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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을 통해서 본 안보적 교훈(연구)
배 영 구*
최 기 웅**
Ⅰ. 머 리 말
Ⅱ. 병자호란의 전개과정
Ⅲ. 병자호란 대응실패 원인
Ⅳ. 現안보정세와의 비교
Ⅴ. 안보적 교훈
Ⅵ. 맺 음 말
*남수단 재건지원단
E-mail:sohop@naver.com
**육군 화생방학교
E-mail:cc180ss@naver.com
학술논문
56 군사연구 제141집
국문초록
우리나라와 역사적으로 가장 밀접한 관계를 형성하고 큰 영향을 미쳤던 중국은
1949년 공산화 된 이후,43년만인 1992년에 한ㆍ중 수교를 통해 양국관계가 정상
화 되었다.현재 중국은 강력한 경제력과 군사력을 바탕으로 중화제국의 부활을
꿈꾸고 있다.중국은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입지를 위협하는 새로운 세력으로 급부
상하고 있고,이에 따라 동북아에서의 분쟁 가능성도 적지 않게 높아지고 있다.
해방이후 우리의 우방이었던 미국은 중화문명에 의존하며 수천년을 살아온 우
리의 친중 사고를 은근히 걱정하고 있다.이러한 상황에서 한·중관계를 볼 때,병
자호란 당시와 현재 우리의 안보상황을 비교하여 교훈을 도출하는 것은 매우 의
미 있는 시도라고 본다.
병자호란의 대응실패는 단순한 외교정책의 오류나 군사력의 격차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그것은 시대변화를 직시하지 못하고 고루한 국가경영 시스템과 권
력에 눈이 먼 왕과 위정자들의 편협한 인식과 독선,근시안적 사고와 임진왜란이
후 누적된 민심의 괴리,군의 패배의식 등이 결합되어 나타난 총체적 국가경영의
실패였다.이러한 실패에도 불구하고 조선은 제대로 반성조차 하지 않음으로써 결
국 몰락의 길을 걷게 되었다.
오늘날 한반도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는 정세변화를 과거 명ㆍ청 교체기와 같은
상황이라고 볼 수만은 없다.그러나 같은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서는 과거
의 거울을 통해 현재의 문제점을 찾아내고 이를 수정,개혁하려는 의지와 실천이
필요하다.
중국의 부상은 우리에게 도전이자 기회이다.따라서 중국 발 안보위협 요인에
적절히 대처하면서 그들을 통일과 국가발전의 지지세력으로 유도해야 한다.이렇
게 하기 위해서는 국가지도층의 전략적 비전과 정치권ㆍ언론ㆍ학계 등 여론 주도
층의 노력을 바탕으로 올바른 대중정책의 방향 정립,군의 시대적 방향에 맞는 전
력 건설,국민들의 대정부 신뢰 등이 유기적으로 결합되어 추진되어야 할 것이다.
주제어 :병자호란,전개과정,안보정세,대응실패,원인,안보적 교훈
Ⅰ. 머 리 말
병자호란(1636.12∼1637.1)은 조선시대 역사에서 가장 안타까운 순간이다.임진
왜란(1592∼1598년)이라는 조선 건국이래 최대의 참상을 겪은 지 40년도 지나지 않
았건만 임진왜란의 패전을 통해 얻은 교훈을 망각한 채 전쟁 예방과 국방을 위한 노
력을 소홀히 함으로써 조선을 부모의 나라로 떠받들던 오랑캐 추장에게 국왕이 무릎
을 꿇고 수십만 명이 포로로 끌려가는 참혹한 결과를 맛봐야 했다.
청의 흥기라는 동아시아의 패권구도 변화는 명확했고 조선 침략 가능성도 예측 가
능하였다.병자호란은 단발성의 전쟁이 아니라 1627년 정묘호란 이후 상황이 악화되
면서 병자호란 발발로 이어진 10여년 간에 걸친 연속과정 속에서 발생했다.이는 사
전에 외교를 통해 전쟁을 예방할 기회가 있었고 청의 본격 침공에 대비할 시간이 있
었음을 보여준다.당시의 왕과 위정자들은 ‘무엇을 보고 어떻게 했다는 것인가?’개탄
하지 않을 수 없다.
우리는 인조정권이 왕권보위와 사대명분에 집착,명의 몰락과 신흥대국 청의 부흥
이라는 큰 흐름을 보지 못함으로써 결국 전쟁을 자초했다고 알고 있다.그렇다면 ‘외
교 실패만이 병자호란 대응실패의 원인인가?’,‘왜곡된 판단과 정책적 오류를 가져온
배경은 어디에서 기인한 것인가?’,‘조선과 청의 전력차가 있었다고는 하나 과거 수ㆍ
당ㆍ요를 격퇴하고 전 세계를 정복한 몽골군에 맞서 30년을 버틴 저력은 어디로 사
라졌단 말인가?’라는 의문이 제기되지 않을 수 없다.
최근 전문가들 사이에서 오늘날 G2로 상징되는 중국과 미국의 대립 등 격변하는
국제정세를 병자호란 당시와 비교하여 우리가 다시 선택의 기로에 서있다는 목소리
가 커지고 있다.본 논문은 이러한 의문과 최근의 불안한 주변정세를 감안하여 병자
호란의 패전원인을 정치ㆍ외교ㆍ군사적 측면에서 분석하여 현재의 안보상황과 비교
를 통하여 국가안보적 차원의 교훈점을 찾고자 하는데 목적이 있다.이를 위하여 병
자호란 전개과정을 개관한 다음 전쟁예방 실패 및 패전의 원인을 다각적으로 분석하
고 당시와 현재의 안보상황을 비교 평가하여 안보적 교훈과 시사점을 도출하였다.
학술논문
58 군사연구 제141집
Ⅱ. 병자호란의 전개과정
1. 인조반정
1623년 3월 23일 능양군(綾陽君)이 조선의 제15대 임금 광해군(光海君)을 끌어내
고 왕좌에 올랐으니 그가 곧 인조(仁祖)다.반정에 성공한 인조는 광해군의 죄악 열
가지를 열거하여 반정의 정당성을 확보하려 하였다.제일 먼저 거론한 것은 이복동
생 영창대군(永昌大君)을 죽이고 모후를 폐한 폐모살제(廢母殺弟)였으며,궁궐공사
를 대대적으로 일으켜 백성들에게 고통을 준 것,선 왕조의 구신을 몰아낸 것 등도
열거하였다1).또한 외교적으로도 임진왜란 당시 명이 도와준 재조지은(再造之恩)을
망각하고 오랑캐에 성의를 베풀고 심하(深河)전투 때에는 전 군을 오랑캐에게 투항
시켰으며 황제가 칙서를 내려도 구원병을 파견하지 않아 예의의 나라 조선을 오랑캐
와 금수의 나라로 만들었다고 성토하였다.2)
심하전투는 1619년 명이 누르하치(努爾哈赤)를 정벌할 때 조선에 원군을 요청하여
강홍립(姜弘立)이 이끄는 1만 5천명을 보냈는데 당시 강홍립은 전세의 불리함을 알
고 후금군에 포위되자 항복해 버렸다.서인들은 이를 광해군의 밀지에 따른 것이라
면서 재조지은(再造之恩)을 저버린 대표적 사례로 들곤 하였다.
“우리는 200여 년 동안 명나라를 지성으로 섬기는 데 조금도 어긋남이 없었다.선조
재위 40여년에 명나라로부터 재조지은(再造之恩)을 입었음에도 불구하고 광해군은
1619년 조선군을 사허루 전투에 참전시키고 강홍립에게 밀지를 주어 후금에 항복하
게 했으니 이는 200년 간 사대한 정성을 한순간에 허사로 만든 것이다.3)”
인조는 즉위하자마자 평안북도 가도에 웅거해 있던 명의 장수 모문룡(毛文龍)에게
둔전과 염전설치를 허용하고 명군과 협력하여 오랑캐를 섬멸할 것임을 다짐하는 등
적극적인 협력의사를 전달하였다.4)
1)한명기,『병자호란 1』푸른역사,2014,p.24.
2)홍용현,「병자호란 실패 원인과 안보적 교훈」『정책연구서』,2014,p.5.
3)『인조실록』,인조 1년 3월 임자
4)서인한,「한권으로 읽는 역대병요․동국전란사」『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2003,p.29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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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사연구 제141집 59
명 조정에서는 인조의 왕권찬탈에 대한 반대론이 일기도 했으나 결국 후금을 견제
하기 위해 조선을 적극 활용해야 한다는 주장이 설득력을 얻었다.이에 따라 명은
인조정권에 책봉의 은혜를 베풀고 적극적으로 오랑캐 토벌에 나설 것을 요구하였다.
