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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산안씨 안응세(安應世, 1455~1480)
우선 다음의 시 한편을 감상하겠습니다. 추만(秋晩) / 가을은 짙어가고
피고 지는 황국화, 고향의 꽃인데 / 黃菊開殘故國花(황국개잔고국화) 겨울옷 오지 않고 고향집 그리워라. / 寒衣未到客思家(한의미도객사가) 해지는 변방에 시든 풀만 우거지고 / 邊城落日連衰草(변성낙일련쇠초) 갈바람에 죽도록 우는 나무 위 까마귀라. / 啼殺秋風一樹鴉(제살추풍일수아)
위 시를 지은 사람은 죽산안씨 안응세(安應世, 1455~1480)라는 사람으로 생육신의 한 사람인 남효온(南孝溫, 1454∼1492)의 가장 가까운 벗으로 26살에 요절해서 더 아까운 그런 사람입니다.
(구)죽산안씨 인물이며, 세종의 딸 정의공주(貞懿公主)와 혼인하여 연창위(延昌尉)가 된 안맹담(安孟聃,1415-1462)의 동생으로 단양군수를 지낸 안중담(安仲聃)의 아들이 안응세(安應世)라는 분이다.
안응세는 문화류씨가정보에 의하면 배우자는 미상이고 아들 하나를 둔 것으로만 기록되어 있다.
그렇다면, 안응세(安應世)는 세종의 사위 안맹담(安孟聃)의 조카가 되며, 세종의 장손되는 단종을 밀어내고 왕위에 오른 세조와는 불편한 관계가 되지 않았을까 하는 짐작을 해본다.
안응세(安應世)의『사마방목(司馬榜目)』의 기록을 보면, 자는 자정(子挺), 을해(乙亥, 1455)년에 태어났으며, 본관은 죽산(竹山)으로, 통훈대부(通訓大夫)로 단양군수(丹陽郡守)를 지낸 안중담(安仲聃)의 아들이고, 성종(成宗) 11년 경자년(庚子, 1480)에 진사(進士) 2등(二等) 5위를 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구)죽산안씨 안준(安濬)을 선대로 모시는 소부소감공파(少府小監公派) 중에서 단양공파(丹陽公派)의 파조가 되는 안중담(安仲聃)은 단양군수(丹陽郡守)를 지낸 것으로 인해 단양공파라고 하는 것 같다.
1921년 간행된 남효온(南孝溫, 1454∼1492)의『추강집(秋江集)』7권「사우명행록(師友名行錄)」에 安應世。竹山人。字子挺。號月囱。又號鷗鷺主人。又號煙波釣徒。又號黎藿野人。後於余一歲。爲人淸澹洒落。安貧喜分。不求名利。不學仙佛。不喜博奕。能詩。尤長於樂府。嘗曰。不義之財。補止於家。不義之食。補止五臟。尤不可犯也。子挺之操心。類如此。白玉之疵。喜酒色也。庚子年進士。是年九月歿。年二十六。知與不知莫不痛之。下止字恐誤
〇 안응세(安應世)는 본관이 죽산(竹山)이고, 자가 자정(子挺)이다. 호가 월창(月窓)이고, 또 다른 호가 구로주인(鷗鷺主人)ㆍ연파조도(煙波釣徒)ㆍ여곽야인(藜藿野人)이다. 나보다 한 살 아랫니다. 사람됨이 청담(淸澹)하고 쇄락(洒落)하며, 가난을 편안하게 여기고 분수를 달게 여겨서 명예와 이익을 구하지 않았다. 선도와 불법을 배우지 않았고, 장기와 바둑을 좋아하지 않았다. 시에 능하였고 악부(樂府)에 더욱 뛰어났다. 일찍이 말하기를 “의롭지 못한 재물은 집안 살림을 돕는 데에 그치지만 의롭지 못한 음식은 오장을 돕는 데에 그칠 뿐이니, 더욱 범해서는 안 된다.” 하였으니, 자정의 마음가짐이 대개 이와 같았다. 백옥(白玉)의 흠이라면 주색을 좋아한 것이다. 경자년(1480, 성종11)에 진사시에 입격하였고, 이해 9월에 죽었으니 향년 26세이다. 아는 사람이든 모르는 사람이든 간에 애통해하지 않는 이가 없었다.-아래의 ‘지’ 자는 잘못인 듯하다.-
남효온(南孝溫, 1454∼1492) 조선 단종 때의 문신으로 생육신(生六臣)의 한 사람. 본관은 의령. 자는 백공(伯恭), 호는 추강(秋江)·행우(杏雨)·최락당(最樂堂)·벽사(碧沙). 영의정 재(在)의 5대손이고, 생원 전(恮)의 아들이다. 김종직(金宗直)의 문인으로 김굉필(金宏弼) · 정여창(鄭汝昌) 등과 함께 수학했다. 1. 성품, 25세에 상소 인물됨이 영욕을 초탈하고 지향이 고상하여 세상의 사물에 얽매이지 않았으며, 김종직이 존경하여 이름을 부르지 않고 반드시 ‘우리 추강’이라 했다. 주계정(朱溪正)·심원(深源)·안응세(安應世) 등과 친교를 맺었다. 1478년(성종 9) 성종이 우토(雨土)의 재난으로 군신(群臣)들의 직언을 구하자, 25세의 나이로 장문의 상소를 올렸다. 