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문발(趙文拔)은 정융진(定戎鎭)의 향리 출신으로 어려서부터 총민하고 준수하며 책을 읽으면 문득 기억하였고, 문사(文詞)는 맑으면서도 놀랄 바가 있었다.
과거에 장원으로 합격하여 남경사록(南京司錄)으로 보임되었는데, 그 아버지의 나이가 60을 넘었으므로 조문발이 시를 지어 최이(崔怡)에게 보내 벼슬을 구하니 최이가 최충헌(崔忠獻)에게 고하여 말하기를, “아들이 장원으로 뽑혔는데 그 아비를 주리(州吏)에 있게 하는 것은 나라가 유사(儒士)를 존중하는 뜻이 아닙니다. 또 조문발은 재기가 있어 반드시 대성할 것이니, 대저 그 아비의 향역(鄕役)을 면해 주어 다른 이들의 아비들까지 격려하는 것이 어떠하겠는지요?”라고 하였다. 최충헌이 그러하다 하여 마침내 왕에게 아뢰어 관직을 제수하니, 당시 사람들이 이를 아름답게 여겼다.
조문발은 여러 차례 자리를 옮기면서 중서주서(中書注書)가 되었다. 일찍이 중서성에서 숙직할 때 어떤 하급 서리[小胥]가 매우 추워하기에, 조문발이 그를 불쌍히 여겨 이불 속에 들어오길 허락하였더니 하급 서리가 잠버릇으로 다리를 배 위에 올려놓았다. 그 날 밤 마침 반정(頒政)이 있었는데 중서성의 관리가 와서 보고하기를, “주서께서 정언(正言)이 되셨습니다.”라고 하니, 하급 서리는 천천히 발을 거두어 내렸으나, 조문발은 오히려 깊이 잠든 것처럼 하였다.
〈조문발은〉 사간(司諫)과 기거사인(起居舍人)을 거쳐 고종(高宗) 14년(1227) 예부낭중(禮部郞中)으로 기거주 사관수찬관(起居注 史館修撰官)을 겸임하여 『명종실록(明宗實錄)』을 수찬한 뒤, 병에 걸려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