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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0-백파] ☆ 낙동강 1300리 종주 대장정 (48)
생명의 물길 따라 인간의 길을 생각한다!
☆ [낙동강 종주] * 경상남도 구간 ④ (남강 수계) 산청-1
2020년 11월 06일 (월요일) [독보(獨步)]▶ 백파 재(再) 출행
* [합천·창녕보→ 창녕·함안보]→ 황강 하구→ 적포교 앞(20번 국도→ 우포늪)→ 낙서초교→ 진등산 박진고개(낙동강 조망)→ 1008번 지방도로→박진로→ 박진교(낙동강)→ 창녕 박진전투기념관(남지읍 월하리)→ 다시 박진교→ 영아지길→ 청아지→ 마분산 영아지 고개(팔각정 전망대)→ 신전리(우향)→ [남지읍 용산리 낙동강 대안에서 남강 합류]→ 학계리→ [남지체육공원]→ 남지 인도교
* [의령군 지정면 성산리] ← 서남쪽에서 ‘남강’ 합류(남덕유산, 뱀사골 발원 / 경호강-진양호 경유)
산청(山淸)
산청군 생초(면)에서, 함양의 남덕유산에서 발원하는 ‘남강천’과 지리산 심원계곡과 뱀사골계곡에서 흘러내려온 ‘임천’이 합류하여 ‘경호강(鏡湖江)’을 이루어 동진하여 남쪽으로 흘러내린다. 산청(山淸)은 함양의 바로 인접한 경호강 유역에 자리하고 있다. 이렇게 산청의 서쪽은 함양군이고, 동쪽은 합천군과 의령군이며, 남쪽은 진주시와 하동군이 있다. 그리고 북쪽은 거창군과 접하고 있다. 산청군(山靑郡)은 ‘경호강’을 중심으로 그 동쪽에 산청읍(山淸邑), 차황면(車黃面), 오부면(梧釜面), 생초면(生草面), 신안면(新安面), 생비량면(生比良面), 신등면(新等面)에 위치하고, 그 서쪽에는 금서면(今西面), 삼장면(三壯面), 시천면(矢川面), 단성면(丹城面)이 있다.
산청의 지형
산청군의 주위는 대부분이 준엄한 산령으로 둘러싸여 있으며, 지세는 지리산 천왕봉을 기점으로 한 산맥이 남북으로 뻗어 하동군·함양군과의 경계를 이루고, 합천군과는 기백산-백운산 지맥인 황매산이 양군의 분수령을 이룬 분지이다. 북부에 갈전산(葛田山, 764m)·바랑산(797m)이 거창군과, 그리고 동부의 황매산(黃梅山, 1,108m), 전암산(傳岩山, 696)이 합천군과 경계를 이루며, 서남쪽의 천왕봉(天王峰, 1,915m), 제석봉(除石峰, 1,806m), 촛대봉(燭臺峰, 1,704m)이 함양군과, 남쪽의 삼신봉(三神峰, 1,284m)·주산(主山, 831m ), 우방산(牛芳山, 570m)이 하동군과 경계를 이룬다.
경호강(鏡湖江)은 산청군 지역의 중앙(中央)을 흘러내리는데, 생초면에서는 초곡천, 생초천이, 오부면에서는 방곡천이, 산청읍에서는 송경천이, 상류의 쌍백에서 대현천, 대곡천, 삼가의 유린천, 용홍천이 유입된 양천(梁川)에 황매산에서 발원하는 단계천(丹溪川)과 신동천이 합류하여 강의 동쪽에서는 흘러들고, 강(江)의 서쪽에서는 웅석봉에서 발원한 남사천이 단성면 남사리에서 경호강에 유입되고, 지리산에서 발원한 덕천강(德川江)은 남류하여 진양호(晉陽湖)에 흘러든다. 이들 하천유역인 단성·시천·생비량·차황·산청 등지는 지세가 비교적 평탄하고 관개가 편리하며 토양이 비옥하여 농경에 적합하나, 산곡의 침식으로 형성된 개석평야인 까닭에 규모가 대단히 작다.
산청의 역사
1363년(공민왕 12) 강성 사람 문익점(文益漸)이 원나라에서 목화씨를 가져와 장인 정천익(鄭天益)과 협력하여 단성면 사월리에서 재배와 방직에 성공하여 국민생활과 국가경제에 크게 공헌하였다. 근년에 후손들이 이곳 면화시배지(棉花始培地)에 사적비를 세우고 유물관을 지어 면업가공발전사를 소장, 전시하고 있다.
1399년(정종 1) 거제도의 명진현(溟珍縣)이 왜구를 피하여 강성현으로 옮겨오면서 두 현이 합쳐져 진성현(珍城縣)으로 개칭되었다. 1413년(태종 13) 산음현의 합주 소속이 해제되면서 현이 지금의 산청읍으로 옮겨지고 현감이 두어졌다. 1432년(세종 14) 명진현이 거제도로 수복되면서 강성현과 단계현이 합쳐져 단성현(丹城縣)으로 개칭되었고 현감이 두어졌다. 『세종실록지리지』에 의하면 세종 때 산음현의 호구수는 257호 1,138인이었고 진성현은 234호 872인이었으며, 단계현은 139호 496인이었다.
1555년(명종 10) 조식(曺植)은 단성현감으로 제수되었으나 이를 사양하고 지리산 아래 덕산동에 들어가 산천재를 짓고 학문연구와 후진교육에 전념하였다. 그의 학행은 이황(李滉)과 더불어 당세의 사표로 추앙되었으며 뒤에 경상우도 일대를 크게 교화하였다.
임진왜란 때 조종도(趙宗道)·이로(李魯) 등은 의병을 규합하여 진주성의 외곽에서 유격전을 전개했으나 진주성 함락 후 이 지방은 거의 폐허가 되다시피 하였다. 그리하여 왜란 직후 1599년(선조 32) 단성현이 폐지되고 그 일부가 산음현으로 편입되었다가 1613년(광해군 5)에 복구되었다. 1767년(영조 43) 산음현이 산청현으로 개칭되었다. 1771년(영조 47) 산청현의 호구수는 2,114호 8,989인이었으며 단성현의 호구수는 2,526호 9,994인이었다.
1895년(고종 32) 지방관제 개정으로 산청현과 단성현이 군으로 개편되었다. 1906년 행정구역 정비에 따라 진주군의 삼장(三壯)·시천(矢川) 등 6개 면이 산청군으로 편입되었고,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단성군이 산청군으로 통합되었다. 1919년 3·1운동이 일어나자 한말의 거유 곽종석(郭鍾錫)은 거창에 은거하다가 문인 김황(金榥)과 더불어 전국의 유림을 규합하여 만국평화회의에 한국독립청원서를 내는 등 유림의 구국운동을 주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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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천강 산천재, 남명(南冥) 조식(曺植)
* [2016년 12월 4일 (일요일) <산천재>를 찾아가는 길] — 단성I.C에서 20번 국도를 타고 …
☆… ‘산천재(山天齋)’는 조선 시대 경상우도의 최고의 학자로 추앙받는 남명(南冥) 조식(曺植) 선생이 마지막 여생을 보내며 학문을 연구하고 후학을 가르치던 곳이다. 대전-통영고속도로(35번) 산청군 단성I.C에서 내려, 20번 국도를 타고 지리산 중산리(中山里) 방향으로 30분 들어가면 된다. ‘산천재’는 경상남도 산청군 시천면 사리[남명로 311]에 있다.
* [남명 선생 생애(生涯)의 개략(槪略)] — <山海亭>-<雷龍亭>-<山天齋>
남명(南冥) 조식(曺植)은 1501년 지금의 경상남도 합천군 삼가면 외토동 외갓집에서 태어났다. 30세가 되던 해에는 처가가 있는 김해(金海) 신어산(神魚山) 아래에 ‘산해정(山海亭)’을 짓고 18년간 학문을 연구하며 강론하였고, 48세부터 삼가의 토동에 돌아와 ‘뇌룡정(雷龍亭)’을 지어 찾아오는 제자를 가르쳤다. 이 시기 조정에서 남명에게 단성현감(丹城縣監)의 벼슬을 내렸으나, 남명(南冥)은 이를 사양하면서 조정의 난맥상에 대한 과감한 비판과 임금의 잘못된 정치를 직언으로 상소하였다. 나라와 백성에 대해 강한 충정이었다. 61세 때 지리산 천왕봉이 바라보이는 덕산[德川江]에 ‘산천재(山天齋)’를 지어 제자들을 가르치다가 72세로 일생을 마쳤다. 뒤에 영의정에 추증되고 ‘문정(文貞)’이라는 시호가 내려졌다.
