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1년 9월 4일 연중 제23주일
나는 분명히 말한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도 매여 있을 것이며
땅에서 풀면 하늘에도 풀려 있을 것이다.
(마태오 18,15-20)
Amen, I say to you, whatever you bind on earth shall be bound in heaven, and whatever you loose on earth shall be loosed in heaven
말씀의 초대
예언자는 말씀을 전하는 사람이다. 충실하게 전해야 올바른 예언자가 된다. 주님의 말씀은 경고와 격려가 반복된다. 어떤 말씀을 하시든 최선을 다해 전해야 한다. 그것이 예언자의 소명이다(제1독서). 율법의 완성은 사랑에 있다. 아무리 철저하게 율법을 지켜도 사랑이 빠지면 완벽하지 못하다. 모든 율법은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한마디로 요약된다(제2독서). 예수님께서는 형제의 잘못을 타일러 주라고 하신다. 당연히 그래야 할 일이다. 그러나 쉽지 않은 일이다. 잘 아는 사람일수록 훈계는 더 어렵다. 그러기에 반복하라고 하신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을 동원하라고도 하신다. 그들과 함께 기도하라고 하신다. 예수님께서도 함께하시겠다는 말씀이다(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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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의 묵상
예수님께서는, 형제가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타일러 주라고 하십니다. 한두 번은 가능할 것입니다. 그러나 계속해서 그렇게 하기는 쉬운 일이 아닙니다. 용서는 마음먹는다고 할 수 있는 일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용서는 순간의 결정처럼 보이지만, 사실은 시간을 두고 쌓는 덕(德)입니다. 그렇습니다. ‘용서는 덕’입니다. 덕에 도달하려면 누구나 수행의 과정을 거쳐야 합니다. 그런데도 사람들은 마음만 먹으면 언제라도 용서할 수 있다고 생각합니다. 그러나 착각입니다. 용서를 감정 차원으로 해석한 착각입니다. 순간에 생긴 미움은 순간의 용서로 사라질 수 있습니다. 그러나 오랜 세월에 걸쳐 쌓아 온 미움은 순간의 용서로 감당하기 어렵습니다. 미움이 쌓인 시간만큼 수련과 극기가 필요합니다. 그것이 무엇일는지요? ‘작은 용서’입니다. 혼자만이 알고 있는 작은 용서를 수없이 실천하는 것입니다. 작은 용서가 몸에 배어야 큰 용서가 가능해집니다. 예수님께서는 형제가 잘못하면 만나서 타일러 주라고 하셨습니다. 일차적으로 형제는 가족입니다. 그들을 먼저 받아 주라는 말씀입니다. 가까운 사람을 이해하지 못하면 멀리 있는 사람도 이해할 수 없는 법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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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앙 공동체는 세상 속에서 주님의 현존의 표시가 됩니다. 그래서 신앙 공동체는 주님의 뜻을 이루는 사랑과 자비와 용서의 공동체여야 합니다. 주님께서 살아 계시는 증거가 되도록 신앙에 충실한 공동체를 만들어야 하겠습니다.
어제도 새벽 묵상 글에 적었지만, 지금 간석4동 성당은 한창 공사 중입니다. 특히 요즘 며칠 동안 성모동산을 새롭게 만들기 위해 무허가 건축물을 철거하는 작업을 했습니다. 그리고 드디어 어제 완전히 무허가 건축물이 철거되면서, 성당이 무척 시원하게 되었지요. 그런데 철거하는 과정에서 소음도 문제였지만, 먼지가 장난이 아니었습니다.
사실 철거하면서 물을 계속 뿌려주기 때문에 먼지가 별로 날리지 않는 줄 알았습니다. 또한 먼지는 눈에 잘 보이지도 않지요. 하지만 공사장 근처에 세워있던 제 차를 보면서 먼지가 얼마나 많은 지를 깨닫게 되었지요. 글쎄 까만색의 제 차가 나도 모르게 어느새 하얀색의 차로 변했거든요.
눈에 보이지 않는 먼지. 그러나 이 먼지들이 모여서 까만 차를 하얀 차로 만듭니다. 그런데 우리들의 죄 역시도 이렇지 않을까 싶어요. 아무리 죄를 짓는다 하더라도 잘 눈에 띄지 않는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 죄가 바로 악으로 기울어지게 합니다. 주님의 자녀인 나를 점점 변화시켜서 주님보다도 마귀와 손잡게 만들어 버립니다. 그러므로 아무리 작은 죄라도 행하지 않기 위해서 노력하는 우리들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제1독서에서 이스라엘 집안의 파수꾼이 되어 끊임없이 경고하라는 것처럼, 우리 역시 이 주님의 세상에서 악에 대한 경고를 멈춰서는 안 될 것입니다. 그리고 그 구체적인 경고의 방법이 복음에서 제시되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이 잘못했을 때, 먼저 단둘이 만나서 타이르라고 하십니다. 이는 상대방의 자존심을 상하게 하거나 굴욕감을 주지 말라는 의미가 담겨 있는 것이지요. 그런데 이렇게 해서도 그 사람이 나의 말을 듣지 않습니다. 그러면 다음 단계로 넘어가서,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라고 하시지요. 물론 힘을 과시하고 겁을 주기 위함이 아니지요. 나만이 아니라 다른 사람들도 네가 잘못하고 있다는 것을 가르쳐주면서 주님께로 되돌아올 것을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문제는 이렇게 해도 말을 듣지 않습니다. 그때 교회에 알리고 교회의 판결에 따르라는 것입니다. 바로 이 교회 안에 예수님께서 함께 계시기 때문이지요.
이렇게 구체적인 경고의 방법을 말씀하시는 이유는 무엇일까요? 이 세상에 늘어나는 죄인을 하나도 빠짐없이 주님 곁으로 다시 부르기 위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주님께서는 사랑 그 자체이신 분이기 때문입니다.
따라서 주님의 뜻을 세상에 알리는데 최선을 다하는 것이 우리에게 주어진 중요한 사명입니다. 그러기 위해 사랑의 파수꾼의 역할을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끊임없이 기회를 다시 주시는 것처럼, 우리도 사랑을 가지고 끊임없는 용서를 실천해야 하는 것입니다.
어느 평일 미사 강론시간에 신부님께서 이러한 질문을 하셨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차가운 바다는 ‘썰렁해’입니다. 그럼 세상에서 가장 따뜻한 바다는 어디일까요?”
신자들이 머뭇거리자 신부님께서 말씀하십니다.
“그곳은 ‘사랑해’입니다. 우리 모두의 마음이 항상 따뜻한 바다와 같이 사랑하는 마음이길 원합니다.”
이 강론을 들은 자매님께서는 평소 남편으로부터 사랑한다는 말을 한번 듣는 것이 소원이었지요. 그래서 집에 가서 남편이 직장에서 돌아오기만을 기다렸지요. 그리고 남편이 오자 온갖 애교를 부리면서 신부님처럼 질문을 던졌습니다.
“여보. 내가 문제를 낼게요. 한 번 맞춰 보세요. 세상에서 가장 차가운 바다는 ‘썰렁해’래요. 그럼 세상에서 가장 뜨거운 바다는 어디일까요?”
남편이 답을 하지 못하자, 자매님께서는 온갖 애교 섞인 목소리로 말을 합니다.
“이럴 때 당신이 나에게 해주고 싶은 말 있잖아!”
이에 남편이 자신감 넘치는 표정을 지으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열바다.”
하긴 ‘열바다’도 바다긴 합니다. 하지만 아내가 정말로 듣고 싶은 말은 ‘사랑해’였지요.
혹시 지금 주님께서 원하시는 사랑의 말과 행동이 아닌, 정반대의 모습을 취하고 있었던 것은 아닌지요? 그래서 주님을 계속 열받게 하고 있는 것은 아닐까요?
이제는 주님께서 우리에게 간절히 원하시는 사랑의 삶을 살도록 합시다. 그 사랑의 삶 안에 주님께서는 언제나 함께 하시겠다고 약속하셨습니다.
‘사랑’라는 단어를 많이 쓰는 오늘을 만들어 보세요.
함께 기도 하기 -서북원 신부-한국 교회가 대형화 되면서 이 문제를 해결하기 위해 거의 모든 교구가 실시하고 있는 것이 소공동체 활성화입니다. 우리 교구도 반모임을 통해 소공동체를 활성화 하고자 시도하고 있지만 아직까지는 좋은 결과를 얻어내지는 못하고 있습니다. 여러 이유가 있지만 가장 많이 이야기 하는 것은 함께 모이는 시간을 맞추기가 어렵고 힘들다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모이는 숫자를 중요시합니다. 언제부터인가 우리는 숫자가 많아야 잘 된다고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러나 이것은 잘못된 생각입니다. 예수님은 복음에서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다”(마태 18,20)라고 말씀하셨습니다. 공동체가 한 사람으로는 이루어질 수 없지만 두 사람만 있더라도 공동체라고 말할 수 있습니다. 아무리 없어도 두 사람 모이기가 그렇게 힘들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기도하라고 말씀하신 것은 주님이십니다. 우리 인간이 아니라 그분께서 함께해 주시겠다는데 무엇이 두려워서 못하겠습니까? 믿고 기도합시다. 나머지는 주님께서 해주실 것입니다. 우리를 도구로써 이용하시게끔 내맡깁시다. 함께 기도하면 아버지께서는 들어주십니다.
원한과 증오의 사슬을 푸는 법
-배광하신부-
사랑은 율법의 완성
우리가 죽인 형제들
옥중에서 회개와 속죄의 삶을 살다 46세의 젊은 나이에 형장의 이슬로 사라진 ‘권 베드로’라는 사형수가 있었습니다. 사형수였던 그에게 냉대가 아닌 끝없는 사랑과 격려, 충고로 함께 하셨던 ‘조 안나’ 할머니 덕분에 그는 회개와 속죄의 삶을 살게 되며 끝내 빛을 향하여 걷게 됩니다. 빛의 세계로 이끈 조 안나 할머니에게 그가 보낸 편지는 눈시울을 뜨겁게 만들어 놓습니다.
“급강하한 기온은 보잘것없는 저 같은 인간에게까지 뭔가를 생각하게 합니다. 저에게 전해주신 참으로 귀한 묵주, 어머님과 함께 기도를 바치는 기분이어서 잠시도 손에서 놓지 않고 있답니다. 묵주 덕분에 외롭지도 슬프지도 않아 큰 위안을 받고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은총일 테죠? 하느님의 뜻에 감사드립니다.”
“올해에도 이승에서 사순절을 맞으며 부족한 저의 죄 값에 대한 보속을 조금이나마 더 키워 갚을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야말로 제겐 은총이 아닐 수 없습니다. 어제 재의 수요일 아침 묵상을 하는 동안 사랑을 배우고 용서를 배워 못다한 지난 날의 삶을 되살려 보자는 묵상을 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오늘 사랑의 참된 충고에 대하여 이렇게 가르치십니다.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 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마태 18, 15)
한 발 더 나아가 에제키엘 예언자는 이렇게 경고합니다.
“네가 악인에게 그 악한 길을 버리도록 경고하는 말을 하지 않으면, 그 악인은 자기 죄 때문에 죽겠지만, 그가 죽은 책임은 너에게 묻겠다.”(에제 33, 8)
그럼에도 우리는 이웃을 쉽게 단죄하며 마음으로, 입으로 죽이기만 하였지, 그가 다시 회개하여 돌아오기를 바라지 않았습니다. 어쩌면 영영 그 수렁에서 헤어나오지 말기를 바랐는지도 모릅니다.
참다운 충고에는 반드시 기다림의 인내와 사랑의 관용이 필요합니다. 늘 그의 처지에서 모든 일을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그리고 예수님이셨으면 어떻게 하셨을까를 늘 묵상해야 합니다. 그것이 예수님을 믿고 그분의 뒤를 따른다고 고백하는 신앙인의 자세이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우리가 죽였던 이들을 떠올려야 합니다. 그들도 하느님 눈에는 더 없이 귀중한 자녀이고, 그분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귀한 존재이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승리
‘예루살렘’은 ‘평화의 도읍’이란 뜻입니다. 그러나 역사상 평화로웠던 적이 거의 없었습니다. 오늘날도 불안하기는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그 지역을 다녀온 분들의 증언을 들어보면, 이스라엘이나 아랍 세계나 한결같이 보수 정통 신앙을 가졌다고 자부하는 ‘종교인’일수록 무력 전쟁만이 평화의 유일한 수단이라고 주장한다고 합니다. 그래서 평화가 왔느냐 하면, 그렇지 않았습니다. 피는 반드시 피를 불렀고, 원한은 더 큰 원한을 쌓아 갔습니다. 그것이 증오의 인간 역사였습니다.
