창세기 6장부터는 노아의 홍수와 관련된 내용들이 나오기 시작합니다. 하나님께서 물로 이 땅을 심판하실 수밖에 없으셨던 당시의 상황들이 설명되고 있으며 또한 의인이요 당세의 완전한 자로서 하나님과 동행하였던 노아에 대해서도 나오게 되지요. 그런데 앞으로 설명될 노아의 홍수 사건은 마지막 때를 살고 있는 오늘날의 사람들에게는 매우 중요한 교훈을 주고 있습니다.마태복음 24:36-39에 보면 "그러나 그 날과 그 때는 아무도 모르나니 하늘의 천사들도 아들도 모르고 오직 아버지만 아시느니라 노아의 때와 같이 인자의 임함도 그러하리라 홍수 전에 노아가 방주에 들어가던 날까지 사람들이 먹고 마시고 장가들고 시집가고 있으면서 홍수가 나서 저희를 다 멸하기까지 깨닫지 못하였으니 인자의 임함도 이와 같으리라" 말씀하고 있지요. 홍수의 심판이 있었던 노아 당시와 마찬가지로 오늘날 역시 죄악으로 관영하여 더 이상 하나님의 긍휼을 바라기 힘든 상태가 되었기 때문입니다. 데살로니가전서 5:1-4에 "형제들아 때와 시기에 관하여는 너희에게 쓸 것이 없음은 주의 날이 밤에 도적같이 이를 줄을 너희 자신이 자세히 앎이라 저희가 평안하다 안전하다 할 그 때에 잉태된 여자에게 해산 고통이 이름과 같이 멸망이 홀연히 저희에게 이르리니 결단코 피하지 못하리라 형제들아 너희는 어두움에 있지 아니하매 그 날이 도적같이 너희에게 임하지 못하리니"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니 여러분은 항상 빛 가운데 거하셔서 주님 다시 오시는 그 날이 결코 도적같이 임하지 않도록 해야 할 것입니다. 앞으로 증거되는 말씀들을 통해 노아의 홍수 사건이 주는 교훈을 잘 깨닫고 늘 깨어있는 신앙생활을 영위하며 다시 오실 주님을 맞이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본론
1.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본문 6:1에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 말씀하고 있는데 이 말씀에 앞서 창세기 4장의 내용을 잠시 복습하기로 하겠습니다. 가인의 후손인 라멕의 대에 이르러 비로소 사람들의 삶이 어느 정도 안정되었고 문명이라 말할 수 있는 것도 생겨나기 시작했는데 그것은 인구가 많아진 것이 가장 큰 요인이었지요. 인구가 적을 때에는 스스로 자급자족하며 의식주 문제를 해결해 나가기에 급급했으나 점차 사람의 수가 많아지면서 서로 협력하는 가운데 삶이 안정되고 문명을 싹틔워 갈 수가 있었던 것입니다. 하지만 이처럼 이 땅에 사람들이 번성하면서 삶이 안정되고 문명이 발달해 갈수록 하나님과의 관계는 오히려 점점 더 멀어져갔습니다. 하나님 중심의 삶에서 인간 중심적이고 자기중심적인 삶으로 바뀌어갔던 것이지요. 이는 오늘날도 마찬가지인 것을 보게 됩니다. 오히려 경제적으로 잘 살고 발달한 나라일수록 점점 더 자기중심적이 되어가고 있으며 기독교 역시 쇠퇴해 가는 것을 볼 수가 있지요. 문명이 발달하고 과학과 기술이 발달하며 더 안정되고 부유한 삶을 살수록 사람들은 하나님을 멀리하며 더욱 죄악으로 물들어 가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라는 말에는 두 가지 의미가 담겨 있음을 알아야 합니다. 첫째로는 말 그대로 많은 사람들이 이 땅에 번성하며 퍼져나가기 시작했음을 의미하고 둘째로는 그 결과 사람들이 점점 하나님과 멀어져가게 되었음을 의미하게 되지요. 겉으로 보면 번영되고 안정된 삶을 누리게 된 것 같지만 그와 동시에 사람들은 급속히 죄악으로 물들어가면서 점차 돌이킬 수 없는 상황으로 치달아갔던 것이지요. 