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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라면식탁에 평화를... 원문보기 글쓴이: 이안드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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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친일인명사전에는 7명의 천주교 친일인사의 이름이 거론되었지만, 민족문제연구소 측은 천주교는 교단 차원에서 친일했다고 밝혔다.(사진/한상봉 기자) |
최초의 한국인주교 岡本鐵治 岡本鐵治는 노기남 주교의 창시개명한 일본식 이름이다.
1942년 1월 3일 천주교경성교구연맹 이사장이며 명동성당 보좌신부인 오카모토(노기남)신부가 경성교구장(현 서울대교구장)이 된다. 그는 같은 해 11월 14일 최초의 한국인 주교로 임명된 이후 그는 1967년 은퇴할 때까지 25년간의 주교직을 수행한다.
다음은 그가 경성교구장에 취임하며 한 말의 일부다.
"우리는 무엇보다도 열심한 가톨릭자가 되고 충량한 황국신민이 되어야 한다. 대개 열심한 신자요, 충량한 국민은 자기 책임 수행에 심혈을 기울이며 그 책임이 중대한 것이면 자기 생명까지라도 아낌없이 희생한다. 현금 국가의 시국은 그런 국민을 요구하고, 현금 교회의 정세는 이런 신자를 요구한다. 우리 모든 이가 열심한 가톨릭자로서 국가에 대한 책임에 이런 태도로써 나선다면 이보다 더 나은 종교보국은 있을 수 없다. 우리 모든 이가 정성으로써 교회유지와 발전에 임한다면 극복하지 못할 어려움은 있을 리 없다.
위에 말한 두 가지 커다란 책임을 실행함에 있어 본직은 별다른 새로운 실천사항을 지시치 않는다. 다만 무언복종과 일치협력, 이 두 가지를 극력 권장할 뿐이니 이는 실로 유구한 황국 2천 6백여 년 역사가 밟아오고 가톨릭 근 2천년 연륜을 통일시킨 위대한 원리이다. 국가의 시국을 돌파키 위하여 행정당국에서 지시하는 바는 절대 신뢰하고 무언복종하라. 누구보다 당국에서 앞 뒤 정세와 그에 대하여 국민이 밟아야만 할 길을 가장 잘 알고 있으니 비록 약간 어렵고 불편할지라도 공연한 비판이나 한탄을 말고 일치 협력하여 무언복종하라." (1942년 1월 18일 경성교구 교구장. 평양춘천교구관리자 바오로 岡本鐵治 <경향잡지> 943호, 1942년 2월호, 1942.02.15, 4-5쪽.)
<경향잡지>는 1911년에 창간한 한국천주교회 공식기관지다. 한국에서 가장 오래된 잡지이기도 하다.
반가웠지만 예상하지 못했던 조국해방이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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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노기남 대주교 |
"흰 바탕에 붉은 해를 그린 국기는 대일본제국의 표징으로서 그 의장은 간단하나마 심장한 의미가 있고 또 극히 아름다워 모든 나라의 국기를 멀리 초월한다. 이 국기 앞에 충군애국에 불타는 얼마나 많은 가슴이 뛰놀았으며, 이 국기 앞에 황군용사의 피는 얼마나 거룩히 흘렀으며, 이 국기 앞에 적국의 함정은 얼마나 많이 바다 속에 격침되고 적국의 비행기는 얼마나 많이 추락되고 적국의 장병은 얼마나 많이 섬멸되었는가!" (<경향잡지> 960호, 1943년 7월호, 1943.07.15, 1쪽)
‘새벽의 7인’이 아닌 7인의 친일 가톨릭인사
민족문제연구소와 친일인명사전 편찬위원회는 2008년 4월 29일 친일인명사전에 수록할 친일인물 4,800여명의 명단을 공개했다. 그 중에 가톨릭 인사로 7명이 포함되었다. 그러자 한국천주교회를 대표하는 한국천주교주교회의(CBCK)나 한국천주교중앙협의회(CCK)이 아닌 서울대교구는 단 하루가 지난 4월 30일 성명서를 통해 “깊은 유감”을 표했으며 가톨릭계 기관지인 <평화신문>(서울대교구), <가톨릭신문>(대구대교구) 들은 2008년 5월 11일자 기사와 사설에서 교회의 반성이 아닌 “우린 무죄다”라고 하소연했다. 심지어 <평화신문>은 친일명단에 오른 7명의 공로를 부각시키며 ‘물타기’에 나섰다.
