묵주 기도 신비를 묵상할 때, 다시금 돌아보게 하는 단어가 있습니다. 환희와 빛과 영광은 '신비' 라는 단어와 연결되는 듯하지만, 고통을 '신비' 와 연결할 때는 어딘가 어색하게 느껴집니다. '고통' 의 의미를 새롭게 바라봅니다. 고통도 신비로움과 연결된다는 점이 우리의 삶과는 멀게 느껴지기에 이해하기 어렵습니다. 신비라는 단어와 고통의 연결점이 과연 무엇일까 묵상해 봅니다.
암과 온갖 빌병, 배신, 사랑한 이와의 이별, 천재지변, 전쟁, 기아 그리고 알 수 없는 사건과 사고 속에서 우리는 고통이라는 단어에 직면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것들이 신비와 연결된다니 이해되지 않습니다. 아니, 인간의 머리로 이해한다는 것 자체가 어불성설일 것입니다. 우리가 신앙생활을 하는 이유도 이러한 고통에서 벗어나고 싶기에 하느님의 보살핌을 받고자 더욱더 기도하고 봉사하며 신앙생활을 충실히 하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1 독서에서 아브라함은 아들을 희생 제물로 바치라는 하느님의 명을 받아들여야만 하는 고통을 감내하며 따르게 됩니다. 이해되지 않는 하느님의 뜻입니다. 복음의 예수님께서도 영광으로 나가기 위해서, 죽음이라는 희생을 받아들이라는 하느님의 뜻을 감당해야만 하셨습니다. 그런데 여기서 하느님께서는 아브라함의 아들을 살려주시고 당신의 아들을 대신 죽여야만 하는 고통을 선택하십니다.
참으로 신비스럽습니다.
하느님께서 당신 아들의 고통과 외아들을 희생해야만 하는 당신의 고통을 선택하신 이유가 무엇일까요? 고통 너머에 우리가 알 수 없는 신비로움이 있다는 것을 알려주시기 위함이 아닐까요?
하느님께서는 당신 능력과 사랑으로 고통과 같은 악에서도 선을 끌어내는 법을 알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그렇기에 우리의 시련들을 하느님께서는 선으로 바꾸어 주실 것임을 확실할 수 있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사랑을 확신하고 기꺼이 받아들인 고통으로 인류 구원을 가져오셨습니다. 마찬가지로 우리에게 다가오는 고통을 하느님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확신으로 받아들일 때, 그 고통이 우리 자신의 구원과 우리가 알지 못하는 누군가를 위한 구원에 공로로 쓰일 것입니다. 그때 예수님께서는 키레네의 시몬이 되시어 우리와 함께 걸어주시며 위로해 주실 것입니다. 그리고 우리의 마지막 때 거룩한 변모로 보답받을 것입니다.
2024.02.25 춘천 주보
말씀의 향기 중에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