이 같은 원한과 증오의 역사에 마침표를 찍기 위하여 예수님께서 이 세상에 오신 것입니다. 그리고 그분께서는 용서가 무엇인지, 사랑이 무엇인지를 당신의 온 몸을 내어던져 우리에게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러나 카인의 자손인 인류는 끊임없는 전쟁을 저질렀고, 그 추악한 전쟁 중 끔찍한 전쟁은 용서와 사랑을 가르치는 모든 종교에서 비롯되었습니다. 나와 생각이, 사상이, 이념이, 신앙이 다르다고 단죄했던 증오의 사슬을 이제는 풀어야 합니다.
무엇보다 가장 많은 증오의 사슬을 묶었던 그리스도인들이 지난 과오를 뉘우치고 사랑이 승리할 수 있음을 보여 주어야 합니다. 그리고 인류의 역사는 분명 사랑이 승리했던 역사임을 가르쳐야 합니다.
프로이센의 젊은 왕 ‘프리드리히 2세’(1712~1786)는 왕의 자리 등극 후 많은 청원서와 진정서들을 처리하는 과정에 가톨릭 교회와 관련된 청원서를 진정 화해와 관용과 용서로 풀었다고 합니다. 가톨릭을 반대하는 프로테스탄트 신봉 대신들은 프로이센에서 로마 가톨릭 학교를 폐쇄시키자고 청원합니다. 프로이센은 프로테스탄트를 신봉하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자 젊은 왕은 청원문의 여백에 다음과 같은 결정을 내렸다고 합니다.
“종교는 모두에게 허용되어야 하고, 감독관은 어떤 종교가 다른 종교에 해를 입히지 못하도록 하는데 신경을 써야 할 것이다. 이 나라에서는 누구나 저마다의 방식으로 구원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누군가는 원한과 증오의 사슬을 풀어야 합니다. 그래야 하늘에서도 풀릴 것입니다. 그리하여 완성된 신약의 율법 사랑에 대하여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가르칩니다.
“사랑은 이웃에게 악을 저지르지 않습니다. 그러므로 사랑은 율법의 완성입니다”(로마 13, 10).
사랑의 충고
-김영춘 신부-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저에게 가장 많이 충고를 해 준 사람은 부모님입니다. 지금도 저의 건강을 염려하시면서, “신부님, 살을 좀 뺐으면 좋겠고 운동을 꾸준히 하세요”라고 말씀해 주십니다. 어느 부모님이나 자녀들을 위한 사랑의 마음에서 그들이 올바른 길을 가도록 충고를 아끼지 않습니다. 가끔은 이런 부모님의 충고가 다 큰 자식들에게는 잔소리로 들리기도 하지만, 부모님의 자식들에 대한 충고가 이어지는 까닭은 부모님의 자녀들에 대한 사랑이 여전히 당신들의 가슴 안에 커다랗게 자리잡고 있기 때문일 것입니다.
사실 저는 저에게 잘못한 사람이 있다 하더라도, 충고하는 데는 어려움을 느낍니다. 일단은 서로가 눈살을 찌푸릴 수 있는 이야기를 하는 것이 마음에 내키지 않습니다. 그리고 그런 불편한 이야기를 하면, 그 사람과의 관계가 서먹서먹해지거나 악화될 것이라는 걱정에 웬만하면 그냥 참고 넘어갑니다. 그의 잘못을 지적할 수 있는 용기가 없기도 하지만, 사실을 고백하면 나에게는 잘못한 그를 받아들일 수 있는 사랑이 부족합니다. 그가 만약 나의 가족이었다면, 그를 사랑하기에 용기를 가지고 그의 잘못에 충고를 했을 것입니다.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마태 18,15). 복음은 다른 사람을 대동하거나, 교회에 알리기 전에 나에게 잘못을 범한 그와 단둘이 만나라고 강조합니다. 복음에서 죄를 지은 사람을 가리키면서, 어떤 사람이라고 하지 않습니다. 그를 형제라고 표현합니다. 이것은 그가 비록 나에게 죄를 지었다 하더라도 신앙 안에서 한 가족을 이루는 형제자매임을 분명히 합니다. 형제가 잘못을 저질렀을 때, 우리는 그것을 밖으로 떠들고 다니지 않습니다. 그에 대한 애정을 지니고 남들이 모르게 그에게 조용히 다가가서 충고를 합니다.
죄를 타이르고 충고를 해 주는 것은 형제를 대하는 열린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이러한 열린 마음은 형제에 대한 사랑의 마음에 토대를 둡니다. 참으로 가까운 친구를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서로 간에 서슴없이 충고할 수 있습니다. 그것은 친구를 진심으로 사랑하고 그에 대한 열린 마음이 있기에 가능합니다. 가까운 친구가 아니라면, 충고로 인해 관계에 금이 가고 친구를 잃어버릴 수도 있습니다. 그렇지만 친구가 형제보다도 가까운 사이라면, 우리는 잘못한 친구에게 기꺼이 충고를 아끼지 않습니다. 친구를 잃는 두려움보다 친구를 아끼고 사랑하는 열린 마음을 지닌 까닭입니다. 마찬가지로 단둘이 만나서 타이르고 충고하는 것은 먼저 그를 향한 열린 마음과 사랑이 있어야 합니다.
그리스도인은 형제에게 충고할 때, 율법에 기초하지 않습니다. 충고의 토대는 사랑입니다. 사랑이 있을 때만이 충고는 힘을 지니고 또한 효력이 있습니다. 사랑이 없는 충고는 잔소리일 뿐입니다. 충고가 법과 규정에 기초하고 있다 할지라도, 잔소리처럼 쉽게 흘려듣게 됩니다. 사랑의 충고를 하기 위해 우리는 잘못한 이를 위해 기도해야 합니다. 다른 이의 잘못을 타이르기 전에, 먼저 그를 사랑하기 위한 토대에 서기 위함입니다. 기도하고 충고하면 잔소리가 되지 않습니다. 내가 기도하고 충고하면 그것은 나의 충고가 아니라, 그리스도의 충고가 됩니다. 나의 충고를 통해 주님께서 그의 잘못과 부족함을 채워 주는 은총을 베풀어 주십니다.
지금 여기!
-진병섭 신부-
지난 2000년 대희년, 요한 바오로 2세 교황님은 교황청 문헌 <기억과 화해>를 통해 교회 역사상 처음으로 교회 안에서 자행된 여러 과오들을 반성하면서 잘못을 고백하고 용서를 청하였습니다. 한국교회 또한 <쇄신과 화해>라는 반성문건을 발표하였습니다.
이 두 반성에는 큰 틀들이 존재합니다. 그 틀 중, 하나가 바로 침묵(가톨릭 대사전 참조)입니다. 종교적인 침묵은 기도와 정신 수련을 위한 필수 수단으로 긍정적인 의미를 지닙니다. 그러나 사회적인 침묵은 긍정적인 의미보다도 부정적인 여러 가지 다양한 의미로 사용됩니다. 때와 장소, 상황에 따라 ‘관찰’, ‘동의’, ‘당황’, ‘공포’, 등을 의미합니다. 교회가 반성한 “침묵”은 후자에 속합니다. 침묵하지 말아야 할 때에 침묵했기에 반성하는 것입니다.
오늘 제1독서는 우리의 예언직에 대해 이야기합니다. 파수꾼이 되지 못하고 침묵한다면 책임이 따른다고 분명히 이야기합니다. 오늘의 복음은 같은 맥락에서 그 방법을 제시해 줍니다. 불의에 대한 침묵이 아닌 그리스도인으로서의 몫을 하라는 말입니다. 결코 침묵하라는 말씀은 없습니다. 행동하라고 전합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제2독서의 말씀처럼, 우리 모든 행동의 바탕에는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파수꾼이라는 이름으로 강요하고, 보이지 않는 폭력을 행사한다면 그것은 결코 그리스도의 예언직을 수행하는 것이 아닙니다. 우리가 보여 주어야 할 것은 예수님께서 우리에게 보여 주신 모습! 불의에 침묵하지 않으면서도 당신의 삶을 통하여 힘 있게 정의를 이야기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지금 어떤 모습으로 그리스도의 파수꾼이 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각자의 자리에서 삶을 살아내고 있는 그리스도인 개개인에게, 또한 함께 어우러져 있는 교회 공동체 모두에게 달려 있습니다. 그리스도인 개개인은 자신의 자리에서 불의에 대해 목소리를 낼 줄 알고 자신의 삶을 통하여 그리스도를 전해야 할 것이며, 교회 공동체는 그 목소리를 모아 그리스도의 평화, 그리스도의 정의가 지금 여기에서 자리 잡도록 몫을 해야 합니다. 다시는 침묵 때문에 반성하는 교회가 되어서는 안 됩니다. 과거의 잘못된 역사를 거울삼아 세상 속에서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는 교회가 되어야 합니다. 그 때는! 그 곳은! 다른 어느 때도 다른 어느 곳도 아니요. 바로 지금 여기이어야 합니다.
충고는 보초의 임무다
-강길웅신부-
군대에 이런 말이 있습니다. '작전에 실패한 지휘관은 용서받아도 보초 경계를 게을리 한 지휘관은 용서받지 못한다.'라는 것입니다. 똑같은 실수라도 작전의 실패와 보초 경계의 태만은 차이가 큽니다. 작전의 실패는 최선을 다하다가 실패한 것이지만 보초 경계의 태만은 그 자체가 이적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보초에게는 막중한 책임이 있습니다. 그 한 사람에 의해서 전체가 죽을 수도 있고 살 수도 있습니다. 따라서 보초는 항시 경계를 게을리 해서는 안되며 위험이 있을 시에는 사람들에게 알려서 재난 을 피해야 합니다. 일찍 알렸는데도 그에 대응치 못해서 사람들이 다치면 그것은 그 사람들 잘못이지만 알리질 못해서 사고를 만났다면 그것은 순전히 보초 책임입니다.
예언자는 시대의 보초입니다. 위험이 있을 때 그는 두려움 없이 세상에 알려야 합니다. 오늘 1독서에서는 에제키엘이 하느님의 보초로서 소임받은 내용을 전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모든 예언자들은 그 고달픈 직무 때문에 왕과 백성들에 게 미움을 받아 참으로 고난의 길을 걸어야만 했습니다. 그러나 보초의 임무는 아무에게나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지난 박정희 대통령 시절에 '유신만이 살길이다.'라는 구호가 있었습니다. 그때 정부 주도하의 언론 매체 때문에 대다수 국민들도 그렇게 믿었습니다. 국민투표에서도 거의 100% 가까운 지지표를 받은 것으로 기억합니다. 그런데 그때 우리 교회의 주교님과 몇몇 신부님들이 정부 정책의 부당함을 지적하면서 '유신철폐'를 요구했습니다. 그것은 실로 대단한 도전이었으며 사리를 분간하지 못 하는 무모한 행위로까지 보였습니다.
많은 천주교 신자들까지도 그때의 주교님과 신부님들을 공격하고 비난했습니다. 정부가 어련히 잘 하고 있는데 왜 교회가 정치에 간섭하느냐 라는 것이었습니다. 우리 교회에 대한 나쁜 여론이 빗발치듯했습니다. 그래서 그때 주교님 한 분과 신부님들 몇 분이 투옥되었으며 많은 고초를 겪었습니다. 그러나 세월이 한참 지난 뒤에야 우리는 그분들이 옳았으며 백성은 유신에 속았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다수는 우둔합니다. 한마디로 군중은 어리석습니다. 앞에서 누가 얼굴을 가리고 거짓말을 하면 그것이 옳은 줄 압니다. 그래서 전체 가 잘못된 길을 옳은 길인 줄 알고 착각 속에 걸어갑니다. 따라서 예언자들의 목소리를 들을 수 있는 귀를 가져야 합니다. 다시 말해 충고를 받아들이는 아량과 지혜가 있어야 합니다. 보초의 말을 듣지 않고 충고를 외면하면 그는 망합니다. 혼자만 망하는 것이 아니고 나라도 망치고 백성도 망칩니다, 그러나 충고를 듣는 것도 어렵지만 충고를 하는 것도 어렵습니다.
