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롬1:16 복음의 능력
요즘 분양되는 초고층 아파트들을 보면 인간이 이보다 더 안락하게 살 수 있는 환경이 있을까 싶습니다.
전철을 타보면 대부분의 사람들이 손에 스마트폰을 가지고 영화도 보고 책도 읽고 뉴스도 보고 은행 일까지 봅니다.
몸에 이상이 있다 싶으면 최고의 의료 시설이 완비된 병원에서 호텔 써비스 받는 것처럼 치료받을 수 있습니다.
만일 공부하고 싶으면 이제는 외국 대학에 가서 얼마든지 많은 것을 배울 수 있는 시대입니다.
대형 마트에는 사람들이 필요로 하는 물건들이 넘쳐납니다. 인터넷은 클릭만 하면 가정까지 배달해줍니다.
수십 개의 채널을 갖춘 텔레비전에서는 끊임없이 울리고 웃기는 프로그램들이 잠시도 눈을 돌릴 수 없게 합니다.
쏟아져 나오는 영화나 스포츠 중계는 사람들의 이목을 사로잡고 환상과 희열을 느끼게 해 주고 있습니다.
현대 문명은 인간이 가진 모든 기술과 자원들을 최고로 활용해 사람 살기가 가장 편리한 상태를 만들어 놓았습니다.
돈만 있다면 이보다 인간이 행복을 누릴 수 있는 사회가 없을 정도로 발달해 있습니다.
이런 상황에서 과연 기독교가 현대인들에게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이겠습니까 ?
정말이지 교회가 현대인들에게 무엇을 줄 수 있는지 심각하게 생각해 보아야 할 시대에 살고 있습니다.
2-30년 전까지만 해도 교회가 세상에 많은 것을 줄 수 있었습니다.
선교원을 통해 교육 혜택을 주었고, 아이들과 청소년들의 놀이공간을 제공했었습니다.
청년들에게는 내일을 설계할 수 있는 이성 교제의 장이 되기도 했습니다. 그래서 연애당이라고 까지 불렸습니다.
가난한 사람들에게 돈도 주고 쌀도 주기도 했습니다. 더 뒤로 거슬러 올라가면 독립운동의 산실이기도 했습니다.
학교, 병원, 사회단체를 만들어 사회를 이끌어 나가는 선구자였습니다.
그 때는 사회에 모든 것이 부족했습니다. 지식도 기술적인 인프라도 자본도 성숙한 문화도 없었습니다.
그런데 지금은 교회가 세상에 뭘 줄 수 있을 지 고민을 해 보아야 합니다. 왜냐하면 세상은 더 이상 부족함이 없습니다. 교회가 애써 나서지 않아도 될 만큼 넉넉합니다. 오히려 교회가 더 부족한 모습을 보입니다.
개척교회들은 돈이 없어 쩔쩔맵니다. 큰 교회들은 돈은 넘쳐나는데 사랑과 화목이 없어 씨끌씨글 합니다.
과연 교회가 세상에 무엇을 줄 수 있을까요 ?
이것은 이천년 전 바울이 로마에 이 위대한 복음 서신 로마서를 보낼 때의 상황과 비슷합니다.
이천년 전 로마는 이미 인간들이 도달 할 수 있는 최고의 문명을 만들었습니다.
유럽과 아프리카 북단과 서남아시아 일대를 통일하고 5만 키로 이상의 아스팔트를 건설해 놓은 초강대국이었습니다.
로마는 완벽한 법률과 정치 체제를 만들어 놓고 그 속에서 인간의 자유와 권리를 극대화 시켰습니다.
당시 로마의 수도는 150 만 명이 사는 대도시였습니다. 상하수도 시설을 완벽하게 설비해 놓았습니다.
모든 건축물은 대리석으로 지었고 냉난방 시설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그 당시 1000 명이 함께 들어갈 목욕탕이 있었으며 심지어 3000 명이 들어가는 목욕탕을 짓기도 했습니다.
시내 곳곳에 100여명이 들어갈 수 있는 목욕탕은 헤아릴 수 없이 많았고 웬만한 가정집은 싸우나 시설까지 갖추었습니다.
오늘날 지붕은 없어지고 남아있는 콜로세움은 5만 명이 들어가는 실내 경기장이었습니다.
그곳에서 그들은 검투사들의 경기를 관람했습니다. 오늘날 2종 격투기 경기를 그들은 이미 2000년 전에 즐겼습니다.
영화 벤허에서도 나오는 실외경기장은 15만 명이 동시에 입장 가능한 공설 운동장이었습니다.
