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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미에와 짐승의 표
서론 - (영화 – 미션 이야기 )
1750년 아르헨티나, 파라구아이, 브라질의 국경 근처에서 일어난 실화를 바탕으로,
원주민 과라니족을 상대로 선교 활동을 벌이는 두 선교사의 대립되는 모습을 통해서
종교와 사랑, 정의가 무엇인가를 심오하게 그린 종교 영화이며,
좀 더 많은 영향력을 확보하려는 백인들 간의 밥그릇 싸움 때문에 여러가지로 복잡했던 종교,정치상황 가운데서도 오로지 원주민 선교를 위해 온 몸을 바치던 젊은 신부가 끝내 원주민 마을을 습격한 군대에게 비폭력적으로 대응하면서 죽어가는 영화
1750년, 스페인과 포르투갈은 남미 오지에 있는 그들의 영토 경계문제로 합의를 보았으나
유럽 한 구석의 탁자 위에서 그은 선이 얼마나 끔찍한 사태를 불러일으킬 지 아무도 관심이 없었다.
스페인과 포르투갈의 군주들은 그들의 식민지가 신부들의 인도로 지상천국이 되는 것을 바라지 않았다.
피땀 흘러 이룩한 선교구가 악명 높은 노예 제도를 합법화한 포르투갈 왕의 식민지에 편입되자, 희생이 불가피하다고 생각한 교황청에서는 포르투갈과의 관계가 염려되어 신부들에게 원주민들에게서 떠나라고 한다.
#짐승의 표와 후미에 – 엔토 슈샤꾸의 책 – 침묵 –영화 – 사이런스 Silence
1500년대 종교 개혁의 분위기속에서 카톨릭 측에서 일어난 종교 개혁같이 예수회가 조직되었다.
그래서 1549년 자비에르 – 일본에 갔다. 당시 일본은 막부의 칼 싸움하던 시대에 자비에르는 총을 소개함으로 폭팔적인 인기를 얻고 기독교 부흥 – 30-70만 성도 - 200여개 교회 성장
서양 문물과 학교 / 의료 등으로 굉장히 호의적이었다.
그런데 갑자가 천황과 막부가 긴장했는데
– 천황보다 예수가 높다.
-죽은 예수가 어떻게 천황자리 넘보냐?
-죽었다가 부활했다고 하지 않느냐?
-그리고 그 예수는 물 위를 걷는 재주도 있다는데 벌써 일본에 건너 왔을지도 모릅니다.
이러면서 일본의 쇼군이 굉장히 위헙을 느끼게 된다.
그래서 기독교는 안되겠네 – 기독교는 일본과 맞지 않아 – 그러면서 기독교를 몰아 내는 정책을 펴게 되는데 그것을 – 후미에 - 라고 얘기 한다.
-후미에는 - 예수님의 그림을 밟는다 – 라는 뜻이다.
그러면 네가 기독교가 아니라는 것을 증명하고 살려 주는 것이다.
-기독교 말살 정책이다. = 살짝만 밟아라 – 지근 지근 안 밟아도 돼 –
-그리고 거짓말이더라도 밟기만 해 – 마음으로 하나님 믿어 – 하나님 섬겨
– 너 하고 싶은 대로 다 해 –
그런데 하나님 나는 안 믿습니다라는 표시로 살짝만 밟아 –
괸찮아 – 거짓말로 밟아도 돼 – 괸찮아 –
자 – 여러분 – 구미가 당기십니까?
아니 그냥 마음으로 믿는 것 다 인정해 준대요, 그리고 살짝만 밟으면 된데요 -
그런데 그때 당시 일본의 기독교인들이 대부분 거절하고 순교를 하게 된다. – 책 – 침묵에 보면
참 잡아 죽이는 과정이 끔찍하다. - 21C 사탄의 박해 전략을 볼 수 있다.
=日本 宣教 – 이책 끝에 작가의 코멘트가 나오는데 – 일본이란 뭔가? 에서 – 늪 – 이란 말을 한다.
-늪 – 사람들은 – 일본은 선교사들의 무덤 – 이라고도 말한다.
