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서울시우문학 3호에 수필 "고향무상"이 게재되었기에 알려드립니다. 일독을 하시고 소감을 보내주시기 바랍니다.
일 송 韓 吉 洙 故鄕 無常
어머니의 품속인양 푸근한 자기 고향이 그립지 아니한 사람이 어데 있으랴 마는 때 묻지 아니하고 정이 샘물처럼 흐르던 내 고향은 향기 나는 고장이었다. 내 고향은 호남평야가 시작되는 금강 가 한적한 포구가 있던 곰개 라는 곳에서 남쪽으로 1km정도 떨어져 있는 곳이다 노령산맥이 지나가면서 곁가지로 작은 언덕 같은 야산을 만들어 조금 솟은 곳이 있으니 함라산이요 봉화산이고 만수봉이다. 이 만수봉 밑에 마을이 그림처럼 걸려 있어 오손 도손 정답게 이야기를 나누는 집들이 모여 있으니 그리운 우리 마을이다. 우리 마을은 갓점, 건너말, 산정, 이렇게 3개 마을에 30여 호가 모여 사는 아담한 고장이었다.
이 마을에는 나의 외가인 평택 林씨들이 주성을 이루고 있고 천안 全 씨와 김해 金 씨 안동 金 씨 창녕 曺 씨 평산 申 씨 밀양 朴 씨 청주 韓 씨 등 각성들이 조화롭게 섞어서 사는 낮닭이 평화롭게 우는 고장이다. 건너 마을에는 평택 임 씨 집성촌이 있는데 여기에 괴짜 한분이 있어 별명을 임 주사라 불렀다. 이 분이 우리 마을 어른들 개개인의 습성이나 행태를 비유해서 노래를 지었으니 “아주 약다 임명구, 우충하다 임낙현, 껑충껑충 신태술, 뒤뚱뒤뚱 박치경, 앞뒤 없는 임난술, 푼수없다 임남팩, 사분사분 전수광” 등 어른들을 놀리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칭찬하는 것도 아닌 묘한 뉴앙스가 풍기는 말을 만들어 우리들 철부지들이 무슨 뜻인지도 모르고 동요처럼 부르며 고샅을 훑고 다니다가 혼쭐이 나기도 했다.
여기에는 우리 어린이 들이 만든 동요도 한몫했다. “해야 해야 떠느라 참봉네는 왜 떴냐 거기는 부잔게 떴지 이곳도 그전엔 부자 였단다” 이것은 설명이 필요 할 것 같다. 우리들이 겨울에 내복도 제대로 갖춰 입지도 못하고 양지쪽에 모여 해바라기를 하노라면 겨울의 얇은 해를 야속한 구름이 수시로 병풍처럼 가린다. 그러면 추워서 덜덜 떨면서 부르는 자작 동요 “해야 해야 떠느라(비추어라) 산 넘어 함열 읍내 참봉이 살던 마을에는 왜 떴느냐 그쪽은 익산 3대 부자가 사는 마을( 만석꾼인 김안균, 조해영, 이배원 중 이배원이 참봉)이니까 해가 떴다. 그렇다면 여기도 예전에는 부자 동네 였었다(우리 마을에 예전에 큰 부자가 살았는데 시주하라고 온 탁발승에게 못된 짓을 하자 스님이 하는 말씀 마당가에 있는 저 우물을 메워야 큰 액운을 막을 수 있다 고 하자 머슴과 종들을 시켜 우물에 농짝 같은 바위를 옮겨서 메우고 보니 부잣집에 불이 나고 돌림병이 도는 등 액운이 겹쳐서 부잣집과 이웃집들이 망했다는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는 부자동네였다) 그걸 고려해서 해야 해야 떠다오 라는 소박한 바램이 담겨있는 치졸한 동요다.
