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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재경제북교총동창회 원문보기 글쓴이: 이수
48회 동창회 발자취, 어린 시절 추억
글 고두승
1. 그리운 시절, 그리운 추억
가. 콩나물 교실
제주북초등학교 48회 졸업 동창들은 대부분 해방둥이이다.
한두살 위에 동창들도 몇 있지만 해방되는 해에 태어난 동창들이 60%를 조금 넘는 것 같으며 다음 해에 태어난 동창들이 40%를 밑돈 것 같은데 한 교정에서 6년을 같이 보냈다. 학업을 받기 위해 초, 중, 고, 대학을 거치는 과정에서 그 중 가장 오랜 시간을 함께 보냈으니 보통 인연은 아닐 것이다. 50년이 지난 지금도 그 인연을 바탕으로 동창회라는 울타리 속에서 그 시절 반추하며 활발하게 활동하고 있다. 돌이켜 보건데 그 시절이 어찌 그립지 않을까.
잠시 그 시절을 회상해 본다. 당시 입학할 무렵엔 시내 5개동엔 북교, 동교, 남교, 광양교 정도만 있었다. 지금은 모교 학생 수가 많이 줄어들어 400명 안 밖이라 하는데 우리가 다닐 때는 유독 모교만이 거의 3,000명에 가까웠으니 지금과 너무 대조적이라 할 수 있다. 근간에 들어 모자란 학생수를 늘리기 위해 여러 가지 방안을 강구하는 모습을 보며 예전과 비교할 때 격세지감을 느끼지 않을 수 없다.
당시 서초등학교는 생기지 않을 때라 용담지역에 닦은내(수근동), 먹돌쌩이, 정뜨루에 살던 아이들은 거의 모교로 몰렸으며 특히 타 학교 담장 바로 옆에 살고 있으면서도 모교를 다녔던 강성범 동창이나 모교와 멀리 떨어진 아라동이나 광양지역에 살았던 현상오, 김성규(구, 재봉)동창 등은 2개 학교를 지나면서 "산 넘고 물 건너(?)" 다녔으며, 더욱이 모교를 다니기 위해 주소지를 바꾼 경우도 있었으니 모교의 인기가 얼마나 높았는지 오늘에 와서도 가늠할 수 있다.
지금이야 거리에 자동차가 쌩쌩 달리기 때문에 엄두도 못 낼 일이지만 그래도 어린 나이에 그 먼 거리를 마다않고 모교를 다녔으니 암만 생각해도 대단한 학교는 틀림없으며 대단한 동창들이다. 제주에서 최초로 생긴 학교란 것도 한 몫을 했을 것이며, 학부모들이 뽑내고 싶은 마음도 한몫 했을 것이다. 때문에 인기도 인기지만 학생 수가 넘쳐나 상대적으로 교실 수는 모자랄 수밖에 없었다.
48회로 졸업한 동창들도 입학 시에는 7개 학급이었다. 2학년부터 6개 학급이다 6학년이 되자 5개 학급으로 편성이 되었다.
졸업생이 331명인 걸 보면 한반에 거의 70명 가까이 반편성이 된 것을 알 수 있으며 바로 콩나물 교실이었다. 5학년까지 6개반이던 것을 6학년이 되자 5개반으로 줄어든 것도 교실 수가 모자라 부득이한 조치였을 것이다.
5학년까지 1반, 2반, 3반~으로 반을 편성했는데 6학년이 되면서 백일홍반, 장미 반, 진달래 반, 봉선화반, 무궁화반으로 나눈 것도 특이하다. 아이들에게 꽃같이 예쁘게 자라고 아름다운 마음 지니라는 뜻이 담겨 있는 것이라 생각한다.
이후 당분간은 꽃 이름으로 반의 명칭을 정하다 언젠가 다시 1반 2반으로 편성이 된 듯하다.
나. 놀이
누구나 가장 그리운 시절하면 때 묻지 않고 순수했던 초등학교 시절을 떠 올리지 않을까 생각한다. 그러나 우리가 자랄 무렵은 어느 고개 보다 넘기가 힘들었던 보릿고개 시절이라 어려움이 많이 있었다.
지금은 중등교육까지 의무교육이라 회비를 내지 않아도 되지만 그 때는 회비를 반드시 납부해야 하는데 회비마저 내기 어려운 가정이 많다보나 장난감 같은 놀이기구는 엄두도 못 낼 일이었다. 요즘 아이들에겐 장남감은 물론 놀이시설이 많아 우리와는 전혀 딴 세상에 살고 있는 듯하다.
우린 어렵다보니 놀아도 돈이 들지 않는 놀이가 대부분이었다. 여학생들은 고무 줄 놀이나 공기놀이, 오자매를 주로 했으며, 남학생들은 축구(큰 공이 없어 작은 공), 다마(구슬)치기, 빳지(딱지)치기, 하루(손 야구), 물총 놀이, 바람깨비 돌리기, 요꼬마이꼬(모자를 앞, 옆, 뒤로 쓰고) 등 돈이 들지 않아도 충분히 할 수 있는 놀이었다. 땅 뺏기, 하시다리(다리넘기), 숨바꼭질, 오니다스께(우리말로 표현이 안됨) 등은 남녀가 공히 할 수 있었던 놀이었으며 특히 여학생들이 고무 줄 놀이를 할 때 남학생들이 고무줄을 자르고 재빠르게 도망치던 일들이 자주 있었다. 여학생들에겐 엄청 짜증나는 일이나 남학생들에겐 고무줄 자르는 것도 일종의 놀이처럼 생각한 것은 아닌지. 그 중 임XX 동창이 가장 짓궂었던 것 같다. 아직도 여자 동창들이 그 일을 기억하고 가끔 말하는 것을 들을 때가 더러 있다. 지난 일들을 돌이켜보니 좋으나 궂으나 어린 시절 추억은 어느 하나 버릴 것 없이 소중한 것 같다.
다. 운동회
초등학교 시절 중에 가장 기억에 남는 일들은 뭐니뭐니 해도 운동회 날이 아닐까.
또 운동회를 앞두고 그날을 기다리며 설레이던 때를 생각하니 그리움이 앞선다.
1, 2, 3학년은 교실이 부족해 오전 오후반으로 나뉘어 수업을 했지만 4, 5, 6학년은 오전 오후 내내 수업을 했다. 그러나 운동회를 앞두고 준비할 때는 덤브링이나 무용연습, 전체체조 등과 중복이 되지 않도록 며칠 전부터 상급학년은 돌아가며 오전에는 수업을 받고 오후에는 수업 없이 운동회 연습을 했는데 철없던 시절 아이들은 수업을 하지 않아서 기쁘고 운동회 연습을 하다 보면 거기에 폭 빠져 그 즐거움이란 말로 다 어떻게 설명을 할까.
운동회 날은 공설운동장(지금 제주시청 북쪽 앞)에 모여 운동회를 개최했다. 지금은 웬만한 도로는 포장이 다 돼 있으나 그 땐 포장된 도로가 한 곳도 없을 때이고 학생들은 운동화를 신은 애들이 별로 없을 때이다. 공설운동장까지 미리 준비한 하얀 천으로 만든 카버를 신고 걷다보면 땅에 널려 있는 작은 돌을 밟아 아플 때도 더러 있었으나 그건 문제도 되지 않았으며 모교에서 2km 가 넘는 거리였지만 단숨에 달려간 것 같다.
