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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처음 마신 커피는 물에 녹았다
처음 마신 커피는 물에 녹는 것이었다. 아버지가 쓰시던 커피 잔은 종이컵보다 조금 큰 도기였는데, 거기에 테이스터스초이스 커피 두 스푼을 넣고 뜨거운 물을 가득 따라 넣는 것이 공식 레시피였다. 초등학교 고학년이 되었던 어느 일요일 아침에는 아버지를 따라 나도 커피를 마셨다. 아버지를 흉내 내 설탕은 일부러 넣지 않았다.
잔 가득 채운 그 쓴 커피를 호호 불어 후룩 마시니 왠지 중학생 형들보다 더 어른이 된 느낌이 들었다. 원두커피는 물에 녹지 않는다는 사실을 안 것은 중학교 시절 대학생 형 누나들을 따라 처음 카페에 갔을 때의 일이다.
이화여대 정문 앞에 있는 카페 비미남경은 작은 자동차만 한 로스터기를 사용하고 있었다. 초록색 생두를 넣으면, 연기를 자욱이 뿜어내며 볶인 짙은 갈색의 커피콩들이 쏟아져 나왔다. 그 커피를 그라인더에 넣고 갈아서 드리퍼에 올려놓고 물을 투과시키니 한 잔의 커피가 탄생했다. 아버지가 드시던 커피는 볶은 커피 중에서 수용성 성분을 뽑아내 동결건조한 인스턴트 커피였던 반면, 비미남경은 직접 원두를 갈아서 내리는 핸드드립 방식으로 커피를 내려준 것이었다.
커피 한 잔이 탄생하는 과정을 오롯이 지켜봤던 기억이 난다. 머리를 빡빡 민 이름 모를 바리스타가 비미남경의 문을 열고 들어섰다. 1년 전에 일을 그만뒀다던 그는 들어오자마자 원두 상태를 살폈다. 그러고는 어디선가 천을 꺼내 와서 삶기 시작했다. 드리퍼에 얹는 종이 필터와 달리 커피의 기름 성분을 덜 걸러내 깊고 진한 맛의 커피를 뽑아낼 수 있는 융 드리퍼였다.
그는 삶고 난 드리퍼를 헹구며 "이거 관리가 잘 안 됐네"라고 말했다. 물에 젖은 융 천을 팟팟 소리를 내며 펴서 사용하기 좋게 드리퍼를 만지작거리는 한편 커피 내릴 물을 끓였는데, 온도계도 없이 연기가 모락모락 나는 주전자 위로 손을 올린 후 다시 팟 하고 드리퍼를 폈다.
"이 정도면 됐군" 하고 중얼거린 그는 드리퍼에 갈린 원두를 담아 커피를 내리기 시작했다. 커피의 상태와 내리는 방식에 따라 물의 온도도 달라져야 하는데, 그 온도를 직감적으로 파악해 물을 끓인 것이다. 융 드리퍼 가득 채운 원두를 여과한 커피는 고작 에스프레소 한 잔, 그리고 그는 그 잔을 나에게 내밀었다. 세상에서 가장 쓴 커피라던 만델린이 그렇게 부드럽고 아름다울 수 없었다.
물어볼 용기도 없었지만, 만약 그 자리에서 이 커피는 어떻게 이런 맛이 나느냐고 물었다 해도 마땅한 대답을 얻을 수가 없었을 것이다. 지금으로부터 20년 가까이 전의 일인데, 당시에는 커피를 내리는 일은 빈 드리퍼에 물을 내리는 것부터 시작해야 할 새만큼 엄격한 수련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 주전자를 잡고 드리퍼에 물을 내리는 것은 마치 무도와 같은 일이었다.
주전자를 잡고 드리퍼에 물을 내리는 것은 마치 무도와 같아서, 신입 바리스타가 바에서 커피를 마주하는 것은 카페 바닥을 파리가 미끄러질 정도로 닦고 주방에서 손이 부르트도록 설거지를 한 후에나 가능한 일이었다. 나 같은 일개 덕후는 감히 커피 한 번 내려보겠다는 생각조차 할 수 없었다.
고등학교 시절부터 단골로 다니던 카페도 모든 것을 도제식으로 가르치던 '올드스쿨' 카페였지만, 지성이면 감천이라 하지 않았던가. 단골로 카페를 드나들기를 3년, 점장님이 원하는 대학에 합격해서 오면 커피를 가르쳐주겠다고 약속했다.
그 후로는 좋아하는 커피도 끊은 채 공부에만 전념했다. 대학 합격증을 들고 카페에 찾아갈 수 있었던 이유는 진심으로 커피를 배우고 싶은 치기 어린 열정도 한몫했을 것이다.
그렇게 떨리는 손으로 난생 처음 주전자를 손에 쥐어봤다. 정식 과정도 아니고 고작 주말 이틀 동안 반나절씩 배우는 수업이었지만, 점장님은 자신이 아는 많은 것을 가장 낮은 자세로 알려주셨다. 수첩에 꼬박 적어두어서 그 수업에서 배운 것들은 아직도 잊지 않고 있지만, 그중에서도 기억에 남는 것이 있다면 '맛있는 커피 6원칙'일 것이다.
♧ 맛있는 커피 6원칙
° 신선한 배전두(볶은 커피) ° 청결한 기구 ° 신선한 물 ° 기구에 맞는 적당한 굵기 ° 적당한 분량 ° 추출 시간과 온도 지키기
(컬럼니스트 beirut님의 글을 발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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