이러한 정황은 후금의 첩자들을 통해 후금정권에 보고돼 조선에 대한 경계심을 증폭
시켰다.
2. 정묘호란의 발발
인조가 등극한 지 4년째인 1626년 누르하치는 팔기군을 이끌고 영원성(寧遠城)5)
을 공격하였는데 명의 장수 원숭환(袁崇煥)은 포르투갈 상인들로부터 구입한 서양식
대포인 홍이포를 활용하여 10배 이상의 병력을 가진 누르하치 부대를 괴멸시켰다.
부상을 입은 채 철수한 누르하치는 그해 8월에 세상을 떠나고 8남 홍타이지(太宗)가
후임 칸으로 등극하였다.그러나 홍타이지는 권력을 완전히 장악하지 못한 상태였으
며 영원성 패전이후 요동지역 한인과 몽골부족들의 동요,만주지역의 심각한 기근,
명의 식량교역 중단으로 사람이 사람을 서로 잡아먹는 등 심각한 위기에 봉착해 있
었다.이러한 상황은 홍타이지로 하여금 명을 향한 서진을 일시 미루고 내부결속을
다지는 한편 조선 정벌을 통해 식량과 생필품을 확보하고 명과의 전면전에 앞서 배
후의 위협을 제거할 필요성이 있다는 인식을 심어 주었다.
홍타이지는 1627년 1월 13일 자신의 정적이었던 아민(阿敏)을 지휘관으로 하여 만
주족,한족,몽골족으로 구성된 3만명의 다국적군을 구성하여 조선을 침공하였다.6)
아민이 의주성을 쉽게 함락하자 조선은 제1방어선을 청천강 이남에,제2방어선은 황
주일대,제3방어선은 평산일대를 연하는 선으로 하여 임진강을 사수토록 하였다.7)
청천강 방어선이 붕괴될 경우 훈련대장 신경진(申景禛)이 도성방어를,수어사 이서
(李曙)가 남한산성을 중심으로 하삼도 병력을 모아 증원군을 편성하고 인조는 강화
도로 들어가 항전한다는 계획을 세웠다.8)
5)현 요녕성 흥성현(興城縣)소재
6)서인한,「한권으로 읽는 역대병요․동국전란사」『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2003,p.297.
7)노영구,「17세기 전반기 조선의 대북방 방어전략과 평안도 국방체계」『軍史硏究』135輯,
2013.pp.347∼349.
8)『인조실록』,인조 5년 정월 을유
학술논문
60 군사연구 제141집
① 제1방어선 :귀주성에 주둔하고 있는 평안도 병마절도사 남이흥(南以興)이
안주를 거점으로 후금군의 청천강 이남 진출을 저지한다.평안감사 윤헌(尹
暄)은 안주에 후방지원을 하고 안주가 돌파되면 평양성을 고수하여 후금군의
남하를 지연시킨다.
② 제2방어선 :황해병마사 정호서(丁好恕)는 황해도 여러 읍의 군사와 경기지역
증원군을 황주에 집결시켜 황주∼송림 일대에서 평양∼중화를 연하는 선으로
남하하는 후금군의 진출을 저지한다.
③ 제3방어선 :도원수 장만(張晩)은 평산에 지휘소를 설치하여 안주·황주 일대의
방어군을 총괄 지휘하면서 봉산∼재령에 방어선을 구축하여 개성과 한성 방면
으로 진출하는 후금군을 저지한다.
④ 수도방어 :훈련대장 신경진은 한성 포수 및 경기지방의 군사를 지휘하여 도성
방어와 치안을 유지한다.수어사 이서는 남한산성을 거점으로 하삼도의 증원
군이 도착하는 대로 군을 재편성하여 안주·황주·평산에 증원군을 투입한다.만
일 사태가 급박하여 국왕이 강화도로 파천할 경우 수도 방어군과 협력하여
강화도를 엄호한다.경상도 2,000명,충청도 5,000명,전라도 3,000명의 하삼도
병사들은 남한산성으로 집결한다.각 도의 수사는 가용 선박을 차출하여 명령
에 따라 강화도로 출동한다.강원도 병력은 평산으로 이동하여 도원수 장만
의 지휘를 받는다.안주의 제1방어선이 붕괴되면 국왕은 강화도로 몽진한다.
<표 1> 주요내용
출처 :장학근,2010,『조선,평화를 짝사랑하다』,플래닛 미디어,pp.240∼241
그러나 의주성에 이어 안주성도 훈련부족과 의지 결여 등으로 쉽게 붕괴되었다.
안주성 함락이후 평양 방어군이 선천으로 이동하고 제2방어선 병력도 후퇴하는 등
변변한 방어 한번 제대로 못하고 연이어 패퇴하였다.제1·2방어선이 무기력하게 무
너지자 인조는 강화도로 피난하고 소현세자(昭顯世子)는 전주로 가 분조,즉 임시정
부를 이끌도록 하였다.인조는 몽진 직전 신료들의 건의를 받아들여 반정이후 민생의
병자호란을 통해서 본 안보적 교훈(연구)
군사연구 제141집 61
고통을 덜어주지 못한 점을 사과하고 자신을 도와줄 것을 요청하는 교서를 발표하였
다.일종의 사과성명이었다.
그런데 승승장구하던 아민군이 갑자기 진격을 멈추었다.아마도 그 병력으로는 서
울까지 진격이 어렵고 조선 내륙에서 고립될 가능성과 영원성에 주둔한 원숭환 등
명나라 부대의 후방공격을 우려한데 따른 것으로 보인다.9)이후 후금은 사신을 보내
명과의 관계를 끊되 후금이 형이되고 조선이 아우가 되는 형식으로 화약을 맺자는
내용을 제안하였고,인조는 상황이 여의치 않음을 인식하고 1627년 3월 3일 강화도
에서 후금의 전통대로 흰말과 검은말을 잡아 형제의 맹약을 맺었다.아민군은 철
수10)하였고 합의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조선은 후금을 형의 나라로 섬길 것을 맹약한다.
② 후금군은 화의가 성립되는 즉시 철군한다.
③ 양국 군대는 자국의 영토을 지키고 압록강을 넘지 않는다.
④ 조선은 후금과 강화한 후에도 명과 단교하지 않는다.
⑤ 양국은 매년 2차에 걸쳐 사절을 교환하고 조선의 영토 내 회령과 난자도
등에 무역시장을 개설한다.
<표 2> 주요 강화내용
출처 :장학근,2010,『조선,평화를 짝사랑하다』,플래닛 미디어,p.244
3. 조선ㆍ후금관계의 재악화
정묘화약을 통해 조선은 명과 맺은 기존의 사대관계를 그대로 유지하되 후금과 형
제관계라는 교린관계를 맺었다.후금은 조선을 쉽게 점령할 수 있었지만 은혜를 베
풀어 철수하였다고 했다.조선은 마지못해 개돼지와 화약을 맺었다는 속내를 안고
있었다.또한 후금은 후금 사신을 명 사신에 준해 대우해 줄 것을 요구하였으나 조
선이 열악한 재정 상황을 들어 난색을 표하자 여전히 자신들을 오랑캐 취급을 한다
며 불만을 드러냈다.11)
9)홍용현,「병자호란 실패 원인과 안보적 교훈」『정책연구서』,2014,p.9
10)『인조실록』,인조 5년 2월 경유
11)서인한,「한권으로 읽는 역대병요․동국전란사」『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2003,pp.301∼304.
학술논문
62 군사연구 제141집
한편 홍타이지는 1631년 대릉하성 공격에 나서기 전 조선에 국서를 보내 병선 지
원을 요청하였으나 조선은 부모의 나라를 공격할 수 없다며 거절하였다.이 와중에
명의 장군 공유덕(孔有德)과 경중명(耿仲明)이 수군 14,000여 명을 이끌고 후금에 투
항하자 명은 조선과 함께 이들을 추격할 것을 제의하였고 조선은 이를 받아들여 압
록강 인근에서 후금군과 교전까지 벌였다.이 사건으로 인해 후금은 더 이상 조선을
신뢰할 수 없는 국가로 인식하게 되었다.12)
마침내 홍타이지는 칭제건원(稱帝建元)13)을 통해 황제의 자리에 올랐으며 조선의
추대를 받음으로써 정통성과 명분을 확실히 확보하고자 조선에 사신을 보냈다.사신
일행은 1636년 3월 조선에 들어와 후금이 국호를 청으로 고치고 홍타이지가 황제로
추대되는 문제에 조선왕이 동의하고 신하의 예를 취할 것을 요구하였다.그러나 조
선 대부분의 신료들이 후금 사신 일행을 참수하고 결사항전하자고 주장했다.조정은
후금과 화의를 중지하고 전쟁에 대비하라는 교서를 전국에 하달했고,결국 홍타이지
는 조선 침략을 최종 결심하게 되었다.
