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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경환명시감상
매봉역에서 내리세요
이향아
오렌지색 3호선 전철을 타고 흔들리면 흔들리는 대로 가만있다가, 내리고 싶으면 매봉역에서 내리세요, 오래된 집들로 나지막한 동네, 매화 꽃봉오리는 진작 벙글었어요, 동네 사람 태반은 양재천 냇물에 세 들어 살거나 늙은 나뭇등걸에 얹혀살아요, 떠날 수 없는 나도 그렇습니다
새로 피는 나뭇잎은 공원 숲까지 뻗치고, 숲속은 지금 수라장입니다, ‘허물고 높이 짓자’, ‘뼈대가 멀쩡한데 허물다니 당치않다’
상수리나무, 벚나무, 이팝나무들은 어쩌라고, 때 되면 가지가 찢어지는 대추나무 살구나무 은행나무 감나무들은, 물정도 모르는 산수유와 목단 명자꽃 진달래 능소화들은 또 어쩌라고, 모두 베어 없애고 허공에 매달릴까,
그래도 오세요 매봉역에서 내리세요, 우리 천천히 시냇가로 갑시다
----이향아 시집, {캔버스에 세우는 나라}에서
어쩌다가 우리의 조국인 대한민국이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삶의 터전이 아닌 부동산 투기업자들의 투기장이 되었을까? 부동산 투기란 삼천리 금수강산을 다만 이익을 창출해내는 소모품으로 생각한다는 것을 뜻하고, 우리 한국인들의 삶의 질의 향상과 행복, 그리고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조국을 물려준다는 국민의식은 손톱만큼도 없다는 것을 뜻한다. 사유재산제도는 만악의 근원이며, 이 사유재산 때문에 인간이 인간을 혐오하며 서로가 서로를 믿지 못하는 불신풍조가 생겨나게 되었던 것이다.
문화선진국일수록 사유재산제도에 제약을 가하고, 개인의 재산이란 이 세상에서 살아가는 동안 잠시 잠깐 빌려쓰는 차용재산이라는 생각을 갖게 한다. 부자로서 죽는 것은 부끄러운 일이고, 전재산을 아낌없이 다 환원하고 죽어가는 것이 선량한 시민의 의무이기도 한 것이다. 삼천리 금수강산, 우리들의 조국은 자연 그대로의 보존이 원칙이며, 제 아무리 주택정책이라고 하더라도 무차별적인 개발이란 있을 수가 없다. 모든 동식물들도 다 집이 있고 짝이 있는데, 가장 근본적인 보금자리(집)를 갖고 투기판을 벌이는 것은 반자연적이고 반인륜적인 대역죄와도 같다.
부동산, 즉, 집이란 그 자체로 사고 팔아야 하는 재화가 아니며, 이 부동산을 함부로 사고 판다는 것은 자연의 질서에 대한 도전이자 모든 생명체들을 대량살생하는 행위라고 하지 않을 수가 없다. 가능하면 자연친화적이며 작고 아름다운 집, 그 어떤 재화도 낭비하거나 소모하지 않으며 천년, 만년 대대로 살 수 있는 집, 모든 동식물들에 대한 사랑과 애정과 행복이 가득한 집을 짓는 것이 모든 문화선진국의 주택정책이라면 대한민국의 주택정책은 무목표, 무의지, 무책임이라는 ‘삼무정책’ 아래 소위 사기꾼들의 ‘떴다방 정책’이라고 할 수가 있다. 첫 번째는 어떠한 일이 있어도 정치인들과 고급관리들의 뇌물의 공급원이 되어야 하고, 두 번째는 실수효자들의 편안하고 안락한 주거환경보다는 건설업자의 최고의 이익이 보장되어야 하고, 마지막으로 세 번째는 일년 열두 달 내내 전국토가 부동산 투기로 활활 타오르지 않으면 안 된다. 자연보호와 환경보호는 일고의 가치도 없고, 상호간의 사랑과 애정과 행복도 일고의 가치가 없다. 역사와 전통을 강조할수록 돈과 시간이 낭비되고, 천년, 만년 영원한 보금자리정책은 건설사업을 다 망하게 하고 국가경제의 주름살만을 더하게 한다. 대한민국의 주택정책은 뇌물이 더욱더 많이 솟아나와야 하고, 건설업자의 최고 이익이 보장되어야 하고, 전국토가 부동산 투기장으로 일년 열두 달 내내 난장판이 되어야 한다. 천국 앞에서는 만인이 평등하고 모든 인간들에게 다 열려 있지만, 이 더럽고 추한 한국인들에게는 지옥의 문만이 활짝 열려 있는 것이다.