* [산천재(山天齋)] — 지리산(智異山) 천왕봉(天王峰)을 바라보며 …
☆… 2016년 12월 4일 (일요일) 오전 11시 11분, ‘남명 조식 선생 유적지’ 주차장에 도착했다. 옛날 덕산(德山)으로 불린 이곳은 경상남도 산청군 시천면이다. 이 지역에는 남명 선생의 ‘산천재(山天齋)’와 ‘남명묘소’와 ‘신도비(神道碑)’가 있고, ‘덕천서원(德川書院)’과 ‘세심정(洗心亭)’ 등의 사적이 있다. ‘산천재’에는 남명이 여생을 보낸 곳으로, 마루 위 벽에는 밭가는 그림 등 벽화 3점이 남아있다. ‘덕천서원’은 산천재와 조금 떨어진 원리에 있으며, 1576년(선조 9년)에 남명의 학덕을 추모하기 위해 지은 것으로, 1609년 사액서원이 되었다. ‘세심정’은 덕천서원 앞 강가에 있는데 남명이 학문을 하는 중 머리를 식히고 휴식을 취하는 곳이다. ‘남명묘소’는 ‘산천재’ 뒷산에 있는데, 남명이 생전에 손수 자리를 잡았다고 한다. ‘남명선생신도비’는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이 비문을 지었다. ‘남명기념관’ 경내에 있다.
* [남명기념관 탐방] — ‘을묘사직소(단성소비, 丹城疏碑)’, ‘무진봉사비(戊辰封事碑)’
☆… 시천면 읍내로 들어가는 도로[南冥路 311]를 중심으로 서쪽에는 <산천재>가 있고, 동쪽의 산 아래에는 ‘남명기념관(南冥紀念館)’이 있다. 남명기념관 입구의 삼문(三門)에는 ‘惺惺門’(성성문)이라는 편액이 걸려 있었다. 남명은 생시 ‘성성자(惺惺子)’라는 방울을 허리춤에 차고 다녔는데, 그것은 마음속에는 늘 경(敬)을 유지하고, 언행에서는 의(義)를 실천하기 위한 자기 경종(警鐘)이었다. 그러므로 사람들은 이 ‘성성문(惺惺門)’을 들어가면서 생시 남명 선생의 ‘성성자(惺惺子)’를 떠올리며 경건(敬虔)한 마음을 지니게 된다.
한겨울 경내는 탐방객이 없어 매우 조용하고 고즈넉했다. 삼문(三門)에 들어서면 정면의 산(山) 아래 산뜻한 현대식 기와를 입힌 ㄷ자 건물인 ‘남명기념관’이 자리하고 있고, 그 앞 너른 광장의 왼쪽에는 순백(純白)의 도포(道袍)를 입은 선생의 입상(立像)이 높은 단(壇) 위에 있고 그 옆 좌우에 ‘신도비(神道碑)’와 ‘단성소비(丹城疏碑)’, ‘무진봉사비(戊辰封事碑)’가 시퍼런 죽림(竹林)을 배경으로 나란히 세워져 있었다.
☆… 먼저 남명 선생의 입상 앞에 머리를 숙여 예(禮)를 올리고, 큰 장방형 오석(烏石)의 4면에 새겨진「단성소(丹城疏)」(「을묘사직소(乙卯辭職疏)」) 번역문을 뜨거운 목소리로 읽어 내려갔다. 구구절절 생생한 충혼(忠魂)이 어린 선생의 숨결이 가슴을 울렸다. 이어서 그 옆의 비석에 새겨진「무진봉사(戊辰封事)」를 읽어나갔다. 한참 읽어가는 도중 이곳의 문화해설사인 ‘안승필’ 여사가 다가와「무진봉사」의 내용에 대한 자상한 설명을 해 주었다. 스스로 나와서 친절을 베풀어 주신 것이다. …(「단성소」와「무진봉사」대해서는 별도의 항목에서 자세히 서술할 것이다.)
남명기념관
남명기념관은 남명선생 탄신 500주년을 기념하여 선생의 학덕을 추모하고 선생이 추구하고자 하였던 경의사상(敬義思想)을 계승, 발전시키고자 사업을 추진하여 2004년 8월에 개관하였다. 기념관 내부에는 남명선생과 관련된 유물 전시실과 영상정보실, 교육관, 세미나실 등이 있으며, 외부 공간에는 신도비, 남명석상, 여재실 등이 있다.
* [제1전시실] — 남명 선생이 실천하는 학문으로의 전환점이 된 서적들과 경의검(敬義劍), 성성자(惺惺子)등 남명의 수행과 실천에 관련된 유물들이 전시되어 있다.
* [제2전시실] — 남명의 가르침을 따랐던 제자들을 주제로 한 전시실로 제자들의 유물과 미니어처 연출, 의병활동과 관련한 조형물을 설치하여 그의 업적을 돌아볼 수 있는 공간이다.
* [제3전시실] — 남명정신을 기리고 이어받기 위한 오늘날의 노력과 이에 대한 실천의지를 표현한 공간으로 사숙 및 문인의 유물과 사적의 전경모형을 볼 수 있다.
안승필 해설사는, 우리가 경내를 다 돌아보고 나올 때, 성성문(惺惺門) 밖까지 나와서 배웅을 해 주었다. 자상하고 따뜻한 배려에 감사를 드린다.
* [산천재 탐방] — 「선조대왕의 제문」비석- ‘산천재’- ‘남명매(南冥梅)’
☆… ‘산천재(山天齋)’는 ‘남명기념관’ 길 건너편에 있다. 경내의 입구, 도로 앞에는 선조 임금이 남명 선생의 영전에 내린 장대한 제문(祭文)의 비석이 세워져 있다. 비문을 우리말로 번역되어 있어서 누구나 쉽게 읽을 수 있다. 18년간 김해(金海)에 살던 남명(南冥)은 회갑(명종16년, 1561)을 맞아, 지리산 천왕봉(智異山 天王峯)이 바라보이는 이곳 덕천강가에 <산천재(山天齋)>를 짓고 후학을 양성하며 노년을 보냈다.
* 다음은 ‘산천재’ 입구에 세워놓은 산천재에 관한 해설(解說)이다.
“서북쪽으로 높이 치솟은 지리산 천왕봉(天王峰)에서 발원한 물줄기가 중산(中山)과 삼장(三莊)으로 나누어 흐르다가 양당(兩堂)에서 다시 만나 덕산(德山)을 이룬다. 덕산에 위치한 ‘산천재’는 바로 조선 중기의 큰 선비 남명 조식 선생(1501~1572년)이 61세부터 돌아가실 때까지 평생 동안 갈고 닦은 학문을 제자들에게 전수하던 유서 깊은 곳이다. 특히 선생이 표방한 천왕봉 같은 기개와 학문의 실천성은 그 문하생들에게 계승되어. 임진왜란이 일어나 우리 민족의 명운이 풍전등화와 같을 때 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물리치는 효과로 나타난다. 이 때문에 선생은 우리 역사상 가장 성공한 교육자로 평가 받게 되었다.
남명 선생은 조선유학의 종사(宗師)로, 경상좌도의 퇴계 이황 선생과 병칭되기도 하지만 학풍과 출처가 자못 달랐다. 선생의 학문은 주자학(朱子學) 일변도였던 당시의 학풍에 비해 개방적 경향을 지니고 있었다. 즉 주자학에 중심을 두고 있으면서도 음양(陰陽), 지리(地理), 의약(醫藥), 도류(道流), 관방(關防) 등 현실에 활용되는 것이라면 무엇이라도 탐구하였던 것이다. 특이 주돈이(周敦頤), 장재(張載), 정이(程頤) 등의 학문을 두루 연구한 뒤에 원시유학으로 돌아가 공자와 안자의 고풍을 체득하여 당면한 현실문제에 대응하려고 했다. 선생의 경의정신과 실천유학은 우리 지성사에 커다란 문제의식을 던져준 쾌거라 하지 않을 수 없다.
선생은 사대사화(四大士禍)로 말미암아 사림(士林)이 극도로 쇠약해진 시대에 살았다. 이 같은 시대를 맞아 흩어진 사림의 원기를 다시 찾으려 하였고, 나라와 민족을 위한 사림의 역할을 통감하면서, 직설적인 언어로 잘못된 정치를 비판하였다. 백성들의 심각한 고충, 이를 외면하고 가렴주구를 일삼는 관리들의 횡포, 조정대신들의 무능함, 제대로 마음을 닦지 않은 군왕 등 선생의 비판정신은 그야말로 전방위적이었다. 특히 선생이 올린「을묘사직소」나 「무진봉사」등은 그 언어가 절실하고 명쾌하여 조정을 숙연하게 하였으며 이로써 사림의 원기는 크게 진작될 수 있었다.