4. 병자호란 발발과 삼전도의 굴욕
1636년 12월 2일 태종 홍타이지는 청병 7만 8,000명,한병 2만,몽고병 3만으로 편
성된 총 병력 12만 8,000명의 대군을 거느리고 조선 침공을 감행하였다.14)청 태종의
선봉부대는 12월 8일 압록강을 건너 의주를 공격하지 않고 곧바로 남하하여 안주로
향했고 좌익군이 실질적 방어력이 없던 의주성을 무혈 점령하였다.의주를 손에 넣
은 청 태종은 용천∼곽산∼선천∼정주를 차례로 점령하고 청천강 주력 방어부대가
배치된 안주성도 쉽게 함락시켰다.청군 선봉부대는 압록강을 건넌 지 불과 엿새만
에 한양 근교까지 진격하였다.15)
조선에서는 안주∼평양선에서 청군을 격퇴시키는 것이 불가능하므로 황주의 방어
력을 강화하여 남진을 지연시키고 강화도∼한양∼남한산성을 연하는 선에서 지구전을
12)노영구,「17세기 전반기 조선의 대북방 방어전략과 평안도 국방체계」『軍史硏究』135輯,
2013.pp.353∼354.
13)황제라 칭하게 되면 반드시 연호를 정한다는 뜻임.
14)노영구,「17세기 전반기 조선의 대북방 방어전략과 평안도 국방체계」『軍史硏究』135輯,
2013.pp.356∼357.
15)정원열․김정근,「군사대비태세 차원에서 본 병자호란의 참패원인」『軍史硏究』138輯,
2014.p.100.
병자호란을 통해서 본 안보적 교훈(연구)
군사연구 제141집 63
펼치기로 결정하였다.그러나 그날 밤 도착한 김자점(金自點)의 두 번째 장계가 청군
선봉대의 평양 통과 사실을 알려오자16)다급해진 조정은 우선 종묘의 신주와 비빈,
왕자,종실,백관의 가족들을 강화도로 피신시켰다.이후 강화도로 들어가려던 인조
일행은 청군 일부 병력이 이미 한성∼강화도 간 통로를 차단하고 있다는 소식을 접
하고 다시 도성으로 돌아가 버렸다.
인조는 상황이 다급해지자 이조판서 최명길(崔鳴吉)을 강화회담 명분으로 적진으
로 들어가 공격을 지연시키도록 하고 그 사이에 수구문∼송파를 거쳐 밤 10시경 병
력 1만여명을 거느리고 남한산성에 입성하였다.17)국왕 일행이 도착했을 당시 성에
는 쌀 6천여석이 비축되어 있었으며 이는 군사 1만명이 약 45일간 지탱할 수 있는
분량이었다.18)
청의 주력군은 남한산성으로 통하는 모든 길을 봉쇄했다.고립된 남한산성내 사정
은 극도로 악화되었다.산성에서는 양곡 1일 배급량을 줄이면서 농성을 계속했으나
기다리던 지원병은 오지 않았고 포위망을 뚫기 위한 소규모 기습작전은 매번 실패로
돌아가고 말았다.19)산성방어에 주력하던 서북지역 조선군은 청군이 우회하자 뒤늦
게 산성에서 나와 청군 추격에 나섰으나 청군의 기습에 말려 김자점군 5,000여 명이
궤멸되기도 하였다.
강원감사 조정호(趙廷虎),유도대장 심기원(沈器遠)등의 부대 1만 수천명도 현재
의 경기도 동부쪽에 모여 들었으나 청군의 위세에 눌려 감히 남한산성을 구원하러
오지 못하고 배회하기만 하였다.하삼도에서 달려온 경삼감사 심연(沈演)이 이끄는
병력 8천여명도 충주에 도착하였으나 청군의 전력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해 참패하
고 만다.다만 전라병사 김준룡(金俊龍)이 이끄는 2천여명의 병력이 수원 광교산으
로 이동하여 청군 지휘관 양고리(揚古利)가 이끄는 5천의 병력을 상대로 조총을 이
용하여 양고리를 쓰러뜨리면서 승전을 거두기도 하였으나 군량과 화약이 떨어져 결
국 남쪽으로 철수하고 말았다.20)
16)『인조실록』,인조 14년 12월 계미
17)장학근,『조선,평화를 짝사랑하다』플래닛 미디어,2010,p.264.
18)한명기,『병자호란 2』푸른역사,2014,p.100.
19)장학근,『조선,평화를 짝사랑하다』플래닛 미디어,2010,p.264.
20)한명기,『병자호란 2』푸른역사,2014,pp.121~138.
학술논문
64 군사연구 제141집
강화도로 진격한 청군은 예성강과 임진강,한강 하류 일대의 민간인 선박을 징발
하고 부근 민가를 헐어내어 뗏목과 배를 건조하고 그 위에 홍이포를 장착,1637년
1월 22일 새벽 강화도 갑곶진에 상륙하였다.21)강화도에 상륙한 청군은 홍이포와 운제,
당차 등 공성기구를 이용하여 성을 점령하였고 청군은 왕실가족 200여명을 이끌고
강화도를 출발해 1월 27일 본영이 있는 삼전도(현 송파구 삼전동)로 향하였다.
강화도 함락 소식이 남한산성에 전해지자 성 내 사기는 급격히 저하되었다.인조
는 저항이 한계에 이르렀음을 깨닫고 최명길 등을 보내 강화의사를 전달하고22)청
의 강화조약을 수용23)하였는데 주요 내용은 다음과 같다.
① 조선은 항복과 동시에 명에서 받은 고명과 책인을 청 황제에게 바친다.
② 조선은 명과의 국교를 단절하고 청국과 군신관계를 맺는다.
③ 명의 연호를 폐지하고 청국의 연호를 사용한다.
④ 세자와 왕자 및 대신의 자제를 청국 심양에 인질로 보낸다.
⑤ 청이 명을 공격할 때 조선은 청에 원병을 파견한다.
⑥ 조선은 매년 청에 사신을 파견하고 일정한 품목과 예물을 청에 보낸다.
⑦ 조선은 도주한 조선인 포로를 즉각 심양으로 돌려 보낸다.
<표 3> 주요 강화내용
출처 :한명기,2014,『병자호란 2』,푸른역사,pp.217∼219
인조는 1637년 1월 30일 새벽 세자와 대신,그리고 호위군 500여 명을 거느리고 남
한산성 서문을 나와 삼전도로 향하였다.삼전도에 도착하여 인조는 청 태종이 앉아
있는 단상을 향해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의 굴욕적 예를 올림으로써 전쟁을 종결하
였다.24)
21)장학근,『조선,평화를 짝사랑하다』플래닛 미디어,2010,pp.265∼267.
22)『인조실록』,인조 15년 1월 임인
23)『인조실록』,인조 15년 1월 무진
24)『인조실록』,인조 15년 1월 경오
병자호란을 통해서 본 안보적 교훈(연구)
군사연구 제141집 65
Ⅲ. 병자호란 대응실패 원인
오늘날 안보의 개념은 전통적인 군사ㆍ외교적 관점을 벗어나 정치ㆍ경제 등을 포
함하는 종합안보의 개념으로 확대하여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이 장에서는 병자호란
실패 원인을 정치ㆍ외교 등 비군사적 측면과 군사적 측면을 아울러 다층적인 관점에
서 분석하고자 한다.
1. 정치적 측면
인조 정권은 출발단계부터 국론 분열의 요소를 안고 출발하였다.반정세력들은 반
정명분 중 하나로 광해군이 이른바 재조지은(再造之恩)을 망각하고 후금과 결탁하여
예의의 나라 조선을 오랑캐와 금수의 나라로 만들었음을 내세웠다.이러한 반정명분
이 일종의 집권 이데올로기로 정착되면서 후금과의 실리적 관계 설정을 주장하는 것
은 폐주 광해군을 옹호하는 세력과 동일시하면서 청의 부상과 명의 내부적 몰락이라
는 객관적 상황을 외면하게 했다.이러한 명분은 국제 역학 구도 변화에 따른 실리
적 접근을 제기할 통로를 애초부터 봉쇄해 버렸다.