거기에서 말 네 필이 끄는 마차 경주는 오늘날의 경마처럼 엄청난 배당금이 걸려있는 사행성 오락이었습니다.
시내 곳곳에 있는 반원형의 극장인 아고라에서는 거의 날마다 연극과 음악이 공연 되었습니다.
로마인들의 일과는 오전 시간만 일했습니다. 오후에는 이렇게 발달한 문화시설에서 여유로운 삶을 즐겼습니다.
그리고 밤에는 파티를 즐깁니다. 사교클럽이 곳곳에 즐비하게 많았습니다.
그렇게 흥청망청 살면서도 그들은 지식과 정보를 습득하는 일에도 게으르지 않았습니다.
시내 곳곳에 토론할 수 포럼이 항상 개설되어 있었고 위대한 철학자들이 가르치는 학원은 문전성시를 이루었습니다.
로마문명은 인간이 이룰 수 있는 최고의 문명이었습니다.
오늘날 미국이 강대국이고 선진국이지만 로마에 비하면 정말 초라할 정도입니다.
모든 세상의 힘과 지혜와 정보와 기술과 문화가 로마로부터 나왔고 또 모든 곳에서 로마로 흘러 들어갔습니다.
로마인들은 부족함이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더 이상의 것이 필요 없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이런 로마인들에게 가난한 복음 전도자인 바울이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이었겠습니까?
바울은 로마인들에게 가장 심각한 것이 빠져 있음을 알았습니다.
다 있었지만 정말 중요한 것이 빠져 있었습니다. 그것은 바로 죄 문제였습니다.
로마의 문명이나 지식과 기술력으로는 절대로 죄를 해결할 수가 없었습니다.
로마인들은 풍족한 가운데 점점 더 깊은 죄에 빠져 들었습니다. 심각한 도덕적 타락이 가중되고 있었습니다.
그들은 소리 없이, 표나지 않게 서서히 파멸의 구렁텅이로 끌려들어가고 있었습니다.
로마인들이나 현대인들이나 변함없이 병들어 있는 것은 바로 죄의 문제입니다.
오늘날 부족함을 못 느끼는 현대인들에게 교회가 줄 수 있는 것이 무엇일까요? 직장을 줄 수 있을까요?
대형 마트나 백화점처럼 필요한 물건을 줄 수도 없습니다. 집 없는 사람에게 집을 줄 수도 없습니다.
교회는 웃음을 주는 곳도 아닙니다. 교회는 재미와 오락을 선사하는 곳도 아닙니다.
지난 1월 21일 서울 왕십리의 아파트에서 일가족을 방화 살해한 사건이 발생했습니다.
범인은 아버지의 꾸중에 앙심을 품은 중학생 아들이 저지른 범죄였습니다.
아버지와 어머니는 물론 11살 여동생과 할머니까지 모두 죽임을 당하고 말았습니다.
같은 날 인천에서는 인터넷 게임에만 열중하는 중학생 아들을 꾸중한 어머니가 아들의 칼에 맞아 죽었습니다.
물질적으로 풍요한 가정들이었으나 가정에 숨어 있던 죄는 가족을 한 순간에 영원히 삼켜 버리고 말았습니다.
이번 주에 대서특필되고 있는 상하이 주재 영사들의 여인을 둘러싼 치정과 섹스 스캔들은 국제적 망신입니다.
그들 주재원들은 우리나라에서 최고의 엘리트 학벌과 엘리트 코스에 있는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많이 배웠고 보장된 인생항로에 있다 할지라도 죄 문제만큼은 해결할 수 없었던 것입니다.
옛날 보다 훨씬 부족함 없는 경제적 형편과 쾌락을 채우고 있지만 마음속에는 진정한 만족이 없는 것입니다.
오히려 더 미워하고 증오하며 싸나와 지고 있는 것이 현대인들의 속사람이고 그것이 이 사회의 현실입니다.
바울은 로마 문명 속에 도사리고 있는 무서운 죄의 실체를 본 것입니다.
로마서는 죄의 문제를 정확하게 진단하고 있습니다. 모든 인간들은 죄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그러나 죄가 정확하게 무엇인지 또 죄가 얼마나 심각하며 얼마나 힘이 있는지는 정확히 모릅니다.
단지 인간들은 다 죄를 가지고 있고 죄는 별로 좋은 것이 아니라는 정도로만 생각하고 있습니다.
사탄은 인간에게 죄는 별로 심각한 것이 아니라는 식으로 자꾸 속여 왔습니다.
