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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순원-삶의조화로운만남,또는그모범(김종회)1[1].hw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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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순원 문학촌 답사 보고서
과 목 명 : 한국문학의 이해
담당교수 : 최정숙 교수님
학 과: 한국언어문화학과
학 번 : 201036647
성 명 : 송 경 화
목 차
Ⅰ 서론 ------------------------------------------2
Ⅱ 본론
1. 황순원의 생애---------------------------------3
1) ‘학’처럼 고고했던 한평생-----------------------3
2) '별'이 된 황순원 -----------------------------4
2. 황순원의 작품세계 ------------------------------5
1) 소설 작품의 변모 ----------------------------7
2) 황순원 문학의 특성 ---------------------------7
3. 황순원의 작품 ----------------------------------8
Ⅲ 결론 -------------------------------------------9
1. 황순원 문학관 ---------------------------------10
2. 답사 후기 및 사진 ------------------------------11
<참고 자료>----------------------------------------11
Ⅰ 서론
‘한국문학의 이해‘ 강의를 들으면서 작가들은 어떤 곳에서 작품을 썼는지 어떤 정서를 가지고 있는지 궁금해지기 시작했다. 찾아가서 그곳의 풍경을 보고 향취를 맡고 싶은 생각도 들었지만 막상 발을 떼서 찾아갈 용기가 나지 않았다. 작년 하반기에 중국에서 한국으로 들어와 있는 상황인데 아직 한국적응이 다 안 된 부분도 있고 누군가와 함께 갈 수 있는 여건이 되지 않는 상황이기에 찾아가고 싶지 않은 부분도 있었다.
그런데 강의 하시는 교수님의 말씀을 들으면 들을수록 ‘혼자 가는 가을여행이라 생각하고 다녀와 볼까? 가는 길을 알아볼까? 어떻게 할까?’ 교수님의 강의는 내 마음을 흔들어 놓으셨다. 갈팡질팡 하는 마음을 한순간 잡게 해 준 것은 다름 아닌 답사 보고서 과제였다. 인터넷을 통해 가는 길과 소나기 마을, 작가에 대해 찾아보고 길을 나서게 되었다.
Ⅱ 본론
1. 황순원의 생애
황순원(黃順元 1915.3.26∼2000.9.14)
시인ㆍ소설가. 평남 대동군(大同郡) 빙장리에서 찬영(贊永)의 장남로 출생. 정주 오산중학 입학, 평양 숭실중학에 전학. 1931년 [동광(東光)]지에 시 <나의 꿈> 발표, 1934년경부터는 소설을 발표하기 시작하였다.
1934년 일본 와세다 제2고등학원에 입학하여 극예술단체인 [학생예술좌] 창립. [삼사문학(三四文學)] [단층(斷層)]의 동인으로 주로 모더니즘 계열의 시를 발표하면서 첫 시집 <방가(放歌)>를 간행했다. 1936년 와세다대학 영문과 입학, 1939년 동 대학을 졸업했다. 1940년 단편집 <늪>의 간행을 계기로 소설에 치중, 1954년 <카인의 후예>를 출간하면서 장편에 전념했다.
1946년 월남, 서울중고등학교 교사, 경희대 교수, 예술원 회원 역임. 대표적 단편소설 작가. 예술원상(1960), 아시아자유문학상(1954), 3ㆍ1문화상(1966), 인촌문학상(1987), 대한민국문학상본상, 금관문화훈장 추서(2000).
1) 학(鶴)처럼 고고했던 한평생.