유럽에서 어떤 왕이 낮잠을 자는데 왕궁 뒤에 있는 방앗간의 풍차 소리 때문에 잠을 못 이루자 짜증이 생겼습니다. 화가 난 왕은 신하를 시켜 풍차를 부숴 버리라는 명령을 내렸습니다. 신하들이 달려가서 그 풍차를 부숴 버리자 방앗간 주인이 나와서 “왕은 백성의 아버지인데 자녀들이 생업에 힘쓰는 것을 기뻐하지 않고 도리어 한 몸의 평안을 위해 재산을 부숴 버리다니 이 나라의 장래가 걱정된다."며 한탄했습니다. 신하들이 이 말을 왕에게 전하자 왕은 방앗간 주인에게 정중하게 사과하고 풍차를 다시 만들어 주었습니다. 이 왕이 바로 프로이센의 프레데릭 대왕입니다.
오늘 예수께서는 충고의 말씀을 들려주시면서 교회의 말조차 듣지 않거든 그를 이방인이나 세리처럼 여기라고 하셨습니다. 누구에게나 잘못은 있을 수 있고 실수가 없을 수 없습니다. 그래서 모두에게 충고가 필요합니다. 인간은 사실 자기 자신을 잘 바라보지 못합니다. 자신보다는 옆에서 더 잘 바라볼 수 있습니다. 그래서 충고를 받을 수 있는 아량이 있어야 합니다.
그래야 큰 사람입니다. 뿐만 아니라 솔직한 충고를 해 줄 수 있는 지혜도 필요합니다. 그래야 용기있는 사람입니다. 신앙인에겐 모두 보초의 임무가 주어져 있습니다. 잘못은 지적하고 고쳐야 하는 책임과 의무가 있습니다. 남이 잘못되고 있는데도 충고하지 않고 바로 잡아주지 않는다면 그는 공범잡니다.
불이익을 당한다 해도 틀린 것은 지적하고 고쳐 줄 때 그가 참 신앙인의 길을 걸어가는 것입니다. 뿐만 아니라 훌륭한 보초가 되기 위해서는 우리가 먼저 남의 말을 잘 들을 수 있어야 합니다. 아무리 자존심이 상하고 체면이 손상된다 해도 겸손하게 받아들일 수 있어야 합니다.
“남에게 해야 할 의무를 다하십시오. 그러나 아무리 해도 다할 수 없는 의무가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의 의무입니다. "(로마 13,8) 이 사랑이 바로 보초의 의무가 될 수도 있습니다.
사람을 변화시키는 힘은 사랑입니다
-이기양신부-
이런 말 들어보셨는지요? "남이야 전봇대로 이를 쑤시건 말건 무슨 상관이냐?"한 마디로 참견하지 말라는 뜻입니다. 우리 시대 많은 사람들은 남의 일에 대해 별로 신경 쓰지 않을 뿐더러 특히 다른 사람이 나에 대해서 간섭하는 것을 좋아하지 않습니다. 이렇게 사는 우리에게 오늘 독서와 복음은 많은 것을 생각하게 합니다. 특히 1독서에서 하느님께서는 누가 악한 길을 가고 있을 때 지나쳐서 그 사람이 죽게 되었다면 경고하지 않은 사람에게 죗값을 묻겠다고 말씀하고 계시지요. 또한 예수님께서는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 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마태 18,15)하고 말씀하십니다. 부모가 자기 자식을 타일러도 말을 잘 듣지 않고 선생님이 학생을 야단치기라도 하면 봉변당하기 쉬운 시대가 요즈음 우리가 사는 시대입니다. 그런데도 하느님께서는 잘못된 길을 가는 이에게 바른 길을 가도록 충고해야 할 의무를 말씀하십니다. 어떻게 지혜롭게 바른 길을 안내할 수 있을까요? 신부가 되기 위해 공부를 하는 동안 방황했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휴학과 복학을 반복하며 2년을 지내면서 앞날이 혼미하던 그 시절, 답답한 마음에 어떤 때는 친구들과 어울려 늦게까지 이야기도 하고 술도 마시면서 1년 반을 지냈는데 어느 날 새벽 4시쯤 집에 들어갈 때였습니다. 담을 넘어 들어가니 어머니가 서 계셨습니다. "왜 담을 넘어오느냐? 벨을 누르면 언제든지 문을 열어줄 터이니 다시는 담 넘어 다니지 말거라." 어머니께서는 이 말씀만 하시고는 두말도 없이 들어가 버리셨습니다. 모든 것을 다 알아들을 수 있는 한 말씀이셨지요. 그 다음부터는 밤늦게 다니지 않았습니다. 충고라는 것은 말로 되는 것이 아니라 마음으로 되는 것이지요. 오늘 제2독서는 "남을 사랑하는 사람은 율법을 완성한 것입니다"(로마 13,8)라며 사랑이 충고의 정신임을 강조합니다. 사랑하는 마음으로 진심을 가지고 대하면 사람은 반드시 변하기 마련입니다. 프랑스의 시인이자 소설가인 빅토르 위고의 「장발장」 이야기를 아시지요? 주인공 장발장은 너무 배가 고픈 나머지 빵 한 조각을 훔쳐 먹습니다. 그리고 이 빵 한 조각 때문에 수감과 탈옥을 반복한 끝에 19년간 중노동을 선고받고 출소하지만 전과자란 낙인 때문에 어디도 몸을 두지 못하고 미움과 적개심만을 키우게 됩니다. 그러던 중 어떤 사람의 안내로 밀리에르 신부를 만나게 되고 하룻밤을 성당에서 묵게 됩니다. 신부는 장발장을 따뜻하게 맞이하고 먹을 것을 주며 위로합니다. 장발장은 처음 받는 인간적인 대접에 감격하게 되고 양심에 눈을 뜨게 됩니다. 그러나 신부가 잠든 사이 장발장은 유혹을 떨쳐버리지 못하고 은 접시를 집어 들고 도망칩니다. 경찰에 붙잡힌 장발장은 성당으로 끌려오지요. "신부님, 혹시 은 접시를 잃어버리지 않으셨습니까? 아무래도 이 사람이 성당에서 훔친 것 같아 검문하다가 잡아왔습니다." 한참을 아무 말 없이 장발장을 바라보고 있던 신부님이 대답하지요. "아닙니다. 그 접시는 내가 이 사람에게 선물로 준 것입니다." 그리고 은촛대까지 그에게 가져가라고 쥐어줍니다. 그 날 이후 장발장은 딴 사람이 됐습니다. 이름을 바꾸고 열심히 일해 백만장자가 되고 존경받는 시장이 되었습니다. 불쌍한 이웃을 돌보는, 사랑을 실천하는 사람으로 변화되지요. 충고는 남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이 아닙니다. 오늘 하느님께서는 내 이웃이 잘못된 길을 가고 있다면 사랑하는 마음으로 지혜롭게 충고해 바른 길을 갈 수 있도록 도와야 한다고 말씀하십니다. 그리하여 모두가 함께 잘 사는 공동체를 만들라는 가르침이지요. 사랑의 힘이 얼마나 위대한지를 체험하는 한 주간 되시기 바랍니다.
충고의 자세
-홍금표신부-
인간은 살아가면서 어쩔 수 없이 잘못을 저지르고 살아갈 수밖에 없는 존재이기에 잘못을 지적 받기도 하고 지적하기도 하면서 살아간다.
그러나 잘못을 지적하는 행동은 대체로 긍정적인 결과를 목표로 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항상 긍정적인 결과만 도출하는 것이 아니라 부정적인 결과를 가져오는 경우도 많이 있다고 한다. 그러기에 이를 예방하기 위해서는 몇가지 요령이 필요한데 공통적인 사항은 이렇다 한다.
먼저 잘못을 지적할 때는 가급적 다른 사람들 앞에서 지적하지 말고 아무도 모르게 그 사람에게 지적해 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잘못된 사실」보다는 「그 사람」이 더 중요하기 때문이다. 그리고 두번째는 전하는 사람의 태도가 문제가 된다고 한다. 잘못의 지적은 「애정과 사랑을 전달하는 수단」이 되어야지 자신의 만족이나 타인을 비하하기 위한 목적이 되어서는 안된다고 한다. 그리고 비판에 앞서 상대방이 가지는 장점을 일깨워주고 상대방을 칭찬해 줄 수 있을 때 잘못을 지적받는 사람은 아프지만 그것을 받아들일 수 있는 여유가 생기게 된다는 것이다. 문제는 지적하는 사람의 말의 내용이 아니라 지적하는 태도에 더 유의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덧붙여 말한다면 부부 사이에서는 사소한 실수나 잘못에 대해서는 눈감아 주고 이해해 주는 것이 좋다고 한다. 너무 사소한 일에 대해 사랑의 이름으로 너무 자주 충고하는 것은 서로를 멀어지게 하는 지름길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어리석은 자만이 노골적으로 비판한다』라는 격언처럼, 지혜로운 부부가 되기 위해서는 사소한 실수는 「그(녀)가 스스로 알도록 조금은 미루어두는 지혜」 나 아니면 「그(녀)가 느낄 수 있도록 눈감아 주는 지혜」를 가질 필요가 있는 것이다. 왜냐하면 배우자가 자신의 부족함을 감싸주는 것을 느낄 때, 부부는 편안한 마음으로 서로를 배려할 여유를 가지게 되고 서로에게 나아갈 힘을 얻을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떻든 이러한 관계에서 불변의 진리는 잘못을 했을 때, 잘못한 당사자가 그 사실을 인정할 수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힘들겠지만 잘못을 인정할 수 있다면 아마 다른 모든 문제는 부차적인 문제로 머무르게 될 것이다.
오늘 복음은 그리스도인들이 마땅히 지녀야할 몸가짐을 밝혀 놓은 부분으로 잘못한 형제의 죄를 바로잡아야 할 때, 우리 그리스도인들이 가져야 할 몇 가지 중요한 규범을 전해준다.
여기서는 먼저 형제적 충고를 할 때는 단둘이 만나서 그의 잘못을 타일러 주어야 한다고 한다. 아마 이 말씀은 충고의 목적이 무엇이어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말씀인 것이다. 즉 형제적 충고는 「그 사람」에 초점을 맞추고 그 사람에 대한 애정과 사랑이 목적이 되어야지 「죄를 드러내고 밝히는 것」이 목적이 되어서는 안된다는 의미이리라.
그리고 두번째는 개인적인 충고를 듣지 않거든 한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서 충고하라는 것이다. 물론 이러한 표현은 재판 때 복수증인을 채택하는데서 영향을 받은 표현일 수도 있지만 여기서는 형제의 잘못을 지적할 때는 객관적인 증거나 사실을 가지고 지적해야 된다는 의미인 것이다. 즉 섣부른 판단이나 독단적이고 주관적인 죄의 판단을 금지하는 말씀인 것이다.
그리고 세번째는 그래도 말을 듣지 않거든 교회에 알리고 교회의 말조차 듣지 않거든 이방인이나 세리처럼 여기라고 한다. 여기서 「이방인이나 세리처럼 여겨라」라는 표현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이방인들이나 세리들을 백안시하고 관계를 갖지 않은 것을 참조하면 되는데 이 표현이 가지고 있는 의미는 그런 사람들과는 절교하든지 아니면 교회에서 내 쫓으라는 표현이다.
물론 이 말은 오해의 소지가 있을 수 있고 때로는 사랑에 반하는 행동으로 받아들일 수도 있지만 이 표현이 강조하고자 하는 바가 절교나 파문이 아니라 잘못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행위를 강조하고 있다는 점을 이해하면 이 말이 가지는 의미를 알 수 있다.
즉 이 말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받아들이지 않는 자들과는 상종하지 말라는 의미 뿐 아니라 그리스도 공동체는 「잘못을 인정할 수 있는 사람」들만이 모이는 공동체이기에 잘못했을 때 잘못을 인정할 수 있는 사람이 되라는 의미도 함께 강조하는 표현인 것이다.
