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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순동면 무기고를. 털어 광주지역 방어를
증 언 자:문관(남)
생년월일: .1958. 12.26(당시 나이 22세)
직 업: 우체국 기술계(현재 교육청 고용원)
조사일시: 1989. 7
개 요
화순우체국 기술계에서 전화선로 공사를 하던 문관 씨는 당시 23세(만 22세)의 젊은 나이였다. 5월 21일 광주에서 넘어온 시위대를 따라 광주로 나와 22일부터 구숭의실고 앞에 있던 사진관 옥상에서 경계근무를 섰다. 26일 화순으로 넘어간 이후 아무 일이 없었는데 8월초에친구들과 패싸움을 하다 경찰서에 잡혀간 것이 화근이 되어 광주항쟁 당시의 활동이 드러난다.
화순 동면 무기고 습격
화순읍 대리에서 3남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난 나는 우체국 지도 계장을 하시는 아버지 슬하에서 별 어려움 없이 자랐다. 고등학교를 마치고 더 공부 할 생각이 없었던 나는 우체국 기술계에 들어갔다. 1980년에는 그곳에 근무하고 있었는데, 5월 21일 오전10∼11시쫌 광주에서 연결되어 오는 케이블선이 갑자기 끊어져버렸다. 지금은 그렇지 않다고 들었지만 당시에는화순 자체적으로 전화선을 조작할 수 없기 때문에 광주와 연결이 되지 않으면 일을 할 수 없었다. 그래서 우리 직원들은 할 일이 없어 사무실에서 놀고 있었다.
그런데 오후 1시쯤 광주에서 시위대가 넘어왔다는 말이있어 화순경찰서 앞에 나가보았다. 아니나다를까 버스 2대와 군용트럭외에도 여러 종류의 차들이 15대 정도 와 있었다. 시위대는 몽둥이로 차체를 두들기면서 구호나 노래를 불렀다. 그들은 머리에 수건을 두르고 있었으며 사람들에게 이렇게 외쳤다."광주에서 난리가 났으니 젊은 혈기 있는 사람은 모두 차에 타시오" 계엄군들이 광주 시민을 다 죽여버린다고 하면서 젊은사람들은 싸우러 가자고 하는데 나도 젊은 사람으로서 차에 안 탄다는 것도 부끄럽고 한편으로는 분한 생각이 들어 시위 차량에 올라탔다. 그때 우리 직원 3명도 함께 탔는데 나중에 보니 끝까지 남은 사람은 나밖에 없었다. 그들은 나처럼 시위 차량을 타고 무기탈취를 하고 다닌 것이 아니라 금방 차에서 내렸다고 했다.
나는 바퀴가 10개 달린 GMC트럭에 타고 다른 5,6대의 차량과 함께 동면지서로 갔다. 엉겁결에 차에 탔기 때문에 처음에는 차들이 어디를 향해 가는지 몰랐다. 차에 올라가니까 먼저 차에 타고 있던 어떤 사람이 내게 수건 하나를 건네주었다. 20여 명 정도가 광주에서부터 타고 온 것 같았는데 그들 모두가 똑같은 수건을 가지고 있었다. 우리가 1시 40분쯤 화순 동면지서에 도착해 보니 우리보다 먼저 와 있던 시위대들이 무기고에서 무기를 가지고나와 차에 싣고 있었다. 또 어떤 사람들은 LMG 2대를 가지고 나와 내가 탄 차에 하나를 설치해 주었다. 다른 한대는 이미 군용트럭에 설치해 가지고 나왔다. 우리 차에 LMG를 설치해 준 사람들은 군대에 갔다 온 사람들인 것같았다. 나는 군대를 가지 않았기 때문에 그것을 어떻게 설치하는지 몰랐다. 고등학교 교련 시간에 군사 교육받은 것 가지고는 어림도 없었다. 그들은 받침대까지 받혀서 완전하게 설치한 다음 가방처럼 생긴 LMG실탄 상자 두개를 주었다.