시대착오적인 명분론 외 지도층간 반목도 주요한 패전요인이었다.반정 성공이후
인조는 반정공신과 광해군 집권시 인목대비 폐비에 적극 반대했던 서인들을 이조,
병조,호조 등 주요 직책에 중용하였다.남인들도 일부 등용하였으나 요직에는 대부
분 배제되었으며 광해군 추종세력인 북인들에 대해서는 철저하게 탄압을 가했다.25)
북인세력들은 인조정권에 뿌리깊은 반감을 품게 되었고,이는 정묘ㆍ병자호란이 발
발하자 임진왜란 때와는 대조적으로 의병모집과 활동이 활발히 이루어지지 않은 원
인이 되었다.26)
반정공신 책봉 과정에서도 강력한 무장세력인 이괄(李适)을 푸대접함으로써 반란
으로 이어졌다.이들이 거느린 2만여명의 대군이 소멸됨으로써 평안도 방어에 허점이
발생하게 되었다.27)정묘호란 패전이후에는 반정 명분을 저버리고 후금과 타협한 데
25)엄변일,「한민족전쟁통사Ⅲ,조선시대전기」『국방군사연구원』1996,pp.298∼299.
26)엄변일,「한민족전쟁통사Ⅲ,조선시대전기」『국방군사연구원』1996,pp.330∼333.
27)김강령,「정묘·병자호란의 전황과 교훈」『군사논단』제55호 2008,pp.161∼162.
학술논문
66 군사연구 제141집
대해 사족들이 반발하고 인조반정의 정당성을 거부했다.강원도 횡성지역에서 이인
거(李仁居)가,죽산에서는 허유(許逌)ㆍ유효립(柳孝立)이,남원에서는 윤운구(尹雲
衢)등의 모반사건이 잇달아 발생하기도 했는데 이는 지도층의 분열상이 극심했음을
보여주고 있다.
서북지방에서는 가도의 모문룡 부대에 대한 조정의 지원이 원망의 대상이 되었다.
모문룡이 인조의 책봉에 결정적 기여를 하면서 기고만장해진 모문룡 부대는 막대한
군량미를 요구하는 것은 물론 밀무역과 약탈을 자행하기도 했다.조선은 명과의 관
계 악화와 재조지은(再造之恩)을 들어 모문룡 부대를 제어할 의지를 보이지 않았으
며 이는 조정에 대한 지역 주민들의 불신을 가중시켰다.28)
인조 정권의 정책 실패로 민심이 조정을 떠난것도 전쟁실패의 주요한 요인이라고
할 수 있다.인조는 광해군의 실정을 지적하며 민생안정에 힘쓸 것을 약속하면서 반
정에 성공하였다.그러나 재정안정을 위한 대동법ㆍ호패법ㆍ군적정리 사업 등은 도
탄에 빠진 백성들의 호응을 전혀 얻지 못했고 다수의 도주민을 야기하는 부작용만
낳아 결국 시행도 해보지 못하고 유야무야 되고 말았다.
한편 이괄의 난 당시 도성이 함락당하자 백성들이 이괄군을 맞이하면서 공신들의
집을 습격했고 한양 수복후에는 이괄세력에 호응한 백성들에 대한 박해가 이어지면서
민심이 다시 한번 인조정권에 등을 돌리게 되는 계기가 되었다.이로인해 정묘ㆍ병자
호란 당시 왕과 세자가 한성을 떠나자 도성안의 백성들은 무능한 조정을 원망하면서
일부 지역은 약탈과 방화를 일삼아 치안 부재 상태가 됐다.백성들은 전쟁이 발발하자
백성들을 버리고 한양을 빠져나간 왕을 구하기 위해 자발적으로 나서지 않았다.
2. 외교적 측면
인조 정권이 청의 침략을 방지하기 위해 외교적 노력을 전혀 기울이지 않았다고는
할 수 없다.그러나 반정세력은 기본적으로 후금에 대한 적대적 감정을 품고 있었고
조정의 여론도 강경론으로 흘러 갈 수 밖에 없는 구조하에서 전쟁을 막기위한 예방
외교 노력은 무시되기 일쑤였다.
정묘호란 이후 병자호란이 발발하기까지 약 10년간 양국 관계는 수 차례의 갈등과
대립으로 점철되어 왔다.그런데 이 중에서도 1632∼1633년의 국교단절 위기와 병자
28)서인한,「한권으로 읽는 역대병요․동국전란사」『국방부군사편찬연구소』,2003,p.303.
병자호란을 통해서 본 안보적 교훈(연구)
군사연구 제141집 67
호란을 촉발하게 된 1636년의 칭제건청(稱帝建淸)을 전후한 위기는 그 갈등의 정도
가 심각하여 분쟁으로까지 확대될 가능성이 농후하였다.
인조 10년(1632)의 조선과 후금 사이의 국교단절 위기는 경제적인 요인과 외교적
인 문제가 혼합되어 발생하였다.후금은 세폐(歲幣),사신대우 등에 있어서 명과 동
등한 예우를 해줄 것을 요청했으나 조선에서는 후금의 무례함에 분개하는 한편 후금
의 진정한 의도를 파악하기 위해 노력하였다.한 때 국교단절까지 갈 뻔 했으나 후
금의 의도가 세폐(歲幣)를 증가시키는 데 있음을 알고 가까스로 ‘국교단절의 위기’를
넘길 수 있었다.29)
청이 조선을 공격한 원인 중 홍타이지의 황제 즉위에 대한 지지를 거부한 것은 결
정적인 이유가 되었다.황제 즉위식에 참석한 조선사신은 군신관계가 아닌 형제관계
인 청의 황제에게 절을 할 수 없다며 버티기도 하였다.30)
또한 가도에 주둔한 명군 모문룡에 대한 조선의 지원은 후금을 자극하기에 충분하
였다.모문룡은 요동지역에서 후금군을 상대로 유격전을 전개하다 후금군에 밀려
1621년 12월 조선으로 들어왔는데 광해군은 모문룡을 위험하고 경솔한 인물로 여겨
육지와 고립된 섬 가도로 밀어넣고 그의 원조요청을 받아 들이지 않았다.그러나 인
조는 반정성공 이후 명의 책봉을 받기 위해 모문룡의 협조를 받았고 그로 인해 둔전
설치 허용,군량미 제공 등 지속적인 지원을 제공하였던 바,이는 모문룡을 목의 가
시처럼 여기던 청을 자극하기에 충분하였다.모문룡이 원숭환에 의해 제거된 뒤에도
그를 대신해 가도를 관리한 서부주(徐敷奏),진계성(陳繼盛)등은 조선과 후금의 통
로를 막고 후금의 사신을 공격하는 등 후금과 조선의 관계 단절을 시도하였다.이러
한 상황에서도 조선은 가도를 명과 부자관계를 이어주는 상징으로 인식하여 가도에
대한 지원을 지속함으로써 후금의 반발을 샀다.31)
특히 1631년 병자호란 발발 직전 후금군이 가도를 정벌하겠다며 병선 1백척을 빌
려줄 것을 요구하였는데 이를 거절한데 이어 명의 장군 공유덕과 경중명이 수군을
이끌고 후금에 투항하자 명과 함께 이들을 공격한 사건은 청을 분노케 하였다.
29)박현모,「10년간의 위기 :정묘-병자호란기의 공론정치 비판」『한국정신문화연구원』
한국정치학회보 37권 2호,2003,pp.31∼34.
30)한명기,『병자호란 2』푸른역사,2014,p.48.
31)엄변일,「한민족전쟁통사Ⅲ,조선시대전기」『국방군사연구원』1996,pp.335∼339.
학술논문
68 군사연구 제141집
3. 군사적 측면
병자호란 패전의 주요한 원인 중 가장 큰 원인은 청군과의 압도적인 전력차라고
하겠다.병자호란 당시 청군은 여진족 약 8만명과 몽골병 3만,한병 2만 등 총 13만
여명의 혼성부대를 편성하였다.
이에 반해 조선은 인조반정 이후 반정군을 정규군으로 전환했고 공신들의 사병격
인 호위청을 시작으로 어영청ㆍ총융청ㆍ수어청을 차례로 설치하였다.32)정묘호란이
후 남한산성에 수어청을 신설하고 어영청과 훈련도감의 병력을 증강시키는 등 중앙
군 강화에 주력하였으나 일부 부대의 병력은 2교대 내지 8교대로 상경근무를 하게
되어있어 즉각 동원할 수 있는 실제 병력은 1만 2,000여 명 뿐이었다.