지난 8월 8일 성 도미니코 축일에 주교님이 수녀님들에게 하신 『잘못했을 때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서로 뜻이 다를 때 신자들의 말을 들을 수 있고, 화가 날 때 화를 참을 수 있는 수도자』가 되라는 말씀으로 결론을 대신하고 싶다................◆
렉시오 디비나에 따른 복음 묵상 -강지숙(한님성서연구소 수석 연구원)-
마태오 18장은 그리스도인 공동체를 위한 생활 지침을 다루고 있습니다. 공동체에는 늘 갈등과 긴장이 존재하기 마련인데, 마태오는 교회 공동체 역시 마찬가지 상황임을 전제합니다. 누구나 예외 없이 불완전한 세상에 살고 있기 때문이지만, 그렇다고 제 하고 싶은 대로 행동하고 옆 사람한테 마음 쓰지 않는 개인주의자들의 나태한 공동체로 둘 수는 없습니다. 오늘 말씀은 형제에 대한 책임을 다룹니다. 그 책임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기 위해서는 필연적인 것으로서 구속력을 지닙니다. “네 형제가 너에게 죄를 짓거든, 가서 단 둘이 만나 그를 타일러라”(18,15). 형제에게 충고하는 것은 유다교의 오랜 전통에 따른 것입니다. 믿는 이들의 공동체에서 구성원 누구 하나 잃지 않기 위해서는 오류에 빠진 형제를 회개의 길로 초대하는 것이 우선입니다. 아마도 이 구절에서 형제가 저지른 죄란 공동체 생활을 방해하는 행위일 것입니다. 그 대상이 나라면 내가 그 형제와 이야기를 나눠야 합니다. 그에게 잘못을 지적해 줄 책임이 개인에게 있습니다. 남들 이목을 피하여 단 둘이 해결하는 것이 좋습니다. 훈계조의 설교는 사람 마음을 움직일 수 없습니다. 먼저 그 형제의 입장에서 충고하되, 그의 태도가 나나 이웃에게 준 상처와 고민을 털어놓아야 합니다. “그가 네 말을 들으면 네가 그 형제를 얻은 것이다”(15절). 그와 나 사이에 관계가 형성된다면 나는 그를 되찾는 것이고, 그는 공동체의 친교를 다시 회복하는 것입니다. 비밀리에 형제에게 충고한 것이 실패로 돌아가면 그와 대화하기 위해 새로운 방법을 모색해야 합니다. “그러나 그가 네 말을 듣지 않거든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거라”(16절). 신명기의 가르침대로 둘 또는 셋이 다시 함께 대화합니다. “어떤 사람이 저지르는 모든 잘못과 관련하여, 그의 어떤 죄나 잘못이든지, 증인 한 사람만으로는 그 증언이 성립되지 못하고, 증인 둘이나 셋의 증언이 있어야 유죄가 성립된다”(신명 19,15). 코린토의 그리스도인들도 이를 실천했습니다. “모든 일은 둘이나 세 증인의 말로 확정지어야 합니다”(2코린 13,1). 주변에 도움을 청하여, 사적인 견해가 아니었음을 다른 믿을 만한 형제들의 도움으로 그를 설득해야 합니다. 증인들은 잘못을 저지른 이가 자신의 잘못을 인정하고 이웃과의 관계를 회복하도록 돕습니다. 그가 마음을 닫고 다른 사람의 말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 경우에만 공동체에게 알립니다. “그가 그들의 말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교회에 알려라”(17절). 이젠 공동체가 그를 책임집니다. 오로지 형제를 잃지 않기 위해서, 그를 공동체의 일원으로 다시 받아들이기 위해서입니다. 이쯤 되면 그가 자신의 의지대로 그러는 것인지 다른 이유가 있어서인지 드러납니다. 의도적으로 형제나 자매를 괴롭히고 공동체를 등지고자 했다면 방법이 없습니다. “교회의 말도 들으려고 하지 않거든 그를 다른 민족이나 세리처럼 여겨라”(17절). 온 공동체가 나서서 할 수 있는 데까지 해봐야겠지만 도무지 마음을 돌리지 않는다면 어쩔 수 없습니다. 전체로서의 교회는 물의를 일으킨 행위가 교회의 규정과 일치하는지 그렇지 않은지 판가름합니다. 잘못을 인정하고 공동체의 규범을 받아들인다면 공동체가 그를 얻는 것이지만, 규범 자체를 거부한다면 그는 공동체 구성원으로서의 역할을 포기해야 합니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서도 매일 것이고,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풀면 하늘에서도 풀릴 것이다”(18절). 교회가 구속력 있는 판결을 내릴 수 있는 권한은, 예수님께서 교회에 위임한 이 풀고 매는 권한에서 비롯합니다. 이 전권은 베드로뿐(16,19) 아니라 교회 전체가 받았습니다. “내가 또 진실로 너희에게 말한다. 너희 가운데 두 사람이 이 땅에서 마음을 모아 무엇이든 청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 이루어 주실 것이다”(19절). 용서하고 보류하는 권한은 기도에 뿌리를 내리고 있어야만 올바르게 발휘될 수 있습니다. 두 사람이라도 마음을 모아 죄인을 위해 기도한다면 그는 잘못을 인정하고 회개할 것입니다. 모든 것이 공동체의 기도로 가능하다는 약속입니다.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20절). 그리스도가 현존하시는 공동체는 마태오가 소망하는 공동체입니다. 참된 공동체는 그리스도께서 이 세상에서 드러나시는 장이어야 합니다. 공동체 구성원들이 예수님의 영을 자신들의 인간관계에서 실현하려고 노력한다면 그 공동체는 한 사람도 잃지 않을 겁니다. 약한 이들과 못난 이들을 돌보고 잃어버린 양을 찾아가며, 죄를 지어 자신을 잃고 이웃과의 관계도 깨진 이들을 다시 얻고자 애써야 합니다. 잃은 한 영혼을 회개하도록 하느님께서 움직여 주실 것임을 기도 안에서 믿어야 합니다. 공동체가 성장하기 위한 가장 중요한 조건은 끝없는 용서입니다. 우리의 용서는 하느님의 용서와 연결됩니다.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22절).
함께 사는 어려움이 나날이 더해 갑니다. 다들 너무도 잘나서인지 남들에게 지기 싫어하고 잘못을 인정하기도 싫어하며, 그러면서 남의 허물에는 앞 다투어 손가락질 삿대질을 해댑니다. 나만 옳고 남은 통째로 그르다는 자만이 하늘을 찌릅니다. 이런 우리에게 예수님은 용서와 화해를 권장하십니다. 내가 손가락질한 그 누구도 하느님의 눈길에서 벗어나 있지 않습니다. 아무도 내치지 않으십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굽어 살피심은 자만이 하늘을 찌르는 사람에게도 멈출 줄 모르십니다. 형제에 대한 책임은 하느님의 사랑과 형제를 진심으로 염려하는 마음이 바탕이 되어야 합니다. 참된 형제애란 다른 이가 불행에 빠지는 것을 두고 보지만 않고 그가 올바른 길로 들어서도록 온 힘을 다하는 것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20절)라면 못할 것이 없습니다.
새벽을 열며
고양이 사료를 만드는 회사에서 연례 회의를 개최하고 있었습니다. 회의에서 광고 담장자는 지난해와 180도 바뀐 캠페인을 제시하고, 마케팅 담당자는 최첨단 이론으로 무장한 야심 찬 계획을 발표했으며, 판매 담당자는 미소를 강조한 새로운 세일즈 방법을 제안했습니다.
드디어 사장이 마무리 연설을 하게 되었습니다.
“오늘 하루 종일 나는 각 부서 담당자들의 이야기를 잘 들었습니다. 과연 최선, 최고만을 모아 놨더군요. 그런데 왜 우리 회사의 실적이 다른 회사에 비해 훨씬 떨어지는 겁니까?”
일순간 회의장이 쥐 죽은 듯이 조용해졌다. 영원히 계속될 것 같던 침묵이 가시고 이윽고 뒤쪽에서 작은 목소리가 들려왔습니다.
“음... 음... 그건... 고양이들이 우리 회사 제품을 싫어하기 때문입니다.”
그렇지요. 그 회사의 실적이 떨어지는 이유는 광고, 마케팅, 판매의 문제 때문이 아니었던 것입니다. 단 한 가지. 고양이들이 이 회사의 사료를 좋아하지 않기 때문에, 잘 팔리지 않는 것이지요. 즉, 가장 근본적인 문제를 해결하지 않고서는 아무리 제품이 뛰어난들, 광고를 잘한들 아무런 소용이 없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모습은 우리들의 일상 삶 안에서도 똑같이 적용되는 것이 아닐까 싶습니다. 주님께서 가장 힘주어서 말씀하신 사랑의 계명을 실천하지 않는다면, 다른 것들을 아무리 잘한들 소용이 없다는 것이지요.
오늘 제2독서를 통해 바오로 사도는 이렇게 말씀하시지요.
“남에게 해야 할 의무를 다하십시오. 그러나 아무리해도 다할 수 없는 의무가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의 의무입니다. .... 그러므로 사랑한다는 것은 율법을 완성하는 일입니다.”
사랑의 중요성을 이렇게 강조하시는 이유는 바로, 이 세상을 현명하게 살아가는 가장 효과적인 방법이 ‘사랑’이기 때문이지요. 예수님께서도 그 사랑 때문에 이 세상에 오셨고, 이 사랑 때문에 고통을 당하시고 죽음을 당하셨습니다. 이렇게 가장 중요한 사랑을 위한 그 큰 희생이 있었기에, 2000년이 지난 지금 사람들은 예수님의 사랑을 기억하면서 조금이라도 그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 노력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세상 안에 그러한 사랑이 있기에, 희망을 가지고서 살아가게 되는 이유가 되는 것이 아닐까요?
예수님께서는 오늘 복음을 통해 이러한 말씀을 우리에게 전해 주십니다.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도 매어 있을 것이며, 땅에서 풀면 하늘에도 풀려 있을 것이다.”
지금 사랑을 하면, 하늘에서도 사랑을 느끼며 행복하게 살 수 있습니다. 하지만 지금 사랑을 하지 않으면, 하늘에서도 사랑을 느끼지 못하고 지금과 똑같이 불행한 마음만이 가득하게 될 것입니다.
가장 중요한 사랑을 실천하기 위한 노력. 그 노력이 그 어떤 것보다도 우선시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바로 나를 하늘나라에 들어가게 하는 이유가 되게 하고, 참된 기쁨의 생활을 하게 하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나의 잘못은 생각하지 않고 남의 잘못만을 바라보는 어리석은 사람이 되지 맙시다.
빠다킹 신부
형제를 얻기 위하여
-강영구신부-
+어떤 형제가 너에게 잘못한 일이 있거든 단둘이 만나서 그의 잘못을 타일러 주어라. 그가 말을 들으면 너는 형제 하나를 얻는 셈이다.
그대에게
형제 하나를 얻는 일은 어렵지 않습니다. 그의 허물과 약점, 그리고 잘못을 받아주고 용서하면 형제를 얻을 수 있습니다. 자신의 나약함 때문에 잘못을 저지른 사람은 양심의 가책과 회한(悔恨)으로 괴로워합니다. 괴로워하는 그에게 너그럽고 따뜻한 마음으로 다가가 그 잘못을 받아주고 용서하면 그는 용서하는 사람의 손을 잡고 나락의 골짜기에서 빠져나와 그의 형제가 됩니다. 용서하는 사람은 상처받은 사람을 치유하는 사람이 되고 용서받는 사람은 허물과 잘못을 씻고 새 사람이 되어 거듭 태어납니다.
형제 하나를 잃는 일도 쉽습니다. 그의 허물과 약점을 들추어내고 그의 잘못을 비난하고 단죄하면 형제 하나를 잃게 됩니다. 잘못을 저질러서 후회하고 괴로워하는 형제를 비난하고 헐뜯는 일은 잘못으로 상처 난 형제의 아픈 곳을 들쑤시는 행위와 같습니다. 허물과 나약함으로 걸려 넘어진 형제를 일으켜 세우지 못하고 돌멩이를 던지거나 짓밟아버리면 그는 영영 일어나지 못할 수도 있습니다.