“연초에 제자들이 세배를 가려했는데 유독 오지 말라시며 대신 밖에서 저녁을 사셨지. 지금 생각하니 무슨 예감이 드신 모양이에요” 소설가 황순원(黃順元)의 빈소가 차려진 서울대병원에는 15일 작가 조해일(趙海一) 이문구(李文求) 김원일(金源一)등 제자와 문단후배들이 모여 평생을 고고하게 살다간 고인을 기리며 추억에 젖었다. 추석 연휴 마지막 날인 2000년 9월 13일 밤, 노작가는 “미열기가 있다”면서 해열제 한 알을 복용하고 자리에 누웠다. 14일 아침, 부인이 아침상을 들고 방문을 열었을 때 노작가는 평온하게 누워 있었다. 작품에서나 생활에서나 절제로 일관했던 그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오산 중 재학시절 남강 이승훈(南岡 李昇薰)의 단아한 풍채와 인품에 매료돼 ‘남자가 늙어서도 저렇게 아름다울 수 있구나’라고 탄복했던 그였다.
단편 <소나기>로 대표되는 정련된 문체처럼 황순원은 결벽에 가까운 생활태도를 실천했다. 시와 소설 외의 글은 한번도 쓰지 않았으며 제자들의 작품에 서문이나 발문을 쓰는 것조차 거부했다. 작품 이외의 일로 언론에 알려지는 일도 피해 왔다. 95년 ‘사진을 찍지 않는다’ 등의 조건을 걸고 모처럼 ‘작가세계’와 인터뷰할 정도였다. 경희대 재직 시절 대학측에서 문학박사 학위를 제의했으나 “소설가로 충분하다”며 거절했다. 술을 좋아했으나 한번도 술로 흐트러지는 모습을 보이지 않은 그는 73년 타계한 번역문학가 원응서에게 '마지막 잔'을 바친 것으로도 유명하다. 절친하던 원씨가 세상을 뜨자 그는 어느 술자리에서건 마지막 잔은 "응서, 자네 것이네"라고 산사람 대하듯 하며 빈 그릇에 쏟아 붓곤 했다.
그의 결벽적인 태도는 작품에 대해 유별났다. 토씨 하나도 바꾸어 쓸 수 없을 정도로 치밀했던 그의 문체는 플로베르의 ‘일사일어론(一事一語論)’에 비유되곤 했다. 이미 발표된 시집에 수록된 시의 절반을 ‘폐기’한 뒤 “없앤 작품은 절대 훗날에도 거론하지 말라”고 당부했으며 노령에도 초교에서 재교까지 직접 체크했다.
고 김동리(金東里)는 “소나기 속에서도 비를 맞지 않고 가는 사람”이라고 농을 했으나 본인은 이런 평가를 달가워하지 않았던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수많은 제자를 키워냈으나 결코 인정에 끌리지 않았다. 일간지 신춘문예 소설부문 심사를 맡아오면서도 제자의 작품이 최종심에 오르면 다른 심사위원에게 최종 결정을 맡겼다. 문하에서는 소설가 전상국ㆍ조세희ㆍ조해일ㆍ김용성ㆍ한수산ㆍ고원정ㆍ박덕규ㆍ김형경, 시인 박리도ㆍ이성부ㆍ정호승, 방송작가 신봉승ㆍ김정수, 수필가 서정범 등이 배출됐다. ‘제자 군단’은 80년대부터 스승을 모시고 ‘보신탕 모임’을 정기적으로 가져왔다. 이호철ㆍ서기원ㆍ최인호ㆍ김지원ㆍ김채원씨 등은 그의 추천을 거쳐 데뷔했다. 작가 전상국(全商國)은 “지난 연말 제자들이 세배를 가려 했는데 스승이 오지 말라시며 대신 불러 저녁을 사셨다”고 말했다.
그의 그늘 아래서 자라난 우뚝한 문인 중에 장남 동규씨(시인ㆍ서울대 교수)도 빼놓을 수 없다. 58년 [현대문학]지를 통해 데뷔한 그는 왕성한 시작활동을 하고 있다. 동규씨는 “조용히 가셨으니 다행”이라는 주변의 위로에도 ”그만 임종을 못했다”며 애통해 했다.
문학평론가 김병익(金炳翼)은 “황순원은 1930년대 작품활동을 시작한 이래 단아하고 정갈한 문체로 인간의 심오한 내면을 드러냈으며, 이를 통해 소설 작법의 가장 중요한 본보기를 보여주었다”고 추모했다.