그 사람들이 무슨 뜻으로 말하는지 모르겠지만 – 혹시 – 선교의 성과가 눈에 보이지 않아서 선교사들의 영적 침체와 탈진 현상을 말하는 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그런 현상의 이면에는 사탄의 전략이 숨어 있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렇게 책에서는 성도들을 잡아다 끔찍하게 죽이는 방법 – 그렇게 신자들이 다 죽었다.
=日本 宣教 – 교토 – 최초의 순교지 – 강 가운데 모아 불로 태워 주였다.
그리고 남은 자들은 도망가고 숨어서 지내게 된다. 그때 일본에 3명의 신부가 남는다.
신자들은 신부 앞에서 고문 당한다.
영화의 회유 방법은 그것이 아니라 – 당신이 배교하지 않으면 – 당신이 전도한 저 신자들을 죽이겠다.
-차원 높은 핍박이다.
당신이 배교하지 않으면 당신의 가족들을 죽이겠다 – 이런 것이다. 이럴 때 신부가 고뇌를 하겠죠?
그러면서 한 사람씩 한 사람씩 죽여 나갑니다.
자 – 봐라 – 저 사람들이 지금 왜 죽지? – 저 사람들은 자기 신앙 때문에 죽는 것이 아니라 당신 때문에 죽고 있는 거야 -
그러면서 신부에게 – 너는 이기주의자다 – 네가 순교의 영광을 얻고 - 천국 가기 위해서 저 신자들을 희생시킨다.
-배교 하라 – 만약 네가 배교하면 저 사람들을 다 살려 줄께 – 이렇게 회유한다.
이것이 오늘날 21C 사탄의 핍박 방법이다. - 사탄의 회유 방법이 달라졌다.
전에 사탄의 핍박 방법은 어땠나요? – 예수 믿는 성도 본인의 배교를 회유하고 그렇지 않으면 고문하고 죽이는 방법이었다.
-당신만 배교하면 사는데 – 이런 식으로 신부를 계속 회유 한다.
그래서 신부가 고민하고 갈등하고 번민하고 배교를 선택하게 된다. 그리고 순간 배교하고 끝난 것이 아니라 평생을 배교자로 산다.
-어떻게 사는가하면
첫째 – 기독교를 부인하는 책을 쓴다.
둘째 – 신자들을 색출하는 일에 앞장서게 된다. – 신부였으니까 숨어서 지내는 기독교인들의 비밀 표시라든지 이런 것을 너무 잘 알 것 아니예요? 그래서 기독교인들을 색출하는 일에 앞장서게 된다.
이 일을 3명의 신부 – 먼저 한 신부 – 페레이라 신부는 실존 인물이다.
실제로 후미에 당시에 그렇게 배교하고 그런 일들을 그렇게 했고 – 그 다음에 2명의 신부가 남았다.
두 신부가 오늘의 주인공이다.
그런데 주인공 신부는 – 로드리에스 신부가 굉장이 갈등한다. 갈등하면서 정말 저 사람들을 위해서 어떻게 해야 될까? 정말 이 죽어가는 영혼들을 보면서 굉장히 안타까워한다.
그래서 이 로드리에스는 페레이라가 갔던 배교의 길에 동참을 하게 된다.
이것이 엔토 슈샤꾸의 침묵이라는 소설을 배경으로 2016년 – 사이런스Silence– 라는 영화가 만들어진 내용이다.
이 영화에서는 계속 이 로드리에스 신부가 배교 했는데도 – 하나님께서 그 사람과 함께하는 그런 것이 나온다. – 계속 그리스도인들을 색출하는 일을 하고 있는데도 – 여전히 하나님께서 그를 이해하고 – 그의 마음을 만져 주고 – 그런 암시가 계속 흐른다.
그러면서 이 영화가 흐르는 멧세지가 뭔가하면 – 한 가지 질문을 한다. – 사랑이란 뭔가?
이 질문을 계속 던진다. – 그러면서 거기서 답변은 사랑이라는 것은 – 실천하는 것이다.
-네가 저 영혼들을 사랑하니? 그러면 저 영혼들을 사랑하면 – 네가 할 수 있는 최선의 것은 뭐지?
-네가 할 수 있는 최선의 뱅동은 뭐냐?