더욱이 본문에 '땅'이라는 말에는 단순히 눈에 보이는 이 땅을 가리키는 의미만이 아니라 생령이었던 아담이 살던 영의 세계인 에덴과 대비되는 육의 세상을 나타내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따라서 사람이 땅 위에 번성한다는 것은 영적으로는 사람이 점차 육의 세상에 물들어감에 따라 육의 사람이 되어간다는 의미이지요. 이처럼 1절의 말씀은 당시의 상황이 신앙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모든 면에 있어서 이미 깊이 악으로 물들어 있었음을 나타내 줍니다. 하나님께서 왜 홍수로 이 땅을 심판하실 수밖에 없으셨는지 그 이유를 짐작케 해 주는 말씀이지요. 이어지는 "그들에게서 딸들이 나니"라는 말씀은 단순히 그 전까지는 사람들이 아들만 낳다가 딸들을 낳기 시작했다는 의미가 아닙니다. 그전에도 당연히 딸들을 낳았는데 왜 굳이 이렇게 표현하신 것일까요? 그것은 이어지는 2절에서 일어나게 될 사건들을 설명하기 위함입니다. 그전에도 물론 딸들이 있었지만 '사람이 이 땅에 번성하기 시작할 때에' 즉 육으로 깊이 물들어가면서 낳게 되는 딸들이 2절의 사건과 관련이 있기 때문입니다.
2.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2절에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 여기서 하나님의 아들들은 누구이고 사람의 딸들은 누구일까요? 오늘날 믿는 사람들 중에는 본문에 나오는 하나님의 아들들이 천사를 나타낸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그러나 히브리서 1:5 말씀을 보면 그렇지 않음을 알 수가 있지요. "하나님께서 어느 때에 천사 중 누구에게 네가 내 아들이라 오늘날 내가 너를 낳았다 하셨으며 또 다시 나는 그에게 아버지가 되고 그는 내게 아들이 되리라 하셨느뇨"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또한 마태복음 22:30에 "부활 때에는 장가도 아니 가고 시집도 아니 가고 하늘에 있는 천사들과 같으니라" 말씀하셨는데 이는 천사들이 사람들처럼 장가를 가거나 시집을 가는 것이 아님을 분명히 말씀해 주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니 하나님의 아들들이 천사를 가리키며 하나님의 아들이 사람의 딸들을 아내로 삼았다는 주장은 성립될 수가 없다는 사실입니다. 또한 어떤 사람들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아담의 후손들 중에서 정통 계보를 이어 나온 셋의 후예라고 주장하는 사람들도 있습니다. 가인의 후예와는 구별하여 셋의 후예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표현했다는 말입니다. 그러나 이 역시 설득력이 없는 것은 성경 어느 곳에도 셋의 후예를 하나님의 아들이라 표현했다고 할 만한 근거가 없으며 가인의 후예를 사람의 아들이라 표현한 것도 없습니다. 다만 구약 욥기에 하나님의 아들들이라는 표현이 몇 군데 나오는데 이것이 누구를 가리키는지에 대해서는 이미 창세기 강해를 통해 말씀드렸습니다. 그렇다면 본문에 나오는 하나님의 아들이란 과연 누구를 가리키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둘째 하늘의 에덴동산에 살고 있는 아담의 후손들을 의미합니다. 그 중에서도 아들이라 했으니 남자를 의미하지요. 아담이 에덴동산으로부터 쫓겨난 후에도 에덴 동산에서 낳은 그의 후손들은 여전히 그 곳에 살고 있습니다. 그리고 에덴동산과 이 땅을 오고 갈 수가 있는데 누구나 아무 때나 내려올 수 있는 것은 아닙니다. 