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선호프”에 가 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을지로3가 건축자재 상가 밀집지역 골목 안, 그러니까 양미옥과 을지면옥 중간쯤에서 길 맞은편 골목 안쪽입니다. 옛날옛날 그러니까 80년대 초쯤에 OB 호프라고 OB 맥주에서 하던 프랜차이즈 생맥주 집들이 있었습니다. 가게에 들어가 앉으면 구운 김 몇 장하고 땅콩을 주던 집 말입니다. 나중엔 통닭까지 튀겨서 팔았었죠. 그 때 그 집에 있던 통나무로 된 테이블들을 기억 하시는지요? 폐기 된 것들을 다 모아서 이 집에서 쓰는지, 특별히 그런 테이블을 구한 건지 잠시 옛 생각에 빠져 들게 하더군요. 모 안주가 몇 가지 있긴 하지만 손님들 대부분이 노가리를 뜯으며, 씹으며 있습니다. 워낙 장사가 잘 되는지 골목 안에 호프집들이 몇 집 모여 있는데 한 집은 그 옛날 OB 호프 그 간판, 파란색 곰이 캡 쓰고 생맥주 잔 들고 있는 그거 있잖습니까? 그 간판을 걸어 놓았더군요. 게다가 가격이 무지하게 착합니다. 노가리 한 마리 천원, 생맥주는 3천원입니다. 그러니 노가리 한 마리에 생맥주 세잔 하면 만원이면 됩니다 착하죠? 그리고 노가리 무지하게 큽니다. 세잔 충분히 커버 됩니다.
분노, 불안, 공포 이런 것들이 한꺼번에 몰려 들어오는 그런 일을 겪어 보신 적이 있으신지요? 극심한 스트레스에 입맛도 떨어지고, 사람들 만나는 것도 싫고, 조울증 같은 걸 겪기도 하고 그랬습니다. 어느 날은 극복한 것 같은데 다음날 아침이 되면 또 갑자기 일어나는 분노, 그에 이어지는 불안, 공포. 한 동안을 그렇게 보냈습니다. 스스로 몸과 정신이 피폐해져 간다고 느끼던 차에 방에 굴러다니던 책을 집어 들었습니다. 내가 이 정신 상태에서 책을 읽을 수 있을까 했지만 책 중간중간에 있는 낯 익은 절 집 사진과 산 사진이 가볍게 한 장, 두 장 책장을 넘기게 하더군요. “산사의 주련”을 주제로 엮은 책들 이었습니다. 무거운 마음 중에 집어 든 책 이었지만 낯익은 사진들이 머리를, 가슴을 조금씩 풀어주더군요. 몇 해를 한 곳 한 곳 확인하며 다녔던, 작은 기억이라도 하나씩은 있는 그 옛 시간의 추억이, 현실에 갇혀 몸부림 치는 저를 풀어주고 달래 주었습니다. 역설적인 일이지만 그랬습니다. 과거가 현실에 갇힌 저를 풀어 주더군요.
춘마곡 추갑사라 할 정도로 아름답다는 공주 태화산 마곡사 대광보전에 있는 주련입니다.
淨極光通達(정극광통달) 맑고 다함 없는 빛 그 통달 함이여
寂照含虛空(적조함허공) 허공을 고요하게 모두 비추네
却來觀世間(각래관세간) 세상을 둘러 살피고 관해 보니
猶如夢中事(유여몽중사) 모두가 한갓 꿈속의 일이네
雖見諸根動(수견제근동) 비록, 만물의 근원이 모두 움직일지라도
要以一機抽(요이일기추) 요컨데, 이를 단 한 번에 뿌리 뽑아라
다음은 가야산 해인사 명부전 주련입니다.
掌上明珠一顆寒(장상명주일과한) 손바닥 위의 한 개의 영롱한 구슬
自然隨色辯來端(자연수색변래단) 색은 자연을 따라 변함 없어라
幾回提起親分付(기회제기친분부) 기회가 있을 때마다 이를 친절히 알려 주었건만
闇室兒孫向外看(암실아손향외간) 어리석은 중생들은 밖에서만 찾고 있다
마지막으로 금오스님의 법문입니다.
有恩念念報(유은념념보) 은혜를 입었다면 찰나마다 갚아라
報則合天道(보즉합천도) 그렇게 갚으면 천도에 부합 되리라
有怨念念解(유원념념해) 원한을 지었다면 찰나마다 풀어버려라
解則無煩惱(해즉무번뇌) 그렇게 푼다면 번뇌가 사라지리라
一身類浮雲(일신류부운) 이 한 몸은 뜬 구름과 같나니
百年同過鳥(백년동과조) 한 평생토록 날아가는 새와 한 가지더라
若以怨報怨(약이원보원) 만일 원한으로 원한을 갚는다면
萬劫無由了(만겁무유료) 만겁토록 악연이 끝나지 않으리라
한 줄 읽고, 또 다시 한 번 읽으면서 마음이 편안해짐을 느끼고, 묶은 체증을 내려 앉히려 손가락을 따듯 제 스스로를 다독거려 줍니다. “고생 많이 했어. 잘 해왔어. 정말 수고 했어”. 그 밤 모처럼 편안한 잠을 잘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지난 토요일 산엘 갔었고, 호프집에 까지 갔었습니다. 만선호프에요. 그리고 그렇게 30년 전의 옛 추억들을 마주 했습니다. 막 고교를 졸업하고 어떻게 세상을 살아갈까 하는 생각을 하던 그 시간들을 말입니다. 사람 사는 일, 별 것 아닌 것을 다 내려 놓자 하는 편안한 시간 이었습니다. 호프 한 잔 하는 거죠. 할 수 있는, 제가 할 수 있는 데까지 하고, 그리고 그렇게 가는 거지 어쩌겠습니까? 만 원짜리 몇 장이면 이렇게 행복해 질 수도 있는 게 사는 거 아니겠습니까?
지난 여름 산행에서 만난 모란 입니다......
첫댓글 민순형님 오랜만입니다...그동안 어떻게 지내셨는지 궁금하군요..가까운 날에 한번 뵙고싶습니다..
민순아 오랫만이다. 살다가 그런일들을 누구나 한두번씩 경험 하게 되지. 人生이란 무엇인가? 어디로 와서 어디로 가는가.
온 곳을 모르고 가는 곳을 몰라도 번듯한 人生임에는 틀림이 없으니 어찌 하랴. 그저 사는동안 주어진 일 열심히 하고 하루하루를
즐겁게 살 수 밖에........ 조만간 시원한 맥주 한잔 하자.
아우님 산에서 막걸리 한잔하세
노가린지 북어포인지 구별이 않되네 ...
"주련" 이란, 기둥에 글씨쓴 판을 길게 걸어 놓은것이지????
김정호!!! 우리 돈암동에서도 먹었는데.... 분명!!! 노가리야~~~~
사진은 작약아닌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