한편 서북국경의 방어체제는 이괄의 난과 정묘호란으로 인해 방어선이 압록강에서
청천강 이남선으로 후진 배치되었으며 병자호란 발발 직전에는 청천강 지역군 4,000명,
황해도군 2,000명 정도와 하삼도군 1,600명 등 총 병력이 8,000여 명에 지나지 않았다.33)
병자호란 당시 조선군은 훈련도감군 2,700명,호위청군 100명,어영청군 100명,총
융청군 등 약 2만여 명이 수도권 방위를 담당하고 적의 진격로인 황해도와 평안도
지역에는 안주에만 고작 수천명이 주둔해 있었다.지방에는 속오군으로 불려지는 병
력이 10만명 이상 있었으나 이들은 군역말고 다른 역을 지고 있었기 때문에 정기적
으로 훈련을 받지 못한 오합지졸에 불과하였다.34)
병자호란 직전 국가적 위기 속에서 대두된 양반충군론이 양반의 반대 속에서 좌절
된 것은 아쉬운 점이라 할 수 있다.1636년(인조 14년)9월 대사간 이식(李植)은 군
제 개혁을 요구하는 상소를 올렸다.여기에는 고려 시대에 사대부도 종군하여 외적
을 막았는데,지금 양반은 천,백 명 가운데 병사가 된 자는 한두 명도 없고 민정(民
丁)은 수십 명 중에 병사가 된 자는 한두 명에 지나지 않는다고 주장하였다.그리하
여 그는 공경(公卿)이하 모든 사람이 군역을 져야한다는 법을 확정한 후 정3품 이
상은 장수(將帥),종6품 이상은 장관(將官),7품 이하는 조사군(朝士軍),유생은 유생
군,무학(武學)은 무학군이라 호칭하여 양반을 모두 군대에 편입시키자고 하였다.이
식은 이와 같이 양반을 모두 충군한 뒤에야 오랑캐의 후미를 제어할 수 있고 요동을
회복할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이에 대하여 비변사는 “이해가 반반이라 거행하기
32)김진수,「조선후기 실학자의 군제 개혁론에 대한 연구」『軍史硏究』131輯,2011,p.137.
33)홍용현,「병자호란 실패 원인과 안보적 교훈」『정책연구서』,2014,p.14.
34)엄변일,「한민족전쟁통사Ⅲ,조선시대전기」『국방군사연구원』1996,pp.299∼303.
병자호란을 통해서 본 안보적 교훈(연구)
군사연구 제141집 69
어려울 듯합니다.”라면서 반대하였다.35)
편성과 지휘체계에도 심각한 문제를 안고 있었다.당시 청군은 부족을 통합하여
국가를 구성하는 과정에서 자연스럽게 부족단위 수렵과 전투 수행의 전통을 살려 각
군 부대를 8개부대(8기)로 나누어 평시 업무에 종사하다 전쟁 발발 시 즉각 전시체
제로 전환하는 시스템을 구축하였다.이는 지휘관으로부터 병사들까지 인간적 신뢰
와 공동운명체 인식을 갖추게 하여 강력한 결속력과 전투력을 구비하였다.또한 홍
타이지는 강력한 왕권을 확립하면서 왕을 중심으로 한 효율적인 중앙집권적 지휘통
제 시스템을 갖추게 되었다.36)
반면 조선은 수도권에 총융청,어영청,훈련도감으로 구성된 정예군을 배치하고
지방군은 평시 농사를 짓다 전시에 모병하는 진관체제를 갖추고 있었다.진관체제
는 여진족이나 왜구 소탕같은 소규모 국지전에 대비하기 위한 도 단위 책임방어 체
제였으며 임의로 인접지역인 타 도를 지원해서는 안된다는 불필적타진지조법(不必
籍他鎭之助法)이 강력하게 시행되고 있었다.
무신들의 반란을 방지하기 위한 이 제도는 전쟁발발시 병력을 분산시키고 통합적
지휘를 어렵게 하는 등 도 단위 이상 방어에 허점이 있었으며 국가단위의 전면전 발
발시 취할 수 있는 방어책으로는 많은 제한이 있었다.이로인해 병자호란 당시 강원
도,경상도,전라도 등 각처에서 수만명의 근왕군이 올라와 남한산성의 동부와 남부
지역에 포진하였으나,청군에 의해 길목이 차단되어 병력이 분산된데다 작전과 보급
을 총괄할 지휘부가 부재하여 대부분이 청군에 패하거나 후퇴하는 결과를 낳았다.
조선군은 무기 체계에서도 열세를 보였다.청군은 사거리 3리(약 1.2km)의 홍이포
를 갖춘 반면 조선은 기존의 총통 수준에 머물렀다.막강한 홍이포의 위력은 조선군
의 전투의지를 위축시키기에 충분하였다.또한 조선은 임란이후 기존의 주력병기인
활을 대신해 항왜 등을 통해 조총제조에 적극 나서 국산화에 성공하였고 병조호란
발생 당시 수만정의 조총을 확보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그러나 재정난 등으로 실제
사격훈련인 방포(放砲)훈련을 실시하지 못해 전투시 청의 기병에 손쉽게 붕괴되었
다.병자호란 시 하삼도 근왕군은 충주 쌍령전투에서 초기 조총으로 청군을 격퇴할
수 있었으나 사격에 익숙치 못한 병사들에게 화약 지급과정에서 폭발사고가 일어나
아군 진영이 아수라장이 되면서 전멸하는 사례도 있었다.
35)『仁祖實錄』권33,인조 14년 9월 13일 갑인
36)엄변일,「한민족전쟁통사Ⅲ,조선시대전기」『국방군사연구원』1996,pp.303∼306.
학술논문
70 군사연구 제141집
조선군은 애초에 청을 격퇴하려는 전략을 구비하지 않고 중앙군을 중심으로 왕을
보호하는데 주력하는 전략을 세워놓고 있었다.즉 국가방어 보다는 왕권 보호에 중
점을 둔 셈이다.조선은 이괄의 난으로 서북지역 전력에 커다란 구멍이 생긴 상태에
서 청의 침략 조짐이 보이자 청천강을 1차 방어선으로,임진강을 2차 방어선으로 설
정하고 임진강선이 무너질 경우 한양을 포기하고 강화도로 조정을 옮겨 장기전을 전
개한다는 작전계획을 수립하였다.
“해서(황해도)지방은 반드시 보장하기 어려우니 강화도를 피난처로 정해놓고 안
주에서 패보가 오면 임금께서는 곧바로 강화도로 들어가십시오.남한산성에서 성을
쌓아 강도와 협조체제를 이루게 해야 합니다.”37)
이는 조선군 전력의 한계와 청의 주력이 기마병으로 수전에 약하다는 점,명의 배
후공격을 우려한 청군이 장기적으로 조선에서 전쟁을 수행하기 어렵다고 판단한데
따른 것이었다.그러나 병자호란 시 명은 거듭된 패전과 내부분열로 청군을 공격할
의지와 능력이 전혀 없었고 청은 수군을 확보하고 있었던 터라 손쉽게 강화도를 점
령했고 남한산성도 47일만에 항복시킬 수 있었다.
삼국시대 이래 지속된 산성전투 전략을 고집한 것도 문제였다.조선은 청의 기병
과 야전에서 붙을 경우 승산이 없다는 판단하에 청의 진격로에 있는 진을 버리고 군
민들을 주변의 산성으로 집결시킨 뒤 화포와 조총으로 저항한다는 전통적인 청야견
벽(淸野堅壁)전술을 택했다.38)그러나 청이 산성을 우회하여 바로 한양으로 진격하
자 조선군은 청의 후미를 압박하기 위해서 산성에서 다시 야지로 나와야 했는데 이
는 조선군의 전술을 바꾸어야 함을 의미한다.남한산성에 고립된 인조를 구하기 위
해 조선군이 적극적으로 나설 수 없었던 주요 이유이기도 하였다.
인조정권은 명분에 사로잡혀 청과의 교류를 거의 단절함으로써 정보파악 기반을
스스로 와해시켜 버렸다.광해군은 정충신(鄭忠信)등 사절을 후금에 들여보내 누르
하치 이후의 후계구도 파악을 지시하였다.정충신은 누르하치의 아들 중 홍타이지가
강경파이고 다이샨(愛新覺羅代善)이 온건파임을 보고하였고 비변사는 이들 형제들
을 대상으로 이간책을 전개할 것을 건의하기도 하였다.