그러는 동안 우리들은 무기고로 들어가 카빈이나 Ml 소총 2, 3개씩을 가지고 나왔다. 동면지서에는 차석 정도 되어 보이는 경찰관 외에는 아무도 얼었다. 다른 경찰관들은 광주로 시위진압을 나가서 자리에 없다고 했다. 그런 상황에서 시위대들이 몰려들었으니 막을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동면지서 무기고는 슬라브로 자그마하게 지어져 있었는데 무기가 상당히 많이 있었다. 수류탄이나 다이너마이트는 없었고 대개 총기류와 실탄이 있었다. 우리들은 총 두자루 이상 탄창 30클립씩 가지고 나왔다. 1백여 명 정도의 시내가 동면지서를 거쳐가는 것 같았다. 사평 조금 못 가서 동면 소재지 2백 미터 전방에 동면지서가 있는데, 그곳에서 무기를 접수한 우리는 모두 광주로 달려갔다. 특별히 우리를 지휘하거나 통제하는 사람은 없었다.
시민군이 되어
광주 방림국교에 도착한 우리는 차를 멈추고 각자 내릴 사람은 내리고 시내로 들어갈 사람은 그대로 갔다. 우리가 방림국교 앞에 도착했을 때 헬기 2대가 돌아다니면서 선무방송을 했다. 뭐라고 했는지는 잘 기억나지 않지만 대충 계엄사령관인가 하는 사람이 시민들에게 시위에 가담하지 말고 집으로 돌아가라고 하는 것 같았다. 헬기가 그렇게 돌아다니자 많은 시민군들이 방림 국민학교 안으로 들어가숨기도 하였다.
그러나 헬기에서의 공격은 없었다.헬기가 가고 난 다음에 시민군들은 차를 타고 속속 시내로 나갔다. 나도 트럭을 타고 시내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다 그날 저녁에 방림동에 사는 친구의 집으로 갔다. 친구집에 들어가기 전에 나는 방림국민학교 옆에 있는 환기구멍에다 총을 숨겨놓고 갔다. 마침 친구가 집에 있어서나는 밥을 조금 얻어먹고 친구와 함께 밖으로 나왔다. 그때가 오후 4시쫌 되었을 것이다. 방림국교 앞에서 보니 조선대 뒷산에서 헬기가 떳다 앉았다 하고 있었다. 그 근방을 오가며 여기저기를 돌아다니던 친구와 나는 우연히 금호타이어에 다니는 친구를 만났다. 그 친구는 총을 들고 있었다. 나도 숨겨두었던 총을 찾아서 들고 다니는 중이어서 우리 셋은 무작정 돌아다닐 것이 아니라 한군데서 계엄군이 공격해 을 것에 대비 해 경계 근무를 서자고 했다. 그때는 일반 시민은 물론이고 시민군들도 밖으로 돌아다닐 시간이 밤 8시로 한정된 데다가 방림동 집들은 거의 피난을 가고 얼어서 텅텅 비어 있었다.
우리는 도로가에 있던 어느 가정집으로 들어갔다. 방림다리가 바로 보이는 2층집이었다. 무기는 총 두 자루와 실탄 15발짜리 30클립이 있었다. 대문을 살짝 열어놓고 근무를 서는데 밤에 조선대 뒷산 쪽에서 계속 총소리가 났다. 예광탄도 여러번 쏘고 콩볶는 듯한 총소리가 오래도록 계속되었다. 무슨 일인지는 알 수가 없었다. 그저 계엄군과 시민군 사이에 총격전이 벌어진 것이라고 짐작할 뿐이었다. 새벽 4시경이 되니 헬기가 또 날아다니면서 방송을 하고 다녔다. "시민 여러분, 안정을 뒤 찾으시고 집으로 돌아가십시오"
그러나 시민군들은 헬기를 향해 총을 쏘았다. 날이 밝자 우리는 거리로 나가 시위차를 탔다. 시내 이곳 저곳을 돌아다니는데 시민들은 우리를 위해 주먹밥과 음료수 등을 제공해 주었다. 특히 전남방직 아가씨들이 공장 앞에서 지나가는 시민군에게 차를 끓여 대접하던 모습이 기억에 남는다. 한번은 계엄군이 서방 쪽에 나타났다는 소식을 듣고 급히 그곳으로 달려갔다. 교도소 부근쫌 가니 어떤 사람이 교도소 앞에서 40∼50명 정도가 죽었다고 했다. 이 말을 들은 우리들은 겁이 덜컥 나가던 길을 되돌아서 시내로 돌아와 버렸다. 그날 언제쫌인지는 잘 모르겠는데 방림동 다리에 갔을 때의 일이다. 방림동을 지키고 있던 시민군들이 공수부대로 보이는 젊은이 두 명을 잡았다. 그들은 머리가 짧은 데다가 경상도 사투리를 쓰곤 있었다. 추측하건대 그들은 전날 광주에서 철수한 공수부대 원들로 급히 철수하느라 일부 낙오된 군인들 중 한 사람인 것 같았다.