대한민국의 정치경제, 문화의 중심지, 우리 한국인들의 젖과 꿀이 흐르는 강남지역, 자고 나면 아파트값과 땅값이 치솟아오르고, 학군이 좋고 천당 중의 천당인 매봉역 근처도 대한민국의 부동산 재개발정책 때문에 아수라장이 되어간다. “허물고 높이 짓자”는 개발업자와 “뼈대가 멀쩡한데 허물다니 당치않다”는 반개발업자가 싸우면, 그곳의 원주민들마저도 찬성파와 반대파로 쫘악 갈라져 피투성이가 되도록 싸운다. 그 옛날보다도 건축기술과 건축자재가 천배, 만배 더 발전하고 좋아졌지만, 도대체 어떻게 해서 아파트를 지은 지 4~50년도 안된 매봉역 근처가 그처럼 이전투구의 장소가 되었단 말인가? 첫 번째는 천년, 만년 대대로 살 수 있는 집이 아닌 임시방편의 아파트를 지었기 때문일 것이고, 두 번째는 재개발사업으로 인한 엄청난 이익이 발생하기 때문일 것이다. 눈앞의 이익은 미래를 생각하지 않으며, 국력과 민심을 갈갈이 찢어버리고, 그 무슨 ‘저주의 선물’처럼 엄청난 재앙을 안겨다가 주게 된다. 수십 년 동안 자라온 상수리나무, 벚나무, 이팝나무들도 갈 곳이 없고, 때 되면 가지가 찢어지는 대추나무, 살구나무, 은행나무, 감나무들도 갈 곳이 없고, 산수유, 목단, 명자꽃, 진달래, 능소화들도 갈 곳이 없다.
이향아 시인의 [매봉역에서 내리세요]는 부동산 재개발정책에 반대하는 시이며, 그 ‘난감함의 미학’을 노래한 시라고 할 수가 있다. 오래된 집들로 나지막한 동네, 매화 꽃봉오리는 진작 벙글었고, 동네 사람 태반은 양재천 냇물에 세 들어 살거나 늙은 나뭇등걸에 얹혀 사는 동네, 상수리나무, 벚나무, 이팝나무, 대추나무, 살구나무, 은행나무, 감나무, 산수유, 목단, 명자꽃, 진달래, 능소화 등과 함께 나도 떠날 수 없는 이 동네에 오시면, 당신들도 너무나도 분명하게 이 부동산 재개발정책에 반대하게 될 것이다. 이향아 시인의 “그래도 오세요 매봉역에서 내리세요, 우리 천천히 시냇가로 갑시다”라는 시구는 자연보호와 생태환경의 보호, 그리고 자연친화적인 작고 아름다운 집에 반대할 사람들은 아무도 없다라는 이성과 양심의 소산이며, 물이 흐르듯이 자연스럽게 살자는 뜻이 담긴 시구라고 할 수가 있다.
우리 한국인들은 모든 생명체들의 삶의 터전이자 보금자리마저도 투기의 대상으로 삼는 악마들이며, 자기 자신과 이 세계를 파괴하고, 궁극적으로는 동식물보다도 결코 행복하게 살지 못한다.
도서관 로맨스
조영심
책의 행간을 놓친 순간이었을 것이다
뒤통수 맞은 듯 내 시선을 사로잡은 형상 하나
드넓은 이마가 돋보이는 검은 테 안경하며
안으로 굽은 어깨 맨도롬한 낯익은 표정
건너편에서 내 안으로 덜컹 쏠린다
오래된 나의 앳된 그 아이가
한쪽 팔로 턱을 괸 기울기며
이따금 깜빡이는 눈매도 그렇고
앙 다문 얇은 입술은 또 어떤가
행여 눈이라도 맞을까
심장만 살금살금 찧고 있는데
처음 그때처럼,
볼 일도 못 보고 숨소리 짓누르는데
손목시계를 살피던 풋풋한 저 머스마
벌떡 일어나 도서관을 나가버린다
말도 못 붙여본 그 짝사랑
순식간에
그를 읽던 행간도 그의 행간도 그도
코앞에서 놓쳤다
놓쳐야 로맨스가 되는 사랑이 나에게도 있었다
----조영심 시집, {그리움의 크기}에서
시도 열정이고, 공부도 열정이고, 사랑도 열정이다. 열정은 불이며, 불꽃이고, 모든 기적을 연출해내는 원동력이다. 인간은 한없이 약하지만, 열정은 더없이 강하다. 시를 쓰면서 그 모든 것을 잊게 하는 힘, 공부를 하면서 그 앎의 세계에 깊이 빠져들게 하는 힘, 사랑을 하면서 더없이 순수하고 그 모든 것을 다 바치게 하는 힘 등----, 열정은 자기 자신의 목숨을 걸고 자기가 그토록 하고 싶고 좋아하는 일에만 몰두하게 한다. 열정의 순수함과 열정의 황홀함과 열정의 힘을 이해하고 그 삶을 살다 간 사람은 이 세상에서 가장 아름답고 행복한 사람이라고 할 수가 있다.
