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故鄕 생각
동암 아우님이 아들 내외, 두 손자 그리고 사부인(査夫人)을 모시고 입암을 방문하셨다는 글을 읽고 감동을 받고, 감사하고, 행복한 모습이 나를 얼마나 부럽게 하는지 나는 깊어가는 가을밤에 소백산 자락에 누워 고향을 생각해 본다.
할아버지, 아들, 손자 삼대가 함께 할아버지 고향을 찾는 것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나는 나라 안에 있어도 조손(祖孫)이 고향 방문을 못하였는데 이국 말리에서 손자들이 할아버지 태어난 곳을 보고 싶다고 찾아온 그 마음이 너무나 감사하고 아름답다. 앞으로 세계적인 인물이 되어 동암과 그 가문을 인하여 입암이 명소가 될 때 입암에 동암의 공덕비도 세워지리라.
고향 생각은 우리 집에서부터 시작을 하여야겠다. 우리 집은 입임리 299번지 바로 파출소 뒤 100m도 채 안 되는 거리에 있었다. 해방 전에는 주재소라 하였고 해방 후에는 지서라 하였고 지금은 파출소라 한다. 해방 전에는 길다란 닛본도를 차고 다니는 보기만 해도 무서운 왜놈 순사가 있었다.
해방 후에는 죽장에 구암산이 제2 모스크바라 불릴 만큼 좌우익이 격렬하게 싸우던 곳이라 한때에는 지서 주위에 돌담을 성 같이 쌓아 요새화한 일도 있었다. 우리 집은 근대사의 아픈 역사를 많이 보고 살았다.
우리 집은 내동댁 5형제 7남매가 나서 자랐다. 해방 전에는 입암 마을 중심에 명고댁, 천정댁, 율동댁, 자천댁, 덕포댁, 등 몇 집 외에는 다 초가집이었다. 담이 있는 집은 몇 집이 안 되고 다 울타리에 울섶으로 대문을 만들어 달아놓은 집이었다.
집 구조도 비슷했다. 안채는 돌계단 두서너 개를 올라가 툇마루가 있고 오른쪽에 건너 방, 가운데가 대청, 왼쪽이 안방, 다음에 정지(부엌), 정지 다음에 소를 키우는 마구간이 있는 집이 많았다. 아래채는 돌계단이 없이 낮게 사랑방이 있었고 소죽을 끓이는 큰 가마솥이 걸러 있었다. 우리 집은 소가 없어 아궁이만 있었다. 우리 집 사랑방에는 이른 아침부터 한문 배우는 아이들이 모였다.
우리 집 왼쪽에는 율리댁이다. 율리 할배, 횡계 아재, 고래 형님, 그리고 영만, 성우, 성우의 아들까지 나는 한 가문의 6대를 보면서 살아왔다. 옛날 같으면 참으로 오랜 세월을 살아온 인생이다. 횡계 아재는 일찍이 돌아가셔서 나는 기억하지 못하고 횡계 아재의 형제는 강원 아재이시다. 고래 형님은 태영, 태길, 태봉 3형제이신데 태봉 형님은 선생을 하다가 장가가기 전에 시국문제로 생사를 알 수 없게 되었다.
율리댁은 우리는 택호를 부르지 않고 큰집으로 불렀다. 큰집 할배, 큰집 아재, 큰집 형님으로 불렀다. 명절 때에는 빠지지 않고 제사에 참례하고 우리 집처럼 드나들었다. 아버님은 기제사(忌祭祀)에도 꼭 참례를 하셨다. 고래 형님은 연세가 아버님과 통죽(通竹)하는 사이였다.
우리 집 오른쪽 앞에는 온댕이댁이 있었다. 온댕이 할배 수하에 대규 할배, 연이 할매, 대식이 할배 3남매가 있었는데 연이 할매는 나와 동갑이라 어릴 때 그 집 건너 방에서 실랑 각시놀이 하며 비게 아기 사이에 재우고 눕기도 하고 새금팔이 그릇으로 밥상도 차려 동지께비하는 사이였다.
일곱 여덟 살 때 수수 대로 총 모양을 만들어 병정놀이 하던 것은 기억이 나지 않는데 네 살 다섯 살 때 연이 할매와 동지깨비 하던 것은 기억이 난다. 온댕이 할배는 사변 때 폭격 파편을 맞아 그 일로 세상을 떠나셨다.