모교 운동회는 학부형까지 합치면 6,7천명이 족히 넘게 모였으니 제주시에서 꽤 큰 행사였다. 모교 운동장(지금은 1/3정도가 줄어짐)도 넓은 편이었으나 이를 다 수용하기엔 부족하여 공설운동장을 택했을 것이다. 1학년부터 6학년까지 전교생을 청군과 백군으로 나뉘어 모교응원가를 가사만 바꾸어 부르며 청군 이겨라! 백군 이겨라! 응원하던 그 함성이 지금도 귓전에 맴돌고 있다.
또한 그날은 점심을 싸가지고 거의 온 식구가 참석했으며, 미리 부모들과 약속장소를 정하고 만나 즐겁게 식사를 했는데 가끔 부모를 찾지 못해 한참 헤매는 아이들도 있었으나 결국엔 찾아 점심을 굶는 학생은 없었던 것 같다. 그리고 아무리 가난해도 곤밥(쌀밥)을 싸서 왔으니 아이들은 어려운 살림에 부모님 주름 늘어나는 것은 안중에 없었으며 마냥 즐겁게 먹고 뛰어 놀았는데 온 가족이 함께하는 소풍날이며 학교의 잔치 날이었다.
라. 재미있는 축구 룰(규칙)
지금에 이런 규정을 적용한다면 난리가 날 것이다.
아마 [전도 체육대회]나 아니면 [전도 축구대회]를 개최하던 날로 기억한다.
축구대회를 개최하게 되면 대게 6학년생을 중심으로 선수를 선발했으며 가끔 5학년 생 중에서도 출중한 선수가 있으면 선발했다. 우리가 6학년이 되었을 때는 우리 딴엔 최강팀이라 자부했다.
그 때는 학생들의 키가 그만그만 했는데 체격이 남다를 뿐 아니라 실력도 출중한 이명화(합센터)와 김금석(골기퍼)이 있어 우승은 “따 놓은 당상”이라 자신 할 때이다. 그런데 시합 날 두 사람이 선수에서 제외 되었다.
기억하는 동창들도 많이 있겠지만 당시 초등학교 선수들의 키가 1m 45cm를 넘으면 실격이 되었다. 이명화가 1m46cm이고 김금석이 1m45.5cm였으니 탈락이 된 것이다. 우리 선수 중에 가장 발군의 실력을 갖춘 두 선수가 빠진 것이다.
분함을 삭이고 첫 시합에 출전했으나 전력이 약화되어 패할 수밖에 없었다.
예나 지금이나 학교마다 무슨 대회이고 간에 우승을 하려는 것은 당연지사이다. 당시 시내 초등학교를 졸업하면 대게 시내 중학교에 진학하므로 중학생을 부정선수로 쓸 수 없었으나 시골에선 초등학교를 졸업해도 확인할 길이 없어 가끔 부정선수를 쓰다 보니 대회시마다 다툼이 생겨 고육지책으로 이런 룰을 만들지 않았나 생각한다.
요즘 초등학생 선수들 중엔 1m 7, 80 cm을 넘는 경우가 허다한데 지금에 이런 룰을 적용한다면 아마 지나가는 소도 웃을 일이며, 이런 말을 한다면 곧이곧대로 믿지 않고 어디 "호랑이 담배피던 시절"이야기라 치부해 버리지 않을까. 배고픈 시절 잘 먹지도 못해 키가 크게 자란 아이들이 별로 없다보니 이 점에 착안하여 희한한 발상을 내놓았지 않았나 생각한다. 그러다보니 1m45cm를 초등학생의 키의 한계로 삼아 이를 넘으면 초등학생으로 간주하지 않았던 난센스 같은 진풍경이 벌어진 것이다.
마. 소풍
소풍날이면 손꼽아 기다리던 날이다. 그런데 소풍 때이면 비가 가끔 내렸다. 그러다보니 언제적 이야기인지 확실치 않으나 이상한 소문이 전해져 내려오고 있었다. 우리가 다닐 때 교정 남서쪽 부근에 물통이 있었는데 “그 물통에 있는 뱀을 누가 잡아 죽이므로 소풍 때마다 비가 온다.”는 것이었다.
어릴 때 귀신이나 도채비(도깨비) 이야기를 들으면 재미도 있지만 그게 모두 사실인 것으로 알던 때이다.
그러다보니 뱀 이야기도 사실로 받아들였던 것 같으며, 소풍 가는 날 비가 오면 괜히 뱀을 잡아 죽인 그 사람을 원망하곤 했다. 이제와 생각하니 우습기도 하고 어이없는 일이라 할지 모르나 50년이 넘는 오랜 세월임에도 그 기억은 머릿속에 남아 있다.
바. 청소시간
지금도 초등학생들 청소를 하고 있을 테지만 우리처럼 하지는 않을 것이다. 예전에 보니 어머니들이 학교에 가서 아이들 청소를 도와준다는 말 들으며 너무 호강하며 키우는 것이 아닌가 여긴 적이 있다. 우리 땐 청소는 수업의 연장선이었다. 수업이 끝나도 청소를 마쳐야 집에 갈 수 있었다. 각 분단별로 나누어 교실바닥, 복도, 유리창, 화단, 화장실(반별로 돌아가며 맡은 것 같다)을 청소했다.
청소를 끝내고 반장이 담임선생님에게 보고하면 검사를 한 다음 합격해야 집에 가는 것이다. 그러다 보니 잔꾀를 부리려 해도 당최 안 되었다.
교실바닥이나 복도는 빈직빈직(번들번들)해야 합격이다. 오랫동안 내려온 방법으로 코끼리 꽝이나 양초를 바르고 닦으면 빈직빈직 했다. 아이들 너무 열심히 닦다보면 아이들이 미끄러지고 어떤 때는 선생님도 미끄러지니 그 재미로 열심이 닦았는지 모른다.
화단은 청소도 청소지만 화단을 가꾸기 위해 바닷가에서 먹돌을 봉가다(주워다) 단장을 했으며, 유리창 청소를 할 때면 유리창에 호호 입김을 불며 닦던 생각이 난다. 어쩌다 화장실 청소를 할 때면 정말 지긋지긋 했다. 지금이야 수세식에서 좌변기로 바꾸어 청소할 필요도 거의 없지만 특히 여름철엔 X버랭이(버러지)가 득실거려 징그러웠다. 바켓츠에 물을 떠 씻어 내렸지만 또 올라오면 또 씻어 내리며 청소를 했는데 힘든 것 보다 징그러운 생각이 앞선다.
이외에도 생각나는 것이 많다. 사라봉은 당초 민둥산이었지만 고사리 손으로 어린 소나무를 심어 지금은 울창한 소나무 숲을 이루어 놓았다. 가끔 사라봉에 운동이라도 갈 때면 이렇게 나무가 크게 자랐는가 보람과 함께 내가 심은 나무에 이름표라도 달아두었으면 참 좋았을 텐데 하는 아쉬움도 갖는다. 사라봉 하면 "송충구제"작업을 하던 기억도 잊혀지지 않으며, 잔디를 떠 갖고와 학교 화단에 덮힌 기억도 새롭다.
사. 졸업
이런 여러 추억들과 함께 우린 6년간 정들었던 모교 교정을 뒤로 하고 그리운 선생님 그리고 사랑하는 아우들을 두고 떠날 수밖에 없었다. 졸업과 함께 대부분 중학교를 진학하게 되었는데 남학생은 3개학교(오중, 일중, 제중)로, 그리고 여학생은 2개학교(신중, 제여중)로 진학하게 되어 당시 제주시에 있는 중학교 5개학교로 뿔뿔이 헤어지게 되었다. 6년이라는 긴 세월을 한결같이 다니던 정든 동무들인데 어찌 아쉬움이 없었으랴!
그 날 부른 졸업의 노래가 새삼 생각난다.