아담이 에덴동산에 살면서 첫째 하늘과 둘째 하늘을 다스리는 권세가 있을 때는 에덴동산과 이 땅을 오고 가는 것이 비교적 자유로웠지요. 아담 자신이 자유롭게 오고 갔을 뿐만 아니라 아담의 후손들 중에도 아담과 함께 이 땅에 내려왔던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런데 아담이 범죄하여 이 땅으로 쫓겨오면서 그 동안 에덴동산과 이 땅을 자유롭게 오고 갈 수 있었던 문이 닫히게 되지요. 그렇다고 해서 완전히 닫힌 것이 아니라 오고 가는데 많은 제약이 따르게 된 것입니다. 영계의 문을 관장하는 그룹의 허락을 받아야만이 이 땅에 내려올 수 있게 되었지요. 그러니 이 땅에 내려올 수 있는 사람이 극히 제한될 수밖에 없었던 것입니다. 오늘 본문에 하나님의 아들들이라 한 것도 바로 이러한 제약 조건이 있었음을 나타내지요. 여자라 해서 이 땅에 결코 내려올 수 없는 것은 아니지만 주로 남자에게 내려오는 것이 허락되었으며 결국 이 남자들로 인해 영계의 질서가 깨어지는 커다란 사건이 발생하게 된 것입니다.
그렇다면 당시에 에덴동산에 살던 사람들은 왜 이 땅에 내려오고자 했던 것일까요? 가장 큰 이유는 바로 이 땅에 사는 사람들과 그들의 삶에 대한 호기심 때문이었고 또한 자신들의 조상인 아담을 직접 보며 위로하고자 하는 이유에서였습니다. 더욱이 아담이 직접 낳은 아들과 딸들은 부모인 아담과 하와가 당연히 보고 싶지요. 그러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도 아담이 에덴동산으로부터 쫓겨난 후에 곧바로 영계의 문을 닫아 에덴동산과 이 땅 사이의 왕래를 금하신 것이 아니라 제한적으로 허락해 주셨던 것입니다. 이처럼 에덴동산에 사는 사람들이 이 땅에 내려오는 것이 계속되면서 그에 따른 부작용이 나타나기 시작하였습니다. 그것은 바로 에덴동산의 사람들에게도 이 세상에 있는 육이 틈타기 시작한 것이지요. 앞서 말씀드린 대로 이 땅에 사는 사람들이 번성하기 시작하면서 사람들은 급속히 악으로 치달아 가게 되는데 에덴동산의 사람들도 이 땅에 내려오면서 이러한 악의 모습들을 자연히 접하게 되고 점차 육에 물들어 가게 되었습니다. 본문에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았다'는 것이 바로 에덴동산의 사람들에게도 안목의 정욕이 들어가게 되었음을 의미합니다. '어떻게 그들이 세상에 물들 수 있을까?' 생각할 수도 있지만 에덴동산의 사람들에게도 첫 사람 아담과 마찬가지로 자유의지가 있으니 그들도 육을 취하게 되면 얼마든지 육에 물들 수가 있습니다. 그들이 에덴동산에 사는 동안에는 항상 빛 안에서 지킴을 받고 있었기 때문에 그들의 자유의지가 비진리 쪽으로 발동하지 않았을 뿐입니다. 그런데 이 땅에 내려와 육의 것들을 보아가면서 자유의지 가운데 점차 안목의 정욕을 취하게 되자 마침내는 육신의 정욕으로 발전하게 되지요. 그 결과 이 땅에 사는 여자들을 아내로 취하게 되는 일까지 일어나게 된 것입니다. '에덴동산에 있는 여자들이 이 땅의 여자들보다 훨씬 아름다운데, 피부색도 곱고 아름다운데 왜 그들이 굳이 이 땅의 여자들을 아내로 취하였을까' 생각할 분도 있을 텐데, 사람이 육에 물들어 가면 아름다움의 기준도 달라질 수가 있다는 사실입니다. 오늘날 어떻습니까? 하나님의 사람들이 보면 너무나 정욕적이고 세상적인 모습인데도 세상의 사람들은 "아름답다."고 말합니다. 얼굴에 화장하는 것을 보아도 현란하고 음산한 색깔로 화장하면서도 예쁘다 말하지요. 당시의 상황도 이와 마찬가지였습니다. 에덴동산의 여자들은 하나님께서 처음 지어 주신 그대로의 미와 아름다움을 가지고 있는 반면 이 땅의 여인들은 세상적이고 정욕적인 모습으로 자신들을 치장하고 있었지요. 