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엘리트 문자와 민주문자
'The Alphabet' 를 저술한 언어학자 Diringer는 문자를 democratic 문자와 elite문자 두 가지로 분류한다
엘리트 문자는 이집트나 중국의 상형문자처럼 갯수도 많고 배우기 어려워 1%의 지식층만 독점하는 문자이고, 민주 문자는 알파벳처럼 누구나 배우기 쉬워서, 정보와 지식을 모든 사람에게 공유할 수 있는 문자이다
세종대왕이 한글을 만든 계기는 조선왕조실록을 보면 진주의 김화가 아버지를 죽인 패륜에서 비롯되었다.
충효를 중시하던 당시의 패륜은 세종을 비탄스럽게 했고 신하들에게 이를 논했는데, 변계량이 '좋은 사례들을 많이 들려주는 것이 백성들에게 바른 길로 가게 하는 것'이라고 아뢴다. 그래서 만들어진 것이 '삼강행실도'다. 그러나 그림만으로는 한계가 있어 백성이 깨우치기 쉬운 문자를 연구하기 시작한 것이다
한글은 민주글자를 넘어 애민과 복지와 계층간 소통과 정보의 간극을 없애는 위대한 글자였다
그러나 한글이 반포되자 최만리를 중심으로 관료와 지식층은 강력하게 반발했다. 한자 포기는 그들의 기득권 시스템에 대한 위협이라고 규정짖고, 작금의 반미와 종북취급을 한 것이다. 세종의 낙담과 좌절은 어떠했을까?
그 후, 400여년 동안 한글은 인정받지 못하고 아녀자들의 글로 명맥을 유지했다.
만약 창제 반포 후, 즉각 사용되었다면 한국의 지식 정보 문화는 어떻게 되었을까?
왜 결정적인 혁신들은 기득권층에 의해 늘 방해받고 퇴행되는 걸까?
스위스의 인쇄박물관 기록에 의하면, 세종대왕과 같은 해에 태어난 구텐베르그는 , 당시 교황 사절단이 조선을 방문한 이후 얻어온 12세기부터 발전된 고려의 금속활자 기술서적 '直指'(직지심체요절:1377년 충북 청주 흥덕사 9권 제작)를 보고, 유럽의 삼강행실도와 같은 대중교육 표본인 'Bible'('book'이라는 의미의 성경)'을 대중화시키려는 의도로 금속활자로 찍어(1466)대박쳤지만, 그의 의도와 달리 오히려 프로테스탄트의 융성이란 예상치 못한 상황에 부딫친다
쉬운 문자인 알파벳에 의한 성경 발간이후 40년만에 유럽 110개 도시에 인쇄소가 설치됐고 그뒤 10년만에 인쇄술로 발간된 서적수가 800만권에 이르고 인문학이 발전하면서 상공인들은 대학을 세우기 시작했으며 독일의 문자 해득률이 25%에 이를 정도로 지식정보혁명이 일어났지만, 브르조아층은 오늘날의 권력과 결탁한 사법부와 언론처럼 '해석의 권한'을 제한.독점하면서 대중의 사고를 통제하기 시작하고, 오늘날에는 '좋은 사례'보다 나쁜 뉴스로 도배하며 대중교란전략으로 권력을 독점 중이다
2005년 5월 신라호텔에서 열린 '서울디지털포럼 2005'에서 한국의 정보기술(IT) 발전에 대해
앨고어는 "한국의 디지털 혁명은 역사적으로 보면 두 번째로 획기적이고 혁신적인 기술발전에 기여하는 사례로...전세계가 인쇄술에 이어 한국으로부터 두번째로 큰 혜택을 보게 되는 것"이라고 했지만, 2mb정권의 IT위원 안철수는 자기 것외에 몽땅 셧다운제로 방치시키며 마누라와 같이 S대에 취직하고, 참여정부의 세계2위 IT위상과 정보통신혁명은 역주행을 시작한다
그가 주장하는 4차산업혁명이 왜 키를 쥐고 있을때 후퇴했는지 아이러니하지 않은가?
■ 집단지성, 논객들의 등장과 '미네르바'
게다가 당시 2mb정권은 가방끈 짧은 무직자가 기득권층을 넘 봤다고 미네르바라는 논객을 정신병자 취급하고, 진보측에서조차 자살회유를 했었다
결국 모멸적 처우와 수치스러운 구치소 생활 후, 무죄 판결로 끝났지만, 그는 이 사회의 양쪽 진영의 추악한 마녀사냥을 당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사회 기득권층의 양 극단에는 가방끈 짧은 것을 용납하지 않는 소위 SKY 기득권층과 그 집단의 386 운동권이, 노대통령과 문재인 등 소외계층을 위해 헌신해 온 비주류 잡대들과 재야의 온라인 지성들인 논객들을 업신여기는데 공조 했으며, 소위 닉언죄라는 자기검열 '미끼효과'를 대량 유포하며, 논객들이 부각되거나 그들과의 친목인 오프라인 번개를 막고, 변씨같은 보수논객을 부각시키는데 성공한다
모두 그가 IT위원이었던 정권하에서 일어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