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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어떤 적 전차도 1,500미터 밖에서 격파할수 있을 것 2. 같은 거리에서 어떠한 종류의 대전차무기에도 방어될 것 3, 최고시속이 40km에 이를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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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전차에 탑재되기로 한 주포는 개래트 725라는 명칭으로 개발중이었는데 텅스텐 탄심의 포탄을 발사하는 75mm 강선포였습니다.
이때 헨쉘사가 제안한 VK3601(H)는 전면 100mm, 측면/후면 60-80mm에 달하는 두터운 장갑으로 보호됨으로써 당시의 많은 연합국측 대전차병기를 무용지물로 만들 수 있었습니다.
한편, VK3601(H)의 섀시는 VK3001(H)의 것으로부터 발전했지만 전륜이 8개로 늘어나고 대형 로드휠이 장착됐으며 리턴롤러는 폐지된 형태를 하고 있었습니다. VK3601(H)은 중량이 증가한만큼 차체크기도 증가하였는데 기존의 VK3001(H)가 전장 5.81m 전폭 3.61m 전고 1.85m인데 반해 VK3601(H) 는 전장 6.05m 전폭 3.14m 전고 2.7 미터에 달하는등 중전차로서의 가능성을 보여주게 되었습니다.
[티거전차의 원형이 된 전차들.. 티거전차는 초기에는 요새를 격파하기 위한 대요새용 전차로 개발될 예정이였다]
VK3601(H)
VK3601(H)의 주포로는 개라트 725라 불리는 75mm포와 88mm KwK 36 L/56, 그리고 105mm L/20 혹은 105mm L/28 등 4종의 주포를 선택할수 있었지만 포탑 제작의 한계로 인해 개라트 725포를 원했습니다. 하지만 독일의 병기국에서는 사용될 텅스턴 탄심을 제작하는데 필요한 물자가 부족하다는 이유로 이 포의 개발을 중지시켰습니다.
반면 헨셜의 라이벌팀인 포르쉐팀은 Krupp사에서 개발된 강력한 '88mm KwK 36 대공포를 주포로 사용하는 포탑을 기본설계로 하는 새로운 포탑을 완성하게 되지요..
88mm Flak 18
[새로운전차에 탑재된 주포로는 당시 대공포로 설계되었지만 수평사격으로 어느 대전차포보다 막강한 위력을 발휘했던 88밀리 Flak 18'를 개량하여 사용하기로 하였다]
원래 88mm포는 '88mm Flak 18'이라는 대공포로 유명했습니다.
하지만 서부전선이나 북아프리카에서 이 대공포는 종종 대전차포로 사용되었는데, 이 포들은 37mm대전차포가 격파하지 못하는 목표물을 쉽게 관통할 수 있었습니다.
[대공포를 수평사격하여 막강한 대전차포로 사용한 위인은 '사막의 여우' 로 유명한 롬멜장군이였다.이는 영국군이 장비한 마틸다 전차가 78밀리 라는 중장갑으로 독일군이 장비한 50밀리 주포마져 이빨도 통하게 않게 되자 당시 북아프리카 사령관이였던 롬멜장군은 대공포로 사용되던 88밀리 대공포를 수평발사하여 이들 전차를 사냥한데서 유래되었다. 훗날 포로가 된 영국군이 대공포인 88밀리를 포를 대전차로 사용하는것은 비겁하다고 하자 햇던 그의 말 " 그럼 대전차포로 뚫리지 않는 전차를 만든 너희들은 비겁하지 않는가?" 라는 농담은 전설처럼 전해내려오는 재미난 일화이다]
이는 영국군이 장비한 마틸다 전차가 78밀리 라는 중장갑으로 독일군이 장비한 50밀리 주포마져 이빨도 통하게 않게 되자 당시 북아프리카 사령관이였던 롬멜장군은 대공포로 사용되던 88밀리 대공포를 수평발사하여 이들 전차를 사냥한데서 유래되었습니다. (수십킬로 상공의 비행기까지 격추시킬 정도인데 이걸 수평사격하여 전차를 사냥하는건 그야말로 식은죽 먹기) 이 정도 파괴력이라면 동부전선에 느닷없이 나타나 독일군을 혼비백산하게 만들고 있는 소련군의 신형전차들을 격파하는데도 전혀 무리가 없어 보였죠
[수직으로 발사하던 88밀리 대골포를 포각을 낮추어 수평으로 발사하게 한것은 기가막힌 생각의 전환이였다. 최대 10 킬로의 사정거리를 가진 대공포라 수평발사시 어떤 연합군 전차로 2천미터 이상의 거리에서 충분히 격파가 가능할 정도로 이포의 위력은 대단했다]
어쨌든 대공포로 설계된 새로운 전차포인 88mm KwK 36 L/56을 새롭게 개발되는 전차의 주포로
삼기로 원했던 독일육군성은 이 주포를 탑재하기 위한 새로운 차체를 개발하라고 명령하게 됩니
다.
하지만 이 새로운 주포를 장착하기 위해서는 더욱더 큰 대형의 차체가 필요했습니다.
따라서 독일 육군은 '88mm KwK 36' 전차포를 사용한 새로운 전차(VK4501)의 개발을 Henschel사와 Dr. Porsche팀에게 명령하게 됩니다.
곧 이들 새로운 전차개발안은 VK4501 로 명령되게 됩니다.
[포르쉐 박사팀이 개발중이였던 티거전차의 또다른 원형 VK4501(P)의 모습 차체 중앙에 공랭식 디젤엔진을 두어 발전기를 돌리고, 다시 모터를 구동시켜 drive wheel을 회전시키는 electro-mechanical transmission 방식이 적용되었으며, 이로 인해 기존 방식보다 중량이 더 나가게 되었다. 결국 이방식은 복잡한 구동방식으로 최종경합에서 떨어졌다 하지만 이때 만들어진 차체를 이용 페르디란트를 제작하는데 이용되었다]
이때부터 독일육군은 빠른기간안에 훌륭한 차체를 생산하기 위해 두개의 업체를 경쟁시키게 되는데 이는 훗날 티거II 의 개발에도 통용되는 매우 유래가 깊은 개발방법중 하나가 됩니다.
VK4501의 요구사양은 최대 중량 60ton 미만, 600hp 엔진 탑재를 하여 최대 속도 40km/h, 야지 주행속도 25km/h의 기동력, 그리고 당시 Krupp에서 개발중인 88mm포를 탑재 할 것 등이었습니다.
탑재될 포탑은 라인메탈사가 개발중이었습니다.
(라인메탈사는 88mm포 장비형 포탑 이외에도 75mm KwK L/70포를 탑재할 수 있는 또다른 포탑을 목업까지 만들어놓고 제안했지만 모두 기각되고 말았습니다.)
1941년 3월 26일 군수 장비 모임에서 헨셀 사와 포르셰 사는 45톤 정도의 중전차를 1942년 히틀러의 생일인 7월까지 개발 완료하도록 요청 받습니다.
개발시간이 촉박했기 때문에 포르셰는 그들의 VK3001(P) 차량의 업그레이드 차량을 내놓으려 했고, 헨셀은 VK3601(H) 차량을 고쳐 써보려 했습니다.
헨셀은 2량의 원형을 만들었습니다.
VK4501(H) H1은 56구경 88미리 포를, VK4501(H) H2는 70구경 75미리 포를 탑재했습니다.
[VK4501(H) ProtoType]
경사장갑을 도입한 판터와 달리, 이들 설계에는 T-34의 혁신적인 설계는 반영하지 않았습니다. 경사장갑의 잇점대신 두껍고 무거운 수직 장갑의 단점을 되풀이하게 된것이죠.. 아마 촉박했던 개발시간과 무관하지 않은것으로 보입니다.
78mm 중잡갑의 마틸다 2 보병전차. 이 전차의 격파수단은 88mm 대공포의 직사뿐이었다.
무적독일전차군단~ 새로운 소련의 중전차들의 쇼크에 빠지다!!
1941년 6월 22일 독일은 소련 침공인 바르바로사 작전에 나서게 됩니다.