우리 집 앞에서 골안으로 가는 길과 안 마을로 가는 길이 갈린다. 우리 집에서 골안을 바라보면 옛날에는 운애댁이 없었고 바로 대청이 보였다. 대청에는 대청 고지기가 있었다. 마을에는 고지기가 셋이 있었는데 대청 고지기, 동사 고지기, 그리고 서원 고지기이다. 고지기는 요사이 말로 하면 관리인 같은 것인데 관리인은 직책을 말 하는 것이라면 고지기는 신분을 말한다. 내가 아주 어릴 때 고지기는 나에게 도령님이라고 불렀다.
골안으로 올라가는 왼쪽에 대청이 있었고 바로 오른쪽에는 덕재댁 문중 종가가 있었다. 덕재 아재는 뵈옵지 못하였고 상주 아재는 내가 아주 어릴 때 우리 집 앞을 지나가시는 것을 몇 번 보았다. 우리 집 앞은 골안에 사시는 분들이 지나다니는 길목이라 골안에 사시는 분들의 얼굴을 자주 볼 수가 있었다. 그런대 상주 아재는 몇 번만 보고 보지 못하였다. 일본애서 유학하신 어른이란 말은 들어도 한 번도 누구와 대화하는 것을 보지 못하였다.
대청과 종가를 지나 한참을 올라가면 왼쪽 산 밑에 뒤에 대나무 숲이 있는 내세댁이 있었다. 내세 할배 맞아들 대호 할배는 교장 하셨고 막내 병식 할배는 육궁 중장이고 막내 딸 숙자 할매는 초등학교 동창이라 기억이 난다.
골안 오른쪽에는 서 씨가 몇 집 살았다. 본래 서 씨가 우리 권가보다 먼저 입암에 살았다고 하는데 나는 이해가 되지 않는다. 그 긴 세월 내가 어릴 때까지 댓집밖에 없었으니 말이다. 서 씨로는 서종수라는 어른이 걸을 때에 언제나 고개를 오른쪽으로 빼딱하게 하고 면사무소에 출근하는 것을 기억한다.
골안에는 아주 깊이 파면 오래된 기왓장 조각이 나온다고 하였다. 경주가 멀지 않은 곳이라 신라 때에는 사람이 많이 살았으리라는 추측들을 하였다.
우리 집 앞에서 온댕이댁 다음에 삼밭을 지나 삼밭 안쪽에는 원호댁이 있었다. 원호댁은 내가 어릴 때에는 보지 못하고 해방 후에 나타났다. 해방 전에 만주로 가셨다가 해방이 되고 바로 해방된 고향으로 돌아 오셨다고 한다. 만주에 처음 가서 입쌀밥을 얼마나 많이 잡수었는지 일어서지를 못하였다는 이야기를 하였다. 왜정 말기에 우리민족이 얼마나 굶었는지를 말해 주는 이야기이다.
원호 할배 슬하에는 중구 아재, 돌바우 아재(중구). 돌용이 아재(중촌), 용출이 아지매 4남매인데 돌용이 아재와 용출이 아지매는 나보다 나이가 적었다. 맏이와 막내는 할매를 닮았고 둘째와 셋째는 할배를 많이 닮았다. 영빈이 사진을 보고 원호 할배 모습이 생각났다. 원호 할배는 양자를 가셔서 생가를 치면 중구 아재와 재종숙 칠촌 간인데 양가를 치면 촌수가 멀다.
원호댁 다음 한 집을 지나면 뒷 거랑이 나오고 거랑을 돌다리로 건너면 왼쪽은 동사로 나가는 길이고 오른쪽은 골안으로 가는 길이고 바로 가면 안마을로 들어가는 길이다. 거랑을 건너 바로 왼쪽 모퉁이에 강원댁이 있었다.
강원 아재는 우리 큰집 횡계 아재의 동생이시다. 지금 영만에게는 종조부이고 나에게는 재종숙 곧 7촌 아재이시다. 강원 아재 슬하에는 태율 형님, 태근 형님 형제가 있었는데 태율 형님은 결혼하여 신혼 때이다.
해방 전이라고 기억이 되는데 마을에 호열자라는 유행병이 들어와 강원 아재 내외분 그리고 며느리가 돌아가셨다. 다섯 식구가 삽시간에 두 형제만 남는 가정이 되었다. 태근 형님도 결혼 전에 시국문제로 집을 나가고 소식이 없었고 태율 형님 혼자만 남았다. 이 때에 많은 사람이 죽었는데 내가 어릴 때라 누구 누구인지는 기억이 나지 않는다. 참으로 슬픈 추억이다.
