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찬미예수님
나의신앙심은 참으로 설명할수가 없고 신비스럽기만 하다는 생각이 든다
지난 1990년대초에 서울에서 천주교친교모임 동아리에 가입했다. 예수회 마리아회 성바오로회
신부님 수사님 수녀님을 주축으로 청년들의 친목모임이었다
일년에 한두쳬 피정도 갖고 소식지도 내고 그랬었는데요
그때 어느분의 소개로 청년성서모임이 생견나것입니다
그래서 저도 모임에 참석하기도 하고 봉사도 하였지요
그러던 어느날인가 봉사자파견을 해달라는 부탁을 받고 가게 되었습니다
쌍문동 성당이었지요 청년회봉사자들인것 같았지요
저는 그당시 시흥동에 살았기 떄문에 지하철을 타고 가면 한시간이상 걸렸지요
그때에는 열정감도 있고 해서 상당히 열심히 준비해갔는데
안오는 사람들도 있고 잘 준비해오지않았던 것 같았지요
그래서 저는 시작했으니까 아무런 사고없이 끝나기만을 간절히 원했지요
모임을 한 사람들중에는 수련회를 마쳐야만 그들이 다시 봉사자가 될수가 있었는데
그들중에 한분이 수련회에 참석하게 되어서 참으로 다행이라 여기고 종결되었지요
그리고 몇년이 흘러서 그 성당에서 청년회단체총회를 한다고 해서 초청을 받았지요
저는 아무런 생각도 없이 그곳을 참석하고 축하도 해주고 돌아왔는데
그곳에서 아주 이상한 애기를 들었지요
그들은 자기네들이 정착도 하기이전에 어디에서 낫선사람이 와서
그들에게 복음을 전했다면서 아주 전설적인 인물이라고 알려졌다는 것이다.
그당시만 하더라도 저는 겨울 해냈구나 하는 마음뿐이었는데 말입니다
그때에 느꼈습니다. 하느님은 내가 아무리 부족하도 여기더라도 분명히 쓰시고자하시면
쓰여진다는 것을 말입니다
저는 한때에 혜화동에 매주 나갔지요 그곳에서 창세기를 시작하고 틀출기와 마르코도 하고
창세기는 그룹봉사도 하고 더 나아가는 직장인모임도 준비하면서 창세기그룹봉사도 했기에
여러사람들로부터 칭찬을 많이 받았지요 청년센터에서 하는 봉사자들의피정이나 재교육에도
빠짐없이 참석하였지요 그리고 친목모임인 하늘나라도 참석했고요
지나고 나면 그때에는 아주 힘들었지만 저의 신앙적인 성정에는 아주 미미했다는 것이었지요
청년성서모임에서 마르코를 할때에 대부분은 20대후반인 여성들이었지요
그들은 오랫동안 성서모임에서 봉사를 했던 사람들이었지요 거의 결혼적령기였지요
그러나 끝에 거의 끝내지 못하고 흐지브지해서 그랬는데요
저는 너무 아까운것이었지요 보통은 그룹모임을 6개월하고 그이후 수련회를 거쳐야만
그과정이 종료가 되는데 그룹모임에서는 늘 묵상노트를 찰고지형태로 정리해서
청년센터에서 담당수녀님에게 검사를 맡아야만 수련회참가가 가능했는데요
사실 이런일은 그룹봉사자가 해야되는일인데요 그당시 팀이 해체되면서 봉사자도 떠나가서
희안하게도 신청을 봉사자가 아닌 제자신이 직접들고 가서 했었지요
저는 이미 봉사도 하고 있어서 그당시 지도수녀님이나 신부님과는 친한 사이여서
노트검사에 통과되어서 수련회에 참석할수가 있었지요
그 덕분에 대치동성당에서 저보다 한참 선배뻘되는 그룹원을 두게되고
그들중에서 수련회를 마칠수있는 사람이 생겨서 만남의 잔치를 목동에서 교구장이신
김수환추기경앞에서 폐지를 받고 촛불을 가지고 그분앞에서 파견선서를 했었지요
이는오로지 저의 힘이 아니라 함꼐한이들의 열정으로 그래되었음을 두고두고 생각이 납니다
지금은 대치동으로 가는 지하철이 있었지만 그당시에는 없었기에
2호선으로 지하철을 타고 가다가 삼성역인가 그곳에서 내려서 버스로 갈아타고 갔던 기억이
납니다.