독일군의 어떤 야전 장비도 뛰어넘는 소련 장비에 독일군은 크게 놀란다. 특히 T-34 중형전차와 KV-1 중전차가 그것인데 T-34는 46구경 75미리 PAK 40 대전차포나 88미리 대공포를 빼고 무적이었다.
[만만하게 보고 소련을 침공한 독일군은 소련이 장비한 최신 중전차인 T-34를 상대해보고는 쇼크게 빠지게 된다. 비록 45밀리의 장가을 가진 전차였지만 경사장갑을 이용 100밀급에 달하는 방호력을 가진전차로 3호 전차의 60구경 50미리 포나 50미리 Pak 38 대전차포는 T-34의 측면을 아주 가까이에서야 뚫을 수 있었다]
3호 전차의 60구경 50미리 포나 50미리 Pak 38 대전차포는 T-34의 측면을 아주 가까이에서야 뚫을 수 있었다. KV-1은 88 mm FLAK 18/36 없이 막을 수 없었다.
[KV전차는 당대의 어떤 대전차 무기로 이를 격파하는건 불가능할 정도로 중장갑을 자랑했다.하지만 이로인해 기동성은 많이 저하되는 문제점이 있었지만 보병전차로 활용되었기 때문에 큰 문제는 없었다. 가장 큰 문제는 잦은 가속기의 문제로 KV 전찰의 대부분은 적 전차로부터 피격이 아닌 차체 고장으로 유기되는 경우가 많았다 ]
T-34의 등장은 독일군의 전차개발자들에게 있어 큰 쇼크였다. 헨셀 사의 설계자 에르빈 아데어스는 "독일 지상군의 어떤 장비보다 좋다는 게 드러나자 말할 수 없는 충격을 받았다"라고 했다. 그는 새롭게 개발중인 중전차를 즉시 45톤으로 늘리고 88미리 포 장비를 명했다. 첫 원형 차량은 히틀러의 생일, 1942년 4월 20일까지 완성토록 했다.
[T-34이 장비한 76밀리 F34 주포는 매우 갈력해서 당시 티거를 제외하고 독일의 어떤 전차도 격파가 가능했다 물론 티거도 근거리에서 측면을 맞을경우 관통되는 수도 있을 만큼 T-34는 위력적인 주포를 가지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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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르셰, 헨셀 양 사는 원형 차량을 내놓고 히틀러가 지켜보는 가운데 독수리요새라 불리던 라스테부르크에서 경쟁했습니다.
대체로 헨셀 안이 두루 앞섰는데, 포르셰 안은 골치 아픈 가솔린-전기 동력장치, 전략 물자인 구리의 지나친 사용 탓이 컸습니다.
결국 헨셜의 VK4501(H) H1 타입이 최종 후보로 낙찰되어 티거(Tiger - Panzerkampfwagen VI Ausführung E) 이라는 명칭을 획득하면서 양산되기에 이릅니다
[새로운 중전차의 정식명칭은 6호전차 H형(Panzerkampfwagen VI Ausführung H, 열대용 필터 장착)였으나, 곧 6호전차 E형(Panzerkampfwagen VI Ausführung E)으로 변경된다.]
6호전차는 1942년 8월에 본격적인 생산에 들어가게 됩니다.
한편 포르셰팀은 승인을 기대하고, 100량의 차체를 미리 만들었는데 계약을 따지 못한 이들 섀시는, 신형 중구축전차를 만드는데 전용되게 됩니다. 1943년 봄 91개의 차체가 개조돼, Tiger(P) 구축전차, 또는 페르디난트로도 알려지고, 뒤에 엘레판트로 알려지게 된 구축전차에 쓰이게 됩니다
[경쟁에서 밀린 포르셰 티거. 차체는 페르디란드 중구축전차로 거듭난다.]
하지만 실전배치시기에도 티거는 본질적으로 아직 시험제작차량 수준이어서, 크고 작은 개량이 생산기간 동안 이어지게됩니다. 주로 더 낮고 안전한 큐폴라를 장비한, 다시 설계한 포탑이 가장 주요한 변화이며 또한 비용을 낮추고자 수중 도하 장치와 외부 공기여과시스템이 생략되고 휠 역시 변화가 이루어져 훗날 전기/중기/후기 로 나뉘는 구분점이 됩니다.
[티거 첫 생산 차량. 양산 선행 차량 V1]
초기형 티거
신형전차 티거는 1942년 8월 시작, 1944년 8월까지 총 1,355량이 제작되게 됩니다.. 이는 매월 25량으로 시작, 1944년 4월 104량으로 가장 많았습니다. 전투력은 1944년 7월 1일이 671량으로 최고이며 일반적으로, 4호 전차보다 생산시간이 2배정도 소요되었습니다.
[티거 생산 라인. 티거의 생산 비용은 3호 돌격포의 4배에 달했다.]
티거의 성능
[새로운 6호전차는 당시의 어떤 전차와도 1:1 상태에서 지지 않을정도로 우수한 성능을 가진 전차였다]
티거는 당대 최고의 전차를 목표로 개발된 전차였습니다. 그를 위해 대공포로 사용되던 우수한 성능의 88밀리 포를 주포로 삼았으며 이는 2,000미터 이상 거리에서 미국 셔먼이나 영국의 처칠4호 전차를 때려잡을 수 있었습니다. 여기에는 특히 독일의 우수한 광학조준장치도 한몫을 했는데 칼짜이츠 렌즈로 구성된 조준경은 우수한 성능을 발휘해 일격필살 이라는 장점을 두루 나타내주었는데.. 5발을 발사하면 4발 이상이 모두 목표물에 명중할 정도로 우수한 조준성능을 보여주었으며 심지어 시속 24킬로로 주행하던 티거가 발사한 포탄이 적전차에 명중할정도로 당대 어떤 전차의 조준장비보다 우수했던 조준장비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티거는 강력한 88밀리 주포를 장착하기 위해 대형의 차체를 가졌고 그에 맞추어 장갑도 강력했다. 하지만 그에 맞추다 보니 무게 57톤이나 나가는 괴물같은 전차가 되엇으며 이를 운행하기 위해서는 막대한 연료소비와 엔진의 무리가 항상 뒤따라야했다]
반대로 우수하기로 정평이 난 소련 T-34의 76.2미리 포는 어떤 거리에서도 티거의 앞면을 뚫을 수 없었지만, 옆면은 500미터 이내에서 BR-350P APCR 탄으로는 관통이 가능했습니다. (후기형인 T-34-85의 85미리포는 대략 1,000미터 거리에서 티거의 측면을 관통할 수 있었다. IS-2 중전차의 122미리 포는 1,000미터 이상에서 티거의 앞면을 부술 수 있었다.)
[쿠르스크의 티거 중전차]
이는 정면장갑 100밀리 라는 어마어마한 장갑에 기인한것으로, 공격각도 30도부터 셔먼의 75mm포는 어떤 거리에서도 티거 앞면을 격파 불가능했으며 100미터로 근접해야 80미리의 차체 옆면을 꿰뚫을 수 있었습니다.
셔먼 파이어플라이가 장비한 영국제 17파운드 포는 보통의 APCBC탄을 쏘면, 1,000미터 이상에서 티거의 정면을 뚫을 수 있었으나 이 포는 탄도변화가 심해 명중률이 극히 떨어진다는 문제점이 있었습니다. 한편 신형셔먼의 76미리 포는 APCBC M62탄으로, 500미터 정도에서 티거의 앞 부분을 관통가능했고, 1,000미터 이상에선 차체 상부 구조물을 뚫을 수 있었다. HVAP 탄은, 늘 공급 부족이고 주로 구축 전차에 지급된 탄으로, 1,500미터 거리에서 전방 관통이 가능했습니다.
실질적으로 1:1 상황으로 맞붙는다면 티거는 연합군의 어떤 전차보다 월등했으며 우월했습니다.
하지만 실제로는 상황이 좀 달랐는데 앞에 언급된 장거리 관통은 실전에서 잘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특히 서부전선의 경우 전력의 분산 위험과 인력의 오류 가능성 증대를 우려, 1킬로 이상 장거리 전투가 드물었으며 이런 우려는, 포의 능력과 무관하게, 전투 거리가 길수록 클 수 밖에 없었다.
