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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com/shorts/zcrBIRlNh_g
1장. 거울 앞의 낯선 사람
아침 거울 앞에서 나는 늘 같은 얼굴을 본다. 세수를 하고, 면도를 하고,
머리를 빗는다.
그런데 어느 날 문득, 거울 속 그 사람이 낯설게 느껴졌다. 그는 정말 나일까?
아니, 더 정확히 말하자면—
그는 정말 '좋은 사람'일까?
데살로니가전서 5장 15절을 읽었다. "아무도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도리어 서로에게 모든 사람에게 항상 좋은 일을 하려고 노력하라."
평범한 구절이었다. 수없이 들어온 말씀이었다. 그런데 그날따라 이 문장이 내 안에서 이상한 울림을 만들어냈다.
마치 오래된 건물의 기둥을 건드렸더니 건물 전체가 흔들리기 시작하는 것 같았다.
나는 좋은 사람인가?
질문은 단순했다. 대답도 쉬워야 했다. 나는 거짓말을 하지 않고, 남을 때리지 않으며, 법을 어기지 않는다.
후배에게 밥도 사주고, 친구가 힘들 때 전화도 받아준다. 교회에 나가고, 헌금도 하고, 봉사도 한다. 그러니까 당연히 좋은 사람이지 않은가?
하지만 성경 구절은 계속 나를 흔들었다. "악으로 악을 갚지 말고."
나는 악으로 악을 갚은 적이 있었던가? 생각해보니 있었다. 여러 번. 아주 세련된 방식으로. 누가 나에게 무례하게 굴면 나도 차갑게 대했다.
단톡방에서 누가 나를 무시하면 나도 그 사람의 메시지에는 답하지 않았다.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구약의
정의가 아니라 "네가 나한테 그렇게 나오면 나도 똑같이 한다"는 유치한
보복이었다.
그런데 더 충격적인 것은 그다음이었다.
"선으로 악을 갚으라"는 말씀.
악을 받았을 때 선으로 갚는 것도 힘든데, 나는 한 걸음 더 나아가 이런 질문을 던졌다. 나는 선을 받았을 때 선으로 갚았는가?
머릿속에 한 사람의 얼굴이 떠올랐다. 대학 시절 선배였다. 그는 내가 어려울 때마다 밥을 사줬다. 학비가 부족할 때 돈을 빌려주기도 했다.
나는 그에게 무엇을 돌려줬던가?
졸업하고 나서 연락을 끊었다. 그가
먼저 연락하면 바쁘다는 핑계로 만남을 미뤘다. 그리고 어느 순간부터 그의 전화를 받지 않게 되었다.
왜? 별다른 이유가 없었다.
그냥 귀찮았다. 내게 더 이상 줄 것이
없는 사람이라고 무의식중에 판단했던 것 같다.
나는 선배의 선을 악으로 갚은 것이다.
거울 속 얼굴이 점점 더 낯설어졌다.
2장. 밥값의 경제학
직장 동료가 있었다. 그와 나는 종종
점심을 함께 먹었다. 처음 몇 번은 내가 계산했다. 후배니까, 더 어리니까,
당연한 일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세 번, 네 번, 다섯 번이 지나도록 그는 한 번도 계산대 앞에 서지 않았다.
처음엔 깜빡한 거겠지 했다. 그다음엔 다음에 내겠지 했다. 그러다 어느 순간, 나는 그가 일부러 그러는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밥을 먹으면서도 마음이 편치 않았다. 국을 떠먹으면서도 머릿속으로 계산기를 두드렸다.
'이제까지 내가 쓴 돈이 얼마지?
오만 원은 넘겠네.'
그날 이후로 나는 그와 점심 약속을
피하기 시작했다.
"오늘은 도시락 싸왔어요."
"미팅이 있어서요." 거짓말은
아니었지만, 진실도 아니었다.
진짜 이유는 단 하나,
더 이상 손해 보고 싶지 않다는 것.
어느 날 그가 물었다.
"요즘 저랑 밥 안 먹으시네요.
제가 뭘 잘못했나요?"
나는 멋쩍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니에요, 그냥 바빠서요."