신앙생활에서 봉사라는 것을 통해서야만 자신의 시앙이 성장한다는 것을 느꼈습니다
일년에 두번하는 봉사자재교육이 있습니다.대학로 동성고등학교별관에 있는 청소년수련관
대강당에서 토요일 일요일 주말 오후에 합니다. 지도신부님이 나오셔서 정리도 해주시는데요
실제적으로 도움이 되는 것은 선배들이 경헌들이었지요
그분들과 함꼐 그룹작업도 하고 떄로는 의종부한마음수려장에서 같이 수련회를 통해 공동작업과
발표회도 가져서 친목을 다 한층 다졌던것이 생각납니다
저는 별로 다른 활동을 하지않았지만 그곳의 많은 이들은 학교에서나 지역에서 대표봉사역할을
하던 사람들었지요 그들은 경력은 저보다 훨씬 높았지만 나이는 저보다 8~10살 아래였지요
지금으로 좀 안타까운것은 그안에서 안주했던 것 같았지요
조금 더 노력해서 30대까지 확장했으면 했던 생각이 들지만 본당에서도 30대의 청년들을 만나기가
어려웠지요 저는 본당에서 주일미사를 두번 참례했었지요 어른들과 함께 하기위해서 교중미사와
청년들과 친교를 위해서 저녁 청년미사를 드리고 그들과 함꼐 가까운음식범에 가서 이야기하면서
친교를 나누었지요 그덕분에 가장 많은 영향을 받은것은 성령기도회였던 것입니다
아주 열성적으로 참가하는 청년부부를 만났던 것이 저에게 가장 소중한 시기였지요
그 청년의 아버지도 제가 청소년사목위원일떄 노인분과원으로 매달 회의때 만날수가 있어서
집에도 가고 도움도 많이 받았지요
경제적으로 어려웠던 시기인 금융대란직후 직장에서 쫓겨나고 집에 아무것도 갖다주지 못했을떄에
저는 본당에서 하는 철야기도에 참석하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성당이 집에서 버스로 3정거장이기때문에 새벽3~4시에 끝나더라도 집에 가는데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지요.
지금까지 제가신앙안에 머물럴수있었던 것은 성서모임과 기도모임에 머물럴수가 있었기 떄문이다.
저는 성서그룹원이 수련회를 갖고 끝나는던 날 파견미사를 가집니다
그때에는 그들은 아주 열정적으로 눈물을 흘리고 참회를 하는 모습이 역력합니다
그안에서 그날 초대된 이들로 부터 축하인사도 받습니다
그때에 함꼐했던 저는 답답하기만 합니다 아무런 느낌도 안나는 것 같았고 맹송맹송했지요
그런생각이나 감정이 든것은 몇년동안 그런일을 하고서야 나타났던 것입니다
아무리 열성적으로 봉사했지만 몸만 피곤하기만 했던 진정성이 없던 그 무수한 시간을 보내고 나서였다
내자신의 힘과 노력으로 되는 것이 아니구나 하지만 그분이 하시고자만 하신다면
나에게도 일어나구나 하는 생각이 두고두고 나는것은 다 그런것이라 여겨집니다
강물을 거슬러올라가는 연어는 마치 그들의 노력과 힘으로 박차나가는 것처럼 비춰지지만
아마도 그들은 자연에 순응하기 때문에 쉽게 오를것이라는 것을 느껴집니다
오늘도 이를 잊지않기 위해서 이럴게 몸부림치면서 여기에 글을 남겨봅니다 아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