그러나 인조 정권은 대명관계와 책봉문제에 골몰하느라 누르하치 이후 후금 권력
37)유재성,『한민족 전쟁통사』3,국방군사연구소,1996,pp.33∼35.
38)노영구,「17세기 전반기 조선의 대북방 방어전략과 평안도 국방체계」『軍史硏究』135輯,
2013.p.357.
병자호란을 통해서 본 안보적 교훈(연구)
군사연구 제141집 71
구도를 전혀 파악하지 못하였고,이러한 정보부재는 전쟁발발 이후에도 이어졌다.
병자호란 시 청국의 의도는 명을 치기 위한 것이니 우리를 상대로 지구전을 하지는
않을 것이라는 오판을 하였다.또 청이 압록강을 건넌 직후부터 봉화대에 봉화가 올
랐으나 황주에 주둔하던 도원수 김자점은 겨울에 청이 공격할 리 없다며 이를 무시
하다가 청이 안주를 향해 내달리던 5일 뒤에나 서울로 장계를 올리는 등 상황판단과
통신수단도 마비되었다.
훈련부족도 심각한 수준이었다.수만정의 조총은 방포훈련을 제대로 안해 무용지
물이었고 이괄의 난 이후 지방군의 반란을 우려한 조정의 견제로 진법훈련이 이루어
지지 않아 청의 돌격에 진형이 쉽게 무너졌다.
마지막으로 조정에 대한 불신과 지휘통제 시스템의 마비,훈련부족으로 조선군의
싸우려는 의지와 사기도 저하되어 있던 상태였다.강홍립은 인조를 만났을 때 “조선
군은 후금군의 깃발만 보고도 무너지고 말았다”고 회고한 바 있다.애초부터 전투의
지가 없이 전쟁에 임한 조선군에게 승전의 기회는 주어질 수 없는 것이었다.
Ⅳ. 現 안보정세와의 비교
최근 국내 학계와 전문가 그룹에서는 우리 주변의 격변하는 안보상황,특히 G2로
상징되는 중국의 군사ㆍ경제적 급성장에 주목하면서 병자호란 당시와 비교하여 국
가 지도층의 각성을 촉구하는 주장이 많이 제기되고 있다.이에따라 이 장에서는 현
재와 당시의 정세적 유사점과 차이점을 비교 분석하여 현재의 우리 안보상황을 평가
해 보고자 한다.
1. 현재와 유사점
후금이 누르하치 치하에서 주변부족을 압도하면서 명의 군사력과 대등하게 성장
하던 병자호란 당시와 비교하여 가장 유사한 점은 첫째가 최근 경제력을 바탕으로
군사력의 급성장과 대외 팽창 정책을 중국이 추진하는 점이다.중국은 경제적으로는
GDP가 2030년이면 미국을 제치고 세계 제1위로 부상할 것으로 예견되는 가운데 군
사비 지출에 있어서도 이미 1,000억불을 돌파하여 세계 2위,아시아 1위의 군사강국
학술논문
72 군사연구 제141집
으로 부상하였다.39)거기에 항모 랴오닝 함 건조를 비롯하여 최신예 스텔스기 개발
등 최첨단 전력개발과 지상군의 기동능력 향상을 통해 원거리 신속 작전능력 배양에
주력하고 있다.
대외 정책 방향에 있어서도 도광양회(韜光養晦)40),화평굴기(和平崛起)41),유소작위
(有所作爲)42),주동진취(主動進取)등 공세적으로 바뀌어가고 있으며 최근에는 신형대
국관계라는 외교적 용어를 통해 지역 패권국가 부상 의지를 여실히 드러내고 있다.
즉,과거 경제성장을 위해 주변국과의 관계 악화방지에 노력해오던 자세에서 벗어나
적극적으로 자국이익 실현을 위해 마찰과 갈등을 불사하고 국력의 과시도 주저하지
않겠다는 의지의 표현이라고 보아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이는 일본과의 센카쿠 문
제,동중국해 남사군도 문제 등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
둘째,중국의 급부상에 대응한 초강대국 미국의 견제 노력도 당시 명의 후금에 대
한 통제노력과 유사하다고 할 수 있다.미 정부는 버락 오바마 대통령 취임이래 아
시아로의 회귀(PivottoAsia),재균형(Rebalancing)등으로 표현을 순화시키고는 있
지만 중국의 패권국가화 저지에 대외정책의 방점을 두고 있다.또한 일본의 집단 자
위권 행사 지지 및 베트남을 포함한 동남아 내 미군기지 확대를 모색하고,호주ㆍ인
도 등과의 안보협력 확대 등 중국에 대해 봉쇄정책을 추진하고 있다.
이는 당시 후금이 요동장악에 나서자 명이 이를 저지하기 위해 원숭환 등을 파견
하여 대릉하성 등에 특별 전초기지를 두고 견제노력을 기울인 것과 비슷하다.중국
이 미국의 해양방면에서의 공격 저지를 위해 반접근 /지역거부전략(A2/AD)43)을
마련하자 미국도 이를 무력화하기 위한 공해전투(Air-SeaBattle)44)작전개념을 검
토하는 등 직접적인 대응책 마련에 주력하고 있다.
39)대한민국 국방부,『국방백서 2014』,2014,부록 238.
40)칼날의 빛을 칼집에 감추고 어둠 속에서 힘을 기른다는 뜻이다.1980년대 덩샤오핑의 대외정
책으로 외부와 불필요한 마찰 대신 내부적 국력 발전을 외교정책의 기본으로 삼았다.
41)평화롭게 우뚝 선다는 뜻이다.후진타오 시절 도광양회를 대신하여 중국의 외교정책노선으로
자리매김 하였다.
42)해야 할 일은 적극적으로 나서서 이루어 낸다는 뜻이다.국제사회에서 중국의 위상에 걸맞는
역할을 해야 한다는 의미로 사용되었다.
43)반접근 /지역거부전략(Anti-AccessAreaDenial)은 1980년 중국이 대만침공 시 남중국해로
진입한 미 해군을 차단하기 위해 채택한 것으로 대공 및 대해 전략을 말함.
44)공해전투(Air-SeaBattle)는 미국의 항공력과 해양력을 중심으로 공중,바다,우주,사이버 능
력등을 통합하여 적의 전력을 원거리 바다에서부터 접근을 차단하고 효과적으로 타격하는
합동작전 개념임.
병자호란을 통해서 본 안보적 교훈(연구)
군사연구 제141집 73
셋째,이러한 두 강대국 간의 대립이 우리에게 선택을 압박하는 상황도 당시 조선
이 명과 청 사이에서 갈등하는 상황과 흡사하다.미국은 우리와의 안보협력 수준을
북한 도발억제에서 벗어나 글로벌 동맹으로 격상시켰으며,중국의 군사력 증강문제
를 빼놓지 않고 각종 의제로 상정하여 공동 대응 필요성을 지속적으로 강조하고 있
다.최근의 미사일방어체계(MD)참여 요구도 우리와의 협력을 통해 중국의 탄도 미
사일에 대한 대응을 강화하고자 하는 것이 주 목적임은 주지의 사실인 것이다.
넷째,당시 지도층 내에서는 임진왜란 시 구원군을 보내준 명의 재조지은(再造之
恩)을 들어 사대의무를 다하자는 서인세력과 실리주의적 접근을 강조하던 북인간 대
립이 있었던 것처럼 현재 우리 내부에도 6.25전쟁 때 우리를 지원한 미국과 안보동
맹을 굳건히 유지해야 한다는 주장과 중국의 최강대국 부상에 대비하여 대중관계 강
화에 주력해야 한다는 주장이 교차하고 있다.
2. 현재와 차이점
최근 주변정세가 당시와 언뜻 유사해 보이기는 하나 구체적으로 들어가면 관계구
도와 갈등의 범위,수준에 있어 상당한 차이점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첫째,당시 후금이 명의 군사력을 압도하고 명이 지도층의 무능과 내부 분열로 와
해조짐을 보이던 것과는 달리 아직 중국의 군사력은 미국에 크게 미치지 못하고 당
분간 미국의 초강대국 지위도 흔들림이 없을 것이라는 점이다. 해ㆍ공군력에 있어
서 양적으로는 우위에 있을지언정 질적인 면에서 중국은 아직 미국에 도전할 만한
수준이 못된다.심지어 일본과 비교해도 우위에 있다고 단정지을 수 없다.우리 세대
내에 이러한 미ㆍ중간 전력차가 뒤집어 질 것으로 예측하는 전문가도 거의 없다.