2) '별'이 된 황순원
황순원은 20세기 우리 문단에서 순수와 서정문학을 대표하는 작가다. 어린 시절 교과서에 실린 그의 소설 <소나기>를 읽고 느낀 감동은 아직도 많은 사람들의 가슴속에 남아 있다. <소나기>는 그가 이뤄놓은 문학적 성과 중 극히 일부에 불과하다. 그는 대다수 국민의 기억 속에 선명하게 남아 있는 몇 명 안 되는 문인이다. 그는 ‘국민작가’로 부르기에 손색이 없다.
그가 세상을 떠났다는 슬픈 소식을 접하면서 우리는 그가 남긴 문학세계 이외에 그가 지나온 80여년이라는 짧지 않은 생애를 새삼 떠올리게 된다. 그것은 그가 우리와 동시대를 살았음에도 불구하고 삶의 방식이나 인생철학이 요즘 사람들과 너무도 대비되기 때문이다. 그는 문학에서 고집스럽게 문학의 본질을 추구하는 순수문학에 매달렸으며 실제 삶에서도 똑같은 ‘순수’의 길을 걸었다.
그는 오직 ‘작가’로만 살기 위해 세속적인 명예와 감투를 마다했다. 예술원 회원과 교수라는 직함 말고는 관직도, 박사라는 칭호도, 훈장도 모두 사양했다. ‘작가는 작품으로 말한다’는 신념 때문에 시와 소설 이외에 다른 글은 일절 쓰지 않았다. 신문사가 주최하는 신춘문예 심사위원으로 오랜 기간 활동했지만 자신의 제자라고 해서 절대 봐주는 일이 없었으며 오히려 제자라는 이유로 당선 대상에서 제외시키는 일까지 있었다고 한다.
요즘 세상은 어떤가. 물욕 명예욕 등 온갖 욕심과 위선, 거짓으로 가득 차 있다고 해도 지나친 말이 아니다. 정치권을 비롯한 모든 집단이 거의 예외 없이 저마다의 이익과 욕심을 챙기고 좇느라 어지럽고 혼탁하다. 좀처럼 출구가 보이지 않는 이 어둡고 캄캄한 ‘혼돈의 시대’에 한 시대의 탁월한 문인으로서 원칙과 소신에서 벗어난 적이 없는 그의 삶은 더욱 빛을 발할 수밖에 없다.
우리는 그의 삶을 되돌아보면서 한없는 부끄러움을 느낀다. 우리에게 문학은 존재하지만 문학의 역사는 존재하지 않는다는 말이 있다. 우리 주변에는 훌륭한 문인의 업적과 삶을 기리는 자료관이나 기념관을 거의 찾아볼 수 없기 때문이다. 황순원씨의 경우 그의 육필 원고라든지 집필실 등을 그대로 보존해 후대에 남기는 작업이 추진되었으면 한다. 그것은 그 동안 잊고 살아온 ‘순수의 시대’를 자신의 문학과 인생을 통해 우리에게 일깨워 준 위대한 문인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다. - [동아일보](2000. 9. 15) -
2. 황순원의 작품세계
▷제1기 : 일종의 서정시와 같은 성격을 지님
▷제2기 : 인정 미화(人情美化)나 서정 미학이 주조를 이룬 수준높은 단편소설
▷제3기 : 장편 작가로 전환, 주정적 세계에서 시야를 정치적ㆍ사회적인 세계로 전환.
일제시대에 시집 <방가(放歌)>(1934) <골동품>(1936) 등으로 시단에 등단, 반세기에 걸쳐 의연하고 준엄한 자세와 인품으로 창작 활동과 문학의 독자적인 본령을 엄정하게 지켜 왔다.
