李泰永)과 함께 진하사은 겸 동지사행(進賀謝恩兼冬至使行)의 부사(副使) 자격으로 사행을 떠나게 되었다.
청나라 건륭제(乾隆帝)가 60년 동안 평화롭게 나라를 다스린 것을 하례하고, 칙령으로 조선 사신을 1785년 1월6일에 열리게 되는 천수연(千瘦宴)에 참석시킨 것, 그리고 중국에 표류한 조선인을 돌려보낸 것에 대한 사례를 위해서였다. 이때 강세황은 건륭황제를 가까이서 보고 황제의 창백한 안색과 기침을 하는 건강상태 등을 글로 적었다.
사행(使行) 일저 중에 만난 중국 청나라 관리 박명(박明), 화림(和林), 예부상서 덕보(德保) 등과는 시를 짓고 차운(次韻)하면서 서로 교류하였다. 청나라 사람들이 강세황의 글씨와 그림을 구하려고 모여들었으며, 그 중 옹방강(翁方綱)은 그의 글씨를 보고 ' 천골개장 (天骨開場) .. 뛰어난재주가 이 글씨에 그대로 드러나 있다 '이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고 한다.
강세황 일행은 산해관(山海關)을 지나 북경에 이르는 길에 접한 아름다운 경치를 화폭에 담고, 글로 같이 읊어 시화첩(詩畵帖)을 제작하였다. 사로(使路 .. 사행길)에서 만난 기이한 경치를 담은 ' 사로삼기첩 (使路三奇帖) '과 북경 호수(湖水)에서 펼쳐진 빙희(氷戱 .. 얼음 위에서 펼치는 묘기)를 그린 ' 영대기관첩(瀛臺奇觀帖) '은 삼사(三使..이휘지,강세황,이태영)가 함께 그림과 시로 사행의 경험을 담은 시화첩으로 유례가 없는 매우 독특한 작품이다.
그 가운데 가장 압권은 '영대빙희(瀛臺氷戱) ... 위 그림 '이다. 건륭제의초청으로 천수연에 참가하게 되었던 강세황 일행은 북경의 호수 한복판에서 벌어진 빙희(氷戱)를 관람하게 되었고, 그 기이한 경치를 화폭에 담았다. 그림오른쪽 상단에는 원형의 도장 '삼세기영(三世耆永) ... 강세황 집안의 3대가 기로소에 들어감을 기념한 도장 '을, 왼쪽 상단에는 방형의 도장으로 강세황의 호를 새겨 '광지(光之)'를 찍었다.
이 시화첩은 가로로 펼쳐 마치 횡권처럼 전체를 연결하여 보아야 전모가 드러나며 본래의 성격을 살필 수 있다. 북해의 백탑(白塔)을 배경으로 한 중해(中海)에 위치한 정자인 수운사(水雲사) 근처에서 벌어진 빙희연(氷戱宴)을 4면에 걸쳐 그린 것이다. 웅장한 북경 중남해 얼어붙은 호수의 경치를 담고 있다.
1784년 12월 21일 건륭제는 이곳에서 빙희연을 베풀었고, 강세황 일행은 그 행사에 함께 참석하게 되었다. ' 영대빙희(瀛臺氷戱)'는 조선이 사신들이 동지사(冬至使)로 북경을 방문했을 때 빼놓지 않고 구경하는 볼거리였다. '비의'는 북방에서 기마(騎馬)와 활쏘기에 능했던 만주족의 풍속과 밀접한 관계가 있으며, 팔기군의 무예 증진을위한 풍속이었다. 홍살문 사이로 지나가면서 무관(武官)들이 활과 화살을 손에 들고 진기한 무예를 선보였다. 강세황 일행은 귀국하여 1785년 2월 14일 정조(正曺)에게 다음과 같이 귀국 보고하였다.