하나님의 아들들에게 이 땅의 여인들이 처음에는 낯설게 느껴졌지만 육에 물들어 가게 되니 오히려 에덴동산의 여자들보다 이 땅의 세상적인 여자들이 더 아름다워 보이기 시작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사람의 딸들을 취하게 된 것이고 그것도 자기들의 보기에 좋을 대로 다 취하였지요. 그러니 이러한 모습은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영계의 질서를 어기는 것이었습니다. 그렇지만 하나님께서는 이들에게 당장 벌을 내리시고 영계의 문을 닫아버리신 것이 아닙니다. 아예 이런 일이 일어나지 않도록 처음부터 막으면 되지 않으셨을까 생각할 수도 있지만 하나님께서는 강제로 하신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자유의지 가운데 모든 것을 맡겨 두셨지요. 스스로가 돌이킬 기회를 주셨던 것이며 공의의 한계에 이르기까지는 참고 또 참으셨던 것입니다. 그럼에도 시간이 지날수록 사람들의 악은 오히려 더해져만 갔고 정욕적인 모습이 되어가고 말았습니다. 마침내 하나님께서 정해 놓으신 한계선을 넘게 되자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심판하실 수밖에 없으셨지요. 이것이 결국 홍수 심판으로 이어지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3. 당시에 땅에 네피림이 있었고
그러면 당시의 상황을 좀더 자세히 알아보기 위해 4절을 먼저 살펴보도록 하지요. "당시에 땅에 네피림이 있었고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취하여 자식을 낳았으니 그들이 용사라 고대에 유명한 사람이었더라" 말씀했으니 당시에 땅에 네피림이 있었다는 사실과 그 후에도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을 취하여 자식을 낳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습니다. 이 말씀은 그 당시 이 땅에 내려온 하나님의 아들들이 두 종류였음을 말해주는데 구체적으로 무슨 말일까요? 당시에 땅에 네피림이 있었다는 것은 하나님의 아들들이 안목의 정욕에 이끌려 사람의 딸들을 취하기 전에 이미 이 땅에 네피림이라는 존재가 있었다는 뜻입니다. '네피림'이란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 사이에서 낳은 후예를 가리키지요. 그런데 네피림을 낳은 하나님의 아들들과 앞서 살펴본 대로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그들을 아내로 취하여 후예를 낳은 하나님의 아들들과는 커다란 차이점이 있다는 사실입니다. 이 땅에 내려와 네피림을 낳은 하나님의 아들들은 안목의 정욕에 이끌려 사람의 딸들을 취하고 그들로부터 후예를 낳은 것이 아니지요. 그러면 '네피림'이라는 존재가 태어나게 된 과정에 대해 살펴볼까요? 아담이 이 땅으로 쫓겨와 살게 된 이후 에덴동산에 사는 사람들 중에는 이 땅에 내려와 아담과 그의 후손들의 삶을 보면서 이 땅 사람들의 삶을 동경하는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자신들은 비록 에덴동산에서 무엇 하나 부족한 것이 없이 영원토록 살 수 있지만 이러한 자신들의 삶보다 오히려 이 땅에 살아가는 아담의 삶을 더 동경했던 것이지요. 오늘날 선진 문명과 문명의 이기를 뒤로 하고 전원생활이나 오지에서의 색다른 삶을 즐기는 사람들이 있는 것처럼 당시 에덴동산에도 이런 사람들이 있었던 것입니다. 