조정에서는, 사풍(士風)를 크게 진작시킨 선생의 명망과 은연중에 형성된 재야 세력을 흡수하기 위하여 선생에게 여러 차례 벼슬을 내렸다. 그러나 선생은 끝내 나아가지 않고 산림처사(山林處士)를 자처하면서 지조와 절개를 지켰다. 많은 선비들이 평가하듯이 선생은 고고탁절(孤高卓節)한 기상으로 만품(萬品)을 굽어보고, 추상열일(秋霜烈日) 같은 위엄으로 천지간에 우뚝하였다. 선생의 이 같은 기상과 위엄, 출처와 학문은 만세에 귀감이 되기에 족하였으며, 문도(門徒)들은 이를 스스로 본받고 또한 후세에 전하기 위해 서원(書院)을 짓고 강학(講學) 활동을 벌였다. 국가문화재 30호로 지정된 ‘산천재’ 일원은 바로 이 같은 일련의 정신이 가장 잘 드러나는 곳이다.…(후략)”
산천재(山天齋)
☆… ‘산천재(山天齋)’ 경내로 들어갔다. 오늘 바라보는 ‘산천재(山天齋)’는 정면 세 칸, 측면 두 칸의 팔작지붕으로 단청(丹靑)이 아주 곱게 칠해져 있다. 단청(丹靑)을 곱게 칠해 예스러운 멋이 없다. 선생이 살아 있을 당시에는 이렇게 단장한 집에서 거하지 않았을 것이다.
뜰에는 당시 선생이 심었다는 오래된 매화나무[南冥梅] 한 그루가 세월의 정적(靜寂)을 지키고 있었다. 지금도 ‘매화(梅花)’는 추운 겨울을 나고 있다. 손수 뜰에 심은 이 매화(梅花)는 남명의 정신적 표상이다. 그러므로 군자의 서정을 시(詩)로 지어 마음을 나누었다. 매화의 기품과 선비의 마음이 아주 잘 드러내고 있다. 세상 사람들은 이를 ‘남명매(南冥梅)’라 부른다. 매화나무 옆에 오석(烏石)의 시비(詩碑)가 있다. 멀리 지리산 천왕봉이 보인다.
‘산천재’의 ‘산천(山天)’이란『주역(周易)』 64괘 중, 산(山)을 상징하는 간괘(艮卦)가 위에 있고 ‘하늘’을 상징하는 건괘(乾卦)가 아래에 있는 ‘산천(山天) 대축괘(大畜卦)’에 근거한 것으로서 ‘흰 구름을 뚫고 우뚝 솟은 큰 산이 수 백리를 뻗어 있는 형국’을 뜻한다. 따라서 산(山)이 높고 계곡(溪谷)이 깊으면 만물을 낳고 포용하여 기를 수 있듯이 ‘군자(君子)가 강건하고 독실하게 수양(修養)해 그 빛이 날로 새로워진다.’는 뜻에서 붙인 이름이다. 즉 이 당호에는, 경솔하게 나서서 자기의 얄팍한 명예나 얻어 세상을 적당하게 살아가려는 사람들과는 달리, 자기의 학문과 경륜을 크게 쌓아 쓰일 때를 기다리는 남명의 의지가 담겨 있는 것이다.
☆… 그리고 남명(南冥)은 생전 ‘산천재’의 창문에 ‘경(敬)’과 ‘의(義)’ 두 글자를 크게 써 붙이고, 자기가 그린「신명사도(神明舍圖)」를 자리 옆에다 걸어두고 자주 보면서 마음을 수양하는 한편,「신명사도(神明舍圖)」와 한 짝으로「신명사명(神明舍銘)」을 지었다. 그리고 ‘산천재’의 네 기둥에는 자신이 이곳에 자리 잡게 된 뜻을 담은「덕산복거(德山卜居)」라는 칠언절구를 지어 주련(柱聯)으로 삼았다. 지금도 ‘산천재’ 네 기둥에 남아있다.
春山底處無芳草 춘산도처무방초 봄 산 어느 곳인들 향기로운 풀 없으랴만
只愛天王近帝居 지애천왕그재거 다만 하늘 가까이 닿은 천왕봉 마음에 들어서라네
白手歸來何物食 백수귀래하물식 빈손으로 들어와 무얼 먹고 살겠냐고?
銀河十里喫猶餘 은하십리끽유여 십 리에 뻗은 은하수 같은 물마시고도 남겠네
☆… 마음은 하늘을 우러러 천왕봉을 마주하는 곳, 청빈한 선비의 삶이지만 '십리에 뻗은 은하수 같은 물을 마시고 살겠다’는 넉넉한 호기(豪氣)를 느끼게 하는 시이다. 그리고 ‘산천재’ 앞에는 초가(草家) 정자(亭子)를 짓고「題德山溪亭柱」(제덕산계정주)라는 시(詩)를 지어 달았다.
請看千石鍾 청간천석종 천 석들이 큰 종을 보시오
非大扣無聲 비대구무성 크게 두드리지 않으면 소리가 없다오
爭似頭流山 쟁사두류산 하나 그것이 지리산만 하겠소
天鳴猶不鳴 천명유불명 하늘이 울어도 울지 않는다오
남명(南冥)은 생(生)을 마칠 때까지 이곳에서 12년 동안 학문에만 전념했지만, 그 명성이 자자해 전국 각처에서 제자가 되기를 원하는 사람이 많았으며, 명종에 이어 선조(宣祖)의 부름은 계속되었으나 건강을 핑계로 모두 거절했다.
[남명 조식 선생의 생애]
― 경(敬)과 의(義)로 선비정신을 실천한 산림처사(山林處士) ―
남명(南冥) 조식(曺植)은 1501년(연산군 7년) 7월 10일(음력 6월 26일) 경상도 삼가현 토골(현 합천군 삼가면 외토리 토동)에서 승문원 판교 조언형(曺彦亨)과 인천 이씨 충순위(忠順衛) 이국(李菊)의 따님 사이에 태어난 3남 5녀 중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그와 쌍벽을 이루는 퇴계(退溪) 이황(李滉) 역시 같은 해에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학문 연구에 열중하였지만, 과거에는 한두 번 응시하고 이후로 응시하지 않았다.
소년기에 아버지 조언형이 단천군수로 발령되자 따라가 단천에서 지내면서 경전자사(經典子史)와 천문, 지리 , 의방, 수학, 궁마, 진법 등 유교 성리학 외에도 다양한 지식과 재능을 익혔고, 특히 자기의 정신력과 집중력, 담력 등을 스스로 시험하려고 두 손에 물그릇을 받쳐 들고 밤을 새기도 하였다 한다. 또한 좌구명(左丘明), 유종원(柳宗元)의 문장(文章)과 노장(老莊)에 심취하여, 거의 초탈의 경지에 이르렀다.
20대 중반까지는 아버지 조언형의 임지인 의흥(義興)·단천(端川) 등 외지에 살기도 했으나 대개 서울에 살았다. 그 뒤 성수침 형제, 성운, 성혼 등과 교제하며 학문에 힘썼으며, 여러 책을 다독하던 중 1525년 25세 때 〈성리대전(性理大典)〉을 읽은 뒤 크게 깨닫고 성리학에 전념하게 되었다. 그러나 기묘사화(己卯士禍)에 충격을 받고 관직을 단념하게 된다. 기묘사화가 일어나면서 숙부(叔父) 조언경이 조광조(趙光祖) 일파로 몰려 죽고 아버지 조언형도 파직되고 이내 세상을 떠나자 고향으로 내려와 버렸다. 그리고는 처가가 있는 김해(金海) 탄동으로 옮겨 18년간 ‘산해정(山海亭)’이라는 독서당을 짓고 학문에 열중하며 많은 제자를 길러내었다.
30대 후반에 ‘경상좌도에는 퇴계(退溪)가 있고 우도에는 남명(南冥)이 있다.’는 찬사를 받았다. 37세 되던 해 어머니의 권유로 과거에 응시했다가 낙방되자 어머니를 설득, 과거를 포기한 뒤 비로소 처사로서 삶을 영위하며 본격적인 학문 연구와 덕성 수양, 후학 양성에 전념한다. 그는 일생동안 술을 입에 대지 않고 수행을 하듯 늘 근신하였다. 1539년(중종 33년) 38세에 특별히 초빙되어 헌릉참봉에 임명되었지만, 벼슬을 고사하였고, 1544년 관찰사의 면담도 거절하였다. 그해 6월에 유일한 적장자였던 ‘조차산’을 병으로 잃었다.
1545년 인종(仁宗) 즉위 후 다시 조정에서 불렀지만 다만 그는 인종(仁宗)이 오래 살지 못할 것이라 예상하고 슬퍼하며 안타까워했다 한다. 명종(明宗) 즉위 후 문정왕후와 그녀의 동생 윤원형과 첩 정난정 등 외척이 어린 왕을 등에 업고 전횡하는 것을 비판하였다. 이후 명종이 여러 번 그를 불렀으나 그때마다 사직상소를 올리고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1548년 전생서 주부(主簿), 1549년 명종 4년 전생서주부에 특진되었으나 고사하였고, 합천 삼가면 집 근처에 계부당(鷄伏堂)과 뇌룡정(雷龍亭)을 지어 강학에 전념하였다. ‘뇌룡(雷龍)’은, 『장자(莊子)』에 나오는 ‘尸居而龍見 淵默而雷聲’에서 따온 말이다. 즉 ‘시동(尸童)처럼 가만히 있다가 때가 되면 용(龍)처럼 나타나고, 깊은 연못처럼 묵묵히 있다가 때가 되면 우레처럼 소리친다)’는 뜻이다.