서울대교구는 친일대상자에 대한 사회의 논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거룩한’ 발걸음을 계속했다. 학교법인 가톨릭학원(이사장 정진석 추기경)은 2008년 6월 11일 서울 동작구 사당동에 지은 교원 기숙사 축복식을 통해 건물의 이름을 '노기남관'으로 명명하고 서울대교구장 정진석 추기경 주례로 축복식을 거행했다. 노기남관의 입구에는 노기남 주교 부조와 문장, 라틴어 사목 모토 ‘피앗 볼룬따스 뚜아’(fiat voluntas tua, 당신 뜻대로 내게 이뤄지소서)를 설치했으며, 1층 현관에도 노기남 주교의 삶과 신앙을 담은 사진 자료들을 게시했다고 교회언론들은 전했다. 정 추기경은 “노기남 주교의 삶과 영성을 오늘날 많은 사제와 신자들이 기억했으면 한다”고 말했다.
그러나 천주교회의 바램과는 정반대로 '일제강점하 반민족행위 진상규명에 관한 특별법'에 따라 2005년에 발족한 국가기관인 친일반민족행위진상규명위원회는 2009년 7월 3일 관련법에 의거 노기남 주교의 행위를 친일반민족행위로 결정한다는 통지서를 서울대교구에 보내왔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울대교구는 이의 제기 공문을 통해 "위원회 결정은 형식적 조건에만 일방적으로 치우치는 바람에 형식보다 중요한 실질적 내용, 즉 일제협력행위에 나서게 된 현실적 동기, 행위 주체에 대한 정체성, 행위의 상대적 정도 등을 전혀 감안하지 않았다"고 노기남 주교의 친일행위를 인정하지 않았다.
천주교회는 천주교회식대로 산다?
서울대교구 산하의 한국교회사연구소는 2010년 10월 명동성당 꼬스트홀에서 ‘노기남 대주교와 한국 천주교회’를 주제로 심포지엄을 진행했다. 학술 심포지엄의 분위기는 “시종일관 팽팽한 긴장”속에서 진행됐다고 교회언론은 전했지만 결론은 당연히 “우리는 무죄다”였으며 “역사 해석에는 절제와 조심성이 있어야 하며 당시 실상을 균형 잡힌 시각으로 파악할 수 있어야 한다”는 준엄한 충고로서 결론을 삼았다. 아무튼 노기남 주교를 비롯한 가톨릭 인사 7인은 무죄였으며 그들을 친일대상자로 지목한 사람들이 무고죄와 함께 “절제와 조심성이 없는 불균형한 시각”을 지닌 자들로서 유죄가 된 셈이다.
서울대교구가 발행하는 <평화신문>은 2011년 들어 새로운 기획물로 ‘시대의 등불이 된 재속 프란치스칸들’을 연재하고 있다. 그러나 공교롭고 유감스럽게도 현재까지 ‘시대의 등불’로 소개된 인물 중 장면, 오기선, 남상철은 <친일인명사전>에 오른 사람들이다. 한국천주교회로서는 ‘시대의 등불’로 부르고 싶겠지만 민족에게는 손가락질 받는 ‘친일자’인 것이 천주교회와 천주교인에게는 어떻게 보이고 있는 것일까? 욕됨을 욕됨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면 그런 역사는 반복될 수 밖에 없는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천주교회는 천주교회식대로 살겠다고 세상을 외면할 것인가?
빙산의 일각이지만 한국천주교회가 피해갈 수 없는 친일 사례들 한국천주교회로서는 부끄러운 일이지만 아래의 자료들은 극히 일부분에 불과하다.