강원댁 밑으로 한 집 지나 월연댁 중흠이 아재 집이고 더 나가면 면사무소 옆에 동사가 있었다. 또 강원댁 오른쪽 골안 가는 길로 가다가 첫 골목을 11시 방향으로 죽 올라가면 왼쪽에 율동댁이 있었다. 율동 할배 윗대는 선원댁이고 율동 할배 아래대는 임마 아재(重爀)이다. 선원 할배는 암은공(巖隱公)이시고 아버님이 글을 배우신 할배라 제사 날에는 꼭 제수를 보내고 그 심부름을 내가 다 하였다. 내가 가면 기특하다고 율동 할배가 홍시를 주셨다.
또 골안 가는 길로 조금 올라가면 큰 오동나무 밑에 온 동내가 마시는 우물이 있었다. 겨울에도 얼지 않고 김이 오르는 우물이다. 우리 엄마는 연약한 몸으로 손이 시리는 한 겨울에도 땀이 비 오듯 하는 여름에도 그 물을 동이로 이고 뒤 거랑 돌다리를 건너 와서 항아리에 채워 온 가족이 먹게 하셨다.
이제 안마을로 들어가는데 강원댁에서 조금 들어가면 왼쪽에 막실 댁이다. 막실 할배는 내가 아주 어릴 때 신경쇠약증으로 우리 집 사랑방에서 오래 동안 주무시며 치료를 받으신 대각(大慤) 할배이시다. 뒤에 죽장 중학교 교장이었다.
막실댁에서 조금 가다가 왼쪽 직각으로 꺾기는 곳에 입구자 큰 기와집이 있었는데 택호가 기억나지 않고 꺾기는 오른쪽으로 명고댁 담, 왼쪽으로 막실댁 담을 지나면 명고댁 대문이 나온다. 명고 할배는 시암공(是巖公)이시다. 내가 어릴 때에는 우리 마을에 제일 무서운 어른이 명고 할배었다. 이 때 마을에 큰 어른이 명고 할배, 교관 할배, 사골 할배가 계셨다.
명고댁 대문에서 왼쪽에는 넓은 논이 있고 오른쪽으로 휘어져 돌아가면 밭을 지나 오른쪽에 토성댁이 있었고 왼쪽에는 덕포댁이 있었다. 덕포댁은 다른 집과 달리 입구 자가 아니고 두이 자(二) 기와집이었다. 덕포 아재 슬하에는 아들이 기억나지 않고 딸 하나 태연이가 우리 소년 소녀 놀 때 늘 앞장서서 일을 하여 특히 기억이 난다.
토성댁 덕포댁을 지나면 오른 쪽에는 큰 기와집 천정댁이 있고, 왼쪽에는 봉걔댁 우리 큰 집이다. 아래 체에 수동댁 우리 숙모님 모자가 살았다. 우리 할매는 초산댁이고 할배와 아재는 내가 아주 어릴 때 돌아가셔서 기억하지 못한다.
우리 할매는 6.25 사변 바로 전에 돌아가셔서 난리 중 피난길에서도 아버님이 혼백을 가슴에 품고 다니면서 조석으로 음식을 받으시면 혼백을 내어 놓고 절을 하고 음식을 잡수셨다.
70년 전 나의 고향 생각은 여기서 멈춰야겠다. 아버님이 나시고 자라나신 큰 집까지 왔으니 더 갈 곳이 없다. 한 가지 추가하고 싶은 것은 이맘때면 온 마을에 감이 무르익어 들에는 곡식이 황금빛, 마을에는 감이 황금빛을 띠었다. 우리 큰집 율리댁은 집 뒤에 1년에 한 동을 따는 큰 감나무가 있었다. 감은 100개가 한 접이고 100접이 한 동이다. 한 나무에 10,000개가 열렸으니 얼마나 많은가!
다들 본적(本籍)을 옮겼으나 나는 미련스럽게 때때로 어려움이 있어도 본적을 옮기지 아니하고 지나 왔는데 이제 고향땅은 점점 멀어지고 있다. 한 줌의 재가 되어 돌아가려고 해도 받아줄 땅이 없고, 한 줌의 재를 선영(先塋) 앞에 뿌리라고 하니 자식들이 허락하지 않는다.
초가 다 타면 불은 꺼지고, 육신의 장막이 낡아지면 영혼은 본향 찾아 가야한다. 지난달에 형님이 가셨으니 이제 내가 갈 차래가 되었다. 장막 관리를 잘 하면 조금은 연장이 되겠지만 타고난 내구연한(耐久年限)은 불변하리라. 낡아진 장막에서 떠나지 않고 머물러 있으면 많은 사람 괴롭게 하니 빨리 가는 것이 복이리라.
깊어가는 가을밤 시월을 보내며 나 혼자 읊어본 고향 생각이다.
2015년 10월 25일 春江 泰 益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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