정직한 눈으로 자신을 바라보며 나도 용서받아야 할 죄인이라는 사실을 아는 사람이 용서하는 사람이 됩니다. 당신의 따듯한 손을 잡고 이웃과 형제들이 일어설 수 있다면 당신은 행복한 사람입니다.(一明)
교회의 말조차 듣지 않거든 그를 이방인이나 세리처럼 여겨라.
-서영남(인천 민들레 국숫집) -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하라고 하신 예수께서 오늘 복음에서는 한 번, 두 번 그리고 세번째나 타일렀는데 돌아오지 않으면 교회에서 내쫓으라고 하십니다. 재현씨가 청송교도소에 있을 때 최고수 형제의 부탁으로 처음 만났습니다. 그때부터 청송 1보호 감호소를 거쳐 2보호 감호소에서 감호를 살고 나올 때까지 부족하지만 재현씨의 옥바라지를 했습니다. 매달 면회를 다녔고, 필요한 영치금을 나눴습니다. 출소한 재현씨가 재범할 가능성이 보였습니다. 서둘러 민들레 국숫집 2층에서 살도록 데려왔습니다. 재현씨가 한번 해보고 싶어하는 주식투자를 할 수 있도록 없는 돈을 빌려서 오백만 원을 만들어 주었습니다. 주식시장이 섰을 때는 국숫집 주방으로 내려오지 못하도록 했습니다. 열심히 자기 일을 잘하는 줄 알았습니다. 그런데 아홉 달이 지났을 때 우연히 재현씨가 한 달 만에 투자한 돈을 다 털어먹고 일하는 척하며 여덟 달이나 지내온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민들레 국숫집이 텔레비전에 방영된 후에 찾아온 자매님들에게 거짓말을 하는 것도 알게 되었습니다. 조용히 민들레 국숫집을 떠나 달라고 했습니다. 빌려준 돈을 갚을 생각이 없다면 갚지 않아도 좋다고 했습니다. 그리고 민들레 국숫집과 관련된 이야기를 재현씨 블로그에는 더이상 올리지 말고 지워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겠다고 했습니다. 고시원에 방을 하나 얻을 수 있도록 작은 돈이나마 주어 보냈습니다. 그런데 블로그에 계속 글을 올립니다. 재현씨만 알아볼 수 있도록 경고의 글을 보냈지만 계속 올렸습니다. 재현씨에게 선의의 사람들이 더이상 피해를 보지 않도록 제 미니홈피에 재현씨의 이야기를 공개했습니다. 사적인 일이라면 일곱 번씩 일흔 번이라도 용서해야 합니다. 그러나 공적인 일이 되었을 때는 오늘 예수님의 말씀처럼 용서해야 합니다. 용서란 우리 자신이 죄인임을 느낄 때 가능한 것이라 생각합니다. 용서란 하느님 앞에서 사람은 누구나 유한한 존재요, 부족한 죄인임을 알고 그럼에도 하느님은 나를 사랑하신다는 믿음에서 출발해야 합니다. 재현씨가 재범하지 않고 잘 살아가면 좋겠습니다.
함께 살이
-조성풍 신부-
살아가면서 다른 사람들을 위해 이런저런 지향으로 기도를 많이 하게 됩니다. 오늘은 각자 자신을 위해 기도하면 어떨까 싶습니다. 다른 사람과 함께하기 위해 먼저 자신을 잘 알 수 있도록 기도했으면 합니다. 자신이 지닌 장점을 깨달을 수 있도록 기도했으면 합니다. 장점이야말로 다른 사람을 위해 내놓을 수 있는 하느님의 선물이기 때문입니다. 권정생 선생의 <강아지똥>을 각색한 에니매이션 작품을 본 적이 있습니다. 시골길 담벼락 밑에 흰둥이가 누고 간 강아지똥은 자신을 더럽다고 피하는 참새 앞에서 부끄러워 울음을 터뜨립니다. 더구나 어미 닭과 병아리들이 먹을 수도 없는 쓸모없는 똥이라고 따돌리자, ‘하느님은 왜 하필이면 날 똥으로 만드셨을까?’ 하며 슬퍼합니다. 그런 강아지똥은 어느 날 민들레로부터 놀라운 얘기를 듣습니다. 아름다운 민들레꽃을 피우기 위해서는 강아지똥의 도움이 꼭 필요하다는 소식이었습니다. 자신을 한없이 낮게만 보아왔던 강아지똥은 자신이 지닌 소중한 보물을 깨달을 수 있었습니다. 오늘 자신 안의 소중한 장점을 깨닫도록 청해보았으면 합니다. 그리고 그 소중한 능력을 이웃과 나누며 함께 살아갈 수 있으면 좋겠습니다.
주님의 사랑과 용서를 전하는 교회를 이루자.
-경규봉 신부-
어떤 형제가 나에게 잘못하며 나를 멸시했을 때, 그를 어떻게 대할까?
주님께서는 먼저 그와 단둘이 만나서 그의 잘못을 타이르라고 말씀하신다. 그를 보호하기 위하여, 또한 잘못을 고백하고 용서하기 쉽도록 단둘이 만나서 권고하라고 말씀하신다. 그의 죄를 심판하거나 책망하기 위함이 아니다. ‘무엇이 죄인가?’에 대해 설명하여 그 형제의 잘못을 정당하게 지적하여 고치도록 하기 위함이다(1디모 5,20). 그로 하여금 자신의 죄를 깨닫도록 하기 위함이다. 그를 판단하거나 단죄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를 참다운 형제로 다시 얻기 위함이다(1고린 9,19-22). 이것이 바로 죄를 지은 형제와의 첫 화해 작업이다(레위 19,17).
사실 개인적으로 만나서 책망을 듣는 경우 이를 순순히 받아들이기는 매우 힘들다. 그렇지만 사랑에서 우러나오는 겸손한 마음으로 형제의 잘못을 지적하고 고치도록 권고하는 것은 더욱 더 어렵다. 그러기 위해서는 인내와 지혜, 용기가 필요하며 무엇보다도 그를 진실로 사랑하고 아끼는 마음이 요구된다. 사랑의 마음 없이는 다른 이들의 잘못을 지적하고 고치도록 권고하기 어렵다. 하지만 그렇게 함으로써 좋은 관계를 회복하고 그가 공동체의 일원으로 새롭게 살 수 있다면 그러한 노력은 꼭 필요할 뿐만 아니라 그리스도인으로서 마땅히 해야 하는 사랑의 의무이기도 하다(루가 17,3-4; 2테살 3,14-15; 야고 5,19-20).
그런데 그 형제가 말을 신중히 듣지 않고 오히려 방관하는 자세로 건성으로 듣거나 완전히 무시해 버린다면 어떻게 할까? 주님께서는 한두 사람과 함께 가서 다시 한 번 사랑의 권유를 하고, 그래도 듣지 않으면 마지막으로 교회가 공식적으로 개입하여 그 형제를 위해 권고하라고 말씀하신다. 교회는 이 땅에서 하느님 나라를 보여주는 공동체로서 진리를 전하는 터전이기 때문이다. 교회는 사람들에게 참다운 진리를 전해야 하며, 사람들로 하여금 진리의 길을 걷도록 해야 하기 때문이다. 나아가 교회는 모든 신앙인들의 거룩한 친교의 장이며, 하느님의 사랑을 드러내고 전달하는 장이다. 그러므로 모든 이들을 하느님의 사랑으로 감싸며 그와 하나가 되어 그를 하느님께로 인도해 나아가야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교회의 말조차 듣지 않거든 그를 이방인이나 세리처럼 여기라고 주님께서는 말씀하신다. 이방인과 세리는 이스라엘 사회에서 회당이나 기타 모임에 들어올 수 없는 사람들, 즉 공동체 밖의 사람을 가리키는 표현이다. 이는 각 교우가 죄를 지은 형제에게 대하는 태도를 뜻한다. 즉 교회가 그 사람을 이방인과 세리처럼 정죄하고 교회에서 벌하라는 뜻이 아니다. 세 번에 걸쳐 권고했음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잘못을 인정하지 않고 회개하지 않는 사람에게 교우들은 교회 차원에서의 친교와 교류를 금하고, 그와 더 이상 접촉하지 말라는 뜻이다. 그와 접촉하지 말라는 까닭은 공동체로부터 소외시킴으로써 다시 한 번 그에게 회개와 반성의 기회를 주는데 그 목적이 있다. 그가 교회를 버림으로써 하느님을 버릴지라도 결코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에서 제외되지는 않는다. 교회가 비록 그를 소외시킬지라도 그것은 그를 단죄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로 하여금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의 품으로 돌아오도록 하기 위함이다.
또한 주님께서는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도 매여 있을 것이며 땅에서 풀면 하늘에도 풀려 있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신다. 주님께서는 베드로에게 주셨던 맺고 푸는 권한(마태 16,19)을 다시 한 번 교회에 주신다. 교회는 지상에서 하느님의 사랑과 자비의 전달자이며, 교회가 구원의 열쇠를 쥐고 있음을 다시 한 번 확인시키신 것이다. 교회로부터 소외됨은 구원에 이르지 못함을 뜻하므로 교회의 가르침을 따르도록 말씀하시는 것이다. 비록 그 교회가 아주 보잘것없는 것처럼 보여도, 아주 적은 수효의 교회일지라도 그 교회에는 주님께서 함께 계시며 하느님께서는 그 교회를 인정하시므로, 결코 등한시하지 말라는 말씀이기도 하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너희 중의 두 사람이 이 세상에서 마음을 모아 구하면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께서는 무슨 일이든 다 들어주실 것이다.”라고 말씀하신다. 두 사람이란 가장 적은 수효의 모임이다. 그처럼 적은 모임이지만 이들이 마음의 일치와 조화를 이루어 겸손히 기도한다면 아버지께서는 이를 교회의 간구로 받아들이신다. 뿐만 아니라 교회가 지닌 특권에 합당하게 응답해 주신다. 사람들은 수효와 양을 보고 판단하지만, 하느님께서는 그들의 마음을 보신다. 서로 합심하여 하나가 되는 마음, 하느님의 뜻을 받아들이는 겸손한 마음을 보신다. 그래서 주님께서는 “아버지와 내가 하나인 것처럼 이 사람들도 하나가 되게 하여주십시오.”(요한 17,11)라고 기도하셨다. 아무리 적은 수효의 교회라도 마음이 하나가 된 그 곳에 주님께서는 언제나 함께 계신다. 물론 이러한 일치는 인간의 힘만으로 부족하고 성령께서 함께 하셔야만 가능하다. 두 사람이 마음을 합하면 성령께서 그들과 함께 계셔서 그들이 원하는 바를 하느님의 뜻에 일치되게 하신다.
나아가 주님께서는 “단 두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기 때문이다.”라고 말씀하신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사람이 둘이나 셋이 모인 곳에 주님께서 함께 계신다는 말씀이다. 둘이나 셋이 모여 예수님의 가르침과 뜻을 서로 나누는 그 곳에 주님께서 함께 계신다는 말씀이다. 예수님을 신앙의 궁극적 대상으로 삼기를 원하는 사람들이 모인 곳에는 주님께서 함께 계신다는 말씀이다. 예수님께서는 “나는 하늘과 땅의 모든 권한을 받았다.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이 세상 모든 사람들을 내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그들에게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명한 모든 것을 지키도록 가르쳐라. 내가 세상 끝까지 항상 너희와 함께 있겠다.”(마태 28,18-20)라고 말씀하셨다. 주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며 가르치는 그곳 - 교회에 주님께는 항상 함께 계신다.
그러므로 오늘 주님께서 함께 계시는 사람이 되자. 마음속에 주님의 사랑을 가득 담은 사람이 되자. 마음이 겸손하고 온유하여 주님의 가르침을 충실히 따르고, 그럼으로써 주님의 가르침을 전하며, 주님의 사랑과 용서를 전하는 교회를 이루자.