예를 들어, 17 파운드 포는 실험에서 티거의 전방장갑을 1000미터에서 관통이 가능했지만, 실전에선, 묘기나 다름 없는 장거리 사격이 가능한 좋은 위치를 찾기가 거의 불가능했습니다. (그전에 우수한 티거의 승무원들에 의해 발각 처리되기 일쑤였다)
[파이어플라이가 장비한 영국제 17파운드 포는 보통의 APCBC탄을 쏘면, 1,000미터 이상에서 티거의 정면을 뚫을 수 있었으나 이 포는 탄도변화가 심해 명중률이 극히 떨어진다는 문제점이 있었다. 어찌되었던 티거전차를 원거리에서 격파할수 있는 전차가 있다는 소문이 돌자 독일군은 포신이 긴 셔먼전차는 보는즉시 우선 격파하라는 명령이 떨어졌고 이를 막기위해 연합군은 위장을 하던지 포신 부분에 백색 페인트를 칧 포신을 짧게 보이게 하려는 노력등 각고의 노력을 하기에 이른다]
하지만 실전에서는 더 가까이서 싸우기 마련이라, 관통 가능한 장갑은 늘어났습니다( HEAT탄은 예외지만, 대전 중 사용이 드물었다 )
티거 주포의 큰 관통력은, 적 전차가 맞설 수 없는 먼거리에서 많은 적 전차를 깨뜨릴 수 있었습니다. 티거는 주로 탁 트인 곳에서 적의 전차를 원거리 타격격파하는 전술을 즐겨썼고 연합군 전차는 매복하거나 집단 공격으로 거리를 좁히는 방법으로 티거의 측면을 노려야 했습니다.
하지만 그전에 입는 피해는 실로 막심했지요..티거 전차 한대를 침묵시키는데는 평균 연합군 전차 5대정도를 희생해야했으며 심지어 어떤 전투에서는 티거전차 한대를 처리하기 위해 연합군 전차 8대를 희생했어야 되었다는 기록도 있을 정도로 티거는 연합군에 있어 공포의 대상이였습니다.
심지어 연합군의 아이젠하워 사령관은 ‘만일 티거를 만난다면 도망쳐도 좋다’ 라는 공식적인 명령을 내리기까지 할 정도로 티거는 독일전차의 우수성을 알려주는 절대무적의 대명사로 통하는 전차였습니다.
[쿠르스크에서 T-34의 76.2 미리포에 관통 당한 티거의 포탑 측면 막강한 장갑을 자랑하는 티거전차 역시 측면공격은 약할 수밖에 없었으며 연합군 전차들은 팀웍을 이루어 4:1 혹은 3:1 식으로 티거의 측면을 노려 격파하는 전술을 이용하기 시작했다.]
티거의 최초의 전투
티거는 1942년 9월 레닌그라드 근처 전투에 투입되어 첫 실전을 겪게 됩니다. 히틀러가 볶아대서, 예정보다 몇달 일찍 전투에 나섰는데, 초기 모델은 기계 고장이 잦았습니다. 3대의 초기형 티거가 투입된것으로 알려진 이 전투에서 1942년 9월 23일 첫 전투에서 티거 1대가 고장으로 주저 앉았습니다. 나머지는 엄폐호의 대전차포에 나가 떨어졌다. 1량은 꽤 멀쩡한 채 노획되어, 소련군이 살펴보고 대응책을 찾게 됩니다. (이게 그 유명한 100번 차량 이다)
[최초로 레닌그라드 방면에 투입된 티거 ..아직 준비가 안되었지만 히틀러의 독촉으로 502 중전차대대(sPz.Abt.502)로 1942년 8월 레닌그라드 방면에 4대를 투입했다.4대 모두 기관고장으로 제대로 활약하지는 못했지만 다행히 관통된 전차는 없었고 이중 1대가 소련군에 나포되어 연구하는데 이용하게 된다]
북아프리카 전투 에서 화려하게 데뷔하다!
한편 다른 티거는 북 아프리카 전선에도 투입되었는데 넓게 탁 트인 지형에서 티거는 그장점을 확실하게 살려 적 전차대를 마음대로 유린했습니다.
[이후 문제점을 해결한 티거는 크루스크 전투에 150여대가 투입되어 소련의 최신 전차 t-34-76형을 상대로 맹활약을 펼치게 된다]
영국군이 장비한 셔먼이나 처칠& 크롬웰 전차 심지어 87밀리의 강력한 강철장갑으로 악명이 자자했던 마틸다II 전차 역시 티거를 만나면 바로 불타올라 고철로 변하기 일쑤였습니다.
[북아프리카 전선에서서도 티거의 활약은 대단했는데 당시 이에 맞설 전차가 없었다 영국군및 미군등 연합군은 공식적으로 티거를 만나면 도망쳐도 좋다는 아이젠아워 당시 총 사령관의 허락을 받기에 이른다]
특히 엄페물이 거의 없고 확트인 시야를 가진 아프리카 사막에서의 전투는 거의 티거의 독무대나 다름이 없었습니다.
그러나 초기형 티거의 문제점이였던 잦은 기계고장으로 일부만 싸울수 있었으며. 레닌그라드처럼, 최소 1량이 영국의 6파운드 대전차 견인포에 격파되기도 했습니다. (이 차량은 노획되어 보빙턴박물관에 전시되기도 하였다. 얼마전에 북원되었으며 현재는 유일하게 가동이 가능한 티거전차 이다)
[아프리카 튀니지에서 노획된 영국 보빙턴 전차박물관의 Tiger- 1 현재 유일하게 가동되는 진짜 티기전차이다]
동부전선에서의 전투
전망이 트인 러시아 초원에서 티거의 장거리 격파 능력이 특히 빛을 발했습니다. 북아프리카 전선과 마찬가지로 러시아 초원에서 역시 우수한 주포성능과 조준장비 그리고 우수한 기량을 가진 전차승무원들에 위해 거의10:1 수준의 일방적인 전투를 벌이기도 했습니다.
독소전 초기 독일군이 T-34 전차나 KV전차에 갖었던 공포를 티거 전차를 통해 소련군 역시 가졌으나 소련군은 이내 이 전차의 단점을 파악 4:1 혹은 3:1 식의 팀전술과 티거전차를 격파할수 있는 대구경 화포를 가진 SU-122 같은 구축전차를 전문 킬러전차를 개발함으로서 티거에 대한 공포를 어느정도 해결할 수 있었습니다.
[152mm Howitzer-gun M1937 (ML-20)를 장착한 구축전차는 KV전차의 차체를 이용한 SU-152와 IS 전차를 이용한 ISU-152로 구분되는데 두 전차다 장갑은 뛰어났으나 엄청나게 느리고 거의 좌우 회전이 어려어 매복 공격하는 방어적 전술을 주로 썼다. 특히 포탄과 장약이 분리되어 장착되는 152mm Howitzer-gun M1937 (ML-20) 포의 특성산 분당 3~4발 (실제로는 분당 2발도 쏘기 힘들었다)밖에 발사할수 없었고 그나마 대전차용으로 개발된 포도 아니여서 탄속이 느리고 거의 곡선을 그리며 발사되어 한번에 명중시키기가 여간어려운게 아니였다고.. 다만 구경이 구경이니만큼 일단 맞기만 하면 어떤 전차로 한방에 보내는건 가능했다고 한다]
1943년 초여름 쿠르스크 대평원 전투에서 투입된 티거는 특유의 장거리 공격능력을 발휘 소련군의 전차들을 학살하는 전과를 올리지만 이에 못지 않게 단점도 많이 발견되기도 했습니다.
차례차례 발견되는 단점들…
티거는 강력한 88밀리 주포와 100밀리에 달하는 엄청난 중장갑으로 무적의 전차로 불리기도 했지만 실제 운용결과 장점 만큼 단점도 많은 전차임이 발견되었습니다.
일단 티거는 56톤이나 나가는 전차로서 엄청나게 무거워, 아무 다리나 건널수 없었으며 지나다가 지하실이 무너질 우려가 있었습니다.