그 내용은, 첫째 남녀의 혼인을 제때에 치르도록 할 것, 둘째 지방수령을 신중히 선택, 임명하여 민폐의 제거에 힘쓸 것, 셋째 국가의 인재등용을 신중히 하고 산림(山林)의 유일(遺逸)도 등용할 것, 넷째 궁중의 모리기관(謀利機關)인 내수사(內需司)를 혁파할 것, 다섯째 불교와 무당을 배척하여 사회를 정화할 것, 여섯째 학교교육을 진작시킬 것, 일곱째 왕이 몸소 효제(孝悌)에 돈독하고 절검(節儉)하여 풍속을 바로잡을 것, 여덟째 문종의 비 현덕왕후(顯德王后)의 능인 소릉(昭陵)을 복위할 것 등이었다. 소릉복위는 세조 즉위 사실 자체와 그로 인하여 배출된 공신의 명분을 직접 부정한 것으로 당시로서는 매우 모험적인 것이기 때문에 훈구파(勳舊派)의 심한 반발을 사서 도승지 임사홍(任士洪), 영의정 정창손(鄭昌孫) 등은 국문할 것을 주장했다. 이 일로 인하여 정부 당로자(當路者)들로부터 미움을 받게 되고, 세상사람들도 그를 미친 선비로 지목하였다. 2. 처사(處士)생활 1480년 어머니의 명령에 따라 마지못하여 생원시에 응시, 합격하였으나 그뒤 다시 과거에 나가지 않았다. 김시습(金時習)이 세상의 도의를 위해 계획을 세우도록 권하였으나, 소릉이 복위된 뒤에 과거를 보러 나갈 것임을 말하였다. 소릉복위 주장은 세조를 옹립한 정난공신(靖難功臣)들이 당시 집권하고 있었던 시기이기 때문에 용납되지 않았고, 다른 명목으로 박해하려 하였다. 그뒤 벼슬을 단념하고 세상을 흘겨보면서 가끔 바른말과 과격한 의론으로써 당시의 기휘(忌諱)에 저촉함을 조금도 꺼리지 않았다. 때로는 무악(毋岳)에 올라가 통곡하기도 하고, 남포(南浦)에서 낚시질을 하기도 하며 신영희(辛永禧)·홍유손(洪裕孫) 등과 죽림거사(竹林居士)로 맺어 술과 시로써 마음속의 울분을 달래었다. 산수를 좋아하여 국내의 명승지에 그의 발자취가 이르지 않은 곳이 없었다. 한편으로 “해와 달은 머리 위에 환하게 비치고, 귀신은 내 옆에 내려다본다.”는 경심재명(敬心齋銘)을 지어 스스로 깨우치기도 하였다. 당시의 기휘에 속하였던 박팽년(朴彭年)·성삼문(成三問)·하위지(河緯地)·이개(李塏)·유성원(柳誠源)·유응부(兪應孚) 등 6인이 단종을 위하여 사절(死節)한 사실을 《육신전 六臣傳》이라는 이름으로 저술하였다. 그의 문인들이 장차 큰 화를 당할까 두려워 말렸지만 죽는 것이 두려워 충신의 명성을 소멸시킬 수 없다 하여 《육신전》을 세상에 펴냈다. 3. 사후상황 저술 죽은 뒤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 때 김종직의 문인으로 고담궤설(高談詭說)로써 시국을 비방하였다고 그 아들을 국문할 것을 청하였다. 이듬해에는 윤필상(尹弼商) 등이 김종직을 미워한 나머지 그 문인이라는 이유로 미워하여 시문을 인출할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1504년 갑자사화 때에는 소릉복위를 상소한 것을 난신(亂臣)의 예로 규정하여 부관참시(剖棺斬屍)당하였다. 1511년(중종 6) 참찬관(參贊官) 이세인(李世仁)의 건의에 의하여 성현(成俔)·유효인(兪孝仁)·김시습 등의 문집과 함께 비로소 간행하도록 허가를 받았다. 1513년 소릉복위가 실현되자 따라서 신원되어 좌승지에 추증되었고, 1782년(정조 6) 다시 이조판서에 추증되었다. 세상에서는 원호(元昊)·이맹전(李孟專)·김시습·조려(趙旅)·성담수(成聃壽) 등과 함께 생육신으로 불렀다. 고양의 문봉서원(文峰書院), 장흥의 예양서원(汭陽書院), 함안의 서산서원(西山書院), 영월의 창절사(彰節祠), 의령의 향사(鄕祠) 등에 제향되었다. 저서로는 《추강집》·《추강냉화 秋江冷話》·《사우명행록 師友名行錄》·《귀신론 鬼神論》 등이 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권문해(權文海, 1534~1591)의 아들 권별(權鼈, 1589∼1671)의『해동잡록(海東雜錄)』1권 안응세(安應世)