12월 21일에는 황제가 영대(瀛臺)에서 빙희(氷戱)를 구경하였습니다. 그날 당일 새벽녘에 신(臣) 등이 서화문(西華門) 밖에 도착하였는데, 섬라사신(暹羅使臣)이 신등의 다음 자리에 섰습니다. 잠시 후에 황제의 난여(鸞輿)가 나와서 국왕이 편안한가를 물었으므로 신 등이 편안하다고 대답하였습니다. 신등이 걸어서 영대 가로 따라가니, 얼마 뒤에 황제가 빙상(氷牀)을 탔는데 모양이 용주(龍舟)와 같았습니다. 좌우에서 배를 끌고 얼음을 따라가는데, 얼음 위에 홍살문을 설치하고 거기에 홍심(紅心)을 달아놓았습니다. 팔기(八旗)의 병정들로 하여금 각각 방위에 해당하는 색깔의 옷을 입고, 신발 밑바닥에는 목편(木片)과 철인(鐵刃)을 부착하고, 화살을 잡고 얼음에 꿇어 앉아서 홍심(紅心)을 쏘게 하였는데, 우리나라에서 말을 타고 달리면서 꼴로 만든 표적을 쏘는 것과 같았습니다.
자화상 自畵像
강세황은 자신에 대하여 다음과 같이 평하였다. 체격이 단소(短小)하고 인물도 없어서 잠깐 만나본 이들은그 속에 탁월한 학식과 기특한 견해가 있음을 알지못하였다. 심지어 만만히 보고 업신여기는 자도 있었지만 그 때마다 싱긋이 웃어 넘길 따름이었다.
표암 강세황은 조선시대를 통틀어 자화상을 가장 많이 남긴 인물이다. 자화상 4폭, 초상화 6폭 등 10폭이 전하고 있는데, 표암은 자신을 그리면서 ' 나는 누구인가 ? '애 대한 답을 모색하였다. 그는 자화상에 대하여 , ' 정신만을 잡아 그렸기 때문에 속된 화공(畵工)이 그저 모습으로 묘사하는 것과 현저히 달랐다 '고 은근히 자랑하였다. 또한 '죽은 뒤 행장을 타인에게 구하느니 차라리 내 스스로 평소 경력을 쓰고 그리겠노라 '고 부언하였다. 그렇다면 강세황은 본인의 생김새를 어떻게 생각하였을까. ' 키가 작고 외모가 보잘 것 없어서 세상 사람들은 탁월한 지식과 깊은 견해를 모르고 업신여기기도 한다. 그럴 때마다 그저 한번 웃고만다 '라고 하였다. 그가 강한 자아의식(自我意識)과 자기표현에 대한 관심을 알려주는 문장이다.
차림새가 우습다. 붉은 띠를 드리운 옥색 도포(道袍)는 선비가 편히 다닐 때 입는 옷이다. 그러나 머리에 얹은 모자는 높다랗다. 오사모(烏紗帽)인데, 벼슬하는 이가 입궐(入闕)할 때 쓰는 관모(官帽)이다. 관모(官帽)를 쓰면 관복(官服)을 입어야 마땅하다.
이 그림은 강세황의 자화상이다. 강세황은 다른 화가들이 그리는 초상이 맘에 안 들었다. 겉은 빼닮아도 속은 딴판이라는 이유이었다. 그래서 자기를 직접 그리기로 했다. 일흔 나이에 들던 해, 작심한 듯이 이 작품을 완성하였다. 그는 평소 자기 외모가 볼품없다고 토로하였다. 호남도 아니고 더더욱 미남도 아니다. 하관이 너무 길고, 인중이 또한 길고, 눈두덩이는 두두룩하다.
칼칼한 지성미가 풍기지만 저 엉뚱한 차림새에 담긴 심중(心中)까지 알아차리기는 어렵다. 그는 해명하는 글을 그림 속에 써넣었다. ' 머리에 오사모를 쓰고, 옷은 야복(野服)을 입었네. 이로써 안다네. 마음은 산림(山林)에 있는데 이름이 조정에 올랐음을... ' 오사모(烏紗帽)가 늘 무겁다ㅗ 생각한 강세황이었다. 벼슬이 높아도 욕심은 낮췄다. 그런 강세황은 여든 살까지 살았다.