그러찮아도 광주 시민들 사이에는 경상도 출신 공수부대 원들이 광주 시민을 다 죽이러 왔다는 얘기가 널리 퍼져 있었는데 짧은 머리에 곁상도 사투리까지 쓰는 그들을 공수부대원들이 아니라고 생각하는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고들은 시민군들에 의해 도청으로 넘겨졌다. 그날 저녁부터 나는 꼬박 4일간을 지원동 숭의실고 앞의 어느 사진관 옥상에서 3백20여 명의 시민군과 매일 밤 경계를 섰다. 누가 누군지 전혀 모르는 사람들이었지만 낮에는 마음대로 따로따로 돌아다니다가도 밤에는 언제나 그 정도의 숫자가 그 옥상으로 돌아왔다. 항시 같은 사람들이 돌아온 것은 아니었을 것이다.우리는 매일 밤 자연스럽게 모여 화기애애한 분위기에서 근무를 섰다. 우리들 중 일부는 수류탄을 가지고 있기도 했으나 그 숫자는 얼마 되지 않았다. 대신 15발짜리와 30발짜리 실탄 30클립 정도를 각자 가지고 있었다. 우리들 중에는 30대 후반으로 보이는 아저씨 한 분이 계셨는데 그분이 우리에게 총기를 다를 때의 주의사항을 일러주었다.
특히 우리가 수류탄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에 계엄군의 장갑차가 지나갈 경우 그것을 투척할 위험이 있었으므로 이에 대한 주의를 주었다. 그는 월남전에 참전했던 사람이라고 자기를 소개하면서 막강한 화력을 가진 공수부대와 싸워 이기려면 시민군은 모자라는 총알을 아껴야 한다고 했다. 그리고 군인들이 가진 장갑차는 약간의 수류탄과 총알로는 대항할 수 없다면서 절대로 장갑차에 함부로 공격하지 말라고 했다. 그는 또 우리들이 무절제하게 가지고 있던 수류탄과 실탄을 회수해 수류탄은 마침 옥상에 있던 장독 주정에 담고 실탄은 바닥 한군데에 일정하게 쌓아놓게 했다. 그런 다음 경계근무를 설 때는 총 한 자루에 실탄 1클립식만 가지고 있게 했다. 우리가 그렇게 근무를 서는 동안 도청에서 파견나온 사람들이 각 지역을 순찰하고 다니면서 그때그때 바뀌는 암호를 알려주고 다녔다.
무기를 반납하고
26일 오후 5시경에 도청 상황실에서 무기를 회수한다는 말을 들은 나는 몹시 피곤하기도 하고 집에 갈 생각으로 도청 수위실에다 총을 반납했다. 그런 뒤 나는 친구와 시민군 한 명과 함께 황금동으로 술을 마시러 갔다. 돈이 없어서 시계를 잡히고 술을 한잔씩 나눠 마신 우리는 각자 집으로 돌아갔다. 나는 그들과 헤어져 화순으로 돌아왔다.화순으로 넘어가는 차가 없어서 밤새 걸었다.일단 집으로 돌아온 나는 다음날(27일)부터 곧바로 우체국에 출근하여 정상 근무를 했다. 9일 이후부터는 케이블 복구와 선로공사를 하느라고 상당히 바랐다. 아마 계엄군이 광주를 진압할 때 쏜 총에 맞았는지 전선이 말이 상했던 것 같다.광주 항쟁이 계엄군에게 무력으로 진압된 뒤 사회 전체적인 분위기가 살벌해져 갔다. 광주 항쟁에 참여했던 사람들은 자수하라는 말들이 떠돌았지만 나는 내가 참여했던 사실을 전혀 입밖에 내지 않았기 때문에 못 들은 척하고 지냈다. 아무 일 없이 직장일에만 몰두하고 있던 나는 불행하게도 그해 8월 초순경에 전혀 엉뚱한 일 때문에 경찰서에 연행되고 말았다.하루는 전화국이 쉬는 날이 있어 친구들과 화순 이양 너머에 있는 송도천으로 놀러 갔다.
