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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의 선 긋기, 혹은 겸허의 시학
----정재규의 시세계
송희복 문학평론가
1. 진짜 나는 어디에 있을까?
시인 정재규는 부산의 교육계에서 오랫동안 몸을 담아 왔다. 낯선 타관 땅인 부산은 그에게 평생직장의 권역이었다. 반면에, 이 글을 쓰는 나는 부산이 고향이면서 평생을 외지에서 보냈다. 나 역시 은퇴를 염두에 두고 서울 본가 외에 고향에 책 읽고 글 쓸 공간을 마련해 있다가, 비교적 최근에 지인의 소개로 시인을 만나 알게 되었다.
시인은 지역 교육계의 요직을 두루 맡으면서 머잖아 은퇴를 준비하고 있다는 말을 들었다. 은퇴를 준비한다는 것은, 과거를 정리하고, 미래를 설계한다는 것은 아닐까? 이번에 머잖아 간행될 시집인『마음에 선을 긋는다』는 은퇴를 기념하는 시집인 것으로 보인다. 이 글을 쓰게 된 나 역시 기쁜 마음으로, 우선 새로운 시집을 간행하는 시인에게 축하의 뜻을 보낸다. 시집의 표제에서 암시를 받을 수 있는 것처럼, 이번 시집에는 시인의 인생관이 잘 반영되어 있다.
부끄럽지 않게 살아가는 것은
마음에 적당한 선을 긋는 것이 아니랴.
―「마음에 선을 긋는다」부분
이번 시집의 내용을 보면, 가장 울림이 큰 표현은 ‘마음의 선 긋기’이다. 마음에 선을 긋는다는 것은 무욕과 절제를 가리키는 말이 아닐까, 한다. 사실상 마음의 선이라고 하는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다. 뉴스에 등장하는 세상의 험한 일 모든 것들이 마음의 선을 긋지 못하는 데서 비롯된 게 아니겠는가. 이런 것들이 하루에도 무수히 우리에게 전해지고 있지 않은가. 인간의 욕망을 결코 측량할 수 없듯이, 마음의 선 역시 눈에 보이지 않은 데 놓여 있지 않은가.
나른한 오후
나만의 시간을 갖고 싶어
신문을 펼쳐 드는데
‘간직할 수 있어서 행복하다’는
기사가 눈에 들어온다.*
간직하다는 말에는
귀하게 여기는 마음이
담겨 있다고 한다.
간직하다는 말을 보는 순간
나는 지금까지
너무 많은 걸 간직하며
살아왔다는 사실을
새삼 느끼게 되었다.
―「간직하다」부분
시인은 어느 날 신문기사를 통해 ‘간직하다’라는 낱말을 우연히 발견한다. 이에 대한 재조명이 그에게 이루어졌다. ‘간직하다’가 귀하게 여기는 마음의 담김일까? 물론 세상의 많은 사람들이 동의할 것이다. ‘간직’이란 말, 참 좋은 우리말이다. 한자말처럼 보이지만, 토박이말이다. 국어사전의 풀이에 따르면, 물건 따위를 어떤 장소에 잘 간수하여 둠, 혹은생각이나 기억 따위를 마음속에 깊이 새겨 둠……. 시인이 본 신문기사의 내용은 후자에 해당하는 듯싶고, 시인은 생각으로는 전자에 뜻을 두고 있으니, 서로간의 생각은 사실상 동상이몽이다. 하지만 기억을 포함해 소유를 한다는 점에서는 생각이 같을 수 있다.
소유라는 말의 뜻은 생텍쥐페리의 동화『어린왕자』에도 나온다. 어린왕자는 왕과 사업가를 만났는데, 왕은 별들을 지배한다고 했고, 사업가는 이것을 소유한다고 했다. 지배하고 소유하는 것은 속물적인 어른의 세계에서나 존재하는 것. 순수한 동심의 세계는 지배-피지배의 관계나 소유-무소유의 경계는 소멸된다.
살아생전에 이 작품을 무척 좋아했던 법정 스님은 자신의 대표적인 에세이「무소유」에서, 소유한다는 것을 소유 당하는 것이라고 말한 바가 있었다. 우리 사회에 무소유의 정신을 심어주고 간 스님의 글들이 그의 빈자리를 채워주고 있듯이, 시인 정재규의 이번 시들에도 불교적인 내용들이 간혹 보이는데, 다음에 인용된 시를 함께 보자.