또한 에덴동산에 살던 사람들 중에는 자신들의 조상인 아담과 하와를 사랑하여 이 땅에 함께 살기를 원하는 사람도 있었지요. 예를 들어 아담과 하와가 직접 낳은 자녀들 중에는 부모인 아담과 하와를 사랑하여 그들과 함께 이 땅에 머무는 것을 원할 수가 있습니다. 바로 이러한 사람들 중에 에덴동산의 삶을 포기하고 아예 이 땅에 내려와 정착한 사람들이 있었지요. 물론 이러한 사람들의 수가 많지는 않았습니다. 그리고 이들은 결코 이 세상의 육에 물들거나 안목의 정욕에 이끌려서 이 땅에 삶을 선택한 것이 아니라 스스로의 자유의지 가운데 선택한 것이었지요. 또한 사람들의 딸들과 결혼함에 있어서도 에덴동산에서와 같이 하나님께서 정해주신 질서를 좇았습니다. 바로 이러한 과정을 통해 낳은 후예가 네피림이지요. 혹시 여러분 중에는 '왜 에덴동산은 영원히 사는 삶이며 질병과 사망이 없는 곳인데 왜 사망이 있고 질병이 있는 이러한 땅에 와서 살려고 했을까?' 생각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그들이 이 땅에 와서 살 때에는 죽는다고 하는 것을 알지 못했어요. 아담이 9백 몇 살 살다가 죽는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에덴동산처럼 영원히 사는 것으로 알았던 것이지 얼마 살다가 죽는다는 것을 생각하지 못할 때의 일입니다. 아담이 930세를 향수하고 죽기 이전의 일이기 때문이었습니다.
4.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
그런데 이렇게 낳은 자손인 네피림과는 다른 과정을 통해 낳은 자손들이 생겨나기 시작합니다. 이 땅의 삶을 동경하여 이 땅의 여인들과 결혼해서 자손을 낳고 정착해서 사는 것이 아니라 단지 이 땅의 여인들의 육적인 아름다움에 빠져서 정욕적으로 여인들을 취하여 자손을 낳고 첫째 하늘과 둘째 하늘을 오가는 사람들이 나온 것이지요. 이러한 모습을 가리켜 바로 본문 2절에서 바로 "하나님의 아들들이 사람의 딸들의 아름다움을 보고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는지라"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2절 말씀은 네피림을 낳은 하나님의 아들들과 사람의 딸들에 대해서 말씀하신 것이 아니지요. 네피림을 낳은 사람들은 어떤 악을 좇아서 행한 것이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께서도 굳이 이들에게 벌을 내리시거나 죄 있다 하신 것이 아닙니다. 이런 경우와는 전혀 다르게 정욕적으로 이 땅의 여인을 자기들의 좋아하는 모든 자로 아내를 삼았던 에덴동산의 사람들이 나오게 된 것이며 이것이 바로 하나님의 진노를 사게 된 것이었지요. 더욱이 에덴동산의 사람들 중에서 점차 정욕적으로 이 땅의 여인들을 취하는 사람이 많아지자 이 땅의 질서는 물론이고 에덴동산의 질서 또한 위협을 받게 됩니다. 그들로 인해 영계의 질서가 혼란해졌을 뿐만 아니라 이 땅에도 도덕적으로 문란한 모습들이 만연하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중대한 결정을 내리시는데 그 내용이 바로 본문 3절의 말씀입니다.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나의 신이 영원히 사람과 함께하지 아니하리니 이는 그들이 육체가 됨이라 그러나 그들의 날은 일백 이십 년이 되리라 하시니라". 다음 시간에 3절에 대한 설명과 함께 4절에 "그들이 용사라 고대에 유명한 사람이었더라"에 대해서 말씀드리겠습니다. 이 밖에도 여러 가지 궁금하신 점들이 더 있으실 텐데 차차 설명이 나가게 될 것입니다.