구 분 미 국 중 국 일 본 러시아
계 1,492,200 2,333,000 247,150 845,000
육 군 586,700 1,600,000 151,050 250,000
해 군 327,700 235,000 45,500 130,000
공 군 337,250 398,000 47,100 150,000
<표 4> 주변국의 군사력 현황
출처 :대한민국 국방부,2014,『국방백서 2014』,국방부,부록 p.236
학술논문
74 군사연구 제141집
둘째,후금과 명이 군사적으로 직접 충돌하였던 당시와 달리 현재 미국과 중국간
에는 갈등 요인이 내재된 상태이기는 하나 직접적으로 군사적 충돌이 일어나지는 않
고 있다는 점이다.
중국의 군사력이 아직 미국의 군사력에 크게 미치지 못할 뿐만 아니라 중국은 물
론 미국도 무력 충돌이 양 국가에 심각한 피해를 가져올 것임을 인식하고 있어 상호
간에 갈등을 관리하고 있다.후금과 명의 대립은 한쪽이 소멸되어야만 끝나는 관계
였으나 미ㆍ중간에는 마찰요인과 함께 경제적 상호 의존 협력관계가 형성되어 있어
직접적인 충돌 가능성은 낮은 편이라고 볼 수 있다.
셋째,후금과 명이 조선에게 선택을 강요하던 강도와 현재 미ㆍ중이 우리에게 전
략적 선택을 강요하는 강도는 현저한 차이가 있다.당시 조선의 선택은 국가 생존을
결정짓는 결코 회피할 수 없는 압박이었으나 현재 미국은 우리 내부의 친중화 주장
에 내심 걱정과 우려를 표시하는 정도이고 중국도 우리에게 노골적으로 미국과의 동
맹 폐기를 요구하지도 않고 있다.
마찬가지로 국내에서도 미ㆍ중간 선택을 주장하는 목소리가 양립하고는 있으나
이러한 대립이 심각한 수준은 아니다.병자호란 당시에는 반정에 이를 정도로 극한
의 대립 상황이었으나 현재는 어느 것이 안보와 국익에 더 유리한지를 계산하는 합
리적 논쟁에 머무르고 있으며 대중관계 강화를 주장하는 측도 한ㆍ미 동맹을 파기해
야 한다고까지 주장하지는 않고 있다.
넷째,당시의 조선은 통일 국가였으나 지금의 대한민국은 분단국가라는 점이다.
당시에는 명과 청,조선간의 3자 관계였으나 지금은 북한이라는 존재가 있으며 북ㆍ
중관계가 과거와 같지 않다고 하나 한ㆍ미 대 북ㆍ중간의 대립적 구도가 여전히 지
속되고 있어 중국의 대북 후원자 역할도 당분간 지속될 것으로 보인다.
이는 우리가 결정적으로 미국을 도외시하고 중국을 선택할 수 없는 이유이기도 한
것이다.이의 연장선에서 당시 청이 가도 모문룡 부대의 존재를 눈에 가시처럼 인식
하여 조선침공의 주요 계기가 된 것과 달리 중국은 주한미군의 주둔 의미를 잘 알고
있으며 한반도 철수를 강력히 요구하지 않는점도 다르다고 하겠다.
다섯째,명ㆍ청 교체기의 대외정세는 미ㆍ중 G2라고 불리우는 양극체제가 아니었
고 중국이라는 일극 안에서 정권담당자의 교체였다는 점이다.중국의 국제적 지위가
강화된 것은 사실이지만 미국과 마찬가지로 중국도 러시아나 EU,일본의 동의 없이
는 어떤 국제문제에서든 독자적으로 자국의 이익이나 의지를 관철시키기 힘든 것이
병자호란을 통해서 본 안보적 교훈(연구)
군사연구 제141집 75
현실이다.이는 현재 체제가 중국 중심의 일극으로 변화한다 하더라도 명ㆍ청 교체기
처럼 순식간에 체제변동이 이루어지지 않고 수세대에 걸쳐서 천천히 진행되거나 돌
발변수에 의해 전혀 예상치 못한 결과가 진행될 수도 있다는 점을 의미하기도 한다.
마지막으로 명이 청으로 교체된 것은 청이 명이라는 구체제를 일소하고 중국을 새
로운 기풍으로 통치할 실력이 있었기 때문이다.하지만 지금 중국은 많은 분야에서
구미 선진국을 따라가기에 바쁘고 빈부격차,지역격차,분리독립 문제로 정치적 불
확실성이 점증해서 내치에 힘을 쏟기에도 버거워하는 상황으로 가고 있다는 점 또한
다르다.
3. 현 안보정세 평가와 전망
이상 병자호란 당시와 현재 우리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는 정세 변화상을 비교해
보았는 데 일부 구체적인 차이점에도 불구하고 큰 흐름에서 당시의 경험은 현재 우
리에게 주는 안보적 시사점이 크다고 할 수 있다.
병자호란 당시 명ㆍ청의 대립이 청에 대한 조선내부의 정치적 분열을 가져오고 비
참한 패배라는 결과를 낳았던 것과 달리,현재 미ㆍ중 간 대립은 안보 국익상 도전요
인이기는 하나 극한 선택을 강요하는 상황은 아니다.
그러나 장기적인 관점에서 보면 중국의 지속적인 고도성장과 군사력 부상으로 미ㆍ
중간의 군사적 대립은 더욱 심해질 것으로 전망되며 우리에게 선택을 강요하는 압박
강도도 높아질 수 밖에 없다.이러한 경향은 미국이 요구하고 있는 미사일방어체계
(MD)참여 등 한ㆍ미 군사협력 확대 문제가 본격화되고 북한붕괴와 통일이 가시화
되면서 더욱 표면화 될 것으로 보인다.단기적인 시각으로 미ㆍ중간의 대립상황을
낙관적으로 평가할 수만은 없는 이유이다.
한편 미ㆍ중간 군사력 평가에 있어서 흔히 간과되고 있는 것은 총량면에서의 군사
력 격차가 아니라 동북아 역내 무력 충돌 발생 시 직접적이고 즉각적으로 행사 가능
한 군사력을 비교 평가해야 한다는 점이다.예컨대 이어도 문제 등 한ㆍ중간 현안
마찰로 국지적 충돌이 발생할 경우 미국이 군사적 개입을 결정하기는 쉽지 않을 것
이다.또한 중국의 역내 문제에 대한 일방주의적 행태도 군사력 성장을 배경으로 더
욱 심화될 것이나 매 사안마다 미국이 동맹국을 대신해서 중국과 대립할 수도 없을
것이다.즉 역내로 국한한다면 중국의 안보적 영향력은 우리 예상보다 빠르게 미국
을 압도할 소지가 크다고 하겠다.
학술논문
76 군사연구 제141집
우리의 국력이 성장하였다고는 하나 미국과 중국이라는 거대한 세력 앞에는 현실
적으로 미미한 수준이다.우리가 두 강대국의 충돌점 가운데에서 여전히 어느 일방
에 의존하여 국가의 생존을 도모해야 하거나 선택을 강요받는 안보적 딜레마 상황은
앞으로 더욱 심각해 질 것이다.
Ⅴ. 안보적 교훈
이상으로 병자호란의 실패원인 분석과 함께 당시와 현재의 안보상황을 비교하여
보았다.이러한 비교를 토대로 향후 우리나라의 안보정책 추진에 있어 다음과 같은
교훈을 도출할 수 있겠다.
첫째,국가안보를 수호하는데 있어 군사력 건설보다 더 중요한 것은 국론 결집이
라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는 것이다.
인조정권이 광해군과 북인을 몰아내기 위해서 대 후금정책을 이용한 것은 권력쟁
취를 위해 국가의 생존을 위태롭게 한 것과 같은 것이다.명분과 이념을 앞세워 반
대를 주장하는 세력을 비도덕적 집단으로 매도하는 것은 합리적이고 실질적인 의사
결정 기회를 상실하게 하고 반대측의 불만을 증폭하여 적전분열을 초래한다.이는
싸우기 이전에 이미 패배한 것과 같은 것이다.