竹山人。字子挺。號月窓。與南秋江最相善。爲人淸淡洒落。能詩尤長於樂府。安貧喜分。不求功名。不喜碁奕。自號烟波釣徒又鷗鷺主人。性又嚴厲。雖不白眼待俗。於人少許可。中司馬試。二十六早歿。人莫不慟之。 師友錄 安子挺死。南秋江會葬畢。於墓前用兕觥酹酒。以詩哭之曰。揮淚强高歌。酹汝一觥酒。 本集 子挺爲人淸淡洒落。白玉疵喜酒色也。嘗曰。不義之財。補止於家。不義之食。補止五臟。不可犯也。 師友錄 子挺抱不世大才。有文章操行天性朴野。不喜紛華。乃就古人古律歌詞中。拔其閑適可玩之尤者一百十四首。合爲一部。名曰湖山老伴。以爲終老江山之計。 冷話 秋江夢見子挺述夢中所見。作詩一絶記之云。邯鄲一夢暮山前。魂與魂逢是偶然。細雨半庭春寂寂。杏花無數落紅錢。 本集 子挺善吟詩喜看花。嘗曰。死亦看花吟詩。死無恨矣。及子挺死。秋江以詩哭之曰。吟詩死亦得。渠恨半消除。 秋江集記秋江云。吾友安子挺亡後十年。高生淳夢見子挺於廣漠之野。子挺問伯恭安在。高曰上寺隷業。子挺不悅。卽成一絶付高生以遺之云。文章富貴摠如雲。何須勞苦讀書勤。但當得錢沽酒飮。世間萬事不須云。高覺而記之遺余。余罔知其意。後十年然後乃覺之。 冷話
○ 본관은 죽산(竹山)으로 자는 자정(子挺)이요, 호는 월창(月窓)이며 남추강(南秋江)과 더불어 가장 사이가 좋았다. 사람됨이 맑고 깨끗하였으며, 시를 잘하고 더욱 악부(樂府)에 능하였다. 가난을 편히 여기며 분수를 즐기고 공명을 구하지 않았으며, 바둑과 장기 같은 것은 싫어했다. 자호(自號)를 연파조도(煙波釣徒)라 하고, 또 구로주인(鷗鷺主人)이라고도 했다. 성격은 엄격하여 비록 시속을 백안시(白眼視)하지는 않으나, 사람들에 대해 허여함이 적었다.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하였으나 26세로 일찍 죽으니, 사람들이 애통히 여기지 않는 이가 없었다. 《사우명행록》
○ 안자정(安子挺)이 죽으니, 남추강(南秋江)이 와서 장사를 끝내고 묘 앞에 쇠뿔로 만든 술잔에 술을 따루어 바치며, 시로써 곡하기를 눈물을 뿌리며 억지로 노래 소리 높이 하여 / 揮淚强高歌 그대에게 한 잔 술을 드린다 / 酹汝一觥酒 하였다. 본집(本集)
○ 자정의 사람됨은 맑고 깨끗하였으나, 백옥에 흠은 주색을 좋아하는 것이었다. 일찍이 그는 말하기를, “의롭지 못한 재물은 집에만 도움이 되고 의롭지 못한 음식은 오장에만 도움이 될 뿐이니, 범해서는 안 된다.” 하였다. 《사우명행록》
○ 자정은 세상에 없는 큰 재주를 지녔으며 문장과 조행이 있었고, 천성이 소박해서 야단스럽고 화려한 것을 싫어하였다. 옛사람의 고율(古律)과 가사(歌詞) 중에서 한적하여 감상할 만한 것으로 뛰어난 것 1백 14편을 뽑아서 한 부의 책을 만들어, 《호산노반(湖山老伴)》이라 이름하고 산수간에서 일생을 마칠 계책으로 삼았다. 《추강냉화(秋江冷話)》
○ 추강(秋江)은 꿈속에서 자정을 만나보고, 꿈속에서 본 것을 술회하여 절구 한 수를 지었는데, 이것을 기록하면 부귀 영화의 덧없는 한 꿈도 죽기 전의 일이던가 / 邯鄲一夢暮山前 자네 혼과 내 혼이 서로 만나게 되니 우연이로세 / 魂與魂逢是偶然 가랑비 내리는 뜰에는 봄이 적적한데 / 細雨半庭春寂寂 살구꽃은 수없이 붉은 꽃잎을 떨어뜨리네 / 杏花無數落紅錢 하였다. 본집(本集)
○ 자정은 시 읊기를 잘 하고 꽃보기를 좋아하여 일찍이 이르기를, “죽어서도 꽃을 보고 시만 읊는다면, 죽어도 한은 없겠다.” 하였다. 그래서 자정이 죽자 추강(秋江)은 시로써 곡하기를 시를 읊게 되면 죽어도 좋아 하였으니 / 吟詩死亦得 이 사람의 한은 반쯤은 녹아 없어지리 / 渠恨半消除 하였다. 《추강집기(秋江集記)》
추강이 이르기를, “나의 벗 안자정(安子挺)이 죽은 지 10년 후에 고순(高淳)이 꿈에 넓고 막막한 들에서 자정을 보았는데, 자정은, ‘백공(伯恭 추강(秋江))이 어디에 있느냐?” 묻기에, 고순이 대답하기를, ‘절에 가서 학업을 닦고 있다.’ 하니, 자정이 기꺼워하지 않는 기색을 하며, 즉시 절구 한 수를 지어서 고순에게 부쳐 보냈는데, 이르기를 문장이나 부귀는 모두 뜬구름 같은 것인데 / 文章富貴摠如雲 뭣 때문에 수고로이 독서에 힘쓰는가 / 何須勞苦讀書勤 마땅히 돈이 있으면 술이나 사서 마실 일이지 / 但當得錢沽酒飮 세상 만사가 다 요긴한 것이 아니라오 / 世間萬事不須云 하였다. 고순은 꿈을 깨서 이것을 기록하여 나에게 주었는데, 나는 그 뜻을 알 바 없었다가 그 뒤 10년 후에야 곧 이를 깨달았다.” 하였다. 《추강냉화(秋江冷話)》
