Claude Lorrain
클로드 로랭
Landscape with Dancing Figures
1648, Oil on canvas, 149 x 197 cm
National Gallery, London
본명 Claude Gellée
1600 프랑스 샤마뉴 ~ 1682. 11. 23 이탈리아 로마
프랑스의 화가
개요
자연을 실제보다 더 아름답고 조화로운 모습으로 이상화한 풍경화로 유명하다. 이런 그림들은 고전적인 발상에서 나온 독특한 아름다움을 보여주며, 풍경 속에는 대개 고전시대의 유적과 고전의상을 입은 목가적인 인물들이 등장한다. 그는 주로 로마 근처 캄파니아 지방에 있는 유적 등에 착상을 얻었다. 이상풍경화가 번성한 17세기 당시 이런 그림을 그린 사람들은 여러 나라에서 로마로 모여든 화가들이었으며 뒤에 이 양식은 다른 나라들로 퍼져나갔다. 시적인 광선 묘사로 이 양식의 발전에 크게 이바지한 클로드는 동시대뿐만 아니라 18세기 중반부터 19세기 중반까지 특히 영국에서 매우 중요한 비중을 차지했다.
생애와 작품
영어로는 보통 간단하게 클로드라고 불리는 그는 당시 독립된 로렌 공국의 샤마뉴 마을에서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났다. 학교교육은 거의 받지 못했으며, 그의 첫번째 전기작가인 요아힘 폰 잔드라르트에 따르면 제과기술을 익혔다. 그의 부모는 그가 12세 때 죽은 것으로 보이며, 그는 그뒤 몇 년이 지나지 않아 로마로 갔다. 로마에서 그는 이탈리아의 풍경화가이며 환상적인 건축 프레스코의 주요한 제작자인 아고스티노 타시에게 미술을 배웠다. 그가 얼마 동안 도제 교육을 받았는지는 불확실하며, 이 시기 이전이나 그 동안에 클로드는 타시의 또다른 제자인 고프레도 왈스와 함께 나폴리에서 2년을 보낸 것으로 보인다. 타시는 클로드에게 건물과 작은 인물들이 있는 풍경과 해안 경치를 그리는 기본적인 기법을 가르쳐주었고 그가 원근법과 풍경화에 지속적으로 관심을 가지도록 이끌었다. 그의 2번째 전기작가인 필리포 발디누치에 따르면, 클로드는 1625년 타시와 헤어져 로렌의 수도인 낭시로 돌아가서 1년 동안 클로드 드뤼에의 조수로서 카르멜 수도회 교회의 프레스코(그뒤 파괴됨) 작업에 참여했다. 그러나 1626~27년 겨울에 클로드는 로마로 돌아가 그곳에 영주했다. 그는 결혼한 적은 없지만 아그네세(1653~1713경)라는 딸이 하나 있었다. 그밖에 1633~56년경에는 그의 제자 조반니 도메니코 데시데리가, 1663년경부터는 조카인 장이, 1680년경부터는 역시 조카인 조제프가 그와 함께 살았다. 1633년 클로드는 활동 범위를 넓히기 위해 화가들의 모임인 성 루카 아카데미에 가입했다.
그의 성격에 관해서는 알려진 것이 거의 없다. 그는 공공행사에 참가하지 않았으며 작품 활동에만 전념했다. 초기에 그는 다른 미술가들, 특히 자신과 마찬가지로 유럽 북부에서 태어난 미술가들과 사귀었지만, 40대에 들어서면서 더욱 외톨이로 살았던 것이 틀림없다. 그는 이상풍경화의 대가인 프랑스의 화가 니콜라 푸생과 가까이 지냈지만, 그들 사이에 미술과 관련된 접촉은 거의 없었다. 그는 공식적 교육을 거의 받지 못했지만 전설도 모르는 무지한 농민은 아니었다. 그림의 주제로 보아 성서와 오비디우스의 〈변형담 Metamorphoses〉 및 〈아이네이스 Aeneid〉에 관해 충분한 지식을 가지고 있었음을 알 수 있다. 그는 시골에 대해 특별한 느낌을 가지고 있었는데, 그의 생활 방식은 부르주아적이었다. 그는 소박한 가정 환경에서 자랐기 때문인지 부지런하고 상냥하고 빈틈이 없었으며, 미술가로서 대단한 인기를 끌었고 노년기에 들어 성공하여 풍족한 재산을 모았다.