[빛나는 졸업장을 타신 언니께 꽃다발을 한 아름 선사합니다~~~~~~]라는 후배들의 노래에 이어
[잘 있거라 아우들아 정든 교실아 선생님 저희들은 물러갑니다~~~~~]라고 우리가 답하고
[앞에서 끌어주고 뒤에서 밀며 우리나라 짊어지고 나갈 우리들~~~~]3절을 같이 부르며 우린 눈물을 쏟아냈다. 그날 왜 그리 눈물을 흘렸는지 모른다. 여학생들이야 아무래도 남학생 보다 마음이 여려 눈물이 많겠지만 남학생들도 눈물을 흘리지 않는 동창들이 거의 없었던 것 같다. 후배의 송사에 이어 송상일 동창의 답사가 심금을 울렸을 것이며 우리를 가르치신 선생님과 그리고 사랑하는 친구들과 헤어지게 되니 어린 나이에 이별은 큰 슬픔으로 다가왔을 것이다. 아 아! 그립고 그리운 그 시절, 그 추억이 서린 정든 교정을 떠나온 지 올해로 어언 50년이 넘고 있다. 꿈 많던 동안의 소년, 소녀는 이마에 주름이 하나둘 늘어나고 머리엔 서리가 내려 세월을 속이지 못하는 것 같다.
아. 담임선생님
재학시 우리를 가르치신 선생님은 31분이다. 그중 이성후 선생님은 3번이나 담임을 맡으셨고 강정희 선생님과 김병욱 선생님, 그리고 김삼자 선생님께서 2회씩 담임을 맡으셨는데 다른 선생님들은 한번 담임을 맡으셨다. 그 때 선생님들의 열성은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40주년 행사 때에 여러 선생님 뵙고 반가웠는데 벌써 10년이란 세월이 흘렀다. 돌아가신 분도 몇분 계시나 아직은 생존해 계신 분이 많으신 것 같다. 건강하게 오래 사시기를 빌어본다.
재학시 음악이나 미술, 붓글(서예) 시간에는 담임선생님끼리 서로 특성을 살려 바꿔서 수업을 하셨던 점도 기억이 나며, 호랑이 선생님이 계신 반면에 순하신 선생님도 계셨는데 이젠 모두가 그리움으로 남아 있을 뿐이다. 1학년부터 6학년까지 담임선생님의 이름을 떠 올려 본다.
6년간 우리를 가르치신 담임선생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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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반 |
2반 |
3반 |
4반 |
5반 |
6반 |
7반 |
1학년 |
김한우 |
한신자 |
고계춘 |
이순자 |
좌은순 |
양순정(화자) |
홍원규 |
2 “ |
변봉래 |
김삼자 |
장승종 |
최현숙 |
안복순 |
현영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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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 |
이성후 |
이순영 |
원인숙 |
김삼자 |
김진열 |
김봉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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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 |
양동수 |
정영찬 |
고문석 |
임병규 |
강정희 |
이인식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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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 |
김택성 |
이성후 |
김덕용 |
김병욱 |
현민식 |
강정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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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 |
백일홍반 |
장미화반 |
진달래반 |
봉선화반 |
무궁화반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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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민형 |
고두희 |
양경조 |
김병욱 |
이성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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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동창회 발족
졸업을 하고 많은 세월이 흘렀다.
코 흘리게 어린애에서 이젠 의젓한 사회인이 되었다.
동창들 저마다 다 자기만 씩 자기의 세계를 구축했으며 직장인이나 사회인으로서 두각을 나타내고 있었다. 이젠 제법 여유도 생기고 사회활동도 많이 하던 시기라 동창들 간에 동창회 조직에 대한 이야기가 거론되기 시작했다.
1993년 중반에 들어서면서 동창회 조직이 가시화되기 시작했다.
졸업한지 실로 35년이 되는 해였으며 지천명의 나이를 바로 코앞에 두고 있을 때이다.
이를 추진하기 위해 준비위원회를 구성하고 창립준비에 들어섰는데 준비위원들을 보면 남자 동창은 김창구, 문광호, 임만춘, 이재윤, 고두승이고, 여자 동창은 고량화, 김영순, 문순정, 양문순, 하순희 등으로 창립에 많은 공헌을 하였다.
특히 창립준비를 위해 아주반점에 모였을 때 재학시 어린이 회장을 맡았으며 똑똑하고 영리했던 이기찬 동창이 불편한 몸임에도 참석하여 같이 염려해주던 모습이 떠오르는데 그 후론 소식이 없다 이 세상을 하직했다니 가슴이 아프고 쓰리다.
졸업 5년이 되던 고등학교 2학년 재학 무렵에 창립(당시 회장 오행립)을 한 바 있으나 그 후 모임이 이어지지 못하고 1회성에 그치므로 재 창립을 한 셈이다.
준비를 끝내고 드디어 11월 20일 ㅇㅇ회관(북교 동쪽 100m지점, 구 제주일보2층)에서 창립총회를 개최하였다..
이 날 참석한 동창들이 85명에 이르렀으니 동창들의 관심이 높은 점을 유추해 볼 수 있다.
특히 서울에서 약국을 경영하는 김경수(약사)동창이 참석해 주어 열렬한 환영을 받기도 했다. 졸업 시 백일홍반 담임이신 이민형 선생님과 진달래반 담임이신 양경조 선생님 그리고 6학년 재학시 교생실습을 하셨던 강려자, 배정자 선생님께서 함께 자리를 해주어 한층 의미가 깊었다.
고두승이 사회로 시작된 창립총회는 김창구 준비위원장의 인사말씀에 이어 경과보고가 있었으며, 회칙통과에 이어 임원선출에 들어갔는데 초대 회장으로 김창구(당시 제주도의회 의원) 동창을 선출했다. 임원구성을 보면 부회장에 좌경희, 좌길훈, 고량화, 김영순과 감사에 이진근을 선출했으며, 총무에 문광호 재무에 강창남이 맡았다. 그 후 문광호 총무가 서울로 가게 되자 김영주가 총무 바톤을 이어 받았다.
창립하고 동창회는 그동안 궁금하던 동창들의 소식을 접할 수 있어 동창들 간에 교류가 활발하게 전개되었으나 오랜 시절 자주 못 만나던 동창들이 대부분이라 처음 얼마간은 서먹서먹한 분위기를 채 벗어나지 못하던 시기였다.
이런 분위기를 깨기 위해선지 김영순, 하순희 여자 동창 등이 오히려 앞서서 남자동창들에게 말을 터서 이야기 하므로 남자 동창들도 덩달아 트기 시작했다. 이젠 으레 말을 트는 것은 기본이다.
초창기 어려움 속에 김창구 초대 회장과 김영주 총무가 고군분투하며 동창회의 발전에 노력하던 시기이다.
3. 재경동창회 창립
제주에서 창립을 하게 되자 서울에서도 미동하기 시작했다.
마침 제주에서 창립에 공헌을 했던 고두승과 문광호, 임만춘이 직장 관계로 서울에서 근무를 하게 되자 제주에서 동창회를 조직한 소식을 잘 알고 있는 윤영재 동창이 전화를 주어 서울도 동창회 조직을 했으면 좋겠다는 의견을 피력한 것이 계기가 되었다 할 수 있다. 창립일 당일 회식비를 윤영재 동창이 전액 부담했는데 본인이 제안한 일이 성사되자 기쁜 마음의 표현이라 생각하며 지금에 와 생각해도 고마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창립준비를 위해 고두승, 문광호, 임만춘이 서로 연락을 취해 숙의하면서 의견을 모아나가기 시작했다.