56톤에 달하는 차체를 견딜 다리는 유럽에서도 많치 않았지만 개천이나 강이 많은 동부전선에서는 더더욱 없었지요.. 그래서 초기형의 경우 도하기능을 집어넣기도 했지만 안그래도 생산단가가 높고 생산시기가 오래걸리는 티거에 있어 이런 도하기능은 더 큰 문제점을 불어일으켰습니다. 결국 초기형의 경우 최대 4미터까지 도하기능이 있었지만 후기형으로 가면 2미터에만 가능하도록 간략화 되었습니다.
유압식 포탑이 느리게 회전하는 것도 문제였습니다. 포탑은 인력으로 돌릴 수도 있었지만, 각도 보정이 아니라면 드물었습니다.
티거 초기형의 속도는 평탄하고 길사정이 좋은지형에서 최고 시속 45킬로미터 정도였습니다. 하지만 이런 속도는 과열하면 엔진이 불타기 쉬워 훈련에서 엄격하게 금지됐습니다.
3,000 rpm에서 발생하는 마이바흐 엔진 초기형의 신뢰성 문제로, 2,600 rpm을 넘기지 못하게 주의를 받았습니다. 이 이상이 넘으면 엔진의 화재가 발생하거나 엔진이 서는 문제가 있었기 때문이죠 기술자들은 이 문제를 풀고자, 마이바흐 HL230 엔진을 2,600 rpm으로 제한하는 조속기(속도 조절기, governor )를 달아 최고 시속 38 킬로미터 정도로 억제했습니다.
또한 티거의 경우 무게 때문에 고장시 이를 견인할 수 있는 견인전차가 없었는데 급한대로 같은 티거로 이를 견인할 수는 있었지만 이럴 경우 엔진의 부하가와 견인하려는 티거까지 고장나는 경우가 많아 공식적으로는 티거를 티거로 견인하는 것은 엄격하게 금지되었습니다. (안그래도 부족한 전차를 두대나 잃는 문제를 예방하기 위함이였다)
티거를 견인하기 위해서는 독일군의 최대의 트럭이였던 18톤 트럭 3대가 필요했습니다.
티거는 중형 전차보다 느렸지만, T-34나 셔먼의 거의 두 배에 달하는 무게에서 그 정도 속도는 그런대로 괜찮았은 편이였습니다.
정작 문제는 티거는 전쟁기간 내내 신뢰성 문제에 시달렸습니다. 티거 부대는 안그래도 무거운 자체에 잦은 전투로 인한 고장으로 전투력 저하가 잦았습니다. 고장으로 전차를 잃지 않고 티거 부대가 행군을 끝내기 힘들었지요 행동 반경도 짧았습니다. 궤도가 매우 넓어서, T-34를 뺀 웬만한 소형 전차보다 접지압이 낮았지만, 이로인해 안그래도 무거운 전차가 기름소비가 엄청났습니다.
특히 50톤이 넘는 무게에 600마력급의 엔진출력은 너무나 작은것이라 엔진이 뻗거나 불타는 일이 흔했으며 변속기의 잦은 고장이나 심지어 독특한 형태의 여러 개의 휠을 겹친 오버랩 방식의 현가장치 구조로 인해 흙이나 눈이 끼어 얼면 작동하지 않는 (심지어 흙과 얼음이 얼어붙어 부피가 증가되어 궤도를 고장내기 일쑤였다) 문제점도 발견되었습니다.
특히 티거는 평소에는 폭 725밀리의 광폭 궤도를 장착하였는데 이것은 당시 철도수송차와는 넓이면에서 맞지 않아 열차로 수송할때는 별도의 폭이 좁은 520밀리의 궤도로 갈아끼웠어야했고 이는 별도의 장비없이 인력으로 행해져 전차승무원들이 가장 싫어하는 일중 하나였습니다.
[티거는 특유의 오버랩 방식의 현가장치를 이용하엿기 때문에 독일의 철도에는 규격이상으로 사용할수 없었는데 티거의 캐터필러는 725mm에 달하는 광폭이었으므로, 이것을 실을 경우 화차보다 폭이 넓어지게 되었고, 따라서 520mm짜리 수송용 캐터필러가 별도로 필요했다. 이때는 또 바깥쪽의 로드휠 8개(한쪽 4개씩)를 떼어내야 하는 어려움이 있었다. 이것을 떼어내고 장착하는 일은 일일히 손으로 해야했기 때문에 승무원들이 가장 싫어하는 일중 하나였다]
가장 큰 문제는 역시 엄청난 생산단가와 제작기간으로 티거의 경우 대전내내 셔먼전차 5만대 이상 T-34의 경우 5만8천대 이상이 생산되었지만 티거는 겨우 1,355대만이 생산될 수 있었고 비용 역시 3호 돌격포의 4배 4호전차의 2배의 비용이 들었습니다. 아무리 성능이 우수하다고 하나 숫적 우세를 무시할수 없는 전쟁무기의 법칙상 이는 큰 문제가 아닐수 없었습니다.
[티거전차는 전통적인 토션바방식과 오버랩 방식의 현가장치를 이용하였는데 이것은 바퀴를 여러개 겹쳐 전차의 하중을 지탱하는것으로 57톤이 넘는 티거의 경우 당시 기술로는 적합한 방식이였으나 이로인해 차체의 무게가 무거워지고 제작단가나 방법도 복잡해지는 이유가 되었다]
실제로 전장터에서 티거가 아무리 강력한 전차라 하나 생산부터 종전시까지 단 한번도 순수 티거전차만으로 완편된 편제로 전투를 행한적은 없었으며 보통 3/4호 전차와 혼합편성 그것도 3~8대 정도가 고작일 정도로 드문드문 있는 편이였으며 이는 결국 양으로 밀어부치는 연합군의 전차세력앞에 이겨내지 못하고 패전하는 이유가 되었습니다.
또한 엄청난 연료소비도 문제였는데 무게 50톤의 전차를 그것도 600마력급의 엔진으로 구동하기 위해서는 엄청난 연료를 먹어댈 수 밖에 없었습니다. 거기에 당시에 독일에는 높은출력을 낼수 있는 디젤엔진을 개발할 능력이 없었기 때문에 순수 가솔린 엔진에 의해 구동되는 티거는 그야말로 기름먹는 하마!! 풀로 연료를 채웠다 하더라도 항속거리는 195km! 실제로 길상태가 안좋은 경우는 고작 100킬로 남짓 이동할 수 있었으며 대부분의 티거는 적의 전차에 의한 피격보다는 연료가 고갈되어 버려지고 아군에 의해 자폭되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티거를 정면에서 맞설 전차는 연합군에 거의 없었다. 물론 대전 후반에는 이를 맞설 전차들이 등장하기도 하였지만 대부분 티거들은 연합군의 공중지원에 의한 피해가 막심했다]
맹수와 같았던 티거전차의 활약상
[자라 보고 놀란 가슴 솥뚜껑만 봐도... 유사한 외모 덕 좀 봤다는 4호 전차 H형]
비록 티거 전차는 완벽한 전차는 아니였지만 당대의 최고의 성능을 가진 전차임에는 틀림이 없었습니다. 특히 우수한 기량을 가진 독일의 전차승무원들에 의해 조종되었을때는 가히 무적의 전차라 불리워도 충분할 정도로 우수한 성능과 전과를 보여주었는데 이중 티거의 대표적인 에이스인
미하일 비트만 (Michael Wittmann) 이나 오토 카리우스 같은 전차장들은 티거전차로 100여대가 넘는 적의 전차를 고철로 만든것으로 유명합니다.
전설의 호랑이 사냥꾼!! 미하일비트만 (Michael Wittmann)
1914년 4월 22일 ~ 1944년 8월 8일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무장친위대 소속 군인. 가장 많이 적 전차를 격파했던 전차병 중 한 명이자, 전설적인 티거 에이스로 유명하다.