우리 마을은 역사가 깊어 유적이 많은 고장이다, 바로 언덕 너머엔 큰 절터 골과 작은 절터 골이 있는데 지금은 넓은 공터에 옛 기와조각이 널려있고 가공한 돌이 널려있다. 이곳을 임해사 터라고 하는데 빈대가 성행하여 폐사가 되었다고 전해 오는데 지금도 기왓장을 들추면 빈대의 잔해가 붙어있다고 한다. 또한 이곳은 북위 36도 08분으로 자생녹차의 북방한계선이어서 익산시가 자연차밭으로 보호하고 있는 곳이다. 우리 마을 입구에 있는 전답을 탑 거리라고 하는데 얼마 전에 임덕규라고 외가의 형 되는 분이 집을 지으려고 땅을 파니 석탑의 한 부재인 옥개석이 나왔다고 하는 걸로 봐서 아마도 고려시대에 큰 사찰이 있었던 것 같다. 그리고 건너 마을 임씨 집성촌에서는 1.500년 전 백제시대의 금동관모와 금동신발 그리고 은제 말 장식 등이 쏟아져 나와서 그곳에 유물전시관을 건립해서 보존 전시하고 있다. 1986년에 문화재 전문위원인 김기웅 박사가 작성한 보고서에 의하면 이곳은 금강가의 요충지로서 백제의 높은 관직을 보유한 지방수령이 거주한 것 같다고 했다. 또한 왕이 왔었다는 어래성이 있고 왕이 머물던 궁이 있었다는 궁골이 있으며 백제 멸망 시 소정방과 백제군이 일전을 벌렸다는 남병산이 칠목재 옆에 있다. 우리 집 뒤 만수봉에 오르려면 땅 밑에서 장구 치는 소리가 들리는 곳이 있기에 발굴 책임자인 김정기 박사에게 전화로 위치정보를 알려주고 발굴을 부탁했는데 지원예산의 부족으로 손을 못 댔다고 차후로 미루더니 이제는 다 잊어 버렸을 것 같다.
설날 전날인 섣달그믐날 밤에는 머리에 장끼 깃으로 장식한 “天下之大本” 이란 농기를 앞세우고 집집마다 다니는 지신밟기 농악이 등장한다, 우선 마을의 공동우물에 가서 무병장수의 원천인 샘물에 잡귀가 범접하지 말라고 우물고사를 지내고 각 가정의 장독에 가서 이 집의 무병장수와 가내평안을 비는 고사를 올리고 난 뒤 마당에 멍석을 깔고 한바탕 놀다보면 푸짐한 안주와 막걸리가 등장 한다. 설날에는 산소에 성묘를 갔다 와서 마을 어른들에게 차례대로 세배를 하러다닌다. 덕담도 듣고 칭찬도 듣고 어느 집에서는 푸짐한 음식 대접도 받고 그러다 보면 짧은 하루해가 꼬리를 감춘다. 정월 대보름 전 날에는 쥐불놀이와 액막이 불을 지핀다. 생솔가지와 생대를 베어다가 단을 쌓고 해가 기울기를 기다렸다가 불을 지피면 매운 연기 속에 생대마디가 터지는 소리가 요란하다. 이 소리가 요란 할수록 잡귀나 액이 범접을 못한다고 소리를 크게 낼 왕대를 잘라서 태웠다. 그런 연후에는 밤을 새운다. 잠을 자면 눈썹이 하해지고 귀신이 왔다 간다고 잠을 못 자게 하나 눈꺼풀이 무거워 저절로 감겨지니 어찌 할 도리가 없어 자는 둥 마는 둥 하며 하룻밤을 넘긴다. 그리고선 새벽 같이 일어나서 아무나 불러내어 “니더위 내 더위 먼저 더위” 하고 더위를 판다. 더위를 많이 팔수록 여름에 더위를 안 먹고 건강하게 잘 지낸다고 학교에 가면서도 팔고 교실에서도 파는 소동이 벌어진다.