1551년 종부시주부(宗簿寺主簿), 1553년 사도시주부(司導寺主簿)에 임명되었으나 모두 거절했다. 뒤에 인종 때와 선조 때에도 사림들이 대거 등용되었으나 그는 관직에 나아가기를 거부했다. 이 때 오건이 문하에 입문한 이래 정인홍, 하항, 옥계, 김우옹, 최영경 등 많은 학자들이 찾아와 학문을 배웠다.1555년 단성 현감, 1556년 종부시주부로 다시 부름을 받았지만, 역시 고사하였다. 단성현감 직을 사양하면서 올린 상소가「을묘사직소(乙卯辭職疏)」인데 「단성소(丹城疏)」라고도 불린다.
* [남명의 을묘사직소(乙卯辭職疏)] — 부패한 조정(朝廷)을 질타하다
‘뇌룡정(雷龍亭)’에서 강학하던 시절, 남명(55세, 1555년 을묘년)에게 조정에서 산청군 ‘단성현감’ 벼슬을 내렸다. 당시의 조정은 어린 임금 명종(明宗)을 대신해서 문정왕후(文定王后)와 외척들이 국정을 농단하고 있을 때였다. 남명(南冥)이 그런 조정에서 내린 벼슬을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았다. 남명은 이를 정중하게 사양하면서 사직의 상소문(上疏文)를 썼다. 거기에는 벼슬을 사직하는 이유와 함께, 임금과 조정의 무능과 무도함을 신랄하게 비판하는 내용을 직설적으로 개진했다. 남명의 시퍼런 칼날[筆鋒]이 부패한 조정을 비판했다. ‘목숨’을 내어놓고 쓴 글이었다. 이것이「단성소(丹城疏)」인데, 『南冥集』에 「을묘사직소(乙卯辭職疏)」로 수록되어 있다.
“… 전하의 나랏일이 그릇된 지 이미 오랩니다. 나라의 기틀은 이미 무너졌고, 하늘의 뜻도 이미 전하(殿下)에게서 멀어졌으며, 인심(人心)도 이미 떠나 버렸습니다. 비유하자면 큰 나무가 백 년 동안이나 그 속을 벌레에게 파 먹혀 진액이 빠지고 말라죽었는데도 그저 바라보기만 하여 폭풍우가 닥치면 견디어 내지 못할 위험한 상태가 언제 닥쳐올지도 모르는 실정에 있는 지가 이미 오래입니다. 조정의 인물 가운데 충성스럽고 뜻 있는 선비가 없는 것도 아니고, 아침부터 밤늦게까지 나랏일에 힘쓸 선비가 없는 것도 아닙니다. 사방을 둘러보아도 손을 쓸 곳이 없다는 것을 이미 다 알고 있습니다.
抑殿下之國事已非。邦本已亡。天意已去。人心已離。比如大木。百年䖝心。膏液已枯。茫然不知飄風暴雨何時而至者。久矣。在廷之人。非無忠志之臣夙夜之士也。已知其勢極而不可攴。四顧無下手之地
아랫자리에선 히히덕거리며 주색을 즐기고 있고, 높은 벼슬아치는 윗자리에서 어물거리며 오직 뇌물로 재산만 불리고 있습니다. 물고기의 배가 썩어 가는데도 아무도 치유하려 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궁궐 안의 신하는 후원하는 세력을 심어서 용을 못물에 끌어들이듯 하고, 궁궐 밖의 신하는 백성의 재물을 벗기기를 이리[狼]가 들판에서 날뛰듯 하는데도 가죽이 다 헤어지면 털도 붙어 있을 데가 없다는 것을 알지 못합니다. 신(臣)은 이 때문에 낮에는 깊이 생각하고 자주 탄식하면서 하늘을 자주 우러러 보고, 밤에는 흐느끼며 침울해 하면서 천정을 우러러 본지 오래되었습니다.
小官嬉嬉於下。姑酒色是樂。大官泛泛於上。唯貨賂是殖。河魚腹痛。莫肯尸之。而且內臣樹援。龍挐于淵。外臣剝民。狼恣于野。亦不知皮盡而毛無所施也。臣所以長想永息。晝以仰觀天者。數矣。噓唏掩抑。夜以仰看屋者。久矣
자전(慈殿, 文定王后)께서는 비록 생각이 깊으시다 하나 깊은 궁중의 일개 과부(寡婦)에 지나지 않고, 전하께서는 다만 선왕의 일개 어린 후사(後嗣)이실 뿐입니다. 그러니 온갖 천재(天災)와 만 갈래의 인심(人心)을 어떻게 감당해 내며 어떻게 수습하시겠습니까? <하략>” 慈殿塞淵。不過深宮之一寡婦。殿下幼冲。只是先王之一孤嗣。天災之百千。人心之億萬。何以當之。
이렇게 지엄한 대비[국왕 명종(明宗)의 어머니]를 일개 과부(寡婦)에 지나지 않고, 만인지상인 임금을 고아(孤兒)에 지나지 않다고 했으니 이 얼마나 무엄하고 신랄한 비판인가. 이 상소문으로 그는 목숨이 위태한 지경에 갔지만 다행히 그를 벌하면 언로(言路)가 막힌다는 사림의 지원 덕분에 참형을 면하기는 하였지만 언로가 자유로운 오늘날에 보더라도 참으로 섬뜩한 ‘돌직구’가 아닐 수 없다. 아무리 언로가 보장된 정치 제도라 하더라도 그렇게 노골적으로 임금까지 비판했으니, 스스로 죽음을 불사한 상소였다. 오히려 뜻있는 선비나 모든 백성들이 상소문에 따른 형벌(刑罰)을 두려워하여 모두 가슴을 졸였다.
당시 사회에 대한 문제점을 날카롭게 지적하면서, 조정의 신하들에 대한 준엄한 비판과 함께 왕과 대비에 대한 직선적인 표현으로 조정에 큰 파문을 일으켰으며, 양사에서는 "군주에게 불경(不敬)을 범했다"며 그에게 벌을 주어야 한다고 했지만, 대부분의 대신이나 사관들은 "초야에 묻힌 선비라 표현이 적절하지 못해서 그렇지, 그 우국충정만은 높이 살만한 것이다."라는 논리로 적극 변호하여 파문은 겨우 가라앉았다.
* [무진봉사(戊辰封事)] — 관료들의 부패에 대한 신랄한 비판(批判)
명종 22년(1567) 6월 왕이 승하하고 이어 등극한 선조(宣祖)의 세 번에 걸친 부름에도 남명은 ‘구급(救急)’과 ‘군의(君義)’란 두 가르침만 써서 보내며 끝까지 거부하다가 이듬해 5월「무진봉사(戊辰封事)」를 써서 상소했다. ‘봉사(封事)’는 관찰사나 승정원 등 다른 상소문과 달리 중간에서 개봉을 하지 않고 임금에게 직접 전하는 상소문을 말한다.
1568년 선조(宣祖)가 다시 불렀으나 역시 사양하고 정치의 도리를 논한 상소문「무진봉사'(戊辰對事)」를 올렸다. 남명의「무진봉사(戊辰封事)」는 ‘서리망국론(胥吏亡國論)’이 그 주제다. 남명은 68세(1568년)에 새로운 정치 시대를 열어보려는 선조로부터 다시 부름을 받았지만, 이번에도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고, 1,600여 자에 달하는 긴 문장의 상소문(上疏文)를 올렸다. 이 상소에서 정치의 개혁을 강력하게 주장한다. 관리를 선발할 때에 문관은 시와 문장으로 시험을 치렀고, 무관은 활쏘기, 말타기 등으로 뽑았기 때문에, 과거에 급제해서 벼슬하는 관리들은 실무를 제대로 몰랐다. 그리고 인사 이동이 심해서, 관리들은 일을 파악할 수 없어 모든 행정이 저절로 아전[胥吏]들 손아귀에 이루어 질 수밖에 없었다. 이 상소문은 당시 서리의 폐단을 극렬하게 지적한 것으로 유명하다.
남명(南冥)의 이와 같은 정신은 제자들에게로 이어져 남명이 죽은 지 20년 후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제자들은 구국의 선봉으로 나서게 되었는데 영남의 3대 의병장, 의령의 망우당(忘憂堂) 곽재우(郭再祐), 합천의 내암(來庵) 정인홍(鄭仁弘), 고령의 송암(松庵) 김면(金沔)을 포함한 의병장급 인물이 무려 50여명이 넘었다. 한 사람의 정신적 유산이 역사에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지대한지를 실감케 하는 대목이다. 수신(修身)하면 치국(治國)의 길로 향하는 것이 당연지사로 여겼던 시대에 그는 끝내 벼슬을 사양하고 늘 자신을 경책(警責)하고 후학들을 기르는데 힘썼다. 그러면서도 국가의 안위를 위해서는, ‘할 말’은 언제 어디서나 기꺼이 하는 선비의 일생을 살았던 것이다.