저이는 누구이냐 ?
얼굴과 이마, 미간에 깊게 패인 주름 그리고 조금은 비루하고 옹색해 보이는 얼굴의 노인이 머리에 조사모(조사모..관모)를 쓰고 몸은 일반 옥색 도포를 걸치고 가슴에 진홍색 세조대를 하고 정좌하고 있다. 얼굴과 몸이 왼쪽으로 조금 틀어져 있어 편안하고 자연스러워 보인다. 머리에는 관모(冠帽)를 쓰고 평복 도포(道袍)를 입었으며, 두 손과 다리를 도포 안으로 숨기고 있는 저 괴상한 노인은 누구일까 ? 화면 상단 좌우에 적혀 있는 찬문을 살펴 보자.
수염과 눈썹이 모두 매우 흰 저 이는 누구인가 / 조모를 머리에 이고 야복을 걸쳤네 / 이에 마음은 산림에 있으나 이름은 조적(朝籍 ..관직명부)에 있음을 알겠구나 / 가슴에 이유(二酉.. 수많은 책들)를 감추고 붓으로 오악(五嶽)을 흔들었네 / 사람들이 어찌 알리오 나 홀로 즐거움을 위함이다 / 늙은이 나이는 칠십이고 늙은이 호(號)는 노죽(露竹)이다 / 그 진(眞 ..초상화)은 스스로 그렸고, 그 찬(贊)도 스스로 지었다 / 세재(歲在)는 임인년(壬寅年. 1782)이다.
관찰자 시점으로 서술된 자찬에서 강세황이 평생 간직하였던 반관반야(半官半野)의 이중적(二重的) 자의식(自意識)이 엿보이고 있다. 외롭고 아팠던 야인(野人)으로서의 평생과 만년(晩年)에 가까스로 성취한 관인(官人)으로서의 영광 그리고 거부할 수 없는 운명에 대한 탄식과 그늘에 가리웠지만 언제나 당당했던 탁월한 문인(文人)의 자부심, 오사모(烏紗帽)와 도포(道袍)라는 ' 부조화(不調和)'는 강세황이 일흔의 나이에 비로소 표출하고 싶었던 내면(內面)의 고뇌와 인생에 대한 솔직한 자서잔인 셈이다.
그는 왜 자화상을 남겼을까? 이는 그림에 적혀 있는 자찬(自贊)과 강세황이 그의 나이 54세 때 쓴 자서잔(自敍傳)인 ' 표암자지(豹菴自誌)'에 있는 기록으로 유추할 수 있다. 내가 일찍 직접 초상화를 그렸는데, 다만 그 정신만을 잡아서 그린 것이라, 속된 화공들이 그저 모습으로 묘사하는 것과는 현저하게 달랐다. 이렇듯 강세황은 자신이 그린 자화상을 그저 자신의 외양만을 충실히 묘사하는데 그친 것이 아니라 외형보다 정신, 내면의 표현을 강조하였던 문인화(文人畵)의 정수를 가미하여, 자화상에 자신의 심정, 마음까지 새겨 넣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이명기(李命基)가 그린 강세황의 초상화이다. 호피의자에 앉아 칠분좌안(七分左顔)한 상(像)으로 녹색 도포 단령(團領)에 쌍학흉배(雙鶴胸背)에 사모(紗帽)를 쓰고 있다. 오른손을 부릎 위에 살며시 두고 양 무릎 간의 의문(衣文)의 표현이 개방적이며, 안정된 형식이 표출되어있다. 옷의 굴절이 구체화되었고, 묘사는 매우 밝으며, 형식이나 옷은 중후하고 심오한 작풍을 지니고 있다. 화면의 오른편 위 여백에 ' 표암 강공칠십이세지 (豹菴姜公七十二歲眞) '이라 제(題)한 글이 있고, 그 아래 어제제문(御製祭文)이 씌어 있다.