잘못한 형제 구하기
-손희송 신부-
제가 군복무 시절에 겪었던 일입니다. 어느 날 내무반의 고참병 한 사람이 불쑥 이런 말을 했습니다. “너 신부된다고 했지? 나도 누나가 성당에 다녀서 천주교에 관심을 가졌었어. 그런데 한 번은 주일에 누나와 함께 성당에 갔는데, 미사 끝나고 나오니까 신발장에 벗어 두었던 내 신발이 없어진 거야. 새 신발이었는데 말이야. 화가 나서 성당에 다시 안 나갔어. 성당에 도둑이 있으면 어떻게 하냐?”
교회는 세례를 받고 새롭게 태어나 착하게 살겠다고 결심한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입니다만, 그 안에서 죄와 잘못이 사라지지 않고 있습니다. 이런 사실은 믿는 이들에게는 신앙의 걸림돌이 되고, 믿지 않은 이들에게는 교회를 비난하는 구실이 됩니다. 사실 신자들이 범하는 죄와 잘못으로 인한 문제는 교회가 처음부터 안고 있었던 문제입니다. 초대교회에서도 심각하게 잘못을 저지르는 신자들 때문에 적지 않게 고심했던 것 같습니다(1고린 5,1-13; 갈라 6,1; 2데살 3,14-15 참조).
이렇게 교회 내의 죄와 잘못은 지속적으로 어려움을 안겨 주는데, 오늘 복음은 바로 이 문제와 관련해서 가르침을 줍니다. 이 가르침에 따르면, 잘못한 이들에 대한 대처는 세 단계로 이루어집니다. 여기에는 죄는 미워하되 사람은 미워하지 않는 ‘사람 존중’의 정신이 배어 있습니다.
첫 번째 단계는 잘못한 형제를 일대일로 만나서 그 잘못을 타일러 주는 것입니다. 보통은 한 사람의 잘못을 직접 일깨워 주기보다는 뒤에서 흉을 보고 주위에 소문을 내는데, 이런 경우 잘못의 당사자는 회개는커녕 억하심정으로 더욱 빗나가는 경우가 많습니다. 바로 이런 이유에서 예수님은 먼저 일대일의 대화를 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일대일의 대화가 효과를 보지 못하면 두 번째 단계로 넘어갑니다. 한두 사람 더 데리고 가서 다시 한 번 설득하는 것입니다. 혼자보다는 여러 사람이 같은 목소리로 얘기하면 귀담아 듣는 경우가 많습니다. 잘못한 이가 회개할 수 있도록 최대한 기회를 주는 조처라고 하겠습니다.
이것마저도 실패로 끝나면 세 번째 단계로 넘어갑니다. 교회 공동체에 잘못한 이를 알리는 것입니다. 예수님은 그 사람이 교회의 말조차 듣지 않는다면 교회 밖에 있는 사람으로 여기라고 하십니다. 교회 안에는 주님이 거하시기 때문에 교회의 말을 듣지 않는다면 주님과 교회를 저버리는 것입니다.
신앙인이 큰 잘못을 하면 당사자의 구원이 위협받는 것은 물론 교회의 신뢰성마저도 손상될 수 있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그 잘못을 묵인해서는 안 되고, “그 죄인에게 마음을 바로잡아 버릇을 고치라고 타일러”(제1독서) 주어야 합니다. 하지만 이 훈계는 “율법을 완성하는 사랑의 정신”(제2독서) 안에서 형제를 구하는 것을 목표로 이루어져야 할 것입니다. 왜냐하면 하느님은 죄인의 죽음이 아니라 죄인이 회개하여 살기를 원하시기 때문입니다.
사랑의 실천은 나눔에서 시작
-박성민신부 -
예수님께서는 자나깨나 불조심이 아니라, 사랑의 길을 가르치시고 하느님과 이웃에 관한 애덕 실천의 방법을 우리에게 가르쳐 주십니다. 오늘도 변함 없이 사랑의 여러 가지 방법을 가르치시는데 여념이 없습니다. ?어떤 형제가 당신에게 잘못한 일이 있거든 단 둘이 만나서 그의 잘못을 타일러 주시오? 하시며, 형제적 권고 혹은 형제적 견책이 중요하다고 말씀하고 계십니다.
남이야 어떻든 간에 무슨 상관이야 하는 사고방식이나, 남이야 전봇대로 이를 쑤신들 무슨 참견이야 하는 생각은 사랑의 실천과는 거리가 먼 인사일 것입니다. 사사건건 남의 일에 참견하려는 몰상식한 수다쟁이 앞에서나 통하는 말투일지언정 화해와 평화의 길목에서는 영원히 사라져야 할 말버릇일 것입니다.
여러분은 우리 형제 중 누가 잘못하였을 적에 그저 비웃는 낯으로 방관해서는 안되겠습니다. 그는 우리 형제요, 같은 하느님 아버지의 자녀들입니다. 그의 잘못은 나의 잘못이며 공동체적인 의식으로 하느님 앞에서는 모두가 책임이 있음을 알아야 하겠습니다.
우리는 군대라는 고립된 생활을 하고 있습니다. 고립된 생활을 하다보면 나 하나만 잘하면 되겠지라는 생각을 많이 하게됩니다. 사고방식을 멀리 추방할 때 사랑의 삶은 시작됩니다. 예수님을 충실히 따르고 봉사하겠다고 굳게 다짐하고 선언한 우리는 진실하게, 올바르게, 의롭게 착한 것을 항상 생각하고 우리의 삶 속에서 실천으로 옮기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형제들이 잘못할 적에는 사랑의 정신과 아껴 주는 마음으로 순순히 타일러 주어야 하겠습니다. 따스한 봄볕에 얼어붙은 얼음이 살살 녹듯이 그 완고하고도 괴팍한 이웃 사람의 마음이 고요함과 평화를 찾는다면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과 같이 ?형제 하나를 얻은 것입니다?(마태 18,15).
일보 전진하여 우리는 하느님을 사랑하고, 이웃들과 사랑을 나눔으로써 일치의 아름다운 모습을 만들어가야 하겠습니다.
교회는 이웃을 용서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 서공석 신부 -
오늘 복음은 교회 공동체 생활에서 이웃이 자기에게 잘못을 저질렀을 때, 어떻게 처신해야 하는 지를 말합니다. ‘어떤 형제가 너에게 잘못한 일이 있거든, 먼저 단둘이 만나서 타일러 주고, 그것을 듣지 않으면, 한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서 타일러보고, 그래도 듣지 않거든 교회에 알리고, 교회의 말도 듣지 않으면, 이방인이나 세리처럼 생각하라’는 말씀입니다. 이것은 구약성서 레위서의 말씀을 마태오복음 공동체가 해석한 것입니다. 레위서는 이렇게 말합니다. “형제를 미워하는 마음을 품지 말라. 이웃의 잘못을 서슴지 말고 타일러 주어야 한다...동족에게 앙심을 품어 원수를 갚지 말라”(19,17-18). 비록 자기에게 잘못을 저지른 형제일지라도 미워하지 말고 타일러 주고 보복하지 말라는 말입니다.
마태오복음서를 집필한 공동체는 유대교 출신 그리스도인들로 구성되어 있었습니다. 따라서 그들은 예수님이 가르치신 이웃 사랑의 실천 규범을 유대교 율법서를 참고하여 구체화하였습니다. 그들은 자기들의 그런 노력을 통하여 교회 안에 성령으로 살아 계신 예수님이 말씀하신다고 믿었습니다. 오늘의 말씀은 그 시대 마태오복음 공동체가 이미 실천하던 바를 요약한 것입니다. 이 말씀을 그대로 오늘 우리를 위한 행동 지침으로 삼을 수는 없습니다. 시대가 다르면 사람들의 행동 방식도 달라집니다.
옛날 사람들은 서로 타일러 주는 일이 많았습니다. 그것은 하나의 미덕이고 사랑의 표시였습니다. ‘좋은 약이 입에 쓰고, 좋은 말이 귀에 거슬린다’는 격언이 통용되던 시대입니다. 옛날에는 할아버지나 할머니가 손자들을 데리고 앉아 잘 타일렀습니다. 그리고 아이들은 어른들의 말씀을 귀담아 듣고 배웠습니다. 그러나 오늘은 그런 현상이 사라졌습니다. 현대인은 타이르는 행위를 불필요한 간섭으로 생각하고, 충고를 불쾌하게 생각합니다. 서로 각별히 신뢰하는 사이가 아니면, 충고는 인간의 자율성을 손상시킨다고 생각합니다. 각자 자기의 자유를 소중히 생각하는 오늘입니다. 따라서 지금부터 2000년 전 마태오복음 공동체에서는 사랑의 실천이었던 충고가 오늘은 남의 자율성을 침해하는 일이 되고, 이웃을 불쾌하게 만드는 몰지각한 일이 될 수 있습니다.
오늘의 복음에서 우리가 유의해서 들어야 하는 것은 그것이 표현하고 있는, 그 시대 사람들의 이웃을 위하는 마음입니다. 오늘 복음은 비록 자기에게 피해를 준 이웃일지라도, 외면하거나 미워하지 말고, 형제자매와 같이 대할 수 있도록 최선을 다하라고 말합니다. 이웃이 우리에게 잘못한 경우에 먼저 둘이 만나서 타이르고, 그것으로 관계가 회복되지 않으면, 한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서 타이르고, 그래도 되지 않으면 교회에 알리라고 말합니다. 공동체에 호소해서 관계회복을 꾀하라는 말입니다. 그러나 그런 시도들이 다 실패하면, 그를 이방인이나 세리와 같이 생각하라는 것입니다. 결국 자기에게 피해를 준 사람에게도 그가 잘못 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하라는 뜻이고, 그러고도 그 사람이 과거의 좋았던 관계를 회복하지 못하면, 이교도나 세리에게 하듯이, 그를 건드리지 말고 가만히 두라는 말씀입니다. 그 시대 유대인들에게 이교도나 세리는 말살의 대상이 아니었습니다. 그들은 일정한 거리를 두고 함께 살아야 하는 사람들이었습니다.
사실 우리가 이웃을 용서한다고 생각해도, 그 용서가 아무런 효과를 내지 못하는 경우들이 있습니다. 나는 내가 피해자라고 생각하고 있지만, 나에게 피해를 준 사람은 자기가 피해자라고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내가 좋은 의도를 가졌다고 항상 좋은 결과가 따라오지 않는 것이 사람과 사람 사이의 일입니다. 내가 용서한다고 생각하여도 상대방의 상처가 치유되도록 기다릴 줄도 알아야 합니다. 내 마음대로 할 수 없는 이웃입니다. 이웃 사랑은 먼저 이웃을 있는 그대로 존중하고 이해하려고 노력하는 데에 있습니다.
‘단 두세 사람이라도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함께 있다’는 말씀도 오늘 복음에 있었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 사람들은 예수님이 하신 실천을 합니다. 예수님의 실천이 있는 곳에 예수님은 살아 계신다고 그들은 믿었습니다. 예수님의 실천은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었습니다. 요한복음서가 전하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아버지께서 나를 사랑하신 것처럼 나도 그대들을 사랑했습니다. 내 사랑 안에 머무시오”(15,9). 예수님은 병자들, 세리들, 그리고 죄인들과 같은, 유대교 공동체가 버린 사람들과 함께 어울리셨습니다. 그들에게 병을 낫게 해 주고, 하느님이 그들을 버리지 않으셨다는 사실을 그들이 깨닫도록 노력하셨습니다. 그분은 그 시대 유대인 사회의 관행과는 다르게 행동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 사람들도 같은 실천을 합니다.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 고독한 사람들, 절망에 빠진 사람들을 위한 우리의 노력 안에 예수님은 살아 계십니다.
교회는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인 공동체입니다. 교회는 일반 사회단체와 같이 재물을 가진 사람들이 행세하고 갖지 못한 사람들이 위축되는 곳이 아닙니다. 높은 사람이 명령하고 낮은 사람이 순종하는 공동체가 아닙니다. 교회는 자발적으로 섬기는 사람들이 모인 공동체입니다. 예수님은 “섬김을 받으러 온 것이 아니라 섬기러 왔다”(마르 10,45)고 말씀하셨습니다. 당신의 이름으로 모인 사람들도 당신과 같이 섬기면서 살 것을 원하셨습니다. “크게 되고자 하는 사람은 섬기는 사람이 되어야 한다”(10,43)고 가르치셨습니다. 자발적 섬김이 지배하는 집단이라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이름으로 모였으면 섬김이 보입니다.