부지런한 문광호가 서울에 살고 있는 동창들 주소를 파악하고 연락을 취했으며 고두승은 회칙(안) 수립 등 제반 업무를 준비하며 창립에 박차를 가했다.
창립일에는 20여명 정도 모였는데 고두승이 사회로 진행되었으며 초대회장엔 그동안 준비위원으로 활동을 하던 임만춘 동창(당시 상업은행 지점장)이 선출되었고, 부회장에 윤영재, 좌옥희, 감사에 김경수, 오헌승이 충무에는 문광호가 맡게 되었다. 아무래도 초창기라 어려움이 따를 수밖에 없었지만 오늘 날 서울 동창회의 발전에 초석을 깔아 놓은 셈이다.
그 후 2대회장은 고순택 동창(국가 공무원 이사관 역임)이, 부회장에는 윤영재, 김경수, 좌옥희, 감사에 정계종, 김채옥이 총무에 여자동창인 김용임이 맡았다. 김용임이 총무를 맡게 되면서 남자 동창들 꼼짝달싹 못하게(?)하고 있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있는데 이때에 회칙을 개정하고 새롭게 회원 상조규약을 만들어 회원간의 친목을 더욱 두텁게 하는 계기를 마련하는 등 회장 고순택과 총무 김용임 체제가 컴비네이션이 잘 이루어지므로 재경동창회는 발전을 거듭함과 동시에 재경동창회의 위상을 높여가기 시작하였다.
3대회장에 오헌승(삼양그룹연구소 소장, 부사장역임)회장단이 들어섰으며 이때도 회칙을 개정하여 여자 부회장 1인을 증원하였는데 부회장엔 윤영재, 정계종, 좌옥희, 현명순이 감사에는 김채옥이 중임되었으며 총무엔 김용임이 계속 맡게 되었다.
오헌승 회장도 제주 동창회와의 유대관계를 돈독히 하는데 큰 역할을 담당하였으며, 모교 100주년 행사를 위하여 기금 모금시 우리 48회 동창회가 기별동창회중 가장 많은 4천2십만원을 모금하는데 최대한의 협조를 아끼지 않았다. 2007년 5월 18일 모교개교 100주년 기념행사 전야제에선 48회 동창들이 어느 졸업기보다 많이 참석했는데 바로 서울에서 오헌승 회장을 비롯한 동창들이 16명이나 대거 내려온 덕분이리라.
그 후 정기총회를 열고 그동안 수고를 아끼지 않은 임원진을 거의 유임시켰다. 회장에 오헌승(삼양그룹 연구소 소장 겸 부사장 역임), 부회장 에 정계종(태준제약(주) 부사장 역임), 윤영재(경기도 건축사협회 회장 역임), 여자 부회장에 좌옥희(전업주부), 현명순(전 재경 신성여고 총동창회장), 총무에 김용임(전업주부)이며, 감사에는 새롭게 양선예가 선출되었다. 세 번이나 연속 총무를 맡게 된 김용임은 이로서 총무 말뚝 박기에 들어가는 듯 한데, 평소 김용임 총무의 열성과 투철한 봉사정신이 말뚝총무로 가는 길이 되었을 것이다.
4. 졸업 40주년 기념행사
동창회 초창기에는 어려움도 없지 않았으나 이렇게 제주에 이어 서울 동창회가 조직이 되자 시너지 효과를 본 셈이다. 제주 동창회가 창립되어 5년이며 서울 동창회가 창립 된지 2년이라는 짧은 기간에 졸업 40주년 행사를 기획하게 된 것이 이를 잘 증명한다.
98년 초 정기총회에서는 이진근 동창이 그동안 수고를 하던 김창구 동창의 뒤를 이어 2대 회장을 맡게 되었다. 98년도는 우리가 모교를 졸업한지 40년이 되는 해이다.
동창들 간에 졸업 40주년 기념행사를 하자는 의견들이 개진 될 때이다.
이에 따라 졸업 40주년 기념행사를 염두에 두며 임원구성에 신경을 쓰면서 남자 부회장에 김덕호, 좌경희, 좌길훈, 여자 부회장에 김영순, 박경선, 하순희, 남자총무에 김영주, 여자 총무에 문순정을 재무에 강창남이, 감사에는 이재윤, 고경봉이 선출되었다.
이진근 동창이 회장을 맡으며 그동안 유보하던 상조회 규약을 시행하게 되면서 동창회는 활성화되어 갔다. 이런 것이 뒷밭침이 되니 졸업 40주년 행사는 탄력을 받기 시작했으며 이진근 회장(서울 임만춘 회장과 행사 공동추진위원장)에게 막중한 책임이 뒤따르게 되었지만 슬슬 풀려나갔다. 힘을 얻은 이진근 회장은 기념행사와 더불어 동창회 수첩제작을 하기로 했는데 그의 추진력은 행사의 성공을 예견할 수 있었으며, 김영주 총무의 헌신적인 봉사는 동창들의 귀감이었다. 마침 은행 지점장을 명퇴하고 고향에 내려와 잠시 쉬고 있는 고두승동창이 준비위원으로 같이 일을 돕게 되면서 행사 준비는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김영주 동창(총무)이 경영하는 청산식당 안방에 동창회 전용전화를 별도 설치하고 준비 사무실을 차려 고두승 동창은 상근하였으며, 특히 이재윤 동창 같은 경우는 개인사업을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자주 들려 도와주었다.
이진근 회장께서도 바쁜 와중에 자주 찾아 점심을 사고 여러 가지 의논도 하면서 행사준비에 철저를 기했고, 좌길훈, 좌경희, 김덕호 부회장과 현동규, 김우종, 오행립 동창 등이 찾아와 협조를 아끼지 않았으며, 김영순, 박경희 하순희 부회장과 문순정 동창회 여자총무 김정자, 양옥윤, 이윤수 여자동창 등이 과일이나 차를 갖고 와 격려해 주면서 더불어 동창들 주소를 파악하기 위해 전화를 해주며 힘을 보태주었다.
김영주 총무께서 일을 잘 부리려고(?) 고두승 동창이 준비 사무실(청산 안방)에 가면 꼬박꼬박 청산주(청산식당 특별 보약제)를 제공했던 사실도 빼놓을 수 없으며 그 당시 일들을 떠 올려보니 어렵고 힘든 일도 있었지만 새삼 보람된 시간을 보내지 않았나 생각한다. 아마 이렇게 많은 동창들이 신경을 써 주며 참여하니 진도가 잘 나갔던 것 같다.
어려움도 있었다. 40주년 행사의 일환으로 [동창회원 수첩]제작을 하기 위해 외국(주로 미국, 남미)에 거주하는 동창들에게 시차를 맞추며 전화를 걸었던 일들, 육지 지방에 살고 있는 어느 동창에게 전화를 하니 무슨 쓸데없이 회원수첩을 만드느냐? 할 때는 의기소침 했으며, 동창주소는 파악이 되는데 사진은 제출해 주지 않아 사진을 받으려고 애쓰던 일이나, 준비모임을 어쩌다 가질 때면 농담반 진담반으로 누가 이런 제안해서 이렇게 고생시키느냐 할 때는 괜히 움츠러들었다. 이런 우여곡절 끝에 졸업동창 331명중 230여명을 조금 웃도는 동창들 주소를 확인할 수 있었으니 보통일은 아니었다.
[동창회원 수첩]제작을 하며 고생된 바 없지 않으나 그동안 소식을 모르던 동창들 서로에게 가교 역할을 해 주고 있으며 동창회 운영에 많은 도움이 되고 있다.
