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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광주대교구 꾸르실리스따 원문보기 글쓴이: 이선정스테파노
2025년 1월 14일 화요일
[(녹) 연중 제1주간 화요일]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아멘+
말씀의 초대
히브리서의 저자는, 만물은 하느님을 위하여 또 그분을 통하여 존재한다고 한다(제1독서).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권위 있게 가르치시고,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을 고쳐 주신다(복음).
제1독서
<하느님께서 구원의 영도자를 고난으로 완전하게 만드신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 히브리서의 말씀입니다. 2,5-12
5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지금 말하고 있는,
곧 앞으로 올 세상을 천사들의 지배 아래 두신 것이 아닙니다.
6 어떤 이가 어디에선가 이렇게 증언하였습니다.
“인간이 무엇이기에 그를 기억해 주십니까?
사람이 무엇이기에 그를 돌보아 주십니까?
7 천사들보다 잠깐 낮추셨다가 영광과 존귀의 관을 씌워 주시고
8 만물을 그의 발아래 두셨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이렇게 만물을 그의 지배 아래 두시면서,
그 아래 들지 않는 것은 하나도 남겨 놓지 않으셨습니다.
그런데도 우리가 보기에는
만물이 아직도 그의 지배 아래 들지 않았습니다.
9 그러나 우리는 “천사들보다 잠깐 낮아지셨다가”
죽음의 고난을 통하여 “영광과 존귀의 관을 쓰신”
예수님을 보고 있습니다.
이렇게 그분께서는 하느님의 은총으로 모든 사람을 위하여
죽음을 겪으셔야 했습니다.
10 만물은 하느님을 위하여 또 그분을 통하여 존재합니다.
이러한 하느님께서 많은 자녀들을 영광으로 이끌어 들이시면서,
그들을 위한 구원의 영도자를
고난으로 완전하게 만드신 것은 당연한 일이었습니다.
11 사람들을 거룩하게 해 주시는 분이나
거룩하게 되는 사람들이나 모두 한 분에게서 나왔습니다.
그러한 까닭에 예수님께서는 그들을 형제라고 부르기를
부끄러워하지 않으시고, 12 이렇게 말씀하십니다.
“저는 당신 이름을 제 형제들에게 전하고
모임 한가운데에서 당신을 찬양하오리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하느님, 감사합니다.
복 음
<예수님께서는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다.>
✠ 마르코가 전한 거룩한 복음입니다. 1,21ㄴ-28
카파르나움에서,
21 예수님께서는 안식일에 회당에 들어가 가르치셨는데,
22 사람들은 그분의 가르침에 몹시 놀랐다.
그분께서 율법 학자들과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23 마침 그 회당에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이 있었는데,
그가 소리를 지르며 24 말하였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
25 예수님께서 그에게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 하고 꾸짖으시니,
26 더러운 영은 그 사람에게 경련을 일으켜 놓고 큰 소리를 지르며 나갔다.
27 그러자 사람들이 모두 놀라,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저이가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 하며
서로 물어보았다.
28 그리하여 그분의 소문이 곧바로
갈릴래아 주변 모든 지방에 두루 퍼져 나갔다.
주님의 말씀입니다.
◎ 그리스도님, 찬미합니다.
오늘의 묵상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을 만나십니다. 그가 이렇게 외칩니다. “나자렛 사람 예수님, 당신께서 저희와 무슨 상관이 있습니까? 저희를 멸망시키러 오셨습니까? 저는 당신이 누구신지 압니다. 당신은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십니다”(마르 1,24).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의 고백이지만 마르코 복음서에 등장하는 첫 번째 신앙 고백으로 그 나름 괜찮아 보입니다.
그러나 예수님께 자신들과 무슨 상관이 있는지, 멸망시키시러 오셨는지를 묻는 이 말은 그 고백이, 그 앎이 사실은 제대로 된 것이 아님을 명백히 보여 줍니다. 주님께서는 우리와 상관이 있으신 분이십니다. 그분 눈에 우리는 소중합니다. 그분께서는 우리의 멸망이 아닌 구원과 행복을 바라십니다. 그러기에 가만히 계시지 못하고 우리 사이에 들어오시려 한 것이지요. “인간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기억해 주시나이까? 사람이 무엇이기에 이토록 돌보아 주시나이까?” 화답송 시편의 이 말씀 그대로입니다.