그의 눈빛을 똑바로 보지 못했다.
그날 밤, 침대에 누워 생각했다.
나는 그를 '나쁜 사람'이라고 규정했다.
밥값도 안 내는 염치없는 사람. 선배의 호의를 당연하게 여기는 철없는 사람.
그런데 묵상을 하다 보니 과거의
한 장면이 떠올랐다.
대학교 1학년 때였다. 과 선배가 나에게 밥을 여러 번 사줬다. 나는 한 번도
계산을 하지 않았다.
왜? 선배니까. 선배가 사는 게 당연하다고 생각했으니까.
지금 생각해보면 그 선배는 아르바이트로 번 돈으로 나를 먹였을 것이다.
그런데 나는 '고맙습니다'라는 말 한마디 제대로 하지 않았다.
나는 내 동료에게 똑같은 일을 당한 것이다. 아니, 어쩌면 나는 그보다 더 나쁜 사람이었을지도 모른다.
왜냐하면 나는 최소한 '선배니까 당연히 내야지'라는 철없는 믿음이라도 있었는데,
지금의 나는 계산하면서도 계산하는 척하지 않는, 더 교묘한 위선자가 되어 있었으니까.
밥값. 겨우 오천 원,
만 원짜리 밥값으로 나는 사람을 저울질했다.
그것도 내가 과거에 남에게 했던 것과 똑같은 짓을 당했다는 이유로 분노했다.
로버트 글로버라는 심리학자는 이걸
'암묵적 계약'이라고 불렀다고 한다.
내가 혼자서 마음속으로 계약서를 작성한다.
"내가 너한테 밥 사주면,
너도 나한테 밥 사줘야 해."
상대방은 그 계약서에 서명한 적이
없다. 심지어 계약서가 존재한다는 사실조차 모른다.
하지만 나는 상대가 계약을 위반했다며 배신감을 느낀다.
나는 선배에게도 그랬고, 동료에게도
그랬다. 심지어 친구들에게도 그랬다.
커피를 사주면서 속으로 기대했다.
'다음엔 네가 사겠지.' 도움을 주면서
계산했다.
'이 정도면 나중에 내가 부탁할 때
거절 못 하겠지.'
나는 호의를 베푼 게 아니었다.
투자를 한 것이다. 밥값은 밥값이
아니라 미래의 호의에 대한
선지급이었다.
친절은 친절이 아니라 빚이었다. 그리고 상대방이 빚을 갚지 않으면 나는 그를 '나쁜 사람'으로 분류했다.
진짜 나쁜 사람은 누구였을까?
3장. 예레미야의 진단
"만물보다 거짓되고 심히 부패한 것은 마음이라 누가 능히 이를 알리요마는."
예레미야 17장 9절. 이 구절을
수십 번도 더 읽었을 것이다. 그런데
그날, 그 문장이 마치 외과용 메스처럼 내 가슴을 절개하는 것 같았다.
거짓된 마음. 히브리어로 '아코브'.
그 단어는 '발뒤꿈치를 잡다', '속이다'라는 뜻을 가지고 있다.
야곱이 형 에서의 발뒤꿈치를 잡고 태어났던 것처럼, 내 마음은 나 자신조차
속인다. 울퉁불퉁하고 굴곡져 있어서,
나도 내 마음의 진짜 동기를 알 수 없다.
나는 왜 후배에게 밥을 샀을까?
정말 순수한 친절이었을까?
아니다. 나는 '좋은 선배'라는 이미지를 원했다. 사람들이 나를 '착한 사람'이라고 말해주길 바랐다.
더 나아가, 후배가 나에게 감사하고
존경하고 나중에 내가 필요할 때 도움을 주길 기대했다.
나는 왜 봉사활동을 했을까?
정말 어려운 사람들을 돕고
싶어서였을까? 일부는 그랬을 것이다.
하지만 솔직히 말하면, 이력서에 쓸
거리가 필요했고, 주변 사람들에게
'의미 있는 일을 하는 사람'으로 보이고 싶었다.
나는 왜 친구의 고민을 들어줬을까?