[미하일 비트만 중위는 티거를 이용 혁혁한 전과를 올린 티거에이스로 연합군이 프랑스 노르망디에 상륙한뒤 비트만의 2중대가 전장에 도착한 다음날인 1944년 6월 13일, 비트만은 숙영지 바로 옆에 있는 작은 마을인 빌레르-보카즈(Viller-Vocage)에서 6호 전차 티거I 한 대로 영국 7기갑사단의 선봉 전차부대에 괴멸적인 타격을 주어 그 이력의 클라이막스를 장식했다.그는 티거 한대로 적진에 침투해 무려 25대의 각종 전차와 장갑차를 때려부수었다]
최종 계급은 SS대위로, 그가 격파한 전차 수는 138대이고 대전차포는 132문이었다. 독일군 전차 에이스 순위에서는 5위[1]지만, 대전차포와 합계를 내면 1위. 사실 전차보다 대전차포가 더욱 상대하기 까다로운 적이기 때문에, 그런 대전차포를 130문이나 때려잡았다는 점에서 2차 세계대전 최고의 전차 에이스로 간주하는 견해도 있다.[2]
[히틀러로 부터 백엽검기사철십자훈장을 수여받는 모습]
본격적인 활약은 독소전쟁 중인 1941년 7월 우만 포위전에서 LSSAH사단 소속으로 당시 탑승차였던 3호 돌격포 A형으로 6대의 T-26 경전차를 격파한 것이 시작이다. 이후 1942년 초까지 돌격포를 타고 싸우다가 부상으로 후송, 완쾌 후 사관후보생 과정을 거쳐 42년 겨울에 3호 전차 전차장으로 전선에 돌아왔다. 이후 사단에 티거 중전차소대가 배치되면서 소대장으로 선발, 43년 2월의 제3차 하르코프 공방전에서 티거 에이스로서의 활약을 시작했다. 티거 소대는 곧 중대로 확대, 제1SS전차연대 13중대로 명명되어 쿠르스크 전투를 시작으로 일련의 활약을 거듭했으며, 비트만은 13중대 3소대장으로서 43년 중반~44년 초반을 보냈다. 특히 44년 1월의 체르카시 포위전에서 비트만은 단 3주 만에 50대에 달하는 적 전차를 격파, 100대 격파를 돌파하는 기염을 토했다. 이때의 공적으로 44년 2월에 중위가 되었다.
[그가 보카빌레주에서 홀로 25대의 적 전차와 장갑차를 때려부셨다는 그의 전차의 위장을 재현한 레플리카의 모습]
원래 13중대는 1943년 10월에 제101SS중전차대대로 개편이 예정[3] 되어 있었으나, 급박한 전황 때문에 제대로 개편이 이뤄지지 못했다. 그러다가 체르카시 포위전이 끝난 후 독일로 이동, 본격적으로 대대 재편성을 받았다. 이때 비트만은 2중대장 임무를 맡았다. 그리고 1944년 4월부터 6월까지 프랑스에 머물렀고 결국 노르망디 상륙작전이 시작되면서 전장으로 이동했다.
[포신에 새겨진 100대가 넘는 화려한 전과들 미하일 비트만 대위에게는 4명의 다른 승무원들이 있엇으며 그들의 환상적인 호홉으로 수퍼에이스로 등극할수 있었다 공교롭게도 그들은 같은날 모두 전사하게 된다]
비트만의 2중대가 전장에 도착한 다음날인 1944년 6월 13일, 비트만은 숙영지 바로 옆에 있는 작은 마을인 빌레르-보카즈(Viller-Vocage)에서 6호 전차 티거I 한 대로 영국 7기갑사단의 선봉 전차부대에 괴멸적인 타격을 주어 그 이력의 클라이막스를 장식했다.[4] 빌레르-보카즈 전투에서의 눈부신 활약에 아돌프 히틀러는 직접 그를 관저로 불러 공적을 치하하고 백엽검기사철십자훈장을 수여하였다. 또한, 이 공적으로 대위로 승진하게 된다.
[그의 탑승차량중 하나인 205번 차량 비트만과 그의 부하들은 하나늬 티거전차에만 탑승한것이 아닌 최소 3대이상의 각기 다른 티거 차량이 목격되고 있다]
이후 대대는 계속 전투에 참여했으나 비트만은 특별히 추가 전과를 올리지 못했고 대대의 전력은 계속해서 감소했다. 그러다가 1944년 8월 8일, 대대 지휘전차인 007호에 탑승하고 캉 남쪽 Saint-Aignan-de-Cramesnil 부근에서 캐나다 제4기갑사단과 교전을 벌이면서 최후의 전과인 전차 3대 격파를 기록하지만, 그 직후 적의 공격을 받고 비트만을 포함한 탑승자 전원이 전사하였다.
[영웅의 최후.. 호랑이도 밀물같이 달려드는 적의 전차 앞에서는 불멸할수 없었나 보다. 피격후 유폭으로 차체와 포탑이 날아간 그의 전차로 그의 최후가 얼마차 처참했는지 잘 보여주는 사진이다]
그에게 일격을 가한 것이 누구냐는 데에는 지금까지도 여러 가지의 설이 분분하다. 캐나다군 파이어플라이 전차의 협공설, 영국군의 공격기 호커 타이푼의 지상공격 로켓 피탄설 등이 있으나, 현재는 파이어플라이의 공격에 의한 피탄, 전사설이 정설로 받아들여지고 있다. 또한 이 전투의 전개 당시 비트만은 부상을 입고 후송된 대대장 대신 대대장 대리 임무를 수행하고 있었는데, 이 전투의 경과를 두고 전차장으로서는 유능했으나 중대장으로서나 대대장으로서는 그다지 유능하지 못했다고 평가하는 사람도 있다.
[그가 최후에 탑승했던 차량으로 알려진 007번 차량의 모습]
어쨌든 전사한 비트만과 동료들의 유해는 전사한 곳 근처에 가매장되었으나 전후 그 소재를 파악하지 못해 이장하지 못했고, 1983년에 프랑스 연구자 에릭 르페브르와 그의 동료들에게 발견되어 라 캉브의 독일군 전몰자 묘지로 이장되었다.
[영웅의 묘.. 전사한 비트만과 동료들의 유해는 전사한 곳 근처에 가매장되었으나 전후 그 소재를 파악하지 못해 이장하지 못했고, 1983년에 프랑스 연구자 에릭 르페브르와 그의 동료들에게 발견되어 라 캉브의 독일군 전몰자 묘지로 이장되었다.]
이 사람 뿐이 아니라, 나치 독일의 수많은 에이스들은 대부분이 씁쓸한 최후를 맞이하여, 아랫것들이 X빠지게 고생해서 엄청난 업적을 이뤄봐야 윗대가리가 멍청하면 말짱 황이라는 만고의 진리를 몸으로 증명하고 있다.
---- [1] SS만으로는 1위이다. [2] 하지만 육군이 아닌 SS소속이었던 이유로 오토 카리우스와는 달리 현재 독일육군의 기록으로 인정되지 않는다고 한다. [3] 당시 SS는 기갑군단 직할 독립중전차대대를 편성하기 위해 각 사단의 중전차중대를 차출해서 대대로 확대 개편할 예정이었다. [4] 이 전투에서 27대의 전차를 격파했다.
출처 엔하키미러 http://mirror.enha.kr/wiki/%EB%AF%B8%ED%95%98%EC%9D%BC%20%EB%B9%84%ED%8A%B8%EB%A7%8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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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지만 용맹한 호랑이!! 오토 카리우스 (Otto Carius)
1922년 5월 27일~[1]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 육군의 전차 에이스. 150~200대의 적 전차를 격파하며 맹활약했다.
쯔바이브르켄 출생. 군인을 동경하여 1940년 젊은 나이(18세)로 자원입대하게 된다. 왜소한 체격과 그로 인한 저체중으로 인해 입대가 2번 거부되지만, 근성(?)끝에 육군에 들어가게 된다. 의외로 병과지망을 대전차로 골랐는데 TO가 비질 않아 일단 보병이 되었다.