인간과 세계에 대한 근원적인 인식의 심화와 확대에 기조하면서 한국인의 삶과 존재 양식을 탁월하게 천착(穿鑿)하고 형상화해 냄으로써 한국 문학의 위상을 높게 이끌어 올렸다. 그의 문학적 업적은 <소나기> <학>을 비롯한 1백여 편의 단편과 <카인의 후예> <일월> <움직이는 성(城)> 등 장편에 응축되어 있을 뿐 아니라 단편에서 장편으로 확대된 그의 서사적인 세계의 추이 그 자체가 곧 우리 문학사의 질적 확산과 긴밀한 맥락을 갖고 있는 것이다.
그는 문학 작업에 의해 원형의 상징 형식을 통한 한국인 정신의 내면적 기조를 밝혀냄은 물론 신의 절대 가치와 인간 존재의 실존적인 구극(究極)과 구원의 문제에 이르기까지 폭넓고 깊은 문제의식을 제기, 한국 소설사에 있어 크게 주목을 끄는 작가이다.
일찍이 중학시절부터 동요와 시를 발표하기 시작했으며 1934년에 그의 소박한 서정시를 모아 <방가>라는 첫 시집을 출간했다. 1939년 대학을 졸업할 무렵에는 <신속>의 동인으로 활동하며 주로 모더니즘 계열의 시를 발표하였다가 첫 단편집 <늪> 발간을 계기로 시인에서 소설가로 변모한다.
그는 한국 사실주의 문학의 전통을 충실히 계승하면서도 세부묘사 같은 것은 대담하게 생략하고 이미지 전달에 주력한다. 초기 소설인 <별><소나기> 등의 작품에는 애수와 정감, 생의 비애들이 간결한 수법으로 잘 다루어져 있다.
인간의 본능이나 직관의 세계를 다루며 인간에 대한 신뢰를 표현하며, 순수하고 아름다움의 동경이 주된 소재인 서정적 세계를 다루었다. 사건의 급박한 흐름은 거의 없고 심리묘사와 분위기 조성으로 사건을 이끌어 가는 특징을 보여 준다. 6ㆍ25를 분수령으로 후기에는 보다 사회적인 방면으로 시선을 돌려 현대 문명의 역기는, 세태 묘사, 예민한 현실 감각을 보이고 있다.
황순원(黃順元)의 친지인 원응서(元應瑞)는 황순원의 인간을 말하는 글에서 다음과 같이 쓰고 있다.
“한마디로 황형의 성격은 자꾸만 위를 향해 올라가는 대나무와도 같다고 할까, 굽힐 줄 모르고 그냥 곧추 위로 올라가기만 하는 성격이랄까, 또 번거러움을 많이 타는 성격이랄까, 물론 때가 때인 만큼 모래터 시절은 여럿과 어울려 다니는 걸 즐기지 않았다기보다도 꺼려하는 편이었다. 워낙 직설적인 성미여서 눈에 거슬리는 일이 많아서인지 몰랐다. 나는 그의 직설적인 데가 좋았다. 그의 그것은 우격적인 직설이 아니라 사리에 합당한, 언제나 바른 말에 가까웠다. 싫은 것과 좋은 것이 분명했다. 이것은 그의 작품에서 '불쾌'라는 어휘를 많이 발견할 수 있는 것도 이 때문이 아닌가 한다.
그런 한편, 그의 심중은 항상 인간의 정과 깊이를 찾고 있다. 그리고 인간의 정과 사랑의 교차를 기원하고 있다. 이 기원은, 그의 수많은 작품 속에서 우리는 찾아낼 수 있는 것이다.“ (삼중당 <황순원 문학전집> 에서)
그 어려웠던 일제 말기의 고향에서의 일을 회상하면서 쓴 이 구절은 작가 황순원의 인간과 문학을 집약적으로 잘 말해주는 것이 아닐까 한다.