이런 동화 속 같은 아름답고 깨끗한 마을에서 유년기와 소년기를 보냈다. 집 뒤에 있는 얕은 산은 우리들의 간식창고요 놀이터였다. 봄에는 찔레 순, 칡 순, 삘기, 산 앵두, 소나무 속껍질을 벗긴 생키를 먹고 여름에는 산딸기, 오디, 칡뿌리 등이 주전부리꺼리였으며 가을에는 간식꺼리가 지천으로 널려 있는 마당이다. 개암, 알밤, 머루, 으름, 돌배, 보리밥, 아그배, 잔데, 야생 꿀, 등 마음만 먹으면 언제 던지 우리의 간식이 거기에 대령을 하고 있었으니 시골소년의 건강함이 거기에서 묻어나왔나 보다. 여름에는 마을입구 둥구나무가 마을의 수호 목으로 버티고 서서 우리에게 그늘을 제공하려고 큰 양산을 펼쳐주고 있었다. 여름에 아이들이 이곳에 모여 개울에서 물장구도 치고 고누도 두고 땅 따먹기도 하면서 여름을 보낸다. 이때 장꾼들이 곰개 포구에서 갈치나 조기, 황석어를 자전거에 싣고 이곳 버드나무 밑을 지나서 칠목재 라는 고개를 넘어가야 하는데 홀로 넘어가기에는 짐이 무거워 힘겨우니 이곳에서 대기하고 있던 아이들에게 자전거 뒤를 밀도록 해서 1km 거리의 칠목재 정상까지 밀어다 주면 지금 돈 1,000원 정도의 벌이가 되기도 하였다. 자전거를 미는 것도 룰이 있고 순서가 있고 질서가 있어서 아무나 할 수도 없어서 나는 축에 끼지도 못했다. 밤에는 개구쟁이 들이 이곳에 모여 심야의 어둠을 틈타서 금방모퉁이에 있는 길산네 아버지가 가꾸는 참외 밭에 가서 수박이나 참외서리를 하기도 하였다. 우리 마을의 역사를 꿰뚫고 있는 이 둥구나무, 마을의 애환과 변천을 지켜 본 이 수호목이 지금은 많은 차량의 왕래로 놀이터 구실을 상실하였기에 우리 형제들이 부담하여 개울가에 萬壽亭이란 정자를 지어놓았다.
곰개 포구에는 황해바다에서 잡아오는 해산물을 도급 관리하는 船主와 客主가 여러 사람이 있었는데 춥고도 배가 고파 빈곤의 덮개를 쓴 서러운 계절인 왜정시대에도 이곳은 더운 김이 솟구치는 부자들의 마을이었다. 그런데 선주중의 한분이 귀천을 하셨다. 재물이 풍성하니 5일 장사에 상주대신 곡을 하는 곡 꾼들을 불러서 수시로 구성지게 곡을 했고 상두꾼을 전주에서 불러와서 상여를 메고 가는데 일대 장관을 연출했다. 우리 면 내외에서 구경꾼이 몰려와 우리 면민보다도 많은 수천 명이 인산인해를 이뤘다. 우리 마을 앞의 둥구나무 밑에서 노제를 지내는데 그것도 큰 구경꺼리였다, 전문적으로 곡을 하는 꾼들이 슬프지도 아니한 구성지고 감칠맛 나는 곡성으로 읊어대는데 푸짐한 음식에 동이 째 안기는 술과 안주 등은 넉넉하고 후덕한 인심이었으니 이것은 喪禮라고 하는 것보다도 하나의 거리잔치요 노블리스 오블리제 행사였다. 실컷 먹고 마시고 떠들고 곡하고 한바탕 쉬다가 망인의 명복을 비는 갖가지 사연을 적은 수백 장의 만장을 앞세우고 상여는 다시 움직여 구성진 만가소리도 드높게 울리는 속에 칠목재의 공동묘지에 안장을 하였다, 우리들은 오랜만에 큰 구경꺼리가 생겼으니 신이 나서 매장하는 곳까지 따라가서 마지막까지 입회를 하였다. 며칠 지나 쉬쉬 하면서 들려오는 풍문이 있었다. 그날의 장례행렬은 관청에서 사설묘지에 매장을 금지하는 정책에 따라 일단 공동묘지로 향했다가 그날 밤에 파묘를 하여 미리준비 해 놓은 명당으로 이장을 하였다고 하니 그날의 그 호화로운 행사는 눈 가리고 아웅 하는 거짓 행사요 진짜는 야반에 벌어진 도둑행사였던 것이다.