[작전회의 중인 오토카리우스 중위의 모습 그는 그리 잘 생긴것도 그렇다고 기골이 장대한 타입도 아니지만 한치의 오차도 인정하지 않는 철저함과 일단 전투에 들어서면 무모하리만큼 용맹성이 대단했던 인물로 기억되고 있다]
하지만 동기들에 비하면 나이도 적고 체격이 왜소해 큰 스트레스를 받은 듯 하다. 오죽하면 사내답게 보이기 위해 수염을 기르려 했는데 솜털이 보송보송하게 나서 더 큰 좌절에 빠진적도 있다. 설상가상으로 행군간 기관총을 짊어지고 가다가 동료의 부축을 받아 복귀하는등 보병으로서는 그리 어울리는 사람이 아니었다. 결국 중대장이 기갑부대로의 전출을 희망하는 지원자를 모집할때 참가하게 된다. 그런데 재미있는 사실은 카리우스 옹의 아버지(이 분도 현역 군인)가 아들이 기갑병과에 들어가는걸 극력 반대했다는 것이다. 아마 효성이 지극한 사람이었다면 전설은 나타나지 않았을지도.....
[위의 사진은 유명한 타미야 킷으로 제품화되어있다 Item #35202번
전차병 훈련을 거친후 제20기갑사단 제21기갑연대에 배속되어 소련 침공에 참전한다.
사단 특성상 체코제 38(t) 전차[2]에 탑승(탄약수)했으며, 숱한 역경과 위기상황, 기본적으로 떨어지는 전차의 성능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실력과 팀워크로 혁혁한 전과를 달성, 1941년 8월에는 간부 후보로 추천받기에 이른다.
이후 본국으로 돌아와 장교훈련을 받은 오토 카리우스는 1942년 봄, 다시 21기갑연대에 원대 복귀하여 한동안은 전차의 부족으로 제설작업에 투입되었다가 새로이 보충차량이 들어오며 자기의 소대를 책임지게 되었다. 하지만 소대장으로서의 첫 임무에서 각 전차의 조종수와 탄약수들이 식사추진을 나간사이에 소련군이 공격을 해오자 공황상태에 빠져 달아났다.(....) 이로 인해 체면을 크게 구기고 본부 중대의 공병소대장으로 잠시 활동하였다. 그러다가 우연하게 온 기회[3]를 잡아 때마침 신형 중전차로 맹위를 떨치고 있던 티거 중대의 소대장으로 부임하게 되니…. 날개달린 호랑이이자 전설의 시작이었다.
[오토 카리우스가 소속된 부대는 제502중전차대대(그 중 제2중대의 소대장)로써, 1942년 겨울 레닌그라드 방면에서 최초로 티거를 실전에 운용한 부대이기도 했다.]
오토 카리우스가 소속된 부대는 제502중전차대대(그 중 제2중대의 소대장)로써, 1942년 겨울 레닌그라드 방면에서 최초로 티거를 실전에 운용한 부대이기도 했다. 오토 카리우스에 대한 부대원들의 첫 반응은, 그들의 티거에 대한 인상 만큼이나 좋지 않았는데[4], 한마디로 "이렇게 허약하게 생긴 새퀴가 대장노릇하며 제대로 싸울 수 있겠어?"였다. 그러나 이후 먼치킨급 실력을 과시하며 모두를 순식간에 닥버로우하게 만든다.(…) 그런데 502 중전차대대 2중대의 경우 중대장들이 너무 자주 바뀌거나 혹은 지휘력에 문제가 있어 카리우스가 한동안 중대장 대리로 사실상 지휘를 책임졌다.[5]
[오토카리우스는 보기에는 왜소해 보여도 일단 전투에 들어가면 어떤 전차장보다 용맹했는데 가장 유명한 전투로는 나르바 방어전과 "오토 카리우스판 빌레르-보카쥬 활극"이라 일컬어지는 마르나파 전투가 있다. 이 전투에서 카리우스는 단 8대의 티거로 선발대인 소련전차 22대를(JS-2 17대, T34/85 5대) 격파하고, 적 여단장의 시신에서 기동계획이 표시된 지도를 노획하고는 후속하던 본대 28대의 적전차를 매복으로 섬멸, 소련군 일개 전차여단을 쓸어버렸다. 이 전과로 오토 카리우스는 백엽 기사검 철십자훈장을 수여받게 된다 자칫 무모해 보이기도 하는 그의 행동은 그의 명성을 천하에 알리는 전설과 같은 일화가 되었다]
제502중전차대대가 주로 동부전선의 북부에서 활동했기 때문에 발트 3국에서의 지연전에서 활약을 펼쳤는데, 가장 유명한 전투로는 나르바 방어전과 "오토 카리우스판 빌레르-보카쥬 활극"이라 일컬어지는 마르나파 전투가 있다. 이 전투에서 카리우스는 단 8대의 티거로 선발대인 소련전차 22대를(JS-2 17대, T34/85 5대) 격파하고, 적 여단장의 시신에서 기동계획이 표시된 지도를 노획하고는 후속하던 본대 28대의 적전차를 매복으로 섬멸, 소련군 일개 전차여단을 쓸어버렸다. 이 전과로 오토 카리우스는 백엽 기사검 철십자훈장을 수여받게 된다.
1943년,휘하 하사와 함께 IL-2를 티거로 잡으신 전적도 있으시다고 한다. [6]
1944년 우크라이나에서는 단 두대의 티거로 30분만에 근거리 난타전으로 소련군의 IS-2로 구성된 1개 중전차연대를 30분만에 전멸시킨 괴수짓을 벌였다. 그리고 그들의 피해는 헤드라이트 하나...(이런 괴물.. 뭐 두 티거의 전차장들이 둘다 100기 이상의 전차격파대수를 자랑하는 괴물들이었다지만 이건 너무하잖아!!!)
[오토카리우스는 티거만 탄게 아니다..1944년 7월 말, 전선 정찰임무를 수행하던 중 매복한 적의 공격에 의해 모터사이클이 피격되면서 부상을 입고 후방으로 후송되었으며, 두달 뒤에는 신형 구축전차 야크트 티거를 운용하는 제512중구축전차대대 소속 중대장으로 부임하여 서부전선의 미영군을 상대로 한 방어전을 전개하게 된다. 비교적 날렵하고 기동성이 좋았던 티거에 익숙했던 오토 카리우스는 느리고 육중한 야크트티거를 매우 싫어했으며, 특히 고정식 전투실(포탑)의 전투력 한계와 엄청난 무게에서 오는 변속기와 서스펜션의 고장빈도에 대해서는 신랄한 비판을 아끼지 않았다.]
1944년 7월 말, 전선 정찰임무를 수행하던 중 매복한 적의 공격에 의해 모터사이클이 피격되면서 부상을 입고 후방으로 후송되었으며, 두달 뒤에는 신형 구축전차 야크트 티거를 운용하는 제512중구축전차대대 소속 중대장으로 부임하여 서부전선의 미영군을 상대로 한 방어전을 전개하게 된다. 비교적 날렵하고 기동성이 좋았던 티거에 익숙했던 오토 카리우스는 느리고 육중한 야크트티거를 매우 싫어했으며, 특히 고정식 전투실(포탑)의 전투력 한계와 엄청난 무게에서 오는 변속기와 서스펜션의 고장빈도에 대해서는 신랄한 비판을 아끼지 않았다.
[오토카리우스가 탔었던 야크르티거도 타미야에서 제품화 되어 있다 Item No:35307 German Heavy Tank Destroyer Jagdtiger Mid Production Commander Otto Carius 가 바로 그것이다]
1945년 4월 15일에 미군에게 항복하였고, 이로써 2차 세계대전에서 그의 역할은 끝났다. 전쟁 기간동안 약 150대의 연합군 전차를 격파한 것으로 알려졌으며, 이것은 당시 독일군 전차 에이스들 전체에서 2위[7]였다. 주로 티거-1에 의해 달성된 전과였다.
전쟁이 끝난 시점에서도 비교적 젊었던 그는 약사자격증을 취득하여 약국을 차렸다. 전장에서 자신과 함께했던 전차를 기리는 뜻에서 '호랑이 약국'이라는 이름을 붙였고, 90세가 넘는 고령의 나이인 지금도 계속 운영하고 있다고 한다.[8]
[오토카리우스 영감의 최근 모습 독일에서 그가 한때 탔던 타이거의 이름을 딴 호랑이 약국에 약사로 일하고 있는 그의 모습 오토카리우스는 비교적 이른 나이에 전쟁에 참여했었고 종전시에도 불과 그의 나이 25세였기 때문에 형기를 마치고 약사공부에 도전하여 약사로 일했다고 한다]
전쟁 회고록으로 "진흙탕 속의 호랑이"가 있으며 일본의 유명감독 미야자키 하야오가 이 책을 바탕으로 동명의 만화를 그리기도 했다.