특히 문학 작품들이나 영화나 드라마를 보면 오히려 죄를 아름다운 것으로 묘사하고 있는 경우도 많습니다.
죄라는 것은 좋은 것은 아니지만 인간이 살아가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이 있어야 하는 것처럼 설명해 왔습니다.
로마서는 인간의 문제를 들여다 볼 수 있는 최첨단 의료 장비입니다.
가장 정확하게 인간의 죄 문제와 그 죄의 심각성에 대해 설명하고 있습니다.
죄는 시시한 것이 아니고 우리 영혼을 파먹으며 영원한 멸망으로 끌고 가는 무시무시한 세력이라는 것을 증거하고 있습니다.
하잖게 여기는 죄가 얼마나 인생을 불행하게 하며 얼마나 아프게 하며 결국 사망과 파멸을 낳게 하는지 고발합니다.
그러면서 위대한 해결책을 제시합니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의 절대적인 은혜뿐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은 절대적으로 죄를 해결할 수 없는데 하나님께서 대신 해결하셨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하나님께서 가장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것은 의의 조건입니다.
하나님께서는 의의 조건을 충족시키기 위해 어마어마한 몸값을 지불하셨습니다.
하나님은 죄인들을 위해 아들을 내어 놓으셔서 죽게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아들의 죽음은 모든 인간들의 영원한 죄를 다 속하고도 남습니다. 우리는 그것을 믿기만 하면 됩니다.
그런데 믿기만 하는 것이 얼마나 큰 능력으로 나타나는지 죄의 모든 세력을 다 이기고도 남는 은혜가 우리에게 임하게 됩니다.
이 소식이 복음입니다.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마귀의 세력을 부수고 새로운 생명을 찾아주는 능력이 있습니다.
복음은 인간을 죄의 세력에서 해방시키는 위대한 능력입니다. 그래서 로마서를 마귀가 가장 싫어합니다.
복음은 인간을 구원하시는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오직 믿음으로만 죄에서 구원받는 능력이 있습니다.
영혼의 병을 치료하고 정신을 바로 잡고 가정과 사회를 바로 세울 수 있는 능력이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상적인 문명을 건설한 세계 제일 국가인 로마를 향해 당당히 외치고 있습니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로마서는 하나님께서 주신 진리의 보물 덩어리가 가득 들어있는 상자와 같습니다.
만일 우리에게 로마서가 없었다면 하나님께서 주신 가장 위대한 능력을 잃어버리는 것과 같습니다.
바울이 그랬던 것처럼 오늘날도 마찬가지입니다.
이 시대에 교회가 세상에 줄 수 있는 것도 복음입니다. 고리타분하지만 복음만이 능력입니다.
교회는 사람을 바꿀 하나님의 능력이 있습니다. 이것은 어느 대학이나 병원에서도 찾을 수 없는 능력입니다.
오직 하나님의 말씀만이 사람의 죄 문제를 해결할 수 있고 사람을 고쳐 놓을 수 있습니다.
아내를 잃고 자기 몸조차 가누기가 힘든 노인이 있었습니다.
장성한 두 아들이 있음에도 그들은 늙은 아버지를 돌보지 않았습니다.
노인은 튼튼한 나무 궤짝을 구하여 그 안에 유리 조각을 가득 채우고 열쇠 없이는 결코 열수 없는 자물쇠를 채웠습니다.
그날부터 아버지의 침상 밑에 못 보던 궤짝 하나가 놓여 있는 것을 본 아들들은 궁금해 했습니다.
아들들은 그것이 무어냐고 물으면 노인은 별게 아니니 신경 쓰지 말라고 말할 뿐 내용물을 보여 주지 않았습니다.
잠겨 있어서 안에 무엇이 들어 있는지 알 수 없지만 다만 금속들이 부딪치는 소리가 난다는 것뿐이었습니다.
아들들은 아버지가 모아놓은 금은보화라고 생각합니다. 그때부터 아들들이 번갈아가며 아버지를 모셨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노인은 죽었습니다. 장례를 치룬 두 아들은 설레임을 가지고 궤짝을 열었습니다.
그러나 깨진 유리 조각만이 가득 들어 있는 것을 발견한 큰 아들은 “ 당했군!" 말하더니 분을 이기지 못해했습니다.
막내아들은 한참 동안 멍하게 서 있었습니다. 그러더니 눈에 이슬이 주루룩 흘러내립니다.
