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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제 : 근심
제목 :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
성경 : 고후 7:8~16
찬송 : 365장
저자 : 이삼규목사
출처 : 20240623 낙양교회 주일 낮 예배
고후 7:8 그러므로 내가 편지로 너희를 근심하게 한 것을 후회하였으나 지금은 후회하지 아니함은 그 편지가 너희로 잠시만 근심하게 한 줄을 앎이라
고후 7:9 내가 지금 기뻐함은 너희로 근심하게 한 까닭이 아니요 도리어 너희가 근심함으로 회개함에 이른 까닭이라 너희가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게 된 것은 우리에게서 아무 해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고후 7:10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고후 7:11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증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그 일에 대하여 일체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
고후 7:12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그 불의를 행한 자를 위한 것도 아니요 그 불의를 당한 자를 위한 것도 아니요 오직 우리를 위한 너희의 간절함이 하나님 앞에서 너희에게 나타나게 하려 함이로라
고후 7:13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위로를 받았고 우리가 받은 위로 위에 디도의 기쁨으로 우리가 더욱 많이 기뻐함은 그의 마음이 너희 무리로 말미암아 안심함을 얻었음이라
고후 7:14 내가 그에게 너희를 위하여 자랑한 것이 있더라도 부끄럽지 아니하니 우리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다 참된 것 같이 디도 앞에서 우리가 자랑한 것도 참되게 되었도다
고후 7:15 그가 너희 모든 사람들이 두려움과 떪으로 자기를 영접하여 순종한 것을 생각하고 너희를 향하여 그의 심정이 더욱 깊었으니
고후 7:16 내가 범사에 너희를 신뢰하게 된 것을 기뻐하노라
어메이징 그레이스라는 영화는 노예제도 폐지에 앞장섰던 영국의 국회의원 윌리엄 윌버포스의 실화를 바탕으로 한 영화입니다.
1759년 영국의 유복한 귀족 가문에서 출생한 그는 21세의 젊은 나이로 정치 생활을 시작했는데, 29세 되던 해 일기장에 하나님이 노예무역의 폐지와 노예제 같은 잘못된 관습을 개혁하라는 두 가지 미션을 주셨다고 합니다. 윌버포스의 확신은 노예 상인이었다가 회심하여 목사가 된 존 뉴턴 목사의 강력한 지지와 권유로 더욱 확고해집니다. 그는 이른 나이에 국회의원이 되었기에 일상적인 의정 활동만 했다면 수상까지도 될 수 있는 인기 있는 정치인이었습니다. 그러나 영국 정부에 큰 부를 안겨 주었던 노예 판매를 금지하는 법안을 발의해 상류층 시민들의 반감을 자초합니다. 그는 노예제도를 폐지하면 유럽 패권은 경쟁 국가인 프랑스가 가져갈 것이라 협박하는 사람들에 의해 영국의 반역자라는 오명을 받으며, 노예제도 지지자들로부터 생명의 위협을 당합니다. 그럼에도 믿음과 신앙의 양심에 따라 맞섭니다. 그는 유럽 전역에서 가장 비난받는 정치인이 되었지만 끝까지 굴하지 않았고 마침내 일기를 쓴 날부터 46년 후인 1833년 7월 26일 영국 하원에서는 노예제도 폐지법 안이 통과됩니다. 비록 이 법안이 통과된 후 3일 만에 세상을 떠났지만, 그가 생전에 통과 시킨 법안들은 오늘날에도 인간 권익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여러분!
윌버포스처럼 비난이 예견되는 상황에서 사람들의 말을 따를지, 하나님의 말씀을 따를지 고민해본 적이 있습니까?
바울은 고린도전서를 쓴 후에 서둘러 고린도를 방문합니다. 고린도 교회의 잘못된 것들을 바로잡으라는 바울의 권고를 많은 사람이 받아들이지 않았고, 상황이 악화되고 있다는 소식을 들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어떤 이유인지 바울의 고린도 교회 방문은 환영받지 못했고, 안타까운 마음으로 고린도 교회를 떠날 수밖에 없었습니다. 바울은 마음을 추슬러 다시 회개를 촉구하는 편지를 보냅니다. 이 편지(준엄한 편지 또는 눈물의 편지)는 디도를 통해 고린도 교회에 전달되었습니다. 성도들의 반응이 어떠한지 그 결과를 기다렸지만 바울은 드로아에서 디도를 만나지 못하자 마게도냐로 건너갑니다. 이곳에서 디도를 만납니다. 바울은 그의 편지를 읽은 고린도 성도들이 잘못을 회개했고 이로써 고린도 교회 문제들이 해결되었다는 소식을 듣고 기뻐합니다. 바울이 편지로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게 한 것이 결국 고린도 성도들의 회개로 이어졌습니다. 고린도 성도들이 회개할 수 있었던 것은 바울과 같은 신실한 사역자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고린도 성도들이 회개하고 돌아올 것이라는 믿음을 버리지 않고 기도하며 복음 사역자의 역할을 감당했습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는 것이 어떤 결과를 가져올까요?