이곳에도 있고
저곳에도 있고
여기에도 있고
저기에도 있고
사방팔방 보아도 나뿐인데
그럼 진짜 나는 어디에 있을까?
이곳에도 없고
저곳에도 없고
여기에도 없고
저기에도 없고
그럼 나는 어디에 있는 것일까?
―「스위스 여행시편 ․ 2」전문
이 인용 시는 스위스 여행 체험의 결과로 나타난 것이다. 시의 배경은 루체른의 빙하공원에 있는 만화경이라고 한다. 거울로 된 미궁에서, 시인은 자신의 모습을 비추어 보고 있다. 거울 속에 비추어진 내 모습은 일종의 그림자이다. 현대 철학의 용어에 의하면 모든 실재의 인위적인 대체물인시뮬라크르(simulacra)라고 볼 수 있다. 인간은 이처럼 다름 아닌 가상 실재의 미혹 속에 살아가는지 모른다. 사물이 기호로 대체되고 현실의 모사나 이미지가 실재를 더 이상 흉내 낼 수 없을 때, 사물의 실재와 환영(幻影)의 관계는 본래의 가치를 잃어버리고 가상현실이 되는 것이 아닐까?
굳이 선(禪)불교가 아니라고 해도, 우리는 묻고 답할 수 있다. 진짜 나는 어디에 있을까? 나의 모든 것을 버리는 데서, 비로소 찾을 수 있다. 거울 미궁 속에서 헤매고 있는 나는 그림자요, 번뇌요, 아상(我相)에 지나지 않는다. 아상이란, 자기중심의 미혹의 관념이나 그릇된 집착을 가리킨다.
2. 생명의 의지와 생명에의 의지
시인 정재규의 이번 시집 속에 사람, 사람됨, 사람살이의 이야기에 관한 내용이 그리 많지 않다. 대신에, 사물을 소재로 삼거나 그 물성(物性)을 드러내는 것으로써 삶을 이야기하기도 하고 인생의 의미를 찾기도 한다. 사물의 존재성을 통해 삶의 의미를 투사하는 시인의 원숙한 시선이 예사롭지 않다. 내가 이 장(章)에서 선택해본 소재는 그늘과 세발낙지와 귀 울림이다. 이를 시제(詩題)로 삼은 시편들의 역량이 결코 간과할 수 없어서다. 먼저, 시편 「그늘」을 살펴 보려고 한다.
햇볕이 쨍쨍 내리쬐는 운동장 한구석에 아름드리 느티나무 그늘이 햇빛을 모으고 있다. 햇빛이 많이 모일수록 더 진한 그늘을 만들어 놓고 바람에 밀려오는 새들의 소리를 하나하 나 챙기고 있다. 그늘은 어린 시절에 길 가다 더위에 지쳐 물 한 모금이 생각날 때 주위를 두리번거리다 풀썩 주저앉아 옷을 벗어던져 놓고 드러눕던 편안한 안식처였다. 바로 옆에 는 가끔씩 길을 잃은 개미가 나무줄기를 타고 올라가다 무리의 흔적을 되찾아 땅 위로 내 려와 쏜살같이 나무 밑구멍을 찾아 들어가기도 했다. 개미들을 무심코 바라보며 누구나 한 번쯤은 가졌을 또 다른 그늘을 생각하곤 했다.
어두운 그늘이 드리운 마음에 포근한 그늘을 덮어 주고 힘든 생활 속에서도 따뜻한 정을 주셨던 어머니의 그늘, 외로울 때 끊임없이 이야기를 나누며 함께 놀아주었던 친구의 그 늘, 삶이 힘들고 지쳐 있을 때 마음속에 만들어진 나만의 그늘을 찾아본다. 보이지 않게 힘이 되어 주었던 그늘에서 또 다른 그늘이 온몸을 감싸준다.
햇빛이 더욱 강하게 그늘을 만들어 주면 늘 아껴 주었던 사람들의 숨겨진 그늘이 더욱 그 립다.
―「그늘」전문
이 시에서 운동장 한구석의 아름드리 느티나무 그늘이 삶을 이야기하는 단초가 되기도 한다. 여기에서 그늘은 편안한 안식처가 되기도 하고, 모성의 이미지를 갖추어 있기도 하고, 늘 함께하는 친구의 모습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온몸을 감싸주는 보이지 않는 힘이 되기도 한다. 그늘은 다름이 아니라 은미(隱微 : 겉으로 드러난 것이 거의 없음)한 삶의 표상이다.
