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린 양의 혼인 잔치.”
왕의 아들의 결혼식에 이어서(마 22:2), “어린 양의 혼인 잔치”(계 19:9)가 베풀어진다. 이 축제를 위하여 하늘은 생명나무로부터 따낸 온갖 과일을, “길이는 여러 마일… 순수한 은으로 만들어진 상” 위에 진설하였다(초기문집, 19). 우리는 그 식탁의 길이가 정확히 얼마인지 알지 못한다.
아마도 “길이는 여러 마일”인 그 식탁이 하늘의 도성 이 끝에서 저 끝까지 펼쳐져 있는지도 모른다. 비록 그것의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으나 우리의 마음으로 하늘을 그려 볼 때에는, 도성 안의 모든 것이 보좌를 중심으로 놓여 있다는 사실을 잊지 말아야 한다.
무지개와 이십사 장로, 네 생물이 모두 보좌 주위에 있다(계 4:3, 4, 6). 지상의 모형에서처럼 새 예루살렘에서도, 천사들이 도성 중앙에 있는 보좌 주위를 둘러싸고 있다. 또한 구원받은 자들이 거처할 저택들도(요 14:2, 3), 보좌를 중심으로 사방에 위치해 있을 것이다.
“하나님의 낙원 중앙에 있는 생명나무”는 보좌 가까운 에덴동산에 자리하고 있다. (창 2:9과 계 2:7을 비교하기 바람, 본서 383쪽 참고). 나중에 이 식탁에 앉을 구원받은 자들은 도성 벽의 사면에 있는 열두 대문을 통하여 도성으로 들어 왔으며 보좌 주위에 모였다.
구속받은 자들이 함께 모여 있는 식탁이 그들의 구속을 위하여 지불한 그리스도의 속죄의 상징인, 은으로 되어있다는 것은 얼마나 의미심장한가!(출 30:12, 13). 그리고 구주이신 예수께서는 보좌에서 내려오시어, “허리띠를 띠고 그 종들을 음식 앞에 앉히고, 나아와 그들을 섬”(눅 12:36, 37, 신킹제임스역)기신다.
예수님께서는 모든 이를 초청한 “큰 잔치”(눅 14:16〜24)에 관한 비유를 우리에게 들려주셨다. 큰 잔치인 어린 양의 혼인 잔치로 부르시는 마지막 초청이 지금 들려오고 있다. “오소서, 모든 것이 준비되었나이다.”
우리가 “밭을 샀으매,” “소 다섯 겨리를 샀으매,” 가정적인 일 때문에, 어떤 세상의 소유 때문에, 일시적 책임 때문에, 우리의 생각이 너무 바빠서 영원한 실재를 위하여 “시간 없음”을 “핑계”하는 일이 없도록 하자. 지금은 그 어떤 시간보다 더 귀중한 때이다.
지금 이 초청이 고백한 그리스도인에게 뿐만 아니라, “시내의 거리와 골목으로” 이방 땅의 “길과 산울가”에서와 “큰 잔치”를 위하여 준비하고 반응하는 가장 어두운 가운데 사는 수많은 사람들에게 주어진다. 곧, 매우 빨리 이 “강권하”는 기별은 그 목적을 다한 후 하나님의 집이 채워질 것이다(ib. 23).
우리는 지금 성경을 마음대로 볼 수 있고, 천국 복음을 어디서나 들을 수 있는 계몽된 지역에 살고 있다. 그런 우리가 만약 초청을 경홀히 한다면, 비유에 나오는 자들과 같이 “그 사람은… 내 잔치를 맛보지 못하리라”(v. 24)는 말을 듣지 않겠는가?
새 예루살렘의 은 식탁에 앉을 기회를 저버리고 그토록 중대한 손실을 당할 여유가 과연 우리에게 있는가? 우리는 결단과 즐거운 예상을 가지고 다음과 같이 외쳐야 하지 않겠는가?
“나는 그곳에 있기를 원하네, 나는 그곳에 있기를 작정하네,
나는 그곳에 있기를 기대한다네, 나는 기대하네.
나는 그곳에 있기를 원하네, 나는 그곳에 있기를 작정하네,
나는 그곳에 있기를 바라네, 그대는 어떠한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