그 사랑이라는 것은 네가 배교함으로 저들을 살리는 것이 가장 최선의 실천이 아니겠느냐하는 멧세지가 계속 나오게 된다.
-제목이 침묵인 이유는 – 이 신자들이 이러한 고난과 고통과 죽음의 공포속에 있는데
– 왜 하나님은 침묵하시는가? 라는 첫번째 질문과 그리고 하나님은 침묵하시는 것이 아니라 사랑으로 응답하고 계신다라는 멧세지를 보내 주고 있는 그런 내용이다.
#여러분은 이 신부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십니까?
이 신부가 올바른 사랑을 실천했다고 생각하십니까? – 쉽지 않는 질문이다.
-내 가족을 – 내 자식을 죽이려고 할 때 – 그때 아들아 – 딸아 – 믿음을 부인하지 말고 죽어라 –
그렇게 말하는 부모가 있나요?
-차라리 내가 죽었으면 죽었지 그렇게 자녀들을 죽게 내버려 둘 수 있는 무모 얼마나 있을까요?
-쉽지 않은 질문이다.
그래서 이 주인공은 그 마을 사람들에게 – 여러분 밟으세요 – 괸찮습니다. – 그런 말을 한다.
그리고 주인공이 자신의 배교를 계속 정당화하기 위해서 – 예수님의 음성이 들린다. – 나를 밟아라 –
괸찮다 내가 너를 이해한다.
– 이 영화는 천주교 영화인데 – 또 천주교 소설이구요,
그런데 천주교 – 개신교 모두가 이 영화를 극찬하고 – 이 소설을 극찬하고 – 또 믿지 않는 사람들까지도
정말 진정한 종교의 모습을 보였다라고 하면서 굉장히 칭송을 했던 그러한 영화이다.
이런 상황에서 남들이 모두 – 예 – 라고 말할 때 – 아니요 – 라고 말하는 것은 참 힘들고 어려운 일이다.
그런데 여기서 아닌 것은 아니오라고 외쳐야 한다.
여러분 비슷한 일이 한국에서도 있었다. – 일제 시대때 – 신사 참배 – 그때 종교 말살하는 것이 아니었다.
그때 교회가 다 없어졌습니까? 아니다. 그럼 신사 참배란 무엇인가?
너 하나님 믿니 – 그럼 하나님 믿어 – 믿은 것 다 인정해 주는데 단 신사 참배 해 –
교회 다녀 – 그런데 신사 참배 해 – 이 문제엿다.
그때 한국 교회는 양분이 되었다. – 그게 신사 참배하는 것이 뭐 우상 숭배하는거야? 괸찮다고 해서 거의 대부분의 교회가 – 한국 기독교 역사에서 신사 참배에 앞장서고 – 독려하고 – 독려할 때 성경 말씀을 인용하면서 – 신자들은 위에 있는 권세에 복종해야 됩니다. – 그리스도인의 의무입니다. 그러니 그렇게 해야 합니다라고 하면서 신사 참배를 종용한 목사들과 교단들이 있었다.
반면에 끊임없는 탄압과 박해에도 불구하고 거절했던 대표적인 이 분이 계신다. – 누가 있어요?
-주기철 목사님 – 손양원 목사님 – 이런 분들은 참 고집스럽게 – 바보처럼 끝까지 거부하시면서 옥고를 치르시고 순교하셨다.
그런데 그것은 주기철 목사님 개인에게 – 당신이 할 것이냐? 말거냐? 이런 시험이었다. 만약에 주기철 목사님 교회에 와서 신자들을 한명씩 죽여 가면서
-당신이 신사 참배 안하면 신자들 한명씩 죽입니다 – 이렇게 할 때 주기철 목사님 – 어떻게 하셨을까?
우리 한번 생각해 봐야 할 것같아요?
여러분은 그때 어떻게 하실 것 같습니까?
여러분 불교 믿다가 기독교로 개종하신 분들 많이 계시죠? 또 기독교로 개종했는데 – 집안은 여전히 제사를 드리고 – 나는 이제 제사를 드릴 수 없어요 – 라는 신자들 주변에서 볼 수 있다.
똑 같은 것이다.