그늘이라고 하니까 생각나는 게 있다. 비평가 임우기는 이미 오래 전에 소위 ‘그늘론(論)’을 제창한 바 있었다. 그는 1996년에 “그늘로 인해 작품은 생생한 삶의 몸을 얻는다.”라고 하는 경인구를 남기기도 했다. 나는 독자들에게 이 한 문장을 염두에 두고 정재규의 시편「그늘」을 한번 읽어보기를 권한다.
짜디짠 바닷물과 갯벌 속에 뒤엉켜
필사적으로 삶을 이어가는 운명
때로는 태양 빛을 몰래 훔쳐보며
끓어오르는 힘을 모으나
탐욕스러운 사람들의 입맛에 주눅 들고
갯벌을 휘젓는 어부들의 손끝이 매서워
미끌미끌한 몸뚱이는 땅속 깊이 파고든다
갯벌에는 필사적인 몸부림으로
녹초가 된 세발낙지의 벅찬 숨소리가 가득하다
그래도 갯벌 깊숙한 흙속에서
겨우 참고 목숨을 부지했건만
처연한 모습으로 식탁에 올라와 있다
접시에 긴 다리를 바짝 붙여보지만
나무젓가락 사이에 끼워진 채 돌돌 뭉쳐져
입 속에서 일생을 마감하는 처연한 삶
갯벌 속에서 유영하던 강인한 힘은
사람들의 입속에서 힘겹게 녹지만
인간의 눈빛에 짓눌려 잡혀온 세발낙지는
온몸을 비틀며
있는 힘을 다해 갯벌로 달려간다
―「세발낙지」전문
시인 정재규에게 있어서 그늘이 생명의 의지(依支)라면, 여기에서 소재로 삼고 있는 세발낙지는 생명에의 의지(意志)라고 하겠다.나는 한때 ‘세발낙지’가 발이 세 개인 낙지인줄 알았었다. 다리들이 가느다랗기 때문에, 가늘 세(細)자 세발낙지인 것이다. 주로 갯벌에 서식하는 작은 크기의 낙지를 가리킨다. 세발낙지의 다리개수는 일반 낙지의 경우처럼 여덟 개라고 하는데, 나도 정확하게 잘 모른다.
사람들 중에서 누가 세발낙지를 먹으면서 이것의 물성에 관해 이런저런 생각을 하겠는가? 시인 정재규의 독특한 시적 발상이 우리를 다시금 성찰하게 만든다. 마침내 갈가리 찢어진 처연한 모습으로 식탁에 오르지만, 그것의 물성은 필사적인 몸부림으로 갯벌 속에서 자신의 잔명을 보듬는다는 데 있다.
시방 내 귓속에는
새봄의 햇살이 따스하게 데워져
기막힌 소리를 내고 있다.
꽃이 웃는 소리와
바람이 떠드는 소리가
최고의 화음이 되어 붕붕 떠다니는 소리.
또한 내 귓속에는
잠 못 이루는 단어들이 차갑게 식어
서늘한 문장을 만들어 내고 있다.
흔들리는 세상을 이야기하는 소리와
이웃들의 고단한 목소리가
일제히 달려와 윙윙 쏟아내는 소리
그리고 생각을 송두리째 흔들어 버리는 소리.
이윽고 귓속에 갇힌 소리들이
꽃 속의 알 수 없는 울림을 듣고 있다.
귓속에 흐르는 꽃의 이야기와 떨림이
빙빙 쏟아지는 꽃가루 되어
아름다운 소리를 내고 있다.
내가 하고 싶은 말은 모두,
귓속에 윙윙거리며 숨어 있다.
―「이명·1」전문
이 시는 이명(耳鳴)을 소재로 한 시다. 우리말로는 글자 그대로 ‘귀 울림’이라고 해야 하겠는데, 이 말이 아직은 국어사전에 등재될 낱말(표제어)로 자격을 얻지 못하고 있다. 이 말이 하나의 공인된 낱말로 승격되면, 띄어쓰기의 빈 틈새도 사라지면서 ‘귀울림’으로 표기될 것이다.