* [민암부(民巖賦)] — ‘물이 사나우면 배를 전복시킬 수 있다’
「무진봉사(戊辰封事)」와 같은 상소에도 불구하고, 임금이 백성을 위한 정치에는 관심이 없자, 남명은 임금과 벼슬아치를 깨우쳐 주기 위해 다시「민암부(民巖賦)」라는 글을 지었다. 이 글은 백성은 물, 임금은 배에 비유하여 물이 사나우면 배를 전복시킬 수 있음을 표현한 것으로, 현실 정치의 모순을 지적하고 이를 극복할 수 있는 힘을 민(民)에게서 찾고 있어 남명의 대민의식을 잘 보여 주는 글이다. 맹자(孟子)의 ‘혁명론’과 그 궤(軌)를 같이한다. 그리고 이 글을 통해 남명의 민에 대한 인식이 조선조 초기 삼봉(三峰) 정도전(鄭道傳)의 민본사상과 유사함을 확인할 수 있다. 삼봉의 민본사상이 고려 말 부패 타락한 관료 지배층의 학정 밑에서 신음하던 백성의 처지를 동정하고, 그들의 지위를 높여주기 위한 현실적인 개혁의지에서 출발해 혁명사상까지 연결되었다면 민을 기반으로 한 척신세력이나 부패관리를 추방하려고 한 사림세력의 개혁성을 내포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원래 민암(民巖)이라는 말은『서경(書經)』의 ‘고외우민암’(顧畏于民巖, 백성들의 암험함을 돌아보고 두려워하라)에서 비롯되었다. 그리고 본문에 등장하는 ‘戴君’(대군)과 ‘覆國’(복국)은『순자(荀子)』「왕제(王制)」에 나오는 ‘君者舟也 庶人者水也 水則載舟’의 비유와 흡사하며, ‘天視廳之在此’는『孟子』「만장」장에 나오는 ‘天視自我民視 天廳自我民廳’에 근거하고 있다. 남명은 백성의 힘을 중시한 각종 경전을 광범위하게 인용하여 자신의 견해를 밝힌 것이다.
남명은 배를 뒤엎을 수 있는 민의 암(巖)이 생기는 원인은 당시의 현실에서 찾았다. 그는 궁실의 광대함, 여알(女謁)의 성행, 과중한 세금, 도가 넘는 사치, 가렴주구의 성행, 형벌의 자행 등 6가지를 문제로 지적하고 수습을 위해서는 군덕(君德)이 가장 중요함을 주장했다. 결론적으로 덕치가 행해지면 백성은 결코 국가운영에 부담이 되지 않는 존재임을 강조했다.
* [생애(生涯)의 마지막] — 산림처사 남명에 대한 선조(宣祖)의 극진한 예우(禮遇)
1569년 종친부 전첨(宗親府典籤) 벼슬에 임명되었지만 사퇴했고, 1570년 선조의 소명(召命)에도 응하지 않았다. 1571년(선조 5년) 선조가 그에게 특별히 식물(食物)과 전답을 하사하자 그는 이를 받고 ‘사은소(謝恩疏)’를 올렸다. 1572년 1월에 경상도 감영(監營)에서 남명에게 병(病)이 있다고 임금에게 아뢰니, 임금은 특별히 전의(典醫)를 파견하였지만, 전의가 도착하기 전에 남명은 세상을 떠났다. 숨을 거두는 순간까지도 ‘경의(敬義)’의 중요함을 제자들에게 이야기했고, 경의(敬義)에 관계된 옛 사람들의 중요한 말을 외웠다고 한다. 음력 2월 8일에 남명은 자세를 단정히 한 채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의 부음 소식이 전해지자 선조(宣祖)는 예관을 보내 치제(致祭)하였다. 그의 나이 만 71세였다. 선조는 그의 죽음을 애도하여 조회를 파하고, 바로 예장을 명하고 부의를 내렸다. 지금 ‘산천재’ 입구에 ‘남명에게 올리는 선조대왕의 제문’을 비석에 새겨 놓았다. 증직으로 통정대부 사간원(司諫院) 대사간에 추증되었다. 후에 영의정으로 증직되었다. 시호는 문정(文貞)이다.
* [남명의 학문과 철학] — 실천궁행(實踐躬行)
조식(曺植)은 61세 때 지리산 천왕봉을 바라보는 덕산의 사륜동(현 산청군 시천면 사리)으로 옮겨 살면서 산천재(山天齎)를 지어 죽을 때 까지 그곳에 머물며 강학에 힘썼다. ‘산천(山天)’은 「주역(周易)」대축괘(大蓄卦)의 ‘하늘이 산 속에 있는 형상으로서, 군자가 이를 본받아 강건하고 독실하게 하여 스스로 빛냄으로써 날로 자신의 덕(德)을 새롭게 한다’는 말에서 뜻을 취한 것이다.
그의 학문은 현실 문제를 해결하고, 지식을 알면 바로 행해야 된다는 실천궁행(實踐躬行)의 뜻을 펴는 것이었다. 실천에 옮기지 않는 학문은 죽은 학문이라는 것이다. 이러한 ‘현실과 실천’에 대한 강조는 후일 북인학파와 남인실학파들이 실천, 실용성을 강조하는 풍토로 이어지게 된다. 그의 제자로 김효원, 동강 김우옹, 한강 정구 등 저명한 학자들과 정인홍 등과 같은 관료학자, 의병장 곽재우가 배출되었다. 일반적으로 낙동강을 경계로 경상우도 지역(오늘날의 경상남도 지역)을 중심으로 학맥을 형성하였다. 그는 퇴계와 기대승 등과도 서신을 주고받으며 이(理)와 기(氣)에 대한 ‘이기논쟁(理氣論爭)’을 모두 공리공담으로 치부했다.
그의 학맥은 북인에게 계승되었으나, 북인은 1623년 인조반정과 1624년의 이괄(李适)의 난 때 모두 숙청당하고 만다. 그런데 그의 제자들 중 동강 김우옹과 한강 정구는 이황의 문하에도 출입하여 수학하였고, 한강 정구의 제자들은 북인과 남인에 모두 진출하여, 그의 학문은 부분적으로 남인을 통해 조선후기까지 계승되었다.
남명(南冥)의 저서로는 1604년(선조 37)에 처음 간행된 『남명집 南冥集』, 『남명학기유편 南冥學記類編』, 『신명사도 神明舍圖』, 『파한잡기 破閑雜記』가 있으며, 문학작품으로 「남명가 南冥歌」, 「권선지로가 勸善指路歌」등이 전한다.
조식은 당대의 유학을 영도하는 위치에 비해 남긴 저술이 많지 않은데, 이것은 남명이 저술 행위를 중요시하지 않았고 오히려 경계했던 학문적 입장에 따른 것과 남긴 원고 대부분이 임진왜란 중 소실되었기 때문이다. [한국학중앙연구원]
* [실사구시(實事求是)의 남명학] — 조선후기 ‘실학’의 선구적 인식
남명(南冥)이 말하는 실천에는 물론《소학(小學)》과《가례(家禮)》의 내용을 중심으로 한 성리학적 예의 실천이라는 의미도 있지만, 수기(修己)와 치인(治人)을 유학의 본령으로 생각하는《대학(大學)》의 학문관으로의 복귀를 주장하는 면이 강하다. 즉 유학자는 고답적인 이론에 매몰되어 현실을 망각해서는 안 된다고 하는 실학적 학문관이다. 이는 성(性)과 천도(天道)에 대해 적극적으로 설명하고자 하지 않았던 공자 이래로 유학의 역사에서 끊임없이 되풀이된 견해이기는 하지만, 특히 조선 후기 실학자들의 학문적 문제의식의 핵심을 이룬 것이었다. 그러므로 남명 조식은 조선 전기 사림파의 실천적 학풍과 조선 후기 실학파의 현실을 중시하는 학풍을 이어주는 사상사적 고리로 간주될 수 있다. 또한 남명은 우리나라의 유학자들 가운데서 선비정신을 대표하는 존재로 간주되어 왔다. 그것은 그가 ‘사직소’를 통해 당대의 정치에 대해 과감한 비판을 행한 데에서 잘 드러나 있지만, 또한 역대의 인물에 대해 그 자신의 독자적인 견해에 따라 비판을 감행한 데서도 두드러진다.