그러한 관심과 사랑 때문에 주님께서는 우리와 같은 한 형제가 되셨습니다. 전혀 부끄러워하시지 않고 기꺼이 그 길을 가셨다는 것이 오늘 독서의 말씀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우리와 무슨 상관이냐, 관심 꺼라.’ 하고 적대감을 드러내며 무관심을 내세우는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에게 분명하고 단호하게 말씀하십니다.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마르 1,25). 우리 또한 사람들 사이에서 아픔과 상처를 겪으며 살다 보니 적대감과 무관심과 체념의 언어를 자신도 모르게 되풀이하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는 주님의 말씀을 명심하여 그러한 속임수에 걸려들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는 모두 형제자매입니다. 다른 어떤 말도 필요 없습니다. 오직 주님께서 보여 주신 사랑과 평화의 길로 모두 함께 나아갑시다.(김동희 모세 신부)
권위가 있는 말엔 항상 이것이 섞여 있다
전삼용 요셉 신부님
첫 어부들을 제자로 뽑으신 예수님은 이제 본격적으로 사람 낚는 일을 시작하십니다. 그 일을 시작하시며 오늘 복음에서 강조하는 것은 ‘권위 있는 가르침’입니다.
복음 전파자의 권위는 ‘성령’입니다. 성령만이 악령을 쫓아낼 힘을 주십니다. 예수님은 회당에 있던 더러운 영이 들린 사람을 쫓아내십니다. 그러자 사람들은 “이게 어찌 된 일이냐? 새롭고 권위 있는 가르침이다. 저이가 더러운 영들에게 명령하니 그것들도 복종하는구나”라며 놀라워합니다.
권위 있는 가르침과 악령을 쫓아내시는 것은 무슨 관계가 있는 것일까요? 가르침은 말로 하는 것이고 악령은 성령으로 쫓는 것인데 말입니다. 그러나 말에 성령의 힘이 더해지면 사람에게서 악령이 떠나가게 되는데 그런 가르침이라야 권위가 있는 것임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권위가 없는 가르침은 어떤 것일까요? 금쪽같은 내 새끼와 같은 프로에 보면 아이들은 부모 말을 듣지 않습니다. 아이들의 문제라고만 치부해버릴 수 있을까요? 부모의 말에 왜 권위가 사라졌는지 알아야 합니다.
예수님은 성령을 받으시고 광야에서 40일간 단식하시며 당신 자신과 싸우셨습니다. 성령이 말의 권위인데, 이 성령은 필연적으로 자기가 자기 자신을 이기게 합니다. 이때 흐르는 피가 말과 섞을 때야 말에 권위가 생기는 것입니다.
무더운 여름날, 한 젊은 스님이 수박을 사러 5일장에 들렀습니다. 완벽하게 익은 수박을 조심스럽게 골라 값을 지불한 스님은 버스 정류장으로 돌아가던 중이었습니다. 갑자기 뒤에서 누군가가 치고 가서 수박이 땅에 떨어져 조각조각 부서졌습니다.
“이보시오! 남의 수박을 깨뜨린 뒤 어떻게 그냥 가버릴 수가 있어요?” 스님이 소리쳤습니다. 백발의 노부인이 뒤를 돌아 스님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훑어보았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중이라면 정신을 차려야지. 이 정도도 못 참느냐?”라고 말했습니다. 가르침과도 같은 여인의 말은 스님의 뒤통수를 강타한 것 같았습니다.
“보살님, 어디 사십니까?” 스님이 호기심에 물었습니다. “내가 어디 사는지 뭐가 중요하냐? 중요한 건 네가 지금 어디에 있는지다.”