막내아들은 그 궤짝을 집으로 옮겨왔습니다. 아버지가 남긴 유품 하나만이라도 간직하는 것이 그나마 효도라 생각한 것입니다.
아내는 구질구질한 물건을 왜 집에 들이느냐며 짜증을 냈고 그는 아내와 타협을 합니다.
유리 조각은 버리고 궤짝만 갖고 있기로.. 궤짝을 비우고 나니, 밑바닥에 종이 한 장이 들어 있습니다.
마흔이 넘은 막내아들은 그것을 읽다가 꺼억꺼억 소리 내어 울기 시작합니다. 그 글은 이러하였습니다.
{첫째 아들을 가졌을 때, 나는 기뻐서 울었다. 둘째 아들이 태어나던 날, 나는 좋아서 웃었다.
그때부터 삼십여 년 동안, 수천 번, 아니, 수만 번 그들은 나를 울게 하였고, 또 웃게 하였다.
이제 나는 늙었다. 그리고 그들은 달라졌다. 나를 기뻐서 울게 하지도 않고, 좋아서 웃게 하지도 않는다.
내게 남은 것은 그들에 대한 기억뿐이다. 처음엔 진주 같았던 기억. 중간엔 내 등뼈를 휘게 한 기억.
지금은 사금파리 유리 조각 같은 기억. 아아, 내 아들들만은 이다음에 나 같지 않기를. 그들의 늘그막이 나 같지 않기를..}
왜 이런 일이 비극이 벌어진 것일까요? 바울이 고발한 무서운 죄가 두 아들의 양심을 병들게 했기 때문입니다.
오산에 있는 노인 요양 병원에 제 큰 누님이 근무를 하고 있습니다.
치매와 뇌경색 환자들 40여명이 기저귀 찬 채, 먹고 자고 싸고를 반복하며 죽을 날만 기다리고 있답니다.
젊어서는 잘 나가던 면장님도 계시고 의사도 계시고 선생님도 계시고 사모님 소리 듣던 분들도 다 기저귀차고 계시답니다.
치매 환자 다섯 명은 입에 담기도 힘든 욕설을 하며 잠도 안자고 보호사들을 할퀴고 꼬집는답니다.
지난 설에 들어오신 80 대 할머니 한 분은 아들 집에서 6개월을 계시다 오셨는데 말을 잃어버리셨답니다.
원래부터 벙어리가 아니고 아들 집에 있는 동안 아들의 구타와 배고픔으로 인한 충격으로 실어증에 걸린 것입니다.
그런데 말입니다. 그 아들이 초등학교 교감이라고 합니다. 때리고 굶기는 것을 보다 못한 딸이 입원 시킨 것입니다.
그리고 치매 걸린 할머니 한 분은 매일 같이 눈을 불알이며 소리 지르기를 “ 니놈들은 모른다. 니놈들은 모른다. ”
그 할머니의 자식 중에는 2명의 의사와 공무원을 하는 자식과 캐나다로 이민 간 자식들이 있답니다.
하지만 2년이 다 되도록 의사와 공무원 자식들이 면회 오는 것을 한번 볼 수 없었답니다.
그 할머니가 질너 대는 ‘니놈들은 모른다.’는 소리는 아마도 죄의 권세가 얼마나 무서운지 모른다는 소리일 것입니다.
등뼈가 휘고 뼈가 바스러지도록 자식을 사랑했건만 돌아온 것은 굶주림과 구타였습니다.
자식사랑 하나로 모든 것을 아낌없이 주며 자식들을 성공시켰건만 성공한 자식들은 어머니를 버렸습니다.
그들도 젊은 날 우리들처럼 웃음이 있었고 행복했을 것이고 자식에 대한 기대도 있었을 것입니다.
그러나 결과는 처절한 아픔이 되고 말았습니다. 이렇게 될 줄 그들이 상상이나 했겠습니까 ?
세상은 사람의 바램되로 되지 않습니다. 세상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대로 되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사람은 하나님께 은혜 받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며 살 때에만 영원히 행복할 수 있습니다.
하나님의 사랑의 초청을 거부하는 것은 곧 저주요 죽음입니다.
죄의 권세는 오늘도 사람들의 행복을 깨어진 사금팔이처럼 갈기갈기 찢어 놓고 있습니다.
소리 없이 서서히 우리 인생과 가정과 사회의 목줄을 조여오고 있습니다. 그것이 보이지 않을 뿐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은 보고 싶은 것만 보려하기 때문입니다. 믿고 싶은 것만 믿으려 하기 때문입니다.
