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중해 문화를 걷다] 트로이-끝나지 않은 원정
히사르릭크 언덕, 그곳은 정말 트로이였을까
트로이의 발굴은 하인리히 쉴리만이 1869년에 오토만 제국의 아나톨리아 서쪽 해변에서 가까운 히사르릭크(Hisarlik) 언덕의 발굴에 대한 허가를 신청했을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그는 이미 전설의 도시 트로이를 발견했다는 확신에 차 있었다. 1822년에 독일에서 태어난 성공한 사업가였던 쉴리만은 미국의 철도 산업에 투자해 부호가 됐지만 42세에 문득 은퇴를 선언한다. 이후 그는 자신의 시간과 돈을 여행과 고대 문명 연구에 바치겠다고 결심한다. 그의 관심은 다름 아닌 고대 그리스의 전설, 특히 트로이 전쟁의 서사에 나오는 잊혀진 장소를 찾아내는 것이었다.
고고학자 쉴리만의 공(功)과 과(過)
그리스의 전설적인 작가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에 나오는 트로이 전쟁의 이야기는 지중해 문명과 유럽 문화의 정체성 형성에 결정적인 역할을 한 서사문학의 최고봉으로 꼽힌다. 일리온(Ilion)— ‘트로이’라는 이름으로 더 잘 알려진 —의 젊은 왕자인 파리스는 신들의 전령인 헤르메스에게서 헤라, 아테나, 아프로디테 중 제일 아름다운 여신을 고르라는 요청을 받는다. 세 여신들은 모두 자신이 선택되기를 원하며 파리스에게 대가를 약속한다. 헤라는 파리스에게 권력을, 아테나는 그에게 영웅의 명예를, 아프로디테는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여인을 아내로 줄 것을 약속한다. 파리스는 아프로디테를 선택하고 이로 인해 아름다운 헬레나 —스파르타의 왕 메넬라오스의 아내 —를 만나게 된다. 헬레나는 파리스와 사랑에 빠지며 파리스를 따라 에게 해를 건너 막강하고 부유한 도시 트로이로 항해한다.
호메로스의 서사시에서 아카이오이족(Achaeoi)이라 불린 그리스인들은 헬레나를 되찾고자 대함대를 결집해서 아나톨리아 해안으로 출동한다. 메넬라오스의 동생이자 미케네의 왕인 아가멤논이 통솔하는 함대였다. 그리스인들의 요구에 응할 의사가 없었던 데다가 막강한 방어력을 자신했던 트로이는 이후 십 년에 걸쳐 그리스인들의 포위하에 기나긴 전투를 치러야 했다. 트로이는 마침내 유명한 영웅 오디세우스의 책략에 의해 함락되고 만다. 고국에서 이역만리 떨어진 끝없는 전쟁에 지쳐가던 와중에 그리스군은 오디세우스의 지휘에 따라 거대한 목마를 만들고 그 안에 병사들을 숨겨둔다. 그리스 함대가 해안 너머로 사라지는 것을 본 트로이인들은 해변에 남아 있는 목마를 그리스가 항복의 표징으로 남겨둔 제물로 여긴다. 그들이 목마를 도시 안으로 들인 후 목마 안에 숨어 있던 그리스인들이 밤중에 트로이의 성문을 열었고, 트로이는 아무런 저항도 하지 못한 채 재빨리 돌아온 그리스 군에 의해 함락됐다. 도시는 약탈당하고 파괴됐으며 시민들은 살해되거나 노예가 됐다.
‘육보격(hexameter)’이라 불리는 운율로 지어진 호메로스의 작품에 관해 많은 논의가 이뤄져 왔다. 특히 전쟁에 대한 묘사가 실제 역사적 사건에 기초한 것인지, 그리고 얼마나 많은 문학적 상상력이 개입된 것인지의 문제는 학자들의 주요 관심사였다. 그러나 현존하는 호메로스와 동시대의 문헌자료가 없는 상황에서 정답을 찾기는 어렵다. 호메로스의 시가 역사적 사건에 근거한다고 믿는 학자들도 호메로스가 다루는 시대에 대해서는 의견 차이를 보인다. 정치제도나 전투방식, 그리고 무기류를 비롯한 물건들에 대한 묘사와 그러한 물건들이 만들어진 재료는 후기 청동기 시대(기원전 1700-1200)나 초기 철기 시대의 초반부와 맞아떨어진다. 기원전 8세기에 살았던 호메로스가 그보다 몇 세기 전에 일어난 사건을 주제로 서사시를 썼다는 것인데, 이는 그의 서사시가 역사적 사건에 근거한 것인지에 대해 의구심을 갖게 하는 또 하나의 이유로 작용한다.