√회개에 이르게 합니다!
√고후 7:8 그러므로 내가 편지로 너희를 근심하게 한 것을 후회하였으나 지금은 후회하지 아니함은 그 편지가 너희로 잠시만 근심하게 한 줄을 앎이라
고후 7:9 내가 지금 기뻐함은 너희로 근심하게 한 까닭이 아니요 도리어 너희가 근심함으로 회개함에 이른 까닭이라 너희가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게 된 것은 우리에게서 아무 해도 받지 않게 하려 함이라
고후 7:10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인간의 근심에는 두 가지가 있습니다. 세상 근심과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입니다. 세상 근심은 하나님을 의식하지 않는 마음 상태에서 하는 근심으로 죄 문제와 무관한 근심입니다. 즉, 자기 자신의 가치 기준에 위배되거나 못 미치는 것에 따른 근심입니다. 그 결과 사람들은 용기를 잃거나 실의와 절망에 빠지며, 심각하면 자기혐오 내지는 자기 연민에 빠집니다. 반면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코람데오(Coram Deo)」의 자세, 즉 ‘하나님이 어떻게 보실까?’를 의식함으로 갖게 되는 근심입니다. 이 근심의 기원에는 내주하시는 성령님의 탄식하심이 있으며, 이러한 근심은 항상 회개를 통해 생명으로 이끌어 줍니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로 인도합니다. 하지만 세상 근심은 좌절, 패배감, 무력감, 양심의 가책, 형벌에 대한 두려움 등으로 인도하는데, 이러한 근심은 사망을 이룹니다.
나쁜 죄책감의 올무에 빠진 사람은 자기를 학대하면서 스스로를 파괴합니다. 스스로 나쁜 사람이라고 자신을 정죄하며 자아상에 상처를 받게 되는데, 일반적으로 우울증이 찾아오고, 심하면 자실이란 극단적인 선택을 할 수도 있습니다. 예수님을 배신한 가룟유다는 이처럼 나쁜 죄책감의 올무에 빠졌던 사람이었습니다. 그는 예수님을 배신한 것을 후회했고, 스스로 목숨을 끊고 말았습니다(마27:5).
하지만 좋은 죄책감은 자신에게 집중하는 대신 우리를 하나님께 이끌어 회개하게 합니다. 회개는 자기가 잘못했다는 사실을 내면의 법정에서 끄집어내어 하나님의 법정으로 가져가는 것입니다. 죄는 기본적으로 하나님이 세우신 질서를 무너뜨리는 것이기 때문에 모든 죄는 하나님께 심판을 받아야 합니다. 다윗이 밧세바를 범하는 죄를 짓고 자기가 하나님께만 죄를 지었다고 고백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시 51:4). 우리는 이처럼 자신에 대한 자책을 내면에 가두지 말고 하나님께 자백함으로 회개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말씀을 통해, 사람을 통해 하나님이 내게 주시는 사랑의 책망은 무엇입니까? 잘못을 지적받아 근심될 때 어떻게 반응하십니까?
하나님의 위로와 격려만이 사랑이 아닙니다. 하나님의 책망과 징계도 사랑입니다. 하나님은 성경 말씀을 통해서 혹은 특정한 사람을 통해서 죄를 지적하십니다. 사랑의 책망이라도 책망을 듣거나 잘못을 지적받으면 마음이 괴롭습니다. 마음이 괴롭고 불편할 때일수록 완고해지려는 습성을 내려놓고 주님 앞으로 나아가야 합니다.
이동원목사님의 이야기입니다.
목사님의 둘째 아들이 어렸을 때 엄마의 지갑에서 상당한 돈을 훔친 사건이 있었습니다. 목사님은 그때가 바로 매가 필요한 순간이라고 생각해 20대쯤 아들을 때렸습니다. 아들은 무척 서럽게 울더니 이렇게 말했습니다.
“아빠는 날 사랑하지 않아. 아빠가 나를 사랑한다는 것은 거짓말이야.”
