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9. 09. 23
정치의 세계에선 경제도 메시지다. 어떻게 압축된 슬로건으로 대중 심리를 휘어잡을까 권력자들은 고심한다. 이명박 정부는 '녹색성장'을, 박근혜 정부는 '창조경제'를 외쳤다. 노무현 정부는 '균형발전'을 내세웠고, 김대중 대통령은 '대중경제론'으로 유명했다. 문재인 정부는 '소득 주도 성장'을 걸었지만 그럴듯한 개념과 달리 실패로 판명 났다. 정부 주도의 국가주의적 정책이란 비판을 받으면서 현 정권의 최대 실정(失政) 분야가 됐다.
▶ 황교안 자유한국당 대표가 소득 주도 성장론과 대척점에 선 '민부론(民富論)'이란 경제 구상을 발표했다. 관(官) 대신 민간 주도, 세금 아닌 시장 중심으로 패러다임을 바꿔 경제를 살리겠다고 한다. 자본주의의 아버지라는 애덤 스미스의 고전 '국부론(國富論)'을 변형시켜 개념을 만들었다. 아이러니하게도 이 용어는 중국에서 먼저 썼다. 고도성장 속에서 빈부 격차가 심각해지자 2010년 중국 공산당이 성장 위주의 '국강(國强)'에서 분배 위주의 '민부'로 전환하겠다고 발표한 것이다. 용어는 같지만 한국당의 민부론과는 거리가 있다.
▶ 선거철이 다가오면 각 정당은 경제 구상을 쏟아낸다. 2017년 대선 때는 공정 성장, 동반 성장 같은 온갖 성장론이 유행했었다. 별별 성장론이 나오니까 "수식어가 붙는 성장론은 다 가짜"라고 일갈한 정치인도 있었다. 당시 문재인 후보는 '국민 성장'을 내세웠고 이것이 집권 후 소득 주도 성장으로 수렴됐다. 주류 경제학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소수파 이론을 갖고 국가 경제를 실험대 위에 올린 셈이었다.
▶ 이상은 훌륭했지만 소득 주도 성장의 패착은 경제 현실을 직시하지 않고 이념을 고집한 데서 비롯됐다. 주 52시간의 기계적 적용, 최저임금의 급격한 인상 같은 정책들이 자영업자를 위기로 내몰고 서민 일자리를 없애는 역설이 벌어졌다. 안 그래도 경기가 하강기인데 호황 때나 조심스럽게 적용할 고비용 정책을 밀어붙였으니 벼랑에서 등 떠민 셈이 됐다. 경제학 교과서에 오를 정책 실패 사례로 불리게 됐다.
▶ 황 대표는 정장 대신 면바지·셔츠 차림으로 '민부론' 발표 무대에 올랐다. 스티브 잡스처럼 뺨에 소형 마이크를 달고 화면을 띄워가며 연설 아닌 프레젠테이션을 했다. 한국당은 기업인 같은 이미지를 연출하려 고심했다고 하나 스타일에 신경 쓰기엔 경제 상황이 너무도 심각하다. 황 대표는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란 클린턴 대통령의 선거 구호도 들고나왔다. 여야가 '소주성'과 '민부론'을 놓고 치열한 정책 토론을 벌였으면 한다.
강경희 논설위원 khkang@chosun.com
조선일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