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요방의 자녀들은 모두 성공한 인사들이다. 장남 호덕평은 중앙통전부 부부장, 전국공상련합회 부주석이였으며 차남 류호는 화윤그룹 상무리사, 부총경리이였고 삼남 호덕화는 1990년대에 중국과학원 소프트웨어중심에서 나와 사업을 시작했는데 과학기술개발, 조림식수 등 사업을 벌렸다. 딸 리항은 중화의학회 부비서장이고 모 외국계기업의 고위관리직으로 있었다.
“부모는 전형적인 일벌레”
“나는 여러번 모친에게 나의 출생지를 물어봤습니다. 모친의 대답은 ‘기억나지 않는다’는것이였습니다.” 호덕화는 지금도 이것을 유감으로 생각하고있다. 1948년 11월, 병퇀정치부 주임을 맡고있던 호요방은 태원전투의 전선에 나가있었고 부인 리소는 후방의 석가장에 있었는데 출산이 림박했다. 석가장이 국민당의 기습을 받게 되자 리소는 경비원의 도움을 받아 전이했다.
“모친은 겨우 석탄운수차에 올라탔는데 대략 하루이틀 달려가서 도중에 나를 낳았답니다.” 호덕화는 스스로 추산해보고서는 하북성 정형일것이라고 했다.
집안에는 이미 아들 둘이 있었으므로 부모는 모두 딸을 원했다. 그가 출생한후 부친 호요방이 가있는 전선에서 전갈이 왔다. “남자아이라면 돌아가서 볼것도 없겠다”는것이였다. 부모의 실망속에 인간세상에 태여난 호덕화는 출생지도 없었거니와 다른 형제들과 마찬가지로 애명만 있고 정식이름은 없었다.
“저의 부모는 전형적인 일벌레였습니다. 아이를 낳자마자 팽개치고 신경쓰지 않았습니다.” 그래서 호덕화와 형제들은 외할머니손에서 자랐다.
1950년 봄, 사천 북부지역이 해방되였다. 호요방은 식구를 데리고 사천으로 갔다. 온 가족이 만났을 때 호요방의 부친은 애명만 가지고 정식이름을 갖지 못한 아이들을 보고는 가보를 정중하게 끄집어냈다. 할아버지는 부친의 항렬이 요(耀)자 돌림이고 그 아래는 덕(德)자 돌림이라고 했다. 그리하여 차례로 평(平), 안(安), 발, 재로 불렀다. 장남 호덕평, 차남 호덕안, 삼남 호덕발로 되였는데 덕발은 후에 유치원에 들어갈 때 “발”자가 번체자로 쓰기 너무 힘들다고 유치원선생이 호덕화로 바꿔주었다.
1952년, 호요방부부는 사천 남충에서 딸을 낳았다. 집식구들은 아주 기뻐했다. 딸을 낳아 모두들 만족한다고 이름을 만매라고 지었으며 막내이자 딸이여서 사랑을 독차지하다싶이 했다. 만매는 군대에 입대해서야 비로소 리항(李恒)이란 정식이름을 가지게 되였다. 리항은 어머니성을 따른것이였다.
그해 호요방은 중국신민주주의청년단 중앙서기로 임명되였다. 이듬해에 4살난 호덕화는 어머니를 따라 북경으로 왔다. 호덕화의 기억에 의하면 부모가 유치원, 소학교, 중학교를 선택하는 기준은 오직 하나, 전탁이였다.
“어릴 때 나는 아버지한테서 친근함은 느낄수 없었다. 나와 한번도 놀아주지 않은 그이를 어느정도 무서워했다. 어머니는 사업만 했지 집에 대해서는 신경쓰지 않았다. 내 기억속에 어머니는 나를 딱 한번 안아주었다. 어머니품에 안겨 반짝거리는 안경을 마주보는 내가 호기심에 손을 뻗어 안경을 만지자 철썩 하고 어머니손이 내뺨을 때렸다. 놀라서 엉엉 우는 나한테로 외할머니가 황급히 다가와 어머니한테서 나를 빼앗았다. ‘아니, 한번도 아이를 안아주지 않더니 한번 안으면서 어떻게 때릴수 있어?’그러자 어머니는 ‘얘가 안경을 망가뜨리면 저는 래일 어떻게 사업을 해요.’라며 성을 냈다.”