내가 주변 사람들로부터 들은 얘기에 따르면, 이명이 보통 괴로운 게 아니라고 한다. 이것은 난치병 중의 난치병이다. 시인은 이명이란 병고의 구체적인 소리를 표현해내고 있다. 갖가지 소리를 베껴낸 글솜씨는 마치 판소리 사설을 듣는 것 같다. 내가 생각키로는 시인의 이번 시 가운데 가장 완성도가 높은 시라고 생각한다.
이 귀 울림의 소리가 시인의 경험인지 상상력인지 잘 알 수 없으나, 만약 후자의 경우라면, 한층 더 가치가 있는 것이라고 여겨진다. 문학 작품이 날것의 경험이기보다는 허구적 장치의 소산인 게 더욱 본질적여서다. 혹은, 이것이 시인의 경험이라고 하자. 고통스러운 귀 울림의 소리를 이렇게 여유롭고 아름답게 표현할 수 있다는 게 놀랍다.
3. 풀잎 속의 영롱한 이슬을 노래하다
중국의 지식인 사회에서는 전통적으로 ‘문자인야(文者人也)’라고 하는 표현이 나돌고 있었다. 글이란, 글을 쓴 그 사람 자체라고 하는 말. 이를테면 작품은 작가의 인품이라는 것. 시인 정재규의 시 작품을 보면, 인간 정재규의 인품이 그대로 드러나거나 전해지고 있다.
그가 시를 바라보면서 생각하는 눈길은 온화하고 겸허하다. 이를테면 ‘겸허의 시학’이라는 비유적인 표현이 잘 어울릴 것 같다. 그는 어려운 말로 자신의 뜻을 난해하게 만들지도, 자신의 존재성을 꾸미려 들지도 않는다. 먼저, 시로 쓴 시인론이라고 할 수 있는, 그의 시편「시인」을 살펴보자.
마음이 숨을 곳을 마련해 주고
한 마디 말속에 마음을 넣어 두기도 하며
자세히 들여다보면
나보다 타인을 먼저 이해해 주기로
단단히 마음먹은 사람
가까이 또는 멀리서
시원한 파도보다 더 힘차게
물보라 일으키며
내 앞에 점점 더 가까이 다가와
진솔한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는
살갑고 습습한 사람
그 누구보다 가슴이 따뜻한 언어들로
풀잎 속의 영롱한 이슬을 노래하는
진초록 같은 사람
또한 누구에게나
희망의 눈빛을 전해주는 편안한 사람
―「시인」전문
시인 정재규는 시인을 세 갈래로 바라보고 있다. 첫째는 마음이 숨을 곳을 마련해 주고, 또 한 마디 말속에 마음을 넣어 두기도 하는 사람이다. 자신보다 타인의 마음을 먼저 이해해 주는 사람이 시인이라는 것이다. 이타적인 존재상이랄까? 둘째, 진솔한 이야기보따리를 풀어 놓는 살갑고 습습한 사람, 시는 삶을 이야기하는 노래이다. 이런 점에서 시인은 이야기꾼이자 노래꾼이다. 마지막으로, 시인은 그 누구보다 가슴이 따뜻한 언어들로 풀잎 속의 영롱한 이슬을 노래하는 진초록 같은 사람. 시인은 희망의 메시지를 전해 주는 존재상이 아니어선 안 된다는 것이다.
비가 멈추자
아이들이 운동장에 우르르 달려 나온다.
질퍽한 땅 위에 흙을 모으는 아이도 있고
흙을 파헤쳐 구덩이를 만드는 아이도 있다.
막대기와 돌멩이로
땅에 그림을 그리는 아이도 있다.
무엇을 그리는지 가만히 보고 있으면
동물이기도 하고
사람이기도 한 생명들이
땅 위에서 꿈틀거리고 있다.
온 정성을 다해
막대기로 그린 그림 위에는
어느새 아이들의 환한 웃음소리가 스며있다.
땅 위의 웃음소리가
사람들을 불러 모으고 있다.
땅에 그린 그림이
햇빛을 향해 벌떡 일어나
손뼉을 치며 부활하고 있다.
―「땅 그림 그리기」 전문
땅 그림을 그리는 아이들의 이야기는 독특한 소재의 시 작품이다. 여기에서 아이들은 앞에서 본「시인」에 등장한 시인의 존재상에 진배없다. 어른에 의한 관찰자적인 시점의 성인 시이지만, 지향하고 있는 정신의 세계에 있어서는 동시 같은 시라고 할 수 있다.