행사를 더욱 빛내기 위해 회장단에서 당시 모교 이민형교장 선생님(졸업시 6학년 백일홍반 담임)에게 모교에 기념품을 증정코자 의견을 타진하자 가능하면 [제주 교육의 발상지] 표석을 세워 줄 것을 요청하신다. 임원들이 모여 회의를 가진 바 모두 한 목소리로 찬성한다.
세울 표석을 자연석으로 하자는 의견도 모아졌다.
때 마침 이진근 회장(한마음 병원 진료부원장)과 장주석(한마음 병원 행정부원장)동창이 당시 한마음 병원을 지을 때인데 건설업체에서 지하를 파기 위하여 병원 부지에 암반을 깨며 토목공사를 하고 있으므로 이회장께서 장주석 동창에게 적당한 바위를 골라보라고 부탁하였다. 장주석 동창이 애쓴 덕분에 적당한 크기의 바윗덩어리 2개(표석과 밭침)를 골라 놓았는데 임원진들이 현장을 답사한 결과 모두 흡족해 했다.
바윗덩어리가 얼마나 컸는지 운반비가 엄청나게 들었다.
서예가 현병찬(44회 동문, 당시 초등교교장이며 대한민국 서예대전 대상 수상)선배님에게 글씨를 부탁하자 흔쾌히 승낙을 해 주므로 글씨를 받아 돌에 새겼다.
이제와 돌아보니 이와 같이 많은 심혈을 기울여 모교 교정에 [제주 교육의 발상지]표석을 세운 것은 더할 나위 없는 보람이며 대단한 자부심이다. 더욱이 [총 동문회]에서 개교 100주년 사업을 준비하고 개최했는데 48회 동창회가 100주년 사업의 일익을 담당했다는 자부심을 가져도 지나친 말이 아닐 것이다. 더불어 이 기회를 통하여 앞을 내다보는 혜안으로 이런 제안을 해 주신 이민형 은사님에게 감사를 드린다.
준비된 사업들을 모두 마치고 98년 11월 3일 드디어 "제북교 48회 동창회 졸업 40주년 기념식"을 거행하였다.
행사당일 동창 92명이 참석하여 대 성황을 이루었는데 졸업 40년 만에 처음 만나는 동창들도 있었으니 그 때 감격을 지금엔들 잊을 수 있을까.
타 동창회에서 행사를 할 때 보면 대게 6학년 당시 담임선생님만 모시고 하는 경우가 대부분이나 우린 그 점에서도 달랐던 것 같다.
1학년부터 6학년까지 우리를 가르치신 담임선생님 전체를 대상으로 초청했는데 22분이나 참석해 주셨다.
지금에 와 생각해도 참 잘한 일이라 자화자찬해 본다.
서울에 살고 계신 고두희(6학년 장미화반 담임)선생님, 양순정(구명 화자, 1학년 6반 담임)선생님께서 참석하신다 하므로 항공표를 보내 드리고 고두희 선생님 묵으실 호텔방을 예약하기도 했다.
멀리 서울에서 두분이 참석하므로 특별히 환영을 받았으며 행사 분위기는 한층 고조되었다.
제주에 살고 계신 선생님들끼리도 오랜만에 뵙는 분들이 계셔 서로 반가워 인사를 나누며 모교에 재직하던 옛 시절을 떠올리는 모습이다. 당시 제주 북초등학교 총동창회 현임종 회장님께서도 참석해 주어 자리는 더욱 빛났던 것 같다.
먼저 모교 교정에서 [제주교육의 발상지] 표석제막식을 가졌으며 이어 기념촬영을 하고 졸업 40주년 기념행사장(오리엔탈 호텔)으로 옮겨 1부 기념행사(사회 김영주 총무)를 가졌다.
이진근 회장께서 “졸업 40주년 기념행사”에 대한 기념사를 하고 이어 이민형 모교교장선생님께서 축사를 해주신 다음 하순희 동창이 지휘로 모교교가를 제창한 후 1부 기념식을 마쳤다. 2부는 만찬시간으로 준비된 식사를 하며 담소를 나누었다.
3부 행사(사회 고두승 준비위원)로 여흥시간을 가졌는데 선생님들께서 돌아가며 노래 부를 차례가 되면 재학시 선생님 담임 반 제자들이 선생님을 둘러싸서 함께 부르는 정겨운 모습을 연출하기도 했다.
4부행사를 빠트릴 수 있을까. 자리를 로베로 호텔 지하 단란주점으로 옮겨 행사를 시작하니 밤이 깊어 가는 것은 안중에 없는 모양이다. 아마 새벽 두 세시까지 남녀 동창들이 함께 자리를 했으리라 생각되는데, 그 날은 아마 사전에 밤을 지새우기로(올 나잇) 아예 마음을 작정하여 왔는지 모른다. 시간도 많이 지나 아쉬움을 뒤로 하고 이젠 헤어져 집으로 돌아간다. 가만히 생각해 보니 행사는 대 성공이었다.
이와 같이 성공적으로 행사를 마무리 할 수 있었던 것은 이진근 회장과 김영주 총무, 문순정 총무(여)의 공이 컸으며, 서울에 공동위원장인 임만춘 회장과 문광호 총무를 비롯한 임원들의 협조는 물론 모든 동창들의 적극적인 참여가 있었기에 가능 했다 생각한다.
5. 국내여행 시작
졸업40주년을 맞이하며 우리는 이처럼 뜻있는 사업을 펼쳤음은 물론 동창들의 결속을 더욱 가속화시키면서 또 하나의 역사를 만들기 시작하였다.
2,000년 4월에 정기총회를 열고 3대회장에 좌길훈(제주도 기술사협회 회장)동창을 선출했으며, 수석부회장에 고두승(당시 중소기업 종합지원센터 본부장), 남자 부회장에 이장순(제주산업정보대 교수), 현동규(변호사 사무장) 여자 부회장에 김영순(트루젠 대표), 하순희(전 초등교사), 고경희(성안유치원 원장)이며, 남자 총무에 김영주, 여자 총무에 문순정이, 재무에 양중갑이, 감사에 강창근, 박경선이 선출되었다.
졸업 40주년 행사를 한지 얼마 되지 않아 큰 행사를 치른 후에 허전함이 감돌던 때이다.
좌길훈 회장의 제안에 따라 바로 우리 남녀 동창들이 국내여행을 계획하고 실행을 한 것이다. 처음 국내여행 시 관광버스 안내양이 초등학교 동창 부부들로 알았는데 남녀 동창들이라니 의문 반 감탄 반하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여행시에 평소 조용한 것만 같았던 신희숙 동창이 전주 비빔밥 5천원과 6천원짜리 차이가 무엇이냐 질문하니 모두 대답을 못한다. 나중에 말해 알았는데 그런 깊은 뜻이 있었음을 누가 알리요. 폭소가 터졌음은 두말할 필요가 없다.
“쑥 넣으면 6천원이고 쑥 빼면 5천원이다” 그냥 말하면 재미없는데 음을 짧게 하거나 길게 잘 조화를 이루면 재미 있는 말이 되기 때문이다. 용기를 얻은 동창들 한마디씩 하니 차안 분위기는 웃음이 벨착(가득)했다.
이와같이 국내여행은 동창들에게 새로운 분위기를 만들게 하였으며 동창들의 정분을 다지는 계기가 되었다.
국내여행은 2년전 까지 7회 째 계속 이어저오고 있으며 작년(07년도)에는 모교 100주년 기념행사 관계로 서울 동창들이 제주 방문을 하게 되므로 중복을 피하기 위해 한해는 쉬기로 하고 올해부터 다시 시작을 하기로 하였다.