-제사 상 차려 놓고 절하는 것 – 뭐가 어렵나요? - 또 연예인들 고사 상 차려 놓고 절하기도 한다.
그거 좀 하면 안되나요?
그런데 고집스럽게 – 그거 안함으로 가족들과 – 친척들과 관계가 끊어지고 – 쫓겨나고 – 신앙 때문에 핍박과 어려움 받고 – 예수 쟁이들은 정말 상종 못할 인간이다 – 이런 말 듣는다.
그래서 많은 사람들이 그래도 신앙을 위해서 그렇게 제사를 거부하고 – 예수님을 선택하고 – 가정의 불화가 있다하더라도 – 집에서 쫓겨나더라도 그렇게 선택을 한다.
그런데 그것이 만약에 목숨이 달린 문제였다면 – 제사를 하고 안하고가 – 이것이 일본의 후미에를 말하는 것도 아니고 – 일제 강점기때 신사 참배 때를 말하는 것도 아니고
이것은 현재에도 일어나는 일 아닌가요?
-우리가 제사를 거부함으로 가족들과 어려움을 겪고 하는데 그것이 그냥 가족 간에 불협화음 – 가족같에 관계가 서운해 지는 것 – 그런 정도가 아니라 – 목숨이 달린 문제였을 때
-그때 어떻게 할까
-그때는 만약에 목숨이 달렸을 때는
-그냥 제사 지내도 됩니까?
그 전까지는 난 신앙을 지켜야 되 – 나는 못합니다 – 라고 했는데 – 그때는 목숨의 위협이 없었으니까 –
그런데 이제 생명이 달렸을 때는 – 그때는 그냥 세사 상에 절해도 되는 것인가요?
만약에 여러분 그렇다면 진리하는 것이 내가 치뤄야할 고통이나 댓가가 얼마나 크냐 작냐에 따라서 달라 질 수 있는 것이 되고 만다. –무슨 얘기냐하면
여러분들이 여기까지 선택하고 오신 것 너무 감사드립니다. 그리고 그 신앙 여정에 하나님이 인도하심이 있었다는 것도 압니다.
그래서 어떤 분들은 정말 목숨을 걸고 오신 분들도 계실 것이고 – 어떤 분은 호기심으로 오신 분도 있을 것이고 그래도 다시 질문해 볼께요/
-여러분이 선택한 이 진리가 정말 목숨을 걸고도 선택할 수 있는 진리인가요? - 아멘? 아멘입니까?
여러분 진리하는 것은 내가 치워야할 – 다시 말해서 – 고통의 무게나 내가 치뤄야 할 댓가 – 그것에 따라서 내가 선택하기도 하고 안하기도 하고 내가 받아들이기도 하고 거절하기도 하고 그런 것이 아니다.
제사를 거부하는 사람들이 당장 죽이지 않으니까 거부하지 – 그런데 당장 죽인다고하면 – 타협하고 그러면 그것이 진리가 아닌 것이죠.
#이 영화에서 빠진 것이 두가지가 있다. – 뭐가 빠졌느냐하면
1-첫번째는 원칙이 빠져있다.
영화의 시종 일관 흐르는 멧세지는 뭐예요? 사랑인데 – 사랑이 뭐냐면?
영화에서는 사랑은 실천하는거다 – 네가 저 영혼들을 사랑하니? – 저 신자들을 사랑하니? 그러면 네가 저 사람들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일이 뭐냐? – 가장 최선이 뭐냐? – 그것을 실천해 – 그 멧세지다.
그러니까 많은 이 영화의 평론가들은 모두 – 기독교인이든 / 천주교도인이든 / 아닌 사람들이든
– 진정한 종교의 모습을 모여 줬다고 얼마나 극찬을 하는지 모른다.
여러분 그런데 – 원칙 – 사랑이라는 것은 항상 원칙아래서 성립되어야 한다.
만약에 어떤 사람이 수많은 여성이 너무 자기를 좋아해서 아 – 어떻할까? 많은 여성들이 나를 흠모하니 – 나 한 사람 희생해서 저 사람들 다 구제해서 다 아내로 맞이 해야겠다. 그러면 그 사람 사랑이 충만한 분이죠? 아닌가요? 그것을 뭐라고 해요? 불륜이라고 한다.