참고로 지금까지도 자신이 티거에 탑승했다는 사실에 매우 큰 자부심을 느끼고 있으며, 1992년에 있었던 어느 기자와의 인터뷰에선 "현대 독일연방군의 레오파르트 전차는 승무원에 대한 배려가 티거보다 떨어진다"며 까기도 했다. (…) [9]
[미아쟈카 하야오 감독과 오토카리우스의 노후의 모습]
이거 내가 현역때 타던거여.
---- [1] 2010년 사망했다는 미확인 보도가 있었으나, 아직 살아계신다. [2] 2차 대전 초기 10개 사단 중 3개 사단(6, 7, 8기갑사단)에 이어서, 1940년 후반에서 41년 사이에 추가 창설한 4개 기갑사단(12, 19, 20, 22기갑사단)은 독일의 전차공급능력 문제로 체코제 전차로 무장했다. 다른 사단들도 기갑사단의 확대개편 과정에서 전차 정수를 절반까지 줄였다. [3] 진짜 우연한 기회다. 어쩌다보니 잠시 파데보른의 장교클럽 관리관역할을 맡게 되었는데, 마침 중대원들과 종종 술자리를 열던 502 중전차 대대 2중대장과 의기투합(...)해서 합류했다. [4] 티거가 처음 보급되었을 때, 독일 전차병들 대부분의 반응은 "고놈 참 딥다리 못생겼다"였다고 한다. (…) [5] 다른 소대장들은 부사관이었다. 본래 독일군은 간부 부족으로 부사관 또는 준사관이 소대장을 맡는 경우가 많은 편이었다. [6] 소련기가 언제나 같은 시간, 같은 고도, 같은 방향에서 매일 날아오자 '포만 잘쏘면 맞출수 있겠는대?' 라고 생각하고 매복하여 실제로 격추(...). 전차포로 대공 사격을 해서 실제 격추기록을 새운 매우드문 사례다. [7] 공인격파기록 150+@. 1위는 쿠르트 크니스펠 상사로 공인격파기록 168+@지만, 비공인 격파기록을 포함하면 카리우스가 200대까지 계산할 수 있어서 순위가 바뀔 수도 있다. [8] 호랑이 약국 홈페이지 : 外http://www.tiger-apotheke.de 현재 파트타임 근무라고 [9] 심지어 회고록의 한 챕터 제목은 "티거 찬양" 이며, 전차의 공격력과 장갑, 기동성의 밸런스가 티거에서 가장 이상적으로 드러났다고 쓰셨다!
출처 엔하키미러 http://mirror.enha.kr/wiki/%EB%AF%B8%ED%95%98%EC%9D%BC%20%EB%B9%84%ED%8A%B8%EB%A7%8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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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O1 의 ACE!! 쿠르트 크니스펠 (Kurt Knispel)
쿠르트 크니스펠[1921년 9월 20일 -1945년 4월 28일]은 구 독일 육군의 최대 전과를 올린 전차 격파 왕이다.
전차 격파의 탑 에이스들이 많은 독일 육군에서도 최고의기록이지만 실제는 이보다 더 많을 것이라는 것이 전우들의 회고다.
[쿠르트 크니스펠 의 모습 그는 앞서 소개한 비트만 중위나 오토 카리우스 중위에 비하면 별로 알려져 있지 않은 에이스지만 그의 전과를 알면 앞서 이야기한 에이스들은 애들에 불과하다는게 최근의 정설이다] ----------------------------
이 독일 기갑의 본좌는 비트만 중위나 오토 카리우스 중위에 비하면 별로 알려져 있지 않다.
독일 전차 격파의 탑 에이스들이 주로 장교들이지만 그는 다른 에이스인 바르크만과 같은 부사관 출신이었다.
[쿠르트 크니스펠 의 전차장 시절의 모습 이 독일 기갑의 본좌는 비트만 중위나 오토 카리우스 중위에 비하면 별로 알려져 있지 않다.
독일 전차 격파의 탑 에이스들이 주로 장교들이지만 그는 다른 에이스인 바르크만과 같은 부사관 출신이었다. ]
--------------------- 그에 관한 전기가 있지만 당사자를 면담하거나 구술을 받지 않고 쓴 것이라 모호하고 과장된 것이 많다.
생존한 오토 카리우스 중위가 쓴 ‘진흙탕 속의 타이거’라는 자전적 전투 기록과 너무 느낌이 다른 책이다.
[독일에서 최근 발간된 그의 전기 이는 당사자를 면담하거나 구술을 받지 않고 쓴 것이라 모호하고 과장된 것이 많아 논란이 많은 책중 하나이다]
그의 적 전차 격파 기록은 소련 전차들을 상대로 수립된 것이다. 그가 공인 받은 적 전차 격파 기록은 무려 168량이나 된다. 볼수록 경탄스런 전과이다.
이렇게 대량의 적 전차를 격파하기 위해서 전차 몇 량이 맞붙는 소규모 전차전은 말 할 것도 없고 쿠르스크 전차전처럼 시야가 훤히 트인 평원에서 몇 십 몇 백량의 전차가 얽히고 설켜 서로 치고 받는 난전식전차전도 여러 번 겪었다는 이야기인데 매번 살아남았다는 것이 기적같이 만 생각이 된다.
적의 후미를 물고 사격하는 공중전과 달리 전차전은 적 전차를 정면에서 공격하는 것으로서, 어느 순간에 자신이 조준하고 있는 전차에 되려 반격 당할 수도 있는 위험성이 있다.
[ 쿠르트 크니스펠의 얼리적 모습 앞줄 오른쪽이 그이다. 그는 독일 태생이 아니다. 체코 변경에서 태어난 독일계 주민이었다. ]
---------------------------- 그가 그런 전차전에서 적 전차를 168량이나 격파한 것은 검객처럼 상대방에게 자기 살을 베게 내주고 적의 뼈를 베는 필사의 대전차 전차 전법을 썼다는 이야기다
쿠르트는 독일 태생이 아니다. 체코 변경에서 태어난 독일계 주민이었다.
독일과 체코의 국경선 일대 수데텐란드는 독일인들이 거주해서 그러나 히틀러가 체코를 독일로 합병하자 독일 국민이 되었다.
그는 어린 시절 자동차 공장에서 앞으로 훌륭한 기계공이 될 꿈을 가진 도제(徒弟)생활을 하며 기술을 연마하다가 1940년 독일 군에 입대했다.
그는 기갑병과로 전입되어 독일의 여러 전차를 거쳐 4호전차로 전차병 마지막 단계 교육을 받아 이수한 것은 1941년 6월 11일 이었다.
[쿠르트 크니스펠이 탑승했었던 차량으로 알려진 티거 차량 그는 4호전차부터 티거2ㅇ 이르기 까지 다양한 전차를 모두 탑승했었다] -------------------------
히틀러가 소련을 침공했던 바르바로사 작전부터 그는 전차의 포수로 참전했다
쿠르트는 독소 전쟁의 여러 전선을 전전했다. 야르제프에서 전투의 첫 맛을 본 그는 스타린그라드 전역(戰域)과 레닌그라드 , 그리고 코카서스 전선에서 실전을 겪으며 경험을 쌓았다.
1943년 1월말, 그는 푸트로스의 기갑 학교에서 타이거 전차를 처음으로 접하게 되었다.
그때 그는 이미 적 전차 12량을 파괴한 경험 많은 전차장이 되어 있을 때였다. 그와 막강 타이거 전차와의 결합은 미래 탑 에이스의 출현을 가능케 했다. 신형 전차의 교육을 마치고 신편한 타이거 부대는 다시 동부전선으로 급파되었다. 그의 부대는 유명한 쿠르스크 전선에서 치열한 전투를 치뤘다.