계추기사 癸秋記事
계추기사(癸秋記事)는 이 초상화의 제작과정을 소상하게 밝히고 있으며, 강세황의 셋째 아들 '관'이 지었다. 이 문적에 의하면 '강세황'이 1756년 음력 4월부터 마음에 차는 초상화를 얻기 위하여 스스로 그려 보기로 하고 화원(畵員)을 시켜 그리기도 했으나 미흡한 채로 있다가 기사(耆社)에 참여한 1783년 5월 정조(正祖)의 전교(典敎)로 이명기(李命基)에게 그려 받게 된 경위, 이명기(李命基)가 초상화로 ' 독보일세 (獨步一世) '하여 문무경상(文武卿相)들이 모두 그에게 초상화를 구했다는 사실, 이명기(李命基)가 병자(丙子 ..1756년)에 태어나 당시 28세이었다는 사실 등이 기록되어 있다. 이밖에 초상화 제작에 필요한 비단을 병장(屛匠)인 김복기(金福起)에게서 열냥에 사들였고 초상화의 제작은 1783년 7월18일에 시작하였다.
이 때 강세황은 서울의 회현동에 있었으며, 19일에 묵초소본(墨草小本)이 이루어지고 20일에는 묵초대본(墨草大本)이 완성되었으며, 21일에는 목초대본위에 초를 대고 23일에는 착색을 시작하여 27일 끝냈음이 밝혀져 있다. 이렇게 하여 이명기가 대본, 소본, 부본까지 모두 마친 것은 열흘 뒤인 28일이며, 이때 이명기(李命基)가 받은 수고비가 열냥이었다.
이처럼 초상화와 그것을 넣을 상자의 제작에 이르는 19일간의 모든 과정을 날짜별로 진행 상황을 밝히고 화가, 표구사, 목공, 협찬자들의 이름과 노임 및 소요 경비, 필요한 재료의 확보상황까지 구체적으로 기록한 개인 기록은 지극히 희귀(稀貴)한 사례로서 매우 귀중한 자료이다.
향원익청 香遠益淸
水陸草木之花 可愛者甚蕃 晉陶淵明 獨愛菊 自李唐來 世人甚愛牡丹 予獨愛蓮之出於泥而不染 濁淸蓮而不妖 中通外直 不蔓不枝 香遠益淸 亭亭淸植 可遠觀而不可褻玩焉 予謂菊 花之隱逸者也 噫 菊之愛 陶後鮮有聞 蓮之愛 同予者何人 牡丹之愛 宜乎衆矣
물과 육지에 나는 꽃 가운데 사랑할 만한 것이 매우 많다. 진나라의 도연명은 유독 국화를 사랑했고 이(李)씨의 당나라 이래로 세상 사람들이 매우 모란을 좋아했다. 내가 유독 연꽃을 사랑함은 진흙에서 나왔으나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맑고 출렁이는 물에 씼겼으나 요염하지 않고, 속은 비었고 밖은 곧으며 덩굴은 뻗지 않고 가지를 치지 아니하며, 향기는 멀리까지 더욱 맑고 꼿꼿하고 깨끗하게 서 있어 멀리서 바라볼 수는 있으나 함부로 가지고 놀 수 없음이다. 내가 말하건데 국화는 꽃 중에 속세를 피해 사는 것이요, 모란은 꽃 중에서 부귀한 것이고, 연꽃은 꽃 중에서 군자답다고 할 수 있다. 아 ! 국화를 사랑하는 이는 도연명 이후 들어본 일이 드물고, 연꽃을 사랑하는 이는 나와 함께 할 자가 몇 사람인가 ? 모란을 사랑하는 이는 마땅히 많을 것이다.
향원익청(香遠益淸) ... 향기는 멀수록 더욱 맑다. 송나라의 문인 주돈이(주돈이)의 애련설(愛蓮說)에 나오는 말이다. 연(蓮)은 불교를 상징하는 꽃으로 널리 알려졌지만, 유학자(儒學者)들도 군자(君子)의 꽃이라 하여 좋아했다. 진흙 속에서도 눈부시게 꽃을 피우는 모습에서 세속(世俗)에 물들지 않는 고고함을 느꼈기 때문이다. 그래서 주돈이(주돈이)는 연(蓮)을 사랑하는 글을 지어 그 덕성을 칭송하였다.