『연려실기술(燃藜室記述)』별집 제12권「정교전교(政敎典故)」음악(音樂) 편의 내용 중에 ○ 우리나라 사람이 올량합(兀良哈)의 춤을 본받아 머리를 흔들며 눈을 크게 뜨고 어깨를 으쓱거리며 팔을 굽히고 두 다리와 열 손가락을 동시에 굽혔다 폈다 하여, 혹은 활을 쏘는 형상을 하고, 혹은 개가 걷는 형상도 하고, 혹은 나무를 잡고 늘어지듯이 늘어지고, 새가 공중을 날아 다리를 쭉 뻗듯이 뻗기도 하며, 앞으로 나아가고 뒤로 물러갈 때는 휙 바람이 났다.공경대부(公卿大夫)로부터 사(士)ㆍ서인(庶人)ㆍ창우(倡優)ㆍ여자에 이르기까지 음률을 알고 몸이 민첩한 자는 하지 않는 이가 없었는데, 이것을 ‘호무(胡舞)’라 칭하였고 악기로 반주까지 하였는데, 우찬성(右贊成) 어유소(魚有沼)가 가장 잘하였다. 안응세(安應世)는 말하기를, “사람에게 아첨하는 행위와 부드럽고 모양내는 태도는 사람의 할 바가 아니다. 하물며 오랑캐는 금수(禽獸)에 비유하고 있는데, 어찌 내 몸에다가 금수의 일을 가하겠는가” 하였다. 《추강냉화》
『국조보감(國朝寶鑑)』제16권 성종9년(무술, 1478)을 보면
남효온(南孝溫)은 성품이 맑고 깨끗하며 사욕이 없었다. 일찍이 김종직(金宗直)을 스승으로 섬길 적에 김종직이 감히 이름을 부르지 않고 꼭 ‘우리 추강(秋江)’ 이라고 하였는데, 추강은 남효온의 호이다. 김굉필, 정여창과 도의(道義)의 교제를 하였고, 김시습(金時習), 안응세(安應世)와 더불어 세상을 초월한 교제를 하였다. 김시습이 그의 재주를 크게 평가하여 과거에 응시하도록 권하면서 말하기를, “자네는 나와 다르니, 벼슬하지 않는 것은 의미가 없는 일이네.”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남효온이 이 소를 올려 그의 출처(出處)를 점친 것인데, 이때 나이가 18세였다. 이로부터 다시는 과거에 응시하지 않고 방랑하다가 생을 마쳤다.
1518년『속동문선』제10권에 안응세(安應世)가 쓴 제병(題屛), 추만(秋晩)과 무제(無題)라는 칠언절구(七言絶句) 시 3편이 남아있다. 제병(題屛) 기러기 돌아올 제 이해는 늦어가고 / 征雁來時歲事闌 하늘 가득 가을 그림자 강가에 내 왔노라 / 一天秋影可江干 세간에 분주타가 부질없이 늙었기로 / 世間奔走人空老 호해 위 싸리문을 내 홀로 닫았다오 / 湖海衡門我獨關
추만(秋晩) 고국에 누른 국화꽃 피어 이미 지고 / 黃菊開殘故國花 솜옷이 이르지 않아 집 생각이 간절하이 / 寒衣未到客思家 변성에 떨어지는 해에 풀빛이 변해질 제 / 邊城落日連衰草 가을 바람 숲속에는 까마귀 울어 쉬지 않네 / 啼殺秋風一樹鴉
무제(無題)
비 젖고 구름쪄서 바닷성이 어두울 제 / 雨濕雲蒸暗海城 마음 슬퍼라 지난 해에 임을 보내었소 / 傷心前歲送郞行 제비랑 기러기랑 적막하여 소식마저 끊이고는 / 燕鴻寂寞音書斷 사람 없는 깊은 원에 살구만 맺혔어라 / 深院無人杏子成
남효온(南孝溫)의 수필집『추강냉화(秋江冷話)』중에서 ○ 자정(子挺, 안응세)이 죽은 뒤 3년이 되는 임인년(1482)에, 고순(高淳)이 꿈에 자정을 쓸쓸한 들에서 만나보고 서로 시를 지어 주고받고 하기를 평소와 같이 하였다. 자정이 백공(伯恭, 남효온)은 잘 있는가를 묻기에 고순이 말하기를, “이미 절에 들어가 학문을 익히고 있다.” 하였더니, 자정이 별로 기뻐하지 않고 곧 시 한 수를 지어 생에게 기탁하여 두 사람에게 주었는데, 그 시에 이르기를,
문장과 부귀가 모두 구름 같은데 / 文章富貴摠如雲 무엇 때문에 애써 글읽기에 힘쓰랴 / 何須勞苦讀書勤 돈이 있으면 술을 사 마실 것이요 / 但當有錢沽酒飮 세상 인사는 말할 필요가 없도다 / 世間人事不須云
하였다. 생이 깨어나서 그것을 나에게 적어주었다.
남효온(南孝溫)의『추강집(秋江集)』제2권에 안응세(安應世, 1455~1480)에 대한 만사가 남아있다. 안자정(安子挺, 안응세. 26세에 요절)에 대한 만사 / 挽安子挺
이하(李賀, 당나라 시인. 27세에 요절)는 진실로 재주가 많았기에 / 李賀固多才 백로가 향기로운 난초를 꺾었구려 / 白露摧香蘭 상여 실은 흰 수레 성 동문 나서니 / 素車城東門 길 가는 사람 또한 기뻐함이 없구나 / 行路亦無歡 궁벽한 등성에다 가시덤불 베어내고 / 窮阡斬荊棘 나무껍질 관으로 대충대충 안장하네 / 藁葬木皮棺 차가운 바람은 나무숲을 스쳐 가고 / 寒風抄林莽 떨어지는 해는 세 발 정도 남았구려 / 落日垂三竿 영혼을 부르며 들판의 제물 차리니 / 招魂設野奠 초혼가 노래 소리 슬프고 쓰라리오 / 楚些聲悲酸
남효온(南孝溫)의『추강집(秋江集)』제3권에 안응세(安應世)에 대한 2편의 시가 남아있다.