만일, 시를 이해하지 못하고 시에 이끌려 다닌다면 어떻게 되겠고, 공부의 참맛을 이해하지 못하고 공부에 이끌려 다닌다면 어떻게 되겠으며, 또한, 이 세상의 어중이 떠중이들처럼 사랑을 이해하지 못하고 사랑에 이끌려 다닌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진정한 시인은 시의 날개를 달고 천하를 날아다니고, 진정한 사상가는 앎(지혜)의 텃밭에서 앎의 열매들을 수확하고, 이 세상의 참된 사랑의 삶을 사는 인간은 ‘사랑의 여신’으로 하여금 그에게 무릎꿇고 경의를 표하게 만든다. 진정한 시인은 시(사랑, 지혜)를 가지고 놀며, 시로 하여금 다양한 주제와 소재로 최고급의 축제를 연출해내게 한다. 열정은 미침이고 미침은 광기이지만, 그러나 이 열정이 그 열매를 수확하게 될 때는 전체 인류의 사랑과 행복과 평화의 삶을 보장해주게 된다. 호머, 소크라테스, 아프로디테, 또는 이태백, 공자, 황진이 등의 생애가 그것을 말해준다.
조영심 시인의 [도서관 로맨스]는 시와 공부와 사랑의 삼중주三重奏이며, 그것이 ‘짝사랑’인만큼 어떠한 결실도 맺지 못했다는 것을 뜻한다. 바둑에서는 다 잡았던 대마大馬가 더 크고, 낚시에서는 놓친 물고기가 더 크다. 짝사랑은 이성이 눈을 뜨는 봄꽃과도 같으며, “오래된 나의 앳된 그 아이”, 즉, “행여 눈이라도 맞을까” 가슴이 두근두근 거렸지만, 나의 마음과 두근거림은 거들떠 보지도 않고 도서관을 나가버렸던 그 아이는 ‘나’라는 꿀샘을 발견하지 못했던 벌과 나비와도 같다. 짝사랑은 그 아이 모르게 혼자서만 좋아했던 사랑이며, 낚시대를 던져놓지도 않고 큰물고기가 물어주기를 바라는 참으로 어처구니 없고 너무나도 허무맹랑한 사랑을 말한다. 사랑 앞에서는 누구나 다같이 어린아이처럼 바보가 되며, 이 백치같은 어리석고 순수한 마음이 없으면 사랑은 성립되지 않는다.
그렇다. 조영심 시인에게도 짝사랑이 있었고, “놓쳐야 로맨스가 되는 사랑이” 있었다. 뒤통수 맞은 듯 내 시선을 사로잡은 아이, 드넓은 이마가 돋보이는 검은 테 안경을 쓴 아이, 한쪽 팔로 턱을 괴고 이따금 눈을 깜빡이고 앙 다문 얇은 입술을 가졌던 아이, 볼 일도 못 보고 숨소리 짓누르는 데 손목시계를 살피다가 벌떡 일어나 도서관을 나가버렸던 그 아이----. 그 아이는 지금쯤 무엇을 하고 있을까? 시인이 되었을까, 소설가가 되었을까? 화가가 되었을까, 음악가가 되었을까? 대학교수가 되었을까, 재벌기업의 사장이 되었을까? 짝사랑은 상상력이 풍부하고, 짝사랑은 과대망상증으로 태평양의 고래도 되고, 짝사랑은 전혀 늙지도 않고 너무나도 젊게 오래 산다.
때때로 짝사랑이 도서관의 로맨스를 꽃 피우고, 때때로 짝사랑이 그 두근거림으로 시를 쓰게 하며, 영원한 소녀의 삶을 살게 한다.
야간 학교
유채은
야간 수업에 쫓기듯
하나 둘 다투어 등교한 별들
피로한 눈을 부비며
제 자리를 찾고 있다
일찍 나온 보름달 선생님
해맑게 웃으며 맞아준다
----유채은 동시집, {버들잎 물고기}(근간)에서
소크라테스라는 별, 아리스토텔레스라는 별, 데카르트라는 별, 칸트라는 별, 마르크스라는 별, 공자라는 별, 맹자라는 별, 노자라는 별, 장자라는 별, 호머라는 별, 이태백이라는 별, 셰익스피어라는 별, 소월이라는 별 등, 우리는 흔히 전인류의 스승들을 별이라고 부른다.
전인류의 스승들은 밤하늘의 별과도 같은 성자들이며, 우리 인간들은 그 스승들의 지혜의 열매를 먹으면서 살아간다. 음식물이 육체의 동체성을 보존해주는 것이라면 지혜는 우리 인간들의 정신의 동체성을 보존해주는 것이라고 할 수가 있다. 정신은 육체를 지휘하고 이끌며, 궁극적으로 정신은 육체가 존재하는 근거라고 할 수가 있다. 정신 없는 육체는 나무토막과도 같고, 육체 없는 정신은 그 어떤 일도 하지 못하지만, 그러나 정신이 있기 때문에 전인류의 스승이 될 수가 있는 것이다.
