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연의 묘한 작동인지 노 선배로부터 화개동천으로 매화향기 마중가자는 연락이 왔다. 모든 일에는 단초가 있다. 새롭게 시작하는 본능은 나에게 있어 남도 섬진강 봄 향기에 머무는 것도 하나의 방편이다. 올 겨울은 유난히 춥고 길었다. 추위를 걷는 것이야말로 인생길과 흡사하길래 겨울은 참으로 운치가 있다. 그런데, 최근의 상념과 혼돈으로 이 계절을 향유하는 시간들을 건조한 일상 속에서 놓쳐 버렸다. 다시 새롭게 시작하는 심기일전의 호흡과 의식의 에너지는 이른 봄날 지리산과 섬진강이 함께하는 화개동천으로 나를 인도한다. 북풍한설을 견딘 만물이 소생의 에너지를 분출하는 대자연이 살아 숨쉬는 그 곳을 경건한 마음으로 동행하기로 했다.
한반도로 상륙하는 봄은 섬진강 물길따라 북상하며 팔도천지 꽃 소식은 화개동천에서 시작한다. 매화꽃을 필두로 산수유와 생강나무가 겨울바람 잔설의 흔적에도 선두를 형성하면 목련과 개나리가 뒤따르고 진달래가 팔도 산허리를 지천으로 도배한다. 진달래가 질 무렵 화개십리 벗꽃은 봄날을 채화하여 반도의 산하 방방곡곡에 봉송하니 봄 향기 꽃 내음은 도심의 길거리까지 수놓는다. 이렇듯 고산계곡의 화개동천은 심산유수와 더불어 백화제방처럼 봄날의 에너지를 발원하는 곳이니 얼마나 아름답고 심오하며 경건한 곳인가 ? 그것도 모자라 산에는 차와 매실이 있고 강에는 재첩과 은어 참게가 함께한다. 대면하는 바다 물길은 7월이면 새로운 전어가 인사하니 이곳은 만물이 시작하는 근원 중의 근원이다. 산수가 훌륭하니 고래로 인간의 발자취가 그냥 지나칠 리가 없었다. 가야국 김수로 왕의 7왕자들이 아자방에서 성불하고 운상원 옥보고의 거문고 자락이 구름 위로 바람과 함께 흐른다. 김대렴 공과 초의선사의 다향이 마을 곳곳에 은유하며 홍류동 구름 자락에는 고운 최치운 선생의 문향이 청학에 걸쳐 있다. 점필재와 남명 선생의 儒魂이 청산의 공기 속에 면면히 이어지며 진감국사, 보조국사, 서산대사가 이룬 해탈의 경지는 맑은 물소리가 되어서 계곡 아래로 감로수 마냥 흘러 내린다. 시공에 밀릴 새라 추사 선생의 기백과 민족사의 아픈 야인 이현상의 시대정신도 봄날의 햇살받고 상록의 가지되어 꿈틀거린다. 이렇듯 화개동천은 유불선의 사상적 뿌리가 깊게 내려있는 현세의 유토피아로써 자연과 인문이 어우러져 문화의 향기가 면면히 흐르는 곳이다.
순천까지 이어지는 고속도를 타고 구례 화엄사로 빠지니 멀리 노고단이 벌거벗은 몸짓으로 손짓한다. 때마침 점심이라 남도 수수한 민가 같은 식당에서 허기진 배를 채우니 도시의 오염된 음식에 독소성분이 가득했던 뱃속이 맑게 정화되는 기분이다. 구례 화엄사 ! 4개의 국보와 보궁이 있으며 남악의 산신제를 지내던 백제시대의 큰 고찰이다. 홍매로 유명하여 때가 되면 전국의 사진작가가 몰려들고 노고단으로 연결되는 등산로의 시작점이다. 그런데, 봄기운과 홍매는 아직 경내에 남아있는 겨울 추위의 눈치 때문에 아쉽게도 숨을 죽이고 있었다. 보궁에 올라 정갈한 마음으로 경건하게 기도했다. 항상 그렇게 기도하듯이 ! 도시와 공학적 사고에서 벗어나 남도의 자연과 유불선에 차츰 동화되어 가는 내 자신을 느낀다. 피곤했던 운전으로 동행인이 운전대를 잡고 잠시 눈을 부치니 우리는 어느새 광양의 매화마을로 들어선다. 양지바른 매화는 일부 피었건만 아직은 일러 상춘객도 소음도 요란하지 않음이 다행스러웠다. 오히려 섬진강 바람이 물결따라 유유하게 다가와 과객의 옷깃을 스치니 앳띈 홍매의 고결함이 창공에 더없이 빛나는 순간이었다. 적절한 思惟로 배경을 음미하며 죽림을 걷고 섬진강을 관조한다. 석양의 하동 포구 강변 송림에 마중 나올 갈매기가 보이지 않으니 마음만이 그립다. 가슴 벅찬 시 한수는 고이 접어 마음 속에 남겨 두기로 했다.
화개동천 쌍계사 사하촌 식당으로 향했다. 지난 번에도 노 선배와 무성한 여름에 들렀는데 오랜 세월 여주인은 변함없는 모습으로 우리를 반긴다. 반야식당의 정원은 어머니의 품처럼 연인의 가슴처럼 내 서정에 안긴다. 100 년이 넘은 매화나무가 고가의 사연을 대변하듯 오랜 이끼 속에서도 주인의 정성과 향기가 묻어나는 마당깊은 집이다. 언젠가는 내가 이 집에 머물것 것 같은 묵시적 예감은 무엇일까 ? 인심좋게 고상한 초로의 시골댁이 자연산 음식과 술을 준비하니 한입 한입이 소중하게 음미된다. 오늘은 태어난 이래 내 뱃속이 최고로 축복받는 날이다. 산골이라 날은 금방 어두워져 함께한 일행은 아쉬움 속에 작별하고 형님과 나는 계곡으로 차를 몰며 觀香茶院으로 향했다. 지리산의 정적 속에 어둠과 계곡의 물소리만이 함께 한다. 내가 왜 여기에 있는 것일까 ?