우리 내부에는 상대방과 사고와 시각차를 인정하지 않고 이긴자가 옳다는 사고가
팽배해 있다.이것이 조선 성리학의 명분중시 사조와 당쟁의 결과라고 치부하는 것은
너무 자조적인 표현이 될 수 있겠으나 안보는 국가 생존의 문제이다.국가 안보를 위
해서는 이념적 편향성을 벗어나 이성적 사고와 실리주의에 토대를 둔 막힘없는 소통
을 통해 초국가적으로 대처해 나가야 한다는 국민적 공감대와 인식 정립이 긴요하다.
둘째,우리 국력의 수준을 감안할 때 군사적 대응에는 한계가 있는 만큼 전쟁 방지
를 위한 예방외교에 더욱 주력해야 할 것이다.
현재 우리정부는 한ㆍ미 동맹을 강화하면서도 중국과의 관계 강화에 주력하고 있
는데 이는 방향선택을 올바로 하고 있다고 보여진다.하지만 앞으로 미사일방어체계
(MD)추진 문제 등과 관련하여 미국의 동참 요구와 중국의 반발은 더욱 심해질 것이며
한ㆍ미 동맹을 기반으로 한 우리의 안보정책 기조에 대한 도전도 강화될 것이다.
병자호란을 통해서 본 안보적 교훈(연구)
군사연구 제141집 77
우리로서는 남북 분단 상황하에서 한ㆍ미동맹을 결코 저버릴 수 없는 만큼 중국의
불만을 누그러뜨리고 우리가 처해 있는 상황을 이해시키기 위한 다각적인 설득 노력
을 더욱 강화해 나가야 한다.
이를 위해서는 외교채녈 외에도 정치ㆍ경제ㆍ군사 분야 중국통 인맥을 확충하고
중국 국민간에 친한 의식을 함양시키기 위한 민간 교류 활동을 확대해 나가면서 역
사적인 한ㆍ중간 우호전통 기조를 살려 나갈 필요가 있다.
셋째,군사적 대응태세의 강화이다.
영토 문제 등 국익에 관련된 사안 뿐만 아니라 한반도 통일과정에서 중국의 군사개
입 등을 염두에 두고 이를 저지할 수 있는 최소한의 전력 구비에 매진해야 할 것이다.
기존의 북한 도발 억제에 주력해 오던 전략개념을 재검토하여 해ㆍ공군력 증강 및
지상군의 기동력 강화에 중점을 둬야한다.아울러 한ㆍ미간 협력을 통해 한반도 통
일과정에서 중국의 개입을 고려한 대중 군사정보 획득 능력 배양과 한ㆍ중간 무력충
돌,중국의 한반도 군사개입 시 등 다양한 돌발상황에 대비한 대응전략을 사전 강구
해 둘 필요가 있다.
이를 위해서는 현재 중국군 전체에 대한 막연하고도 총론적인 군사정보 수집노력
을 벗어나 한반도 유사시 개입 가능한 중국의 지상군 및 해ㆍ공군 전력과 중국 지도
부의 대 한반도 전략에 대한 치밀하고도 정교한 군사정보 획득 노력을 배가해 나가
야 할 것이다.
넷째,장기적 관점에서 우방국과의 협력하에 중국을 관리하기 위한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중국을 과도하게 자극하지 않는 선에서 한ㆍ미간 안보결속을 일층 다져 나가면서
일본에 대해서도 과거사에 따른 감성적 접근을 억제하면서 안보협력 강화를 적극 추
진해 나가야 한다.최근 영유권 문제나 무역마찰 등에 있어서 드러난 막가파식 행태
를 견제하기 위해서라도 이러한 한ㆍ미ㆍ일 안보결속 강화는 더욱 필요하다.
다섯째,중국을 국제규범에 순응하고 국제협력 질서 구축에 동참토록 노력해 나가
야 할 것이다.
우리의 외교 위상이나 입지 상 중국에 대한 개입은 한계가 있으나 중국 위협론을 심
각하게 인식하고 있는 주변국과 협력하여 역내 다자 안보대화나 인권대화를 활성화하고
군축회담,해상 평화질서 노력 등을 적극 주도함으로써 중국이 과거와 같이 무력을 앞세
운 중화패권 국가로 나아가지 않도록 유도해 나가는 노력도 배가해 나가야 할 것이다.
학술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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Ⅵ. 맺 음 말
우리 역사에 있어 가장 밀접한 관계를 형성하면서 때로는 긍정적으로,때로는 부
정적으로 강력한 영향력을 미쳤던 중국은 1992년 한ㆍ중 수교를 통해 공산화 된
1949년 이후 43년만에 다시 우리와 관계 정상화를 통해 현재에 이르고 있다.이제,
이 잠들어 있던 거대국가는 강력한 경제력과 군사적 성장으로 중화제국의 부활을 꿈
꾸며 동아시아에서 미국의 입지를 위협하는 새로운 세력으로 부상하면서 역내 국가
들과 협력과 갈등을 반복하고 있다.
해방이후 우리의 후원국이었던 미국은 중화문명에 의존하며 수천년을 살아온 우
리의 친중 사고를 은근히 걱정하고 있다.이러한 상황 하에서 병자호란 당시와 현재
우리의 안보상황을 연결짓고 걱정하는 것은 너무나도 자연스러운 현상이라 하겠다.
병자호란의 대응실패는 당시 조선의 단순한 외교정책 오류나 군사력의 격차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었다.그것은 시대변화를 직시하지 못한 고루한 국가경영 시스템과
권력에 눈이 먼 왕과 위정자 들의 편협한 의식과 독선,근시안적 사고,임진왜란이후
누적된 민심의 괴리,군의 패배의식 등이 결합되어 나타난 총체적인 국가경영의 실
패였다.이러한 실패에도 불구하고 조선은 제대로 된 반성조차 하지 않음으로써 결
국 몰락으로 내던져지고 말았다.
오늘날 한반도 주변에서 벌어지고 있는 정세변화를 과거 명ㆍ청 교체기와 똑같은
상황이라고 만은 할 수 없다.그러나 병자호란과 같은 국가적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
기 위해서는 과거의 거울을 통해 현재의 문제점을 찾아내고 이를 수정,개혁하려는
의지가 필요하다.모든 유기체와 마찬가지로 국가도 환경의 변화에 맞추어 변화하지
않으면 국가의 생존과 미래는 보장할 수 없다.
중국의 부상은 우리에게 도전이자 기회요인이기도 하다.중국발 안보위협 요인에
적절히 대처하면서 그들을 통일과 국가발전의 지지세력으로 유도하기 위해서는 지
도층의 전략적 비전과 정치권ㆍ언론ㆍ학계 등 여론 주도층의 초당파적인 대중정책
방향 정립,군의 시대방향에 맞는 전력 건설,국민의 대정부 신뢰 등이 유기적으로
결합되어야 할 것이다.
〈접수일 :2016.1.28,심사완료일 :2016.3.24,게재확정일 :2016.4.29〉
병자호란을 통해서 본 안보적 교훈(연구)
군사연구 제141집 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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병자호란을 통해서 본 안보적 교훈(연구)
군사연구 제141집 81
(Abstract)
National Security Lessons to Learn from
the Byoungjahoran
Bae,YoungGu
Choi,KiWoong
TheChinathathashadamostpowerfuleffecttoushascomebacktoKorea
again after43yearsthrough theresumption ofdiplomaticrelations in 1992.
CurrentlytheChina'sstrongeconomyandmilitarygrowthrateisthreateningthe
statusoftheUnited Statesin EastAsian and thepossibility ofconflictin
NortheastAsiawentup.
Afterliberation,ourstatesponsor,theUnitedStatesisanxiousaboutusthat
havelivedforthousandsofyearsrelyingonChina'scivilization.Underthese
circumstances,deductionfrom thesecuritylessoncomparedtotheByoungjahoran
atthattimeandthecurrentsituationasofnow canbeverymeaningful.
ThefailureoftheByoungjahoranwastotallyfailureofthemanagementofthe
state.Theking andpoliticianshadaroutinemanagementsystem ofanation
withoutlookingatthechangeofthatperiodandwereseekingforthepower.
Besides,theyhadanarrow mindandwereblindedbyself-righteousnessaswell
asashort-sightedwayofthinking.
Today,thesituatixxonchangestakingplaceinaroundtheKoreanpeninsulaisnot
thesameasthepastMingandCheongdynastyexchange.However,weneeda
willtocorrectandreform thecurrentproblemsoutofthepastsimilarfailuresin
ordernottorepeatthenationalfailuresuchastheByoungjahoran.Theriseof
theChinaisachallengeandopportunityforusaswell.
Keywords:TheByoungjahoran,Developmentprocess,Securitysituation,
Thefailureofaction,Cause,Securityless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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