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처음 웨슬리 선교사님을 만난 것은 1974년 의예과를 다닐 때였다. 그는 상하의가 통으로 연결된 청색 작업복을 입고 있었는데, 빛이 바래고 군데군데 때가 묻어 있었다. 버지니아공대 출신인 그는 당시 전주예수병원에서 관리부장으로 전문성을 발휘하고 있었다. 1972년 전주시에서 처음으로 엘리베이터가 설치된 신축 병원의 건물뿐 아니라 의료기와 모든 설비를 총괄하고 있었다.
자신을 배관공(Plumber)이라고 소개하기도 하는 공대 출신 기술자가 책을 나눠준다는 소문이 내 귀에도 들렸다. 지금 생각하면 내 인생에 일어날 수 있는 몇 안 되는 소중한 만남이 시작된 것이었다. 지금처럼 미리 약속할만한 방법이 별로 없던 시절인지라 나는 무작정 전주예수병원을 찾아갔고, 관리부 창고에 있는 허름한 사무실에서 웨슬리를 만났다. 당시는 지금처럼 우리나라의 기독교 도서 출판이 활발하지 못했던 때였고, 신앙적, 지적 갈증을 덜기 위해서 용돈을 아껴 새벽에 도착하는 야간열차로 서울에 가곤 했었다. 광화문에 있는 ‘생명의 말씀사’가 문을 열면 서점 한쪽에 있는 외국도서를 접할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이런 시절에 만난 웨슬리는 그 이래로 변함없이 ‘문서 선교사’라는 타이틀에 너무나 정확히 어울리는 삶을 살았다.
전주의 중화산동에는 선교사들이 세운 여러 학교들(신흥중고, 기전여중고, 한일여자신학교 등)과 전주예수병원이 있어서 꽤 선교사들이 있었는데, 내가 본 선교사들은 대부분 고개를 들고 올려다보아야 할 만큼 키가 큰 것 말고도 여러 면에서 다가가기에는 적잖이 용기가 필요했다. 그러나 그는 말투도 부드럽고 위압적인 태도나 외모와는 거리가 멀었다. 처음 만난 그는 키까지 작아서 한국 사람과 쉽게 친해질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1964년에 한국에 온 이래 구순을 바라보는 지금까지 그의 삶은 내 첫인상과 다르지 않았다.
처음 받은 책은 루이스 벌코프(Louis Berkhof)의 <조직신학>을 요약한 이라는 책이었는데 대학생 때 신학을 혼자서 공부하는 출발점이 되었다. 의사가 된 후로는 자연스럽게 의료인으로서 삶의 현장에서 어떻게 기독교 신앙을 살아낼 것인지 생각하게 하는 책과 논문을 보내줌으로써 끊임없는 자극을 주셨다. 그리스도인으로서 끊임없이 질문하는 삶을 살라는 것이었다. 일하는 곳이 어디이든 질문하는 자세로 산다는 것은 의료의 영역에서도 이원론을 극복하려는 세계관적 몸부림으로 이어지게 한다. 생명의 기원과 시작과 끝, 삶의 질에 속하는 윤리적 문제를 대면하면서(?), “의료는 인술이 아니라 비즈니스입니다!”라고 강조하는 병원 경영자 회의에 앉아있으면서, 국가적 의료 시스템이 왜곡시킨 의료 현장을 안타까워하면서, 나아가 르완다 난민촌이나 선교지 나이지리아에서 한정된 자원으로 의료 선교를 수행할 때 어떻게 우선순위를 정할 것이냐는 현실적인 문제에 이르기까지, 의료인은 아니었지만 웨슬리 선교사님이 던져준 도전은 늘 나를 따라와 내 삶의 현장에 있었다.
사실 그는 흔히 선교사들이 시도하는 큰 프로젝트를 시도하지 않았던 것 같다. 그러나 한번 누구와 관계를 맺으면 절대 놓지 않았다. 그저 “우리 인간의 모든 실존 영역을 통치하시는 그리스도께서 내 것이라고 하시지 않을 곳은 단 한 평도 없다”는 카이퍼(A. Kuyper)의 말을 전하기 위해 그의 방식대로 평생을 일관되게 살아온 것이다. 그는 다양한 영역에 몸담고 있는 우리나라 그리스도인 지성인들에게 책을 매개로 다가와 준 하나님의 선물이었다. 그를 만난 각 사람에게도 선물이었지만, 그가 서로를 연결하고 만날 수 있도록 중재자가 되어준 것 또한 IVF와 기독교학문연구회 등과 같은 많은 열매로 맺어진 선물이었다.
요즘에 선교에서 BAM(Business as Mission)이나 자비량 선교가 중요한 흐름의 하나가 되었지만, 그는 일찍이 그 길을 택했다. 전주예수병원에서 일할 때나 미군 부대와 원조로 진행된 수원지역 지역개발사업에서도 전문 분야 엔지니어로 일을 하면서 생활비를 벌었고, 그 돈의 상당 부분으로 책을 구하여 IVF는 물론 개인적으로 주인을 찾아주는 수고를 평생 해온 것이다. 선교사 타이틀도 없이 가장 영향력 있는 선교사가 되었다.
그는 도움이 필요한 일을 민감하게 감지하고 세세한 부분까지 도움을 주는 수고를 아끼지 않았다. 미국의 생명윤리 학자 페인(F. E. Payne)의 책 을 ‘한국누가회 출판부’(CMP)를 통해 번역 출간한 일이 있었다. 이런 일에 문외한이었던 나는 어떻게 번역 허락을 받을지 망설이고 있었다. 웨슬리는 저자에게 보낼 견본 편지를 써 보내주면서 이 일을 그만두지 못하게 하기도 했다.
웨슬리 선교사님은 미국에서 1935년에 태어났지만 1965년 30세 젊은 나이에 한국에 들어와 우리나라에 산 기간이 57년이 될 만큼 나이(87세)가 드셨다. 수년 전 건강이 나빠져서 고비를 넘긴 적도 있었지만, 그 외에 몇 차례 의료적 작은 도움을 드린 적이 있었다. 자연스럽게 그는 자신의 사후에 어떻게 할 것인지에 대한 말씀을 꺼내셨다. 그는 자신이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는 한국을 떠나지 않고 이 땅에 묻히기를 원했다. 이야기를 이어가면서 본인이 일했던 전주예수병원의 선교사 묘지가 있는 ‘선교 동산’에 묻히셨으면 하는 마음을 읽게 되었다. 나의 병원장 임기가 끝난 후여서 이 뜻을 전주예수병원에 전했고 후임 병원장과 전주예수병원 이사회는 흔쾌히 이를 허락하였다. 더욱 감사한 것은 이제 웨슬리 선교사님이 법적으로도 한국인 국적을 가지게 되었다는 것이다.
상식과 지성의 틀을 견지하지 못하고 균형을 잃은 한국 교회의 안타까운 면면을 접하게 될 때마다, 이를 위해 50년 이상 낯선 땅에서 웨슬리 선교사님이 이어온 삶이 아직 끝나지 않은 길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 길을 이어가기 위해 바통을 받아야 할 사람은 그와의 만남을 통해 용기를 내서 이원론적 삶을 선택하지 않으려 노력하고 있는 자들이 아니겠는가.
첫댓글 하나님의 선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