6. 등반대회
02년도 3월에는 정기총회에서 새로운 회장을 선출하였다. 그동안 수석부회장을 맡아 온 고두승(당시 제주도 중소기업센터 본부장) 동창을 회장으로 선출하였으며 수석부회장에 이장순(제주산업정보대 교수), 남자 부회장에 김영주(청산유황오리 대표), 현동규(변호사 사무실 사무장) 여자 부회장에 고량화(제주도 보건복지여성국장), 김영순(투르젠 대표), 김혜옥 (전업주부), 남자 총무에 강창근(화신택시 상무) 여자 총무에 문순정(교보생명) 재무에 장수방(우정탕 대표)감사에 양정헌(고교 교장), 박경선(선경주단 대표)이 선출되었다.
고두승이 4대 회장을 맡아서는 여행도 계속 실시하면서 제주에 오름 등산을 실행했다.
처음에 오름 산행시 22명이 참석했는데 목적지가 “물장오리”였다.
고회장이 2주 전 쯤에 다른 모임에서 “물장오리”를 올라가다 길을 못 찾아 어렵게 올라 간 적이 있으나, 나무에 리본을 달아 길을 안내하는 표시가 되어 있어 좀 자신이 생겨 인솔하고 앞장섰는데 이게 웬일인가.
며칠 전 큰 비가 내려서인지 소로 길이 다 메워져 버렸고 나무 잎으로 덮여 있어 길을 찾을 수 없게 되었다.
리본도 보이 질 않았다. 아마 리본이 바람에 날려 가버린 모양이다.
강행하려다 잘못하면 엉뚱한 길로 빠져 산에서 헤매 일 것 같아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하산하여 그 대신 성판악 휴게소 앞에 있는 “물오름”을 오르기로 하고 이동하는데 어느 여자 동창 왈 "물장오리는 어디 이사가 부러서" 하니 웃음바다가 되었다.
그 후 한 동안은 여자 동창들 만날 때 마다 고회장에게 "물장오리는 오끗 이사 가부런"이런 농담 한마디 던지곤 했다.
오름을 오르다 길을 잘 못 들어가면 가시덤불 속에 들어가 생고생을 할 때가 더러 있다.
산을 우습게보아선 안 된다는 사실 새롭게 터득했던 날이다.
그 후 등반대회는 몇 차례 진행되었으나 계속 이어지지 못해 아쉬운 마음이 태산과 같다.
7. 합동 환갑잔치
04년도 정기총회는 4월에 개최되었다.
48회 동창회의 숫자를 따서 전년도에 회칙 개정을 통하여 4월 8일로 정기총회 날짜를 못 박았기 때문이다.
이날 새로운 회장에는 수석부회장을 맡아온 이장순(제주산업정보대 교수)이 회장에 선출되
었으며 수석부회장에 김용우(당시 애월상고 교장), 남 부회장에 양정헌(고교 교장), 현동규(변호사 사무장), 여 부회장에 고화순(농장 대표), 박경선(선경주단 대표), 신희숙(하경꽃꽂이연구회원장), 남 총무에 강창근(화신택시 상무), 여 총무에 하순희(전 초등교사), 재무에 장수방(우정탕 대표), 감사에 양중갑(사법서사 사무장), 양옥윤(교보생명)이 선출되었다.
새로운 것을 추진하다 보면 또 새로운 것을 도모하게 되는 모양이다.
여행 횟수가 5회 째(당시 04년도) 되던 해 내년(05년도)에는 동창 대부분이 환갑을 맞이하게 되므로 이번에는 모처럼 고향에서 합동환갑잔치 여행을 하자는 의견이 오고가며 이를 회장단에 위임키로 하였다.
그 후 구체적으로 이 문제를 다루게 되어 제주(회장 이장순)와 서울 (회장 오헌승) 간에 전화 연락을 자주 주고받으며 의견을 조율하는 가운데 협의가 잘 이루어져 합동환갑잔치를 실행하기에 이르렀다. 해당 장소인 중무관광단지를 사전에 답사를 하는 것을 보며 이장순 회장의 꼼꼼함이 드러나기도 했다.
05년 11월 19일은 우리 동창들 합동환갑잔치 여행을 하는 첫날이다.
제주 동창들이 공설운동장에서 집결한 후 공항으로 이동하여 서울서 내려오는 동창들과 합류하니 제주에서30명 서울에서 16명, 도합 46명이 되었다. 서로 인사를 나누고 버스에 올라 첫 번째 목적지인 한림공원을 향해 버스에 탑승하고 출발했다. 사회자가 일일이 참석한 동창들을 소개하는 가운데 첫 번째 목적지에 도착하였다.
쌍용굴을 정점으로 수석, 분재, 열대식물, 국화꽃의 대향연 등 자연과 인공이 잘 조화된 한림공원은 종합관광지이며 제주의 자랑이라 생각한다.
이제 점심시간이 훨씬 넘고 있어 모슬포에 예약된 식당을 향해 가는데 고두승 회원 부인이 준비해 준 오매기 떡을 나누어주니 금방 바닥이 날 정도이다. 이장순 회장 부인께서도 앞치마(에이프론)50개를 손수 만들었으므로 이 시간에 나누어 주었다. 점심식사를 한 후 버스를 타고 이동을 한다.
산방산 바로 앞에 위치한 하멜 표류지에 만들어진 하멜상선 기념관(模型風船) 관광과 함께 그 이웃에 자리하고 있는 그 유명한 용머리 해안가를 돌아보았는데 처음 오는 동창들 저마다 감탄사이다. 일부 동창들 망설이다 별 기대없이 돌아 봤는데 절경을 보고 천만다행이라 생각한다.
행사가 마련된 중문 관광단지에 도착 후 잠시 남쪽 바닷가 주상절리의 경관을 구경했는데, 막혔던 가슴이 탁 트이도록 시원스레 부서지는 파도, 육각형 돌기둥 바위들이 깎아지른 절벽은 용암이 굳으면서 생긴 현상이라 하는데 조각가가 정교하게 잘 다듬어 낸 것으로 착각이 든다.
이제 "제북교 48회 동창회 합동 환갑 잔치 기념식" 연회장에 들어가자 별천지에 온 기분이다.
중문 천재연 폭포를 끼고 위치하는 곳이라 계곡이 눈앞에 아른거리며 끝자락에 푸른 바다가 펼쳐지는 광경이야말로 뭐라 형언하기 어려울 정도로 장관이다.
평소 제주에 대하여 자부심을 갖지 않던 사람들도 해외여행을 다녀오면 제주만 한 곳 없다 한다. 천혜의 관광지 제주를 다시한번 느끼며 이 땅 풍요롭게 만들어 자손만대까지 이어지게 해야 할 책임을 생각하며 제주에 태어난 것을 감사히 여기게 된다.
잠시 합동잔치 기념식(사회 강창근 총무)을 가졌다.
제주 이장순 회장께서 "참석해 준 동창들에게 감사의 뜻과 더불어 즐거운 시간이 되기를 바라는 인사말씀"을 하고 서울 오헌승 회장께서 "임원들이 준비를 잘 해주어 감사드리며, 또한 열렬히 환영을 해준 제주 동창 여러분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하고 난 후 준비된 케이크를 커팅하므로 기념식을 마치었다. 만찬을 끝내고 자리를 옮겨 노래를 부르며 2차 행사를 진행한 후 당일 일정을 모두 마쳤다.
합동환갑잔치 스냎
다음 날은 섭지 코지를 거쳐 제주 최고의 관광지라 할 수 있는 성산 일출봉을 거쳐 하산하여 성산읍 오조리 그 유명한 해녀식당에서 전복죽과 함께 간단하게 전복회를 곁들여 반주를 하니 즐거운 마음들이다. 이어 점심 후 비자림을 향했다.