전인류의 스승이란 앎의 투쟁에서 승리한 천하무적의 장군을 말하며, 이 천하무적의 장군들만이 그 어떠한 외부의 적과 장애물들을 다 돌파하고 이 세상의 삶을 옹호하고 찬양할 수가 있다. 전인류의 스승들이란 모든 인간들을 먹여 살리는 성자들이며, 따라서 우리 인간들은 태어날 때부터 공부하기를 원한다. 이 세계는 누가 지배하고, 이 세계의 인간들은 어느 누가 먹여 살리고 있는가? 많이 아는 자, 즉, 그의 두뇌에서 ‘지혜라는 열매들’이 끊임없이 솟아나오는 자들이 이 세계를 지배하고 우리 인간들을 먹여 살리고 있는 것이다.
유채은 시인의 [야간 학교]라는 별들은 낮에는 산업현장에서 일하고, 밤에는 공부하러 온 어린 청소년들을 말한다. “야간 수업에 쫓기듯/ 하나 둘 다투어 등교한 별들”은 “피로한 눈을 부비며/ 제 자리를 찾고” 있는 어린 청소년들이며, 그 어렵고 힘든 삶을 살고 있는 어린 제자들을 무한히 위로하고 용기를 북돋아 주듯이, “일찍 나온 보름달 선생님”이 “해맑게 웃으며 맞아준다.”
유채은 시인의 [야간 학교]는 그 동시적인 분위기를 통해 더없이 따뜻하고 사랑스러운 공간을 마련해 놓고 있는 시이며, 전인류의 스승이라는 목표를 위해 주경야독晝耕夜讀으로 공부를 하는 어린 청소년들에게 무한한 성원을 보내고 있는 시라고 할 수가 있다. 야간 수업에 쫓기듯 하나 둘 다투어 등교한 별들, 그 피곤하고 지친 어린 별들을 일찍 나온 보름달 선생님이 해맑게 웃으며 맞아준다는 발상은 이 세계가 모두 야간 학교라는 인식을 가져다가 준다. 야간 학교는 우주 학교이며, 수많은 별들은 우주 학교의 어린 청소년들이며, 보름달은 그 어린 학생들을 이상낙원으로 인도해주는 전인류의 스승인 것이다.
유채은 시인은 그의 앎을 통해 [야간 학교]를 창시하고, 이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이상낙원을 건설해낸 것이다.
유채은 시인은 시인 중의 시인이며, 영원한 야간 학교의 보름달 선생님이다.
웃음을 굽는 빵집
김찬옥
바닥에서 눈물을 끌어 올릴 힘이 있다면
정글을 누비는 하이에나의 이빨이라도 빌려 보아야지
썩은 나무 둥치 뒤에서 사지가 축 늘어져 있는 웃음이면 어때,
뼈를 잘 발라내고 웃는 살점만 갈기갈기 찢어 먹으면 되지
그런 날은 단 하루만이라도 살만해지겠지
날마다 아침을 여는 나의 체구가 이삿짐 트럭은 될 수 없잖아,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듯 발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신발창에서도 도레미 송이 울려 퍼지게 하고 싶어
생명이 없는 웃음이면 어때, 우는 것보다는 웃는 게 백배는 더 좋지
내가 웃음천이 되면 나를 보는 이들도 따라 웃음 천국이 되겠지
똥구멍에 가을바람이 들듯 배창시가 터지도록 웃음을 꺼내 웃다보면
나도 모르게 거북한 속이 진정되어 편안해지기도 하잖아
웃음이 웃음을 빠르게 전파시키는 특별한 비결은 뭐 없을까,
허공에 나라를 건설하는 일도 아니고
전철역 부근에 웃음을 굽는 빵집 간판 하나 내 걸면 어떨까?
그러면 웃는 빵집을 지나는 사람들까지도 다 고소해질 수 있겠지
새벽부터 웃음이 고픈 사람들끼리 모여 웃음을 직접 굽다보면
아침을 거르고 출근하는 이들에게
웃는 빵을 무료로 나누어 줄 수도 있겠지
웃는 빵을 먹고 일하는 사람들은
정치판에서도, 책상 앞에서도, 시장통에서도,
웃는 일만 척척 만들어내겠지
세상 구석구석이 웃는 꽃으로 만발하기 전에
내가 먼저 웃음이 대박 나는 빵집 주인이 될 수도 있겠지
----김찬옥 시집, {웃음을 굽는 빵집}에서
웃음이란 사람의 마음과 표정의 변화를 나타내는 것이지만, 웃음의 유형들은 매우 다종다양하다고 할 수가 있다. 어떤 일의 성취감 때문에 너무나도 기뻐서 웃는 웃음, 아들의 합격이나 취업소식 같은 기쁨 때문에 조용하지만 환하게 웃는 웃음, 서로간에 정담을 주고 받으며 유모어와 위트 때문에 배꼽을 잡고 웃는 웃음, 희극인들의 말놀이와 기상천외한 표정과 연기 때문에 배꼽이 빠지도록 웃는 웃음, 매우 어리석고 하찮은 인간들의 바보같은 짓 때문에 웃게 되는 웃음, 너무나도 어처구니가 없고 더 이상 기대할 것이 없는 실소失笑와도 웃음 등, 웃음의 유형은 너무나도 다양하고 어느 누가 마음만 먹는다면 ‘웃음의 사회학’을 정립해볼 수도 있을 것이다.