나는 연꽃을 좋아한다. 연꽃은 비록 진흑 속에서 자라지만 그 더러움에 물들지 않고, 맑고 잔잔한 물에 씻겨도 요염하지 않다. 속은비고 겉은 강직하며, 넝쿨도없고 가지도 없지만 향기는 멀수록 더욱 맑다. 높이 우뚝 솟아 깨끗하게 서 있으니 멀리서 바라볼 수 있지만, 함부로 가지고 놀아서는 안된다. 생각컨데 국화(菊花)는 꽃 가운데 은일자요, 연꽃은 군자(君子)다.
성리학의 창시자로 추앙받는 주돈이(주돈이)가 지은 최고의 명문이니, 조선의 문인이라면 누구나 암송하며 공감한 글이다. 강세황이 이 명문(名文)의 감흥을 그대로 살려 그림으로 옮겼다. 두 포기의 연꽃은 다소곳하다. 연못에 연이 가득하겠지만, 연의 청정한 자태를 담아내기 위해서 두 포기만 단출하게 그렸다.
화면 앞자리에 자리한 낮은 연과 만개(滿開)한 꽃, 뒤쪽에 자리한 늘씬한 연과 꽃봉우리의 대비(對比)와 조화가 자연스럽고 매끄럽다. 풍부한 여백과 간결하고 조화로운 구성으로 문인화(文人畵)의 담백한 맛을 살렸지만, 묘사는 무척 사실적이다. 살짝 구부러지며 올라간 연대와 꽃대의 까칠한 돌기까지 세밀하게 그렸다.
큼지막한 연잎은 잎맥 하나하나를 놓치지 않았고, 해를 받는 윗면과 수면을 향한 아랫면의 색감도 정교하게 옮겨 놓았다. 끝자락에만 붉은 빛이 감도는 꽃잎은 순수함과 화사함을 동시에 전해주고 있다. 수면에 떠 있는 어린 연잎과 수초(水草)는 현장감을 고조시킨다. 여기에 연 밭의 터줏대감인 개구리가 빠질 수 없다. 어린 연 잎 하나를 차지하고 날름 앉아 있다. 위쪽 연잎 위에 숨기 듯 그려 놓은 풀벌레도 앙증맞지만 운치를 돋우는데 한몫을 하고 있다. 간결하고 담백한 필치의 문인화를 주로 그렸던 강세황의 그림 가운데 이례적으로 묘사력이 돋보이는 그림이다.
송도기행첩 松都紀行帖
강세황은 안산(安山) 거주 시절, 산수(山水)유람을 즐겼고 여행에서 체득한 점을 글과 그림으로 남겼다.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는 '송도기행첩 (松都紀行帖) '은 강세황이 송도(松都), 즉 지금의 개성(開城)을 직접 여행하고 그린 화첩(畵帖)인데, 그림 16 장면과 글씨 2폭으로 구성되어 있다.
강세황은 1757년 당시 개성 유수(留守)이었던 오수채(吳遂采. 1692~1759)의 초청으로 개성을 유람하였고, '송도기행첩'을 제작하였다. 강세황의 부친 '강현'과 오수채(吳遂采)의 부친 ' 오도일(吳道一) '도 친한 동료이었으므로 선대(先代)부터의 우정이 개성 여행을 성사시킨 것이다. '송도기행첩'의 장면들은 군량미 창고인 태안창(泰安倉)에서 바라본 풍경 그림이 3점이나 있으며, 군사적으로 중요한 대흥산성, 군기고 대흥사, 행궁(行宮)인 대승당 그림이 포함되어 있다. 이 장소들이 다른 송도 기행문학에서는 다루어지지 않은 공적(公的) 기능의 공간이라는 점에서 '송도기행첩'과 다른 기행사경첩과는 큰 차이를 보이고 있는것이다.