* [남명의 경의학(敬義學)] — “內明者敬 外斷者義”
남명(南冥)은 부패한 조정에서 내리는 벼슬을 사양하고 초야의 처사로 지내면서, 내면의 수양을 뜻하는 ‘경(敬)’과 도의 적극적인 표출을 의미하는 ‘의(義)’를 동시에 추구하는 ‘경의학(敬義學)’을 학문의 핵심으로 삼았다. 퇴계(退溪)가 주로 순수한 학문적 관심에서 성리학(性理學)의 이론과 실천에 심취했던 반면, 남명(南冥)은 이론 논쟁을 비판하면서 실천 문제에 관심을 집중했으며, 노장(老莊) 사상 등에 대해서도 포용적이었다. 유학자이자 성리학자였던 그는, 조선 시대 내내 다른 유학자들이 도교와 노장 사상을 이단시한 것과 달리, 노자와 장자에게도 취할 점이 있다고 본 것이다.
남명(南冥)은 ‘경(敬)과 의(義)’를 학문과 수양의 신조(信條)로 삼았다. ‘산천재(山天齋)’의 왼쪽 창문에 ‘敬’ 자를, 오른쪽 창문에 ‘義’ 자를 써 붙이고, 또한 경(敬)의 상징으로 성성자(惺惺子)라는 두 개의 작은 쇠방울을 매달고 다녔다. 성(惺)은 '깨달음'이니 성성자惺惺子)는 스스로 경계하여 방울소리를 들을 때마다 자신을 일깨우고자 했던 것이다. 그리고 또 한 개의 장도를 차고 다녔는데 그 칼에는 “內明者敬 外斷者義”(안에서 밝히는 것은 경(敬)이요, 밖에서 결단하는 것은 의(義)다)라는 글귀를 새겼다.
남명(南冥)의 경의검(敬義劍)에 적은 글귀는 주역(周易) 곤괘(坤卦)의 육이(六二) 효사(爻辭)의 문언(文言)에 나오는 ‘敬以直內, 義以方外’에 근거를 두고 있다. 이는 ‘경(敬)으로써 마음을 곧게 하고, 의(義)로써 언행을 방정하게 한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남명에게 있어 ‘경(敬)’은 목숨을 걸고 자신의 내면세계를 수양하는 것이라면, ‘의(義)’는 이를 바탕으로 사회적 실천을 이룩하려는 의지인 것이다. 그는 얕은 지식으로 과거에 급제하여 벼슬살이를 하는 것보다, 깊은 학문탐구와 사유로 흔들림이 없는 단단한 인격을 완성하고 사회의 부조리와 불의에 대해서는 거침없는 직설(直說)을 하여 정의를 세우고 민본국가를 만들고자 하였다.
* [남명에 대한 후대의 평가] — “기개(氣槪)와 절조(節操)”
18세기의 실학자 이익(李瀷)은 저서 『성호사설(星湖僿說)』에 따로 「남명선생문」이란 항목을 두고 “내 글은 비단을 짜서 한 필을 이루지 못한 것이고, 퇴계의 글은 포목을 짜서 한 필을 이룬 것.”이라는 남명의 말을 인용하였다. 「남명선생시」라는 항목에서는 “천 석 무게의 종을 보라. 크게 치지 않으면 소리가 없다네. 어떻게 하면 두류산처럼 하늘이 울어도 울지 않을 수 있을거나?”(「제덕산계정주題德山溪亭柱」)라는 부분을 인용하여 그에 대해 “우리나라 기개와 절조의 최고봉(東方氣節之最)”이라는 찬사를 부여하며 그의 우뚝 솟은 기개를 높이 평가했다. 다음은 성호 이익의 퇴계(退溪)와 남명(南冥)에 대한 평설이다.
“퇴계(退溪)가 소백산 밑에서 태어나 우리나라 유학자의 종주(宗主)가 되셨는데, 그 계통의 인물들은 깊이가 있고 빛을 발하여 예가 있고 겸손하였으며 문학은 찬란하여 수사의 유풍을 방불케 했다. 남명(南冥)은 지리산 밑에서 태어나 우리나라에서 기개(氣槪)와 절조(節操)로서 가장 높은 위치를 차지하셨으니, 그 후계는 정신이 강하고 실천에 용감하였으며 의(義)를 숭상하고 목숨을 가볍게 여겨 이익을 위해 뜻을 굽히지 않았고, 위험에 처하여 뜻을 굽히지 않는 독립적인 지조(志操)를 지녔으니, 이는 상도(上道)와 하도(下道)의 다른 점이다.” — 『성호사설(星湖僿說)』권지1,「天地文」'백두정간'
☆… 남명(南冥)은 또한 우리나라의 유학자들 가운데서 ‘참다운 선비정신’을 대표하는 존재로 간주되어 왔다. 그것은 그가 사직소를 통해 당대의 정치에 대해 과감한 비판을 행한 데에서 잘 드러나 있지만, 또한 역대의 인물에 대해 그 자신의 독자적인 견해에 따라 비판을 감행한 데서도 두드러진다. 또한 퇴계학파는 인(仁)을, 남명학파는 의(義)를 중시한 점을 그 특징으로 간주하였다. 이는 대체로 조식 및 남명학파에 대한 공통된 견해라고 할 수 있다.
☆… 남명이 출사(出仕)를 거부하고 은신한 것에 대해, 유홍준(兪弘濬)은 ‘남명의 이러한 복거(卜居)와 불출사(不出士)는 결코 죽림칠현 같은 은일자의 모습도 아니고 공자의 제자 안회와 같은 고고함의 경지도 아니었다. 그는 결코 세상을 외면해버린 은둔자가 아니었다. 그가 세상에 나아가지 않음은 시세(時勢)가 발이나 씻고 있음이 낫다고 판단되었기 때문이었다.’고 평하였다.
* [퇴계(退溪)와 남명(南冥)] — 조선중기 영남학파의 두 거봉(巨峰)
☆… 1501년 남명(南冥) 조식(曺植)이 태어난 해에 경상좌도(慶尙左道) 안동 예안현 온계리에서 퇴계(退溪) 이황(李滉)이 태어났다. 이후, 퇴계(退溪)는 70세, 남명(南冥)은 72세까지 장수를 했다. 두 사람은 16세기 조선 중기 영남학파의 두 거봉이다. 퇴계(退溪)가 경상좌도 사림의 영수라면 남명(南冥)은 경상우도 사림의 영수인데, 두 사람의 제자들은 동인(東人) 정파를 형성했다. 그러나 동인 정파는 퇴계학파의 남인과 남명학파의 북인으로 분립된다.
퇴계(退溪)는 1534년 34세로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자로서 사대부의 길을 걷게 되고, 남명(南冥)은 1539년 39세로 초야에서 학문에만 전념하는 유일(遺逸)로 인정받아 국가의 부름을 받았지만 나아가지 않았다. 선비가 수기(修己)하면 당연히 치인(治人)의 단계로 가서 학자 관료인 사대부가 되는 것이 상식이었다. 당시 퇴계는 처음에는 벼슬길에 나아갔지만, 남명(南冥)은 여러 차례 벼슬길에 나아갈 기회가 있었음에도 이를 모두 사양하였다. 선비가 굳이 조정의 관료가 되어야만 국가를 위하여 일할 수 있다고 생각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남명은 유학(儒學)의 본질이 무엇인가에 대해 골똘히 공부하고 이를 실천하기 위해 스스로 경계(警戒)하며 후학을 가르치는데 진력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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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천강(陽川江), 합천 삼가현의 남명 조식의 뇌룡정
경호강의 동쪽에서 흘러내리는 양천강은 산청군 생비량면과 신안면을 관류하여 흐르는 하천이다. 합천군 자굴산에서 발원하여 합천 쌍백면과 삼가면, 의령군 대의면을 거쳐 산청으로 흘러들어 단계천과 합수하고 마지막에 경호강과 합류하여 남강으로 유입되며, '생비량천'이라고 부르기도 한다.
이 강은 발원지로부터 장장 60㎞에 이르는 동안 생활 농업용수로 공급하는 젖줄 역할을 해왔다. 그러나 흐름이 완만하여 남강댐 축조 이후 장맛비 때 침수 피해가 잦아지고 있다. 예전에는 은어와 황어가 많이 잡혀 명물이었던 적도 있으나 댐 건설 이후에는 거의 자취를 감추었다.
양천강 상류 합천군 삼가면 외토동에 남명 조식 선생의 생가가 있고 중년에 학문을 연구하고 제자를 길러냈던 뇌룡정이 있다. 그러나 의령∼대의 간의 강변도로를 따라가면서 만나는 정경이 일품이고, 생비량면 도전리 쪽에는 마애불상군과 우암 송시열 선생이 사액한 어은서원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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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리산 덕천강(德川江), 덕천서원 / 세심정
덕천강은 산청의 지리산에서 발원한 맑은 물로 ‘산청의 정신’을 드러내는 강이며, 신라와 고려의 수호신을 모신 성전과 조선의 개국을 반대한 지리산의 기백을 간직한 강이다.