웃으면 복이 온다는 말도 있고, 웃는 얼굴에 침을 뱉을 수 없다라는 말도 있다. 김찬옥 시인의 [웃음을 굽는 빵집]은 너무나도 어렵고 힘든 밑바닥의 삶에서 그 밑바닥의 삶을 딛고 ‘소문만복래笑門萬福來’, 즉, ‘웃음의 시학’을 역설한 시라고 할 수가 있다. “바닥에서 눈물을 끌어 올릴 힘이 있다면/ 정글을 누비는 하이에나의 이빨이라도 빌려 보아야지”라는 시구는 이제는 어렵고 힘든 삶에 지쳐서 눈물의 샘마저도 말라버렸다는 것을 뜻하지만, 그러나 “썩은 나무 둥치 뒤에서 사지가 축 늘어져 있는 웃음”이라도 잡아 보겠다는 삶에의 의지를 드러낸 시구라고 할 수가 있다. 하이에나는 시체청소부이며, 시인이 시체청소부가 되었다는 것은 그의 웃음이 이미 죽었다는 것을 뜻한다. “뼈를 잘 발라내고 웃는 살점만 갈기갈기 찢어” 먹는다면 “그런 날은 단 하루만이라도 살만해”질 것이고, “신발창에서”는 “도레미 송이 울려 퍼지게” 될 것이다. “날마다 아침을 여는 나의 체구가 이삿짐 트럭은 될 수 없잖아”라는 시구는 이 세상에서 삶의 거처를 마련하지 못하고 끊임없이 떠돌아 다니고 있다는 것을 뜻한다. 얼마나 어렵고 힘든 삶을 살아왔으면 하이에나가 되어 사지가 축 늘어진 웃음을 찢어 먹고 싶다고 했겠으며, 또한, 얼마나 어렵고 힘들게 떠돌이--나그네의 삶을 살아 왔으면 이삿짐 트럭보다는 “피아노 건반을 두드리듯 발걸음을 내딛을 때마다/ 신발창에서도 도레미 송이 울려 퍼지게 하고” 싶었던 것일까?
웃음은 이 세상의 삶의 찬양이고 긍정이며, 웃음은 자기 자신을 활짝 열어 젖히고 타인들과 함께 잘 살아보겠다는 행복의 전도사라고 할 수가 있다. 삶은 웃음의 존재근거이고, 웃음은 행복의 인식근거이다. 너무나도 슬퍼하면 더 큰 슬픔이 찾아와 목을 눌러버리지만, 웃고, 또 웃으면 기쁨이 찾아와 그의 어깨를 두드려 준다. 얼굴을 찡그리고, 또 찡그리면 기쁨이 찾아오다가도 돌아가지만, 더없이 친절하고 상냥하게 웃으면 그의 모든 잘못마저도 다 용서해주게 된다. 생명 없는 웃음이라도 우는 것보다는 웃는 게 백배는 더 낫고, 내가 웃음의 천(샘)이 되면 모든 사람들은 웃음 천국의 원주민이 된다. “똥구멍에 가을바람이 들듯 배창시가 터지도록 웃음을 꺼내 웃다보면” 그 모든 근심과 걱정을 다 잊고, 우리는 모두가 다같이 잘 살 수 있게 된다. 어쩌다가 일가족이 몰살을 당한 사건들을 생각하면 나의 크나큰 슬픔은 아무 것도 아니고, 전재산을 다 잃고 실의에 잠겼다가도 그것이 ‘공수래공수거空手來空手去’의 진면목이라고 생각하면 저절로 웃음이 나온다. 이 세상의 모든 것은 웃음의 뿌리가 되고, 그 어느 것도 웃지 않을 이유가 없다. 웃음이 웃음을 빠르게 전파시키는 특별한 비결은 허공에 나라를 건설하는 것도 아니고, “전철역 부근에 웃음을 굽는 빵집 간판 하나” 내거는 일일 수도 있다. 웃음을 굽는 빵집에서 웃음을 굽다보면 웃는 빵집을 지나는 사람들까지도 다 고소해지고, 새벽부터 저녁까지, 저녁부터 새벽까지, 이 세상의 모든 웃음이 고픈 사람들에게 웃는 빵을 무료로 나누어 줄 수도 있을 것이다.