강세황의 여름여행의 추억을 담은 '송도기행첩'은 회화사적으로는 개성 주변 명승지 그림을 한데 모은 유일한 화첩이라는 점과 음영법(陰影法), 투시도법의 서양화법이나 중국의 새로운 화풍을 도입하였다는 면에서 높이 평가 받고있다. 그리고 문화사적으로는 조선시대 집안 간의 오랜 교유 관계와 문인들 사이에 크게 유행한 명승지를 유람하고 시와 그림을 남기는 풍조를 보여주며 또한 지리서(地利書)를 편찬한 관료의 공적을 기념하려는 측면도 반영하고 있는 다층적(多層的) 의미의 화첩이다.
영통동구도 靈通洞口圖
靈通洞求 亂石壯偉 大如屋子 蒼蘇覆之 乍見駭眠
俗傳龍起 於湫底未 必信然然 環偉之觀 亦衿稀有
영통동 입구에 장엄한 돌들이 현란하게 솟아 있고 / 크기가 집채만한 것이 푸른 이끼가 덮혀 있네 / 놀란 눈으로 얼핏 보아도 전설에 용이 난 곳이라 / 마음이 으스스해진다더니 과연 그럴만 하구나 / 주위를 둘러보아도 역시 소문대로 희유한 곳이라고나
이 그림은 종이 바탕에 그린 수묵담채(水墨淡彩)이다. 크기는 가로 53,4 cm, 세로 32.8 cm의 크기로 국립중앙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이 그림은 간세황이 송도(松都 ..지금의 개성) 지방의 명승고적을 여행하면서 사경(寫景)한 송도기행첩(松都紀行帖) 중의 한 점이다.
영통동(靈通洞)은 개성 부근의 오관산(五冠山)에 소재한 명승이다. 선비 화가의 독자적인 풍경 포착과 참신한 격조를 함께 지닌 소략한 표현의 이 그림은 영통동 입구에 거암(巨岩)들이 들어선 계곡을 그린 것이다. 좌측 아래의 샛길에는 나귀 타고 탐승(探勝)하는 자신과 뒤따르는 시동(侍童)이 표현되어 있다. 대담하게 처리한 바위와 산의 경물(景物) 표현, 화흥(畵興)을 잘 살려낸 단순한 화면 구성, 청색, 녹색, 갈색, 황색의 맑은 담채(淡彩)와 수묵(水墨)의 필법(筆法) 등은 설익은 듯 하면서도 명랑하고 신선한 감각을 풍기고 있다. 더욱이 당시의 회화 경향에서는 느낄 수 없는 이채로운 묘법(描法)을 보여주고 있다.
특히 바위의 선염법(渲染法 ... 동양화에서 화면에 물을 칠하여 마르기 전에 붓을 대어 몽롱하고 침중한 묘미를 나타내는 기법)은 원근(遠近) 개념을 부여한 미점(米點)의 산악 표현과 대조적으로 담채와 담먹을 묽게 혼용하여 입체감을 나타내었다. 이것은 전통적인 기법을 탈피한 혁신적인 화풍이다. 또한 '송도기행첩'의 다른 작품에서와 마찬가지로 원근법의 확실한 응용과 더불어서 서구적인 조형 해석도 찾아 볼 수있다.
태종대 太宗臺
그림 오른쪽 위에 '태종대(太宗臺)'라고 적혀 있다. 태종대는 개성 북쪽 성거산(聖居山)에 있는 넓고 평평한 바위로 조선 태종(太宗)이 이곳에 놀러온 후 그 이름을 따서 태종대가 되었다고 한다. 화면 중앙 아래쪽에는 넓적한 바위 위에 갓을 쓰고 있는 선비가 종이를 펼쳐놓고 그림을 그릴 준비를 하고 있다. 맞은편 바위에는 웃옷을 벗고 있는 사람, 바지만 걷어 올린 채 계곡에 발을 담그고 있는 사람, 이들을 서서 지켜보고 있는 시종(侍從)들이 보인다.