스님은 그녀를 따라가고 싶은 참을 수 없는 충동을 느꼈습니다. 잠시 후, 노파는 막걸리를 파는 가게로 들어갔습니다. “남 따라다닐 시간에 네 갈 길이나 가라.” 노파가 말했습니다. 스님은 그 말에 깜짝 놀라며 속으로 생각했습니다. “내가 지금껏 남을 따라다니기만 했구나.” 노파의 말은 계속해서 가르침처럼 느껴졌습니다.
스님은 “부인, 당신은 매우 현명해 보이는군요. 무엇을 공부하셨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라고 물었습니다. 그 여자는 “지혜는 공부하는 것이 아니라 살아가는 것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저는 23살에 결혼해서 아이를 낳았습니다. 얼마 지나지 않아 남편이 세상을 떠났습니다. 아이를 키우고 대학에 보내기 위해 갖은 고생을 했습니다. 그런데 그 사람은…. 군에 입대하고….” 그녀의 눈에는 눈물이 흘렀습니다. “어느 날 그의 부대에서 전화가 왔습니다. 지뢰를 밟고 죽었다고 하더군요.” 그녀는 계속해서 갈라진 목소리로 말했습니다. “그 사람 얼굴을 보기 전까지는 믿을 수가 없었어요. 그 후로 눈물이 멈출 수가 없었어요. 먹고 자고 상관없어요. 저는 몇 년 동안 슬픔에 사로잡혀 있었어요.”
스님은 그녀의 말속에 담긴 깊은 고통을 깨닫고 “어떻게 극복하셨나요?”라고 물었습니다. 그녀는 “어느 날 지붕에서 물방울이 떨어지는 것을 발견했어요. 떨어지는 것을 보다 보니 충격을 받았습니다. 물방울이 냇물이 되어 냇물이 바다가 됩니다. 바다가 다시 구름이 되고 물방울이 되죠. 삶과 죽음은 따로 있는 것이 아닙니다. 모든 것은 돌아옵니다. 그 근원으로. 이것을 느끼고는 슬픔을 멈출 수가 있었습니다.”
노파의 말에 권위가 있었던 이유는 노파의 말은 곧 삶이었기 때문입니다. 노파는 자기 자신을 이긴 사람입니다. 그 안에 성령께서 계신 것이고 그 성령이 한마디, 한마디에 그 사람의 피를 섞는 것입니다. 그래서 같은 말이라도 예사로 들리지 않습니다. 나의 삶을 변화시키지 않은 말들은 내가 아무리 되풀이해도 힘이 없습니다.
예수님은 아버지한테서 들으신 말씀으로 당신을 변화시키셨습니다. 그러니 말씀에 힘이 있으셨던 것입니다.
자신을 이긴 사람의 말엔 권위가 있습니다. 자신도 이기지 못한 말은 권위가 없습니다. 아무리 옳은 말이라고 해도 그렇습니다. 잔소리일 뿐입니다.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 중 가장 권위 있는 말은 어디서 하신 말씀일까요? 제자들의 발을 씻어주실 때, 그리고 십자가에서 하신 말씀들입니다. 자기를 이기신 말씀. 이 말씀을 듣는 이들은 변합니다. 성령께서 그 사람의 말에 피를 섞어주셨기 때문입니다. 영향력 있는 말을 하고 싶거든 매일 성령을 자기를 이기는 시간을 꼭 가져야 합니다. 이것을 한마디로 하면 ‘기도’라 할 수 있습니다.
