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궁화 이 강산에 역사 반만년(호원숙 비아, 작가)
모두들 생애 처음 겪는 여름이라고 합니다. 무덥고 불안하고 견디기 힘들다고 합니다. 저는 그럴수록 기후를 불평하지 않으려 애를 씁니다. 아침에 숲을 오릅니다. 숲은 절정이 지난 듯 초록이 전과 같지 않습니다. 갑작스런 소나기에 떨어진 이파리들이 갈색으로 변해 뒹굴고 쏟아진 폭우에 큰 나무가 쓰러져 길을 막고 있습니다. 벌레들만이 얼굴에 눈에 다리에 열심히 들이닥칩니다. 너희들의 전성기구나. 혼잣말을 합니다.
엊그제는 마당의 무궁화 나무에 벌들이 왱왱거리더니 큰 집을 짓고 말았습니다. 이웃에서도 처마 밑에 그런 일이 있어 벌집을 제거해 달라고 119차가 동원된 적이 있었습니다. 119를 불러야 하나 하다가 이웃에 벌치는 집 할머니한테 물어보았더니 걱정하지 말라고 그 벌들은 물지는 않는다고 하며 영감님이 오시면 벌집을 끌고 가져갈 수 있다고 합니다. 그러면서 여왕벌이 두 마리면 한 마리를 밀쳐내서 그 쫓겨난 여왕벌을 따라 일벌떼들이 집을 지은 거라 합니다.
수십 년부터 산기슭에 벌을 치고 닭을 길러온 부부는 이제 많이 늙었습니다. 그래도 아직도 달걀과 꿀을 사다 먹을 수 있으니 얼마나 놀라운 일인지 모릅니다. 할머니는 벌집이 돈이라고 합니다. 그럴 때는 꼬부랑 할머니이지만 눈빛이 반짝입니다. 저에게는 항상 좋은 말을 해주고 감사하다고 말합니다. 저도 마찬가지입니다. 가장 중요한 달걀과 닭과 꿀의 공급처이고 가끔은 오가피 이파리나 도토리묵을 갖다 주기도 하는 고마운 이웃입니다.
“이제 너무 힘들어, 언제까지 할 수 있을지?” 하며 한숨을 쉬며 한탄을 하지만, 몇백 년 전과 다르지 않은 생활을 하면서 이 시대를 살아가는 노부부를 보면 점점 존경스럽게 느껴집니다.
그런데 영감님이 오시기도 전에 어느 틈에 그 무궁화 나무가 허룩해지면서 벌집이 어디론가 이동을 해버렸습니다. 나중에 그걸 알고 영감님이 무척 애석해 했다고 합니다. 벌이 점점 줄어들어 벌집을 돈을 주고 사야 한다고 합니다. 벌들의 세상을 어찌 짐작이나 할 수 있을까요?
무궁화가 선연하게 핀 것을 쳐다봅니다. ‘백두산 뻗어내려 반도 삼천리 무궁화 화려강산 역사 반만년’(이은상 작시) 어릴 적 노래를 혼자 중얼거려 봅니다. 낭랑하게 노래 부르며 고무줄놀이를 하던 어린 동무들이 문득 생각이 납니다. 가난했어도 기백이 있었던 것 같습니다.
아이들이 골목에서 그렇게 노래를 부르며 노는 소리를 듣기 어렵습니다. 8월이어서일까요? 광복이 된 후 끊임없이 이 나라가 번성한 것에 무한히 감사하면서도 잃어버린 것에 대하여 안타까운 마음에 기도를 드립니다.
저는 땀에 젖은 손수건과 옷을 손으로 빨래해서 밖에 넙니다. 뜨거운 볕이 아까워 조물조물 주물러 빤 것을 널며 기도문을 외워봅니다.
“하느님, 깨끗한 마음을 새로 지어주시고 꿋꿋한 뜻을 새로 세워주소서. 당신 앞에서 나를 쫓아내지 마시고 당신의 거룩한 뜻을 거두지 마소서.”(시편 51,10-11)
호원숙 비아 / 작가 / 펴낸 책 「엄마는 아직도 여전히」, 「그리운 곳이 생겼다」, 「엄마 박완서의 부엌-정확하고도 완전한 사랑의 기억」, 「아치울의 리듬」 등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