문학과 그 작자의 인간과는 일단 별개의 것임을 부인할 수 없고, 또 이런 점과 관련하여, '글은 곧 사람이다' 하는 말이 이따금 시비거리의 제재로 되어온 것도 사실이기는 하지만, 그래도 역시 이 경구가 지닌 일면의 진실을 부인할 수 없을 듯하다. 황순원의 작품을 대할 때마다 그것을 느끼게 한다. 원응서가 증언한 바 황순원의 대나무같이 곧은 성품, 번거로움을 많이 타는 성품, 싫고 좋고가 분명한 성품, 그러면서도 심중에서는 항상 인간의 정과 깊이를 찾는 그의 성품은 이 작가의 문체, 등장인물들(특히 긍정적 인물들)의 생태, 그리고 그가 추구하는 문학적 주제(장편소설에 있어서의)를 통하여 일관성 있게 투영되어 있는 듯하다.
우선, 그의 문체부터가 번거로움을 많이 타는 문체임을 알 수 있다. 그의 문장의 주류를 이루고 있는 것은 쇼트 센텐스이다. 가능한 한 군더더기를 제거해 버리려는 이 작가의 유다른 결벽증의 반영이 아닐까 한다. 그것은 이 작가의 고전적이라 할 만큼 엄격한 지적 절제에 의하여 그의 문장들이 통제를 받고 있는 탓이라 할 것이다.
대상을 부각시키는 방법에 있어서도 이런 점은 마찬가지로 드러난다. 대상을 부각시킴에 있어서 그는 세부묘사 같은 것은 최소한의 필요 조건을 제외하고는 대담하게 생략해 버린다. 그에 있어서 흥미의 초점이 되는 것은 이런 개개의 형상들이 아니라, 그 대상들이 하나로 어우러져 풍겨주는 전체적인 인상을 단적으로 부각시키는 데 있다. 이 점에서 그는 화가로 비유하자면 사실파가 아니라 인상파이다. 번거로움을 싫어하는 이 작가의 유다른 결벽증의 반영이 아닐까 한다.
1) 소설 작품의 변모
▷초기작품경향 : 1941년 [인문평론]에 발표한 <별>, <그늘> 등에서 현실적 삶의 모습보다는 주로 동화적인 낙원이나 유년기의 순진한 세계를 담은 환상적이고 심리적 경향의 단편.
▷후기작품경향 : 전쟁과 이데올로기의 분열이 남긴 비극적 상황과 비인간화 경향 폭로.
2) 황순원 문학의 특성
단편으로 출발하여 인간의 본연적인 범생명주의의 추구에서 시작한 이 작가의 기본 사상은 <카인의 후예>에서 정치적 저항을, <인간 접목>에서 사회적 저항의 굴곡과 진전을 보였고, <나무들 비탈에 서다>에서 전란의 비극적 상황으로 인한 내부적ㆍ외부적 피해상을, <일월>에서 다시 인간의 근원적 생명과 심리 등을 추구하였고, <움직이는 성>에서 전래적 사상과 외래 사상, 즉 동양과 서양의 철학적 종합을 추구했다. 이러한 굴곡과 전회(轉回)는 그의 원숙한 작가 정신의 심도와 발전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의 작품에 나타나 있는 구성의 치밀성, 문장의 시적 세련, 높은 예술적 품격 등은 한 마디로 예술주의 내지 예도주의(禮道主義)라고 할 수 있다.
1. 구성의 치밀함.