비자림까지 왔는데 고순택 동창이 인근 고향 평대에 지워 놓은 집을 둘러보기로 했다. 서울동창들 제주에 내려 올 때 기꺼이 무료로 방을 빌려 준다는 고순택 재경 前 회장의 말에 박수를 치고 일어섰다.
이제 서울 갈 동창들을 생각해 제주에 도착하여 靑山식당(김영주 동창 경영)에서 가볍게 저녁식사를 마치고 서둘러 공항을 향해 출발했다. 초등학교 남녀 동창 46명이 고향에서 합동 환갑잔치 겸 1박2일 여행을 했으니 별나긴 별난 동창들일 꺼다. 지금까지 다섯 번 여행에서도 늘 즐거움의 연속이었지만 이번에라고 다를까. 역시 유종의 미를 거두었다. 초등학교 동창이라서 어렸을 적 티 없이 맑고 순수한 그 시절로 돌아가 우린 쉽게 동심의 세계로 빠져들었는지 모른다.
이 행사를 성공적으로 수행하기 위해 수고를 아끼지 않은 이장순 회장, 김용우 수석부회장 강창근 총무, 하순희 총무, 장수방 재무와 서울의 오헌승 회장과 정계종, 윤영재, 좌옥희, 현명순 부회장, 김용림 총무, 김채옥 재무의 노고가 컸음을 밝혀둔다.
8. 카페 개설도
참 지금으로부터 5년 전 60을 바라보던 시절이다. 우리 나이 세대들을 보면 컴퓨터와는 거리가 먼 편이라 컴맹이 많다.
그런데 한 앞서가는 여자 동창이 03년 8월 12일에 48회 동창회 가교 역할을 할 수 있는 카페 “채오기”를 개설하므로 덤으로 동창들 전부가 컴맹을 면한 세대로 인정받게 되었다. 카페를 개설한 주인장은 김채옥 여자 동창인데 나이들어도 젊게 살아서인지 컴퓨터를 열심히 배워 젊은 사람 못지않은 실력을 갖추고 있다.
덕분에 우린 가끔 이 곳을 통해 서울과 제주 간에 소식을 주고받으며 정분을 두텁게 쌓아가고 있다. 아직 모든 동창들이 회원으로 가입하지 않은 부분은 좀 섭섭한 감도 없지 않으나 우리 세대에 카페를 차렸으니 보통 일은 아니며 동창회 체면치례는 하다가도 남을 일이다. 한 사람의 동창의 열성과 봉사가 있기에 가능한 일이면서 동창 한 사람의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을 새삼 느끼게 한다.
주인장 김채옥 동창의 멋이 새삼 돋보이며, 그 멋 계속 지녀주기 바랄 뿐이다.
9. 여행은 언제 까지 이어질까
여섯 번이나 여행을 했으니 이젠 으레 1년에 한 번 여행은 당연한 것으로 받아드린다.
그러나 최초로 여행을 시작할 무렵에는 성사될까 근심 반 걱정 반이었다.
더욱이 여자동창들이 남자 동창들하고 여행을 간다면 남편들이 쉽게 동의할까 염려한 것도 사실이다.
아마 남자동창들만 간다면 분위기는 썰렁했을 것이며 참여도 저조했으리라.
그런데 여자동창들 평소에 品行이 方正(?)하다 보니 쉽게 승낙을 얻어낸 걸로 알고있다.
남자동창들의 인격이 많이 참조된 점도 간과할 수 없겠지.
하긴 나이 들어가면 가정에서 여자들의 기세가 등등해져 승낙 받고 오질 않고 통보하고 왔는지 모른다.
여하튼 남녀 동창들이 가정관리는 평소에 참 잘 하는 것 같다.
여섯 번이라는 역사를 창조하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인가.
전년도에 제주에서 45년생을 위하여 합동환갑장치를 열었는데 이번에는 서울에서 46년생 동창들을 위하여 합동환갑잔치를 했으니 희한한 동창회라 하겠지만 배려하는 마음도 이 정도면 최고 아닌가. 한 쪽에 기울어 지지 않도록 중용의 도를 지키는 모습이다. .
그리고 앞으로 당분간은 여행을 계획하고 실행해야 할 것이다.
여자 동창들이 먼저 그 시기를 묻곤 하는데, 아마 여행을 가지 않으면 회장이 탄핵을 받을지 모른다. 회장 입장에서 보면 마음의 부담이 될지 모르나 그 동안의 노하우가 있으니 그리 걱정할 일도 아닐 것이다.
나이 들면서도 멋을 잃지 않는 북바리 사팔뚜기(북교 48회 동창회) 동창들아!
지금껏 잘 해 왔으니 앞으로도 남은 인생 서로 위하고 감싸주며 오순도순 살다 가자꾸나.
10. 모교 100주년 기념행사 준비
06년 4월이 되자 정기총회를 개최하고 새로운 집행부를 구성했다. 회장에는 수석부회장을 맡아온 김용우(제주도 교육청 정보화 과장)동창이 선출되었으며, 수석부회장에 강시정(제주경찰서 과장), 남자 부회장에 양정헌(제주관광 해양고 교장), 강창근(화신택시 상무), 여자 부회장에 고량화(前 제주도 여성보건복지국장), 김영순(트루젠 대표), 박경희(전업주부), 총무에 하순희(전 초등교사), 재무에 양안근(前 공무원), 감사에 양중갑(법률사무소 사무장), 고화순(농장 대표)를 선출했으며 여자동창 상조회 총무에 고경희(前 성안유치원 원장)을 선임했다.
또한 고문에는 이진근 (한마음 병원 진료부원장), 좌길훈 (제주도 기술사회 회장), 고두승 (아라종합사회복지관 관장), 이장순 (제주 산업정보대 교수), 오행립 (건강식품 대표)을 추대하였다.
이제 졸업 50주년을 2년 앞두고 있으며 모교 개교 100주년을 1년 앞둔 시점이다.
우리 동창회 김용우 회장이 총동창회 수석부회장을 맡아 수고를 아끼지 않았으며 하순희 동창이 총동창회 부회장, 강창근 동창이 총동창회 감사, 고두승 동창이 “총동창회 100주년 기념사업 회관건립사업 추진위원장” 등 총동문회에서 굵직굵직한 직책을 맡아 수고를 했다. 차기에는 우리 동창회에서 총동창회 회장을 맡을 차례이다.
따라서 동창들의 협조가 어느 때보다 요구된다 하겠다.
김용우 회장은 이런 책임감 속에 노심초사하며 고군분투를 했다.
매사에 협조를 아끼지 않은 동창들이기에 적극 참여하여 또 하나의 역사를 창조한 것이다. 앞에서도 이야기 했지만 총동창회에서는 100주년 기념사업을 하며 기금을 모금하면서 각 동창회에 1천2백만원을 할당했는데 이에 세배가 넘는 4천2십만원을 모금했으니 48회 동창회의 위상은 하늘을 찌르는 듯 했으며 김용우 회장과 하순희 총무, 서울에 오헌승 회장과 김용임 총무의 공은 높이 평가받아 마땅하다. 더불어 김용우(2백만원), 오헌승(1백5십만원) 그리고 1백만원 기탁자인 고두승, 고량화, 김경수, 김덕호, 이진근, 정계종을 비롯한 많은 동창들의 아낌없는 협조가 큰 힘이 되었다. 특히 모교교장으로 재임하면서 영광된 100주년을 맞게 된 우리 동창 박전해 교장께서 거금 1천만원을 쾌척하였고, 제주에서 제조업체 중 최고의 매출실적을 자랑하는 탐라사료(주) 대표이사이며 전 제주도의회 의원을 지낸 바 있는 제주 경영자협회 회장인 윤태현 동창이 1천만원을 쾌척해 줌으로써 목표를 훨씬 초과했을 뿐 아니라 48회 동창회의 저력을 과시했다 할 것이다. "뜻 있는 곳에 길이 있다(Where there is will, there is a way)"라는 말처럼 김회장의 뜻이 하늘에 닿았을 것이다.