목사님이 “왜 그렇게 말하니?”라고 하자, 아들은 “아빤 날 슬프게 만들었잖아”라고 대답했습니다. “아들아, 너만 슬픈 게 아냐. 아빠는 더 슬퍼. 아빠 말 잘 들어봐. 네가 잘할 때는 아빠는 기뻐하면서 사랑해. 그리고 네가 잘못할 때는 아빠는 슬퍼하면서 너를 사랑한단다.”(이동원, 이렇게 선택하라/나침판)
징계와 책망에서 하나님의 사랑을 보는 영적 시각이 있다면, 순종과 회개를 선택할 수 있습니다. 반대로 하나님의 사랑을 보는 영적 시각이 없다면 불평과 원망, 그리고 심지어는 대적하는 데까지 나아갑니다. 여러분은 어떤 시각을 갖고 계십니까?
√구원에 이르게 합니다!
√고후 7:10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
고후 7:11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증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그 일에 대하여 일체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
나쁜 죄책감은 사람의 영혼을 파멸시키고, 심지어 생명까지 앗아 가지만 좋은 죄책감은 하나님 앞에 회개함으로 우리로 하여금 구원을 얻게 합니다. 배신자 유다와 마찬가지로 베드로 역시 주님을 모른다고 저주하면서까지 부인하였습니다. 베드로는 유다처럼 자신의 선택을 후회했지만 스스로 자신을 처벌하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죄를 하나님의 법정으로 가지고 갔습니다. 그리고 그곳에서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들였습니다.
우리가 회개한다는 것은 하나님의 용서를 받아들이는 것이며, 스스로 깨끗하게 할 수 없음을 인정하는 것입니다. 이제 하나님의 처분을 기다려야 합니다. 우리의 허물과 죄를 하나님께 맡겨야 합니다. 우리가 겸손의 자리에 서면 하나님은 우리를 용서하시고 구원하십니다.
딛 3:5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여러분!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이와 같이 회개를 낳게 합니다. 이 회개는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입니다. 자신의 잘못에 대한 근심(슬픔)은 회개로 연결되며 이는 구원을 낳습니다. 이 구원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입니다. 이에 해당하는 헬라어는 ‘아메타멜레톤’입니다. 그 뜻은 ‘후회가 없는’ 또는 ‘돌이킬 수 없는’이란 뜻입니다.
롬 11:29 하나님의 은사와 부르심에는 후회하심이 없느니라
그만큼 우리의 구원은 견고합니다. 이와 달리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룹니다. 세상 근심이란 하나님의 뜻과 상관없이 세상의 방식대로 슬퍼하는 것을 말하는데, 그 결과는 죽음입니다.
회개의 결과는 구원인데 그것이 어떻게 나타났을까요?
고후 7:11 보라 하나님의 뜻대로 하게 된 이 근심이 너희로 얼마나 간절하게 하며 얼마나 변증하게 하며 얼마나 분하게 하며 얼마나 두렵게 하며 얼마나 사모하게 하며 얼마나 열심 있게 하며 얼마나 벌하게 하였는가 너희가 그 일에 대하여 일체 너희 자신의 깨끗함을 나타내었느니라
고린도 교회는 바울의 편지를 받고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을 했습니다. 그들은 거짓 교사들의 가르침을 버렸고 무엇이 잘못되었는지 자신들을 돌아보았습니다. 그들은 하나님 앞에서 참된 경건을 회복하기 위해 근심했습니다. 이러한 근심은 생명으로 인도하는 근심입니다. 고린도 성도들은 하나님 앞에 바로 서기 위해 진지했고 열정적이었습니다. 바울이 이 편지를 쓴 목적은 잘못한 자를 책망하고 시시비비를 가리기 위함이 아닙니다. 오히려 고린도 성도들이 얼마나 자신의 가르침에 순종했으며 바른 믿음을 가지기 위해 노력했는지 칭찬하기 위함이었습니다. 우리가 권면하는 목적은 사람을 살리고 세우는 것이 되어야 합니다.
√고후 7:12 그런즉 내가 너희에게 쓴 것은 그 불의를 행한 자를 위한 것도 아니요 그 불의를 당한 자를 위한 것도 아니요 오직 우리를 위한 너희의 간절함이 하나님 앞에서 너희에게 나타나게 하려 함이로라
√순종에 이르게 합니다!