자정(子挺)의 꿈을 꾸고 꿈속에 본 바를 기술하다 / 夢子挺。述夢中所見。
저문 산 앞에서 한바탕 꿈을 꾸었으니 / 邯鄲一夢暮山前 혼과 혼이 만난 것은 참으로 우연일세 / 魂與魂逢是偶然 가랑비 내리는 뜰에는 봄날이 적막한데 / 細雨半庭春寂寞 살구꽃이 무수히 붉은 돈처럼 떨어지네 / 杏花無數落紅錢
또 한 수 / 又一首
안생이 이미 죽어 지음이 끊어지고 / 安生已去知音斷 안응세(安應世)이다. 홍자가 남으로 돌아가 오도가 궁하네 / 洪子南歸吾道窮 홍유손(洪裕孫)이다. 대유가 있다지만 지향함이 괴로우니 / 縱有大猷趨向苦 김굉필(金宏弼)이다. 가슴속 품은 회포 농서공과 얘기하네 / 胸懷說與隴西公
1498년(연산군 4) 류자광(柳子光)이 위 시를 문제 삼아 김종직(金宗直)과 관련되었다며, 탄핵한 일이 조선왕조실록에도 기록되어 있습니다. 연산(燕山) 31권, 4년(1498 戊午 / 명 홍치(弘治) 11年) 8월 16일(己卯) 1번째기사
유자광이 남효온의 시를 근거로 안응세·홍유손 등이 김종직의 일파라 하여 국문하기를 청하다
○己卯/柳子光啓: “南孝溫軒名秋江, 金宗直許與氣岸以能詩稱之。 孝溫, 宗直之黨, 嘗作詩云: ‘安生已逝知音少, 洪子役鄕吾道窮。 縱有大猷趨向苦, 心懷說與隴西公。’ 所謂安生, 其類安應世, 洪子卽洪裕孫也。 朴處綸爲南陽府使時, 疾裕孫輕世高談, 復鄕吏之役。 謂之吾道窮者, 以裕孫比孔子也。 大猷, 金宏弼字也。 宏弼初與孝溫等同志, 而竟赴科擧, 故云趨向苦。 隴西公指李允宗也。 右人等結爲黨援, 高談詭說, 傷毁士習。 裕孫軒名曰軒軒軒。 必有名軒者。 且裕孫與其同志者號曰竹林七賢, 蓋慕晋室阮咸等事也。 效衰世之事, 復行於聖明之世, 請鞫之, 以懲其罪。 又有姜應貞者, 與其徒號爲十哲。 其類推應貞曰夫子, 請竝鞫之。” 傳曰: “可。 所謂軒軒軒、隴西公者, 何義也?” 子光曰: “隴西公者, 昔李陵、李白居隴西, 故後人稱李姓通謂之隴西。” 傳旨義禁府曰: “洪裕孫與某某人, 竹林七賢稱號, 放浪無忌辭緣及南孝溫詩, ‘安生已逝知音少, 洪子役鄕吾道窮。 縱有大猷趨向苦, 心懷說與隴西公。’ 作詩意趣及命軒名軒軒軒者竝鞫之。”
유자광은 아뢰기를, “남효온(南孝溫)은 헌명(軒名, 서재 이름)이 추강(秋江)하므로, 김종직이 그 기안(氣岸)을 허여하였으며 시에 능하다고 칭찬도 하였습니다. 효온은 종직의 당으로 일찍이 시(詩)를 지었는데,
안생이 죽으니 지음이 없어지고 홍자(洪子)가 시골에서 부역을 하니 우리 도가 궁하도다. 대유(大猷)는 있지만 추향(趨向)에 고달프니 이 심회를 농서공(隴西公)에게나 이야기하리
하였습니다. 이른바 ‘안생’은 그 동류 안응세(安應世)이고, ‘홍자’는 곧 홍유손입니다. 박처륜(朴處綸)이 남양 부사(南陽府使)로 있을 적에, 세상을 경히 여기고 큰 소리하는 유손을 미워하여 향리(鄕吏)의 부역(夫役)을 복원시켰는데, ‘우리 도가 궁하다.’고 한 것은 유손을 공자(孔子)에 비한 것이오며, ‘대유(大猷)’는 김굉필(金宏弼)의 자(字)로 굉필이 처음에는 효온(孝溫) 등과 동지였으나 마침내 과거에 응시하였기 때문에 추향에 고달프다 이른 것이오며, ‘농서공(隴西公)’은 이윤종(李允宗)을 가리킨 것입니다. 이상의 사람들이 결탁하여 당원(黨援)이 되어 고담(高淡)·궤설(詭設)을 일삼이 선비의 기풍을 손상하고 있습니다. 유손(裕孫)의 헌명(軒名)은 헌헌헌(軒軒軒)이온데, 반드시 헌(軒)의 이름을 지어준 자가 있을 것이오며, 또 유손이 그 동지들을 허여하여 죽림 칠현(竹林七賢) 이라 이름하였으니, 대개 진(晉)나라 완함(阮咸) 등의 일을 사모한 것입니다. 쇠세(衰世)의 일을 본받아서 다시 성명(聖明)의 세상에 행하려드니, 청컨대 국문하란 자가 있어 그 무리를 허여하여 십철(十哲)이라 부르고, 그 무리들은 응정을 추앙하여 부자(夫子)라고 부르고 있사오니, 청컨대 아울러 국문하소서.” 하니, 전교하기를, “이른바 헌헌헌과 농서공이란 것은 무슨 뜻이냐?” 하자, 자광(子光)이 아뢰기를, “농서공(隴西公)이란 것은 옛날에 이릉(李陵)과 이백(李白)이 농서에서 살았기 때문에 후세 사람이 이씨(李氏)를 통칭해서 농서라 이릅니다.” 하였다. 의금부에 전지(傳旨)하기를, “홍유손은 아무개 아무개와 더불어 죽림 칠현(竹林七賢)이라 호칭하고 방랑하여 기탄이 없는 행동을 하므로 사연(辭緣)이 남효온(南孝溫)의 시(詩)에 미쳤다.