-우리가 사랑과 불륜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그런데 그것을 어떻게 – 뭘로 구분하냐면 – 원칙 – 으로 구분한다.
그냥 사랑이라고 다 구제해 준 것이거든요 – 내가 날 희생시킨 것이거든요 – 그래서 많은 여성을 아내로 맞이했디만 원칙이 빠져 버렸기 때문에 그렇게 되 버린 것이다.
우리가 사랑이라는 것을 해석할 때 – 항상 원칙이라는 것을 중심에 두고 해석을 해야 한다.
-이 영화에서 사랑이 뭐예요? -감정이다.
그 사람이 나 때문에 죽으니까 – 그 사람 불쌍하니까 – 그 사람을 동정해서 – 그 사람의 잠시의 고통에서 구제해 주기 위해서 끊임없이 마음의 감정을 자극 시킨다.
2-두번째로 그다음에 도 여기에서 뭐가 빠졌는가?
-믿음이 빠져 버렸다.
계시록 14장 4절에서 마지막 백성들은 뭐라고 말했는가?
4절 – 이 사람들은 여자로 더불어 더럽히지 아니하고 정절이 있는 자라 –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며 – 사람 가운데서 구속을 받아 처음 익은 열매로 하나님과 어린 양에게 속한 자들이니 –
5절 – 그 입에 거짓말이 없고 흠이 없는 자들이더라 –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따라가는 자들이다. – 이렇게 말씀하신다.
여기서 포인트는 따라가는 자가 포인트가 아니다. – 어디로 인도하든지 – 내가 이해가 안되더라고 – 왜 그렇게 해야 되는지 알 수 없어도 – 그것이 예수님이 인도하시는 길이라면 내가 순종하고 따라가는 그 믿음을 말한다.
계시록 14장 4절 - 분명 고난의 길이고 – 말도 안되는 길이다. 비상식적인 길이요 –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길이 예수님께서 인도하시는 길이라면 따라가는 그 믿음이 마지막 백성에게 요구되는 믿음이다.
-지금 아무리 암담해도 상 주시는 이를 믿음으로 바라 보고 믿음이 길 가는 것이다.
그런데 이 영화 – 사이런스 – 에서는 원칙도 없다. – 믿음도 없다. 단 감정만 있는 것이 영화 사이런스다.
사실 여러분 예수님 그림 밟는 것 – 여러분 지나가다가 그리고 집에서 그림 밟을 수도 있다.
그것 별것 아닌 것처럼 생각 될 수 있다.
과거 얘기 – 남의 나라 얘기 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런데 이것은 남의 얘기가 아니다. 곧 우리 얘기이기도 하다.
-여러분 사실 짐승의 표가 별것인가요? – 참고 ; 계시록 13장 16절
마음으로 하나님 믿으면 되지? – 마음이 중요하지 – 하나님 믿는 것 다 인정해 줄 께 – 다 안다니까 – 괸찮아 – 그런데 – 행동으로만 – 이렇게 표시해 ~
마음으로 하나님 믿는 것 – 우리가 다 알아 – 하나님 부인하라는 것 아니야 –
여러분 하나님 부인하라는 시험 아니다 – 그래서 오히려 – 짐승의 표 – 는 후미에보다 훨씬 더 쉬운 시험이다. – 후미에는 뭐였어요? – 하나님을 부인하는 표시를 드러내라는 것이었다.
짐승의 표는 그것 아니다. – 하나님 부인이라는 것 아니다. 하나님 믿어 - 그리고 부일 할 필요도 없어
그런데 이렇게만 좀 해 – 아무 때나 예배 드리면 되지 무슨 형식이 그렇게 중요하니?
이 형식에 꽉 같혀 가지고 말이지 –
그럼 우리가 어떻게 해요? – 하나님 제 맘 아시죠 ? – 제가 하나님 사랑하는 거 아시죠?