√고후 7:13 이로 말미암아 우리가 위로를 받았고 우리가 받은 위로 위에 디도의 기쁨으로 우리가 더욱 많이 기뻐함은 그의 마음이 너희 무리로 말미암아 안심함을 얻었음이라
고후 7:14 내가 그에게 너희를 위하여 자랑한 것이 있더라도 부끄럽지 아니하니 우리가 너희에게 이른 말이 다 참된 것 같이 디도 앞에서 우리가 자랑한 것도 참되게 되었도다
바울은 고린도 교인들의 회개가 자신뿐만 아니라 디도에게도 큰 위로가 되었음을 밝힙니다. 위로와 기쁨은 바울에게만 있었던 것이 아니라 디도에게도 있었습니다. 바울은 이것을 ‘디도의 기쁨’이라고 표현합니다. 이 기쁨은 디도가 고린도 교인들에게서 받은 ‘위로’(7:7)와 짝을 이룹니다. 디도는 바울의 편지를 전달한 사람으로서, 바울이 그 편지를 보내면서 얼마나 많은 고민을 하였는지 잘 알고 있었던 사람입니다. 그리고 그 편지가 고린도 교회 속에 일으킨 회개의 역사를 현장에서 생생하게 목격하였습니다. 이를 두고 바울은 ‘그의 마음이 너희 무리로 말미암아 안심함을 얻었다’고 말합니다. ‘안심함을 얻었다’고 할 때 사용된 동사는 ‘아나페타우타이’인데 ‘쉬게 하다’, ‘소생시키다’를 뜻하는 ‘아나파우오’의 완료수동태형으로서 ‘시원하게 하다’는 의미가 있습니다. 디도가 우려했던 모든 것들이 그의 마음속에서 깨끗하게 씻겨 나가는 모습을 생생하게 묘사한 것입니다. 아울러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 대해 그가 디도에게 자랑했던 모든 것이 부끄러움으로 끝나지 않은 것에 감사하는 마음을 표시합니다.
√고후 7:15 그가 너희 모든 사람들이 두려움과 떪으로 자기를 영접하여 순종한 것을 생각하고 너희를 향하여 그의 심정이 더욱 깊었으니
바울은 다시 현재의 시점으로 돌아와서 디도의 마음을 대신 표현합니다. 고린도 교인들은 바울에게 하듯 디도에게 순종하였습니다. 디도는 이와 같은 사실을 회상하면서 지금 더욱 그들을 향하여 ‘심정’이 싶은 상태임을 알립니다. ‘심정’은 ‘내장’을 가리키는 단어인 ‘스플랑크나’를 번역한 말입니다. 이 단어는 동정심이나 깊은 애정을 나타냅니다. 디도는 이제 고린도 교인들을 향해 사랑의 깊은 감정이 생긴 것입니다. 하나님의 역사를 함께 경험한 사람들 사이에는 이와 같은 깊은 애정이 생깁니다.
여러분!
하나님의 위로가 필요한 지체는 누구입니까? 삶의 여러 가지 문제로 근심하는 지체를 어떻게 위로하면 좋을까요?
사랑하는 사람의 아픔을 알지만 해 줄 수 있는 게 없는 것만큼 고통스런 일은 없습니다. 하지만 그 순간에 마음 담긴 위로의 말과 행동이 상대방에게 큰 힘을 줄 수 있습니다.
√이러한 위로 방법으로 다음 같은 것들이 있습니다.
√첫째, 가벼운 허그를 하는 것입니다.
(허락된 관계에서) 가볍고 따뜻한 신체 접촉은 어디서나 통하는 사랑의 언어입니다. 두려움에 떨고 괴로워하는 사람에게 따뜻한 신체 접촉이 마음을 달래고 심지어 심혈관에 쌓인 스트레스까지 진정시켜 줄 수 있습니다.
√둘째, 상대방의 마음을 표현할 수 있도록 공감의 말을 하는 것입니다.
공감은 상대방의 입장에서 생각하력 노력하는 행위로, 심리학자들은 공감을 통해 부정적인 감정을 표출하는 것이 전반적인 정신 건강에도 도움이 된다고 말합니다.
√셋째, 문제에 대해 얘기를 나누는 것보다는 자리에 같이 있어 주는 것입니다.
그래서 초상이 났을 때 함께 해 주면 그보다 더 큰 위로는 없습니다. 때로 이것이 가장 힘 있는 위로가 됩니다. 반면에 영혼 없는 위로는 상처를 줄 수 있습니다. 상황을 객관화하여 말하는 위로의 말들은 상대방을 화나게 하는 말들이기 때문에 피해야 합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자식이 잘못하면 부모는 사랑의 매를 듭니다. 그것이 자녀를 바르게 이끄는 길이기 때문입니다. 바울은 영적 아버지로서 진리에 대한 담대함과 사랑으로 고린도 성도들을 책망하는 편지를 보냈습니다. 이에 그들은 잠시 근심했지만, 하나님의 뜻대로 근심하며 회개했습니다. 하나님 뜻대로 하는 근심은 거룩한 말씀의 기준 앞에서 자신을 돌아보고 돌이키게 합니다. 복음 사역자의 근심은 성도들이 믿음의 길을 떠나는 것이고, 기쁨은 성도들이 온전한 믿음에 굳게 서는 것입니다. 사랑으로 전하는 책망에 선한 마음으로 반응하여 변화와 성숙의 열매가 가득한 우리 성도들이 되시기를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