‘안생(安生)이 죽으니 지음(知音)이 적어지고 홍자(洪子)가 고을의 부역을 하니 우리 도가 궁하도다. 대유(大猷)는 있지만 추향에 고달프니 이 심정을 농서공에게나 이야기하리.’
라고 시를 지은 본뜻과 헌명(軒名)을 헌헌헌이라 한 이유를 아울러 국문하도록 하라.” 하였다.
남효온(南孝溫)의『추강집(秋江集)』제7권에 湖山老伴一部一百十四篇。乃亡友子挺所撰也。子挺抱不世大才。生二十六年。白衣而歿。其文章操行。余於誌文詳之矣。天性山野。不喜世上紛華。乃就古人古律歌詞中拔其閒適可玩之尤者。名曰湖山老伴。以爲終老江山之計。而尙友於千載之意。 嗚呼。子挺平生性嚴厲。雖不能白眼待俗。於人少許可。獨與余交分最深。嘗憂余病風少氣力。在世不久。一日。就余談詩。夜分乃去。朝明。又來謂余曰。昨話心期甚穩。中道忽思君宿疾。私自語曰。某若先我化去。則余誰與語懷。掩泣而歸。子挺此語。琅琅若今日耳聞者。豈意病者存而強者死。以子挺之悲。移我以悲子挺哉。子挺仙化十年之冬十月。披得此編於篋中。悲不已。
〇《호산노반(湖山老伴)》1부(部) 114편은 바로 고인이 된 나의 벗 자정(子挺)이 편찬한 것이다. 자정은 세상에 드문 큰 재주를 가졌으나 태어난 지 26년 만에 백의(白衣)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문장과 행실은 내가 지문(誌文)에서 상세히 말하였다. 타고난 성품이 산야에 처하기를 즐기고 세상의 번잡하고 화려함을 좋아하지 않았다. 이에 옛사람의 고율가사(古律歌詞) 중에서 한적하여 감상하기에 매우 좋은 것을 뽑아 《호산노반》이라 이름하고 강산에서 노년을 마치려는 계획과 천고의 옛사람과 벗하려는 뜻으로 삼았다. 오호라! 자정은 평소에 성정이 준엄했기 때문에 비록 세속을 백안시하지는 않았으나 사람에 대해 허여함이 적었다. 그러나 유독 나와 더불어 교분이 몹시 깊었다. 일찍이 내가 풍(風)을 앓고 기력이 약해져 오래 살지 못할 것을 걱정하더니, 하루는 내게 와서 시를 얘기하고 밤중에 돌아갔다가 아침이 밝았을 때에 또 와서 내게 이르기를 “어제 얘기를 나눌 때에 내 마음이 매우 평온했소. 길 가는 도중에 갑자기 그대의 묵은 병이 생각나 혼자 말하기를 ‘모(某)가 만약 나보다 먼저 세상을 떠난다면 나는 누구와 더불어 회포를 말할까.’ 하고, 얼굴을 가리고 울면서 돌아갔소.” 하였다. 자정의 이 말이 낭랑히 오늘 귀에 들리는 듯하거늘 어찌 병든 사람은 살아 있고 강건했던 사람이 죽음으로써 자정의 슬픔이 나에게 옮겨 와 자정의 죽음을 슬퍼할 줄 생각이나 했겠는가. 자정이 세상을 떠난 지 10년 되는 겨울 10월에 상자 속에서 이 책을 찾아 펼쳐 보고 슬퍼해 마지않는다.
출처 : http://www.pressian.com/article/article.asp?article_num=40070927172148&Section=
술과 노래 [이종범의 사림열전] 남효온: 방랑, 기억을 향한 투쟁 2007-10-01
한강의 밤
남효온은 뜻있는 젊은 선비 사이에서 '실로 말하기 어려운 금기를 드러낸 강개한 인사'로 이름을 알렸다. 그러나 조정에서는 '광동(狂童)', '광생(狂生)'으로 낙인이 찍혔다. 성균관의 사유(師儒)를 '자격이 없다'고 신랄하게 비판하였으니 그곳 출입도 생각하기 어려웠다.
남효온은 도성에 머물고 싶지 않았다. 한동안 전장(田莊)이 있는 행주로 들어가 나루터에서 낚시로 소일하고 술을 찾았다. 그러다 모친의 간곡한 부탁으로 다시 과거 공부를 시작하였다. 행주의 어느 사찰을 찾고 집에는 '경심재(敬心齋)'라는 액자를 걸고 마음을 잡았다. 「경심재명(敬心齋銘)」이 있다. "해와 달이 머리 위로 환히 비치고 귀신은 좌우에서 살피며 내려다보네."
성종 11년(1480) 진사시에도 합격하였다. 그러나 대과는 포기하였다. 일화가 전한다. 어느 날 꿈에 증조모를 보았다고 한다.
내가 '급제하겠습니까' 물었더니 처음에 대답이 없어 다시 물으니 증조모가 '급제하기는 어렵겠다' 하시다가, 이윽고 '금년 5월에는 급제하겠는데 작문은 여러 선비의 으뜸이겠으나 원수가 시관이 되면 반드시 뽑기는 하되 하등으로 삼을 것이니 네가 급제하기 어려운 까닭이다' 하였다. 내가 '천지가 있고, 귀신이 바로 잡을 것인데 원수라 해도 어찌 사사로운 생각으로 그렇게 하겠습니까?' 하니, '네 말은 옳다' 하였다. 『추강냉화』
아찔하였다. '대과는 어렵겠구나' 하였을 것이다. 그래도 실력이 없다는 평판을 듣기는 내키지 않았던지 공부는 계속하였다. 그리고 3년쯤 되었을 때였다. 이번에는 평생 시우(詩友)를 기약하였으나 26세에 요절한 안응세(安應世)가 친구 고순(高淳)의 꿈에 나타나 안부를 물으며 시를 주더라는 것이다. 다음은 고순이 전한 안응세의 시다.