진심으로 친구를 위로하고
싶어서였을까?
물론 그런 마음도 있었다. 하지만
동시에, 친구가 나를 '의지할 수 있는
사람'으로 여기고, 나에게 빚진 감정을 느끼길 바랐던 것도 사실이다.
가장 충격적인 것은, 이 모든 계산과
기대가 무의식적으로 일어났다는
점이다.
나는 내가 착한 사람이라고 진심으로
믿었다. 밥을 사면서, 봉사를 하면서,
친구를 위로하면서, 나는 정말로 '좋은 일을 하고 있다'고 느꼈다.
그 순간만큼은 진짜였다.
하지만 상대방이 기대한 대로
반응하지 않을 때, 내 안에서 무언가가 꿈틀거렸다.
짜증, 실망, 배신감. 그리고 그 순간
나는 깨달았다. 내 선행에는 가격표가 붙어 있었다는 것을.
어거스틴이라는 신학자는 이것을
"자기 자신에게로 굽어있다(incurvatus in se)"고 표현했다.
인간의 의지는 자연스럽게 자기 자신을 향해 휜다. 내가 아무리 밖을 향해 손을 뻗어도, 그 손은 결국 다시 나에게로 돌아온다.
나는 펠라기우스가 아니라 어거스틴이 옳았다는 것을 경험적으로 알게 되었다.
나에게는 순수한 선을 행할 능력이
없다. 내가 하는 모든 선에는
자기애가 섞여 있고, 모든 친절에는
기대가 숨어 있으며, 모든 희생에는
보상 심리가 도사리고 있다.
심지어 지금 이 고백조차도 순수할까?
나는 이 글을 쓰면서 '깊이 성찰하는
사람'으로 보이고 싶은 건 아닐까?
이 정직한 자기 고백마저도,
또 다른 형태의 위선이 될 수 있다.
예레미야는 옳았다.
내 마음은 만물보다 거짓되다.
그리고 심히 부패하다.
히브리어로 '아누쉬'—치유 불가능할
정도로 병들었다는 뜻.
나는 나쁜 사람이다.
4장. 웨이터의 연기
사르트르의 카페를 처음 방문한 건
책 속에서였다.
『존재와 무』에 나오는 그 유명한
웨이터. 그는 완벽하게 웨이터를
연기한다.
너무 깍듯하고, 너무 기계적이고,
너무 '웨이터답게' 움직인다. 사르트르는 그것을 '자기 기만'이라고 불렀다.
나는 그 웨이터였다.
나는 완벽하게 '좋은 사람'을 연기했다. 화가 나도 웃었다. 싫어도 친절했다.
마음속으로 욕을 하면서도 입으로는
격려의 말을 했다.
그리고 스스로에게 말했다.
"나는 성숙한 사람이야.
감정을 조절할 줄 아는 어른이야."
하지만 사르트르가 말했듯,
그것은 기만이었다.
나는 내 자유를, 내 진짜 감정을,
내 솔직한 욕망을 부정하고
'좋은 사람'이라는 사물로 스스로를
고정시키려 했다.
왜? 진짜 나를 보여주면 거부당할까 봐. 내 안의 이기심, 욕심, 악의를 드러내면 사람들이 떠날까 봐.
그래서 나는 가면을 썼다. 아니, 가면을 쓴 게 아니라 가면이 되려고 했다.
직장에서 나는 '성실한 직원'이었다.
집에서는 '효자'였다. 친구들 사이에서는 '재미있고 믿을 만한 친구'였다.
교회에서는 '신실한 신자'였다. 각각의 무대에서 나는 다른 배역을 연기했다.
연기는 완벽했다.
너무 완벽해서 나 자신도 속았다.
나는 정말로 내가 그런 사람이라고
믿었다.
배역과 배우를 구분하지 못했다.
그런데 어느 순간,
대본에 없는 상황이 벌어졌다.
밥값을 내지 않는 후배,
내 호의에 무반응인 친구,
내가 도왔는데 감사하지 않는 동료.
그때 가면 뒤에서 진짜 얼굴이
튀어나왔다. 분노, 원망, 실망.