땅에 그린 그림이 바로 시인의 시요, 예술가의 예술 작품이다. 시와 예술은 온 세상에 괴질이 창궐하고 있는 지금처럼 아무리 어려운 시대라고 해도 희망의 메시지를 담고 햇빛을 향해 벌떡 일어나 손뼉을 치며 부활하고 있다. 시인 정재규의 시에도아이들의 환한 웃음소리가 스며있기를 바라마지 않는다.
요컨대「땅 그림 그리기」는, 적어도 내가 생각하는 한, 시인 정재규의 가장 대표적인 작품인 것으로 보인다. 나는 이 시를 처음 접할 때 타고르의 명시「바닷가에서」를 떠올렸다. 무한한 세계의 바닷가에서 어린이들이 모입니다……로부터 시작되고 있는 그 주옥의 명시 말이다.「땅 그림 그리기」와 같이 성취적인 수준의 시편은 그의 고향 마을 어딘가에 시비로 세워져 기념되어야 한다고 보는 게 나의 소견이다.
시인 정재규의 시에는「어느 노인의 아침」에서 폐휴지를 한가득 실은 수레를 힘들게 끌고 가는 노인을 응원하는 반려견처럼,「휴지통」에서 냄새나는 쓰레기통을 뒤집고 있는 길고양이처럼,「야생화」에서 혼자여야 아름다움을 오래 뽐내는 야생화처럼 그렇게 잘나 보이거나 눈에 띄는 것들이 결코 아니다. 그의 시들도 아무렇게나 놓여 있는 무정물이라기보다, 살아있는 제 모습을 그럭저럭 이어가고 있는, 그래서 더 건강해 보이는 생명체와 같다.
하지만 심미적인 가치를 최대한 절제하고 있는 그답지 아니한 심미적인 시도 간혹 보인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다음에 인용되어 있는「무늬」이다. 한 여인의 치마폭에 아로새겨져 있는 무늬를 따라가다 보니 어디선가 나비 한 마리 쏜살같이 날아올라 멋진 춤을 추고 있다는 것은 매우 환상적이고, 환혹적이다.
한 여인이 걸어가고 있다. 휘황찬란한 옷은 아니지만 고운 색으로 국화, 개나리, 진달래꽃 이 옷마다 사방으로 흩어져 있다. 사뿐사뿐 걷는 치마폭에 숨어 있는 그림들은 한 발짝 뛸 때마다 가쁜 숨을 몰아쉰다. 잡자, 잡아보자. 흩날리는 꽃잎마다 단아한 여인의 숨 가쁜 소리도 들려온다. 만지고 싶은 마음에 무늬를 따라가다 보니 어디선가 나비 한 마리 쏜살 같이 날아올라 멋진 춤을 추고 있다. 마음속에 숨겨진 색깔마다 숨 멎은 아름다움이 진한 향기로 쏟아진다. 무의식 속에 묻혀 큰 숨을 몰아쉰다. 잠시 후 여인이 지나간 자리에 무 늬는 댕그라니 남아 있고, 어느새 여러 꽃이 무늬를 그리며 자태를 뽐내고 있다. 여인은 어디로 갔을까.
―「무늬」전문
이와 같은 시는 시인이 정년퇴임 이후에 시간의 여유가 많을 때 도전해볼 시적인 영역이 아닐까, 생각해 본다. 그의 시들이 운동장 한 구석에 놓여 있는 아름드리 느티나무가 그늘이 되어주듯이, 앞으로는 아름다운 무늬처럼 자태를 뽐내면서 사라지는 여인과 같은 시로 도약했으면, 한다.
그의 시가 지닌 미덕은 삶의 균형 감각이다.
교육자로서의 그, 시인으로서의 그는 사람으로서의 욕망을 적절히 자제할 줄 알면서 마음의 선을 긋거나, 세상을 바라보는 데 있어서는 극단으로 향해 기울어지지 않은 채 이비(理非)의 저울질을 할 수 있는 나이에 이르렀다. 이런 균형의 감각은 전깃줄에 앉아있는 새와 줄타기하는 광대의 유비(類比 : 사물을 유추하면서 서로 비교하는)관계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다. 그의 시집 간행을 다시 한번 축하면서, 마지막으로 다음의 시 일부를 인용한다.
전깃줄에 앉아있는 새와
줄타기하는 광대를 생각하며
(……)
기울어진 마음을 다잡아 본다
―「균형」부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