문장과 부귀는 모두 뜬구름 같은 것 文章富貴惣如雲 어찌 수고스럽게 독서에 애를 쓰는가 何須勞苦讀書勤 돈이 생기거든 술이나 사시게 但當得錢沽酒飮 세상 인간사가 그대 뜻대로 되지 않을 것이니 世間人事不須云
술과 시를 좋아하며 맑고 깨끗하게 살았던 안응세가 오죽하였으면 꿈에 나타났을까? 그래, 과거가 무슨 소용인가? 그때 감회를 「고순이 꿈에 안응세를 본 이야기에 적다」에 풀었다. 마지막 부분이다.
내 장차 번뇌를 버리고 吾將棄煩惱 이제 돌아가 낚싯줄을 손질하며 歸去理釣絲 한강 물가에서 어슬렁거리며 逍遙大江濱 그대 의심일랑 사지 말아야지 勿受吾侯疑
남효온은 한강을 오가며 낚시나 하며 살기로 작정하였다. 행주나루와 양화진 사이 압도(鴨島)에 갈대 집까지 지었다. 억센 갈대가 많아 나라가 관리하였는데, 마찰은 없었는지 모르겠다. 거룻배도 한 척 장만하였다. 띠 풀로 다락을 얹어 먹고 잘 수 있도록 꾸민 타루(柁樓)였다.
남효온은 여의도와 서강과 동작, 마포를 오가며 지냈다. 배가 지나가면 친구들이 술을 가지고 찾아왔다. 밤을 새며 그믐달을 보다가 닭 울음을 듣는 나날이었다. 그러다 압도로 들어가곤 하였다.
양화진에서 서호주인(西湖主人)을 자처하며 고깃배를 움직이던 이총과 왕래가 잦았다. 언젠가 친구들을 태우고 압도로 건너왔던 모양이다.「이총이 배 타고 압도의 초가를 찾다(百源乘舟訪余于鴨島蘆間)」다섯 수에 그날의 정경을 담았는데, 네 번째다.
잘 드는 칼로 가늘게 회 치니 은빛 나고 雄劍斫魚銀膾細 술 데우는 풍로 숯불 연기 푸른데 風爐煮酒炭烟靑 강과 들에서 부리는 종들까지 문 앞에서 신곡을 부르니 江奴野婢門新曲 다시 술잔 돌아 흠뻑 취하는구나 更與傳杯醉酩酊
고기를 잡아 회를 뜨고 술을 마셨는데 노비들이 이총이 새로 지은 노래를 따라 불렀다. 거문고에서는 당대 제일이었던 이총은 슬픈 노래를 많이 지었는데, 이 날은 부르기 쉽고 경쾌한 곡이었던 모양이다. 이총은 태종의 증손으로 나중에 남효온의 둘째 사위가 되었다.
한강은 사람과 물산이 무수히 지나는 물류와 소통의 길이었다. 뜻을 펴기 위하여 왔다가 뜻을 잃고 떠나는 만남과 헤어짐의 여러 길목이 있었다. 또한 기다림의 길이었다. 혹여 조정을 떠났다가 다시 들어가고자 할 때 한강보다 빠른 길은 없었다. 도성과 경기의 권세 있는 가문이 한강변에 전장(田莊)을 열었던 연유가 여기에 있다.
한강은 공부하기에 좋은 문화 공간이기도 하였다. 장래가 촉망되는 유능한 관리에게 휴가를 주어 책을 읽게 하는 독서당을 호당(湖堂)이라고 하는 것도 한강이 훤히 보이는 풍광 좋은 곳에 두었기 때문이다. 이것만이 아니다. 독서당의 엘리트 관료를 유인하며 조정과 도성의 권위를 가볍게 비웃을 수 있었다. 한강은 시위와 저항의 공간이었던 것이다. 그러다 한강은 풍류의 광장으로 변한다. 넓은 강바람을 타고 멀리 인왕산이 멀리 보이는 곳에서 즐기는 뱃놀이는 더할 나위 없었다. 그 사이 내일을 위한 격려와 위로를 주고받을 수 있으면 순간 연대와 모색의 공간으로 탈바꿈한다. 바로 남효온의 한강이었다.
남산의 봄
남효온은 도성에 들어가면 홍유손ㆍ이종준ㆍ권경유ㆍ이정은(李貞恩)ㆍ신영희(辛永禧)ㆍ우선언(禹善言)ㆍ이분(李坋)ㆍ조자지(趙自知)ㆍ이달선(李達善)ㆍ강흔(姜訢) 등과 자주 어울렸다. 달 밝은 밤이면 꽃을 보고 술을 마시며 밤거리를 활보하였으며, 날 고운 봄에는 남산에 올라 시를 지으며 또 마셨다.
어느 날 밤이었다. 비파를 걸쳐 멘 이정은과 함께 이종준의 집을 찾았다. 이정은은 태종의 손자가 되는 종친이었는데 음율의 달인이었다. 특히 슬픈 노래를 잘 연주하여 지나가던 행인도 멈춰서 눈물을 훔칠 정도였다. 이종준 역시 시와 그림에 일가를 이루었으니, 더할 나위 없는 조합이었다.