덕천강은 지리산 천왕봉 아래서 샘솟는 천왕샘을 비롯하여, 지리산의 신령스러움을 모셨던 제석천과 호야와 연진의 전설을 낳은 음양수샘에서 시작한 ‘중산리계곡’의 물이 스스로 무지개를 피운다는 무제치기 폭포와 청정 비구니들의 독경소리 고요한 ‘대원사에서 흘러온 물’과 만나는 덕천 양단수에서부터 진양호에 닿기까지의 강이다.
시천면 두류산(頭流山) 양단수(兩端水)는 지리산 중산리에서 흘러오는 물과 대원사 계곡, 내원사, 안내원·장당 계곡의 맑은 계곡과 만나는 곳을 일컫는다. 덕천강을 이루는 두 지류를 가리킨다. 이는 조식 선생의 시조(時調)에서 유래되었는데, 중산리 방향 덕산고등학교 앞 작은 공원에 시비가 세워져 있다.
두류산(頭流山) 양단수(兩端水)를 녜 듯고 이제 보니.
도화(桃花) 뜬 말근 물에 산영(山影)조차 잠겨셰라.
아희야. 무릉(武陵)이 어디메오 나난 옌가 하노라.
덕천강의 남명유적은 두 곳으로 나뉘는데, 사리(絲里)에는 남명 조식 선생의 산천재, 별묘, 신도비, 묘비가 있고, 원리(院里)에는 덕천서원과 세심정이 있다. 산천재는 선생이 학문을 닦고 연구하던 곳으로 명종 16년(1561)에 세웠고, 순조 18년(1818)에 고쳐졌다. 규모는 앞면 2칸, 옆면 2칸이다. 덕천서원은 선조 9년(1576)에 세웠고, 앞면 5칸, 옆면 2칸의 현재 건물은 1926년에 고쳐 지은 것이다. 세심정은 선조 15년(1582)에 처음 세웠다. 다음은 스스로 마음을 씻어내는 욕천(욕천)이라는 시이다.
全身四十年前累 전신사십년전루 사십 평생 살아온 이내 몸의 더러움을
千斛淸淵洗盡休 천곡청연세진휴 맑은 못 깊고 넓어 남김없이 씻어냈네
塵土倘能生五內 진토당능생오내 오장 속에 티끌 혹시라도 남았다면
直今刳腹付歸流 직금고복부귀류 당장 이 배를 갈라 물에 흘려보내리라!
산청의 이름처럼 덕천강은 얼마나 맑고 청정하였으며, 주변 경치는 아름다웠다. 남명은 일생토록 벼슬길에 나가지 아니하고 지리산이 올려다 보이는 양단수 언저리에 산천재를 열고 ‘안으로 바른 마음을 기르며 밖으로 그 옳음을 실천한다’는 경의학(敬義學)을 몸소 행하며 가르쳤다.
남명의 가르침을 받은 많은 선비는 훗날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분연히 일어나 의병을 모집해 싸웠다. 남명 문하에서 궐기한 의병장만도 홍의장군 곽재우(郭再祐)를 비롯하여 정인홍(鄭仁弘), 최영경(崔永慶) 등 50여 명에 이르렀으니 퇴계(退溪) 이황(李滉)으로 대표되는 영남좌도의 사상이 낙동강을 중심으로 경북 안동에서 형성됐다면 지리산에서 발원한 덕천강은 영남우도를 대표하는 사상을 낳았다고 하겠다.
덕천강은 지리산 천왕봉에서 산록에서 발원하는 강이다. 천왕봉을 중심으로 제석봉과 연하봉, 촛대봉, 영신봉을 거쳐 삼신봉에 이르는 남부 능선이 만든 법천 계곡, 청내골, 도장골, 거림골, 고운동 계곡에 이어 중봉에서 갈라져 나온 구곡산 능선과 치밭목 능선이 만든 순두류 계곡, 천지암골, 내원골, 장단골 뿐만 아니라 천왕봉에서 중봉을 거쳐 하봉과 쑥밭재, 새재, 깃대봉, 밤머리재, 웅석봉으로 이어지는 왕등재 능선과 웅석봉 능선이 만든 조개골, 대원사 계곡, 딱밭실 골에서 흘러내린 물이 모여 만든 강이 덕천강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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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청3매(山淸三梅)
— 정당매(政堂梅), 원정매(元正梅)(汾陽梅), 남명매(南冥梅) —
산청 단속사지(斷俗寺址) 정당매(政堂梅)
정당매는 통정(通亭) 강회백(姜希顔, 1357~1402)이 심은 매화나무로서 꽃의 색깔은 백색이 홑꽃이다. 경남 산청군 단성면 운리, 지리산 줄기가 힘차게 뻗어 내려오다가 멈춘 옥녀봉 아래 남향으로 자리한 단속사 절터에는 동·서의 삼층석탑과 주춧돌이 어지러이 놓인 가운데 매화나무 고목이 한 그루 서 있는데, 이것이 정당매(政堂梅)이다.
偶然還訪石山來 우연환방석산래 우연히 옛 고향을 다시 찾아 돌아오니
滿院淸香一樹梅 만원청향이수매 한 그루 매화향기 사원에 가득하네
物性也能至舊主 물성야능지구주 무심한 나무지만 옛 주인을 알아보고
慇懃更向雪中開 은근갱향설중개 은근히 나를 향해 눈 속에서 반기네
이는 고려말 문신 통정공(通亭公) 강회백(姜淮佰, 1357~1402)이 자신의 삶을 마치기 전에 자신이 손수 심은 정당매를 찾아와 읊은 시 “단속사에 심은 매화(斷俗寺 手種梅)” 일부이다. 강회백이 노래한 이 매화는 산청군 단성면 운리 탑동마을 단속사 터에 있는 매화로 강회백이 심었다고 한다. 강회백은 훗날 그의 벼슬이 정당문학(政堂文學) 겸 대사헌에 이르렀기에, 후세 사람들과 스님들이 이 매화나무를 ‘정당매’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따라서 이 정당매의 나이를 640살로 보는데 나무 높이 8m에 둘레가 1.5m이며, 1982년 11월 10일 경상남도의 보호수로 지정되었습니다.
인재 강희안(姜希顔, 1419~1464)의 『양화소록(養花小錄)』에 보면 ‘우리 선조 통정공께서 소년시절에 지리산 단속사에서 글공부를 하실 때에 손수 매화 한 그루를 뜰 앞에 심어놓고, 시 한 수를 읊었다’고 씌여 있다. 여기서 인재가 말하는 선조는 고려 말기의 문신인 통정(通亭) 강회백(姜淮佰)으로 우왕2년(1376)에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이 점점 높아져서 정당문학(政堂文學, 중서성과 문하성의 종2품 벼슬)겸 대사헌에 이르렀다. 공양왕 4년(1392) 정몽주가 살해된 뒤 진양에 유배되었다가 조선 건국 후 태조 7년(1398) 동북면 도순문사(都巡問使)가 되었다.
그는 경남 산청 출신으로 강희안의 조부가 되며 통정이 소년시절 정당매를 심고 읊었다는 시가 있다. 『통정집』에 기록된 또 하나의 시는 그가 46세로 일생을 마치기 전에 손수 심은 정당매를 찾아와 읊은 시로써 읽는 사람으로 하여금 커다란 감동과 감회를 느끼게 한다.
단속사의 스님들이 공의 재덕(才德)을 생각하고 깨끗한 풍채와 고매한 품격을 사모하여 그 매화를 보면 곧 공을 본 듯하였다. 해마다 흙으로 뿌리를 다져주고 북돋아 기르기를 때를 맞춰 알맞게 하였다.
그 가지의 모양이 가까스로 굽고 또 푸른 이끼가 나무줄기를 감싼 것이 『매보(梅譜)』에서 말한 고매(古梅)와 다름이 없으니 참으로 영남의 한 고물이라 하겠다. 이로부터 영남에 나랏일로 오는 사람들이 이 고을에 오면 누구든지 단속사를 찾아서 그 매화를 감상하고 우리 선조의 시운에 맞춰 시를 써서 문 위에 걸어놓곤 하였다.
이와 같이 단속사의 스님들은 이 매화나무를 극진히 보살피게 되었고, 통정공의 후손들과 영남에 내려오게 된 관리들이 정당매를 찾게 되었다. 이 매화나무의 나이는 통정공이 소년시절 단속사에서 글을 읽을 때 심었다고 기록되어 있으므로 그가 이 절에서 공부한 시기를 20세 이전의 등과하기 전으로 본다면 대체로 1376년 이전에 식재된 것으로 볼 수 있어 그 수령은 630년이 넘었을 것으로 본다.
현재 정당매는 높이 8m에 둘레가 1.5m로서 근간에서 4본의 지간이 생겨 위로 혹은 옆으로 뻗었다. 꽃의 색깔은 백색이며 홑꽃이다. 3월 20일 전후이면 어김없이 꽃망울을 터뜨려 맑은 향기를 퍼뜨린다.