-하나님 제가 이렇게 안하면 저도 죽고 / 가족도 죽고 우리 다 죽어요, 하나님 우리가 이렇게 죽는 것 원치 않으시죠? 하나님은 사랑의 하나님이시잖아요,
이렇게 한다고 해서 / 하나님을 부인한다고 해서 – 하나님을 부인한다는 것 아니래요 –
-여러분 어떻습니까? – 구미가 당기나요?
만약에 그러면 그럴 때 – 하나님께 충성하는 사람들은 뭐가 될까요?
그리고 반대로 사랑없고 형식만 중시하는 사람들은 율법 주의자들이 되는 것이다.
-다른 신부 이미지 -
이 영화에서도 배교를 거부하고 순교당한 신부는 아주 고집이 세고 – 형식에 갖힌 그러면서 숭고한 인간의 생명 하나 건져내지 못하는 그런 인물로 묘사가 되구요, 반대로 배교한 로드리게스 신부는 정말 사랑이 가득하고 – 정말 하나님의 뜻을 실천하는 그런 모습으로 나온다.
-이 영화가 왜 나왔을까? 이것을 보면서 이제 짐승의 표를 사용할 때가 다 되었나보다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사람들에게 이런 세계를 자연스럽게 받아 드리도록 하기 위해서
-이 순교 당한 신부에게는 아주 고집이 센 그런 모습으로 나온다. – 배교한 신부는 정말 신자들을 살리기 위해서 자신을 희생하는 그런 모습으로 나온다.
영화를 보는 사람들은 이 주인공에게 표를 다 던져 주게 되어 있다.
여러분 이 짐승의 표를 강요할 때가 다 된 것 같아요, 이런 미디어를 통해서 – 신앙의 절개를 지키려고 하는 사람들을 사랑이 없는 사람으로 – 형식에 갇혀 있고 – 원칙만 지키려고하는 율법주의자들로 묘사하고 있다.
-영화의 멧세지 자체가 그렇다. 그것은 형식일 뿐이야 – 형식을 너무 고집하지마 – 끊임없이 이 말로 배교를 권유한다.
교리의 형식을 고집하지 말고 – 인간의 존엄을 생각하라 – 교리는 단순히 형식일 뿐이다.
그것은 살아 있는 생명력이 되지 못한다. 그러면서 사랑을 실천하게끔 계속 이야기한다.
여러분 이런 논리하면 WCC, 에큐메니칼 – 종교 다원주의 – 이런 것이 가능하게 되는 것이다.
여러분 인간의 생명이 중요하지 않다 그 얘기가 아니다. 또 나만 믿음 잘 지키자 이것도 아니다.
교리나 형식과 원칙에 갇혀 가지고 사랑을 실천하지 말라 – 이런 얘기도 더더욱 아니다.
-그렇다면 질문한다. 만약에 그것이 사랑의 실천이고 참된 믿음의 표본이라면 – 그렇다면 왜 하나님 믿어요?
불교 믿으면 안되나요? 알라 – 신도 믿으면 안되나요? 뭐든 믿으면 안되나요?
굳이 그렇게 고집스럽게 하나님을 믿어야 할 필요가 도데체 왜 있는 것이예요?
여러분 이 영화에서는 교리란 형식이 아니라 – 신의 음성에 순종하는 것이다. 그렇게 멧세지가 계속 나온다
그러면서 그 음성이 계속 들려요 – 예수님의 따뜻하고 – 온유한 음성이 들린다.
여러분 그런데 신의 음성이고 그 음성이 정말 하나님의 음성인지 아닌지 우리가 어떻게 알지요?
그것이 혹시 위기를 모면하고자하는 내 마음의 소리인지 아니면 유혹자 사탄의 소리인지 그것을 어떻게 우리가 압니까?
-우리가 이것을 구분할 수 있는 방법이 딱 한가지가 있다. – 어떻게 구분하는가?
이사야 8장 20절 – 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쫓을지니 -
이 성경 말씀대로 하는 것이 하나님의 음성이다. – 여러분 하나님은 이미 다 말씀해 좋으셨다.
그래서 새로운 음성 – 새로운 말씀을 들으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 – 하나님 음성 듣고 싶으세요?
그러면 말씀 보시면 됩니다.
왜 하나님의 음성을 성경과 설교 말씀에서 들으려고 하지 않는가? 새로운 음성만 자꾸 들으려고 하는가?