지금은 가볼 수 없고 사진자료도 전해지지 않기에 태종대의 실제 모습을 확인할 수 없지만, 조선 후기에는 송도 여행의 단골 명승지이었기에 태종대에 관한 기록은 많이 남아 있다. 조선 후기 문인 김창협(金昌協)은 '송경유기'에서 ' 태종대에 이르니 시냇물이 빙 둘러 흐르고 대의 옆에는 입석(立石)이 있으며 그 꼭대기에는 노송(老送)이 구불구불 기이하게 걸려 있다 '라고 하였는데, 이는 그림 속 풍경과 잘 들어 맞는다.
전경(前景)의 태종대와 입석, 중경(中景)의 삐죽삐죽 솟은 암석들이 둘러처진 넓은 바위에서 물놀이하는 사람들, 후경(後京)의 맑은 녹색으로 엷게 칠해진 산의 모습까지 태종대에서 바라본 풍경을 앞으로 끌어당겨서 화면을 가득 채우고 있다. 이는 실경(實景)을 다룰 때 보이는 독특한 특징이다.
화면 중앙 하단부에 절단된 바위를 배치함으로써 그림을 보고 있는 사람이 강세황으로 추측되는 인물과 함께 태종대에 있는 것처럼 느끼게 하는 효과를 내고 있다. 현장감을 높이는 데 효과적인 구도이다. 구도뿐만 아니라 세부 표현에서도 사실감을 높였는데, 발을 담그고 있는 선비가 앉아 있는 바위 아래 부분을 불투명한 흰색으로 가볍게 칠해서 맑은 물에 잠겨 있는 바위를 표현한 모습도 조선시대 다른 그림에서는 찾아보기 힘든 모습이다. 또한 바위에 음영(陰影)을 가해서 입체감을 살리려고 한 모습도 강세황이 수용한 서양화풍의 영향이다.
박연폭포 박연폭포
태종대가 있는 성거산(聖居山)과 천마산 사이에는 '송도삼절(松都三絶)'의 하나인 박연폭포(朴淵瀑布)가 있다. 높이 37m로 우리나라 3대 폭포로 불리운다. 폭포 위에 박연(朴淵)이라는 못이 있고, 폭포 밑에는 둘레 120m, 지름 40m 정도의 고모담(姑母潭)이 있다. 고모담에는 여러 사람이 설 수 있는 큰바위가 있으며, 서쪽 기슭에는 범사정(泛斯亭)이 있다.
화면 상단 오른쪽에는 대흥산성의 북문인 성거관(聖居關) 문루(門樓)가 보인다. 강세황의 '박연폭포' 그림은 현재의 박연폭포 풍경과 큰 차이를 보이지 않는다. 박연폭포 주변이나 경물 하나하나를 빠트리지 않고 성실하게 화폭에 옮겼다. 실제 경관에 어울리는 가로가 긴 화면에 거대한 암석(岩石)이 층층이 쌓인 암벽을 구축하고, 그 사이를 포말을 일으키며 시원스럽게 쏟아져 내려오는 물줄기를 그렸다. 암벽과 산, 나무는 갈색과 녹색 계열의 맑은 담채(淡彩)를 이용하여 여름철에 보이는 물기를 머금은 바위와 푸른 산의 모습으로 묘사하였다.
당대의 진경산수화가(眞景山水畵家) '겸재 정선'도 박연폭포를 그렸는데, 겸재는 강세황과는 달리 세로로 긴 구도로 폭포의 높이를 과장하고 경물(景物)을 선택적으로 배치하였다. 선택과 집중(選澤과 集中)으로 위압적인 강한 인상을 주는 겸재의 그림과는 달리 강세황의 박연폭포는 현실감 있게 전달하려는 의도로 필선(筆線)과 담백한 색채로 맑고 깔끔하면서 단정한 인상을 주어 보는이의 눈을 편안하면서도 시원하게 해 주고 있다.
송도전도 松都全圖