1627년 이전의 작품은 남아 있지 않은데 아마 그는 그때 이후 비로소 풍경화를 시작한 것으로 생각된다. 연대가 적혀 있는 최초의 작품은 〈소떼와 농민들이 있는 풍경 Landscape with Cattle and Peasants〉(1629, 필라델피아 미술관)이다. 그뒤 1630년대초에 곧 그는 명성을 얻기 시작했다. 그의 명성은 풍경을 그린 프레스코 연작(로마의 크레센치 궁전에 있는 작은 프리즈를 제외하고 모두 소실됨) 덕분이기도 했지만, 발디누치는 그 주된 이유가 "태양, 특히 바다 위에 떠 있거나 새벽과 저녁 무렵 강 위에 걸려 있는 태양에 의한 자연의 모습"을 묘사하는 데 뛰어났기 때문이라고 했다. 1637년경 교황 우르바누스 8세와 여러 명의 추기경 및 스페인의 펠리페 4세로부터 의뢰받은 작품들로 클로드는 이탈리아에서 주요한 풍경화가가 되었다.
1635~36년 그는 〈진실의 책 Liber Veritatis〉(런던 대영박물관)의 제작을 시작했다. 이것은 클로드가 자신의 그림들을 본떠 꼼꼼하게 묘사한 195점의 소묘가 들어 있는 진기한 책으로, 소묘들의 뒷면에 그 그림을 의뢰한 고객이나 그것을 걸게 되어 있는 장소 등의 세부 사항들이 기록되어 있으며, 책의 후반부에는 그림의 연대가 적혀 있다. 1635년 이전에 그린 그림 대부분과 그뒤에 그린 몇 점의 그림들은 포함되어 있지 않지만, 〈진실의 책〉은 연대순으로 편집되었으며, 그의 고객들을 밝히고 있을 뿐만 아니라 그의 미술의 발전과정에 대한 매우 귀중한 기록을 제공하고 있다. 그가 발디누치에게 말했듯이 그의 모사품으로부터 그의 그림들을 보호하기 위해 만들어진 이 책은 클로드의 재산 목록 1호가 되었으며 그 자체로도 훌륭한 미술작품이었다. 그는 또한 이 책을 새로운 작품을 위한 모티프의 저장고로도 사용했던 것 같다.
여러 나라에 걸쳐 있는 클로드의 고객들은 주로 귀족들이었는데 대부분이 프랑스나 이탈리아의 귀족들이었다. 그는 성미가 까다롭고 비싼 가격을 요구하는 미술가였다. 그는 반드시 주문을 받아 작품을 제작했는데 처음에는 중개인을 통해 그림을 팔기도 했지만 뒤에는 고객들과 직접 협상하여 작품의 크기·가격·주제를 결정했다. 처음에는 그림을 빨리 그렸지만 얼마 후부터 제작 속도가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의 후기 작품들은 초기의 것보다 대체로 크고 훨씬 더 꼼꼼하게 그려졌다. 그가 그린 총 300여 점의 그림들 중 250여 점과 1,000여 점이 넘는 소묘들이 지금까지 남아 있으며, 그는 또한 44점의 에칭을 제작하기도 했다.