그리고 나는 당황했다.
'어? 나는 착한 사람인데,
왜 이런 나쁜 감정이 드는 거지?'
사르트르라면 이렇게 말했을 것이다.
"당신은 착한 사람이 아니라
착한 사람을 연기하는 사람일 뿐이다. 당신의 본질은 고정되어 있지 않다.
당신은 매 순간 자유롭게 선택할 수
있는 존재다. 그런데 당신은
그 자유를 부정하고, '착한 사람'이라는 사물처럼 행동하려 한다."
나는 웨이터처럼 '좋은 사람답게'
움직였다. 하지만 진짜 좋은 사람이
되지는 못했다.
왜냐하면 진짜 좋은 사람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매 순간 선택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더 솔직하게 말하면,
나는 '좋은 사람'이 되고 싶었던 게
아니라 '좋은 사람으로 보이고' 싶었다.
나는 평판이 필요했다.
인정이 필요했다.
사랑받을 자격이 필요했다.
그래서 연기를 했다.
매일 아침 가면을 쓰고, 밤에 벗었다.
그러다 가면을 벗는 것조차 잊어버렸다. 가면이 살에 달라붙었다.
지금 나는 알고 싶다. 가면 너머에 진짜 내 얼굴이 남아 있기는 한 걸까?
5장. 레비나스와 타자의 얼굴
그는 단지 밥값을 내지 않는 후배가
아니었다. 그에게는 이름이 있었고,
이야기가 있었고, 가족이 있었고,
꿈이 있었다.
그런데 나는 그를 '밥값 안 내는 사람'이라는 카테고리로 축소시켰다.
레비나스라는 철학자가 있다.
그는 타자의 '얼굴'에 대해 말했다.
여기서 얼굴은 생물학적 얼굴이 아니라, 그 사람의 존재 자체, 환원될 수 없는
고유성을 의미한다.
타자의 얼굴은 나에게 명령한다.
"나를 죽이지 말라."
이것은 문자 그대로 살인을
금지하는 것뿐 아니라,
그 사람을 나의 개념으로 환원하지
말라, 나의 이익을 위한 도구로 만들지 말라는 윤리적 명령이다.
나는 그 후배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
그를 '나에게 빚진 사람',
'예의 없는 사람',
'이용만 하는 사람'으로 개념화했다.
그의 고유한 존재를 지워버리고
나의 판단으로 대체했다.
더 충격적인 것은, 나는 그에게서
나를 봤다는 점이다.
내가 과거에 선배에게 했던 짓을
그가 나에게 하고 있었다.
그래서 나는 더 화가 났다. 왜냐하면
그는 나의 거울이었고, 그 거울은
내가 보고 싶지 않은 나의 모습을
비췄기 때문이다.
마르틴 부버는 관계를 두 가지로
나눴다. '나-그것(I-It)'과 '나-너(I-Thou)'.
나-그것의 관계에서 타인은 사용되고, 경험되고, 분류된다.
나-너의 관계에서 타인은 만나지고,
존재하며, 존중받는다.
나는 대부분의 사람들을 '그것'으로
대했다. 상사는 '내 승진에 도움이
되거나 방해가 되는 그것',
후배는 '내 명령을 수행하거나
거부하는 그것', 친구는 '나를 즐겁게
하거나 실망시키는 그것'이었다.
심지어 가족도 예외가 아니었다.
부모님은 '나를 지원해주시거나
간섭하시는 그것',
형제는 '나와 비교되거나 경쟁하는
그것'이었다.
나는 묻고 싶다. 나는 누군가를 진짜로 '만난' 적이 있었나?
계산 없이, 기대 없이, 판단 없이
누군가의 존재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인 적이 있었나?
레비나스는 윤리가 대칭적이지
않다고 말한다.
"나는 타인에게 책임이 있지만,
타인이 나에게 책임이 있는지는
나의 관심사가 아니다."
이것은 가혹하게 들린다.
불공평하게 들린다.
나는 항상 대칭성을 요구했다.
"내가 너한테 이렇게 해줬으니,
너도 나한테 이렇게 해야 해."