조재형 가브리엘 신부님
‘신호등’이라는 노래가 있습니다. 가사는 이렇습니다. “이제야 목적지를 정했지만/ 가려 한 날 막아서네./ 난 갈 길이 먼데 새빨간 얼굴로 화를 냈던/ 친구가 생각나네./ 이미 난 발걸음을 떼었지만/ 가려 한 날 재촉하네./ 걷기도 힘든데/ 새파랗게 겁에 질려 도망간/ 친구가 뇌에 맴도네./ 건반처럼 생긴 도로 위/ 수많은 동그라미 모두가/ 멈췄다 굴렀다. 말은 잘 들어/ 그건 나도 문제가 아냐/ 붉은색 푸른색 그사이 3초 그 짧은 시간/ 노란색 빛을 내는/ 저기 저 신호등이/ 내 머릿속을 텅 비워버려/ 내가 빠른지도/ 느린지도 모르겠어./ 그저 눈앞이 샛노랄 뿐이야.” 경쾌한 멜로디가 좋았던 노래입니다. 자동차가 등장하면서 ‘신호등’이 필요해졌습니다. 신호등이 없으면 교통의 흐름이 막히기도 하고, 무엇보다 교통사고의 위험이 더 커집니다. 이런 신호등도 가끔은 ‘수신호’로 바뀔 때가 있습니다. 교통사고가 크게 났을 때는 경찰이 수신호로 차량 통행을 유도합니다. 대통령이나 외교 사절이 이동할 때도 수신호로 차량을 유도합니다. 수학능력 시험처럼 학생들에게 아주 중요한 시험이 있는 날도, 학생들의 이동 차량을 위해 수신호로 차량 통행을 유도합니다.
신앙 안에서 ‘신호등’과 같은 것이 있습니다. 율법과 계명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이스라엘 백성이 광야에서 하느님의 뜻대로 살 수 있도록 모세에게 ‘십계명’을 주었습니다. 십계명은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의 관계를 정립하고, 이스라엘 백성 공동체가 가야 할 삶의 길을 제시해 주고 있습니다. 십계명의 빨간불은 하지 말라는 겁니다. 하느님 이외에 다른 신을 섬기지 말라는 겁니다. 남의 재물을 탐하지 말고, 남의 아내를 탐하지 말고, 부정한 행위를 하지 말고, 거짓으로 증언하지 말고, 도둑질 하지 말고, 살인하지 말라는 겁니다. 십계명의 파란불은 하느님을 섬기고, 주일을 거룩하게 지내는 겁니다. 부모에게 효도하라는 겁니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십계명 이외에도 613개의 율법이 있었습니다. 이 율법은 신호등처럼 이스라엘 백성을 하느님께 인도하고, 공동체가 하느님의 뜻대로 살 수 있도록 이끌어 주었습니다. 그러나 이 십계명과 613개의 율법은 지킬 수 없는 사람들에게는 삶을 구속하는 고삐와 같았습니다. 지킬 수 없는 사람은 죄인처럼 지내야 했습니다. 교황님께서도 교회법을 지킬 수 없는 상황에 부닥친 사람들을 단죄하기보다는 교회가 보듬어 안을 수 있도록 배려하자고 하였습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이유가 있습니다. 요한복음은 그것을 이렇게 전합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을 너무나 사랑하신 나머지 외아들을 내 주시어, 그를 믿는 사람은 누구나 멸망하지 않고 영원한 생명을 얻게 하셨다. 하느님께서 아들을 세상에 보내신 것은, 세상을 심판하시려는 것이 아니라 세상이 아들을 통하여 구원받게 하시려는 것이다.” 신호등과 수신호는 모두 사람을 위해 있는 겁니다. 다만 수신호가 필요한 때가 있기에 수신호를 통해서 사람에게 도움을 주는 겁니다. 하느님의 아들이 사람이 되신 것은 하느님의 ‘수신호’입니다. 계명과 율법만 지키기에는 세상이 너무 타락했습니다. 계명과 율법만 지키기에는 인간의 나약함이 너무 컸습니다. 세상에는 계명과 율법을 모르는 이방인들이 많았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예수님을 통해서 새로운 계명과 새로운 질서를 알게 해 주셨습니다. 예수님께서도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안식일이 사람을 위해서 있는 것이지, 사람이 안식일을 위해서 있는 것이 아닙니다. 새 술은 새 부대에 담아야 합니다.” 사람들은 예수님에게서 새로운 권위를 보았습니다. 그것은 예수님의 권위가 계명과 율법을 뛰어넘었기 때문입니다.