양식의 발전
클로드의 그림들은 기법과 의도 면에서 일관성을 유지했지만 점차적인 양식의 발전을 보여주기 때문에 단계별로 구분할 수 있다. 타시 및 네덜란드와 플랑드르 미술가들의 영향을 보여주는 초기 작품들은 활기 차고 생생하며 회화적이다. 그것들은 매력과 놀라운 효과들로 가득 차 있다. 동판에 그린 작은 그림들은 1610년에 로마에서 죽은 독일의 미술가 아담 엘스하이머 의 성향을 반영하고 있다. 그의 것으로 확인된 작품은 하나도 없지만, 이 시기에 클로드는 가끔 자연을 직접 사생하기도 했는데 보통 소묘를 통해 자연을 탐구했다. 초기의 그림들에 많이 보이는 유형은 전경(前景)의 한쪽에 짙은 색조의 무성한 나뭇잎들이 있고 다른 한쪽에는 어렴풋이 햇빛을 받고 있는 원경(遠景)이 대조를 이루고 있다. 소떼나 염소떼를 돌보는 목동들이 나무 밑에서 나오고 있거나 시냇가에 앉아 있다. 그와 동시에 클로드는 전통적인 주제인 배들이 있는 해안가 풍경을 새롭게 항구의 장면으로 발전시켰다. 이 그림은 화면의 한쪽이나 양쪽에 궁전들이 있는 항구의 풍경으로, 궁전들은 고대나 동시대의 실제 건축물들을 기초로 각색하여 이상화한 경우가 많다. 정박해 있는 큰 배들은 방금 막 도착한 모습이거나 곧 떠날 채비를 하고 있다. 그러나 항구를 그린 그림에서 가장 중요한 특징은 빛이다. 빛의 원천은 대개 수평선 위로 막 떠오른 태양인데, 그는 1634년 〈항구의 풍경 Harbour Scene〉에서 이것을 처음으로 표현했으며, 이렇게 태양이 그림 전체를 비추게 하는 방법은 미술에서는 이때 처음 사용된 것이다. 빛이 태양에서 직접 발산되든 그렇지 않든 간에 수평선 위의 하늘에서 퍼져나오는 빛을 사용함으로써 클로드의 그림들의 또다른 특징인 심원한 깊이가 강조되고 있다. 특히 전경에서 배경으로 가면서 윤곽과 색의 선명도가 점점 약해지면서 얻어지는 미묘한 분위기의 원근법에 의해 더욱 심원한 느낌을 준다. 대체로 새벽이나 저녁의 빛을 그림으로써 시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1640년초부터 그는 좀더 고전적 기념비적인 구도를 그리기 시작했다. 타시를 비롯한 북부 미술가의 화풍 대신 동시대 볼로냐파의 풍경화, 특히 도메니키노의 작품들의 영향이 나타났다. 그림에서 한 쪽에 키가 큰 나무들을 그리고 다른 쪽의 뒤편에는 이보다 작은 나무들과 고대 유적들을 그려 균형을 이룬다거나, 전경 부분을 무대로 삼아 인물들을 그려넣거나 탁 트인 풍경을 거쳐 수평선에 이르기까지 시선이 천천히 따라가도록 강을 구불구불하게 그린다거나, 대개 어렴풋이 바다가 보이는 언덕들을 원경으로 그리는 등의 그의 구도상의 원칙은 이 당시의 10년 사이에 이루어진 것이다. 인물들은 그시대의 의상 대신에 고전적이거나 성서에 나오는 복장으로 묘사되는 경우가 대부분이었다. 널리 알려진 견해와 달리 클로드는 모든 인물을 혼자서 직접 그렸다. 인물들은 단순한 양치기일 때도 있지만, 고전시대의 신화나 종교 사이에 끌어낸 주제를 나타내고 있는 경우가 많다. 빛은 초기나 후기의 그림들에서보다 더욱 선명하며 넓고 고요한 구도는 1648년의 연대가 적혀 있는 〈풍경 : 이삭과 리브가의 혼인 Landscape : The Marriage of Isaac and Rebekah〉(〈방앗간 The Mill〉이라고도 함)에서 볼 수 있듯이 고른 빛으로 가득 차 있다.