그리고 자기가 해석하려고 한다.
이러니까 이러 이러 하니까 – 이렇게 해서 사랑을 실천하기 위해서 / 영혼을 살리기 위해서 –
이렇게 신부가 배교함으로 희생한 것이다. – 그렇게 말할 수 있다.
여러분 창세기 – 선악과 이것 먹는다고 네가 하나님 부인하는 것 아니야 ~
선악과 이것 먹는다고 네가 하나님 욕하는 것 아니야 ~
선악과 억는다고 하나님 떠나는 것 아니야 ~
네가 하나님 사랑하는 것 - 하나님이 너무 잘 알지 ~ 하나님께서 왜 모르겠어 ~
하나님이 너무 잘 알지 ~ 하물며 너의 마음을 모르겠어 ? 괸찮아 이거 먹어 ~
여러분 하와가 하나님 배반하려고 선악과 먹은 것 아닙니다.
하나님이 미워서 선악과 먹은 것도 아닙니다.
저 하나님 사랑하는 것 아시죠? - 하면서 불순종했습니까?
여러분 사탄의 음성에 속아 넘어가지 마시기 바랍니다.
여러분 사실 저희나 되니까 배교한 신부가 잘못 됐다고 얘기하지 세상 사람들 – 그리고 어떤 기독교인들은
이 배교한 신부 옳다고 얘기한다.
여러분 우리가 이 신부가 옳다라는 생각을 하고 있으면 – 어떻게 되는지 아시나요?
-우리 모두 그 길을 따라 가게 된다.
여러분 지금 우리가 생각하는 결단이 우리의 미래를 결정한다는 것을 아시기를 바랍니다.
우리가 이 신부가 옳다라고 생각하고 있으면 언제든지 또 얼마든지 우리 자신을 합리화 하게 된다.
그런데 예수님께서 뭐라고 말씀하셨어요?
누가복음 14장 26절 – 자기 목숨까지 미워하지 아니하면 내 제자가 되지 못하고 –
영화 사이런스 – 주인공 로드리게 신부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다 – 이것을 믿는 자는 후미에 같은 것은 아무 문제가 없습니다.
아니 그것 밟는다고 구원을 잃어 버려요? 이미 구원을 받은 사람인데 - 전혀 시험에 들지 않는 것이다.
아니 비록 짐숭의 표를 받아도 구원을 잃어 버리지 않는다.
주님 제가 주님 사랑하는 것 아시죠? – 그러면 되는 것이다. 뭐가 문젭니까?
이 사이런스 영화 보고 선택하는 여러분의 결정이 바로 미래의 여러분들을 결정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을 기억했으면 좋겠다.
일반 대중도 / 기독교인들도 – 신부의 배교로 사랑은 나타낸 것을 옳다고 말하는 사람이 있다.
많은 사람들이 주인공 배교한 신부 편으로 간다.
– 그것은 사랑의 실천이야 ~
-하나님은 다 아시지 ~
-하나님은 우리가 이렇게 개 죽음 당하는 것을 원하지 않아 ~
영화의 그 순교당한 신부는 정말 개 죽음을 당한다. – 멋있게 / 장렬하게 죽는 것도 아니다.
정말 형편없이 죽는다.
여러분 우리가 이 원칙이 빠져버린 믿음과 사랑 – 무서운 함정이라는 것을 아시기 바랍니다.
-무서운 기만이다.
– 교회 안에 있다는 것 자체가 여러분을 기만과 미혹에서 보호해 줍니다.
시각이 완전히 다릅니다. 여러분 우리가 믿고 있는 진리가 얼마나 밝은 진리입니까?
이 진리는 우리가 흔들리지 않고 바른 길 가게 해 줍니다.
우리가 이 감적적인 사랑을 가지고 있으면 전부 흔들려서 다 떠내려가게 된다.
여러분 후미에와 같은 시험이 계시록 13장에 짐승의 표의 환란의 시험이다.
자 – 짐승의 표 환란을 어떻게 이길 수 있는가? – 이 짐승의 표를 이기는 사람들의 특징을 바로 이어지는 계시록 14장에 너무나 잘 설명해 주고 있다.