그런데 거기서 입교에 산다는 어떤 사람들과 패싸움이 벌어져 이양지서에 연행된 것이다.4명이 연관돼 연행될 판인데 한 명은 현장에서 도망쳐 버리고 한 명은 이양지서에서 그냥 풀려나 나와 다른 한 친구만 화순경찰서로 넘겨졌다. 그곳에서 조사를 받는 과정에서 패싸움을 한 사실에 대한 조사가 아니라 5·18에 가담했었는지의 여부를 집중 추궁당했다. 그러다 보니 나와 함께 잡혀간 친구는 혐의가 전혀 없어서 3일 만에 풀려났는데 5·18 당시의 출근카드에 1주일 동안 결근한 것이 드러나 그것을 가지고 끈질기게 심문했다.절대로 그런 사실이 없다고 시치미를 땠지만 그래봤자 내게 돌아오는 건 매타작뿐이었다. 결국 나는 고문에 못견뎌 모든 사실을 불어버렸다. 내가 화순경찰서로 이송되던 날은 화순지역 5 · 18 관련자들이 광주로 넘어간 날이기도 하다. 그들이 떠난 뒤 화순교도소 ,유치장에는 일반 잡범 50명 정도가 수감되어 있었다. 나도 처음에는 그 잡범들과 같은 처지였다가 얼마만에 정치범으로 바뀌어버렸다. 일단 내가 광주항쟁에 참여했다는 것을 인정해 버린 다음부터는 함께 행동한 사람이 누구냐고 다시 추궁을 받아야 했다. 어찌나 혹독하게 때리던지 말을 안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나는 순진하게도 사실대로 말하라고 하길래 처음 화순경찰서 앞에서 시위차량을 탈 때 함께 있었던 우체국 직원에서부터 광주에서 함께 행동했던 친구 두 명까지 다 얘기해 버렸다. 그 바람에 직장 동료들도 조사를 받는 고초를 겪었다. 다행히 그들은 시위차량을 타고 광주까지 넘어가지 않고 금방 내렸다 하여 간단한 조사만 받고 곧 풀려날 수 있었다.
그러나 내 친구들은 21일 동안 나와 함께 현장검증 등을 다니면서 조사를 받았다. 우리가 조사받는 과정에서 방림동 다리 옆의 가정집에서 하룻밤 잔 일이 드러나 경찰들은 우리를 데리고 그 집으로 가서 혹시 잃어버린 물건이 없느냐고 물었다. 우리가 그 집이 비록 빈집이었지만 잠만 자고 나왔지 물건에는 손을 대지 않았다고 했는데도 우리의 말을 믿지 않고 확인하러 간 것이었다. 집주인이 아무것도 잃어버린 물건이 없다고 하여 우리는 간신히 특수강도죄를 면할 수 있었다.나는 무조건 한 일마다 주동으로 몰렸다. 그란 무엇보다도 조사 과정에서 겁이 났던 것은 조서 첫머리에 쓰인 '전두환 때려죽이자'라는 문구였다. 나는 그 말을 그대로 인정하면 꼭 죽는 줄로만 알았기 때문에 조서내용에서 그말만은 빼달라고 조사원들과 오랫동안 씨름을 했다. 그 한줄을 가지고 21일 동안이나 버틴 것을 보면 내가 그 말 한마디를 얼마나 겁냈는지를 알 것이다. 그러나 결국 그 말을 때지 못하고 우리 새 명은 조서에 지장을 찍고 맡았다. 곧이어 우리는 보안대로 넘겨져 다시 심문을 받았다. 우리가 보안대로 넘겨지자마자 간단하게 자술서를 써서 내라고 했다. 그래서 간단하게 자술서를 써냈더니 화순경찰서에서 넘어온 조서와 맞지 않는다고 엄청나게 두들겨 팼다.