최하 천민의 밑바닥 삶에서 그 밑바닥의 삶을 살며, 그 밑바닥의 삶을 통해 [웃음을 굽는 빵집]을 연출해낸 극적 구조와 반전의 드라마는 김찬옥 시인의 현실주의의 승리이자 낙천주의의 승리라고 할 수가 있다. 현실주의는 성실하고 긍정적인 삶의 소산이고, 낙천주의는 성실하고 긍정적인 삶을 모든 인간들의 행복으로 승화시킨 인식의 힘의 소산이라고 할 수가 있다. 옷는 빵을 먹고 일하는 사람들이 “정치판에서도, 책상 앞에서도, 시장통에서도/ 웃는 일만 척척 만들어” 내게 될 것이다. 만일, 그렇게 된다면, “세상 구석구석이 웃는 꽃으로 만발하기 전에/ 내가 먼저 웃음이 대박 나는 빵집 주인이 될” 것이다. 슬픔을 기쁨으로, 절망을 희망으로, 불행을 행복으로 반전시키는 김찬옥 시인의 솜씨는 ‘웃음의 시학’의 연출가이자 ‘행복의 전도사’의 그것이라고 할 수가 있다.
웃는 빵, 웃는 꽃, 내가 먼저 웃음이 대박나는 빵집 주인, 웃음을 굽는 빵집 등----. 아아, 이 말들은 내가 지금까지 들은 가장 아름답고 풍요로운 모국어이자 전인류의 공용어가 될 한국어인 것이다.
아아, 이처럼 아름답고 풍요로운 한국어와 우리 한국인들의 백절불굴의 삶의 정신과 그 용기를 선사해준 김찬옥 시인에게 무한한 경의를 표한다.
알혼에서 만나
안희연
알혼*은 작은 숲이라는 뜻이래
기차를 타고 배를 타면 언제든 갈 수 있는 곳
그런데 알혼은 그렇게만 갈 수 있는 곳은 아닐 거야
둥지가 품은 알의 영혼 같기도
네 혼을 알라, 혼내는 소크라테스의 말 같기도 한
알혼,
아무리 영혼이 궁금하더라도
둥지에서 알을 훔칠 수는 없지
둥지에서 손을 거둘 때 알 하나가
실수로 미끄러져 깨졌더라도
그럴 때 깨진 건 알이 아닐 확률이 높다
손이 닿는 순간 이미 충분히 상했을 것이다
그러니까 알혼, 긁히거나 멍든 자국,
언제 어디서 부딪혔는지 알 길 없지만
몸에 머물다 사라지는 검푸른 빛이 있다는 것
그건 내게도 영혼이 있다는 증거 아닐까, 누군가 나의 영혼을 꾸욱 건드려본 것은 아닐까
알혼으로 가는 길은 하나가 아닐 것이다
과녁처럼 서서 쏟아지는 비를 맞는다
내리는 것은 비가 아니라 칼일 수도 있지만
도착은 해도 다다를 수는 없겠지만
* Olkhon. 러시아 바이칼호의 섬.
알혼은 러시아 바이칼 호수에 있는 섬의 이름이며, 그 이름의 어원은‘작은 숲’이라고 한다. 알혼은 기차를 타고 배를 타면 언제든지 갈 수 있는 곳이지만, 그러나 알혼은 그렇게 간단하고 쉽게 갈 수 있는 곳이 아니다. 왜냐하면“알혼으로 가는 길은 하나가”아니고, 과녁처럼 쏟아지는 비를 맞으며 도착해도 다다를 수 없는 곳이기 때문이다. 알혼은 존재하면서도 존재하지 않고, 존재하지 않으면서도 존재하는 그런 이상낙원인지도 모른다.
진리는 하나이지만, 현자는 이를 여러 이름으로 언표한다는 힌두경전의 말이 있다. 싯다르타, 고타마 붓다, 여래, 석가모니 등은 부처의 다른 이름들이고, 야훼, 여호와, 예수 등은 기독교적인 하나님의 다른 이름들이고, 포세이돈, 하데스, 아플로, 아프로디테, 헤라클레스 등은 제우스의 다른 이름들인지도 모른다. 신은 전지전능한 영생불사의 존재이며, 이 전지전능한 신은 그때 그때마다 수많은 다른 이름과 그 모습으로 나타난다. 알혼은 이상낙원이며, 안희연 시인의 말에 따르면, 수많은 다른 이름들을 갖고 있다. 작은 숲을 뜻하는 알혼, 새들이 알을 낳은 알혼, 소크라테스적인 인간의 영혼, 인간이 실수로 깨뜨리면 알이 아닌 알혼,“언제, 어디서 부딪혔는지 알 길 없지만”“긁히거나 멍든 자국”이 있는 알혼, 그래서 내 영혼이 있다는 증거같은 알혼, 끝끝내 기차를 타고, 배를 타고, 과녁처럼 쏟아지는 비를 맞고 도착해도 다다를 수 없는 알혼이 바로 그것을 말해준다.
만일,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알혼으로 가고, 우리는 또한, 어떻게 알혼에서 만날 수가 있는 것일까? 도道란 만물의 기원이며, 만물의 보편법칙이고, 덕德이란 이 도의 법칙에 따라 사는 것을 말한다. 이 세상의 행복은 도덕을 실천하는 데 있고, 도덕을 실천하면 그는 전지전능한 신적인 존재가 될 것이다. 도덕은 어진 현자의 길이고, 만인평등의 길이다. 도덕은 인류평화의 길이고, 인류 행복의 길이다. 도덕국가는 이상낙원이며, 이 이상낙원이 안희연 시인의 [알혼]일 것이다.