‘내가 치매 걸리겠어. 내가 중풍 걸리겠어. 나는 절대로 90세까지 건강하게 살다가 하루 만에 죽을거야
우리 자식들은 절대로 나를 버리지 않을거야 내 자식 만큼은 끝까지 효도 할거야 ‘ 그렇게 생각합니다.
그리고 아무런 두려움 없이 마음껏 자기 욕심만을 채웁니다. 자기의 성공만을 위해서 삽니다.
그리고 다 잘 될 것이라 확신합니다. 이것은 내 생각이 아니라 마귀가 심어놓은 생각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를 받지 않는 누구도 이 죄의 참담한 고통에서 벗어 날 수 없습니다.
예외 없이 하나님의 은혜를 모르는 인생은 죄의 종이 될 수밖에 없고 그 결과는 참담함입니다.
60이 다 되신 제 누님은 매일 같이 그런 노인 환자들을 보면서 두 가지를 생각한답니다.
첫째는 ‘ 나는 이다음에 이 환자들 중에서 어떤 모습일까?’를 생각한답니다.
둘째는 틀림없이 그들 중에 하나가 나의 모습일 것이라 생각하면 사지가 떨릴 정도로 두렵다고 합니다.
예수를 믿는다고 늙지 않거나 병들지 않거나 죽지 않는 것은 아닙니다. 똑같이 고통을 당합니다.
그러나 지금 말씀 드린 이런 고통 보다 더 무서운 고통이 있습니다. 그것은 사후 세계에 있습니다.
이 세상에서 겪는 고통은 죄의 결과가 아니라 과정입니다. 맛보기 일 뿐입니다.
진짜 죄의 결과는 죽음 후에 있다고 성경은 증거 합니다. 그것은 불지옥입니다.
그곳은 구더기도 죽지 않으면서 사람마다 불에 소금 치듯 한답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몸은 죽여도 영혼은 죽일 수 없는 사람을 두려워하지 말고 몸과 영혼을 능히 지옥불에 던지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라
우리가 이 땅에서 겪는 죄의 권세도 이렇게 무서운데 우리 생이 끝난 후에 당하게 되는 고통은 얼마나 무섭겠습니까 ?
죽음을 생각하지 않아도 죽음이 오고, 늙지 않으려 발버둥 쳐도 늙는 것처럼 지옥 가기 싫어도 가야 합니다.
이제 몇 십 년 안 남았습니다. 아니 몇 년 안 남았습니다. 아니 몇 달 안남은 분도 여기 있을 수 있습니다.
죽음에는 순서가 없습니다. 누가 먼저 죽음을 대면해야 하는지 우리는 알 수가 없습니다.
하나님의 베풀어 주시는 은혜를 받지 않고는 우리를 불행하게 하고 파멸하는 죄의 권세에서 벗어날 수 없습니다.
예수는 믿으면 좋고 안 믿어도 할 수 없는 것이 아닙니다. 믿지 않으면 영원히 멸망입니다.
우리 마음에서 잘 안 믿어지면 내게도 믿음을 달라고 하나님께 매어달려야 합니다.
믿음이 자꾸 떨어지려고 하면 떨어지지 않도록 내게도 성령의 역사를 달라고 해야 합니다.
세상이 주는 즐거움에 멍청하게 웃고 울며, 쾌락과 욕정만 마음대로 채우는 것은 결코 성공도 행복도 아닙니다.
우리는 매주일 마다. 매일 매일 하나님의 은혜를 받으며 하나님의 보호와 축복 속에 살아야 합니다.
그리고 언제든지 세상 떠날 때 지옥 불에 들어가지 않고 기필코 천국가야 합니다.
하나님의 사랑은 끝이 없지만 그 사랑 받을 기회는 많지 않습니다.
성령께서 오늘 이 시간 우리에게 믿음의 결단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복음을 믿으십시오. 약한 믿음은 더욱 강하게 하십시오. 거짓된 믿음은 진실한 믿음으로 바꾸십시오.
틀림없이 복음에는 우리를 죄에서 구원하는 하나님의 능력이 있습니다. 참되게 믿으면 됩니다.
우리의 믿음이 참된 믿음이 되기만 하면 복음의 능력이 우리의 삶에 나타날 것입니다.
구원하시는 복음의 능력을 매일 매일 붙드시고 전하면 사십시오. 이 보다 중요한 일은 없습니다.
이보다 더 큰 축복은 없습니다. 그리한다면 복음의 능력이 우리의 삶을 아름답게 만들것입니다. 할렐루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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