계14장 12절 – 무슨 말이 있느냐하면 – 읽어 봅시다.
하나님의 계명 – 이것은 불변하는 원칙이다. – 이것은 기록된 말씀이다.
마땅히 율법과 증거의 말씀을 쫓을지니 – 변함이 없다.
다른 음성을 들으려고 자꾸 애쓸 필요가 없다. 우리에게 이미 말씀해 놓으셨다.
그래서 이 말씀과 믿음을 지키는 자들 – 소망 중에 바라보는 – 믿음 뿐만 아니라 - 십자가에서 예수님께서 가지셨던 그 믿음 – 이 두가지가 빠진 것이 영화 사이런스다.
계12장 17절 읽어 보면 – 또 얘기한다.
-용이 싸우는데 – 하나님의 계명과 예수의 증거를 가진 자와 싸운다. 여러분 계명과 말씀과 – 이 원칙 이것과 믿음을 가진 자들과 싸우려고 준비중에 있다.
여러분 어떠한 위기가 와도 이 성경의 원칙 – 성경의 진리는 타협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인본주의적인 감정으로 잘 포장해서 설득할 수 있다. 그러나 어떤 시련과 고난이 와도 진리를 믿음을 버려서는 안 된다.
이 진리의 터에 내 믿음의 뿌리를 잘 내려서 – 정말 하나님에 대한 진짜 믿음 – 진짜 사랑을 잃지 않는 그리스도인 되길 바랍니다.
여러분 이 위기의 순간에 그것을 선택하면 망하는 것처럼 보일지라도 – 기생 라합의 정탐꾼 영접한 일
참고 ; 여호수아 2장 9절 / 히브리서 11장 31절
세상의 평가를 다 뒤로 하고 계시록 14장 4절 – 어린 양이 어디로 인도하든지 –
참고 ; 구원파 – 기쁜 소식 교회 – 구원 받았다 – 죄 지어도 괸찮다.
난 천국 가서 저 구석에만 있어도 좋다, - 천국 판자집이라도 좋다. - 이런 식의 신앙 있는 사람들 있다.
-이것은 구원파가 만든 천국 티켓이다.
또 장로교 – 예정론 – 하나님의 불가항력적인 은혜 – 내가 천국 안 가려고 해도 가게 된다. – 할렐루야 ~
그런데 목사인데도 여전히 성경적이지 못한 삶 아니었다.
-한번 구원은 영원한 구원이 아니다 – 유튜브 참고 –
-믿은 사람이 믿지 않는 사람보다 왜 더 이기적인가?
– 복음과 진리 – 누가 전하는 가 중요하지 않다.
한국 교회 – 근본 신학과 교리의 문제다 – 이제는 성경의 진리가 회복되어야 한다.
-진리를 찾기 위해서 애쓰는 사람들 –
21C 우리가 살고 있는 시대를 평가한다면
- 알곡과 가라지 – 알곡은 더 알곡되고 / 가라지는 더 가라지 되는 시대이다. -이것을 보고 두렵다.
-은혜 받을 만한 때에 은혜 받지 못하면 우리 영혼은 메말라 죽어 버리게 될 것이다.
-주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지 못 할 때 우리의 신앙 양심은 메말라 버리게 될 것이다.
결론 - 찬송가 521장
– 어느 민족 누구에나 결단할 때 있나니 참과 거짓 싸울 때에 어느 편에 설건가 주가 주신 새 목표가 우리 앞에 보이니 빛과 어둠 사이에서 선택하며 살리라 – 아멘
구약과 신약 성경은 이 혼합 종교를 거부하고 있다.
여호수아서 24장 15절 – 만일 여호와를 섬기는 것이 너희에게 좋지 않게 보이거든 너희 열조가 강 저편에서 섬기던 신이든지 혹 너희의 거하는 땅 아모리 사람의 신이든지 너희 섬길 자를 오늘날 택하라 오직 나와 내 집은 여호와를 섬기겠노라 -
누가복은 4장 21절 –이에 예수께서 저희에게 말씀하시되 이 글이 오늘날 너희 귀에 응하였느니라 하시니
– 우리 운명을 결정 할 것이다.
아멘