후손들은 이 정당매를 기념하기 위하여 비각을 짓고 비를 세웠다. 매각(梅閣)은 1915년에 매비의 건립과 함께 건립된 것으로 ‘정당매각(政堂梅閣)'이란 넉자로 된 현판이 걸려 있으며, 비각 안에는 매각을 세운 연유를 기록한 ‘정당매각기(政堂梅閣記)'와 통정공의 매화원운(梅花原韻)의 시와 후손들의 시 여러 편이 걸려 있다. — 현재 이 정당매는 1982년 11월 10일자로 경상남도의 도나무(고유번호 12~41 호)로서 보호수로 지정되어 있다.
매화나무는 꽃이 피는 시기에 따라 일찍 피기에 ‘조매(早梅)’, 추운 날씨에 핀다고 ‘동매(冬梅)’, 눈 속에 핀다고 ‘설중매(雪中梅)’라고 하며, 꽃의 빛깔에 따라 하얀 것을 ‘백매(白梅)’, 붉으면 ‘홍매(紅梅)’라 부른다. 지금 우리가 흔히 보는 매화나무는 주로 일제강점기 때 개량된 것이고, 토종 “고매(古梅)”는 온 나라에 대략 200여 그루가 있다고 하는데 2007년 문화재청이 전국의 토종 고매(古梅)를 조사하여 그 가운데 강릉 오죽헌 율곡매, 구례 화엄사 화엄매, 장성 백양사 고불매, 순천 선암사 선암매를 천연기념물(天然記念物)로 지정하여 보호하고 있다.
단성면 남사리 원정매(元正梅)
경남 산청군 단성면 남사마을은 약 500여년 전에 형성된 마을로 조선시대 의 전통적인 양식을 갖춘 고택(古宅)이 여러 채 있고 오래된 마을답게 회나무의 고목이 여러 그루가 있다. 이 마을에는 매화의 고목이 많기로도 유명하다. 이 마을의 고택 중 하나로 진양 하씨가 32대째 살아온 ‘분양고가’가 있다. 이 집은 원정공(元正公) 하집(1303~1380)이 살았던 집이다. ‘원정(元正)’은, 의(義)를 행하여 백성을 기쁘게 함이 ‘으뜸[元]’이요, 정의(正義)로써 남을 복종케 함이 ‘바름[正]’이라는 뜻으로 취한 것이다. 그는 21세 때인 1324년에 진사를 거쳐 문과의 갑과에 3등급으로 급제하여 경주부윤과 문화찬성사를 거쳐 대광보국 숭록대부 진천부원군에 이르렀다.
이 집은 동학란 때 소실된 채 지금은 그의 31대 손인 하철이 새로 집을 지어 ‘汾陽古家’(분양고가)라는 액자를 걸어 놓아 옛 명문가의 흔적을 나타내고 있으며, 대원군의 ‘元正舊廬’(원정구려)라는 친필액자가 보관되어 있는 사랑방 앞에는 610년의 세월을 묵묵히 지켜온 매화나무 한 그루가 잘 생긴 소나무와 함께 어울려 있다. 이 매화나무는 고려 원정공 하집이 심은 것으로 등걸은 고매(古梅)로서의 품격을 갖추고 있고, 3월말이면 연분홍 꽃이 핀다. … 이 집 뒤뜰에는 조선조 세종 때 영의정을 지낸 하연이 손수 심었다는 600여년 생의 감나무도 있다.
노목의 원줄기는 이미 쇠하여 꽃을 피우지 못하고 밑동 옆에 새가지를 내어 꽃을 피우고 있다. 원정매 앞에는 자그마한 ‘매화시비’가 있고, 매화시비에는 「원정공 매화시」 - ‘집 양지 일찍 심은 한 그루 매화’ 시가 조각되어 있다
舍北曾栽獨樹梅 사북증재독수매 집 양지 일찍 심은 한 그루 매화
臘天芳艶爲吾開 납천방염위오개 찬 겨울 꽃망울 나를 위해 피었네.
明窓讀易焚香坐 명창독이분향좌 밝은 창에 글 읽으며 향 피우고 앉았으니
未有塵埃一點來 미유진애이점래 한 점 티끌도 오는 것이 없어라.
진양 하씨 대동보(제1권)에 의하면 1377년 이후에 원정공은 송악에 몇 간의 집을 짓고 ‘송헌(松軒)’이라 이름 하였으며, “일찍이 매화 한 그루를 심었다”고 적혀 있으며 그의 손자가 심은 감나무가 580년이 되었음을 볼 때에 지금의 매화는 그 수령이 610여 년이 넘었을 것으로 본다.
덕천강 산천재 남명매(南冥梅)
산천재의 뜰에 있는 이 매화나무는 남명(南冥) 조식(1501~1572) 선생이 61세이던 명종 16년(1561)에 손수 심은 것으로 3월말이면 연한 분홍빛이 도는 반겹 꽃이 가득히 핀다.
멀리 지리산 천왕봉이 올려다 보이는 산청군 시천면 사리에 있는 산천재의 뜰에는 남명(南冥) 조식(曺植) 선생이 61세이던 명종 16년(1561)에 손수 심은 매화나무가 있다. 산천재는 선생이 학문을 닦고 연구하던 곳으로 명종 16년(1561)에 세웠고, 순조 18년(1818)에 고쳐졌다. 규모는 앞면 2칸, 옆면 2칸이다.
남명(南冥)은 영남의 퇴계 이황과 쌍벽을 이룰 만큼 호남학파의 수장이다. 평생 벼슬에 나가지 않았지만 죽어서 사간원(司諫院)과 대사간(大司諫)에 이어 영의정에 추서된 위인이다.
남명(南冥)은 1501년(연산7년)에 경상도 삼가현에서 태어나 벼슬길에 나아간 아버지를 따라 서울로 이주하였다가 그 후 의령, 김해, 삼가 등지에서 거주하였다. 선생은 61세가 되던 해에 산청의 덕산으로 이주해 그곳에 서실을 짓고 산천재라 이름하였다.
이 당호의 ‘산천(山天)’ 이란 말은 『주역(周易)』 ‘산천(山天)’ 대축괘(大畜卦)의 “강건하고 독실하게 수양해 안으로 덕을 쌓아 밖으로 빛을 드러내서 날마다 그 덕을 새롭게 한다"는 말에서 뜻을 취한 것으로 강건한 기상과 독실한 자세로 세상에 나아가지 않고 깊숙이 묻혀 심성을 도야하고 올바른 수양을 하는 것이 학자의 길임을 천명한 것이다.
남명(南冥)은 산천재를 짓고는 그 뜰에 매화나무를 손수 심었다. 그리고 해마다 아름다운 꽃을 피우는 이 매화나무를 몹시 사랑했다. 이 매화나무에 붙였던 그의 애정을 다음 시에서 짐작할 수 있다.
이 ‘남명매(南冥梅)’는 산천재를 건립할 당시에 심었다면 이제 450여년의 연륜을 헤아린다. 밑에서부터 크게 세 갈래로 갈라진 줄기는 뒤틀려서 위로 뻗어 올랐다. 윗부분의 가지는 일부 말라 죽었으나 새로운 가지가 섬세하게 자라나 비교적 건강한 편이다. 해마다 3월 말이면 연분홍빛 반겹 꽃이 가득히 피는데, 그 향기가 지극히 맑다.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평생을 벼슬길에 나아가지 않음으로써 진정한 은둔의 지사였던 남명(南冥)의 그 맑은 정신이 남명매의 그윽한 향기 속에 지금도 스며있는 듯하다. 산천재 마당에는 ‘매화나무’ 앞에 '매화시'를 새긴 시비가 있다.
朱點小梅下 주점소매하 작은 매화나무 아래서 책에 붉은 점을 찍다가
高聲讀帝堯 고성도제요 큰 소리로 요전(堯傳)을 읽는다
窓明星頭近 창명성두근 북두칠성이 낮아지니 창이 밝아오고
江闊水雲遙 강활수운요 강물 넓은데 아련히 구름이 떠 있네
* ‘帝堯’(제요)는 『서경(書經)』의 ‘요전(堯傳)’을 두고 하는 말로, 요(堯)임금의 어진 정치를 서술한 내용이다. 맑은 향기를 지닌 매화 아래서 성군의 덕치를 꿈꾸는 내용이다. 고개를 들어보면, 멀리 지리산 천왕봉이 보인다.산 천재의 정원의 끝 강쪽 언덕에는 남명매보다는 뒤에 심었을 것으로 보이는 크고 작은 매화나무가 서 있다. 또 산천재의 바깥뜰에는 수형이 아름답고 크게 자란 활엽상록수인 가시나무가 여러 그루 서 있어 운치를 더해주고 있다. …♣
<계 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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