쉴리만이 현대 고고학의 선구자이기는 하지만 그의 발굴 방법은 날선 비판을 받아왔다. 히사르릭크 언덕의 정착지는 트로이 전쟁 당시뿐만 아니라 그 이전과 이후에도 몇 세기 동안 사람들이 살았던 곳이다. 그러나 쉴리만은 호메로스의 트로이 시기에 해당하는 정착지 층을 발견하기 위해 대규모로 언덕을 파 내려갔다. 오늘날 고고학의 발굴 방식과는 다르게 쉴리만은 파 내려간 각 층의 구조를 기록하지도 않았고 층별로 체계적으로 발굴하지도 않았다. 결과적으로 쉴리만은 단층의 상당 부분을 파괴했고, 결국은 훨씬 이전의 초기청동기 시대(기원전 2550-2200)의 요새층을 호메로스의 트로이라고 결론지었다. 우연히 값진 금속 그릇들과 청동 무기 및 금으로 된 머리띠 장식 등을 발견하기도 했는데, 이 발굴품들을 ‘프리아모스 왕의 보석’이라 명명하며 호메로스의 트로이를 발견하는 데 성공했음의 증거로 제시했다. 전문가들에 의해 이 발굴품들이 명백히 트로이 전쟁의 추정연도보다 훨씬 앞선 시기의 것임이 밝혀졌지만, 어쨌든 쉴리만은 대중적인 관심과 명성을 얻는 데에 성공했다.
쉴리만의 시절부터 현재까지 히사르릭크에 대한 발굴과 연구는 터키와의 협력하에 독일과 미국의 많은 연구소들에서 진행돼왔다. 히사르릭크가 트로이 도시였을 수 있다는 가능성에 기반을 두고, 히사르릭크에 대한 연구는 트로이를 포함한 모든 정착 시기에 대해 행해졌다. 총 열 개의 주요 정착 시기가 발견됐고 각 시기는 여러 세부시기로 나뉜다. 히사르릭크에 집중된 발굴은 이 언덕을 그 지역에서 가장 많이 연구된 장소로 만들었다. 지금은 이 언덕이 시대적으로 어떻게 발전하고 변화했는지뿐만 아니라 타지역과의 무역과 정치 관계는 어떠했는지도 알 수 있다.
호메로스 서사시에 대한 의구심
그러나 아직도 충분히 규명되지 못한 부분이 있다. 바로 트로이전쟁 추정시기에 해당하는 정착지의 역사적 진위의 문제이다. 호메로스는 트로이를 지역 간 권력의 중심지로 묘사했다. 히사르릭크에서 발견된 당시 정착층의 구조는 최근까지도 이 점을 충분히 입증하지 못했다. 다만 최근 십 년간 히사르릭크를 둘러싼 지역에서 이뤄진 현장발굴에 의해 언덕 아래 부분에 카다란 도시가 존재했음을 알 수 있게 됐다. 만약 참호에 둘러싸인 이 지역에 대단위의 인구가 정착해 살았다면 히사르릭크는 틀림없이 이 지역의 정착 구조에서 아주 중요한 입지를 가진 중심지였을 것이다.
전설의 도시 트로이에 대한 탐구는 계속된다. 단지 오래된 서사시의 배경이 되는 장소를 찾는 것이 아니다. 이 탐구는 유럽 문화의 집단적 정체성에 커다란 영향을 끼친 고대 유산의 기원을 밝히려는 시도이다.
유럽의 민족과 가문드링 트로이에서 뿌리를 찾는 이유
지중해와 유럽의 민족과 왕들이 호메로스의 서사시에 나오는 전쟁의 패자들 —전쟁의 승자인 그리스인이 아닌 —즉, 트로이인들에게서 자신들의 뿌리를 찾으려 했다는 것은 역사의 아이러니가 아닐 수 없다. 이 중에서 트로이 혈통의 아이네아스(Aeneas)를 로마인의 조상으로 묘사하는 전설은 특히 중요한 의미를 가진다.