세 사람은 살구꽃이 활짝 핀 이종준의 뜰에서 이정은의 비파소리에 취하여 술을 마시고 시를 읊었다. 한 구절씩 이어가는 연구(聯句) 「이정은과 같이 달빛 타고 비파 들고 이종준의 문을 두드리다」가 있다.
우뢰 같은 비파소리 봄을 재촉하는데 琵琶撥雷催晩春 (이종준) 꽃 아래 사람다운 사람이 모였구나 花下相逢皆可人 (남효온) 청담이 끝나니 술 항아리가 엎어졌네 淸談未了欲臥 (이정은) 맛있는 산나물 안주를 배불리도 먹었구려 山肴喫盡羞澗蘋 (이종준) 좌중에서 이 추강이 늙어 미쳤다 한다지 座中秋江老狂發 (남효온) 다시 한 잔 비우면 원통함을 씻으려나 更把一杯心欲雪 (이정은)
이종준은 이정은의 비파 소리가 좋고, 이정은은 자신의 노래가 끝나자 술이 없는 것이 아쉬웠다. 남효온이 이 자리에 만난 사람은 좋지만 자신이 이렇게 미쳐 늙어가는 것이 아닌가 하자, 이정은이 한 잔 술을 권하며 위안하고 있다. 세 사람은 한껏 취하여 밤거리를 쏘다니다가 새벽에 권경유를 찾아가 놀라게 하였다. 『추강냉화』에 나온다. 이종준은 무오사화가 일어나자 함경도로 유배를 가다 나라를 원망하는 시를 지었다고 모함을 받고 결국 맞아 죽었고, 권경유 역시 사초에서 김종직의 「조의제문」을 불멸의 작품으로 찬양하였다는 이유로 참형을 당하였다.
성종 13년(1482) 봄날 조자지의 집에 갔을 때였다. 홍유손이 제안하였다. "현재 세상이 벼슬하기에는 마땅치 않으니 우리는 죽림칠현(竹林七賢)이 되어 호탕한 놀이나 할 뿐이다." 3세기 후반 중국 삼국시대 죽림 아래에서 술을 마시며 청정무위(淸淨無爲)와 공리공담(空理空談)을 일삼았던 일곱 선비들처럼 당분간 세상을 멀리하자는 모임을 만들자는 것이었다. 남효온ㆍ홍유손ㆍ조자지를 비롯하여 이정은ㆍ이총ㆍ우선언ㆍ한경기(韓景琦)가 중국의 청담파가 즐겨 썼던 '소요건(逍遼巾)'을 준비하고 술과 안주를 가지고 흥인문 밖 대밭에 모였다. '죽림우사(竹林羽士)'의 결성이었다. 이현손(李賢孫)ㆍ노섭(盧燮)ㆍ유방(柳房) 등은 뒤늦게 합석하였다. 일행은 날이 저물 때까지 화타(華陀)의 비방(秘方)으로 빗는다는 '도소주(屠蘇酒)'를 돌리며 한껏 노래하며 춤추다 헤어졌다. 한경기는 한명회의 손자, 노섭과 유방은 각각 노수신, 유자광의 아들이었다.
남효온은 술로 인하여 실수가 많아 장안의 놀림감이 된 적도 있었다. 모친의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다. 금주를 단행하였다. 그때 「지주부(止酒賦)」를 지었는데 남아 있지 않고 「주잠(酒箴)」이 남아 있다. 중간 부분이 이러하다.
석 잔이면 말이 잘 나오다가 三盃言始暢 법도를 잃은 줄도 모르고 失度自不知 열 잔이 되면 점차 언성이 높아가다 十盃聲漸高 그러다 의견이 벌어진다네 論議愈參差 이어서 항상 노래 부르고 춤추니 繼而恒歌舞 근육이 수고로운지도 깨닫지 못한다 不覺勞筋肌 연회가 파하면 동과 서로 치닫다가 筵罷馳東西 옷은 모두 황토물을 들였네 衣裳盡黃泥
사실 술 마시는 사람은 논쟁하다 틀어지고, 화해하다 어지럽게 마감한다. 겪어보지 않는 사람은 모른다. 그러나 남효온은 이후로도 술을 끊지 못하였고 술을 마시면 거리낌 없는 언사를 퍼붓곤 하였다.
언젠가 신영희ㆍ이달선 등과 남산으로 꽃구경을 간 모양이다. 「남산에 올라」라는 제목으로 각자 한 수를 읊었는데 남효온이 시작하였다.
지난해 이 산에 오르니 去年此山頭 사람들이 서로 봄꽃 구경하더라 春花人共看 남들은 가는데 나 홀로 왔으니 人去我獨來 이마에 땀이 보송보송 나더라 我顙誠有汗
이렇게 절반을 마쳤을 때였다. 신영희가 대뜸 "나 홀로 왔다는 구절에 무슨 곡절이 있으렷다?" 하며 수염을 비틀며 놀렸다. 다음은 후반이다.
어느덧 해 떨어져가니 斜日射三竿 봄날 강 물빛이 더욱 반짝인다 春江照爛漫 술병 열어 큰 잔 들이키니 開罇乃大嚼 뻐꾸기는 바위에 올라 조잘댄다 布穀啼巖畔
그러자 이달선이 "술은 왜 혼자 마신다고 하는가?" 하며, "이제는 수염을 통째 뽑히겠군" 하였다. 남효온이 말하였다. 아니다. 이 몸이 그대들과 오늘 놀지만 내일은 그대들보다 더 어진 사람과 놀아도 그대들은 꺼리지 않고 오히려 칭찬할 것 같다. 『추강냉화』
내일은 오늘보다 나은 날이 되고, 좋은 만남이 있었으면 한다는 것이다. 이제 남산을 벗어날까, 일탈을 생각하였을지 모른다.
/이종범 조선대 교수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