팃포탯. 눈에는 눈. 공정한 거래.
하지만 레비나스의 윤리는 거래가
아니다.
타인의 얼굴 앞에서 나는 무한한
책임을 진다.
상대방이 어떻게 반응하든,
내가 무엇을 얻든 얻지 못하든,
그것은 나의 책임을 면제시키지 못한다.
이것은 너무 가혹하다. 불가능하다.
인간의 능력을 넘어선다.
그래서 나는 깨달았다.
나는 스스로의 힘으로는
진짜 선한 사람이 될 수 없다.
나에게는 은혜가 필요하다.
내가 받은 무한한 용서를 기억할 때만, 나는 타인에게 무조건적인 존중을
베풀 수 있다.
그 후배의 얼굴을 다시 보았다.
이번에는 정말로 보려고 애썼다.
'밥값'이라는 렌즈를 벗고,
'나의 판단'이라는 프레임을 걷어내고, 그냥... 그 사람을 보려고 했다.
그는 어떤 고민을 하고 있을까?
어떤 상처가 있을까?
무엇을 꿈꾸고 있을까?
나는 알 수 없다.
하지만 그것이 중요하다.
내가 다 알 수 없다는 것,
그 사람을 나의 이해 안에 가둘 수
없다는 것을 인정하는 것.
그것이 진짜 존중의 시작이다.
6장. 웃는 얼굴의 과학
억지로라도 웃어보기로 했다.
화가 나도, 짜증이 나도, 일단 입꼬리를 올려보기로 했다.
위선 같았다. 가짜 같았다.
그런데 신기한 일이 일어났다.
웃는 표정을 지으니, 정말로 기분이
조금 나아졌다.
화난 사람을 생각하면서 웃으려고
하니, 그 사람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이 잘 떠오르지 않았다.
나중에 알았다. 이것을 심리학에서
'안면 피드백 가설(Facial Feedback Hypothesis)'이라고 부른다.
표정이 감정의 결과물만이 아니라,
감정의 원인이 될 수도 있다는
이론이다.
웃는 근육(큰광대근)을 움직이면,
뇌가 '아, 지금 행복한 상황인가 보다'라고 해석한다. 그래서 세로토닌 같은 긍정적 신경전달물질이 분비된다.
반대로 미간을 찌푸리는 근육(추미근)을 마비시키면 우울증 증상이 완화된다는 연구도 있다.
나는 또 하나를 발견했다.
긴장하거나 화가 나면 얼굴 근육이
'세로로' 움직인다. 눈썹이 올라가고,
미간이 찌푸려지고, 입꼬리가 내려간다. 수직적 움직임.
하지만 웃을 때는 얼굴 근육이
'가로로' 움직인다. 입꼬리가 양옆으로 올라가고, 눈가에 주름이 생긴다.
수평적 확장.
그래서 나는 실험을 했다.
부정적인 생각이 떠오를 때마다
의도적으로 얼굴을 '수평 모드'로
전환했다.
입꼬리를 올리고, 눈가에 힘을 주어
미소 짓는 모양을 만들었다.
처음에는 이상했다.
속으로는 욕이 나오는데 겉으로는
웃고 있으니까.
완벽한 위선자가 된 기분이었다.
하지만 계속하다 보니,
속마음도 조금씩 바뀌었다.
웃는 표정을 유지하면서
누군가를 미워하기가 어려웠다.
미소를 지으면서 복수를 계획하기가
힘들었다.
이것은 위선일까, 아니면 지혜일까?
아리스토텔레스는 말했다.
"우리는 의로운 행동을 함으로써
의로워지고,
용감한 행동을 함으로써 용감해진다."
내면이 완벽하게 선해질 때까지
기다리는 것이 아니라,
먼저 선한 행동을 반복함으로써
내면을 훈련시킨다.
나는 진짜로 웃고 싶지 않았다.
하지만 웃는 행동을 했다.
처음에는 가짜였다.
하지만 점점 진짜가 되어갔다.
물론 여전히 어렵다.
어떤 날은 웃는 게 너무 힘들다.