로마제국의 황제 아우구스투스의 제위 시절에 베르길리우스가 집필한 서사시 <아이네이드(Aeneid)>는 많은 면에서 호메로스의 <일리아스>와 <오디세이아>와 비슷하다. 트로이의 영웅이자 왕족이었던 아이네아스는 트로이가 멸망할 때 탈출한다. 노쇠한 아버지를 어깨에 지고 어린 아늘 아스카니우스(Ascanius)의 손을 잡고 트로이를 탈출하는 아이네아스의 모습은 로마의 예술품에 자주 나오는 모티프이다. 아이네아스는 살아남은 트로이인들을 모아 오디세우스의 모험에 필적할 만한 여행을 시작한다. 그의 종착지는 이탈리아 반도의 라티움 지역 서부의 해안가였다. 이곳 왕의 환대를 받으며 그는 왕의 달 라비니아의 약혼자를 전투에서 이긴 후에 그녀와 결혼했다. 전설에 따르면 로마 건국 신화에 등장하는 도시 알바 롱가(Alba Longa)를 건설한 사람이 바로 아이네아스의 아들인 아스카니우스였다. 로마의 건설자로 알려진 로물루스와 레무스 형제는 아이네아스와 리비아의 아들 실비우스(Silvius) 혈통이다.
이 서사시가 로마제국의 국가적 정체성 인식에서 가지는 중요성은 로마 문화의 곳곳에 나타난다. 예를 들어 가이우스 율리우스 카이사르(Gaius Julius Caesar)의 성은 직접적으로 아이네아스의 아들인 아스카니우스와 연결이 되는데, 아스카니우스는 율리우스라는 이름으로도 불렸다. 로마의 초대황제들도 모두 이 가문에 속했다. 이들은 황제 가문의 우수성을 내세우거나, 평소에는 찬사를 아끼지 않던 그리스인들과 대립이나 전쟁을 해야 할 때, 그리고 심지어는 전설의 도시 트로이가 위치한 소아시아를 정복한 것 등을 정당화하기 위해서 트로이 혈통을 강조했다.
율리우스 카이사르의 후계자이자 로마 초대 황제인 아우구스투스는 전쟁의 신 마르스 신전을 건축해 로마 역사에서 위대한 인물들의 동상을 신전 양쪽에 세우도록 명령했다. 아이네아스의 동상은 사원 입구에서 가장 잘 보이는 곳에 세워졌다. 이곳에서 시민들은 끊임없이 로마와 트로이의 관계에 대하여 상기될 수밖에 없었을 것이다.
트로이로부터 뿌리를 찾으려는 민족 중에서는 프랑크족도 있다. 이들은 게르만 부족들의 연합체로 기원후 3세기부터 현재의 독일과 프랑스에 해당하는 유럽 서부와 중부 지역에서 살았다. 프랑크족이 트로이 혈통이라는 것은 중세의 역사기록에도 남아 있으며, 심지어 라인강변의 도시인 크산텐(Xanten)은 ‘작은 트로이’로 불렸다. 중세에는 합스부르크 왕조나 호엔촐레른 왕조와 같은 귀족 가계들이 자신들의 혈통을 트로이의 왕족에서 기원하는 것으로 내세우는 것이 보편적이었다. 스칸디나비아 및 독일 신화에서 아버지 신으로 나오는 오딘(Odin)은 종종 아나톨리아(트로이 유적지인 히사르릭크 언덕이 위치한 지방)인으로 묘사되기도 한다.
전 시대를 통틀어 수많은 가문과 민족들이 왜 트로이와의 연관설을 주장했을까. 무엇보다 그리스의 문화적 영향력을 통해 지중해에 널리 알려지게 된 호메로스의 서사시가 끼친 영향, 그리고 이 작품에서 묘사된 신들과 영웅들이 벌이는 전투, 우정, 배신 등으로 이뤄진 드라마의 한 부분이 되고자 하는 갈망이 강하게 작용했을 것이다. 트로이 전쟁에서 살아남은 자들의 탈출에 대한 내러티브는 자신의 혈통을 어느 정도 개연성 있게 신화의 영역으로 포함시키는 것을 가능케했다. 이로 인해 파괴된 도시 트로이는 많은 가문과 민족들의 신화적 근본이 됐도 유럽 문화사에 깊이 자리 잡은 하나의 개념이 됐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