1. 일본정신 발양주간 실시에 관한 건
"국민정신총동원 조선연맹에 가입한 우리 교회단체로서도 전적으로 그 취지에 찬동하고 성의껏 모든 주간행사에 참예하되 경성교구 각 지방 본당 신부는 황실의 안녕과 국위선양을 기원하는 뜻으로 미사성제를 거행하고 될 수 있는 대로 교회가 중심이 되어 모든 행사를 각 지방 형편에 따라 계획하여 실시하되 만일 실시 형편상 교회단독으로 행키 어려운 경우에는 교우들이 그 군이나 면 연맹에서 하는 여러 행사에 다수 참가하여 국민으로서의 본분을 다하기를 부탁하노라."(<경향잡지> 894호, 1939년 1월호, 1939.01.28, 4쪽)
2. 경성교구 애국행사 성적
"국민정신총동원 경성교구 연맹에서는 황기 2천 6백년의 기원가절을 기회로 과거 3년 동안에 행한 각종 애국행사를 보면 동양의 평화, 황군무운장구, 전몰장병의 위령을 위한 각종 기원성제 2만 9천 6백 22회, 동상목적을 위한 기도 5만 5천 4백 52회, 국방헌금 3천 6백 24원 23전, 제일선 장병위문금 9백 32원 4전, 병기헌납보조금 4백 22원 39전, 제일선에 보내는 위문주머니 6백 91대, 시국을 위한 강연회와 좌담회 1만 1천 5백 92회, 출전 장병의 가족위문 1백 51회, 부상 장병 위문 37회, 기타의 각종 행사 1백 65회로써 천주교회는 비록 겉으로 떠들어 남의 이목을 끄는 일은 별로 아니할지라도 자기의 당면한 책임은 얼마나 은근하고 충실하게 꾸준히 계속 시행하여 나가는지를 여실히 보이고 있다."(<경향잡지> 920호, 1940년 3월호, 1940.03.12, 17쪽)
3. 매월 제일주일은 교회 애국일로
"우리는 천황폐하와 국가의 혜택을 받을 뿐 아니라 천주교 신자로서도 또한 폐하와 국가의 혜택을 받고 있는 우리들이다. 만일 오늘이라도 폐하와 제국의 현명한 통치가 없었던들 우리가 오늘날 천주교회 신자로서 교회의 모든 본분을 안온하게 지켜가고 있었을 지가 의문이다. 애국주일을 위하여 여러분께 간절히 부탁하는바 현금 국책수행을 위하여 정부당국에서 명하는 일체 행사는 물론이오, 교회당국으로부터도 교회행정을 위해서나 시국극복을 위하여 명하는 행사가 있을 때에 불편이 다소 있을지라도 봉사봉공의 정신을 가지고 솔선하여 모든 행사에 협력해 주시기를 바라는 바이다. 애국주일에 무운장구 기원미사를 거행할 것과 미사 전후하여 애국식을 거행할 것과 미사 중 시국에 관한 강론과 미사 후 신궁 혹은 신사참배를 단체로 할 것 등이다."( <경향잡지> 931호, 1941년 2월호, 1941.02.12, 15-17쪽)
4. 1전 헌금의 결정
"국민총력 경성교구연맹에서는 병기를 헌납하기로 하여 모든 교우들이 매월 매인 1전 헌금하기로 되었다함은 당시 기보한 바와 같거니와 작년 연말에 그 수합된 총액이 1만원에 달하는 좋은 성적을 보였던바 동 연맹에서는 당국에 병기의 종류에 대하여 문의하였더니 당국에서는 현금 그대로 헌납함이 더욱 좋다하므로 동 연맹 이사장 노기남신부는 이를 조선군 사령부에 헌납하여 당국자를 감격시켰다."( <경향잡지> 942호, 1942년 1월호, 1942.01.15, 10쪽)
5. 총독각하는 반도 민중의 영광
"근년 같은 시국에 우리가 남차랑 총독 같은 이를 모셨다는 것은 큰 다행이었다. 그가 시작하고 실시한 반도교육령의 개정, 창씨제도, 지원병제도, 기타 내선일체의 대방침은 착착 실현되고 또 그 실적이 일반의 예상 이상으로 양호하였다. 그리하여 반도 민중이 시험에 합격하여 적자, 완전한 황국신민에 편입된 데에는 남총독 각하의 공적이 자못 큰 바이니 남총독은 실로 반도 민중을 구원한 큰 은인이다."( <경향잡지> 947호, 1942년 6월호, 1942.06.15, 1쪽)
6. 대망의 징병제