억지로 웃다가 입이 경련할 것
같은 순간도 있다.
그럴 땐 그냥 중립 표정이라도
유지하려고 노력한다.
최소한 찡그리지는 않으려고.
칼 융은 '그림자'에 대해 말했다.
내가 부정하고 억압한 나의 어두운 면. 나는 내 안의 그림자—이기심, 욕심,
악의—를 인정하게 되었다.
하지만 인정한다고 해서
그것에 굴복하는 건 아니다.
오히려 인정했기 때문에 대항할 수
있다.
"아, 지금 내 안에서 나쁜 감정이
올라오고 있구나. 이걸 그대로 표현하면 상대방에게 상처를 줄 거야.
그러니 일단 웃어보자."
이것은 자기 기만이 아니라
자기 조절이다. 억압이 아니라 승화다.
7장. 나쁘지 않은 사람
나는 좋은 사람이 되려는 노력을
멈췄다. 대신 나쁜 사람이 되지
않으려고 노력하기로 했다.
차이가 뭘까?
좋은 사람이 되려는 노력은
'향상 초점(Promotion Focus)'이다.
이상적인 나를 추구한다.
칭찬받고, 인정받고, 사랑받는 나.
하지만 이것은 끝이 없다.
아무리 해도 부족하다.
그리고 실패하면 좌절한다.
나쁜 사람이 되지 않으려는 노력은
'예방 초점(Prevention Focus)'이다.
최소한의 해악을 끼치지 않는다.
상처 주지 않고, 실망시키지 않고,
배신하지 않는다.
이것은 더 현실적이다. 측정 가능하다. 실패해도 다시 시작할 수 있다.
나는 목표를 수정했다:
상대방이 싫어하는 행동을 하지 말자.
상대방이 원하지 않는 표정을 짓지
말자.
나에게 이익이 되더라도,
상대방에게 손해가 된다면 하지 말자.
심리학자 로이 바우마이스터는 말했다.
"나쁜 것은 좋은 것보다 강하다."
한 번의 나쁜 행동이 백 번의 좋은
행동을 무너뜨린다.
한 번의 거짓말이 평생의 신뢰를
파괴한다.
그래서 나는 전략을 바꿨다.
선행을 추가하려고 애쓰지 말고,
악행을 제거하는 데 집중하자.
의학의 첫 번째 원칙은
"해를 끼치지 말라(Primum non nocere)"다.
환자를 치료하기 전에,
먼저 해치지 않아야 한다.
관계에서도 마찬가지다.
상대방을 행복하게 만들기 전에,
먼저 불행하게 만들지 않아야 한다.
나는 여전히 나쁜 사람이다.
이기적이고, 계산적이고, 교활하다.
그 본성은 하루아침에 바뀌지 않는다.
하지만 이제 나는 안다.
내가 나쁜 사람이라는 것을.
그리고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
위선자로 사는 것보다 낫다는 것을.
존 오웬이라는 청교도 신학자는 말했다.
"죄를 죽이라, 그렇지 않으면 죄가
너를 죽일 것이다."
나는 내 안의 죄를 완전히 없앨 수는
없다. 하지만 매일 죽이려고
노력할 수는 있다.
오늘도 나는 거울 앞에 선다.
거울 속 사람은 여전히 낯설다.
하지만 이제 조금은 정직하다.
그는 가면을 벗었다. 아니, 정확히는
가면을 쓰고 있다는 것을 인정한다.
그리고 다짐한다.
오늘 하루, 누군가에게 나쁜 모습을
보이지 않기 위해 노력하자.
억지로라도 웃자. 미워하지 말자.
상처 주지 말자.
나는 좋은 사람이 아니다. 하지만
나쁘지 않은 사람이 되려고
애쓰는 사람이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으로 충분한지도 모른다.
"악에게 지지 말고
선으로 악을 이기라." (로마서 12:21)
이기는 것은 거창한 영웅적 행위가
아닐지도 모른다.
그저 오늘 하루,
내 안의 악에게 지지 않는 것.
작은 친절을 베푸는 것이 아니라,
작은 악을 범하지 않는 것.
그것이 진짜 선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