결국 밥 먹고 똥산 일까지 다소라고 해서 16절지 14장이나 되는 분량을 앞뒤 빽빽히 채워 써냈다. 그리느라고 우리는 보안대 지하실에서 이틀 동안 잠 한숨을 잘 수 없었다. 공수부대 원 2명이 우리를 감시했는데, 보안대 지하실에는 모기가 상당히 많았다. 군인들은 몸에 바르는 모기약을 발라 모기에 물리지 않았지만 우리에게는 전혀 발라주지 않았다. 모기에 물리면서 이를 동안 열심히 자술서를 썼더니 형사들의 마음에 들었던지 광주 계엄분소로 옮겼다.거기서 친구들은 3개월 만에 풀려났다. 그들은 계엄분소에서 군사재판을 받고 기소중지로 풀려났다. 나는 3년 6개월 실형을 받고 상무대 영창에서 5개월 산 뒤 광주교도소로 옮겨졌다. 교도소로 옮겨진 나는 일반 잡범과 같이 취급되어 그들과 함께 소위 상청교육이라는 것을 하루에 7시간씩 받았다. 두 달 정도를 토끼뜀에 40킬로그램짜리 모래를 나르는 일 등을계속했는데 그것을 견디지 못해 쓰러지는 사람이 많았다.
나는 그때 나이가 군대에 갈 나이였기 때문에 군대에온 셈치고 마음을 편하게 먹었더니 삼청교육을 받는 동안 몸이 나버렸다. 나와 함께 상청교육을 받은 사람들 중에는50 ∼ 60세 정도 되는 사람들도 있었는데, 12월, 1월의 무진장 추운 날씨에서 그런 교육을 받느라고 무척 힘겨워 했다. 실상 그렇게 나이 먹은 사람이 아니라도 그해 겨울에 추운 바닥에다 '원산폭격'을 시키고 '푸쉬업'을 시켜서 손에 동상이 걸린 사람이 많았다. 온갖 기합을 받은 다음에 우리'는 목욕탕으로 가 목욕을 했는데 기껏해야 일인당 물 한 바가지밖에 주지 않았다. 온몸을 진흙밭에서 뒹글고 온 사람들이 그 물로 온몸을 깨끗이 씻는다는 것은 생각도 못 할 일이었다. 얼굴만 씻고 나도 물이 온통 흙탕물이 되어버렸지만 그래도 우리는 그 물에다 온몸을 씻어야 했다.그것뿐 아니라 손수건도 그 물에 빨아서 썼다. 삼청교육을 받기 시작한 첫 달은 7시간씩 훈련을 받았고, 나머지 한 달은 4시간씩 받았다.
그러고 나서야 감방에 배치되어 생활할 수 있었다.나는 2층 12방에 잡범들과 함께 지냈는데, 5 · 18 관련자들은 1층 1방, 2방, 3방에 분산, 수용되어 있었다. 그런데 그곳에 수용되어 있던 화순지역 관련자들이 내가 5 · 18과 관련되어 구속이 되었는데도 불구하고 일반 잡범들과 함께 생활하고 있다는 것을 알고는 나를 1층으로 옮겨달라고 교도관들에게 말했다. 그래서 전방이 되었는데 그 방에는 한상석 씨 등이 있었다.거기서 약 9개월 정도를 살고 나서 나는 1981년 3월 4일에 석방되었다. 이성전 씨 등 화순지역 관련자들은 나보다 한 달 뒤에 석방되었다. 나의 죄명은 계엄법 위반뿐인데 그들은 내란 실행죄가 적용되어 있었던 것이다.
이곳 저곳을 옳겨다니며 직장을 구했으나
석방된 다음에 나는 3, 4일 동안 우체국에 출근을 했다. 우체국에서는 처음에 내가 출근하는 문제로 왈가왈부하지 않았다. 그런데 4일째 되니까 우리 부서 계장님이 나더러 우체국에 나오지 말라고 했다. 공무원법 8조 5항에 형사사건으로 기소된 자는 의원면직된다고 되어 있어서 나는 결국 의원면직되고 말았다.우체국에 근무한 지 일 년 정도 되었기 때문에 퇴직금이 나을 줄 알았는데 그것도 없었다. 내가 감옥생활을 하던 직장에서 쫓겨나 고생을 하는 동안 공무원 신분이었던 아버지는 여러 모로 고초를 많이 겪으셨다. 원래 간이 좋지 않으셨던 아버지는 내 일 때문에 술을 많이 드셔서 더욱 건강이 나빠졌다. 아버지는 술을 안 드셔야 하는데도 자꾸 드시는 바람에결국 간경화증이 치명적인 상태까지 되어서 44세라는 젊은 나이에 돌아가시고 말았다. 그때 나는 포항에서 '부산파이프'라는 회사에 다니고 있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자 식구들을 내가 부양해야만 했다. 그래서 돈을 더 많이 벌 생각으로 포항제철 부두에서 3만∼5만 톤급 선박 하역작업을 했다. 일이 맡을 때는 수입이 50만∼60만원이 되었지만 월급제가 아니고 일당제여서 수입이 일정하지 않았다. 게다가 한 달이면 15일은 노는 경우가 더 많아 일만힘들었지 생각만큼 돈을 벌 수 없었다.