네 아이 세가지 성
호요방의 네 자녀는 각각 부모의 성을 따서 호씨와 리씨 성을 가진외에 류씨도 있다. 어려서부터 다른 사람에게 양자로 보내여진 차남의 성이 류씨였다.
1945년 겨울, 전선에 나가게 되자 호요방부부는 어쩔수 없이 40일도 되지 않은 차남을 섬서북부 농촌의 류세창에게 보냈다.
그러면서 류세창에게 아이를 다시 다른 사람에게 보내지 말고 나중에 아이를 학교에 보내며 자유련애로 결혼하게 해달라는 부탁을 남겼다. 호요방은 아이가 류씨성을 가지도록 했다. 류세창은 얻은 아들에게 이름을 류호라 지었다. 호는 호요방의 호자와 발음이 같기때문에 두 성을 한꺼번에 쓴것이였다.
해방후 류세창일가는 청해로 갔다. 그는 집안살림이 어려웠으나 호요방의 부탁을 잊지 않고 류호를 학교에 보냈다. 13살에 류호가 우수한 성적으로 소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호요방은 아들을 한번도 찾지 않았다.
호요방이 이미 북경에 자리를 잡은 뒤 류세창부부는 수차 망설이다가 류호를 북경에 돌려보냈다. 당시 호요방은 류세창을 보고 깜짝 놀랐다. 한참동안 말을 잇지 못하던 호요방은 류호의 머리를 툭 치면서 류세창이 영원히 아버지란것을 기억하라고 말했다. 이후 매번 겨울방학과 여름방학이 되면 류호는 류세창부부를 보러 갔다.
“주자파”의 후대
문화대혁명시기 호요방은 자본주의집권파로 몰려 하남성 횡천현 황호농장에 가서 로동개조를 했다. 부인 리소는 격리심사를 받았고 나이 칠순인 외할머니는 안휘 고향집으로 보내여졌다. 부친의 비서, 운전기사도 모두 가버렸다. 만매는 혼자서 큰집에서 살았다. 집은 텅텅 비여있었다.
당시 고중에 다니고있던 호덕화는 청화대학에 입학하여 공정사가 되는것이 꿈이였다. 그런데 고중 1학년을 마치자마자 북경시정제2공사로 가서 도로수리를 맡게 되였다.
호덕화는 1973년에 중경통신학원에 합격됐다. 졸업후 남경통신학원에서 교편을 잡고 10년간 그곳에 눌러있었다. 1986년부터 중국과학원 소프트웨어연구중심에서 사업을 시작했다.
류호는 원래 청화대학 화학공업학부를 다녔는데 1966년 5월에 예비당원이 되였다. 일반당원의 예비고찰기간은 1년인데 비해 그는 입당한지 1년만에 문화대혁명을 만나다보니 1980년대에 정식당원이 되기까지 10여년을 예비당원으로 있었다.
맏이 호덕평은 “문화대혁명”때문에 운명이 바뀌였다. 1962년에 그는 북경대학 력사학부에 입학했다. 1967년 졸업하기 전날에 등소평, 호요방이 “자본주의집권파” 타도대상이 되면서 등박방과 호덕평도 “흑오류”자녀가 되여버렸다. 그는 북경대학에서 타도대상이 되였다. 그때 그는 심신에 극도의 상처를 받았다.
문화대혁명후에 호덕평은 석사연구생이 되였다. 졸업후 국가력사박물관에서 연구사업을 했다. 1984년 호덕평은 중공중앙 정당령도소조의 특파원이 되여 호북성으로 갔다. 그곳에서 그는 한때 인기를 끌었던 여론간행물을 창간했다. 호덕평은 후에 중공중앙통전부 비서장을 지냈고 나중에 통전부 부부장으로 승진했다.
흐르는 세월속에서 온갖 풍상고초를 다 겪은 호씨집안 자녀들은 지금 편안하게 생활하고있다.
(중국《환구인물》에서 발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