모교가 개교 100주년을 마지 했으니 실로 감회가 깊다.
100년전 학교가 문을 열 무렵에는 구한말로서 나라가 기울어져 가는 시기가 아닌가.
더욱이 제주 땅은 지금과 달리 “사람을 낳으면 서울로 보내고 말을 낳으면 제주로 보내라”는 말이 통하던 시절이었을 꺼다. 그런 척박한 환경에서 제주북초등학교가 탄생한 것은 실로 역사적인 일이다. 또한 제주 신교육의 효시일 뿐 아니라 오늘날 제주가 어느 지방보다 높은 교육열을 갖고 있는데 바로 그 정신은 일찍이 제주북초등학교에서 시작되었을 것이다.
그러기에 북초등학교 개교 100주년을 기념하면서 우리 동창들은 모교의 발전과 사랑스러운후배들이 큰 꿈을 펼치도록 선배로서 길을 열어 주어야 할 것이며 애교심을 한층 높여나가야 할 것이다. 한마디 첨언 한다면 모교와 동문회의 발전을 위하여 48회 동창회가 그 중심에 서 있을 수 있기 바란다.
11. 이젠 외국여행 기획 중
08년 4월 올해 정기총회에서는 그동안 수석부회장을 맡아 수고를 했던 강시정 (전 제주경찰서 수사과장)동창을 새로 회장으로 선출하였다. 수석부회장에 양정헌(전 교장), 남자 부회장에 김덕호(형제전업사 대표), 진순호(여관 대표), 여자 부회장에 김정자(주부), 문순정(교보생명), 양옥윤(제주여고 총동창회장), 총무에는 하순희(전 초등교사)가 유임되었으며 남 재무에 문덕훈이, 여 재무에 양연순(주부) 맡게 되었으며, 감사엔 양중갑과 오안희(주부)가 선임되었다. 고문에는 이진근(한마음병원 부원장), 좌길훈(기술사협회 회장), 고두승(아라종합사회복지관 관장), 이장순(제주산업정보대 교수), 김용우(전 애월상고교장)가 추대 되었다.
서울 총무를 여자 동창인 김용임이 3회에 걸쳐 맡고 있는데 제주에서도 여자 동창인 하순희가 중임을 하게 됨에 따라 48회 동창회는 운영 실권이 여자 동창들에게 넘어가는 것 같다. 집안 살림도 섬세한 여성들이 제대로 잘 꾸려 나가듯이 동창회 살림도 여성들이 알뜰살뜰 잘 꾸려 가리라 믿어 의심치 않는다. 사팔뚜기 여자 동창들이여 파이팅! 이로세.
지난 총회 때 올해는 외국으로 여행을 가자는 의견들이 많았는데 회장단에서 의견을 종합하여 대다수 동창들이 원하는 곳으로 가리라 예견된다. 그동안 일곱 차례 여행을 하면서 항상 즐거움이 함께 했으며 언제나 지켜야 할 본분 잘 지켜왔으므로 모든 동창들이 다시 가고픈 생각이 들 정도이다. 어딜 가더라도 우리 서로 존중하고 최소한의 예의를 지킨다면 여행은 우리 동창회의 필수항목이 될 것이다.
제주의 강시정 회장과 서울의 오헌승 회장이 의논 족족 잘 해서 암으로 남은 임기 동안 48회 동창회의 발전에 많은 힘 써 주기를 바란다. 동창회의 발전은 무엇보다 회원들의 참여가 요구된다. 이는 어려운 일이 아니며 우리가 마음속에 꼭 지녀야 할 덕목임을 항상 간직하기 바란다.
지금까지 살아온 세월보다 살아 갈 세월이 훨씬 적게 남았으나 우리가 보내는 시간이 짧게 느끼면 긴 삶을 산다는 의미가 담겨 있다고 한다. 그래서 시간을 아껴 쓴다면 남은 삶은 짧아도 길 것이며 보람의 연속이 될 것이다. "오래 사는 게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떻게 사느냐가 중요한 것이다"라는 말을 되새겨 본다.
이제 모교 개교 100주년기념사업의 일환으로 모교 100년사를 발간함에 있어 우리 동창회의 역사를 기록하는 것을 마감하려 한다. 좀더 시간이 허락한다면 동창들 개개인의 추억들을 집대성하여 작성했으며 더 좋았을 텐데 아쉬움이 많지만 이 정도에서 줄이게 됨을 이해해 주기 바라며 글을 맺는다.
■ 48회동창회 역대 임원명단 (제주)
직위 |
회장 |
고문 |
부회장 |
총무 |
재무 |
감사 |
| |
남 |
여 |
| ||||||
초대 (93, 11월~ 98, 1월) |
김창구
|
|
좌경희 좌길훈,
|
김영순, 고량화
|
문광호 김영주
|
강창남
|
이진근
|
|
2대 (98, 1월~ 00, 3월) |
이진근
|
|
김덕호 좌경희 좌길훈
|
김영순 박경선 하순희 |
김영주(남) 문순정(여)
|
강창남
|
이재윤 고경봉 |
|
3대 (00, 3월~ 02, 3월) |
좌길훈 |
이진근 |
고두승(수석) 이장순 현동규 |
김영순 하순희 고경희 |
김영주(남) 문순정(여) |
양중갑 |
강창근 박경선 |
|
4대 (02, 3월~ 04, 4월) |
고두승 |
이진근 좌길훈 |
이장순(수석) 현동규 김영주 |
고량화 김영순 김헤옥 |
강창근(남) 문순정(여) |
장수방 |
양정헌 박경선 |
|
5대 (04, 4월~ 06, 4월
|
이장순 |
이진근 좌길훈 고두승
|
김용우(수석) 양정헌 현동규 |
고화순 박경선 신희숙 |
강창근(남) 하순희(여) |
장수방 |
양중갑 양옥윤 |
|
6대 (06, 4월~ 08, 4월) |
김용우 |
이진근 좌길훈 고두승 이장순 오행립 |
강시정(수석) 양정헌 강창근 |
고량화 김영순 박경희 |
하순희 |
양안근(남) 고경희(여) |
양중갑 고화순 |
|
7대 (08, 4월~ 현재) |
강시정 |
이진근 좌길훈 고두승 이장순 김용우 오행립 |
양정헌(수석) 김덕호 진순호 |
김정자 문순정 양옥윤 |
하순희 |
문덕훈 양연순 |
양중갑 오안희 |
|
■ 48회동창회 역대 임원명단 (재경)
직위 |
회장 |
부회장 |
감사 |
총무 |
초대 |
임만춘 |
윤영재 좌옥희 |
김경수 오헌승 |
문광호 |
2대 |
고순택 |
윤영재 김경수 좌옥희 |
정계종 김채옥 |
김용임 |
3대 |
오헌승 |
윤영재 정계종 좌옥희 현명순 |
김채옥 |
김용임 |
4대 |
오헌승 |
윤영재 정게종 좌옥희 현명순 |
양선예 |
김용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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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댓글 초등에서 고교까지 12년간이나 우리 선배님 48회가 가장 모범적이라 생각합니다.
청춘을 즐겁게 보내셔야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