안희연 시인의 [알혼]은 기차를 타고 배를 타고 갈 수 있다는 점에서는 현실적이고, 소크라테스적인 인간의 영혼이 살고 있다는 점에서는 이상적이고, 과녁처럼 쏟아지는 비를 맞고 도착해도 다다를 수 없다는 점에서는 신비적이다. 만물의 기원이며 만물의 보편법칙인 도덕도 존재하지 않고, 이 세상의 이상낙원인 [알흔]도 존재하지 않는다. 존재하면서도 존재하지 않고, 존재하지 않으면서도 존재하는 이상낙원을 찾아가는 것이 삶이고, 그곳을 노래하는 것이 우리들의 만남의 합창이 되고, 알혼의 신비로운 아름다움이 이 세상의 행복의 무늬가 된다.
삶은 환영이고 신비이며, 이 삶의 진리는 그 어느 누구나 제멋대로 이해하고 향유할 수가 있다. 진리는 하나이지만, 수많은 얼굴과 다른 이름들을 갖고 있다.
별국
공광규
가난한 어머니는
항상 멀덕국을 끓이셨다
학교에서 돌아온 나를
손님처럼 마루에 앉히시고
흰 사기그릇이 앉아 있는 밥상을
조심조심 받들고 부엌에서 나오셨다
국물 속에 떠 있던 별들
어떤 때는 숟가락에 달이 건져 올라와
배가 불렀다
숟가락과 별이 부딪치는
맑은 국그릇 소리가 가슴을 울렸는지
어머니의 눈에서
별빛 사리가 쏟아졌다
제아무리 가난해도 꿈이 있으면 그의 가난은 가난이 아니다. 정말로 가난한 사람은 최저생활의 밑바닥에서 쓰레기통을 뒤지거나 장발장이나 라스콜리니코프처럼 죄를 짓게 된다. 열흘 굶어서 도둑질 하지 않을 사람이 없다는 말이 있듯이, 인간 이하의‘생계형 범죄’를 저지르는 사람에게는 꿈이라는 말조차도 사치이기 때문이다.
이 세상에는 가난의 종류도 매우 많고, 가난의 색깔과 그 유형도 수많은 사람들의 얼굴처럼 더없이 많고 다양하다고 할 수가 있다. 경제적으로는 아주 부유하지만 마음이 더없이 가난한 자의 가난, 먹고 살 걱정이 없으면서도 돈 쌓이는 속도가 느리다고 투덜대는 가난, 간신히 목구멍에 풀칠을 하고 살면서도 더없이 상냥하고 친절하게 사는 자의 가난, 자나깨나 하루살이처럼 바쁘게 살면서도 한시도 고귀하고 위대한 꿈을 잃지 않고 사는 자의 가난, 부의 이전과 사회적 신분이동이 가능하지 않은 사회에서‘유전무죄-무전유죄’라는 구조적 모순 때문에, 살인, 사기, 강도, 절도 등의 생계형의 범죄를 저지르며 살아가는 자의 가난 등이 그것을 말해준다.
나는 공광규 시인의 [별국]을 읽으면서 공광규 시인의 가난은 가난이 아니라고 생각했다. 왜냐하면 그의 가난은 꿈이고 낭만이며, 한 편의 명시로 탄생한 아름답고 행복했던 가난이었기 때문이다.“가난한 어머니는/ 항상 멀덕국을 끓이”셨고,“학교에서 돌아온 나를/ 손님처럼 마루에 앉히시고/ 흰 사기그릇이 앉아 있는 밥상을/ 조심조심 받들고 부엌에서 나오”셨던 것이다. 멀덕국이란 건더기보다 국물이 더 많은 국을 말하고, 사랑하는 아들, 즉, 손님처럼 귀한 아들에게 멀덕국의 밥상을 차려야만 했던 어머니의 마음은 얼마나 쓰라리고 아팠던 것인가를 생각하면, 지금도, 이 순간에도 그 아들의 눈물샘은 마를 날이 없었을 것이다.
국물 속에는 동태나 두부 몇 점, 또는 멸치나 돼지비계 몇 점이 떠 있던 것인지도 모르고, 다른 한편, 살이라고는 하나도 없는 돼지와 소뼈다구들이 들어 있었는지도 모른다. 국물 속에 떠 있던 작은 건더기는 별이 되고, 국물 속에 떠 있던 큰 건더기는 달이 되었다. 하지만, 그러나“국물 속에 떠 있던 별들,”“어떤 때는 숟가락에 달이 건져 올라와/ 배가 불렀다,”“숟가락과 별이 부딪치는/ 맑은 국그릇 소리가 가슴을 울렸는지,” “어머니의 눈에서/ 별빛 사리가 쏟아졌다”라는 매우 아름답고 멋진 시구들은 어느 누구나 쓸 수 있는 시구들이 아니다. 공광규 시인에게 가난은 행운이고 축복이었으며, 그는 이 행복한 삶을 어느 누구도 쓸 수 없는 [별국]으로 탄생시킨 것이다.