2. 날카롭고 다급한 간결체 문장(간결체)
3. 한국적 서정성 추구의 고전적 경지 개척
4. 시적 서정미를 풍겨 주는 문장
5. 범생명주의(凡生命主義)와 휴머니즘의 사상
6. 토속적 것에의 강렬한 애착
7. 높은 예술적 품격
8. 예술주의, 또는 예도주의(禮度主義) 작가
9. 소설이나 시 이외의 다른 장르에는 일체 쓰지 않는 결벽성
3. 황순원의 작품
【시】<나의 꿈>(1931.동광) <1933년의 수레바퀴>(1933) <향수>(1952) <제주도말>(1952) <그날>
【단편소설】*<별>(1941) <황노인>(1942) <그늘>(1942) <눈>(1944) <술>(1947) *<목넘이 마을의 개>(1948) <몰이꾼>(1949) <맹산할머니>(1949) <노새>(1949) <기러기>(1950) *<학>(1953) <잃어 버린 사람들> <너와 나만의 시간> <탈> *<독 짓는 늙은이>(1950) *<이리도>(1950) <어둠 속에 찍힌 판화(版畵)>(1951) <곡예사>(1952) <목숨>(1952) *<소나기>(1953) <과부>(1953) <여인들>(1953) <산골아이>(1953) <왕모래>(1954) <사나이>(1954) <부끄러움>(1955) <필묵장수>(1955) <잃어버린 사람들>(1956) <불가사리>(1956) <산>(1956)<비바리>(1956) <내일>(1957) <소리>(1957) <다시 내일>(1957) <링반대룽>(1957) <너와 나만의 시간>(1957) <한 벤치에서>(1957) <안개구름 끼다>(1957) <뎃상>(1957) <내 고향 사람들>(1961) <가랑비>(1963) <송아지>(1963) <그래도 우리끼리는>(1963) <비눈>(1964) <달과 발과>(1964) <닥터 장의 경우> <피>(1967) <겨울 개나리>(1967) <차라리 내 목을>(1967) <막을 내렸는데>(1968) <수리그림자> <온기 있는 파편> <어머니가 있는 6월의 대화> <아내의 눈길> <조그만 섬마을에서> <원색 오뚝이> 수컷퇴화설> <자연> <우산을 접으며> <병든 나비> <애> <머리> <세레나데>
【장편소설】<별과 같이 살다>(1947) *<카인의 후예>(1954.자유문학상 수상작) <인간 접목>(1957), *<나무들 비탈에 서다>(1960) *<일월>(1965) <움직이는 성>(1973)
【단편집】<늪>(1940.첫 단편집) <별>(1941) <황순원 단편집>(1940) <목넘이 마을의 개>(1948) <기러기>(1951) <곡예사>(1952) <학(鶴)>(1956) <잃어버린 사람들>(1958) <너와 나만의 시간>(1964) <탈>(1976)
【시집】<방가(放歌)>(1934.첫 시집) <골동품>(1936)
【전집】<황순원대표작선집>(1969.전6권.조광출판) <황순원전집>(1985.전12권.문학과지성사)
Ⅲ 결론
1.황순원 문학관
황순원 선생은 고향이 평안도이다. 그런데 양평과 무슨 연고가 있기에 문학관이 양평에 자리잡게 되었는가? 작가의 대표적 단편소설 ‘소나기’에 “어른들의 말이, 내일 소녀네가 양평읍으로 이사 간다는 것이었다.” 이 한 구절로 ‘소나기’의 배경이 양평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고 양평에 소나기 마을을 조성하면서 자연스럽게 문학관이 소나기 마을에 자리잡게 된 사연이다.
황순원 문학관은 3층 규모로 작가의 단편 소설〔소나기〕의 내용에 숫숫단 모양을 형상화했으며 작가의 생애와 문학을 한 눈에 볼 수 있는 세 곳의 전시실이 있다.
제 1전시실에는 영상과 유품 등으로 황순원 선생님을 만날 수 있는 공간으로 구성
제 2전시실에는 첨단 시설을 통해 작가의 작품 속으로 들어가 볼 수 있는 공간으로 구성
제 3전시실에는 남폿불 영상실로 소년 소녀가 공부한 옛날 초등학교 교실에서 소나기 애니메이션을 볼 수 있는 공간으로 구성되어 있다.
그리고 복도에는 사회의 중요한 변화와 작가의 작품 연보가 시대별로 연결되어 한 눈으로 볼 수 있게 되어있다. 문학관에 간 날은 문학제가 있던 날이라 2010년도 2011년도 그림그리기 대회에서 수상했던 초등학생 작품부터 고등학생 작품까지 전시되어 있었다.
마지막으로 마타하리 사랑방이라하여 작가의 작품을 종이책, 전자책, 듣는 책으로 감상할 수 있는 문학 까페테리아라는 휴식 공간도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