예전에 함께 지내던 주교님께서는 늘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이시라면 이럴 때 어떤 결정을 내리셨을까?” 주교님 선택의 기준은 ‘예수님’이셨습니다. 사제직의 권위가 있다면 그것은 오직 예수님을 따름에서 주어지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하느님께 대한 순명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렇게 기도하셨습니다. “아버지 이 잔을 제게서 치워주십시오. 그러나 제 뜻대로 마시고 아버지의 뜻대로 하십시오.” 예수님의 권위는 십자가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누구든지 나를 따르려는 사람은 자신의 십자가를 지고 따라야 합니다.” 예수님의 권위는 겸손함에서 시작되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제자들에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사람의 아들은 섬김을 받을 자격이 있지만 섬기러 왔습니다.” 그리고 제자들의 발을 씻어 주셨습니다. 제자들에게도 그렇게 하라고 모범을 보여 주셨습니다. 사제직이 순명을 만나면, 사제직이 십자가를 만나면, 사제직이 겸손을 만나면 주님께로부터 주어지는 권위가 생겨납니다. 예수님은 전 생애를 걸쳐서 봉사와 희생의 모습을 보여 주셨습니다. 십자가에 못 박혀서 죽기까지 순명을 보여 주셨습니다. 그것이 바로 예수님께서 보여 주신 새로운 권위였습니다. 그 권위 위에서 부활의 꽃이 피는 것입니다.
“그분께서 율법 학자들과 달리 권위를 가지고 가르치셨기 때문이다.”
<그분께서 이루시리니>
상지종 베르나르도 신부님
“조용히 하여라. 그 사람에게서 나가라.”(마르 1,25)
나는 믿음
이라는 생각에
한껏 뿌듯해진다면
믿음이신 분
앞으로 오롯이
다가가는 겁니다
나 모르는
맹신의 우상을
자취없이 무너뜨리시리니
나는 희망
이라는 생각에
맘껏 나를듯하다면
희망이신 분
앞으로 오롯이
다가가는 겁니다
나 모르는
허상의 그림자를
남김없이 흩으시리니
나는 사랑
이라는 생각에
잔뜩 우쭐해진다면
사랑이신 분
앞으로 오롯이
다가가는 겁니다
나 모르는
탐욕의 마수를
가차없이 꺾으시리니
오늘의 성인
성 사바 (Sabas)
신분 : 대주교
활동지역 : 세르비아(Serbia)
활동연도 : 1174-1237년
같은이름 : 싸바 사바스
중세의 세르비아 왕국인 네만야(Nemanya) 왕조를 세운 스테파누스 1세(Stephanus I)의 셋째 아들인 성 사바는 17세 때에 그리스의 아토스 산(Mount Athos)에서 수도생활을 시작하였다.
그는 부친의 도움으로 세르비아 수도자들을 위하여 아토스 산에 수도원을 따로 세운 후 원장으로 봉사하였다.
그러다가 1207년 그의 형제인 스테파누스 2세와 불칸(Vulkan) 사이에 불화와 내전이 발발했을 때 고향으로 잠시 돌아가기도 했었다.
수많은 수도자들과 함께 돌아온 그는 스투데니카(Studenica)에 수도원을 세운 것을 비롯하여 온 나라의 개혁, 특히 교육을 위하여 헌신하여 땅에 떨어졌던 신앙과 교육이 부흥되기 시작하였다.
그의 노력은 국민들의 단결을 불러 일으켰고 교회 또한 크게 융성하게 하였다.
그는 방인사제와 주교를 존중하여 그들에게 교회를 맡김으로써 더욱 발전시키는 덕을 지녔다.
그는 두 차례나 성지를 순례했는데, 두 번째 순례 중 불가리아(Bulgaria)의 티르노보(Tirnovo)에서 사망하였다.
그는 세르비아의 수호성인이다.
그는 사바(Sava)로도 불린다.
성 말라키 (Malachy)
신분 : 구약인물 예언자
활동연도 : +연대미상
성 말라키(Malachias, 또는 말라기)는 구약성서 열두 편의 소예언서 중 마지막 책인 말라키서의 저자로 등장한다.
말라키서는 “야훼께서 말라키를 시켜 이스라엘에 내리신 경고”의 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말라키서는 종교와 사회 생활에 대해 가치있는 증언을 수록하고 있는 하까이서와 즈카르야서와 함께 유배 시대 이후의 예언을 담고 있다.