진짜로 가난한 사람은 국물 속에 떠 있는 별을 보지 못하고, 언제, 어느 때나 숟가락으로 달을 건져 올리지도 못한다. 또한 “숟가락과 별이 부딪치는/ 맑은 국그릇 소리가 가슴을 울렸는지”도 모르고,“어머니의 눈에서/ 별빛 사리가 쏟아”진 것도 모른다. 가난은 하늘의 별과 달을 띄워놓고, 그의 시적 재능을 마음껏 펼쳐보이게 하는 원동력이었던 것이며, 그는 이 아름답고 풍요로운 가난이 있었기 때문에 이처럼 아름답고 뛰어난 [별국]이라는 소우주를 창출해냈던 것이다.
그 어떤 부유함보다도 더욱더 아름답고 행복한 가난의 징표인 별빛 사리----. 가난은 눈물(사랑)이 되고, 눈물은 별빛 사리가 되었던 것이다.
악순환
최승자
근본적으로 세계는 나에겐 공포였다.
나는 독 안에 든 쥐였고,
독 안에 든 쥐라고 생각하는 쥐였고,
그래서 그 공포가 나를 잡아먹기 전에
지레 질려 먼저 앙앙대고 위협하는 쥐였다.
어쩌면 그 때문에 세계가 나를
잡아먹지 않을는지도 모른다는 기대에서……
오 한 쥐의 꼬리를 문 쥐의 꼬리를 문 쥐의 꼬리를
문 쥐의 꼬리를 문 쥐의 꼬리를 문 쥐의 꼬리를……
공포란 두렵고 무서운 것이며, 두렵고 무섭다는 것은 그의 삶이 장애를 만났다는 것을 뜻한다. 시냇물이 자그만 돌이나 여울을 만날 때에는 매우 가볍고 경쾌하게 흐를 수도 있지만, 그러나 더없이 커다란 강물이 천길의 낭떠러지를 만났을 때는 이과수나 빅토리아, 또는 나이아가라 폭포처럼 그 엄청난 고통을 토해낸다. 천길의 낭떠러지는 물의 죽음이며 공포 자체이지만, 그러나 제3의 방관자인 우리 인간들은 그 물의 죽음과 공포 자체를 더없이 즐겁고 유쾌한 구경거리로서 바라보게 된다. 타인들의 죽음과 공포는 아름답고 멋지며, 그것은 하나의 놀이이자 축제이며, 더없이 크나큰 부를 축적할 수 있는 관광상품이 된다. 자본은 천 개의 팔과 다리를 지닌 괴물이며, 그의 눈과 손길이 닿으면 그 모든 것이 상품이 된다.
최승자 시인의 [악순환]은 이과수와 빅토리아, 또는 나이아가라 폭포와도 같은 공포 자체이며, 그것은 그의 삶이 장애를 만났다는 것을 뜻한다. 이 세상은 고양이의 세상이 되었고, 최승자 시인은 독 안에 든 쥐가 되었다. 고양이의 감시의 눈초리는 사시사철, 밤과 낮으로 작동을 하고 있었고, 피비린내가 잔뜩 묻어 있는 고양이의 울음 소리는 천지개벽의 굉음 소리처럼 들려오고 있었다. 앞도 벽이고, 뒤도 벽이다. 옆도 벽이고, 그 옆도 벽이다. 부잣집의 담을 넘어가거나 백화점의 물건을 훔치지 말라는 것도 공포였고, 아버지와 오빠와 남동생과 연애를 하지 말라는 것도 공포였다. 대통령과 사장과 어른들에게 절대적으로 복종하라는 것도 공포였고, 언니와 여동생, 또는 타인들을 음해하거나 시기하지 말라는 것도 공포였다. 공포, 즉, 두려움과 무서움이 삶의 욕망을 더욱더 끔찍하게 짓누르고 있었고, 오직 살고 싶다는 욕망만이 지레 겁을 먹고 앙앙대고 위협하는 쥐가 되었다.
막다른 골목에 몰린 쥐가 고양이를 물어뜯고, 이 쥐의 독기가 최승자 시인의 [악순환]의 시적 원동력이 된 것이다.“쥐의 꼬리를 문 쥐의 꼬리를 문 쥐의 꼬리를 문 쥐의 꼬리를 문”시인의 삶의 욕망과 죽음에 대한 공포가 언어의 폭포가 된 것이다. 시는 삶의 욕망과 죽음에 대한 공포로 이루어진 언어의 대폭포라고 할 수가 있다.
최승자 시인의 [악순환]의 언어는 오늘도, 지금 이 순간에도 고양이를 물어뜯으며 부들부들 떨고 있지만, 우리들은 모두가 다같이 이 [악순환]의 ‘언어의 폭포’를 손에 땀을 쥐고 관람하는 관광객일 뿐이었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