1650년대에 클로드는 〈산상설교 The Sermon on the Mount〉와 같이 훨씬 더 크고 장엄한 그림들을 몇 점 그렸다. 1660년대 중반에 그의 양식은 마지막 단계에 이르는데, 그의 가장 뛰어난 걸작들 중 몇 점이 이 시기에 나왔다. 색의 범위는 제한되고 색조는 차분하고 은빛을 띠고 있다. 인물들은 이상하리만큼 길쭉하고 관습적인 기준에 따르면 서투르게 그려져 있다. 그와 동시에 주제가 분위기를 결정지으며 때때로 풍경의 구도를 규정하고 있다. 이 시기의 그림들은 진지하고 신비스러우며 숭고한 시적 정서를 발산하고 있다. 클로드는 이러한 성향에 따라 그의 유명한 작품인〈마법에 걸린 성 The Enchanted Castle〉을 그렸다.
소묘가로서의 업적
클로드의 소묘는 회화 작품 못지않게 중요하다. 그중 절반가량은 자연을 대상으로 한 습작들이다. 분필이나 펜 또는 수채화 물감으로 자유분방하게 그린 이 소묘들은 그의 그림이나 작업실에서 그린 소묘들보다 훨씬 자연스러우며 그가 캄파니아에서 사생 여행을 다니면서 본 평범한 모티프들, 즉 나무와 유적, 폭포, 강둑, 햇빛을 받고 있는 들판 등을 보여준다. 상당수가 장정본에 그려졌지만 뒤에 낱장으로 분해되었다. 작업실에서 그린 소묘 가운데 일부는 그림들을 위한 준비 과정(클로드는 예전의 어떤 풍경화가보다 더욱 꼼꼼하게 작품을 준비했음)이고, 나머지는 그 자체를 목적으로 그린 구도들이다. 일부는 그림들을 본뜬 모사품들로 〈진실의 책〉에 포함된 소묘들과 비슷하다. 그는 죽을 때까지 거의 모든 소묘들을 그의 작업실에 보관했다.
클로드는 1682년에 죽었고 로마의 산타트리니타데이몬티 교회에 묻혔다. 그의 제자로는 몇 점의 소묘만이 알려져 있는 데시데리 이외에 안젤루초(1640경~50 활동)가 있었으나 클로드의 그림들은 1630년대 후반과 1640년대에 헤르만 반 스와네벨트와 얀 보트, 클라스 베르헴 등 로마에서 활동한 네덜란드 미술가들에게 특히 영향을 미쳤다. 그는 또한 17세기의 프랑스 미술가 피에르 파텔에게도 영향을 주었다. 클로드의 후기 작품은 그의 생전에는 그다지 인기가 없었다. 존 우턴, 조지 램버트, 리처드 윌슨과 같은 영국의 화가들을 중심으로 1750년경 그의 미술을 부흥시키려는 작업이 시작되었지만, 보다 넓은 의미에서 그의 미술은 J.M.W.터너와 새뮤얼 파머에 이르기까지 1세기 동안 영국 풍경화가들의 양식에 큰 영향을 미쳤다. 18, 19세기초의 영국인들은 클로드의 작품을 매우 열심히 수집했다. 지금까지도 그의 그림이 가장 많이 있는 곳은 영국이며, 그의 소묘 중 절반가량이 대영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클로드의 명성은 19세기 후반에 러스킨의 미술 비평으로 떨어지기 시작했다. 러스킨은 클로드의 작품이 과학적인 진리에 비추어 판단하면 진부하고 엉성하다고 생각했다. 클로드의 명성은 1800년경 절정에 이르렀으며 현재까지도 높이 평가받고 있다. 클로드의 차분하고 매력적인 미술은 여전히 신선한 아름다움과 시각적인 평온함을 제공하고 있다.
M. W. Lely Kitson 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