결론
오늘은 노아 시대에 홍수의 심판이 있을 수밖에 없게 되었던 배경에 대해 말씀을 드렸습니다. 세월이 흐르면서 이 땅의 사람들은 점점 악으로 물들어 가게 되었는데 에덴동산에서 내려온 사람들까지 육으로 물들어 함께 악으로 빠지게 되면서 이 땅의 질서는 급속히 무너져갔지요. 더욱이 이 땅에 사는 사람들에게 있어서 에덴동산에서 내려온 사람들은 거의 신과 같은 존재로 여겨졌습니다. 에덴동산의 사람들은 이 땅의 육의 사람들에 비해 훨씬 뛰어난 지식과 지혜와 더불어 발달된 기술을 가지고 있었고 육의 사람들보다 여러 가지 면에서 능력 또한 더 뛰어났습니다. 그러니 이러한 에덴동산의 사람들이 자연히 인간 이상의 존재로 보여질 수밖에 없는데 이들이 이 땅의 사람들과 함께 악을 행해 나가니 이 땅의 사람들에게도 부정적인 영향을 크게 주었던 것입니다. 에덴동산의 사람들이 처음에는 단지 호기심에서 이 땅에 내려오기 시작했는데 나중에는 겉잡을 수 없는 결과를 가져오게 되었지요. 그렇다면 이를 통해 우리는 무엇을 깨달을 수 있습니까? 바로 죄의 속성에 대해 깨달을 수가 있습니다. 자유의지 가운데 한 번, 두 번 육을 취하게 되니 악이 전혀 없는 에덴 동산에 살던 사람들도 마침내 죄 가운데로 빠져드는 것을 볼 수가 있지요. 하물며 오늘날은 어떻겠습니까? 더욱 죄로 물들기 쉬운 이 세대 가운데서 여러분 자신을 진리로 지켜 나가려면 비진리의 것은 아예 접하지를 말아야 합니다. 여러분이 악은 모양이라도 버리고 성결되어 진리로 온전히 무장이 되어지기 전까지는 여러분이 비진리의 것을 보고 듣고 취할수록 다시금 여러분 안에 비진리가 쌓여갈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세상으로부터 안목의 정욕이 틈타게 되고 이것이 점차 육신의 정욕으로 발전하여 마침내는 비진리를 행하도록 만들어 가지요. 신앙생활을 잘 하던 사람이 갑자기 세상으로 빠져 가는 경우가 그렇습니다. 아직 버리지 못한 육의 모습이 결국 다시금 육으로 빠지게 만드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베드로후서 2:20-21에 "만일 저희가 우리 주되신 구주 예수 그리스도를 앎으로 세상의 더러움을 피한 후에 다시 그 중에 얽매이고 지면 그 나중 형편이 처음보다 더 심하리니 의의 도를 안 후에 받은 거룩한 명령을 저버리는 것보다 알지 못하는 것이 도리어 저희에게 나으니라" 말씀하셨으니 주님께서 다시 오시는 그날까지 죄를 피흘리기까지 싸워버리는 믿음의 경주를 결코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또한 열심히 충성하면서 신앙생활을 해도 온전히 영으로 들어오기 전까지는 항상 깨어 자신을 돌아보아야 하지요. 또한 고린도후서 10:18에 "옳다 인정함을 받는 자는 자기를 칭찬하는 자가 아니요 오직 주께서 칭찬하시는 자니라" 말씀하신 대로 주님께서 인정해 주시기 전까지는 스스로가 옳다 해서는 안 되며 주님께서 함께하시는 증거가 나타나야 합니다. 그리하여 주님의 칭찬을 받고 인정받는 모습이 되어 주님께서 함께하시는 증거가 풍성히 나타날 수 있기를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