"무엇보다도 필요한 것은 정신이니 황국을 위하는 정신과 내선일체의 정신을 더욱 철저하게 가져 실현하기로 힘쓸 것이오, 국어(일본어-인용자 주)를 모르는 청년들은 하루바삐 국어에 달통하도록 힘써 응소된 다음에 여러 가지 불편이 없도록 할 것이며 내지군인들의 장점을 지금부터라도 배우기를 힘쓸지니 서로 일치단결하는 마음과 자기가 맡은 책임은 죽는 한이 있을지라도 반드시 수행하고야마는 그 견고한 책임 관념과 아무리 어렵고 괴로운 일을 당할지라도 실망낙담 하는 일 없이 꾸준히 끝까지 최후의 한 방울 피까지 갈진히 하려는 백전불굴의 정신 등은 황군이 세계에 자랑하는 바이다. 심신 양 방면으로 이렇게 모든 준비를 다하여 반도청년들이 군문에 들어가는 날에는 반도동포도 내지동포와 추호도 다름없는 완전한 황국신민의 자격을 갖출 것이다."( <경향잡지> 955호, 1943년 2월호, 1943.02.15, 1쪽)
7. 금속품 헌납
"우리가 날마다 애용하던 식기를 헌납하여 이것이 어뢰가 되어 적국의 군함을 격침시키고 우리의 자녀들이 밥을 먹던 수저가 헌납되어 이것이 포탄도 되고 폭탄도 되어 혹은 적국의 비행기를 떨어트리고 혹은 적군의 진지를 괴멸시키고 하는 것은 생각만 하여도 얼마나 통쾌하며 얼마나 우리와 우리 자녀들에게 자랑스러운 일이 되는가? 이런 쾌감은 그 자체만 보아도 우리가 금속품을 남모르게 감추고 비밀히 애지중지하는 그 애착심에 비하여 훨씬 고상하고 깨끗하고 대장부다운 맛이 있는 것이다."(<경향잡지> 957호, 1943년 4월호, 1943.04.15, 1쪽)
8. 비행기를 보내자
"비행기! 비행기! 현대전쟁에는 무엇보다 비행기가 많아야 한다. “비행기를 한 대라도 어서 빨리 보내라.” 이것은 남태평양 제일선에서 주야의 분별없이 악전고투를 하는 황군용사들이 국민을 향하여 외치는 주문이다. 제1선에서 귀화하는 여러 장병들의 보고에 의하면 적군보다 비행기의 수효가 더 많을 필요도 없다. 동등의 수효이기만 하면 적의 항공 병력을 분쇄시키는 것은 문제도 안 되는 것이다. 이것은 황군의 분투정신과 민첩 무쌍한 기술을 생각하면 누구나 긍정할 것이다."( <경향잡지> 967호, 1944년 2월호, 1944.02.15, 1쪽)
"이후 1944년 2월 11일부터 4월 29일까지 전개된 총력연맹의 ‘미영격멸 비행기 2백대 헌납운동’은 예상보다 훌륭한 성적을 내어 2백 48대분인 24,818,366원 71전의 헌금이 만들어졌다."( <경향잡지> 970호, 1944년 5월호, 1944.05.15, 2쪽)
아직도 교회는 할 말이 있는가?
필자는 천주교인으로서 할 말이 없다. 그러나 천주교회는 특별히 서울대교구는 아직도 할 말이 있는 듯하다. 노기남 주교는 1942년 12월 20일 주교취임을 한 날 “명동 바오로수녀원에서 축하 오찬회가 있었다. 이 오찬회 석상에서 노 주교는 대동아 전쟁의 필승을 다짐하고 황국 신민화 운동을 수긍하는 체 하는 발언을 했다. 그러나 노 주교는 즉시 혀를 깨물고 싶도록 후회했다.” (노기남 대주교, 박도원, 한국교회사연구소, 1985, 228-229쪽)
그러나 불행하게도 그 후회는 친일의 마침표가 아니라 친일의 서막에 불과했던 것이다. 한국천주교회가 자랑하는 첫 한국인 주교는 민족해방과는 상관없는 교회의, 교회에 의한, 교회를 위한 주교였을 뿐이다. 노기남 주교는 그리고 지금도 그를 옹호하는 자들은 그것이 무슨 잘못이냐고 항변하고 있지만 그들이 주님이라고 고백한 예수는 노기남 주교가 그토록 지키려는 교회 안에 있었던 것이 아니라 일본인들에 의해 핍박받던 위안부․ 징용자․ 징병자․ 독립군 등을 비롯한 억눌린 민족 가운데 계셨음을 몰랐던 것이다. 지금도 예수 없는 교회를 붙들고 있는 그대들은 누구인가? 예수의 목소리는 이천년 전부터 들려오고 있다. “성전을 허물어라. 내가 사흘 안에 다시 세우겠다.”(공동번역 요한2.19)
*이 기사는 <기독교사상> 2011년 8월호에 게재되었던 글입니다.
김유철/ 한국작가회의 시인. 천주교 마산교구 민족화해위원회 집행위원장. 경남민언련 이사. 창원민예총 대표. 저서 <그림자숨소리>,<깨물지 못한 혀>,<예수의 말씀>등이 있다.
- 출처, 가톨릭뉴스 지금여기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