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주의는 가장 높은 형태의 너그러움이다.
그것은 다수가 소수에게 양보하는 권리고
그래서 이 행성에 울려 퍼진 가장 고귀한 외침이다."
- 호세 오르테가 이가 「대중의 반역」
오르테가 이 가세트의 「대중의 반역」을 읽은 것은 1980년이었다.
우리 사회에 자유주의가 자리 잡을 가능성은 보이지않고 역사에 대한 믿음마저 흔들리던
그 시절, 꼭 반세기 전 유럽에 전체주의의 그늘이 짙어지기 시작할 무렵 명철한 자유주의자가
쓴 이 책은 우리 사회의 전망에 관해 많은 것을 내게 가르쳐주었다.
오르테가(1883~1955)는 스페인의 철학자이자 정치가로 그의 저작들은 큰 영향을 미쳤다.
현대는 대중의 시대다. 신분의 제약이 사라지고 모든 사람들이 사회의 운영에 참여하게 된 것은
자연스럽고 바람직하다. 그러나 민주주의 사회에서 대중이 드러낸 모습은 그리 아름답지 않다.
무엇보다도. 일시적 다수가 갖가지 소수들을 비난하고 억압한다. 자연히, 대중의 편견과 이기심을
부추겨서 자신의 목적을 이루려는 정치가들이 권력을 쥐는 경향이 깊어지고, 차츰 모든
사회들에서 민중주의가 대세를 이룬다.
대중이 먼저 출현한 유럽의 경험은 부정적이다. 대중의 열광적 지지를 받은 전체주의가 세상을
휩쓸어서, 끔찍한 참화를 불렀다. 20세기 초엽에 전체주의가 갑자기 번창한 까닭은 대중의
출현에 대해 기존 지배 계층이 대응하지 못해서 대중의 선동과 동원에 능한 전체주의자들에게
기회를 주었다는 사실에서 찾을 수 있다.
이제 공산주의, 파시즘, 그리고 나치즘으로 불리던 전체주의 체제는 거의 다 사라졌다. 그러나
그런 체제를 가능하게 했던 대중의 득세는 오히려 강화된다. 대중은 20세기에 갑자기 나타난
존재로 자신의 정체성에 대해 마음을 쓰지 않는다. 오히려 다른 사람들과 같다는 것에서 안정과
만족을 얻는다. 대중은 자신들이 평범하다는 것을 알 뿐 아니라 그런 평범을 자랑스럽게 여겨
사회 전체에 강요한다.
그리고 민주주의는 대중에게 그렇게 강요할 힘을 준다. 이제 대중의 취향과 뜻을 거스르는
의견은, 아무리 합리적이고 정의롭더라도, 나오기 어렵고 박해받는다. 그렇게 대중이
득세한사회에선 너그러움이 줄어들고 갖가지 소수들은 박해를 받는다.
반어적으로, 이런 대중의 득세는 모든 사람들의 자유를 위협한다. 개인은 궁극적 소수다. 그래서
대중의 뜻이 여론이라는 이름으로 도덕이나 법 위에 자리 잡으면, 누구의 자유도 확고하게
보장될 수 없다. 조지 오웰이 경고한 대로, 여론에 의한 지배보다 더 압제적인 정치는 없다.
그것은 어떤 압제적인 법이나 폭군의 지배보다 압제적이다. 대중의 뜻이나 취향을 거스르는
말 한 마디로 한 사람의 삶이 문득 부서질 수 있다는 사실을 우리는 날마다 만난다.
모두 사랑이 중요하다고 외친다. 그러나 정말로 필요한 것은 너그러움이다. 이 세상엔 우리가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길바닥에 가래를 뱉는 사람들로부터 신호를 어기고
차를 모는 사람들을 거쳐 부패한 관리들에 이르기까지, 도저히 사랑할 수 없는 사람들이 너무
많다. 그렇게 사랑할 수 없는 사람들을 억지로 사랑하려 애쓰면, 우리는 '추상적인 사람'을
인류를, 민족을, 국민을. 민중을 구체적인 사람들 대신 사랑하게 된다.
그리고 그런 추상적 사람의 이름으로 개인들을 억압하고 박해하게 된다. 소설가 로렌스의
얘기대로, "다른 사람을 사랑하도록 스스로에게 강요하는 사람은 스스로의 몸속에 살인자를
낳는다." 사회를 이루고 살아가는 데서 중요한 것은 자신들이 싫어하거나 미워하거나
경멸하거나 이해할 수 없는 사람들의 권리를 인정하고 그들의 판단을 존중하는 시민들의
너그러움과 그런 너그러움에서 나오는 참을성이다.
그러나 대중은 결코 너그럽지 않다. 그래서 자유주의는 고귀하지만 여리다. 오르테가는 이 점을
강조했다.
"자유주의는 적과 공존하겠다는 결심을 선언한다. 그것도 약한 적과 인류가 그렇게
고귀하고, 그렇게 역설적이고, 그렇게 세련되고, 그렇게 곡예적이고, 그렇게 반자연적인 태도에
이르렀다는 것은 믿기 어려울 정도다. 그래서 바로 그 인류가 이내 그것을 없애려고 안달한다는
것이 이상하지 않다. 그것은 지구에 뿌리를 굳게 내리기엔 너무 어렵고 복잡한 절제다."
오르테가의 얘기는 모든 자유주의자들이 새길 만하다. 자유주의는 대중이 득세한 세상에선
뿌리를 깊이 내릴 수 없다. 그 사실을 잊으면, 세상이 자기를 몰라준다는 서운함과 세상을 보다
자유롭게 하려는 노력에 대한 회의가 겹쳐서, 자유주의를 포기하게 된다.
- 복거일 (소설가)
- 살림 간, 복거일 남정욱 엮음, ‘내 마음 속, 자유주의 한 구절’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