[후반에는 드디어 퀴니어스 타이거라 불리는 타이거II에도 탑승했다. 히틀러가 소련을 침공했던 바르바로사 작전부터 그는 전차의 포수로 참전했다
쿠르트는 독소 전쟁의 여러 전선을 전전했다. 야르제프에서 전투의 첫 맛을 본 그는 스타린그라드 전역(戰域)과 레닌그라드 , 그리고 코카서스 전선에서 실전을 겪으며 경험을 쌓았다. 1943년 1월말, 그는 푸트로스의 기갑 학교에서 타이거 전차를 처음으로 접하게 되었다. 동부 전선에서 몇몇 주요 전투에 참여했던 그의 부대는 다시 본국으로 소환되어 타이거 2 전차로 재장비했다.]
동부 전선에서 몇몇 주요 전투에 참여했던 그의 부대는 다시 본국으로 소환되어 타이거 2 전차로 재장비했다.
그의 부대는 노르만디 상륙작전으로 내륙으로 깊숙이 치고 들어오는 미 영 연합군을 막도록 급파되었다.
그는 노르만디에서 독일군을 따라 퇴각하면서 카엔에서 연합군과 큰 전차전을 했다.
그러나 대 소련 전쟁의 사정이 다급해지자 쿠르트의 부대는 다시 동부 전선으로 이동했다.
이곳에서도 독일은 소련에게 밀리기만하는 참담한 실정이었다.
이런 암담한 전황에서 독일 기갑부대는 강철 같은 단결심을 발휘하며 악착같이 거대한 소련의 군사력에 저항했다.
쿠르트는 밀려오는 적과 수없는 격전을 했다. 메조투르, 토로크젠트미크로스, 세그레드, 케크스케메트 그리고 그란 교두보 전투는 물론 기우라, 니트라, 바브 케슬등의 전투다.
[쿠르트 크니스펠의 티이거2를 탑승했던 시절의 모습으로 죽기 얼마전의 사진이다. 그의 부대는 노르만디 상륙작전으로 내륙으로 깊숙이 치고 들어오는 미 영 연합군을 막도록 급파되었다. 그는 노르만디에서 독일군을 따라 퇴각하면서 카엔에서 연합군과 큰 전차전을 했다. 그러나 대 소련 전쟁의 사정이 다급해지자 쿠르트의 부대는 다시 동부 전선으로 이동했다. 이곳에서도 독일은 소련에게 밀리기만하는 참담한 실정이었다. 이런 암담한 전황에서 독일 기갑부대는 강철 같은 단결심을 발휘하며 악착같이 거대한 소련의 군사력에 저항했다. 쿠르트는 밀려오는 적과 수없는 격전을 했다. 메조투르, 토로크젠트미크로스, 세그레드, 케크스케메트 그리고 그란 교두보 전투는 물론 기우라, 니트라, 바브 케슬등의 전투다.]
----------------------- 세계 현대 전차전에서 이정도의 격심하고 다수의 전투를 경험했던 전차 부대도, 전차장도 없었다.
위의 한 전투에서 쿠르트는 단숨에 적 전차 24량을 격파해서독일 군부를 놀라게 하였다.
수많은 전투에서 전차 168량을 격파한 이 경이의 투사에게도 종말은 찾아왔다.
그는 1945년 4월 28일,우스티츠에서 전사했다. 전쟁이 끝나기 단 열흘전이었다.
[쿠르트 크니스펠의 최후 그는 공식적으로 168대를 격파햇지만 실제로는 그보다 훨씬 많다는게 정설이다. 어떤 전투에서는 쿠르트는 단숨에 적 전차 24량을 격파해서독일 군부를 놀라게 하였다.] -------------------------
여기서 독일 격파왕인 그의 전과를 살펴보자는 것이 아니다. 그는 공식 적 격파 전차가 168량이지만 비공식적으로는 195량까지 도달 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주위 평가다.
쿠르트는 경탄할만큼 겸손했다.
[쿠르크의 모습 그는 공식 적 격파 전차가 168량이지만 비공식적으로는 195량까지 도달 할 수 있다는 것이 그의 주위 평가다.
쿠르트는 경탄할만큼 겸손했다. 실제로 그가 격파한 차량을 따지면 200대가 넘을것이라는게 주변에 함께 싸웠던 그의 동료들의 말이다 그는 전과를 챙기는 법도 동료보다 앞서 전과를 말하는 일도 없었다. 그저 묵묵히 자기할일에만 충실했다고 한다]
누구든 같은 부대 동료 전차장이 쿠르트가 격파한 적전차를 “그것은 내가 격파했어!“하고 주장하면 쿠르트는 아무 항의도 안하고
“자네 말이 맞겠지.”하고 선선히 전과를 양보했다는 것이다. 쿠르트 전차의 승무원들이 불평을 해도 그는 웃으며 그들을 달랬다고 했다.
사실 전차전은 공중전과 달라서 어느 특정 적전차가 어떤 아군 전차의 포에 격파 당했는지 판단하기가 무척 혼란스러운 경우가 다반사다.
이 전과 다툼이 부대의 결속과 사기를 훼손할 수도 있었다.
말한 대로 전차전은 자신의 살을 적이 베이게 하고 적의 뼈를 베는 죽기 아니면 죽이기의 사력을 다한 전투의 결과이다.
그러나 그런 전과를 동료에게 선선히 내주는 것은 자기 목숨도 공짜로 내 줄 수도 있다는 극한의 대범함이다.
사실 전투중의 전과 다툼은 어느 나라건 육해공군 어느 분야건 공통 된 것으로 때로는 추태로 까지 발달할 수가 있다.
역사적으로 최대로 유명했던 전과 다툼은 1943년 남태평양 부인 상공에서 일본 연합함대 사령관 야마모토 이소로쿠[山本 五十六]를 격추했던 P-38 조종사 사이에 있었다.
야마모토를 격추했다는 공식 인증을 받은 렉스 바버 중위에게 토마스 램파이어 대위가 이의를 걸고 넘어지면서 논쟁이 격렬하게 벌어져서 그날 출격한 전우는 물론 참전 조종사들을 부끄럽게 만들었었다.
전과 다툼이 사실 병가지상사[兵家之常事]로서 오히려 당연함에도 쿠르트는 그의 대범한 양보심이 그의 비범한 전과에 앞서 병사들의 귀감이 된다.
국방부 블로그 울프 독 기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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독일 전차 격파 에이스의 기록
이름 격파 수 부대
Kurt Knispel 168 s.Pz.Abt. 503
Walter Schroif 161 s.SS-Pz.Abt. 102
Otto Carius 150+ s.Pz.Abt. 502
Johannes (Hans) Bolter 139+ s.Pz.Abt. 502
Michael Wittmann 138 s.SS-Pz.Abt. 101
Uscha Oberhaber 127 s.SS-Pz.Abt. 102
Paul Egger 113 s.SS-Pz.Abt. 102
Arno Giesen 111 8./SS-Pz.Rgt. 2
Heinz Rondorf 106 s.Pz.Abt. 503
Heinz Gartner 103 s.Pz.Abt. 503
Wilhelm Knauth 101+ s.Pz.Abt. 505
Albert Kerscher 100+ s.Pz.Abt. 502
Balthazar (Bobby) Woll 100+ s.SS-Pz.Abt. 101
Karl Mobius 100+ s.SS-Pz.Abt.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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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이새벽에 이런수고를 하시다니 대단하십니다 감사히 보고갑니다
이런 귀한자료를~~수고 많으셨습니다..티거 도장이나 웨더링에 참고하겠습니다.
이번 리뷰도 정말 좋네요..^^ 많은 공부가 되었습니다. 티거가 연합군의 공포의 대상이였군요.
오토 카이우스가 타미야 티거킷을 들고 있는 모습은 아군적군여부를 떠나 말로 표현할수 없는 감회를 느끼네요..ㅎㅎ
킬수가..100이 넘는 에이스들이....14명...역시 전설의 전차였군요~! 잘 보고 갑니다!
당시 1:1 로는 거의 무적이였죠.. 적의 탄은 다 튕겨내고 내가 쏜 탄은 모두 관통하니..
흥미진진합니다. 잘봤습니다. ^^
티거는 파면 팔수록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가득하지요~~
이번 리뷰 진짜 재미있습니다.
늘 정성있는 리뷰 잘 봤습니다. 언제한번 오토영감님 뵈러 가야되는데;;
늦었지만 정말 재미있게 읽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