그 며칠 뒤 우리들은 만수봉 중턱에 모여 구성진 만가를 되살리는 상여놀이를 하였는데 마을사람들이 모두 집밖으로 나와서 이마에 손을 얹고 구경하고 있었는데 나중에 집으로 돌아와서 부모님께 많은 꾸중을 들었다. 금방 있었던 일을 배워서 따라하고 있었으니 지금 생각을 해도 맹모삼천지교라는 말이 맞는 이야기인 것 같았다.
우리 마을에도 일제의 숨 막히는 압박에서 벗어나는 해방의 기쁨을 누리는 순간이 오자 맨먼저 우람한 나무를 벌목하는 일부터 시작을 하더니 마을 잔치를 한다고 소를 잡기로 했다. 그런데 도끼머리로 소의 정수리를 내려 처야 되는데 이를 할 사람이 없었다, 힘깨나 쓰는 마을의 젊은이가 소고기 5근을 받기로 하고 자원하여 소를 쓰러트린 뒤 이 사람도 같이 뒤로 넘어져 기절을 했다는 것이다. 우리 마을에는 함열 읍내 만석꾼 이 참봉네 재실이 있다. 원래는 선영의 묘소가 있었으나 중간에 실전이 되어 찾지를 못하자 단을 만들어 제사를 모시는 장소인데 공간이 넓어서 많은 사람들이 모이기 좋은 장소였다. 내가 전주에서 대학을 다닐 때 내 아우가 주선을 하여 추석을 기하여 이곳에서 일명 신파라고 하는 마을 예술제를 거행하여 큰 호응을 얻었다고 한다. 이 말을 듣고 그 다음해에는 내가 주선하여 좀 더 규모를 넓혀 노래와 춤, 그리고 아이들 재롱잔치와 “人情 無常”이라는 3막짜리 연극을 올려놓으니 문화나 예술에 목이 마른 많은 면민들이 성황을 이뤄 이들에게 문화갈증을 풀어 주었는데 한편 성금도 많이 접수되어 마을의 공동기금으로 활용케 한 일도 있었다.
이런 인정이 넘치고 활기찼던 마을이 이제는 그늘이 드리워지고 있다, 그 많던 젊은이가 모두 어디론가 흩어지고 노인들만 집을 지키고 있었다. 1939년 기묘년의 큰 가뭄에도 마르지 않고 맑은 물이 솟아나와 우리 마을 뿐 아니라 건너편 큰 마을에서도 물을 길어다 먹었다는 대밭속의 유명한 샘물이 있었는데 그 고마운 샘이 방치되어 녹슬고 있다. 샘물이 좋아서 몹쓸 돌림병도 비껴가던 마을이 점점 병들고 있었다. 이 좋은 샘물도 이제 한 물이 갔는지 방치하고서 자기 집에 자가 수도를 설치하고 있다. 또한 부안의 방폐장 설치 반대, 새만금 방조제 축조 방해 운동의 찌꺼기가 흘러와 물들었는지 좋지 않은 행태에 오염이 되어 있었다. 얼마 전에 마을에서 1km정도 떨어진 만수봉 정상으로 고압선 철탑공사를 하려고 한국전력에서 작업차가 마을로 들어오려고 하니 이 고압선과는 아무 관련도 없는 우리 마을에서 이 정보를 어떻게 귀 동냥을 했는지 알고서 마을의 노인들이 모두 나와서 마을입구에 멍석을 깔아놓고 누워서 공사차량의 출입을 저지하니 할 수 없이 한전에서 한발 물러서서 협상을 하려고 나섰다고 한다. 그러자 이 마을에 실제로 살고는 있으나 주민등록이 타처로 되어 있는 자, 한전에서 돈을 준다고 하니 급하게 주민등록을 옮겨 놓은 자 등 도시사람 뺨치는 얌체행태가 벌어졌으나 규정상 이분들을 제외하자 무조건 생떼를 쓰고 있다고 하니 떼법이 통한다는 이야기를 어데서 듣고 그 흉내를 내고 있는지 모르지만 고향의 그 푸근하고 순박한 인심은 다 어디로 도망갔느냐고 하늘을 향하여 물어 보고 싶다. (서울 시우문학 3호에 게재)
|
첫댓글 저의 고향도 개발의 돈이 되는 부서지는 소리로 추억은 파헤쳐졌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