교회는 이웃을 용서하고 사랑하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예수님에게서 용서와 사랑을 배워서 자발적으로 실천하면서 사는 사람들의 모임입니다. 교회는 섬김을 주축으로 구성되고 조직되어야 합니다. 교회 안에 서열이 있다면, 그것은 섬김의 실천으로 말미암은 서열입니다. “첫째가 되고자 하는 사람은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10,44)는 예수님의 말씀입니다. 교회에는 섬김이 아닌 다른 것으로 사람의 우열을 논할 수 없습니다. 예수님도 군림하지 않으셨습니다. 용서와 사랑과 섬김이 있을 때 교회가 있고, 부활하신 예수님을 역사 안에 살아 계시게 하는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모인 공동체가 있습니다.
교회의 예언자적 사명
-유영봉 신부-
초 점 : "네가 만일 악한 자에게 일러주지 않으면 악한 이의 멸망은 곧 너의 책임이다." 현대의 극단적인 이기주의는 타(他)의 어떤 간섭도 허용치 않으려 한다. 그러나 그리스도 신자는 말씀의 빛으로 심고, 뽑고, 세우고, 무너뜨릴 예언자적 사명을 다함으로 세상을 변화시켜야 할 것이다.
1. 내 인생을 내 멋대로 사는데, 왜? '근대화'란 다른 말로 하면 전체를 위해 개인은 희생되어도 무방하다는 가치체계에서 각 개인의 존엄성이 크게 신장되는 방향으로의 변화라고도 할 수 있다. 그래서 요즘엔 자신의 행동에 대해 다른 사람의 어떤 간섭이나 비판도 받아들이지 않으려 한다. 한쪽에선 최소한의 생존에 필요한 것마저 갖지 못해 굶주리는데 부유층의 자녀들은 한 달 용돈이 2-3백 만원이라고 서슴없이 이야기한다. 이들은 "누가 자기들 한데 돈 달라고 했나? 내 돈 내가 쓰는데 괜히 야단이야!" 하는 태도를 보인다. 한마디로 "내 인생을 내 멋대로 사는데 웬 간섭이냐 !" 는 식이다. 이런 태도는 개인적인 차원에서 뿐 아니라, 집단이기주의나, 국수주의에서도 나타난다. 오늘 제 1독서의 "네가 그 죄인에게 버릇을 고치라고 일러주지 않았을 경우..... 그 사람이 죽은 책임을 나는 너에게 지우리라"(에제 33,8) 하신 말씀은, 타인과 세상의 악에 대해 우리가 취해야 할 자세를 깨우쳐 준다고 하겠다. 세상을 그리스도 안에 새롭게 변화시키기 위해 먼저 나 스스로 정의와 사랑을 살고, 악을 악이라고 외쳐야 할, 예언자적 사명이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있음을 명심해야 한다.
2.평신도 사도직이란? 세례로 그리스도의 제자가 된 이들은 모두 하느님의 백성이다. 그리고 하느님 백성 중 성직자, 수도자 신분에 들지 않는 모든 신자들이 평신도들이다. 공의회 문헌에는 "교회 창립의 목적은 하느님 아버지의 영광을 위하여 그리스도 왕국을 전 세계에 펴고 모든 사람을 구원에 참여케 하며, 또한 그들을 통하여 전 세계를 그리스도께로 향하게 하는 일이다. 이 목적을 위한 신비체의 활동을 모두 '사도직'이라고 부른다(평신도 교령2항) 라고 교회의 사도직을 설명하고 있다. 교회는 그 자체가 그리스도 예수와 성령의 파견에 그 뿌리를 두고 있으며, 모든 신자들도 세상에 파견된 자들임을 잊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세례와 견진을 통해 평신도 사도직을 부여받았다. 평신도 사도직에는 사제직, 예언직, 왕직의 세 가지가 있다는 것을 우리는 잘 알고 있다. 오늘의 말씀은 특별히 우리의 예언직에 대해 일깨워 준다고 하겠다. "너 사람아, 내가 너를 이스라엘 백성의 보초로 세운다."(에제33,7) 그렇다. 그리스도 신자는 이 세상을 악의 세력에서 지키고 하느님의 뜻을 전할 파수꾼으로 세워진 자들이다. 교회는 자신의 이 사명을 수행함으로 "현세 질서에 복음정신을 침투시켜 현세 질서를 완성하게 된다"(평신도 교령 5항).
3. 교회의 예언직 '예언자'(propheta)라는 말의 참뜻은 '미래의 일을 알아맞히는 사람' , 또는 '점쟁이라기보다,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 전하는 사람" 즉 '하느님의 대변자' 라고 하는 것이 더 맞는 표현일 것이다. 마치 손전등을 들고 방 구석구석을 비추어 보면서 모든 것이 제자리에 놓여 있는지 살펴 제대로 정돈하듯이, 우리는 세상 사물에 대해 성서와 교회의 가르침에 비추어서 잘 잘못을 가려 어느 것이 하느님의 뜻인지를 밝힐 의무가 있다. 이것이 복음의 빛으로 세상을 비추는 것이다. 그리하여 '뽑아버리고, 무너뜨리고, 세우고, 심을 것'을 가려서 그 사명을 다해야 한다. 세상의 잘 잘못을 구별하여 세우고 '예'할 것은 '예'하고 '아니오'할 것은 '아니오'라고 분명히 하는 것이 예언자의 사명이다. 예언자의 길은 수난의 길이며 많은 불이익을 감수해야 한다. 어떤 사람들은 교회가 정치 사회적인 현실 문제에 대해 개입하며 발언하는 것을 월권행위라고 생각하기도 한다. 그러나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다. 일찍이 독일의 신학자 본 훼프는 "미친 운전사가 차를 몰고 질주 할 때, 그 운전사를 차에서 끄집어내리지 않고 그 차에 치인 사람을 돌보며 치료만 하는 것은 교회가 제 사명을 다하지 못하는 것이다" 라고 하였다. 제도적이거나 구조적인 악에 대해 방관할 수 없음을 지적한 것이다. 어떤 젊은이들은 마더 데례사의 구호 활동에 대해 "인도 사회의 구조적인 부조리를 외면한 채 그 부조리한 구조의 희생자들만 돌보는 것은 사랑의 의무를 다하는 것인가?" 라고 질문을 하기도 한다. 한번 음미해 볼 말이다. 물론 불의와 부정에 대한 가장 힘있는 항변 그것은 나 스스로 진리 편에 서서 이웃의 아픔을 나누며 온 몸으로 사랑을 사는 것이다. 그러나 "아무리 해도 다할 수 없는 의무, 그것은 사랑의 의무입니다"(제2독서) 하신 말씀을 되새기며 불의와 부정과 제도적 부조리를 고발하며 불의를 불의라고 외쳐야 할 우리의 예언자적 사명을 다하고 있는지 깊이 반성해 보아야 할 것이다.
사랑을 배경으로 한 형제적 충고
-양승국 신부 -
수감된 형제들, 그리고 소년원 아이들을 만날 때마다 절실히 다가오는 한 가지 느낌이 있습니다. '저렇게 정이 많고 마음씨 착한 사람들이 도대체 무슨 이유로…' 하는 느낌입니다. '저렇게 순박하고 의리있는 아이들이 과연 무슨 일로…' 하고 의구심을 가질 때가 많습니다. 그래서 더욱 안타깝지요. 다들 어찌 그리 단순한지 모릅니다. 다들 어찌 그리 잘 생겼고 또 어찌 그리 마음 씀씀이가 관대한지 모릅니다. 그러나 단 한 가지 '욱' 하는 마음을 버리지 못해 스스로 무덤을 파는 것입니다.
담장 바깥에 있는 우리 역시 별반 다를 바가 없다고 생각합니다. 너나 할 것 없이 공통적으로 안고 있는 성격적 결함 중 하나가 한순간을 견디지 못하는 것입니다. 그렇게도 스스로를 잘 조절해 나가다가도 단 한번에 점수를 다 깎아먹습니다. 평소에 그리도 여유있어 보이고 유유자적하던 우리지만 단 한순간에 내적 상태가 돌변하는 체험을 하지요. 딱 1분만 참았어도 되는데 그 순간을 못 넘깁니다.
한번 비위가 상하고 마음이 틀어지면 완전히 다른 사람이 됩니다. 속이 부글부글 끓기 시작하면서 얼굴은 즉시 싸늘한 냉기를 띱니다. 머리 위에서는 연기가 무럭무럭 나는 느낌입니다. 라면이라도 끓일 수 있을 정도로 열을 받습니다.
그런 상태는 분명히 비정상 상태이지요. 그런 상태에서는 지능지수가 현저하게 떨어진다고 합니다. 그래서 어떤 일을 저지를지 모르게 됩니다. 그런 상황에서는 무조건 입 꼭 다물고 시간을 버는 노력이 필요한데, 그걸 또 우리는 못합니다. 그리고는 결국 절대로 해서는 안 될 말, 주워 담지 못할 말을 내뱉게 됩니다. 주변에 누가 있건 없건 상관하지 않습니다. 평소에 따놓은 점수를 완전히 다 까먹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이런 우리 인간들의 약점을 잘 간파하고 계셨기에 '뚜껑이 왕창 열리는' 긴박한 상황 앞에서도 한 박자를 늦출 것을 요구하십니다. 아무리 화가 나더라도 우선 마음을 가라앉히고 차근차근 논리적, 단계적, 이성적으로 접근할 것을 요청하고 계십니다.
아무리 나를 핍박하는 사람, 내게 몹쓸 말을 하는 사람, 기본이 안 된 사람, 눈꼴사나운 사람, 덜 되먹은 사람, 한마디로 '싸가지 없는' 사람이라 할지라도 분개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일단 목소리부터 가다듬어야겠지요. 심호흡을 몇번 하면서 나름대로 생각을 정리하면 좋습니다. 최대한 감정이 섞이지 않은 목소리로 대화를 시작하면 좋습니다. 그것도 조용히, 그리고 개인적으로 말입니다.
그리고 차분하게, 그러나 솔직한 마음을 전달하는 것입니다. 정말 이 순간 용기가 필요한 순간이지요. 상황을 피하지 않고 직면할 수 있는 용기, 참으로 소중한 덕입니다.
이웃의 부족함이나 약점을 회피하지 않고 당당하게 직면하는 노력, 이보다 더 큰 형제애는 또 없다고 생각합니다. 이웃을 진정으로 사랑하는 사람은 이웃이 지닌 한계를(특히 스스로 바라보지 못하는 취약점) 정확히 바라볼 수 있도록 지적해주는 사람입니다.
그러나 형제에게 충고하는 과정에서 미성숙한 대화기법이나 대화 문화로 많은 경우 참담한 결과를 초래할 때가 있습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성숙한 대화 문화, 바로 예수님의 대화기법이 필요한 것입니다. 논리적이면서도 단계적, 이성적 접근, 진정 이웃을 사랑하는 마음을 배경으로 한 형제적 충고가 필요한 것입니다.
공동생활에서 상처는 필연적이라고 보면 정답입니다. 괴로운 것이 상처지만 결국 상처를 통하지 않고서는 서로 성장할 수 있는 기회를 잡기가 어려운 것도 사실입니다. 이런 측면에서 공동체에서 받는 상처는 상호성장의 장입니다. 역설적이게도 상처는 상호 성화를 실현하는 장입니다. 성령께서는 상처와 고통을 당신 활동 장소로 선택하십니다.
돈보스코 성인의 당부를 이번 한 주간 묵상거리로 삼고자 합니다.
"사랑하는 형제 여러분, 이제 우리 혀를 하느님께 봉헌했으니 더 이상 우리 것이 아닙니다. 형제를 다치게 하는 말, 형제 가슴에 비수를 던지는 말은 더 이상 하지 말도록 합시다. 우리 혀는 이제 봉헌된 혀이니 매일 주님께 찬미 노래를 드립시다. 앞으로는 우리 혀로 거룩한 말씀만을 선포합시다. 격려와 위로의 말만을 사용합시다."