구약성서에서 ‘말라키’라는 이름은 말라키서 1장 1절 표제에만 등장한다.
히브리어로 말라기는 ‘나의 특사’ 또는 ‘나의 천사’라는 뜻이다.
4세기의 유대 전승들을 모은 “예언자들의 삶”(Lives of the Prophets)에는 말라키가 즈불룬의 소파(Sopha) 출신으로 레위인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이 전승에는, 말라키가 신앙심이 깊고 온유하여 백성들로부터 공경을 받았는데, ‘보는 것이 공정하여’ 말라키란 이름이 주어졌다고 전한다.
가(假)에피파니우스(Pseudo-Ephiphanius)와 다른 교부들은 이 전승을 받아들였으나, 현대의 학자들은 이러한 전승들이 기원이 늦고 비현실적이어서 예언자의 생애에 관한 증명으로는 역사적 가치가 없다고 여긴다.
다만 예언 내용을 통해서 볼 때, 그는 하느님의 거룩함과 인간 죄의 심각함(2.17-3,4; 3,6-7. 13-20)을 파악한 인격적인 신앙을 지닌 것으로 여겨진다. 뿐만 아니라 우상 숭배와 이혼(2,10-16), 사회 불의(3,5)에 반대한 매우 헌신적이고 통합적인 인물이었다(A.E. Hill).
그는 성전과 사제와 희생 제사 등 종교의 형식에 대한 외적인 관찰자의 입장에서 설교하였지만, 단지 형식주의자나 예식주의자가 아니고 윤리적, 영성적으로 알려져 있다.
성녀 마크리나 (Macrina)
신분 : 개종자
활동연도 : 270-340년
같은이름 : 마끄리나
성녀 마크리나는 성 대 바실리우스(Basilius, 1월 2일)와 니사(Nyssa)의 성 그레고리우스(Gregorius, 3월 9일)의 할머니로서 이들의 성장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친 인물이다.
마크리나 부부는 소아시아의 네오카이사레아(Neocaesarea)와 폰투스(Pontus) 등지에서 살았는데, 갈레리우스와 막시미누스의 황제의 박해 때문에 수많은 고생을 하였다.
그들은 박해자들의 손길을 피하기 위해 숲 속에서 7년이나 은거했으므로 수없이 굶주렸다고 한다.
로마 순교록에는 마크리나가 성 그레고리우스 타우마투르구스(Gregorius Thaumaturgus, 11월 17일)의 제자였다고 한다.
성녀 니노 (Nino)
활동년도 : +340년경?
신분 : 소녀, 노예
지역 : 그루지야(Georgia)
같은 이름 : 니나
고대 이베리아(Iberia, 오늘날의 그루지야 지역)의 전쟁 포로 노예였던 성녀 니노는 소아시아의 카파도키아(Cappadocia) 출신이었다. 사람들은 그녀의 뛰어난 성덕과 신심에 큰 감명을 받았다. 또한 그녀가 자신이 믿는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많은 질병을 퇴치함으로써 그루지야 황녀의 총애를 받았다. 특히 그녀는 황후의 병을 낫게 했으며 사냥 길에 오르는 국왕을 도와주었다. 그 결과 왕과 왕비는 그녀로부터 교리를 배워 그리스도교로 개종하였다. 한 노예 소녀의 힘으로 큰 이변이 일어난 것이었다.
국왕은 콘스탄티누스 황제에게 사람을 보내어 주교와 사제들을 파견해 달라고 요청하여 그루지야 왕국은 마침내 그리스도교 국가가 되었다. 이런 큰 성공을 거둔 성녀 니노는 궁중을 물러나서 보드베(Bodbe) 산중에서 은수생활을 시작하였으며, 그곳에서 여생을 지냈고 묻혔다. 그루지야의 사도로서 존경을 받는 성녀 니노는 니나(Nina)로도 불린다. 그리고 그녀의 축일은 12월 15일에 기념하기도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