여주인은 마실 나갔는지 큼직하게 착한 개와 불빛만이 우리를 반긴다. 어둠에 비치는 다원이 얼마나 아름답고 포근했든지 그리고 집 내부는 인생 깊은 내 누님이 가꾼 것처럼 진한 인연의 여운이 감도는 마음의 안식처였다. 여주인은 노 선배와 반갑게 해후하고 차담으로 그 동안의 안부를 주고 받는다. 다음에 내 잠시 여기 머무르며 깊이있는 製茶를 체험할 수 있을까 ? 내일 여정을 위해 일찍 시골 장작이 불을 지핀 외떨어진 조그만 방에 누웠다. 방바닥이 누렇게 끓고 있었다. 도시의 오염에 갇힌 피부 속 찌꺼기가 적멸되는 느낌이라 온 몸을 뜨끈뜨끈하게 찜질하고 싶어 이불 속으로 파고든다. 산사의 자연인으로 동화되는 이 순간의 느낌은 너무나 평온하다. 밤하늘의 별과 함께 깊어가는 밤의 정적 속에 계곡의 물소리, 바람소리, 산짐승의 움직임 소리만이 여운으로 남은 체 인간의 소리는 어디에도 없다.이미 노선배도 나도 자연의 일부가 되어 있었다. 아침 일찍 상쾌한 기분으로 七佛寺로 향했다. 가야 김수로왕의 일곱왕자가 현실의 짐을 덜고자 외삼촌 보옥선사를 따라 성불했다 해서 부쳐진 이름이다. 옛날 음악의 거목들이 만드는 소리가 구름따라 바람따라 흘렀다는 이야기처럼 심산 허리에 걸터앉은 雲上院이었다. 부처님 앞에 배를 올린다. 항상 그랬던 것처럼 ! 가슴이 뭉클하고 삶의 회환이 눈가의 이슬로 흘러 내린다. 경내를 소요하니 야생의 맷돼지가 내려와 식사를 하고 있다. 정말 자연과 인간의 조화이다. 다시 다원으로 돌아오니 아침 한 상이 가득 차려져 있었다. 어찌나 군침이 도는지 ! 여주인의 설명 속에 너무나 소중하게 너무나 맛있게 먹어본다. 이번 여정은 세끼 음식 먹으려고 불원천리 마다하고 온 것은 아닐까 ? 짐을 추스리고 여주인이 만드는 마지막 차 한잔을 작별 인사로 2013 년 화개동천의 여정을 끝냈다. 노 선배의 인연깊은 다원에서 나의 새로운 인연의 시작을 기대한다.
자연을 순종하며 자연에 동화되어 살아가려고 노력하는 사람들 ! 정녕 그들은 인간의 진정한 가치를 아는 사람들이다. 우리가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를 행복을 어디에서 찾아야 하는지를 가르쳐 준다. 봄 기운이 지리산 여기저기에서 터져 나온다. 난 그 기운과 함께한다. 다음엔 製茶의 여정으로 다시 찾을 것이다.
첫댓글 클린님의 글을 읽고나니. 섬진강화개동천의 들머리부터 쌍계사,모암,칠불사까지 내리연결된 그 길따라 걸어가듯 눈에 그려지네요.
그곳 곳곳에 터지고 있는 산수유,매화,생강나무의 모습과,화엄사,매화마을 그리고 하동포구의 송림까지‥
인심좋은 식당의 정갈한 음식과,은은히 퍼지는 차향‥‥
좋은 여행 되셨길 바라구요,
다음엔 제다의 여정으로 다시 찾으실수 있으시길 기원드립니다.
좋은글‥잘 읽고 갑니다^^
그 곳에서 태어나지도 않았지만 마음의 고향처럼 느껴지는 곳입니다. 문화의 역사적 향기 잘 지켜졌으면 좋겠습니다.
좋은 글 감명깊게 음미하고 갑니다^^
감사합니다.
모처럼 문어체의 여행글 읽습니다.
부끄럽네요. 여기서 살지만 자연에 동화된다기보다는 자연한테 얻어먹기만 해서요. 단야식당 형님은 잘 계시던가요? 지척에서 거꾸로 안부를 돌아서 듣습니다.^^
다음엔 제다의 여정으로 오신다는데 어찌 의논해 보겠습니다.^^
수업료가 있는데 아시는지요.
잘 아시나 보네요 ? 그집 마당은 참으로 제 가슴에 포근하게 다가옵니다.
오랜 인연이지요.
저는 이제 십여년이 넘고 시인은 더 오래되고요.^^
아련한 기억에서도 지워져 버린듯한~
쌍계사를 다녀오는 느낌입니다.
작은다리를 건너 굽이돌아 올라 태고의 신비를 보는듯했던 20여년전 가보고 기억도 흐린데~
클린님의 마음자락이그곳에서 유영을 하고 있을거 같네요.
저도 얼른 시간 내어 그곳에 발길 놓아볼까 합니다.
좋은글 감사히 읽었습니다.
오랜 세월의 인연을 밟아 보신다면 정말 좋은 기행이 아닐런지요 ? 한번 다녀오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