그러는 중에 광양재철이 생겼다는 말을 듣고 광주로 내려와 광양제철에 들어갔다. 내가 하는 일은 쇳물을 녹이는 작업이었다. 그곳에서 2년 정도 근무한 나는 1987년 대통령 선거에 김대중씨가 나온다는 말을 듣고 세상이 조금이라도 변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 화순으로 내려왔다.
복직투쟁을 벌이며
정상용 씨등 등이 선거운동을 하면서 5· 18 광주민중 항쟁동지회를 만들자 거기에 참여했다. 그러고 있자니 교육청에 근무하시는 외삼촌이 화순국민학교에 고용원 자리가 하나 나왔다면서 일하라고 했다. 처음에는 별로 마땅치가 않았지만 전신전화국(구우체국)에 복직을 요청하는 동안 임시로 있을 생각으로 취직을 했다.나는 전신전화국의 복직 탄원서를 체신부장관, 노태우대통령, 김대중 평민당 총재에게 보냈다. 1980년 당시에는 우리가 폭도로 물렸었지만 지금은 민주화운동에 일익을 담당했던 사람으로 정부에서 인정을 했으니까 광주항쟁과 관련하여 해직된 사람들은 당연히 복직시켜 주어야 하지 않느냐는 내용의 탄원서였다.체신부장관은 답신에서 1980년 당시의 우체국이 체신부소관이었지만 지금은 전신전화국으로 바뀌었으니 전신전화국장한테 말하라고 책임을 회피해 버렸다. 청와대로 보낸 탄원서도 마찬가지였다. 관계부서로 가서 일을 해결하라는 것이었다. 그래서 전신전화국으로 가면 거기서는 자기들 마음대로 결정할 일이 아니라고 하면서 발뺌을 했다.
김대중 평민당 총재 앞으로 보낸 탄원서도 응답이 없기는 마찬가지였다. 하도 가타부타 말이 없길래 화순지역 국회의원인 홍모 의원한테 찾아갔더니 자기는 그런 일을 담당하는 분과가 아니기 때문에 잘 모르겠다고 했다.그래서 한번은 체신부장관한테 직접 전화를 했더니 비서가 받아가지 고 인사과장과 연결시켜 주었다. 그 사람한테 나는 이러저러한 사람인데 왜 복직을 안 시켜 주느냐고 했더니 인사과장이라는 사람이 너스레를 떨며 말했다."아이고 고생 많이 하셨습니다. 그런데 이 문제는 광주문제가 정부차원에서 완전히 해결된 다음에야 가능한 일입니다. 한시라도 빨리 이 일이 해결되기를 바랍니다마는 광주문제가 해결되더라도 복직은 어렵고 특별채용 정도로나 될 것 같습니다. "언제 광주문제가 해결될지도 모르는데 원상 그대로 복직되지도 않는다는 말이었다.집안 식구들의 생계를 책임지고 있기 때문에 직장일을 소출히 하면서까지 그 일에 매달릴 수는 없지만 그래도 나는 끝까지 복직투쟁을 벌일 참이다. 나와 같은 가슴 아픈 일을 격은 사람이 어디 한두 사람이겠는가마는 그렇다고 가만히 있을 수는 없지 않겠는가. 우리 화순지역에서 광주항쟁과 관련된 사람들은 누구나 할것없이 어렵게 살고 있다. 경제적으로 가난한 것은 둘째치고라도 구타당한 후유증과 정신적인 고통은 안 당해 본사람은 모를 것이다. 하루빨리 광주항쟁의 진상이 밝혀져 모두가 잘살 수 있는 세상이 왔으면 좋겠다.(조사 · 정리 임금옥) [5.18연구소]
첫댓글 행복한 시간 보내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