잘못을 깨우쳐준다는 것
-정승현 신부 -
사람은 잘못을 저지르는 존재입니다(Errare humanum est). 전혀 잘못이 없는 사람은 사람이 아니라 천사일 것입니다. 너도 나도 잘못을 저지르고 삽니다. 그런데 흔히 우리는 다른 사람의 잘못을 잘 보면서도 자신의 잘못은 보기가 어렵습니다. 두 사람이 굴속에 들어갔다 나왔다고 합시다. 한 사람의 얼굴에는 검댕이 묻고 다른 사람의 얼굴은 깨끗하다면 얼굴에 손을 갖다 대는 사람은 누구이겠습니까? 아마도 얼굴이 깨끗한 사람이 먼저 얼굴에 손을 댈 것입니다. 다른 사람의 얼굴에 검댕이 묻은 것을 볼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다른 사람의 잘못에서 자신의 잘못을 깨달을 수 있다면 좋으련만 다른 사람의 잘못을 보면서 자신은 다르다고 생각하는 것이 보통입니다.
잘못을 깨우쳐주는 것은 큰 사랑입니다. 그런 점에서 나는 이 “사랑의 의무”를 소홀히 하여왔습니다. 남이 듣기 싫어한다고 해서, 또는 나 자신이 더 많은 잘못을 저지르는 사람이라고 해서, 흔히 말하는 대로 “좋은 것이 좋은 것이지.” 하면서 형제가 잘못을 저지르는 것을 보면서도 못 본 척하였습니다. 사실 남의 잘못을 지적한다는 것은 귀찮은 일입니다. 그것은 또한 위험한 일이기도 합니다. 잘못을 지적받은 그가 나를 못마땅하게 여기거나 멀리하기 십상입니다. 내 앞에서는 고맙다고 말하면서 혼자서는 기분 나쁘게 생각할 수도 있습니다. 그래도 나는 이 귀찮고 위험한 “사랑의 의무”를 성실히 수행해야 합니다. 오늘의 말씀은 남의 잘못을 깨우쳐주는 “사랑의 의무”를 다하라고 가르칩니다.
“너 사람아, 내가 너를 이스라엘 족속의 보초로 세운다. 너는 나에게서 경고하는 말을 받거든 그대로 일러주어라. 내가 한 죄인에게 ‘너는 사형이다.’라고 유죄판결을 내렸는데, 네가 그 죄인에게 버릇을 고치라고 타일러주지 않았을 경우에는 그 죄인은 자기 죗값으로 죽겠지만 그 사람이 죽은 책임을 나는 너에게 지우리라. 그러나 네가 그 죄인에게 마음을 바로잡아 버릇을 고치라고 타일러주었는데도 그가 마음을 바로잡아 버릇을 고치지 않았다면 그는 자기 죗값으로 죽겠지만, 너는 죽지 아니하리라.”
구약의 예언자들은 지도자와 백성의 잘못을 타일러 고쳐주는 일을 맡았습니다. 그들은 목숨을 걸고 그 일을 수행하였습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예언자들의 말에 귀를 기울이기는커녕 그들을 박해하고 죽였습니다. “그들이 박해하지 않은 예언자가 하나도 없다.”고 외친 첫 순교자 스테파노의 말 그대로입니다. 박해받는 예언자 없이 일어난 파국은 없다고 말할 수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파국을 막으려고 예언자들을 보내셨으며 예언자들의 말을 들었으면 파국은 면하였을 텐데도 사람들은 그렇게 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이 잘못을 저지른 것도 불행이지만 그 잘못을 깨우쳐주는 예언자들을 받아들이지 않은 것이 더 큰 불행이라는 말입니다. 특히 왕들의 잘못은 그 개인의 불행에 그치지 않고 민족 전체의 불행과 직결되어 있었습니다. 오늘의 교회도, 오늘의 그리스도인들도 이 예언직을 맡았습니다. 지도자들 앞에서, 사람들 앞에서 목숨을 걸고 “예” 할 것은 “예” 하고 “아니오” 할 것은 “아니오” 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도 다음과 같이 잘못을 타일러주라고 말씀하십니다. “어떤 형제가 너에게 잘못한 일이 있거든 단둘이 만나서 그의 잘못을 타일러주어라. 그가 말을 들으면 너는 형제 하나를 얻는 셈이다. 그러나 듣지 않거든 한 사람이나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라. 그리하여 ‘두 사람이나 세 사람의 증언을 들어 확정하라.’는 말씀대로 모든 사실을 밝혀라. 그래도 그들의 말을 듣지 않거든 교회에 알리고 교회의 말조차 듣지 않거든 그를 이방인이나 세리처럼 여겨라. 너희가 무엇이든지 땅에서 매면 하늘에도 매여있을 것이며 땅에서 풀면 하늘에도 풀려있을 것이다.”
잘못하는 일을 보고 뒤에서 흉을 보면 안 됩니다. 그것은 오히려 사태를 더 악화시킬 뿐입니다. 단둘이 만나 앞에서 잘못을 타일러주어야 합니다. 말을 듣지 않으면 그와 잘 통하는 사람, 그의 말이라면 잘 들을 수 있는 사람과 함께 가서 타일러주어야 합니다. 그래도 말을 듣지 않으면 교회에 알려야 합니다. 교회는 서로 사랑하는 형제적 공동체이기 때문입니다. 그렇게 해서도 안 된다면 우리로서는 어쩔 수 없는 일입니다. 하느님의 사랑과 진리로 돌아올 때까지 기도하며 기다리는 수밖에 별 도리가 없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은 한마디로 뒤에서 말하지 말고 앞에서 말하라는 것입니다. 뒤에서 한 말은 오해를 불러일으키지만, 앞에서 한 말은 얼마 동안 불편한 관계이더라도 언젠가는 이해하고 화해할 기회를 가져옵니다.
잘못을 타일러준다는 것은 비판하는 것과는 다릅니다. 비난하거나 화를 내는 것과도 다릅니다. 우월감을 버리고 겸손한 마음으로 타이르지 않으면 안 됩니다. 여기서 말하는 잘못은 남에게 해를 끼치는 윤리적 잘못을 말합니다. 그런 잘못이 아닌 잘못은 상대의 자유에 전적으로 맡길 일입니다. 잘못을 타일러주는 것은 간섭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더 중요한 것은 남이 나의 잘못을 지적할 때에 나는 어떠한 마음 자세를 지녀야 하는가 하는 점입니다. 잘못을 지적받았을 때에는 겸손하게 이를 받아들여야 합니다. 누구나 느끼는 것이지만, 남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일입니다. 그는 그 어려운 일, 귀찮고 위험한 일을 나를 위해서 기꺼이 한 것입니다. 잘못을 지적할 때에는 누구나 그 잘못을 가능하면 부드럽게 만듭니다. 쓴 약을 먹기 좋게 하려고 당의정으로 만드는 셈이지요. 그러니 내 잘못의 심각성을 깊이 생각해 보아야 합니다. 다른 사람의 잘못을 지적하는 것도 “사랑의 의무”이지만 다른 사람의 지적을 잘 받아들이는 것도 “사랑의 의무”입니다. “남에게 해야 할 의무를 다하십시오. 그러나 아무리 해도 다할 수 없는 의무가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의 의무입니다.”
“사랑은 선택이 아니라 의무입니다”
-김영수 신부-
우리 본당에도 홈페이지가 있습니다. 인터넷시대에 맞추어 신자들의 의견과 본당의 소식들을 나누는 공간이 마련되어서 여러 가지로 편리한 점이 많습니다. 교회의 활동이 인터넷이라는 공간으로 확장된 덕분에 더 많은 사람들과 만나고 더 좋은 일들을 나눌 수 있게 된 것은 문명의 혜택이라고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익명의 개인들이 이루는 거대한 인터넷 공간의 무한한 정보의 세계가 놀랍기도 하지만 때로는 인터넷이라는 공간이 자신외의 다른 사람의 의견이나 상황을 전혀 배려하지 않는 이기적이고 폐쇄적인 도피처의 역할을 하기도 합니다. 어느 곳에 문제가 발생하면 즉시 항의 글이 뜨고 차마 입에 담을 수조차 없는 내용의 글들로 도배를 합니다. 교회 안에서도 이런 일이 가끔 일어납니다. 공동체 안에서 문제가 있다고 생각될 때 서로 만나서 대화하고 이해하려는 노력을 하지 않고 자신의 흔적은 숨긴 채 대뜸 홈페이지에 비난의 글을 띄우고 그 일에 관련된 모든 사람들을 매도합니다. 익명이라는 커튼 뒤에 숨어서 상대방을 전혀 배려하지 않고 상처를 주고 공동체를 흔들어 놓는 미성숙하고 고약한 사람들의 놀이터가 된 것 같아 안타깝기도 합니다. 『남에게 해야 할 의무를 다하십시오. 그러나 아무리 해도 다할 수 없는 의무가 한 가지 있습니다. 그것은 사랑입니다』(로마13, 8). 바오로 사도께서 우리에게 들려주시는 사랑의 의무에 관한 말씀은 서로 사랑하는 일이야말로 그리스도인들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삶의 대원칙이라는 사실을 강조하는 것입니다. 사람들이 사는 세상에는 문제도 있고 갈등도 있고 상처도 있게 마련입니다. 서로 다른 의견들이 있고 다양한 방식이 있기 때문입니다. 교회는 사람들로 이루어진 공동체입니다. 사람들로 이루어진 공동체는 사랑 받지 못하고, 사랑하지 못해서 생긴 상처들도 있습니다. 오늘 복음은 우리가 흔히 경험하는 구체적인 상황을 상정하고, 그리스도인 공동체가 이 상황 속에서 어떻게 사랑을 실천해야 할 것인지를 제시해 줍니다. 공동체 안에서 누가 (나에게) 잘못을 하였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형제가 죄를 지을 경우에 어떻게 사랑해야 할 것인가? 복음은 잘못한 사람을 죄인으로 단정하기 이전에 「형제」임을 잊지 말아야 한다는 것을 먼저 강조합니다. 그래서 누구든지 형제가 잘못한 것을 알게 될 경우 사랑으로 그 형제를 바로잡아 주어야 하는 의무를 지니기 때문에 먼저 불필요하게 명예를 훼손당하는 일 없이 형제가 잘못을 깨닫고 회개 할 수 있도록 도와주어야 합니다. 단둘이 만나는 일에서부터 한 두 사람을 더 데리고 가는 일은 잘못한 사람의 죄를 공개적으로 따지는 최종적 단계를 가능하면 유보시키면서 그 사람의 회개를 위해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하라는 말씀입니다. 이러한 모든 노력에도 잘못을 고치지 않으면 그때 가서야 비로소 공식적으로 공동체에 알리고 공적인 조치를 취할 수 있고 이러한 노력마저 실패로 돌아갈 경우에는 그를 「다른 민족이나 세리처럼 여기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마지막 조치마저도 죄인을 단죄하라는 의미가 아닙니다. 공동체 안에서 잘못한 사람의 회개를 위해 개인적으로든, 공동체적으로든 할 수 있는 모든 노력을 다했다는 것을 전제로, 잘못한 사람은 스스로 공동체의 사랑을 거부했기 때문에 이제는 그를 주님께 맡겨 드릴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따라서 교회가 지닌 「맺고 푸는 권한」은 공동체를 보호하기 위해 잘못을 범한 사람을 공동체 밖에 매어두는 권한을 의미하기도 하지만, 조건이 채워지면 항상 풀어주어야 할 의무도 포함되어 있는 것입니다. 곧 죄인이 돌아오기를 항상 기다리는 것이 공동체가 끝까지 해야 할 노력인 것입니다. 그리스도인 공동체(교회)의 사명은 죄를 찾아내어 죄를 없애는 일이 아니라 죄인들을 회개시켜 그들과 함께 하느님의 나라로 들어가는 것이기 때문입니다. 그리스도인 공동체는 형제들이 그리스도를 중심으로 모여 자기의 개인적인 판단이 아니라 형제들의 기도를 통한 식별에 근거해야 하며, 개인의 이익이 아니라 하느님 나라와 이웃 사랑을 추구하는 기도를 바칠 때, 하느님 아버지께서는 기도하는 이들 가운데 현존하시는 당신의 아드님 그리스도를 보시고 그 기도를 들어주신다는 약속인 것입니다. 함께 기도하는 일은 서로가 사랑하고 있음을 드러내는 표지이며, 하느님의 사랑을 신뢰하는 믿음의 실천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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